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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기획 <통일의 물꼬를 트며 남북한 문화교류 전망> 문화선진국으로서의 고구려 위상 철저히 규명해야 안휘준 서울대 교수 최근에 현대그룹의 정주영 명예회장 일행이 소 500마리를 이끌고 북한을 방문하고 금강산 개발사업과 관광사업을 실시키로 합의한 일이나 동해안에 다시 침투한 북한 잠수정 사건과 간첩사건을 접하면서 우리는 북녘의 우리 영토와 겨레, 그리고 그곳에 꽃피웠던 우리의 고대문화를 떠올리게 된다. 지역적으로는 남과 북, 시간적으로는 현대와 고대가 교차하는 문제들을 접하면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와 관련하여 역사적인 측면에서 제일 먼저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고구려이다. 고구려가 우리 나라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와 최강의 군사력을 지녔던 위대한 나라였다는 것은 누구나 다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초등학교만이라도 학교를 다닌 사람이라면 으레 광대한 영토를 넓히며 국운을 떨쳤던 광개토대왕(375~413/재위 : 391~413)과 장수왕(394~491/재위 : 413~491) 같은 제왕들, 영양왕 23년(612)에 수나라의 113만이 넘는 대군을 물리친 을지문덕, 보장왕 4년(644)에 당나라 태종의 30만 대군을 격퇴한 안시성주 양만춘, 고구려말기에 전권을 휘두르고 당군을 물리친 연개소문(?~665) 등의 장군들의 이름과 그들의 위업 정도는 익히 알고 있는 게 상례이다. 우리는 이들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그들이 헌신하고 일군 나라, 고구려에 대해 크나큰 자부심과 긍지를 느낀다. 그런데 고구려가 그처럼 막강한 나라였으며 몇몇의 훌륭한 영웅들이 그 왕조를 위해 크나큰 공을 세웠다는 중요한 사실들을 단순히 기억하는 것 이외에 과연 우리는 고구려에 관하여 무엇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역사적 사실들에 관해서도 결과만 알 뿐, 그 시말이나 자초지종 혹은 과정 등에 대하여는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고구려와 관련하여 더없이 중요한 문화에 관해서는 더욱 무지하여 보다 철저한 파악과 이해가 요구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고구려와 그 문화에 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고구려 역사의 올바른 이해 먼저 고구려사에 대한 올바르고 충분한 이해가 전제됨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이를 위해서는 고구려사에 대한 적극적인 연구와 폭넓은 소개가 요구되나 그렇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최근에 이르러 몇몇 소장학자들이 열심히 연구에 참여하고 있고 또 학회도 만들어져 있으나 종래의 열악한 상황이 크게 개선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고구려사 연구가 이처럼 부진하게 된 데에는 먼저 사료의 부족을 들 수 있다. 본래 문헌사료가 제한되어 있는데다가 남북분단과 대립으로 인하여 고구려의 유적과 유물을 직접 접하기 어렵게 되어 연구에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만주 벌판이 현재 북한이 아닌 중국에 속해 있으므로 그러한 제약을 어느 정도 뛰어넘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사에서 보다 큰 비중을 차지하는 후반기의 역사가 평양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관계로 중국에 있는 유적과 유물만으로는 연구에 충분한 성과를 거두기가 어렵다. 게다가 중국에 있는 자료들조차 이용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인 실정이다. 한·중간의 학술교류의 부재, 중국의 소수민족정책에 따른 고구려사의 연구에 대한 경계심 등이 장애요인이 되고 있다. 이 때문에 고구려사에 대한 연구가 극도의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고, 이에 따라 그것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어려워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이와 같은 여건과 함께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종전에 남·북 학계에 자리잡았던 고구려사에 대한 인식과 분위기이다. 이를테면 북한에서는 고구려사 중심의 사관(史觀)이 확고하게 뿌리를 내린 반면에 우리쪽에서는 은연중 신라사를 중시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이 그 한가지 예이다. 즉 북한이 고구려·발해·고려를 역사적 법통으로 삼는데 비하여 고구려나 발해의 자료를 접하기 어려운 우리 쪽에서는 부득이 신라를 중심으로 고대사와 고대문화를 연구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자연히 고구려에 대한 연구가 부실해지고 그에 수반하여 고구려에 대한 인식 또한 두텁지 못하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이처럼 이런저런 이유들 때문에 고구려의 역사에 대한 적극적인 연구와 올바른 이해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이를 극복하는 노력을 학계와 정부가 함께 기울여야 하리라고 본다. 이러한 상황의 극복없이는 고구려의 역사와 문화를 정당하게 이해하고 재인식하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고구려 문화의 정당한 파악 고구려를 바로 알려면 역사와 함께 그 문화를 정당하게 그리고 철저하게 파악해야만 한다. 문화에 대한 철저한 이해없이는 고구려를 제대로 알 수가 없다.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고구려가 역사상 가장 광대한 영토와 최강의 군사력을 지녔던 위대한 왕조였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지만 그것이 가능했던 요인에 대해서는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막강한 군사력만으로 고구려가 위대해질 수 있었을까. 필자는 고구려가 위대해질 수 있었던 것은 강한 군사력과 함께 정신력으로 일구어진 훌륭한 문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이러한 문화가 있었기에 견고한 성을 쌓을 수 있었고 뛰어난 무기를 만들 수 있었으며 지혜로운 작전을 펼칠 수 있었다고 본다. 말하자면 성공적인 전쟁의 수행도 뛰어난 문화가 뒷받침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이점은 고구려의 탁월한 문화를 살펴보면 쉽게 이해가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도 고구려의 문화를 철저히 파악하는 일이 요구된다. 사회과학자들이 얘기하는 포괄적인 생활문화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는 창의성과 직접 연관이 깊은 좁은 의미에서의 문화를 알아보는 것이 더 절실하다고 생각된다. 이와 관련하여 무엇보다 주목되는 것은 유적과 유물 등의 미술문화재들이다.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는 다른 분야들과 달리 이 분야는 상대적으로 비교적 다양한 자료를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80여 개의 고분들에서 발견된 벽화, 역시 고분들에서 수습된 서예자료, 불교조각, 토기와 금속공예, 와당, 성곽 등은 고구려 문화의 특성과 변천을 파악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되어 준다. 이러한 미술문화재들을 통하여 우리는 고구려인들의 지혜와 창의성, 특성과 우수성, 생활과 습관, 종교와 사상, 우주관과 내세관, 복식과 건축, 과학기술, 외국과의 교류 등 다양한 측면을 확인할 수 있다. 고구려의 힘차고 웅혼한 무사적 기질과 역동적인 특성도 벽화를 비롯한 미술문화재들에서 잘 드러난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위대한 고구려의 건설이 문화와 결코 무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 문화와 관련하여 또한 크게 주목되는 것은 선진성(先進性)이다. 고구려는 삼국시대의 다른 어느 나라 보다도 앞서서 미술문화 분야에서 독자적인 양식을 형성하고 이를 백제, 신라, 가야는 물론 바다건너 일본에까지 전해 영향을 미치고 새로운 전통의 형성에 기여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회화, 불교조각, 각종 공예, 가람(伽藍)배치법 등에서 쉽게 그리고 뚜렷하게 확인된다. 이는 고구려가 지리적으로 중국과 접해 있었던 데에서도 이유를 찾아볼 수 있겠으나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고구려가 지니고 있던 진취성과 창의성 덕택이었다고 볼 수 있다. 어쨌든 이러한 사실은 고구려가 우리 민족문화의 형성을 선도했을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에 있어서 중국과 더불어 미술문화의 발달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음을 분명히 말해 주는 것으로서 그 의의가 더없이 크다고 하겠다. 고구려의 미술이나 문화에서 간취되는 또 다른 중요한 현상은 국제성이다. 고구려는 중국은 물론 서역과도 교류하여 필요한 것을 취해서 자체 문화의 발전을 위한 밑거름으로 삼았다. 초기에는 한나라와 동진의 영향을, 그후에는 6조시대의 영향을 섭렵하였음이 고분벽화를 비롯한 미술에서 확인된다. 벽화고분의 말각조정(抹角藻井) 천장이나 각종 문양, 일부 복식과 악기의 그림 등에서 보듯이 서역문화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고구려는 문화적인 측면에서 일본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595년에 일본에 건너가 그곳 쇼토쿠(聖德)태자의 스승이 된 혜자(慧慈)를 위시한 고승들과 기술자들을 파견하여 그곳의 불교문화의 발전에 기여했음은 물론 예술인들을 보내 일본 고대문화 형성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610년에 일본에 파견되었던 담징은 고구려 미술을 일본에 전하는데 가장 큰 기여를 했다고 믿어진다. 이밖에 아스카시대의 일본에서는 가부미노 에시(簧文畵史), 야마시로노 에시(山背畵史), 고마노 에시(高麗畵史) 등의 고구려계 화사씨족(畵史氏族)들이 백제계의 가와치노 에시(河內畵史)나 신라계로 믿어지는 수하타노 에시(策奏畵史) 등과 함께 활동하며 일본의 고대 회화와 화단의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일본 고대의 대표적 작품들인 천수국만다라수장(天壽國曼茶羅繡帳), 다마무시즈시(玉蟲廚子), 다카마츠츠카(育松塚)의 벽화, 호류지(法隆寺)의 금당벽화 등에 고구려 회화의 영향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점은 이러한 고구려계 화가들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음을 말해 준다. 이와 비슷한 상황은 다른 미술분야나 음악, 기타 문화분야에서도 확인된다. 이처럼 고구려의 미술과 문화는 국제성을 강하게 띠었던 것이다. 고구려문화는 고구려에만 국한되었던 것이 아니라 백제, 신라, 가야는 물론, 중국, 서역, 일본 등지와 국제적으로 밀접한 연관을 맺고 발전하며 영향을 주고 받았던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의 미술이나 문화를 이해함에 있어서 이러한 국제성과 국제적 공헌을 반드시 재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처럼 고구려 및 그 문화에 관해서는 유념할 점들이 적지 않다고 하겠다. 그것들을 크게 묶어서 포괄해 보면 대강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① 고구려는 무력과 군사력만 강했던 나라가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발군의 강대국이었다. ② 고구려의 문화는 각 방면에서 높은 수준으로 발달하였으며 백제, 신라, 가야에 영향를 미침으로써 우리 고대문화 형성에 선도적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고대 한국문화의 시원과 관련하여 대단히 중요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 ③ 고구려의 문화는 중국이나 서역의 문화를 수용하여 자체 발전을 꾀하고 일본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는 등 국제적으로 동아시아 문화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러한 고구려 문화의 보다 철저한 규명을 위해 우리 학계의 부단한 노력, 북한 및 중국과의 보다 적극적인 정부차원의 학술교류가 요구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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