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계에 바란다 / 연극

연극인들의 의욕적인 외침이 들리기를…




이태주 연극평론가

동숭동 거리를 거닐 때마다 요즘 나를 괴롭히는 생각은 '왜 연극을 해야 하는가 ?'라는 명제이다. 좋은 연극을 만들고자 하는 진지한 의욕과 성실한 노력이 엿보이지 않고 ,오로지 연극 장사에만 열을 올리면서 조잡한 공연을 양산해 내는 상황이 우리 연극을 어느새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극에 뜻을 둔 예술가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물론 고독하고 순수한 창조적 소수는 남아 있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너무나 허약해서 문화적 공해와 소음을 해치고 우리 귀에 와 닿지 않고 있다. 한때 소극장 무대에서 연극 실험의 깃발을 내걸던 의욕적인 야심파들은 어디로 갔는지, 이들의 거친 숨결과 외침을 지금 들을 수 없는 것이 유감이요 슬픔이다. 우수한 희곡 작품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연출가들과 제작자들은 의기소침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배우들은 신나는 공연 무대가 없을 바에는 영화나 텔레비전에 안주하려는 타산을 할 것이다. 극평가들은 수준 이하의 작품들 앞에서 비판하고 경고하고 나무라는 글을 써봤자 개선될 기미가 보이질 않으니 적당히 얼버무리는 평필을 휘두르고 있을 것이다. 부유하는 관객들은 반나체로 손짓하는 포스터를 보고, 또는 삐끼의 안내를 받아 어둠침침한 소극장으로 인도되지만 쇼 코미디 같은 무대를 보고 이것도 연극인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불만스럽게 퇴장하거나 아니면 재미있다고 하면서 약물에 취한 듯한 몽롱한 눈짓으로 바깥세상을 쳐다 볼 것이다.

지금 우리 연극은 함께 무너져 내리고 있는 느낌이 든다. 너무나 흥행 위주에다, 너무나 상업적이다. 유치하고, 자극적이다. 심원한 인생의 울림이 없는 듯하다. 흥분도 감동도 느낄 수 없다. 연극은 우리들의 잠들기 쉬운 '눈'을 부릅뜨게 해주지 않고 있다. 연극은 새로워진 그 눈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도록 해주지 않고 있다. 연극은 우리의 삶을 인식하고, 우리의 아이덴티티를 찾는 일에도 도움을 못 주고 있다. 연극은 우리들 생활 속에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무용지물로 처리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연극이 이 사회에 존재해야 되는 이유가 연극이 우리 문화예술의 원동력이 되고 문화형성력이 되는 이유가 소멸되고 있는 위기에 우리는 직면하고 있다. 이 문제를 우리는 연극의식의 쇠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연극을 왜 만들어야 하고, 연극을 왜 보아야 하는지, 그 원초적 충동과 자세와 철학을 포함한 연극의식이 극도로 퇴색한 한해가 1996년 연극계였다. 1996년 말 타임지에서 특집한 해방 50년의 아시아 기사에서 세계적인 이목을 집중시킨 중국, 일본, 인도의 예술가는 소개하면서 한극은 아무도 소개하지 않고 있는 문화적 현실에 대해서 우리는 겸손하게 반성할 수밖에 없었던 쓰라린 1996년의 문화예술계였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개선하고 ,침체된 연극계를 활성화할 것인가, 이 짧은 지면에서는 한두 가지만을 열거할 수박에 없다. 무엇보다도 먼저 문화지원예산을 늘려야한다. 1996년 문예진흥원은 약 3천 건의 지원신청에 대해서 약 1천 건을 지원해 주었다고 한다. 문예진흥원은 순수 문화예술 창작 지원 사업 이외의 제반 지출을 억제하고, 골고루 나눠주는 다원화 지원 방식을 지양하면서 집중 지원 방식을 병행했으면 한다. 특히 다음 세대의 유능한 예술가들을 개발하고 육성하는 일에 중점을 두었으면 하고, 문화의 국제화를 위한 과감한 지원책도 강구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지원 성과에 대한 객관적인 고찰과 평가가 뒤따르면 좋을 것이다.

창작극의 활성화를 위한 지속적인 지원은 바람직하지만, 그 동안의 사업 실적을 평가해서 그 방법을 점진적으로 개선했으면 한다. 극작가, 연출가, 극평가들로 구성된 집단창작위원회에서 작품의 위촉, 창작과정, 공연으로의 발전에 이르기까지 전반적인 문제를 담당하는 통합적인 지원사업을 제창한다. 몇 년 전에 국립극단에서는 창작 활성화 기금을 마련해서 위와 비슷한 일을 시작하다가 중지한 일이 있다. 이런 일은 20년 정도 밀고 나가야 결과가 나타나는 장기 지원 프로그램의 성격이 되어야 한다. 연극의 위기는 창작극 쇠퇴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