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타닉」 안보기?

미국영화 「타이타닉」은 흥행 부문의 새로운 기록을 세울 것 같다. 제작비 2억8천만달러를 들여 만든 이 초대작은 미국내 흥행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음은 물론 세계적으로 화제를 일으키고 있는 중이다. 2월 20일부터 국내에서도 상영을 시작한 이 영화는 예매만도 20여만명을 넘어서는 신기록을 세웠다. 영화계에서는 과연 어떤 결과로 마무리될 것인가를 두려운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 는 중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상영되는 과정에서, 영화보기를 거부하자는 움직임이 일부에서 제기되고 있는 것은 경계해야 할 대목이다. 「타이타닉」이 미국영화이며 직배회사를 통해 흥행하고 있기 때문에 흥행수익의 대부분은 결국 미국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관람을 거부 하는 주된 명분이다. 경제위기 상황에서 영화흥행까지 외국에 내맡길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주연을 맡은 어느 배우가 한국에 대해 무시하는듯한 발언을 했다는 지적이 컴퓨터통신에 오르면서 번지기 시작한 ‘타이타닉 안보기’ 주장은 조직적인 운동으로까지 확산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소수의견’에 머문 정도지만 그렇다하더라도 이것이 현명한 일인가라는 부분은 보다 냉정하게 따져봐야 한다. 소박한 의도로 시작한 일이라 하더라도 자칫 그 여파는 엉뚱하게 변질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영화가 때로는 미국 우월주의나 백인 중심적 가치관을 지나치게 내세우고 있기 때문에 편협하고 위험하다는 지적은, 여러 나라에서 여러 경로를 통해 제기된 바 있다. 「록키」, 「람보」같은 영화들에서 드러나는 ‘잘난 척하는 미국인’의 시건방과 오만은 말할 수 없을 정도다. 백인, 그 중에서도 미국적을 가진 주인공이 보여주는 영웅성은 영화의 중심을 이루고 그의 상대가 되는 ‘적’들은 생각도, 신념도, 인격도 없는 인물처럼 묘사된다.

이런 식의 ‘아메리카니즘’이 미국영화에 나타난 것은 훨씬 더 오래 전이다. 존 웨인이 한창 인기를 끌던 시절에 나왔던 서부영화들은 이 세상 모든 것이 주인공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연약하기만 한 여자’를 보호하고 선량한 서부 개척자들과 그 가족들을 지키는 사람은 바로 주인공이다. 그는 보안관이 되기도 하고 기병대 장교로 나오기도 한다. 또 때로는 도망자나 떠돌이 건달처럼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때도 본성은 착하기 짝이없는 영웅의 이미지를 숨겨두고 있다. 인디언은 난폭하고 잔인한 미개인의 전형처럼 나타나고 흑인이나 아시아인은 무지하고 미련하거나 비겁한 유형으로 설정된다. 부잣집의 하인이나 식당, 술집의 종업원, 허드렛일 하는 동네의 일꾼 따위의 역할이 고작인 정도다.

이런 식의 인물설정이나 영웅주의적 구성은 서부영화뿐만 아니라 전쟁영화나 액션, SF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나타난다. 얼마전 인기를 끌었던 「인디펜던스 데이」에 나타난 미국대통령의 이미지를 떠올려보면 요즘 영화에서도 그런 이미지는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미국영화가 미국식 패권주의를 전파하는 첨병이라고 비난을 받는 것은 바로 그같은 부분 때문이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정도의 차이일 뿐 미국식 가치관과 생활방식을 앞세우며 그것과 다르거나 충돌하는 경우가 생기면 막무가내로 무시하고 배척하는 경향을 여지없이 드러내는 것은 별다른 차이가 없다. 미국인들 입장에서 보면 자랑스러운 미국, 강한 미국에 대한 자부심을 철철 넘치도록 느끼겠지만, 반대 쪽 입장에서 바라보면 오만함과 무례함과 난폭함에 분통이 터질 일이다.

국제무역기구WTO가 출범을 위한 국가간 협상이 진행될 때 유럽 각국들이 영화를 비롯한 비디오, 음반 등 영상시장 부문을 제외하고자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던 이유도 바로 영화를 포함한 영상 소프트를 통해 유입되는 미국식 가치관이나 문화가 여과없이 확산될 것이란 점을 경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나 독일, 이탈리아 등이 자국에서 열리는 칸느나 베를린, 베니스 영화 제에 국가적인 지원을 계속하고 있는 것은 영화계의 자율적 능력만 믿거나 시장논리에 따라 되는데로 갈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두었다가는 미국영화가 판을 휩쓸어버릴 것이라는 걱정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영화의 실질적 영향력을 두려워하고 경계하지만 막상 그것을 막을 힘이 없는 것이 또한 현실이다. 그렇다고 경제나 문화 등 각 분야가 국제적 유기성을 형성하고 있는 상태에서 미국영화 수입을 금지한다거나 특별히 불이익을 줄 수도 없다. 유럽 각국들이 영화를 포함한 영상산업 분야를 자유무역 대상에서 제외한 것은 미국영화를 차별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자국 영화의 산업적 문화적 기반 유지를 위한 지원이나 보호 정책을 펼 수 있는 길을 열어두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국영화가 세계시장을 휩쓸고 있는 현상이 멈추지 않고 있다. 줄기는커녕 시간이 갈수록 영향력은 커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프랑스가 국가적 자존심을 걸고 만들었던 영화 「제르미날」이 미국영화 「쥬라기 공원」에 맥없이 밀려버렸고, 「스피드」나 「인디펜던스 데이」 「미션 임파서블」 「맨 인 블랙」같은 영화들은 엄청난 흥행수익을 올리며 세계시장을 휩쓸었다. 거대한 자본과 첨단의 기술, 강력한 상품성을 앞세우며 밀어붙이는 파상공세는 세계 영화시장을 미국영화 중심으로 끌어가며 공룡같은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영화가 사람들을 더 당혹스럽게 만드는 것은 미국식 패권주의를 앞세우면서도 그것을 상쇄하거나 무마할 만한 ‘문제작’ ‘화제작’을 끊임없이 내놓는다는 점이다. 미국이 자유세계의 파수꾼을 자부하던 60-70년대만 하더라도 「졸업」이나 「솔져부루」 「미드나이트 카우보이」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대부」 같은, 이른바 ‘아메리칸 뉴 시네마’를 통해 미국 사회 내부의 모순이나 불안, 편협한 아메리카니즘의 허상과 왜곡을 날카롭게 비판함으로써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그렇게 공개적이며 지속적으로 국가나 사회의 정체성에 대한 비판을 담은 경우는 유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마이클 치미노 감독은 「디어 헌터」를 통해 베트남전이 미국인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었는가를 돌아보았고, 스티븐 스필버그는 「쉰들러 리스트」를 통해 국가와 인종을 뛰어넘어 인류 공동의 선을 추구하고자 하는 휴머니즘의 감동을 영화로 만들었다. 우디 알렌은 중·상류층 미국인의 도시적 생활을 유머러스하면서도 독창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영화의 실험성이나 창의성, 사회적 역할을 감안하더라도 미국영화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일정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의 국적이 미국이라는 사실만으로 무조건 비난할 수만은 없는 영화들을 미국영화계는 끊임없이 내놓고 있는 것이다. 미국영화의 양면성이자 저력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다.

「타이타닉」 역시 그런 영화 쪽에 가깝다. 영화사상 최대 규모라고 할 만한 2억8천만달러의 제작비, 영화사상 기념비적인 평가를 받을 만한 특수효과, 탄탄한 구성과 뛰어난 연출력, 윅 앞에서 드러나는 다양한 인간군상, 세기말을 넘기면서 돌아보는 오늘의 세상과 내일의 예견같은 것들이 고루 들어있다. 미국인이든 아니든 이 영화에 감동하는 이유는 국적과 인종, 종교나 이념같은 것 을 뛰어넘는 휴머니즘에 공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부도덕한 재벌이나 타락한 정치인, 빗나간 오렌지족 젊은이를 비난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고 사회정의와 어긋나는 부분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 재벌집 아들 이지만 잘 생기고 공부 잘하고 성격좋고 책임감 강하고 모든 일에 모범이 될만한 경우라면, 그를 비난할 아무런 근거가 없다. 「타이타닉」은 바로 그런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영화의 국적이 미국이고 직접배급을 통해 국내 흥행이 이루어 짐으로써 수익의 상당부분은 미국으로 들어가고, 이런 영화와 경쟁해야 하는데도 자본이나 제작능력면에서 부족한 한국영화계로서는 위협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이 영화보기 거부 운동의 이유가 되어서는 안된다. 정말 미국영화와 경쟁할 수 있는 힘을 키우고, 나름대로의 대안을 찾기 위해서는 미국영화가 지닌 장점이 무엇이며 언어와 문화가 다른 나라들에서까지 인기를 모을 수 있는 요인이 무엇인가를 분석하는 냉철함이 더 필요하다. 감성적인 애국심만으로 영화보기를 거부하자는 주장은 자칫 배타적 국수주의로 비칠 가능성이 크고 이는 외교적 시비의 빌미가 될 수도 있다. 한국영화는 미국영화와 힘겨운 경쟁을 해야 하고, 과연 미국영화의 벽을 넘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 방법은 ‘미국영화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한국 영화의 성장’이라는 긍정적 방향에서 찾아야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