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프로그램

민족 정신문화와 예술문화의 숨결

- 인사동 문화의 현장을 중심으로




이형옥 / 조형갤러리 관장

1. 인사동에 대하여

인사동(仁寺洞)은 조선시대 중부 관인방(菅仁坊)의 '인(仁)'자와 대사동(大寺洞)의 '사(寺)'자를 취하여 지어진 것이다. 「한경지략(漢京識略)」 권2 명동조(名洞條)를 보면 '대사동(大寺洞)'은 곧 탑사동(塔寺洞)인데 옛날에는 원각사(圓覺寺)가 있었으나 지금은 석탑(石塔)만 남아 있다'라고 하였다. 한경지략은 순조(1801∼1834) 연간에 지어진 책인데 이때에는 '대사동'과 '탑사동'으로 혼용하여 불려졌음을 알려주고 있다.

인사동은 조선초기까지는 한성부 중부 관인방(菅仁坊)과 견평방(堅平坊) 관내였다. 1751년에 반포된 수성책자(守成冊字) 「도성삼군문분계형록(都城三軍門分界衡綠)」에 의하면 한성부 중부 관인방 대사동 일패계(一牌契)·이패계(二牌契)·삼패계(三牌界)·사편계(四牌契)와 견평방 중어물전(中魚物廛) 일패계·이패계에 속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한성부의 행정구역 변경이 있을 때에는 한성부중서(漢城府中暑) 관인방 대사동계와 원동(圓洞)·대사동·이문동(里門洞)·향정동(香井洞)·수전동(水典洞)·이문동계(里門洞契) 이문동이었다.

1910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7호에 따라 경성부 중부 관인방과 견평방 지역이 되었다가 1914년 4월 1일 경기도고시 제7호로 경성부 인사동으로 하였다. 동년 9월 29일에는 경성부 북부출장소 인사동 인사정(仁寺町)이 되었고 1943년 6월 10일에는 부령 제 163호로 종로구 인사동으로 되었다.

1946년 10월 1일 종로구 인사동으로 변경되어 오늘에 이른다.

인사동은 동으로 낙원동, 남으로 종로 2가와 서쪽의 공평동, 북쪽의 관훈동과 서로 접해 있다. 인사동 길과 태화관 길이 서로 교차하는 인사동은 동(洞)의 서쪽을 재개발하여 상업업무 중심지역이 되었다.

인사동은 종로 1·2가 동사무소의 행정관할 구역인데 1946년 10월 서울시의 일부 지역에서 동회제도를 실시할 때 인사동회(會)가 설치되었다. 1955년 4월 18일 서울특별시 조례 제66호로 인사동은 공평동 일원과 함께 신설된 대사동의 관할구역이 되었다.

1970년 5월 18일 서울특별시 조례 제613호로 인사동은 낙원동·관철동·공평동·관훈동·견지동·종로2가와 함께 낙원동 동사무소의 관할구역이 되었다 1977년 9월 1일 서울특별시 조례 제1181호로 종로1가동과 종로2가동이 통합되어 종로 1·2가 동사무소가 신설되자 이의 관할구역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여러 개의 자연부락으로 형성된 인사동은 대사동에서부터 유래가 되는데 댓절골·사동(寺洞) 등의 이름으로도 불려졌으며, 지금의 인사동과 관훈동 사이에 걸친 마을이다. 큰절인 원각사가 있었으므로 마을 이름이 붙여졌다. 향정동은 향우물골·향나무우물골·상우물골로도 불렸는데 우물 옆에 향나무가 있었으므로 명칭이 유래되었다.

이문동은 인사동·종로2가·공평동에 걸쳐있는 마을로 222번지에 순화궁(順和宮)의 이문이 있어서 마을 이름이 붙었으며 이문안이라고도 하였다. 승동은 인사동과 종로2가에 걸쳐 있는 마을이고 그 옆으로는 수전동이, 승동의 북쪽에는 과부 다섯 명이 살았다는 오과부골이 있었다. 낙원동과 인사동에 걸쳐 있는 부락은 원골 혹은 원동이라 하였다.

인사동은 탑동·사동·탑사동이라는 명칭으로 오랫동안 불러왔던 것은 대광명전(大光明殿)을 비롯하여 400여 칸 규모의 원각사에 딸린 석탑이 유명했기 때문이다.

탑골공원에 현존하는 이 석탑은 원각사가 낙성된 후에 세워졌고 이때부터 대사동이라는 동명보다 탑과 관련된 동명으로 불려졌던 것이다.

인사동 194번지는 중종반정 때 공훈을 세운 정국공신(靖國功臣) 구수영(具壽永, 1456∼1524)이 살았다. 능성 구씨(綾城具氏)의 인맥을 형성한 그는 부호군(副護軍)·동지중추부사·도총관·지돈녕부사·판동녕부사를 역임하고 능성부원군에 봉해졌으나 연산군에 아부했다하여 1509년에 파직되었다.

태화정(泰和亭)·부용당(芙蓉當) 등이 있는 구수영의 집은 증손자인 구사맹(具思孟)의 소유가 되었는데 인조의 생모인 인(仁) 왕후는 구사맹의 딸이었다. 인조가 어릴 때 외가인 이곳에서 자랐음으로 인조의 잠저(潛邸)가 되었다.

영조는 부용담 앞의 연못을 잠룡지(潛龍池)라 하고 친필 현관을 걸게 하였다.

그후 이 집은 안동 김씨에게로 넘어가 김흥근(金興根, 1796-1870)의 소유가 되었다. 경상도 관찰사·영의정 등을 역임한 김흥근이 극심한 안동 김씨의 폐단 속에서도 고고한 인망을 받았던 것은 정수동(鄭壽銅)의 도움이 컸다. 정수동이 김흥근의 문객으로 자주 그의 집을 드나들 무렵 남의 돈 2만 냥을 가로챈 사실로 김홍근이 원망을 듣고 있었다.

어느 날 김흥근의 집을 찾은 정수동에게 사색이 된 계집종이 달려와 "세 살 된 어린 자식이 돈을 삼켜 목에 걸렸으니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당황하며 물었다.

정수동은 점잖게 아이가 삼킨 돈이 남의 것인지 아니면 자기 것인지를 물었다. 계집종이 자기 것이라고 하자 이번에는 몇 푼을 삼켰느냐고 물었다. 한 푼이라고 하자 정수동은 "아무 걱정 말라. 남의 돈 2만 냥을 먹고도 아무 탈이 없는데 자기 돈 한 푼 먹었다고 죽겠느냐"라고 하였다.

이 말을 방안에서 들은 김홍근은 그 길로 2 만 냥을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었고 정수동에게 자신의 청렴을 구해주었다며 고마워한 뒤 두고두고 그 말을 교훈으로 삼았다.

그후 이 집은 헌종의 후궁인 경빈 이씨(慶嬪李氏)의 순화궁이 되었는데 1908년 서부 반송방(盤松坊) 한동(漢洞)으로 옮겨졌다가 1911년에 동부 인창면(仁昌面)의 이씨 묘소로 옮겼다. 순화궁을 이전하고 난 후 빈 집으로 남아있던 이곳은 이완용의 소유로 넘어 갔다.

별장으로 사용하며 본가로 오가던 이 집은 친일파들의 교유장소로 자주 사용되었는데 어느 날 하늘이 컴컴해지면서 소나기와 함께 정원에 있는 고목에 벼락이 내리쳐 둘로 갈라졌다.

때마침 이완용의 집을 찾아와 당구를 즐기고 있던 그의 아들 이항구(李恒九)와 조카 한상룡(漢相龍)은 놀라 갈팡질팡하다가 안방 깊숙이 숨었다. 그러나 이완용은 그 자리에 버티고 서있으면서 숨는 아들을 항해 "벼락이 떨어진 후 도망쳐야 아무 소용이 없는 노릇"이라고 충고하였다. 낙뇌로 이완용은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으며 장안의 사람들은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을 하늘이 대신 천벌을 주었다'며 쑤군거렸다.

소문과 함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완용은 이 집을 팔려고 내놓았다. 때마침 1918년의 화재로 소실된 명월관(明月館)의 주인 안형환(安笘煥)이 인수하여 명월관의 분점격으로 운영했는데 옥호를 태화정(太和亭)이 있는 곳이라 하여 태화관(太和館)이라 하다가 후일 태화관(泰和館)으로 고쳤다.

외진 위치에 있던 태화관은 2층으로 크고 작은 방이 많아 장안의 부호와 총독부 관리들이 즐겨 찾던 곳이었는데, 3·1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의 장소로 선택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 민족대표들은 태화관 2층 동쪽 끝 방에 모여 고종황제의 빈소가 있는 남쪽 문을 열어놓은 후 한용운의 사회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종로경찰서에 전화를 걸어 그 사실을 통고, 참석한 29인이 먼저 스스로 체포되었으며 지방운동의 주최 및 연락 관계로 늦게 도착한 길선주(吉善宙) 등 세 사람은 경찰에 자진 출두하여 투옥되었다.

궁정양악대(宮廷洋樂隊) 출신들이 만든 우미관양악대(優美館洋樂隊)와 단성사양악대(團成社洋樂隊)가 자주 출연하던 태화관을 헐고 기독교 감리교 여자교육기관인 태화회관이 설립되었으나 공평지구 재개발사업으로 인해 현재 12층 높이의 태화빌딩이 들어섰다.

한편 대사동에는 효종 때의 훈련대장 이완(李浣, 1620∼1674)이 살았다. 이완은 임진왜란 때 육전의 명장이었던 이수일 장군의 아들로 칼날같이 강직한 사람으로 함경도 병마절도사·어영대장·수어사·포도대장을 거쳐 우의정에 올랐다.

훈련대장이 되었던 1653년에 효종의 북벌계획에 맞추어 신무기의 제조, 성곽의 개수 및 신축 등으로 전쟁준비를 완료한 바 있으나 효종의 별세로 계획이 중단되고 말았다.

효종의 북벌정책은 이완의 유비무환 실천사상이 뒷받침된 것이었다. 왕궁을 수비하던 이완에게 효종은 "병자년과 같은 사변이 날 경우 그대가 나를 강화까지 호위하고 갈 터인데 적병이 뒤에서 추격해오면 어떻게 할 참인가"하고 물었다. 이에 이완은 "신은 이미 20말 들이의 큰 부대 수천 개를 만들어서 병사마다 하나씩 갖고 있게 하였습니다. 유사시에는 그 부대의 흙을 담아 지형에 따라 배치하면 높이는 한길이 넘고 둘레도 자기 몸을 호위할만한 포대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라고 답하였다. 효종은 이완의 이 같은 답변에 더욱 그를 신임하였다.

송시열과 함께 효종을 도와 북벌계획을 추진하던 그는 어려서부터 힘이 장사고 담도 컸다. 그가 아직 20세가 되기 전의 일로 외가에 갔을 때이다. 저녁 먹은 것이 좋지 않아 늦은 밤 측간에서 용무를 보고 있는데 바로 앞에서 호랑이가 나타나 쭈그리고 앉아 있는 개를 물어갔다. 별안간 자지러질 듯한 개의 비명소리를 듣고 집안 사람들이 나와 개가 어디 갔느냐고 묻자 그는 "호랑이가 물어 갔어요"라고 말했다.

어른들은 그런 급한 판에 어떻게 태연스러우냐고 묻자, 이완은 웃으며 "범이 이미 달아났는데 소리를 지른다고 무슨 소용이 있으며 또 물어간 개를 먹기 전에는 오지 않을텐데 무엇이 무서워 보던 뒤도 보지 않을까"라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있다.

이완은 원래 낙산(駱山)아래 낙동(駱洞) 인평대군(鱗平大君)의 집 앞에 살았는데 왕족의 이웃에 사는 것은 법도에 어긋난다 하여 이곳으로 이사한 후 몸소 배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해마다 가지가 휠 정도로 배가 주렁주렁 열렸는데 그가 죽은지 20년이 지나 병조판서 민종도가 길지(吉地)라 하여 빼앗아 살면서부터 배나무에는 한 개의 배도 열리지 않았다.

그후 공훈을 세운 이완의 서손이 1964년에 나라에 부당하게 집을 빼앗겼던 억울함을 호소하여 되찾으면서부터 배나무에 열매가 다시 맺히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외에도 인사동에는 마을 이름에 걸맞게 많은 명인들이 살았는데 조선시대 성리학의 대가이며 가장 뛰어난 철학가이고 경세가(經世家)인 동시에 교육자이며 능변가인 이이(1536∼1583)가 살았다.

시호는 대성(大成), 호는 율곡, 자는 숙헌인 그가 49세에 세상을 떠난 곳은 대사동 모퉁이에 있는 남의 집이었으므로 친지와 제자들이 여러 방면으로 주선하여 집 한 채를 마련해 유가족에게 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청빈하게 살았던 율곡 선생이 서거한 그 곳에서 '사동 대감'으로 불려지던 조선말 세도 재상 김병학(金炳學)이 으리으리한 집을 짓고 살았다고 하니 대조될 만할 일이다. 조선시대의 문신이었던 김병학(1821∼1879)은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를 배경으로 대사헌과 판서를 지냈다.

인사동 137번지에는 승동 교회(勝洞敎會)가 있다. 1893년 미국 북장로 교회 선교사 무어 S.F.Moore에 의해 설립되었는데 곤당골 교회에서 분할 받은 16명의 교인으로 중앙교회라는 이름을 가지고 시작되었다.

1905년 8월 1일 현재의 인사동으로 이전하였는데 1919년 3·1운동 때에는 교회 학생을 중심으로 한 대대적인 학생시위운동을 일으켰다. 1934년 승동 교회를 개명되었고 1939년 지금의 한신 대학 전신인 조선신학교(朝鮮神學校)가 이곳에서 개교하였다.

인사동은 일제 말부터 골동품 상가가 형성되기 시작하여 1960∼1970년대에 걸쳐 성시를 이루었다. 지금은 장안평을 비롯, 강남역까지 군데군데 골동품상가들이 확산되었지만 한때 골동서화는 물론 생활도구, 장신구 등 온갖 전통공예품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어서 살아있는 노상박물관이라는 애칭도 가지고 있었다.

지금도 내국인은 물론 외국인 여행객 사이에 골동품의 진품 여부와 제대로 된 것을 찾으려면 인사동으로 가야 한다는 말이 불문율처럼 전해지는데 성수기 때는 200여 개의 골동품 취급점이 인사동 일대에 흩어져 있었다.

이에 따라 화랑·전시장·표구점 등 골동품과 관련된 업종들이 하나둘씩 개업하여 서로 병존하고 있다.

이러한 골동품이 집결된 고미술품의 진품을 감정하는 한국미술협회가 이곳에서 발족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한국고미술협회 회원 약 80퍼센트가 인사동 일대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런 인사동의 특징을 살리기 위해 1988년 서울올림픽을 기화로 하여 해마다 거리축제가 인사동에서 개최되었는데 지신밟기·봉산탈춤 등의 행사를 비롯하여 각종 공예품의 거리판매도 행해지고 있다.

궁궐과 가까워지면서 양반관료들이 집단 거주하던 인사동의 면모는 많이 달라졌지만 조상의 숨결을 가장 많이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박치원은 이 같은 모습을 「인사동 지대(地帶)」라는 다음과 같은 시를 통해 표현하였다.

안국방(安國房)은

세도 벼슬아치들이

수염을 어루만지며

헛기침 거만한 걸음걸이

그래서 주거지 근방은

필묵(筆墨)이며

한지(韓紙)며 벼루며 연적이며

표구며 이른바

양반네들이 필요한

필수 문화도구(文化道具) 장수들이

물건을 댄 점포가 있었다.

덩달아

다로 향로 주전자

별의 별 도구들이 손때묻은 대로

유리진열장에서 광(光)내고 있다.

옛 장식장이며 서판각(書板刻)

요즈음은 하회(河回)탈까지 깎아 판다.

고서화(古書畵)거래 아직도

옛식 표구(表具)는 여기서 볼 수 있다.

그러면서

서(書)·화랑(畵廊)이 줄이어 서서

동양화(動陽畵)와 첨단 서양화(西洋畵)가 맞부딪

히면서

양면이 서로 부서져 가면서

자연스럽게 변용(變容)해 가는 것 같다.

낙원동(樂園洞)은 역시

장전의 고장이고

인사동 낙원동은

그것들을 만드는

이른바 제조업이 성했다.

신기한 것은 인사동 골목에 들어서면

고서죽적(古書竹籍)이며

게다가 누리퉁퉁 곰팡내 나는

고본(古本)이 서점(書店)에 쌓여있고

고물(古物)단지 같은

그 옛날 쓰다 남은

도자기며 청동도구

고철(古鐵) 화루며 인두

아직도 떡집은 남아서

낙원동 할미떡을 현대화시켰다.

인사동 골목을 들어서면

옛날 내집 골목을 들어선 듯

반가운 반면 어찌된 셈인지

차분하지 않은 건

케케묵은 모습들을 내놓으면서

그것들이 아니고 옛것이라 그것들을

지금 흉내내 만들어 파는

그래도 옛 모습이려니 여길

그마음 한구석 때문에

인사동 골목은 낯설지 않는지

그래서 나는

참 어처구니 없이 슬프다.

인사동은 골동품 상가뿐만 아니라 가구점으로도 이름난 곳이다.

지금도 동일·파고다 등의 일류가구점을 필두로 하여 10여 개의 가구점이 오랜 전통을 자랑하고 있다.

호화주택과 맨션아파트가 급증가됨에 따라 이에 알맞은 고급가구의 수요가 날로 늘어가고 있으며 주택의 양옥화의 경향과는 반대로 가구는 복고풍의 디자인이 더 많이 팔린다고 한다.

2. 정신문화를 이끌어 가는 거리

인사동이 아직까지 전통의 맥을 이어오는 이유는 근처의 경복궁이나 청와대, 비원 등 문화재가 많아 정책적으로 높은 건물을 짓지 못하게 해 낙후된 채 남아 있다가 오히려 그런 점들에 매력을 가진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지자 현재처럼 전통가옥들이 많이 남아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외국인들이 우리나라 전통문화에 남다른 관심을 보이면서 이들을 상대로 골동품상이나 전통 생활용품을 파는 재미를 톡톡하게 보던 가게들이 인사동에 모여들면서 지금처럼 골동상점들이 밀집한 거리가 된 것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지나치게 세련되고 깔끔한 종로의 도회풍 카페가 아니면 담배 냄새 자욱하고 음악소리 시끌벅적한 술집에 싫증나 좀더 한갓진 저녁시간을 즐기려는 직장인들로 밤만 되면 인사동은 소리 없이 분주하다. 몇천 원하는 두툼한 해물파전에 동동주를 시켜놓고 시간가는 줄 모르고 떠드는 직장인들이 주점마다 가득하고 가야금소리가 은은한 전통찻집에는 '소나무 숲 솔바람'이니 '구름 속 나그네'니 하는 이름도 생소한 전통차를 마시는 연인들의 사교장으로도 한몫을 하고 있다. 말만 들으면 알만한 문인이나 화가들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는 곳이기도 한 인사동의 요즘은 날씨가 쌀쌀해 줄긴 했지만 날이 풀리면 주말에는 골목마다 희한한 물건을 내다 파는 좌판구경도 색다른 풍속도다.

지나가며 구경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생활소품이나 시골 박물장사를 연상케 하는 온갖 잡동사니들을 파는 좌판들은 인사동의 또 다른 이미지를 갖게 하고 있으며, 골목 초입에는 여러 대의 포장마차가 들어서 우리의 현실을 잘 말해주고 있다. 인사동 골목은 고궁 못지 않게 외국인들의 발길이 많은 곳이다. 그냥 범상해 보이는 생활용 상품들도 이들에게는 새로운 볼거리이기 때문에 살이 촘촘한 전통부채와 각종 한지, 크기별로 갖춰진 붓, 쓰다 남은 요강과 놋그릇, 손으로 구부려 만든 청동액세서리, 앙증맞은 다기 세트, 은은한 아름다움이 묻어나는 머그잔과 접시, 오래되어 녹이 시퍼렇게 쓴 엽전 등은 바쁘게 지나치는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관심 있게 보는 사람들에게는 그냥 지나칠 수 없을 정도로 진귀한 물건들이 상점마다 가득하다.

오래된 옛날 돈이나 우표를 파는 가게의 고전사는 희귀 화폐의 모든 것을 보여주고 있으며 향토색 짙은 생활도자기의 앙증맞음은 전통의 맥을 자랑하고 있다. 특히 인두, 다리미와 오래된 할아버지의 뿔테안경, 엿장수가위, 수동식전화기, 놋그릇, 놋수저, 너덜너덜해진 고무, 할머니들 속바지춤에서 끌러온 것 같은 금강면경(거울) 머리장식용 뒤꽂이, 색 바랜 에기 배냇저고리 등등의 옛 생활용품들이 서로의 모습을 자랑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1) 화랑가가 한국의 시대문화를 조명

인사동은 화랑이 밀집되어 있는 곳이다. 신사동이나 청담동 같은 강남 화랑가는 고가의 미술품이나 외국의 유명작가 그림을 많이 취급하는데 비해 인사동 화랑가는 비교적 젊은 신예작가들의 실험성 짙은 작품전이나 미대생들의 졸업 작품전을 많이 볼 수 있다. 서민적인 그림들로 대중적인 인기를 끌고있는 인사동 화랑가는 그래서 미술에 관심 있는 젊은이들이나 그림 공부하는 미대생, 시끌벅적한 종로거리에 싫증난 사람들의 발길을 돌리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분위기 있게 시간을 보내려는 데이트 족들도 상당수이며 재미난 이색 이벤트가 곳곳에 숨어있고 운이 좋으면 구석진 화랑에서 보석 같은 그림 한 점을 발견할지도 모르는 곳이다.

인사동에서 들러 볼만한 화랑 몇 군데를 소개하자면 1994년도에 문을 연 인사갤러리는 지하, 지상 1, 2층이 모두 화랑이다. 총 150여 평으로 신예작가들과 기성작가들의 열린 공간으로 한 몫을 하고 있다. 관훈 갤러리는 작은 공간이 전체 6관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크고 작은 전시가 기획 또는 대관으로 작가들의 소품이나 소그룹활동의 작품전을 가질 수 있는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덕원 갤러리는 1992년도에 개관하여 100여 평의 전시장이 2층부터 5층까지 층마다 특색이 있는 공간으로 다양한 전시를 열 수 있도록 화랑가의 1번지로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조형갤러리는 65평의 격조 있는 전시공간으로 불황의 어려움을 딛고 새로운 미술문화 비전으로 미술개발과 방향을 전망하는 현대적 시스템으로 국제화시대의 새로운 미술시장을 확보하고 있으며 시대미술을 조명하고있다. 기타, 학고재, 선 화랑 등이 주요 미술관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현재 인사동 화랑가 현황

가나화랑 남경화랑 세모화랑 가람화랑 단성갤러리 송원화랑 갤러리나인 대림 화랑 예맥화랑 갤러리다경 덕원갤러리 예성화랑 갤러리도올 데미화랑 예전화랑 갤러리동주 동문당 인데코화랑 갤러리보다 동산방화랑 제3갤러리 갤러리사계 동호갤러리 조형갤러리 갤러리상문당 동주갤러리 중안문화센터 길러리서호목 갤러리청남 아트갤러리 갤러리아미손 미추화랑 토도랑갤러리 아트뉴스 백상기념관 터갤러리 갤러리인 백송화랑 하나로미술관 경인미술관 백악예원 하당갤러리 공칭화랑 빈켈화랑 학고재화랑 공평아트센타 삼경화랑 한선갤러리 관훈갤러리 삼정아트 스페이스헤나켄트갤러리 그림사랑 서경갤러리 홍갤러리 금호갤러리 선화랑 후인갤러리 나무화랑 이공이공갤러리 코스모스갤러리 나화랑

폐관된 갤러리

덕원갤러리1관(1층) 동서화랑 백상갤러리 빈켈화랑 예맥화랑 제3갤러리 청남아트갤러리 터갤러리 헤나켄트갤러리 후인갤러리 청년미술관 산솔갤러리 갤러리신

새로 개관된 갤러리

사비나갤러리노 화정이후 갤러리

2) 전통 음식이 즐비한 곳

인사동 골목에서 살다시피 하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대개 이러한 음식점을 소개한다. 겉으론 허름해 보여도 안으로 들어가 보면 편안한 분위기의 실내공간이 눈길을 끈다. 거문고 소리에다 절절 끓는 온돌방, 거문고와 큰 북, 투박한 원, 목상 시인들의 빛 바랜 원고지 등이 무언가 생각나게 하는 우리 전통의 맥이 숨쉬는 얼이 맺혀 있는 곳들이다.

토속미가 풍기는 된장찌개, 시세대로 받는 간장, 게장 이 집을 지키는 사람 또한 시인이며 풍류객이 운영하는 툇마루집이 그것이다. 크고 작은 술잔에 행주치마 한 폭 가득 갖고 오는 쌈 상추의 풋내음은 고향의 민가를 생각나게 한다. 향토색 짙은 술안주는 독특한 것이 툇마루 명성의 비결이고 함경도 가자미 식혜, 조청과 물오징어, 북어찜 구이, 통 북어탕, 녹두빈대떡, 맘태자볶음 등이 인사동을 찾는 이에게 시장기를 돌게 한다.

안동의 문배주, 진도 홍주, 이강주 등 토속주가 우리 전통의 흥겨운 가락에 맞춰 향기를 품어내고 있는가 하면, 천연건강 식품으로 잘 알려진 버섯 매운탕 집의 온정은 또 다른 우리의 입맛을 부르고 있다. 전통 도자기 그릇에다 원적외선 돌 냄비를 사용, 맛깔스러움을 자랑하는 버섯골집이나, 순수한 무공해 산지 식품으로 인사동 골목에선 유일하게 이 집의 온정만 버섯전문집으로 유명하다.

이러한 전통문화, 고고학, 한학 등 관련된 유명한 학자들도 즐겨 찾는 이곳은 다양한 입맛을 연구하는 개량 한정식 전문집도 눈길을 끌고 있다. 담백하고 맵지 않으며 자극적이지 않기 때문에 특히 일본인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이기도 한 사원은 전통 한정식을 개량, 한정식으로 국제화에 맞춰 외국관광객 젊은이들에게 맞추는 새로운 요리법을 연구하여 즉석요리를 천연산지에서 유기농으로 재배한 채소들을 사용하여 그 맛의 묘미를 자랑하고 있다.

3) 문화예술인들이 즐겨 찾는 전통 찻집

인사동의 찻집은 고풍적인 실내장식물이 걸려져 있다. 이런 장식들이 아무렇게나 걸려져 있는 것도 차 내음과 무관하지 않을 정도로 다채롭다. 대형 약탕기를 사용한 집, 형형색색 맛과 색이 어우러진 한국 전통의 맛 그 향기가 아닌가 싶다.

노년층이 많을 듯한 집에 젊은 층이 짝지어 이야기를 나누며 입가에 향기를 품고 있는 모습들은 한국 차가 명약이 아닌가 싶다. 한방으로 쓰여진 갖가지 식물을 채취한 어성조차는 여성의 보혈과 신장기능에 좋고, 소화 촉진제로도 효용이 높다고 한다. 술독이나 감기에도 효용이 좋다고 하는 한방 차들은 오랜 시간 좌선하는 스님들에게 좋은 차로도 유명하다.

불교적인 색채를 띠면서 깔끔하고 간단한 공양(식사)을 할 수 있는 찻집으로 유명한 '내 남편은 나뭇꾼'이란 찻집은 순수한 국산 차를 쓰는 곳으로 우리의 자랑이라고 한다. 녹차, 생강감초차, 오미자차, 대추차, 모과차, 유자차, 어린왕자차 등은 불교적인 냄새를 피우려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절 음식처럼 오신채(파, 마늘, 달래, 부추, 홍리)를 쓰지 않고 자연의 맛을 되살려 조상의 맛갈을 자랑하기도 한다. 전통 차의 진수를 자랑하는 「나누는 기쁨」은 5층 건물의 3층에 자리를 잡고 있는 곳이다. 여기에는 원목의 테이블의 태고는 청산유수의 낙조를 상상케 하고 있으며 여기에 나온 전통녹차들은 순수 자연에서 채취한 것으로 우전, 세작, 중작, 말차, 쌍화차, 대추차, 매실차, 솔바람차, 모과차, 오미자차, 수정과, 감주 등의 향기가 실내의 온화함을 10여 년의 세월 속에서도 끊임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제 막 개업한 '달만 생각한다'의 전통찻집 「달새」는 고향을 두고 온 사람이면 고향을 생각나게 하는 어스레한 골목 어귀에 초가삼간 초롱불은 길을 밝히고, 오래된 나무판 대문 사이로 현대인의 만남의 장소로 이용하고 있다. 실내의 물 흐르는 소리와 막 잠에서 깬 잉꼬새의 노랫소리는 삭막한 도시 공간의 매연, 소음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향기 그윽한 작설차, 매향 유자차, 모과차, 국화차, 치커리차, 감잎차, 식혜, 영지차, 생강차, 둥글레차, 오미자차, 두충차, 수정과, 대추차, 쌍화차 등은 현대인들의 스태미나에 효용이 있으며, 머리를 맑게 하고 정신건강에 좋다고 한다.

인사동은 현대도시에서 유일하게 새소리를 들으며 차를 마실 수 있는 곳으로 문명에 찌든 현대인들에게 가장 자연을 영위케 하는 명소이다. 새들의 합창과 물레방아 물 떨어지는 소리는 소나타의 환상곡을 연상케 하고 있으며, 창가에 흐르는 물의 모양은 찾는 이의 향수를 생각나게 하고 있으며, 입가에 작설차의 향기를 품어대기도 하는 것이다. 예술인들의 쉼터인 이 곳은 전통 한방 차와 유과와 떡 등을 만들어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우리의 맛을 느끼게 하고 있다.

3. 90년대 인사동 변모와 실태

서울의 대표적 문화의 거리인 인사동의 정체성이 위태로워지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고미술상과 화랑이 모여 있는 데다 한옥풍의 건물들이 밀집해 한국문화와 서울의 전통 생활상을 느끼고 싶어하는 외국 관광객이 가장 즐겨 찾는 이곳이 최근 들어 점차 변질되고 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선 안국동 로터리에서 인사동으로 들어가는 입구 언저리에서부터 요즘 울긋불긋한 치장은 한 피자 집과 제과점이 들어서면서 서울의 대표적 전통문화 거리의 인상은 구겨지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인사동 골목에는 여전히 고화방이 즐비하게 있고 골동상, 전통찻집, 고서집, 필방, 크고 작은 화랑들이 전래미술의 거리 특성을 느낄 수 있지만 골목 안쪽으로 조금 들어서면 한식을 전문으로 하는 밥집들과 사무용 고층 빌딩까지 촘촘히 들어서고 있어서 인사동의 인사동다운 모습이 잘 유지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런데, 최근 불황의 여파가 밀려들면서 관훈동, 인사동 일대 화랑들이 하나 둘씩 문을 닫고, 대신 업종을 바꾸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어서 미술의 거리 인사동의 정체성마저 찾기 어렵게 되고 있어 우리의 마음은 더욱 황량해진다. 이 지역의 중심인 인사동 네거리의 화랑들조차 한 곳은 은행으로 다른 한 곳은 신세대풍 제과점으로 탈바꿈하고 있다는 것은 사태의 심각성을 말해 주고 있다. 근처의 한 화랑은 찻집으로 변했으며 계약 만료로 곧 폐쇄될 화랑도 적지 않다고 한다.

화랑의 폐업이 이렇듯 많아진다는 것 자체가 걱정스러운 것은 물론이다. 아무리 불황이 심하기로 우리가 문화예술을 등지고 살만큼 어려워져서는 곤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더욱 우려하는 것은 화랑의 폐업으로 대신 미술과 관련 없는 유흥업소나 사무실이 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지 않아도 거리주변은 수익성이 좋은 음식점이나 술집의 증가로 문화거리의 위상이 위태로워진 지 오래다.

그리고, 지금껏 남아있던 한옥들이 차츰 헐리고 콘크리트 슬라브의 고층 빌딩이 점위 해 들어오고 있어서 비명을 울린지도 꽤 오래 되었다. 이제 인사동의 정체성 자체를 지키기 어렵게 된다면 이는 역사문화 도시인 서울의 황폐화이며 문화국으로써의 한국의 이미지는 없을 것이다.

이 작은 전통거리, 서울의 숨구멍 같은 문화 공간 하나 유지할 줄 모르는 우리라면 정말 장래가 없다. 우리 자신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를 살리기 위해서는 인사동을 제대로 지키는 의지가 발휘되었으면 한다.

오늘날, 90년대 말로 접어든 인사동의 화랑들은 어려워진 경제여파로 하나 둘, 축소 또는 폐관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가 ? 젊은 작가들이 꼭 한번 거쳐가길 원하는 명문의 갤러리들이 없어진다는 것은 문화의 공간이 줄어들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나마 서울의 인사동은 예술 최고의 명소이자 20∼40년대 미술가들의 등용문으로써 활동무대로 자리를 잡고 있는 곳이다. 그러나, 축소 및 폐관되는 현실을 볼 때마다, 문화의 퇴색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

그래도, 한국미술의 메카로 불리며 수많은 작가들을 발굴, 소개한 금호 갤러리, 인사동의 얼굴인 덕원 갤러리의 1층 전시장이 폐관되는 것이 그것이다. 여기에 금호 갤러리는 사간동으로 이동하여 그 맥을 이어갈 거이며, 그 외 크고 작은 미술관들은 대기업의 영리 추구로 인한 잠식으로 파행적 운행을 하고 있는 실정이며, 이에 따른 여파는 인사동 문화의 토속적 아름다움을 사라지게 하고 있어, 문화공간의 운영난을 심각하게 하고 있다, 문화란 없애긴 쉬워도 쌓아올리려면 대단히 힘든데, 사무실 또는 기타 상업, 유흥업소, 단란주점, 노래방, 제과점, 피자점, 골프점, 옷가게, 양복점, 대형 커피점, 다른 거리와 다름없는 유사한 거리로 바뀐 모습들이 예술인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인사동은 오로지 문화의 거리로 지정하여 운영해야 한다. 민주화이기 때문에 민원이 들어온다 해서 문화의 보존을 하지 않고, 없애거나, 희석시키는 일은 전통문화 발전에 역행하는 것이다. 전통문화는 곧, 이 나라의 정신 문화와 일치하므로, 외국 관광객의 한국을 이해하기 위한 학습장으로 그 중요함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 97년 현재 주요 문화 공간

대관갤러리 및 화랑 64

기타 표구화랑 및 전시하는 곳 72

전통찻집 11

전통음식점 12

고미술집 115

전통공예 21

전통도예 29

필방 및 지물포 43

화방 2

액자 14

고문서(책) 5

전통옷 4



4. 인사동 활성화를 위한 제언

인사동에 대한 애착과 사랑은 이제 지역 주민이나 관련 업체를 뛰어넘어 서울시민 혹은 문화를 사랑하는 한 국민의 가슴속에 자리잡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인사동 거리가 그만큼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문화의 메카로 기능 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이 지역은 율곡 이이 선생의 생가와 박영효, 민영환 선생의 유적과 함께 3·1 운동의 근원지로써 골목마다 역사의 유적과 향기가 스며있는 서울에서는 거의 유일한 문화 공간이라 생각된다. 이것은 또한 지역 주민들의 인사동에 대한 애착은 바로 이러한 전통에의 자부심과 사명감에서 생성된 것이며 이것이 인사동을 전통문화의 거리로 지정, 활동할 수 있는 곳으로도 적합하다.

이것은 우리의 문화적 의미를 보다 실체화하여 국민의 정신적 철학이 숨쉬고 있는 곳이어서 더욱 그 책임감을 갖고 보존, 또한 특수 지역으로 외국인이나 관광객들이 민족예술의 학습관으로 꼭 들러 이곳을 보지 않고는 한국을 이야기할 수 없도록 조성해야 할 것이다.

인사동의 바람직한 형태의 보존과 개발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정부의 문화정책의 수위에

따라 인사동이 서울의 얼굴이 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한국의 얼굴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인사동을 소중한 문화 자산으로 유지, 발전시킬 수 있는 장·단기 계획을 수립하고 추진해 나아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파리의 보부르 거리나 뉴욕의 소호 거리 같이 서울을 상징하는 세계의 문화적 명소로서의 거리를 만드는 것이 결코 힘든 일만은 아닐 것이다. 이미 인사동 거리는 충분할 정도의 유·무형의 자산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1997 문화유산의 해를 맞이하여 인사동 문화의 활성화를 위한 기초적 단계로 추진하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 문화유산의 해에 걸맞은 전통 문화 축제 개최

● 제3회 미술 축제

● 제10회 관훈/인사동 축제

● 인사동길 가로등 교체(메탈-나트륨)

● 안국 로터리 가각녹지 조성(철쭉 및 수목)

● 문화단체 운영 지원 : 고미술협회, 미술협회, 화랑협회, 문화보존회……

● 인사동길 전통업소 간판 특색 있게 정비

● 관광상품 개발, 인사동 안내책자 발간(그림 엽서 포함)

● 판매수익 사업 전개

● 인근 사기업, 공공기관을 주차공간으로 활용 협의(대성산업, 풍문여고 운동장, 교동 초등학교 운동장)

이러한 사업이 추진되고 있으며 앞으로 더 많은 사업이 요구되고 있는 현실이다. 이것들은 점차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기에 우선적으로 기술한 것이다.

그 다음 단계로 실시되어야 할 사업은 인사동 거리를 보다 낳은 환경과 민족의 문화거리로서, 역할을 다 할 수 있도록 추진되어야 한다.

● 탑골공원 뒤 낙원상가 앞 쓰레기 소각장 폐쇄 (전용주차장, 관광객 및 방문차)

● 인사동길 차 없는 거리 (토요일, 일요일), 축제의 거리 조성

● 건축물 한국이미지 설계 (신축, 허가, 구건물 개축 시)

● 가급적 문화 사업 및 전통 상업 유도

● 멀티비전을 설치(인사동 입구)하여 문화행사나 문화 프로그램 소개

● 문화예술인들 놀이마당 설치(수시 공연)

● 대형 건물의 의무적 문화공간 설치(평당 기준의 1할)

● 전통 특산물 시판

5. 21C를 향한 문화 활성화를 위한 전망

21세기 한국미술의 위상정립과 국제 문화 교류에 선두적 사명을 다하고 있는 화랑, 미술관, 갤러리는 한국미술의 국제화의 대응과 미술문화의 새로운 시대를 가져오고자 다각적으로, 장르별, 테마기획 및 실험적 모색전이 열리고 있으며, 개인전, 작가 그룹전 등을 소개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미술문화의 뿌리와 화랑의 형성도 단순한 판매 전략으로만 끝나는 것보다 문화의 장으로 위치를 다해야 할 때이다. 한 나라의 미술 문화의 역사적 사명 아래 시대적 정신대변으로 조명과 테마적 방법론은 제시해야 하며 미래주의적, 실험적 발표 또는 기획에 적극 지원을 아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야 비로소 살아 있는 작가 발굴과 한국 미술의 위상과 미술문화의 개발이 미래의 역사적 장으로 이루어질 수 있으며 국제화시대에 한국 미술문화의 위상 정립을 굳히게 될 것이다. 세계는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고 있으며, 한국의 산업경제 또한 세계 질서 속에 예속되어 있다. 이러한 세계 흐름 속에 새로운 이벤트의 형성과 축제의 거리가 문화가치를 누릴 수 있을 때, 세계성에 고리를 찾을 수 있다. 그래야만 국제화 속의 국가 경쟁력에서 이겨낼 수 있는 것이다. 미술문화 역시 문화가 형성하는 것은 인류의 시작과 생활터전에서부터 시작되고 오늘에 이르고 있듯이 문화는 곧 정신인 것이다.

정신적 문화가 형성되지 않고 경제가 바로 설 수 없다. 만약, 경제만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거품경제인 것이다. 철학적 정신 세계는 인식하고 있으며, 따라서 인습이나 품격, 형성까지도 인지해야 한다. 물질만능주의 시대에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정신문화의 정착이 필요하다. 유구한 전통적 유교문화 사상과 예속된 정신문화는 오늘날 서구 물질문화에 침해당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것은 내면의 정신적 철학이 없고, 서구 사회의 외형적 묘목만을 모방하여 추구해온 흐름과 일치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주관이 없는 타의 반, 자의 반 눈치만 보면서 무사안일주의 사고로 우리를 모르고 있는 현실이다. 그래서 쉽게 지배당하고 쉽게 포기하는 습성에 이르고 있다.

이것은 국가 정책으로, 문화수용은 좀더 미래주의적으로 50∼100년 앞을 보고 미래를 연구해 접목을 시킬 필요가 있다고 본다. 오늘날 왜 우리 문화가 혼돈 상태인가를 지난 몇 년간 다른 나라를 보고 느낀 것이 있다. 단편적이긴 하지만 한 나라의 특징은 첫눈에 느낄 수 있는 미학적 철학이 있어야 한다.

러시아 연방이나 미국, 유럽, 동남아 등은 그 나라의 특징이 살아 있으며 또한 그 특징을 보면 그 나라의 문화의 저력을 알 수 있으며 예술적 가치를 느끼게 된다. 도시의 공간 예술품들, 건축물의 인간화, 지하철 입구의 공원화, 도로의 장기적 계획, 건축물의 예술화, 장식화, 민족의 혼 등의 것은 각국 나라의 문화를 잘 이야기해 주고 있다.

물론, 세계 도시가 외형적으로 다 같을 순 없지만 우리나라의 특징을 살릴 수 있는 소재는 얼마든지 많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경우는 특징이 없는 것, 외형적 문화 건설은 웬일인가 ? 이러한 것도 한 나라의 민족긍지의 미술 문화가 정신적 문화로 정착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라도 국제적 통합, 문화, 경제 블록에서 우리는 하루빨리 국민적 계몽이 일어나야 한다. 얼마 안 가서 외국의 문화, 가치관, 경제, 정치, 교육까지도 밀려오는 시점에 와 있을 것이다. 여기에 밀리면 이제는 더 이상 헤어날 수 없는 낙오자가 되는 것이다. 유구한 전통문화와 우리의 저력을 국제적 위상에 올려야 한다. 감히 한국을 쉽게 넘보지 못하도록 말이다. 경제에 성공했다고 해서 그것이 위대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정신 문화 없이 이루어질 수 없으며,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마는 부패 된 현실 속으로 빠져들고 있는 것이다. 신한국 창조에 국민 모두가 책임을 지고 같이 일어나 근면한 일터에서 생활의 낙을 찾을 수 있도록 정부가 앞장서야 하고 따라서 국민 운동이 건전한 사회문화 정착에 동참해 나아가야 할 때, 비로소 한 나라의 문화가 정착하게 되고 뿌리 있는 전통 사회가 지속될 것이다.

요즘 들어 기성세대가 신세대에 침해당하고 버림받는 경우가 있다고 본다. 그것은 문화 정책의 가치 혼란 속에 있으며 무방비 상태로 방치하다 보니 오늘날 개인주의 성향과 이기심만 늘어가고 있는 것이 바로 현실이다. 지난 9월초 인도네시아에서 발롱댄싱(민속가극)을 본 일이 있다. 이 가극의 내용은 선과 악을 이야기하고 있다. 조상은 선도 악도 다 같은 그들의 조상으로 존중한다는 것이다. 세상에는 완전한 승자가 없으며 또, 완전한 패자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두 신을 다 믿고 항상 제를 올리는 것을 사회 현실에서 직접 보았다. 선만을 존중하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문화를 갖고 있었다. 집집마다 사원을 만들어 하루에 3번식 제를 올리며 사는 이유는 무엇인가 생각해 볼 때, 다시 한번 이기심만 팽배한 우리 현실을 돌이켜보게 하고 있다.

우리나라보다 경제적으로 뒤져 있기는 하지만 정신문화에서 많은 교훈을 주고 있는 나라인 것만은 틀림이 없다. 국제화시대, 우리도 이젠 개인적 이기주의나 사적인 우월주의 내지는 권위주의를 청산하고 인간 본연의 마음으로 다 같이 힘과 정성을 다해야 할 것이며, 한가지의 미술문화 정착만이 꼭 모든 것을 이루는 것은 아닌 것처럼 국민 각자의 건전한 정신문화 정착과 한국 문화의 시대적 정립에 박차를 다해야 하며, 세계적 위치에서 한 국민의 진정한 질서와 국가 위상을 심어 보자는 것이 곧 산업 발전에 미래가 있는 것이고 고급 문화의 정착인 것이다. 그래서 한 분야, 미술 문화의 정신적 위치는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운동으로 국민정서에 부흥코자 노력을 다하고 화랑가마다 문화공간을 장기적 문화조명의 터전으로 시대 미술 문화를 인물이나 테마적, 실험적 작품을 새로운 각도에서 심층분석, 조명하여 국가의 사명과 예술의 진보적 역할을 다해야 한다.

이것은 미술문화의 새로운 터전이요, 국제시장에서 한국의 미술, 한국의 작가를 이야기할 수 있게 되며 또한 한국 문화를 통해 한국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예술가는 문화 역사에 산 증인으로 한 시대 한 나라의 흐름을 현실적인 시각으로 조명하는 역사가이기도 하다. 올바른 발굴과 폭넓은 국제교류는 작가의 내실을 구축하고 있지만, 세계 여러 나라와 어깨를 같이 한다는 위상 정립이기도 하다.

따라서, 미술문화의 선진발전과 한국미술의 위상정립이 우선적으로 시급하며 화랑, 미술관이 단순 대관 위주의 미술관 운영보다는 연구하는 미술관으로 좋은 작가를 발굴, 양성하는 또 다른 영역을 함께 이끌어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끝으로, 한국 미술의 저변 확대 조명으로 국제 미술문화와 수평적 교류 증대에 아낌없는 노력을 다같이 경주해야 하며 작가들의 끊임없는 노력과 경제 활성과 미술관의 새로운 각오가 그 열쇠를 풀 수 있을 것으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