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기획 / 1997년 문화예술계의 성과와 1998년 전망
전통교육에 관심이 제고된 한 해
유영대 / 고려대 교수
'문화유산의 해’에 열린 전통 공연들
올해는‘문화유산의 해’이다. 우리 민족에게는 유형 및 무형의 문화유산이 엄청나게 많다. 그럼에도 이를 온당하게 보존하고 전승해 나가고 있느냐에 대해서는 다른 견해가 많이 표출되기도 한다. 특히 1996년부터 서서히 불기 시작한「문화유산 답사기」류의 책들이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면서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이 제고되었으며, 이 같은 문제제기에 대하여 국민적으로 관심을 환기시키고자 하여 이 같은 캐치 프레이즈를 내걸었을 성싶다. 그러나 이 같은 목표를 정하고 난 뒤 용의주도하게 이 주제를 선도적으로 이끌어갔느냐에 대하여 긍정적 답변을 얻기 어렵다.
문화유산의 해를 학문적으로 점검하고 검토하려는 학술행사가 8월 22일부터 2일간 과천 호프호텔에서 열렸다. 민속학회 주최로 열린 국제민속학대회는‘동아시아 문화유산의 보존과 전승’을 주제로 하여 우리나라와 중국·일본·몽골의 학자 32명이 주제발표에 참가하는 큰 규모의 학술행사였다. 동아시아의 민속학자 100여 명이 참가하여 열띤 발표와 토론이 이루어져 풍성한 수확을 거두었다. 대부분의 연구발표는 동아시아 제국의 구체적이고도 개별적인 민속현상과 보존에 집중되어, 동아시아의 학자들이 함께 우려하고 또 가능성을 전망하는 자리가 되었다.
문화유산의 해의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이자 가장 의미 있는 공연으로는 1월 21일부터 27일까지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열린 김덕수패 사물놀이의「코리아 판타지」를 들 수 있다. 이 공연은 난장이라는 한국적 축제를 재현한 것으로 뜻깊다. 이 공연은 김덕수가 무대에 선지 40년이 되고 사물놀이 창립 20년을 기념하는 뜻깊은 무대였다. 이날 공연은 문굿으로 시작하여 비나리를 거쳐 삼도 설장고가락을 연주하고, 판굿으로 공연을 마무리하였다. 사물만으로 채운 두 시간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김덕수의 이 같은 작업은 재즈 그룹 레드선과의 협연으로 이어지다가 10월부터 호암아트홀에서 공연한「난타」에 이르러 절정을 이루었다. 「난타」는 일상생활에서의 소리를 유머러스한 분위기로 바꾸어 보여줬는데, 특히 부엌이라는 익숙한 공간을 무대로 내세운 이 공연은 연극배우와 사물놀이 연주자로 받아들여 퍼포먼스의 의미를 더욱 강화시켰다.
세계의 마당극 유산을 조망할 수 있는 공연으로 9월 1일부터 과천에서 열린‘세계 마당극 큰잔치’를 살펴보자. 이 공연에는 탈춤에 기반을 두고 새롭게 복원한 한국의 대표적 마당극「밥」(김지하 원작, 임진택 연출)과 극단 전망의「여시아문」등을 소개하면서 태국과 러시아의 마당극도 판을 벌였다. 마당극의 다양한 형식과 유형을 살펴볼 수 있는 소중한 판이었다. 국립창극단은 창극을 전문적으로 공연하는 단체이다. 창극은 판소리를 재료로 삼아 만들어 낸 연극이며, 판소리와는 여러 측면에서 구분되는 장르다. 그런데 아직도 창극의 독자적 영역이 독자적으로 서 있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어정쩡한 판소리의 감상장소가 창극 무대라는 인식이 불식되지 않고 있다. 국립창극단에서 9월 9일부터 14일까지 공연한「열녀 춘향」(박병도 연출)을 보면서도 우리 창극이 아직도 제자리를 찾지 못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였다. 1998년에는 임진택 연출의「춘향전」이 여섯 시간 짜리로 만들어 공연된다고 하는데 기대되는 무대이다.
지방화시대 맞아 각 지역축제의 폭발적 증가
세시풍속과 관련하여 형성된 지역 축제는 우리 전통예술의 가장 진수적인 측면을 잘 나타내 준다. 우리 민족은 설날, 정월 대보름, 단오, 추석을 가장 큰 명절로 삼았다. 그 중에서도 단오는 일년 중 양기가 가장 왕성한 날로 여겨왔으며, 축제의 의미가 가장 강화된 날이기도 하다. 올해의 지역 축제 가운데서 가장 볼거리를 많이 제공한 것은‘강릉단오제’였다.‘강릉단오제’는 음력 4월 보름날 대관령의 국사서낭신과 여서낭신을 강릉으로 모셔오는 봉안제를 필두로 삼아 20여 일간에 걸쳐 진행된다. 남대천에 굿당이 만들어지고, 국사서낭신과 여서낭의 위패가 제단으로 모셔지는 영신제가 단오제의 전야제가 된다. 이를 신호로 삼아 단오축제가 남대천에서 펼쳐진다. 강릉관노탈놀이가 열리는 옆에는 씨름판도 자리잡고 있다. 굿판과 농악판 등 공식적으로 마련된 무대 말고, 팔도 음식을 맛볼 수 있는 음식점을 비롯한 장사치들의 좌판이 있는 저자거리야말로 오히려 더 흥청댄다. 이곳에서 벌어지는 엿장사의 재담이나 각설이패의 공연이야말로 오늘의 살아있는 지역축제의 전형적 현장이다.
같은 기간에 열린 전주의‘풍남제’도 단오축제의 한 전형을 보여주었다. 전주대사습놀이에서 벌이는 판소리 및 기악, 무용 등의 경연대회는 이 축제의 열기를 한층 고조시키는 목록이다. 대사습은 해마다 가장 권위 있는 판소리 명창을 배출하는 등용문이다. 특히 올해는 전인삼이라는 걸출한 남자 명창을 배출하여 화제거리가 되었다.
이밖에도 음력 사월초파일에 열리는‘춘향제’는 지역축제의 명성을 손상시키지 않을 만큼 권위가 있다. 당진의‘기지시 줄다리기’와 창원의‘삼일문화제’는 공동체 의식을 결속시키는 절오축제의 문법에 걸맞는 좋은 축제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지역축제의 명분을 이용하여 축제가 난립하는 경향도 있어서 우려된다. 지방화시대를 맞이하여 각 지역에서 열리는 지역축제의 총수는 400개를 넘어가고 있다. 1970년대까지의 우리의 전통적 지역축제는 80개 정도였다. 그런데 1980년대와 1990년대를 거치면서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400개가 넘는 지역축제가 보고되었다. 그러다 보니 축제 자체가 공동체를 기반으로 전통에 입각하여 치뤄지기보다는 상업적이고 말초적 경향을 띤 채 진행되는 것이 일반적이 되었다.
상설 공연장 및 국악전수 교육장들
1997년은 상설공연장에서 레퍼토리를 정하여 하는 공연이 늘어난 중요한 해이기도 하다. 국립국악원은 작년에 토요 상설 무대를 마련한데 이어 올해는 화요일과 목요일로 상설무대를 확대하여 언제든 우리 전통예술과 만날 수 있는 장을 마련하였다. 한복을 입고가면 무료로 입장시켜주는 아이디어도 전통을 적극적으로 보존하고 계승한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착상이라고 보여진다.
정동극장은 매주 화·금요일에 전통예술 상설무대를 열어서 뜨거운 호응을 받았다. 짧게는 한 달, 길게는 6개월 단위로 레퍼토리를 정해놓고 공연함으로서, 안정적 분위기에서 공연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이 같은 추세는 지방으로도 확대되어 전북도립국악원에서도 토요일마다 상설공연 프로그램으로 이 지역의 애호가들의 눈과 귀를 만족시켜 주었다.
1997년은 교육 프로그램이 어느 때보다도 의미 있는 작업으로 다가온 해이기도 하다. 전통교육에 대한 관심이 제고되어 직접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이제는 상당히 늘어났다. 이 같은 교육의 가장 모범적인 기구로는 전주 덕진에 있는 도립국악원 교육제도를 가장 전통적이고 높이 칠만 하다. 인간문화재급의 교수들이 매일 구전심수의 기법으로 강의하는 이 프로그램은 국악교육의 원형이라고 할 만하다. 국립극장에서 개설한 문화학교는 연륜이 오래된 만큼 이제는 중요한 교육 제도로 정착한 느낌을 준다. 요일별로 장르를 달리하여 판소리나 북반주, 혹은 기악을 가르치는데 분위기가 사뭇 진지하다. 우리 소리 동호인 모임이자 교육기구이기도한 한소리회와 대금정악 전수소가 합쳐서 국악의 대중화에 앞장선‘한소리 국악원’의 업적도 높이 살만 하며, 고창 동리국악당의 판소리 및 기악 교습도 상당히 헌신적인 것으로 생각된다.
이제 1997년도 저물어 가고 있다. 여느 해의 세밑은 한해를 보내는 서러움과 나름의 넉넉함이 병존하여 뭔가 여유로운 흥청거림이 있었는데, 올해는 음울한 그림자만이 우리 앞에 드리워진 채 답답하게 하루하루가 지나간다. 11월에 들이닥친 환율의 위기는 앞으로의 경제 위기가 만만치 않다는 위기감과 함께 그동안의 우리의 삶의 모습을 송두리째 반성케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이렇듯 경제위기가 닥치면 가장 먼저 위축받는 곳이 문화다. 하물며 전통문화에 있어서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