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고도, 경주를 꿈꾸며
남인기 / 국립중앙도서관 지원협력부장
■ 고도 로마의 보존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듯이 로마는 일찍부터 군용도로를 건설했고 그 이름은 지금까지 쓰이고 있다. 예를 들면 남쪽으로 아파아길, 라티나길, 북쪽으로는 카시아길, 풀라미니아길, 아우렐리아길, 동쪽으로는 살라리아길, 아벤티노길, 서쪽으로는 오스티아길이 제각기 뻗어 있는데, 모두가 로마 공화정의 전성기인 BC312년에서 BC220년 사이에 건설된 것들이다. 이 도로들은 일직선 이차선 규모의 도로로 가로 세로 30센티미터의 정방형 돌로 포장하여 건설한 것이었다.
지금도 로마 정치권력의 중심지였던 포로 로마노(로마광장)에서는 원로원 등의 건물 잔해와 함께 고대 로마 도로의 원형을 볼 수 있다. 로마 중심부를 흐르는 테베레 강 위에는 2천년 전에 건축한 교각들이 아직도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BC753년 레물루스 형제가 바구니에 담겨 떠내려왔다는 티브리나 섬도 고적의 하나로 남아 있다. 고대 로마 문화유적의 기둥은 뭐니뭐니해도 아우렐리우스 성벽이다. 성벽은 장장 15킬로미터에 이르는데, 이 성벽을 중심으로 2천5백년 전의 문화 유적들이 오늘날까지 현존하고 있다.
지금도 중심 로마의 어느 곳이나 6미터 정도 파내려가면 로마시대 때의 도로나 성터, 건물지 등 유적들을 발견할 수 있다.
소위 원로마라고도 불리는 이 유적들은 그 장구한 세월 동안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던 것인데, 그 먼지의 퇴적층이 무려 6미터나 된다고 한다. 고도 로마의 남쪽 방향으로는 카타콤베라는 지하 2.30미터 깊이의 무덤군이 4백 킬로미터 연장길이로 얽혀 있는데 이는 로마인의 공동묘지이기도 했지만 탄압받던 시대 때의 가톨릭 교도들의 지하활동 및 피난처로서 더 유명하다. 수많은 가톨릭 교도들이 처형되어 그 곳에 묻혔다.
이러한 고도 로마는 10년 전에 가보았을 때나 한달 전에 가 보았을 때나 언제나 그 모습 그대로 그 자리에 있다. 돌담 하나 교체하거나 복원하거나 신축한 것이 없다. 고대로부터 존재하는 원형 그대로 언제나 동일한 역사의 얼굴과 향취를 그대로 지니고 있다.
그래서 로마를 '영원의 도시 로마'라고 부르기도 한다. 심지어 시내버스의 색깔이나 테르미니역에서 베드로 성당까지 가는 버스 번호까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그러므로 로마는 언제나 같은 색깔, 같은 이미지를 풍긴다. 그렇다고 로마시 당국이나 국가가 로마를 방치하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가능한 한 옛 모습의 '고도 로마'를 유지하도록 유적 보존에 모든 행정력을 쏟는다. 무너질 염려가 있는 부분은 사전에 철저히 조사, 진단하여 유지적 차원의 보수를 시행한다. 로마의 문화유적 보존 정책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고도의 시가 안으로는 일정한 차량 외에는 통행이 금지되어 있고 한번 보수를 시작하면 철저한 고증과 고건축 기술을 동원하여 완벽할 때까지 출입을 금지한다.
또한 로마의 신문 방송도 고도의 유적보존에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감시하며 정부의 유적 보존 정책을 비판한다. 일례로 이탈리아의 대법원 건물에 대한 외벽 먼지 청소가 언론의 비판으로 중단된 사건만 보아도 이탈리아 국민들이 고도 풍치 유지에 얼마나 적극적인가를 알 수 있다. 테베레 강의 '천사의 다리'를 건너면 '천사의 성'이 있고 그 천사의 성과 나란히 하여 19세기 바로크양식의 7층 대리석 건물이 바로 이탈리아 대법원이다. 지난 80년대 로마의 모든 건물이 그러하듯이 이 대법원 건물도 외벽이 먼지와 매연으로 덮여 우중충하게 보였다. 시 당국은 대법원 건물로서의 위풍과 엄숙함을 나타내기 위해서 외벽을 깨끗이 청소하려 했다. 앞면을 닦아내고 측면을 씻어내고 있는 중에 「라 리퍼부리카」지를 비롯하여 신문·방송들이 일제히 비난을 퍼붓기 시작했다.
고도 로마의 고풍스러운 풍치와 경관을 해치는 외벽청소는 즉시 중지해야 한다는 것이 비판의 요지였다. 빗발치는 비난여론에 대법원은 청소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테베레 강변의 천사의 성과 베드로 성당과 나란히 서 있는 이탈리아 대법원의 건물은 앞쪽과 뒤쪽의 건물 색깔이 판이하게 다르다. 로마의 고색창연한 색깔은 오랜 시간의 지층과 풍우속에 형성되었으며 그러한 색깔이 로마다운 색깔임을 느낄 수 있게 한다.
이탈리아는 로마뿐 아니라 전국이 문화유적지이다. 남쪽 시칠리 섬에서부터 알프스의 베로나, 밀라노, 베네치아에 이르기까지 고대 로마의 문화유적, 중세 기독교의 건축물들, 르네상스시대의 문화유적들이 즐비하다.
유네스코는 세계 인류의 정수급 문화재를 전(全)인류적 차원에서 보존하기 위하여 세계문화 유산등록제를 1975년부터 실시하고 있다. 세계 각국의 문화재로 등록된 440여 건 가운데 2백여건이 고대 로마, 르네상스 문화 집중되어 있는 이탈리아의 문화재라는 사실은 이탈리아 문화유적의 인류문화사적 위상을 잘 말해 주고 있다.
고도 로마를 둘러싸고 있는 아우렐리우스 성벽과 더불어 볼게재 공원, 판피리 공원, 고대 로마시대 때부터 있어 왔던 왕궁 저택의 정원들이 수없이 산재해 있다. 또한 시내 곳곳에도 이탈리아 원주민이라 할 수 있는 에트루리안인들의 문화유적지가 공터 형태로 훼손없이 유지 보존되고 있다. 외곽 4차선의 준고속도로가 2차선으로 좁아지거나 우회도로로 변형되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은 물론 문화유적지 때문이다. 구 로마 중심가에는 육교가 하나도 없다. 아무리 통행이 불편하다 해도 고도의 풍치를 해치면서까지 육교를 짓지는 않는다.
로마에는 소위 '밤의 문화'가 없다. 바티칸의 영향일 수도 있지만 그 흔한 디스코테크나 나이트클럽, 대형 맥주홀 같은 것도 없다.
이탈리아 와인을 곁들인 1, 2백년 된 맛좋은 스타게티집은 테베레 강변을 따라 줄 서 있어도 유흥가는 전혀 없다.
야경을 요란하게 하는 상업광고의 네온사인도 없다. 옥상의 대형 광고 설치도 고도풍치에 어긋나므로 금지한다. 구 로마 중심거리인 비아콘로티거리가 서울의 명동과 같은 거리임에도 규격화된 소형 간판 외에는 옥상간판도 없다. 1992년 처음으로 서울, 로마 직항노선을 개설한 대한항공 로마 지사도 중심부 건물 5층에 자리잡고 있지만 외부에 입간판 하나 설치하지 못하고 있다. 고도의 미관을 훼손하는 행위는 철저히 금지하는 것이 로마의 문화유적 보존정책이다.
구 로마의 볼게재 공원 핀초 언덕에서 내려다보는 시가의 황혼녘 광경은 한폭의 그림으로 시적이기까지 하다. 312년에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자리인 폰테 밀비오 다리를 건너고 있노라면 2천년 전의 로마 병사와 금방이라도 마주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 구 파리와 런던의 유적 보존
'구 파리'는 프랑스의 자존심이요, 상징이다. 루이 14세 이후부터 세계적 도시로 발전한 파리는 나폴레옹의 계획적인 도시개발로 오늘날의 고풍한 예술 도시로 조성되었다. 개선문을 중심으로 사통팔달로 포장된 대로가 뻗어 있고 세느 강변을 따라 고건물, 조각, 교각, 동상, 기념관 들이 아름다운 미관을 자랑하고 있다.
많은 문화재보호법이 있지만 특히 1962년 드골 정부 때 재정한 소위 '앙드레 말로' 법은 문화재 보존을 위한 강력한 장치이다. 역사적인 가로(街路)나 마을, 고고학적 매장물이 있는 지역은 이 법에 의하여 보호지역으로 지정, 보존하고 있다. 구 파리도 구 로마와 마찬가지로 도시 자체가 거대한 미술관이다. 시가의 풍치는 물론 건물의 높이, 양식까지 문화재위원회의 허가 없이는 변경하지 못한다.
영국에도 여러 종류의 문화재보호법이 제정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도 도시전원계획법이 가장 강력한 법이다. 첫째 건축상 또는 역사상 특별한 가치가 있는 건조물은 등록하여야 하며(현재 17만 건이 등록), 둘째 경관보존 지역, 그린벨트 지역, 역사적 건조물군을 보호하기 위하여 특정 '보존지구'로 지정할 수 있다.
'문화재 보호를 위한 신탁법인'을 두고 있는데 이는 국민 누구나 가입할 수 있는 민간단체로서 국내에 역사적인 중요 토지나 건조물 및 자연 경관지역을 기증받거나 또 구입하여 관리하는 조직이다. '문화재보호 신탁법인'에 가입하고 있는 회원은 15만이 넘으며 매년 2백 파운드(약 30만원)의 회비를 납부하면 누구나 회원이 될 수 있다. 현재 이 법인이 신탁관리하고 있는 문화재는 영국 전영토에 걸쳐 30만 헥타르(10억 평, 3천 제곱킬로미터) 2백 30여 개의 기념건조물이 있는데 디즈레일리 전수상 관저, 토마스 하디의 생가, 시인 칼라일, 워즈워드의 집, 처칠의 가옥 등이 포함되어 영원한 영국의 문화재로 보존, 관리되고 있다.
■ 고도 경주의 보존
문화유산은 한번 파과되면 다시 복원할 수 없다. 지난 9월 방한한 페데리코 마요즈 유네스코 사무총장은 '고속철도가 경주를 관통하게 되면 앞으로 경주가 세계문화유산지역으로 등록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언급했다.
그는 이집트 피라미드 지역과 페루 잉카유적을 그 예로 들었다. 이집트의 경우 피라미드 지역에 고속도로 건설안이 제시돼 경제성을 주장하는 측과 문화재 훼손을 이유로 반대하는 측의 찬반 논란이 한창일 대 자신이 무바라크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고급 차를 타고 피라미드를 관광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없다'고 취소를 제의하자 이를 받아들여 피라미드가 그대로 보존될 수 있었다고 한다. 페루 마추피추지역의 잉카유적의 경우에도 후지모리 대통령이 케이블카와 호텔 건립 계획을 밝혀 유네스코 문화유산 위원회가 세계의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마추피추지역을 인류문화유산에서 제외한다는 방침을 통고함으로써 그 개발 계획이 취소되었다고 한다.
그는 이어 '경주는 고도 보존이 비교적 양호한 유적도시이기 때문에 문화적 자부심을 지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경주의 중심부를 고속철도가 관통하는 것은 '문화적 폭거'라고 문화계에서는 비난하고 있다. 일본의 경우에도 고속철도인 신간선은 나라(奈良)의 주변도시인 오사카와 교토를 오갈 뿐 나라지방은 복선 전철을 깔아 운행하고 있다. 또 지난 1962년 나라 시 유적 부근에 전철 차고 건설 계획을 발표하자 전국적인 유적보존운동이 일어나 국가가 전지역을 국비로 사들여서 사적지로 지정한 일도 있다.
세계 각국의 고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의 아테네는 아크로폴리스 등 유적보호를 위하여 차의 도심 진입을 금하고 있고, 파리는 구 시가지와 고도의 풍치를 보존하기 위하여 신도시 라데퐁스를 별도로 건설하였다. 구 로마도 일찍부터 신 로마 EUR를 건설하여 주거지역을 도시 외곽으로 분리했다. 아테네든 로마든 파리든 선진국의 고도는 국가의 문화재 관계법에 의해 철저히 보존되고 있으며 국민도 이에 적극 호응한다. 구 파리는 프랑스의 자존심이고 자랑이듯이 로마나 아테네도 그 나라의 역사이고 정신이다.
파리의 세느 강 근방에 있는 노틀담 성당의 경우, 고유의 자연경관을 유지하기 위하여 5백 미터에 달하는 원둘레 안으로는 보존지역으로 지정되어 있어 주변 건조물은 물론 가로수 하나도 함부로 자르지 못하게 되어 있다.
구 파리 시가를 따라 비슷한 모양으로 늘어 서있는 주택가도 개, 증축은 물론 외벽을 칠하는 것조차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로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테베레 강변을 따라 원형 그대로 보존되고 있는 2천년 전의 문화유적은 물론, BC312년 경에 건설되어 현재까지 발굴이 안된 6백 킬로미터의 아피아 가로도 문화재관계법에 의해 철저히 보호되고 있다. 그곳 광활한 지역은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박물관으로 사소한 소나무 한 그루 배지 않고 원형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어떤가? 서대문의 독립문이 교통에 문제가 된다고 하여 옆으로 옮겨놓았다. 뿐만 아니라 남대문, 덕수궁의 주변경관이야 어찌되었든 간에 빌딩 숲으로 뒤덮어 놓았으며, 동대문 밑으로는 지하철이 통과하고 있다.
조선조 5백년의 수도 서울에 조선조의 고풍스런 모습은 고궁 정도를 제외하고는 남아 있지 않다. 정선의 진경 산수화는 인왕산 바위의 아름다움을 그리고 있다. 그 인왕산의 중간 허리에 관광도로를 건설하여 역사적 자연 풍치를 훼손시켰다. 설악산·한라산에도 관광 케이블카를 설치하려고 했다. 눈앞의 단기적인 개발 이익 때문에 훼손된 것이다.
고도 경주도 세계적 시각으로 보면 몇 개 남아 있지 않은 인류사적 문화유적지이다. 경주는 그 일대가 하나의 커다란 문화유산 현장이다. 지상뿐만 아니라 지하까지도 문화재의 보고로 남아 있다. 이러한 겨레의 자랑스런 유적지를 일시적인 개발 이익 때문에 고속전철을 지하로 통과하게 하려고 한다. 고도 경주는 역사도시로서 보존되고 가꾸어져야 하며 길이 후손에게 전수되도록 해야 한다. 어떠한 현대적 고층건물도 고도 경주의 풍치를 해쳐서는 안된다. 구 로마나 구 파리에서는 고색창연한 역사의 모습만 있지 성냥갑 같은 현대식 빌딩은 보이지 않는다. 그만큼 역사적 환경도 문화재로 보고 있는 것이다.
70년대 그 어려웠던 시대에도 보문단지 조성을 비롯하여 구 경주의 모습을 해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경주시민에게 사유권의 제한을 보상하는 차원에서도 국가는 경주의 외곽에 신 경주의 주거단지와 상업단지를 대대적으로 조성해야 할 것이다. 구 경주의 근처에 경마장 설치도 구 경주의 역사적 풍치를 보호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재고되어야 한다.
고도 경주에 대한 우리 국민의 인식도 바뀌어져야 한다. 경주는 관광도시도 아니고 개발도시도 아니다.
경주는 민족의 정기가 서려 있는 역사 도시이자 야외 박물관이며 우리의 산교육장이다. 교토가 일본의 품격이며 자랑인 것처럼, 장안이 중국의 오랜 역사의 상징물인 것처럼 경주는 우리의 정신이자 역사인 것이다.
로마를 찾는 순례객이나 관광객은 연간 3천만 명이 넘는다. 로마에 고속철도나 고층빌딩이있어서 관광객이 모여드는 것은 아니다. 오래된 로마 고도의 풍치와 역사의 향기를 맛보기 위하여 로마를 찾는 것이다. 구 로마의 거리를 걸으면 로마제국의 함성이 귀에 들리고 로마원로원들의 위풍당당한 모습이 로마시대 때의 돌포장 도로를 따라 걷는 모습이 눈에 선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마는 언제나 로마이도록 벽돌 하나 옮기거나 교체하지 않고 천년 그대로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일인당 국민소득이 1만 불을 달성하여 선진국에 진입한다고 한다. 그러나 국민소득 1만 불을 달성했다고 선진국이 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쿠웨이트, 사우디 같은 나라가 선진국일 수 없듯이 문화의 선진화가 되지 않으면 진정한 의미의 선진국이 될 수 없다. 만일 우리의 고도 경주를 천년의 고도로 보존하지 못하면 우리는 문화대국이 될 수 없다. 한번 훼손된 고도는 영원히 복원될 수 없기 때문에 목전의 이익에 급급해서 민족문화를 훼손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고도 경주의 보존은 문화대국 즉 선진국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지금 '역사 바로세우기' 와 '정통성의 확립'을 위하여 국민 전체가 진통을 겪고 있다. 역사 바로세우기와 정통성 확립은 정치 분야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문화에도 역사 바로세우기와 정통성 확립이 요구된다. '고도 경주'를 '영원한 고도 경주'로 가꾸어 나가는 것이 우리의 막중한 책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