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비극, 실험적인 무대정신이 돋보이는 작품 둘
-「안티고네」와 「트로이의 여인들」
김유미 / 연극평론가
「안티고네」와 「트로이의 여인들」
가을은 흔히들 문화의 계절이라고 말한다. 그 가을을 알리는 9월에 세계연극제의 개막은 서울연극제 등 그러지 않아도 다양한 볼거리가 제공되는 9월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고 있다. 이는 외국의 우수작과 국내의 우수작을 한꺼번에 감상할 수 있다는 점에서 관객들의 관심을 매우 자극한다. 외국작품들에 대한 관심은 우선 호기심에서 시작될 수 있다. 그러나 피상적인 호기심에서 벗어나 특별히 벼르고 별렀던 작품을 보게 된다는 기대감도 적지 않은 듯하다. 9월 중순까지 공연된 세계연극제 해외 공식초청작 중에서 이러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작품들이 몇 있다. 「안티고네」,「트로이의 여인들」, 그리고 베네주엘라 라하따블라 극단의 「아무도 대령에게 연락하지 않는다」이다.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작품은 「안티고네」와 「트로이의 여인들」이다. 이 두 작품은 우선 그리스 비극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더욱 이 작품들이 관심을 끄는 것은 너무도 잘 알려진 이 작품들을 과연 어떤 방식으로 보여줄지의 문제에서 각각이 시사하는 바가 크기 때문이다. 두 작품을 모두 해석의 면에서 고전의 전통을 해제하지 않는 텍스트를 기본으로 하기 때문에 그것을 드러내는 과정의 중요성은 더욱 커진다.
정적인 무대에서 상징적인 기호들이 뿜어내는 동적인 힘
「안티고네」의 주인공 안티고네는 죽은 오빠들의 시신 사후처리 문제로 왕인 크레온과 맞서다가 결국은 죽게 되는 비극적인 인물이다. 이 비극은 가족사적으로 볼 때 외디푸스의 딸인 그녀가 마땅히 겪을 수밖에 없는, 이미 잉태된 비극의 결말 정도에 해당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무모한 싸움 끝에 죽은 오빠들의 죽음과는 달리 그녀의 죽음에는 국가와 개인간의 갈등이라는 거창한 문제가 제기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 동안의 「안티고네」의 국내 공연의 경우에는 이러한 정치적인 합의가 특별히 소중하게 여겨지기도 했었다.
그리스 아티스극단의 이번 공연에서는 이러한 해석의 강박관념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안티고네와 크레온의 불꽃튀는 대결을 고스란히 지켜보는 즐거움을 허락한다. 이는 우선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가 주는 의미의 자유로움과 무관하지 않지만 그보다는 잘 훈련된 배우들의 몸짓언어가 더욱 강렬한 전언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언어조차도 의미적인 중요성보다는 리듬의 중요성으로 부각되며 이는 몸짓의 리듬과 조화되어 통일감을 준다.
몸짓이 주는 상징성이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은 코러스들이 배에서 뽑아내는 빨간 줄을 가지고 하는 행동이다. 이 행위는 크레온의 아들 에이몬이 자살하고 이에 실망한 크레온의 아내이자 에이몬의 어머니인 유리디아스가 목을 메는 격정적이고 위험한 절정을 향해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붓는다. 그 행위는 나쁜 결과를 막고 싶어하는 최대한의 몸부림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위험한 절정을 예고하는 기능을 한다. 그 힘으로 절정의 장면은 매우 간단하지만 정말 비극적으로 표현된다. 이 비극은 안티고네의 비극이라기보다는 크레온의 비극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크레온 개인으로서의 비극이 왕으로서의 권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는 것을 또한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물론 이러한 상징들 속에 숨어 있는 언어들을 감지해 내려면 관객은 조금 피곤함을 느끼기도 한다. 프로시니엄 무대 위에서 배우들의 움직임이 지극히 정적이라는 점은 이를 더욱 부채질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정적인 행동이 상징들의 의미를 더욱 크게 보이게 하기 위한 전략일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결과적으로 상징적인 의미들은 동적인 에너지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극장문을 나서고 난 후에도 조용하지만 그 격렬했던 호흡이 하나의 리듬으로 남아 쿵쾅거리는 숨을 가다듬어야만 하는 순간에서도 알 수 있다.
동적인 무대에서 관객을 제의의 한가운데로 몰아넣는 집약된 힘
뉴욕 라마마 극단과 동랑연극 앙상블이 협연한 「트로이의 여인들」은 시작부터가 특별한 관극체험을 예고한다. 관객은 객석의 자기 자리를 찾아 앉는 대신 모두 뒤편 무대 위로 올라가야 한다. 그리고 연극이 시작되는데 그러면 트로이 여인들의 울부짖음과 그리스 병사들의 창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관객은 배우들의 움직임에 따라 같이 움직여야만 한다. 관객도 갑자기 군중의 역을 맡은 배우처럼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의 전환은 관객 스스로를 이 사건에 보다 깊이 관련된 인물로 만드는 효과를 발생시킨다. 무대와 객석을 해체하는 이러한 방식은 마당극 양식에서 어느 정도 익숙해 있기는 하지만 훨씬 동적이라는 점에서 매우 다른 느낌을 준다.
이러한 동적인 느낌은 비단 관객과의 관계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무대 자체를 매우 입체적으로 활용하여 객석 출입구까지 극장의 네 벽을 모두 이용할 뿐만 아니라 가운데 허공의 공간도 십자로 종횡무진하는 역동성을 보여준다. 2부에서 관객이 객석에 자리하고 난 후에도 객석과 무대는 긴밀히 연관되어 다양한 동선을 관객이 느낄 수 있게 만든다. 이러한 공간 이용을 위해 다양한 무대장치들이 동원되기도 하는데 모두 소박한 것들이 화려한 효과를 내도록 고안되어 있다. 그 탁월한 예는 나무판자이다. 상하의 운동을 연결해 주는 비스듬히 세워진 판지는 긴박감, 격렬함, 분노의 직선 또는 버려지는 죽음의 조용한 하양곡선 까지도 거침없이 표현해 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무대가 관객을 사로잡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이 작품의 전부는 아니다. 이 작품의 진짜 미덕은 제의성의 고양에 있다. 무대는 이러한 제의성을 고양시키도록 적극 후원해 줄 뿐이다. 이러한 제의성은 중요 장면장면에서 부각된다. 줄거리만을 따라가는 친절한 줄거리 해설보다 훨씬 줄거리 이해에 도움을 준다. 안드로마케가 트로이의 어린왕이자 자신의 유일한 아들을 그리스 병사의 손에 넘겨주기 전에 행하는 의식, 트로이의 공주 폴류씨나가 제물로 바쳐지는 의식 등 거의 모든 장면이 이러한 의례를 보여준다. 그리스 병사들에 의해 강간당하는 트로이 여인들의 모습까지도 하나의 제의처럼 치러진다. 이러한 제의 속에서 관객은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듣지 않아도 경험으로 알아버린다. 감동을 따로 말할 필요가 없는 단계이다.
그러므로 이 연극에서는 의미적인 기능을 하는 언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라틴어 등 다양한 나라의 언어가 사용되지만 그것은 모두 다양한 음악적 효과로 돌려진다. 「안티고네」에서는 리듬만으로 효과를 냈지만 여기서는 울부짖음까지도 완벽한 음악이 되어 원시적인 정서를 뿌리채 흔들어 댄다. 덕분에 관객은 쉽게 제의의 한가운데로 빠져들고 그 속에서 트로이 여인들의 비극적인 삶과 그리스 문명의 실체가 가슴으로 다가온다. 어떤 정확한 대사로 이야기되는 연극보다 훨씬 정확하게 감동을 전한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확실히 역설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