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존의 단계 뛰어넘어 창조의 길 향하도록 환한 길을 놓아야…
- 전통문화의 현주소를 찾아서
정병헌 / 숙명여대 교수
전통이란 무엇인가
전통이란 무엇인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 전통이라는 이름의 유산은 무슨 의미를 갖는가? 전통의 논의에 있어 우리가 항상 만나는 것은 티·에스·엘리어트의 「전통과 개인의 재능」이라는 글이다. 여기에서 엘리어트는 우리가 고민하는 많은 문제를 이미 해명해 두고 있었다. 예컨대 “전통이 앞선 세대가 남긴 성과를 맹목적으로 혹은 소심하게 고수하고, 전세대의 성공을 추종하는 데 있다면 그런 전통은 적극적으로 저지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또 “전통은 계승될 수 없다. 그것을 원한다면 비상한 노력으로써 획득하여야 한다. 이를 위하여 역사적 의식을 지녀야한다” 등의 구절을 통하여 엘리어트는 전통 논의에 대한 많은 답안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가능한가? 진정한 전통의 계승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 창조적인 계승이란 무엇인가? 이에 대한 심각한 고민과 처방이 등장하지 않는 한, 전통문화는 항상 활성화되어 있는 외래의 대중문화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있었던 정순임의 심청가 완창(8월 20일)과 창극「열녀춘향」(9월 9일부터 9월 14일까지), 그리고 과천 호프호텔에서 열렸던 민속학회 주관의 국제민속학대회(8월 23일과 24일)는 전통의 계승에 대한 우리의 심각한 고려를 강요하고 있었다.
원형의 보존과 창조적 계승, 그리고 심층적 연구의 필요성
정순임이 부른 심청가는 이날치에서 김채만, 박동실로 이어지는 고졸한 서편제의 소리이다.
이는 광주의 한애순과 경주의 장월중선으로 이어졌는데, 정순임은 어머니인 장월중선의 소리를 이어받아 그 전모를 유창한 소리의 세계로 펼쳐 보였다. 이를 통하여 청중들은 보성소리 심청가와는 다른 의젓한 또 하나의 판소리를 감상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과거의 것을 원형 그대로 보존하여 전달하는 것은 문화 전승의 기본이다. 그러한 원형 위에서만 모든 변형은 의미를 지닐 것이기 때문이다. 세태와 인기에 영합함으로써 한 문화의 원형을 상실해 버리는 경우를 우리는 너무도 많이 보아왔기 때문에, 이번의 무대는 소중한 추억으로 기억될 수 있을 것이다.
박병노 연출의 창극 「열녀 춘향」은 이 시대의 창극이 지향해야 하는 방향과 문제점에 대한 고민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무대였다. 이 시대의 우리에게 왜 '열녀'는 강조되어야 하는지를 이 작품은 설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대본과 창극술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성찰은 놀이성 속에 감추어져 관객에게 전달되지 않았던 것이다. 창극은 판소리를 중요한 재료로 하여 만들어 낸 독특한 연극 형태이지, 판소리를 더 잘 감상하기 위한 방편은 아니다. 따라서 창극에서 발견하고자 하는 것은 판소리의 진정한 맛이 아니라 창극의 예술이다. 그런데 이 예술성은 연출과 직접적인 관련을 맺는다. 또한 배우와 배경과 음악은 정밀한 연출 의도에 통합되어야 하는 것이다. 판소리에서 작품 해석의 주체는 연창자이기도 하고 또 고수일 수 있지만 창극에서 작품 해석의 최종적 권한은 결국 연출이 가질 수밖에 없다. 배우나 소도구는 연출의 작품 해석에 종속되어야만 극이 성립되는 것이다. 극이 보여주는 정교한 예술미를 드러내지 않고 단순히 임기웅변적인 재담이나 동작을 통하여 관객을 웃기고자 한다면 이는 놀이를 지향하는 마당극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2일 동안 계속된 국제민속학대회는 무려 32편의 연구 결과가 발표되어 풍성한 수확을 이루었다.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 몽골의 학자 등이 참여하여 열띤 발표와 의견을 교환한 것은 우리 문화의 나갈 길을 제시한 중요한 지침이 되었다. 발표된 대부분의 연구가 자국 문화의 원형질이라 할 수 있는 민속 전통에 치중됨으로써 각국이 세계사에 기여하는 것은 바로 자신의 문화 정체성 identity에 있음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연인원 수백 명의 학자들은 바로 자신과 자신의 이웃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확인하고 자신의 지향을 가늠할 수 있었다. 참석한 많은 인원들이 학문의 다음 세대를 짊어질 젊은 집단이었고 그들이 연구실과 현장이 결합된 통합적 연구 태도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여준 것도 중요한 의의라고 할 수 있다.
가치있는 일은 무엇인가
현재에도 가치있는 과거야말로 전통에 값하는 것이고 이러한 이유에서 전통은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창조되는 것이다. 현재를 영위하는 문화 종사자들의 의식이 전통의 창조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이 때문이다. 앞에서 거론한 행사들을 통하여 우리는 전통의 창조를 위하여는 유산의 원형적 보존과 창조적 계승, 그리고 그에 대한 심층적 연구가 필요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각각의 방향이 정립되지 않았을 때 그 문화가 외래적인 것에 종속되는 것은 필연적인 귀결이다. 한 문화의 세례를 받은 후진 문화는 엄청난 충격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고, 그 영향은 두고두고 지속된다는 것을 우리는 일제의 식민지 체험을 통하여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어려웠던 시절, 먹고 사는 것이 중요한 과제였던 1960년대 초, 우리는 그래도 후세를 위하여 전통 문화의 전수자들에게 인간문화재라는 칭호를 부여하면서 국가의 보호를 도모하였다. 지금은 별 것 아니지만, 그 어려웠던 시절, 국가의 보호가 있어 오늘의 연명은 가능하였는지도 모른다. 국가의 재정이 어려웠지만, 그나마 원형은 유지되어야 한다는 문화의식이 그러한 장치를 가능하게 하였던 것이다. 먹고 사는 문제에서는 그나마 벗어난 지금, 30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와 똑같이 원형의 보존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엄청난 무감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은 그러한 바탕 위에서 창조의 길을 향하도록 환한 길을 놓아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한 장치가 바로 공교육 기관의 설립이다. 왜 창극에서 연출이 가능할 수 없었는가? 그것은 배우가 창만 배웠을 뿐이지 배우로서 지녀야 할 다양한 연기술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창극학교 하나만 있었다면, 종합적인 극술이 전통문화와 화학적인 결합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제도적 뒷받침 없이 스스로 우뚝 서라고 하는 것은 아직 정립되지 못한 전통예술을 향하여 차마 할 수 없는 말이다. 전통예술에의 절망은 서양에서 유입된 춤동작으로 건둥건둥 뛰어가는 배우에게서 그리고 그 안스러운 모습이야말로 우리의 진실이라고 자포자기하는 관객이 한숨에서 진하게 배어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