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옹기 개발로 전통의 맥을 잇는다
- 충북 옥천 옹기제작 공장
이장섭 / 한국문화정책개발원 책임연구원
황순원의 「독짓는 늙은이」에서는 전통옹기 제작방법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반쯤 독을 지어 올려, 안은 조마구 밖은 부채마치로 맞두드리며 일변 발로는 틀을 돌리는 익은 솜씨만은……' 그러나 현재 이러한 방법으로 옹기를 제작하는 곳은 찾아보기 힘들다.
우리 음식사에 있어 장류 음식의 전통만큼이나 장독의 역사도 유구하다. 장독 또는 장단지, 항아리 따위의 질그릇과 오지그릇은 세간에서 옹기라고 부른다. 옹기는 저장음식의 종류와 용도에 따라 다양한 모양과 이름을 지닌다. 물론 음식 저장용 이외의 옹기로 만든 생활도구도 지역에 따라 여러 가지 서로 다른 명칭을 가지고 있다.
사기그릇이 식기였다면 옹기는 식품 저장용으로 주로 사용되었다. 그렇다고 식기나 조리용으로도 전혀 무관하지는 않았다. 설렁탕 한 그릇은 질그릇 뚝배기에 담아야 제맛이다. 비록 '뚝배기보다 장맛'이라 했지만, 된장찌개도 투박한 뚝배기에 끓여야 제격이다. 음식 맛은 양념과 손끝에서 나온다지만 담는 그릇과도 어울려야 한다. 특히 저장음식은 그 저장용기가 그 맛을 지속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지금도 우리 식단에서 뗄래야 뗄 수 없는 간장, 된장, 고추장 따위의 장류 발효식품은 장단지에서 그 맛을 제대로 낸다. '장독을 살펴보아 제맛을 잃지 않고 맑은 장 따로 모아 익는 족족 떠내어라' 농가월령가의 유월령에 나오는 구절이다. 옛말에 '광속에서 인심 나고 장독에서 맛난다'했고 '장맛보고 딸 준다'고 했듯이 장의 중요성은 고래로 음식 맛의 기본이었고 나아가 집안을 가늠하는 기준으로 우리 선조들은 여겨왔다. 뿐만 아니라 중요한 반찬의 하나로 입맛을 돋구는 젓갈류는 아직도 독에서 삭히고, 저장한다.
그래서 장독은 살림의 기본목록 중의 하나이고, 장독대 또는 장독간은 우리의 옛 가옥에서 뺄 수 없는 필수공간이었다. 일상음식뿐 아니라 저장음식의 보관장소로서 장독대는 전통가옥 구조에서 부엌 가까운 곳에 위치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곳은 부녀자들이 정화수 한 그릇을 장독 위에 떠놓고 기원을 하는 치성공간이기도 했다.
서구식 가옥이 보편화되면서 장독대는 주거공간에서 더 이상 설자리를 잃어버렸고 서구음식에 익숙한 세대들은 장을 담글 줄도 모를 뿐 아니라 장으로 맛을 내는 전통도 가벼이 생각할 만큼 세태는 변화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옹기를 굽는 옹기장을 거의 사라지게 만들었고, 현재는 몇 안돼는 옹기공장이 재래식 옹기를 현대사회에 어울리는 생활용기로 개발하여 그야말로 '끊어져 가는 전통의 맥을 잇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가 찾아간 곳은 충북 옥천군 안내면 현리에 소재한 '안내토기'라는 옹기제작 공장이다. 굳이 공장이라 하는 것은 과거처럼 옹기를 만들고 굽지 않기도 하거니와 제작 공정이 현대식 공장체계를 이루고 잇기 때문이다.
이곳 안내토기 옹기제작 전문가들은 선대로부터 옹기업을 이어 받은 장인들이고 모두 천주교 신자라는 특성을 가진다. 전하는 말로는 이들의 선조는 원래 옹기장이가 아니라 조선 말엽 대원군 치하의 천주교 박해를 피해 벽지로 숨어들어 옹기를 구우며 살아온 신자들이었다고 한다. 이들의 후손들이 지금 안내토기의 전문가들이며 지금도 선대의 업을 독실한 신앙심을 바탕으로 잇고 있다.
안내토기의 사장인 최길동(53, 崔吉東, 세례명 바오로) 선생도 가업을 이어받은 몇 안돼는 장인(匠人)의 한 사람이다. 학교를 제대로 다닐 여우도 없던 시절에 집안에서 하는 일이 옹기 업이라 어려서부터 거들던 집안 일이 평생의 천직이 되었다. 과거 장인들이 걸었던 과정을 그대로 이어받은 아마도 마지막 세대가 아닌가 여겨진다.
최선생은 철이 들기 전부터 아버지가 하시던 옹기일 을 거들어야 했던 가정 형평에서 성장하였다. 그의 부친은 원래 보은 내송리 자안이라는 지명을 가진 곳에서 옹기 굽는 일을 하다가 해방 후 경북 상주 화령지방으로 옮겼고 6.25 한국전쟁 중에서 다시 원래 터전으로 왔으나, 전쟁 후에 보은읍 학림이라는 곳에 정착하였다. 이 곳에서 선생의 옹기일 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서 옹기 굽는 일이 천한 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모르게 듣게 되었고, 다른 일거리를 찾고자 서울 등지로 몇 차례 도망을 다니기도 했었다. 배운 게 한정이라 이것저것 손을 대보았으나 마땅치 않아 결국 귀향하게 되었고 고향에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이 오늘의 그를 잇게 하였다. 여기에는 물론 가족사적인 이면이 크게 작용하였다. 부친은 가정을 돌보기 보다 다른 일에 몰두하고 계시고, 형은 군에 가는 바람에 그가 아니면 가정을 돌볼 수 없었던 사정이 그것이었다. 두 동생을 공부시키려고 아버지가 일하던 옹기공장에서 만든 항아리를 지게에 짊어지고 보은. 옥천 등지의 몇십 리 길을 팔러 다닌 것이다. 이 와중에 그곳 주인은 그의 부친에게 더이상 일을 맡기지 않았고, 집안 사정은 더욱 어려운 지경에 봉착하였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곳이 옥천군 안내면 현리, 즉 지금의 '안내토기'가 있는 곳인 이곳으로 옹기 일을 배우러 오게 된 것이다. 당시 이 공장은 그의 고모부가 운영하던 곳으로 고모부 밑에서 일하면서 한푼을 아껴 집안 일에 보태야 했던 시절이었다. 그러던 중에 고모부가 세상을 버리시고, 고종형은 이 사업을 제대로 꾸리지 못하여 최사장이 당시 돈 8만원에 옹기공장을 인수하게 된다. 이와 동시에 학림에 있던 전 가족이 이곳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는데 이 때가 1963년이었고, 현재까지 그 자리에서 사업을 확장하여 번듯한 모양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현재의 모양을 일궈내는 데는 뼈를 깎는 세월을 감내해야만 했다. 옥천. 보은 인근의 내노라는 옹기공장 7군데가 안내토기를 제외하고 전부 문을 닫은 지나온 과정이 최선생의 현재를 대변한다.
6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옹기 항아리는 우리네 가정 일상생활에서 뿐 아니라 생업도구로 없어서는 안될 필수품의 하나였다. 장단지(장독)가 그랬고, 보리쌀을 씻는 데 사용하는 도구인 '옹가지'는 여성에게는 꼭 필요한 그릇이며 뒷간을 푸는 '장군(인분을 담는 옹기 또는 나무로 만든 도구)'과 '귀뎅이(인분을 장군에 퍼 담을 때 쓰는 오지로 만든 도구)'는 겨우내 판매하는 주요 품목이었다. 그러나 60년대 이후의 시대변화에 따른 여러 요인은 전통적 옹기생산에 변화를 몰고 온다. 예를 들면, 정부시책으로 통일벼가 보급되고 보리농사가 줄어들면서 보리 옹가지는 더 이상 수요가 없어졌는가 하면, 또한 장군과 귀뎅이도 고무나 플라스틱을 재료로 만든 제품으로 대체되는 운명을 맞는다. 60년대 후반의 또 다른 어려움은 벌목금지로 인해서 가마에 나무로 불을 지피는 것을 단속하여 제대로 옹기를 구울 수 없어 이때 기름으로 가마에 불을 때는 방법이 처음 시도되었다 한다.
김장용 항아리조차 플라스틱 용기가 나오자 더 이상 팔리지 않았다. 현재는 가정에서 김장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평상시의 김치도 담그지 않는 가정이 늘어나기 때문에 김장독은 사라질 형편이다. 한편 이러한 우리 식생활문화의 변화과정에서 새로운 옹기제품으로 개발한 것이 '냉장고용 김칫독'으로 1994년에 의장특허를 받았다.
예나 지금이나 김치는 우리의 식단에서 빠질 수 없는 반찬이지만, 현대의 가옥구조에서 저장의 문제는 예와 같지 않다. 특히 냉장고 보관시 그 냄새로 인하여 주부들의 불만이 적지 않다. '냉장고용 김칫독'은 바로 이 냄새 문제를 해결해 줄 뿐 아니라 제대로 익힌 김치의 맛도 내기 때문에 인기가 높다고 한다.
특히 최사장이 자랑으로 여기는 것은 전통 유약의 개발이다. 1988년부터 무공해 옹기를 만들려고 전국 각지를 다니면서 재래 유약을 만들 수 있는 약토를 찾아 헤맸다. 그러던 중 강원도 어느 곳에서 그것을 발견하고 과거 유약을 재개발하는데 성공, 이것을 사용하여 무공해 옹기를 생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것은 잘 먹는 것보다 건강을 생각하게 된 시대가 도래하면서 기존 유약의 유해성 논란이 일고 나서부터 최사장이 받은 자극에서 출발했다. 소위 광명단과 망간을 재료로 한 유약의 유해한 납 성분을 전통 유약은 함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신 문물이 소개된 지난 세기말이래 우리 나라에 소개되어 최근까지도 옹기의 유약으로 사용되는 '광명단'은 현재 그 유해성으로 말미암아 찬밥 대우를 받고 있다. 한때 이 광명단과 망간을 원료로 한 유약은 인기가 대단하여 이것을 바르지 않은 옹기는 팔리지 않을 정도였다. 왜냐하면 이 유약을 바름으로써 옹기에 일정하게 깨끗한 색과 반들반들한 표면을 만들어 재래 옹기의 투박한 외양을 없애주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 유약을 바르면 섭씨 800도 정도의 낮은 온도에서 옹기를 구울 수 있기 때문에 연료비와 인건비의 절감도 가져와 너나 할 것 없이 애용하였다.
그러나 '빛 좋은 개살구'라 했던가. 광명단의 납 성분은 옹기의 숨구멍을 막아 버려 옹기의 생명을 끊어 버린다. 물을 부으면 기름이 뜨고, 불에 올리거나 장 또는 김치 같은 발효식품을 담아두면 납 성분이 녹아 버린다. 이것이 우리 몸에 해롭다는 것을 인식한 것은 최근의 일이었다.
아래에 소개되는 바와 같이 현재 옹기 제작은 대부분의 공정에서 기계의 도움을 받거나 완전히 기계화된 상태로 변화되었다. 옹기의 재료가 되는 점토는 전국 각지의 것을 사용한다. 한 지역의 점토를 사용할 경우 물건이 좋지 않기 때문에 여러 곳의 흙을 섞어서 사용한다. 현재 톤당 3만원에 점토를 구입한다.
옹기제작 공정은 아래와 같다. 이는 기계화 이전의 제작과정을 주로 하였고 기계화된 부분의 변화된 양상도 함께 기술하였다.
① 과거에는 점토를 물과 함께 섞어 손으로 반죽을 하였으나, 현재는 쇠날의 칼퀴가 자동으로 돌아가는 '토랑지(토련기)'라고 부르는 기계에서 반죽한다.
② 다음은 정련하는 과정으로 반죽된 흙을 '롤라'에 넣고 간다. 이때 점토 안에 섞여 잇는 반죽되지 않은 흙덩이나 작은 돌멩이 따위가 부서지게 된다. 이 일은 예전에 반죽된 흙을 떡메로 쳐서 했고, 이 과정을 '흙을 다린다'고 했다. 이렇게 다린 흙은 일정한 크기로 쌓아둔다('고재 놓는다').
③ 정련되어 쌓아둔 흙은 다시 한번 정련과정을 거치는데 이때는 낫 모양의 '깨개'라는 도구를 사용한다. 이것으로 흙더미를 깎을 때 물 안 먹은 흙덩이나 돌멩이를 들어낼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얇게, 여러 번 깎아낼수록 '흙이 좋아지는' 것은 당연하다. 보통의 경우 두 번을 깎고 잔그릇의 경우 3번 깎아낸다고 한다.
④ 깎아낸 점토를 다시 덩어리로 뭉쳐 평평한 바닥에 편 다음 떡메보다는 작은 '꽃메'로 친다. 그 다음 갓부분 점토를 '너까래'로 잘라내어 안 부분에 포개어 다시 꽃메로 다듬는다. 이 작업이 끝나면 점토를 뒤집어서 전과 같은 작업을 반복한다.
⑤ 꽃메로 치는 작업이 끝난 점토는 한 사람이 들 수 있는 정도의 크기로 8등분하여 쌓고 물 축인 가마니로 덮어서 습기를 유지하게 저장한다. 현재는 비닐을 사용한다.
⑥ 실제 옹기 만드는 작업이 시작되면, 조수(통칭 일본어인 '데모도'로 사용)는 철사로 점토를 잘라내어 작업대에서 다시 반죽하여 떡가래 모양으로 만들어 '대정(기술자)'에게 건네준다.
⑦ 대정은 이 흙가래를 물레 위에 올려놓고 의도한 옹기를 빚어낸다. 현재는 이러한 제작방법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만드는 사람에 따라 크기가 일정하지 않고 특히 옹기의 두께를 전체적으로 일정하게 만들기가 어려워 상품가치가 적을뿐더러 주된 이유는 대량생산이 어렵기 때문이다. 제품의 일관성을 갖추기 위해 이미 만들어진 틀(이곳에서는 일본말인 '가다'를 사용)에 반죽된 점토를 넣어 제품을 찍어내고, 칼로 다듬는 마무리 작업은 칼로 한다.
⑧ 성형된 제품은 건조과정을 거친다. 약 50% 정도가 건조되면 유약을 바른 후 완전 건조를 시킨다. 건조가 완전히 된 다음 유약을 바르게 되면 구운 후에 유약이 벗겨진다. 자연건조시 일주일 이상의 기간이 소요되고, 가마 옆에서 불때는 열을 이용할 경우 3∼4일 정도 걸린다.
⑨ 말린 용기를 현재 섭씨 1250~55도 열로 고정된 가스가마에서 12시간을 굽는다. 과거 흙가마를 사용할 때 불빛을 보고 감으로 불 조정을 하였다. 당시는 일주일 밤낮으로 불을 때었는데 처음 삼사일간은 가마의 습기를 말리는 과정이고, 닷새 째부터는 옹기 굽는 본격적인 불을 때었다고 전한다.
옹기제품은 그릇과 항아리 등 제품의 종류에서 특별하게 고가 품과 저가품의 구분이 없다. 도자기가 예술의 경지에 이르는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아마도 일상용품으로서의 가치가 미적 가치에 우선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렇다고 옹기에 아무런 장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옹기의 경우 특이한 장식은 개별 옹기장의 미적 감각에 따라 다양하다. 안내 토기에서 제작하는 항아리의 경우, 유약을 바른 직후 양손을 이용하여 나비 모양의 문양을 하는 것인 유일한 장식이랄 수 있다. 그리고 항아리 주둥이나 목 또는 몸체 부분에 점토를 가늘게 약간 부풀려 몇 가닥의 줄모양으로 테를 두르는 방법은 대부분 옹기제작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한다.
옹기는 주로 전국 각지의 옹기 전문점에서 판매된다. 부분적으로는 예컨대 뚝배기는 대도시의 식당에서 주문을 받아 생산되기도 한다. 옹기 유통의 특이한 현상은 옹기전문점 이외에 행상이 아직도 많이 있다는 점이다. 물론 과거처럼 지게에 메고 다니며 판다는 점에서는 예나 마찬가지이다.
최근에 엄청나게 비싼 일본제 옹기제품이 들어와 불티나게 팔렸다는 이야기는 몇십만 원짜리 속옷이 불티나게 팔리는 것처럼 '비싸면 무조건 좋은 것' 이라고 믿는 일부 계층의 소비심리가 다른 계층에도 영향은 준다는 사실이다. 다수의 사람들의 생활문화는 많은 부분에서 상층 소수의 문화에 모방되는 과정을 거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국민의 의식개혁이란 것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가를 다시 한번 생각게 한다.
안내토기에서 일하는 직원은 13명이나 이 중 6명이 기술자이다. 최사장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들은 전부 어려서부터 옹기 만드는 일에 종사해 왔다. '뼈 굳으면 어렵다'는 것이 옹기기술이라는데 어려서부터 기술을 익힌 아마도 마지막 세대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들의 아내도 보조역할을 하는 소위 '데모도'로 일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대다수 전통상품과 마찬가지로 옹기 만드는 일에 종사코자 나서는 젊은 사람은 아직 없다고 한다.
실제 오늘날 촌락사회의 가옥을 제외하고 새로운 가옥구조에서 장독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젊은 세대들은 장을 담그지도 않기 때문에 장단지는 더 이상 현대의 일상용품의 기능을 상실하고 만다. 단지 장을 만드는 공장이 말 그대로 '전통적인 방법으로 만드는 장'이라면 이 장단지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러나 현실은 대부분 검은 고무 통이나 플라스틱 용기를 사용하는 추세이기에 이 또한 맛과 위생 면에서 전통의 그것을 보장할 수 없다는 말과 같다. 장이나 김치 같은 우리의 발효음식은 옹기그릇에서 만들어지고 저장되었을 때 본래의 그 맛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이제 근거 없는 이야기로만 그치지 않는다. '옹기가 숨쉰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하기 때문이다. 흙을 구워 만든 옹기의 표면은 물이 새지 않지만 미세한 구멍을 가진 다공질(多孔質)이어서 공기, 미생물, 효모 등이 통과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온도, 습도를 조절할 수 있어 발효식품을 썩지 않게 숙성시키고, 즉 삭히고, 익히며 장기간 저장하기에는 안성맞춤이며 그래서 우리 입맛에 맞는 식품저장에는 제격이다. 특히 위생 면에서 옹기의 장점을 최사장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옹기조각에 손을 베면 덧나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세균이 옹기에서 서식할 수 없다는 얘기다.
현대생활에 맞게 개발된 옹기제품은 앞서 언급한 냉장고용 김칫독, 생수통 따위가 있다. 먹는 물을 가려야 하는 요즘에 예전의 물맛을 지켜주는 용기라 하여 인기가 높다. 그밖에 작은 크기 장단지와 김칫독, 약항아리, 그리고 음식식기인 뚝배기가 주로 생산되는 품목이다.
현재의 공장경영을 보다 확대할 수 없느냐는 질문에 최사장은 절래 절래 고개를 흔든다. 중소기업 육성자금을 지원한다는 홍보는 있지만 '현실적으로 그림의 떡'이라는 것이다. 언론매체를 통해 늘상 볼 수 있는 중소기업을 살리겠다는 정부시책의 구호와 실제의 차이가 무엇인가를 보는 듯하고, 이것이 20세기말의 우리의 모습인가 하여 못내 아쉽다. 마치 우리 것을 살리자는 구호는 이곳저곳에서 요란하지만, 어디에서 무엇을 어떻게 살릴 것인가의 실천적 논의는 뒷전에 밀려나 있는 현실과 다를 바 없다. 전통의 작은 것에서부터 우리의 관심이 출발하고 그리고 꾸준해야 한다. 소위 '문화민족'의 전통은 구호로만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문화는 내일 또는 모레의 문제가 아니며, 몇 세대를 거쳐야 그 모습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지금껏 진실하게 살고자 노력했으나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는 것"이 비록 지금우리의 현실이지만, "지금의 공장 터에 이층건물을 올리고 공장자동화 시설을 갖춰서 생산의 효율을 높이고, 그리고 그 공장 옆에 무의탁 노인을 위한 무료 양로원을 설립하는 것이 앞으로의 소원"이라는 최길동 사장의 '작은 희망'은 오늘날 큰 구호만이 요란한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