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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 무용
문애령 무용평론가
최근 몇년 사이 젊은 무용가들에게 일정한 제작지원금을 후원하는 기획공연이 많아졌다. 그러다보니 그 안에서 발생하는 문제들도 부각되고 있는데, 참가를 원하는 쪽에서 보자면 선별의 기준이 모호하다는 불만을 제기할 수 있고, 참가하게 된 무용가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지원금의 혜택이 미미하지만 표현하기가 껄끄러운 경우를 당하게도 된다. 이번에 처음으로 기획공연을 가진 『춤』지의 경우는 여러명의 평론가들이 참가자들을 선정했고, 지원금의 규모도 가장 큰 것이어서 이러한 문제점들을 완화시키는 새로운 기준을 제시했다. 특히, 좋은 평가를 받은 무용가에게는 연속적인 지원을 약속하고 있어 기대가 크다. 이 후원 방법은 너무 당연하고도 이미 늦은감이 있지만 무용분야에서 이뤄진 모든 지원금의 분배가 모두에게 골고루라는 형태를 지녀왔던 관례로 볼 때 다른 기획공연들에서도 재고할 가치가 있을 것이다. ‘경제력이 없거나 조달할 창구가 없는 무용가는 일년만 공연하고 사라져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우리 무용계의 구조조정까지 연결되는, 더 나아가서는 극장의 운영체계에서 문화정책까지 연결되는 출발점이다. 지금까지는 위의 질문에 대한 답은 ‘그렇다’ 쪽에 가까웠다. 이런 맥락에서 과연 ‘우리에게 전문무용가로 인정할 만한 사람들이 있는가’조차도 의심스러운 형편인데 기성세대가 무용인구를 확산시킨 공로를 제대로 인정받기 위해서라도 이제 젊은 무용가들을 자유롭게 풀어놓을 시기가 왔다는 생각이다. 이번 참가자들 중에서 본다면 김은희, 박호빈은 좋든 싫든 독자적인 활동을 하고 있는 그야말로 기획공연에서 키워주지(?) 않으면 안될 형편에 놓인 사람들로 우리의 풍토에서는 전문성을 충분히 인정할 만하다. 독자적인 활동을 선언했다고 해서 모두가 인정받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사라지는 존재들이 더 많기 때문에 홀로서기 이후의 생존이 곧 그들의 가능성이고 진정한 능력인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대학무용단의 일원인 사람들의 작품이 형편없다거나 독자적인 활동에 의한 소산이 탁월하다는 뜻은 아니다. 대학무용단원의 작품은 그 소속단체의 최근 작품 형태를 어떻게든 계승하고 있는 반면 후자의 경우에는 작품을 대하는 방법이 자유롭다. 비록 그 방법이 세련되지 못했고 얄팍하고 때로는 우려되는 것이라 할지라도 관객은 한 창조자의 방황을 관찰하면서 무용에 대한 흥미를 키워갈 수 있다. 김은희 「달궁」 성공작으로 이끌어 김은희의 경우 「달궁」에서 우려의 소리를 자청하는 모습을 보였다. 항상 그녀의 뒤를 따라다니는 구설은 일본풍의 작품스타일이라는 것이었고, 그녀 자신도 매우 민감하게 거부반응을 보여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자타가 공인할 만큼 뚜렷하게 일본풍의 분위기를 연출하면서 구설에 도전하는 배짱을 보인 것이다. 삭발을 한 남자가 눈 주위에 붉은 화장을 하고 옷깃이 뒷머리까지 올라오고 자락이 땅에 끌리는 망토를 입고 느린 스텝으로 돌처럼 보이는 소품을 들고 등장한 순간 김은희 작품 중 최악의 경우라는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작품이 진행되면서 안정감을 급속히 회복했고 김은희 특유의 정감어린 연출면에서는 보다 강한 대비효과를 가져왔다. 지난해의 「환, 환」과 동일한 구성 방법이었지만 「달궁」은 표현강도에서 느림과 빠름, 일본무용의 느린 이미지와 한국 춤사위의 활력이 극명한 대조를 이뤘다. 조심스럽고 미화됐던 걸음걸이가 거칠고 투박해진 셈이었고 마무리 부분에서는 악기연주로 독특한 비애감을 만들어내 전체적으로 한 단계씩 강도가 높아졌다. 그녀의 취향으로 미루어 반드시 부딪쳐야 할 벽에 스스로 도전한 셈이었고, 이번 작품은 몇년간을 스스로 결산하는 것처럼 보였다. 직접 출연한 김은희의 춤맵시와 아울러 지난번보다 원숙해지고 여유가 있어진 현대춤 기교자들에게 이식시킨 한국춤의 급격한 대비의 호흡법이, 그리고 마무리 과정에서 도입한 극적인 제스처들이 「달궁」을 성공작으로 이끌었다. 박호빈의 작품만들기 박호빈은 지난해부터 올 상반기까지 가장 많은 기획공연에 참가한 무용가다. 신인 무용가들의 특징이라면 작품 만들기를 아주 즐긴다는 점인데(소질의 유무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아도 좋을 것이다) 박호빈을 보면 즐겨가면서 연결해가는 창작 과정이 연상된다. 그렇다고 즐기는 과정에서 나온 모든 작품들이 명작이 될 수는 없다. 이번 「오르페우스 신드롬」은 다작이 빚어낸 가벼움을 만회한 좋은 기회여서 아직은 댄서로서 활동할 시기가 아니냐는 우려의 시선을 만회했다. 그의 관심은 이번에도 역시 몇몇 중점적인 장면의 연출에 집중됐고 각 장면마다 물뿌리개, 녹색식물, 빨간 뱀, 삽 등 독특한 소품들을 적절히 활용하면서 재치있게 상징적인 의미를 구사했다. 그의 장점이라면 이런 재치가 살아있는 안무감각으로 통제되고 있어 생생한 느낌이 되며 동작의 구성에도 활기있는 생명력이 발견된다는 점이다. 반면 소품 의존도가 지나친 경우 무거운 주제를 너무 가볍게 처리했다는 인상과 함께 작품의 통일성이 약해질 가능성이 있었다. 김은희와 박호빈이 항상 깊은 호기심의 대상이었다면 다른 참가자들은 상대적으로 자신의 색깔을 지닐 가능성을 타진하는 시선으로 관찰됐다. 김나영과 이명진이 소극적이기는 하지만 기존의 터부에서 조금씩 벗어나려는 경향을 보였고 은혜진은 소속단체와 유사해 보이지만 독특한 확산로를 개척해 신선한 작품을 선보였다. 유일한 발레계 김나영 김나영은 발레기교를 전공으로한 안무가들 중에서 가장 큰 관심을 받고있는 신세대로 이번 8명의 안무가 중 유일한 발레계열이다. 그런만큼 그의 작품 「대피소」는 김나영 개인의 문제이기 이전에 발레계열 전체의 논제로 떠올랐다. 도입부와 후반부에서 가상적인 미래의 여인들이 다분히 미래적인(?) 동작들을 강조했고 의상과 장치와 소품이 조화를 이루는 공간을 구성했지만 내용의 전개를 들여다보면 낭만성이 다분한 고전적인 발레스토리를 재현하고 있었다. 2인무에서의 기교만 해도 직업발레단을 벗어나면 김나영만큼 연기할 인물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적어도 그 정도는 돼야 무대에 설 수 있지 않느냐는 만족감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줄거리와 표현은 있는데 동작이 없다는 사실이 여전히 크게 느껴졌다. 김나영이 이 정도면 아무도 안된다는 생각과 함께 교사로 만족하는 그에게 지나친 책임을 지워주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해보지만 적어도 이런 기획공연에서는 누군가 이 낭만의 벽을 깨뜨려야 한다. 이명진 「몽유십이행」 이명진은 「몽유십이행」에서 흔히 사주팔자를 따질 때 나오는 12동물과 자신을 등장시켜 언젠가는 현실이 될 미지의 세계를 생각한다. 도입부에서 이러한 내용을 대사로 처리해 춤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그러나 춤의 내용이자 곧 춤 자체가 될 것임으로 설명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부분에 효과적으로 접근했다. 이후로는 12동물과 그녀가 만들어내는 형상들이 얼마나 그 내용에 효과를 불어 넣는가에 따라 작품의 성패가 달려있었는데 도입부에서 쉽게 풀어준 것에 비해 구성이나 기교의 배열에서는 단순함을 벗어나지 못했다. 여기서 또 한번 한국무용 전공자들이 작품을 구성하는 관습적인 한계를 본 셈인데 동물들에게 다양한 움직임을 부여한다면 보다 독특한 이야기거리로 주목할만 했다. 은혜진의 화려한 춤 은혜진은 무트댄스의 단원이다. 무트댄스를 볼때마다 예술감독의 실험무용이 너무나 빨리 전통처럼 흡수되는 경향을 봐왔고, 은혜진은 가장 대표적인 추종자 혹은 모방자였다. 하지만 이번 「은빛」에서 보인 은혜진의 감각은 보다 화려했고 비표현적이었다. 표현할 거리가 없는 춤이 드디어 한국춤계에 등장한 것이다. 감정이나 내용이 없이 무대가 풍기는 어떤 느낌들 만을 담아내는 것도 작품일 수 있다는 시각은 은혜진이 몸담았던 무트나 리을무용단의 시각과는 거리가 멀다. 물론 그가 사용한 기교는 무트의 것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속도감과 경쾌함이 색다른 요소였고 신무용계열의 구도와 등퇴장 방식을 접목시켜 얼핏 트리샤 브라운의 여성군무를 연상시켰다. 표현을 강조하는 무용스타일이 현대적이라면 이러한 비표현적 경향이 탈현대적 무용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한국무용의 창작경향이 드디어 표현이라는 그 엄청난 벽을 깼다는 속단을 해보지만 선구자 은혜진의 행보는 더욱 부담스럽게 됐다. 무시하지 못할 무엇인가가 느껴지는 몸짓들, 규정할 수는 없지만 시선을 집중시키는 행위들은 그 자체로 충분한 존재 이유가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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