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 연극의 활성화를 기약한 96 수원 국제 연극제
이재명 / 명지대 교수, 연극평론가
지난 8월 제1회 96 수원성 국제연극제가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수원성 축조 200주년을 기념하는 문화행사의 하나로 열린 이번 수원성 국제연극제는 지난 8월 19일부터 25일까지 수원 화서문 특설무대와 수원시 일대에서 우리나라와 미국, 러시아, 일본, 중국 등의 국가에서 참가한 유수한 극단의 다양한 공연들이 화려하게 펼쳐졌다. 이번 연극제에는 미국의 '오마하 매직 극장'과 러시아의 '유고자빠드' 극단, 일본의 '신쥬쿠 료산바쿠', 중국의 '길림성 경극단'과 우리나라 수원의 극단 '성'이 참여한 공식 공연과, 에디와 패트릭의 재즈 공연, 상징물거리극, 최복호 환경 패션쇼, 유진규 마임, 내관 조명 퍼포먼스, 백현순 한국무용 등으로 이뤄진 전야제 공연 등이 처음으로 시민들에게 개방된 화서문 특설무대에서 다채롭게 공연되었다.
또한 수원역전 광장과 중앙극장, 장안공원, 한화백화점 등 수원시내 여러 곳을 누비면서 판토마임과 무용, 퍼포먼스, 인형극, 실내악 등이 거리공연이라는 형태로 관객들을 찾아다니며 공연되었다. 사흘 동안 수원시 일대에서 펼쳐진 거리공연의 경우는 관객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겠지만, 처음으로 시도되는 거리공연에 수많은 수원시민들이 발길을 멈추고 지켜보았으며, 사흘간의 리허설 공연과 하루 동안의 전야제, 그리고 본공연 사흘 모두 일주일 동안 2만 이상을 헤아리는 관객들이 화서문 특별무대 앞을 꽉 메웠다. 이번 연극제에는 본격적인 거리공연이나 야외극을 볼 기회가 거의 없었던 수원시민들에게는 특별한 예술적 경험의 장이 되었다. 또한 전 공연이 무료로 공연될 이번 국제연극제에서는 서울을 비롯한 각지에서 공연을 보러 수원을 찾은 연극계 인사들과 관계자들 뿐만 아니라, 수원시민들의 열렬한 호응과 참여속에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 글에서는 지난 8월 23일부터 25일까지 사흘간 진행된 공식 참가작 다섯 작품에 대한 개별적인 단평과 함께 연극제 전반에 대한 성과와 문제점을 간략히 검토해 보고자 한다. 23일에는 중국 길림성 경극단의 경극 공연과 일본 마임이스트 오꾸다의 마임, 그리고 일본 신쥬쿠 료산바쿠의 공연이 있었다.
1964년에 창단되어 40년 이상의 경력을 가진 길림성 경극단은 경극 특유의 박력있는 동작과 원색의 분장과 의상, 고유한 연극적 관습에 입각한 연기술을 마음껏 보여 주었다. 이들이 보여준 작품은「갈림길」과 「옥반지를 줍다」. 그리고 유명한 고전 작품「서유기」중의「용궁을 들썩하게 하다」였다. 특별히 우리 관객들의 언어 장애를 최소화하기 위해 해학적이고 격렬한 무술격투 장면 중심의 무술동작극을 공연하여 큰 호응을 얻어냈다. 이중에서 「갈림길」이라는 작품은 어둠 속에서 두 남자가 서로 상대방을 오인하고 격투를 벌이면서 아슬아슬한 장면을 연출하였는데, 피터 쉐퍼의 희극「블랙 코미디」를 연상시켰다.
중국 극단 공연과 일본 극단 공연 사이에 막간극으로 일본 마임이스트 오꾸다의 「비누방울」이 공연되었다. 다양한 색깔과 크기의 비누방울을 만들어 환상적인 장면을 연출하여 어린 관객들로부터 열광적인 갈채를 받았다. 다음날 공연한 우리 마임이스트 이두성의 작품「새·새·새」역시 몸짓언어가 빚어내는 힘차고 섬세한 표현을 맛볼 수 있었다. 특별히 무대공간을 탁 트인 성벽 위에 설정하여 하늘을 나는 새의 힘찬 몸짓을 효과적으로 나타냈다.
1987년 재일교포 2세 김수진을 대표로 도쿄에서 결성된 극단 '신쥬쿠 료산바쿠'는 일본에서 가장 다이나믹하게 연극활동을 펼치고 있는 젊은 극단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들이 내한공연을 갖게 된 것은 1989년「천년의 고독」과 1993년「인어 전설」에 이어 세 번째이다.「인어전설」은 서울 여의도 한강변에 대형 텐트를 설치하고 공연하여 신선한 충격을 안겨준 바 있다. 이때 연출자 김수진은 평양의 대동강변에서 이 작품을 공연함으로써 연극 공연을 통한 통일 분위기를 조성하고 싶다는 다부진 포부를 밝힌바 있었다. 이들이 공연한 「내 사랑 메디아」는 극의 외형상 앞서 공연한 「인어 전설」과 유사한 점이 많았다. 떠돌이 장님 부부가 목적지 없는 여행을 하면서 어떤 이야기를 들려 주는데, 그 이야기는 운동을 통해 성공하려는 젊은이와 그 주변 인물들에 관한 것이다.「인어 전설」에서 권투 선수가 중심 인물이었다면, 이 작품에서는 달리기 선수가 나와 인간다운 삶을 보장받기 위해 악전고투를 벌인다. 또한 이들 주변의 여인들은 종이꽃 만들기, 술집 여급, 나아가 매춘업을 전전하면서 '카드(외국인 등록증)'에 묶여 살 수 밖에 없는 소외된 계층임을 보여준다. 이들의 이야기는 배타적인 일본 사회에서 어렵게 적응해 나가는 재일교포들의 고통에 찬 삶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내 사랑 메디아」공연은 성벽 옆길을 달린 장면이나, 화서문의 윗층과 옆계단 등의 환경을 아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관객들의 열띤 호응을 얻어낸 바 있다.
24일에는 미국 현대 연극을 선도하던 여성 극작가 미건 테리가 이끄는 '오마하 매직 극장O.M.T'의 「별행로 달 정거장 Star Path Moon STOP」과 막간극으로 이두성의 마임「새·새·새」공연, 그리고 길림성 극단의 경극 재공연이 있었다.
1968년 설립된 O.M.T는 비영리적인 실험연극 공연을 위주로 하면서, 대중적이면서 교육적인 활동을 펼쳐왔다. 이번에 공연한 「별행로 달 정거장」은 인류 역사상 변함없이 반복되어 온 주제인 안락한 보금자리를 찾기 위한 '탐색'과 '이동'문제를 다루었다. 특별히 이번 공연에서는 현대 대중적인 미국인의 삶 가운데에서도 풍요와 진보와 물질 문명의 혜택을 제대로 누리지 못한 채 뿌리 뽑힌 자들의 소외현상을 입체적으로 표현해냈다. 급속한 환경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소시민과 예견하기 힘든 자연재해 속에서 갈피를 찾지 못하는 농민들의 삶이 다양한 악기 연주와 슬라이드 투사 등의 도움을 얻어 전개되었다. 이번 공연은 우리 마당극과 유사한 형태의 실험극으로, 언어소통의 문제만 해결되었더라면 우리 관객들에게도 더 많은 공감대를 불러 일으킬 수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전날 공연의 성과에 힘입어 많은 관객이 찾아왔으나 이 작품의 경우 어린 관객들의 무질서와 언어 소통의 문제 때문에 공연 분위기가 산만하였다.
좀처럼 멈출 줄 모르는 부슬비가 내리는 가운데 진행된 마지막 날엔 러시아의 '유고자빠드' 극단의「로미오와 줄리엣」, 수원의 극단 '성'이 준비한「혜경궁 홍씨」가 공연되었다. 1977년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에서 설립된 '유고자빠드'극단은 1985년 정부로부터 '국민극단'이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1990년부터는 모스크바 시가 인정하는 '모스크바 시립극단'이 되었다. 이 극단은 1990년 우리나라에서 「햄릿」공연을 통해 셰익스피어 연극의 러시아적 재해석을 시도하여 호평을 받은 바 있다. 이번에 공연한 「로미오와 줄리엣」도 원작의 틀을 깨지 않으면서도 극단 나름의 리듬과 템포감을 살려 활력있는 무대를 창조해냈다.
활기 넘치는 무대와 화려한 몸놀림, 열정적이면서도 다정다감한 화술 등은 언어의 장벽을 넘어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그리하여 비가 내리는 어수선한 분위기와 전혀 소통되지 않는 언어적 한계를 넘어서, 연기자와 관객이 함께 호흡을 맞춘 공연이었다. 그러나 3시간이 소요되는 작품을 연극제 스케줄에 맞추기 위해 1시간 20분 정도로 조정하다 보니 전체를 감상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았다.
연극제의 대미를 장식한 작품은 수원 토박이 극단 '성'이 공연한 「혜경궁 홍씨」였다. 1983년 창단되어 창작극과 번역극 1백여 편을 끊임없이 공연해온 극단 '성'은 이번 '96 수원성 국제연극제'의 실질 주관 단체로서, 자체 공연뿐만 아니라 전체 기획, 홍보, 진행을 도맡았다. 작품 「혜경궁 홍씨」는 정조 임금의 수원성 축조 사업과 연관이 있는 사도세자의 파란만장한 삶과 죽음을 소재로 한 작품이었다. 노론과 소론의 대립 속에 사도세자가 벌인 기이한 행각과 이를 지켜보며 애태우는 혜경궁 홍씨의 가슴앓이를 극화하였다. 그러나 이 작품은 비가 오는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정확하게 전달되지 않은 대사, 배우들의 산만한 동선 등의 문제 때문에 큰 감동을 주기 어려웠다.
이번 국제연극제가 거둔 성과로는, 먼저 서울이 아닌 지방도시에서 국제적인 큰 규모의 행사를 대과없이 잘 치루어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특별히 야외극 공연으로만 치루어지는 어려움을 잘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였고, 또한 관객 동원에도 성공적이었다는 성과를 거두었다. 수준 높은 연극을 질서 있게 감상하는 수원시민들의 감상 태도 역시 앞으로 이와 같은 국제연극제가 계속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이번 연극제는 많은 성과를 거둠과 동시에, 앞으로 해결해야 할 몇가지 문제점도 안게 되었다. 먼저 외국 극단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여서인지 이번 연극제가 내건 '자연 인간 성'이라는 주제와 부합되는 공연이 많지 않았다. 외국 극단의 원어 공연에 대한 대비가 없어 순수 일반 관객들이 감상하기에는 좀 벅찬 느낌이었다. 또한 야외극 공연에서 반드시 따르게 되는 음향 문제, 특히 대사 전달의 문제를 기술적으로 처리하는 방법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밖에 공연 기간 및 공연 장소에 대한 배려, 무료 공연 방침의 문제 등을 슬기롭게 해결해야 할 것이다.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정책적인 지원 문제 또한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서울의 직접적인 영향권 안에 있어 자생적인 문화예술 활동이 지지부진할 수 있는 지방도시에서 '96 수원성 국제연극제'를 훌륭하게 치루어냈다는 사실만으로도 크게 축하할 만한 일이다. 격년제로 치루어질 '수원성 국제연극제'가 춘천에서 벌어지는 인형극축제와 마임 페스티벌과 함께 대표적인 국제 연극행사로 자리잡게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