놋쇠에 거는 희망, 전통문화의 일반 상품화
- 방짜유기의 장인 김문익
이장섭 / 한국문화정책개발원 책임연구원
겨울을 앞두고 동네 아낙네들이 모여 앉아 깨진 기왓장을 간 가루로 놋그릇을 닦는 일은 예전 세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과거 동절기 동안의 식기로 일반적이었던 놋그릇을 60년대 스테인레스 식기가 등장하면서 그 생명을 다하고 만다. 그러나 이즈음 고풍스레 치장한 한식전문 음식점에서 과거 놋그릇을 연상시키는 식기가 새로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전통의 복귀현상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이 그릇은 과거의 놋쇠를 틀에 부어 만든 일반적인 주물 놋그릇이 아니라 방짜유기라 이름하는 것이다. '품질이 좋은 놋쇠를 부어 내서 다시 두드려 만든 그릇'이라는 방짜유기는 오늘날 새로운 호황을 맞고 있다. 납이나 아연 따위의 다른 금속이 완전히 걸러지지 못한 주물놋쇠와 달리 방짜유기는 놋쇠를 망치로 두드려 만들기 때문에 이러한 금속이 거의 들어있지 않아 주기적으로 닦을 필요가 없다는 데서 가치를 지닌다. 비단 고급 전통유기라는 점에서 방짜유기의 명성뿐만이 아니라, 그것이 현대생활의 여러 부분에서 필요한 용품 또는 도구로 쓰여지는 데 의의를 가진다.
이점은 우리가 찾아간 방짜유기 장인(匠人)의 한 분인 김문익(金文益, 53세 경기도 무형문화재 10호)선생의 공장에서 실감할 수 있었다. 외형상으로도 번듯한 공장의 모습이며, 그 안에서 활기차게 돌아가는 작업과정은 지금까지 우리가 취재한 전통상품의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었던 광경이었다.
김문익 선생은 경남 함양 태생으로 어려서부터 유기 만드는 일에 접하며 성장하였다. 덕유산 골짜기에 자리잡은 고향마을에서 집안 식구 모두가 유기 만드는 일에 종사하였기 때문이다. 공장이 덕유산 자락에 자리잡은 것은 불 때는 재료인 숯의 조달이 그만큼 용이하기 때문이었다고 선생은 기억한다. 당시만 해도 그것이 유기제작의 관건이었다. 고향의 유기공장은 말 그대로 김 선생 가족의 가업으로 이어왔다. 굳이 농사일을 고집했던 그의 선친을 제외하고는 백부(김소용 술), 숙부(김재식), 이모부(김무용), 종형(김창식) 등 남자 친척 대부분이 이일에 전념하였다. 지금은 전부 작고하시고 김 선생이 선대의 가업을 이어간다.
김 선생도 소학교 5학년 때인 13살부터 유기 만드는 일에 투신하여 40년이 지난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 당시는 오늘날처럼 기계화된 작업공정을 거치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모든 것이 수공업으로 이뤄지는 '전통적'방식으로 유기가 제작되던 시기였다. 그가 처음 배운 것은 놋쇠를 끓이기 위한 용광로인 흙 도가니에 불때는 일을 하는 '풍구 잡이' 일이었다. 그것이 기술 없이도 가능한 가장 초보적인 노동이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불 때는 재료는 숯이고 이에 불을 붙여 풍구로 바람을 내어 불때는 작업을 하였다. 이때 사용했던 숯은 그 나무의 종류에 따라 몇 가지로 나누어진다. 소나무로 만든 것은 숯은 목탄, 참나무로 만든 것은 백탄, 그리고 으뜸으로 치는 것은 박달나무나 물푸레나무로 만든 백탄이란 것이었다. 백탄은 하얗게 탄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며, 불을 끌 때도 모래로 덮어야 할만큼 화력이 좋았다고 한다. 김 선생은 차차 성장하면서 놋쇠를 때리는 작업인 '망치질'을 배우게 되고 장인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고향에서 1965년까지 일을 하다가 상경하여 방짜유기의 또 다른 장인(匠人)인 이봉주 선생 밑에서 일을 배우게 된다. 당시 이봉주 선생은 서울 염창동에 공장을 운영하였고, 그곳은 김 선생의 고향 유기공장의 재래식 방법과는 달리 기계화에 어느 정도 들어선 단계였다. 이봉주 선생과의 만남은 김 선생에게 있어 기계식 유기제작에 접했다는 것 외에 지금까지 익혀온 유기제작의 전통기술이 또 다른 유기제작의 그것과 만남이 이뤄졌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이봉주 선생은 이북식 유기제작의 전통을 전수하신 분이다. 이 전통은 유기의 외형에 보다 많은 비중을 두고, 김선생이 어릴 적부터 배운 남부지방의 전통은 소리에 의미를 둔다. 따라서 이북의 전통유기는 양푼, 세숫대야, 요강 따위의 전통 생활용품이 유명하였고, 남부지방에서는 풍물의 꽹과리, 징, 또는 바라 따위의 악기생산에 더 명성이 높았다. 이는 전통적으로 남부지방에서 풍물이 북부지방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이 분포되어 있고 그에 따른 문화적 영향이 아닌가 한다. 전래로 농악이 평야지방에 한정되어 분포되어 있기에 북부지방은 풍물악기의 수요가 적었을 것이고 이것이 유기제작의 전통에 영향을 준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래서 김 선생은 남부지방의 유기제작 전통에 북부지방의 유기 의 모양을 잘 만드는 전통을 함께 습득하는 행운을 잡는 계기가 된다. 약 16년간을 그곳에서 일하고, 1981년에 독립하여 군포에 터전을 잡아 지금에 이르게 된다. 현재는 국일공예사(國一工藝社)라는 9명의 직원을 둔 방짜유기 공장의 대표로 있다.
유기는 현재 다음 공정을 거쳐 완성된다. 현재의 기계화된 방식과는 다소 차이가 있는 전래의 전통방법은 비교되어 기술된다.
① 가장 우선된 일은 놋쇠의 재료인 주석과 구리를 혼합하는 것으로 주석과 구리를 28% 대 72%의 비율로 섞는다.
② 혼합된 주석과 구리는 용광로에서 섭씨 1600도의 온도로 끓인다. 과거에는 숯을 재료로 하고 풍구를 바람 내는 도구로 이용하여 불을 땠으나 현재는 기름과 동력을 이용해서 바람을 내어 원료를 끓인다. 놋쇠를 끓이는 용광로는 흙 도가니로서 현재 국산과 독일 산이 있는데 국산은 10번 정도 사용하면 폐기해야 하지만 독일산은 그 다섯 배정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독일 산이 선호된다.
③ 끓고 있는 놋쇳물을 긴 손잡이에 연결한 바가지로 퍼내어 틀에 부어낸다. 이는 제품의 형태가 아니라 다음 공정에서 두드려 내기 위한 기본모형이다. 놋쇳물을 부을 때의 양은 어림짐작으로 하지만 오랜 경험에서 나온 감각으로 대부분 정확하다. 예컨대 꽹과리의 경우 약 500g을, 징의 경우 약 4.2 Kg정도를 붓는데 숙련공의 경우 거의 일정하게 부어낸다. 이 작업의 경우 또 다른 어려움은 섭씨 천도 이상의 용광로 옆에서 쇳물을 떠내고 붓는 작업을 해야되기 때문에 열을 이길 수 있는 체질을 가진 사람만이 가능하다(우리가 취재하던 날 관찰과 사진 작업을 위해 이 작업장에 들어갔다 나왔을 때 30도가 넘는 바깥기온은 오히려 시원할 정도였다).
놋쇳물을 틀에 붓기 전에 함께 붙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틀에 기름을 바른다. 과거에는 돼지비계를 사용했으나 지금은 식용 돼지기름인 쇼팅을 이용한다. 놋쇳물을 틀 속에 부을 때 부어진 놋쇳물이 굳는 순간 그 위에 톱밥을 뿌리는 한 사람의 보조원이 있다. 이는 쇳물이 굳을 때 응축성을 높이는 효과를 낸다. 특히 악기의 경우 이 과정을 거침으로써 제소리를 낼 수 있다고 한다.
④ 다음은 틀에서 굳은 놋쇠를 때리는 작업에 들어간다. 현재는 기계작동에 의한 자동 망치질로 작업이 진행되지만 과거에는 사람이 망치로 직접 때려서 작업을 했다. 망치로 때리는 작업은 '초밧대기 때리는 작업'과 '도듬질'로 나뉜다. '초밧대기 때리기' 일은 초벌작업에 해당하고, 본격적인 망치질은 도듬질이다. 도듬질로 놋쇠를 얇게 만들어 원하는 제품의 형태를 잡아낸다. 이북말로는 '우김질'이라고 하는 도듬질은 세 사람의 망치 잡이와 집게 잡이 그리고 풍구 잡이의 분업으로 이뤄진다. 세 명의 망치 잡이는 '쇳매', '전매'와 '앞매'라는 각기 다른 이름을 가진다. 쇳매는 세 개의 망치 중 가장 큰 망치를 잡고 때리는 망치 잡이로 보통 힘센 사람이 담당하고, 앞매는 셋 중 가장 기술이 출중한 사람이 된다. 도듬질할 때는 세 사람이 번갈아 가면서 망치질을 하기에 '딩·동·뎅'소리가 나며, 시간이 갈수록 놋쇠가 얇아지고 망치질도 빨라지기 때문에 소리가 요란해진다고 한다.
집게 잡이는 '대정'이라고 부르며 망치로 두드리는 동안 놋쇠를 집게로 잡고 있으며 그것이 식으면 숯불에 넣었다 달궈 다시 꺼내 잡는 일을 반복한다. 풍구 잡이는 '가짓대정' 이라고도 하며 숯불이 꺼지지 않도록 계속해서 풍구작업을 담당한다. 김 선생이 이 업에 발을 들여놓으며 가장 먼저 배운 일도 바로 풍구질이다. 망치질은 놋쇠가 잘 식지 않도록 하기 위해 제품을 세 개씩 겹쳐 한꺼번에 하게 된다.
⑤ 망치질의 다음 작업은 '다듬질'이다. 여기서는 어느 정도 형태가 나온 것을 완전한 '모양'으로 잡아주는 작업을 한다. 다시 말해 마무리작업으로서 제품을 곱게 다듬는 일이다. 따라서 이 일은 대개 기술이 좋은 '앞매'가 담당하게 된다.
과거에는 거의 밤에 일을 했다고 한다. 보통 밤늦게 시작해서 그 다음날 오전에 마무리한다. 특히 도듬질하는 과정에서 달궈진 놋쇠의 빛깔을 잘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밤에 작업이 이뤄져야 한다고 한다. 자정 경부터 시작되는 망치 때리는 작업은 대개 새벽 경에 마치게 되며, 이때부터 다듬질이 시작된다. 물론 지금은 기계로 모듬질, 다듬질을 하기 때문에 밤에 작업할 이유는 없어졌다.
기계작업은 제품생산의 확대를 가져왔을 뿐 아니라 과거의 수작업에 의한 제품보다 제품의 모양을 보다 정교하게 만드는 데도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현재의 재료는 과거에 비해 질 면에서 떨어진다고 한다. 현재의 정련 기술이 99.9%의 구리를 만들고 따라서 정확한 놋쇠 조합이 가능하지만, 과거에는 동(銅)에 금 또는 은이 조금씩 섞여 있어 '쇠가 말을 잘 들어 일하기가 휠씬 좋았다'고 김 선생은 말한다.
현재 김 선생이 경영하는 국일공예사에는 9명의 종업원이 있다.30년 이상을 방짜유기업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도 3명이 있으며 이들은 유기를 깎는 일인 '가질'분야의 전문가들이다. 그 외는 젊은 세대도 있지만 인력수급이 일정한 체계를 지닌 것은 아니다. 이 전통제조업에 관심을 가지고 종사하기를 원해서 한다거나 이 업이 다른 직업보다 더 나은 무엇을 보장하기 때문에 선택하는 선택논리는 나타나지 않는다. 대개 친척이나 친지의 소개로 발을 붙이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옛 방식이 크게 변화되지는 않은 상태이다. 과거 김 선생의 고향에서 가족, 친족성원에 의한 가내수공업적인 인적 구성은 지금도 어는 정도 남아 있다. 그의 동서와 친구들도 이곳에서 일을 하고 있고, 처조카인 이춘복(35)씨는 이미 약 15년 전에 그의 밑에서 일을 배우기 시작하여 지금은 숙련공의 경지에 이르러 김 선생의 대를 이을 수 있는 장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또 다른 제자인 이재태(27)씨도 약 7년째 방짜유기의 전통을 배우고 있는 젊은 후계자이다. 이는 다른 전통상품이나 전통기예에 비해 전통 계승의 후진인력이 원만한 편이다. 방짜유기가 현대사회에서 각광받는 전통상품으로 수요가 끊이지 않기 때문에 경제원리가 그 종사자들의 수급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다른 전통업 종사자에 비해 장인이 생계가 문제시되는 일은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그만큼 필요한 인력 충당의 일차적인 문제는 없는 셈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연재한 여러 가지 전통상품의 전승 또는 전통장인의 세대계승은 여러 가지 어려움에 봉착해 있음을 보아왔다. 그 일차적인 이유는 사회. 경제적 변화에 따라 전통적 생활맥락에서 기능 하던 생활용품 또는 도구가 기계화된 상품이나 서구식 도구로 대치되어 본래의 의미를 잃게 되어 그에 대한 수요가 없어지는 점이다. 방짜유기의 경우 이 점에서 다른 전통상품과 차이를 보인다.
방짜유기의 판로는 현재 서울의 종로 3, 4가에 위치한 만물상회를 비롯하여 전국 각 도시의 그러한 상회를 통해 형성된다. 생산품목도 대개 이들의 주문에 의해 정해진다. 전통악기는 꽹과리, 징, 바라, 만신종 또는 무속종이라 부르는 것이 주종을 이루고, 절 집이나 무속신앙에서 필요한 제기류가 있으며 그리고 양푼, 숫가락, 주걱, 세숫대야, 요강 등 과거의 생활용품도 일정한 수요가 있어 생산된다. 그리고 현대의 주거생활에서 필요한 용품과 현대인의 감각에 맞는 디자인도 개발을 시도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못한다. 예컨대 전화받침대라든가 현대식 쟁반 따위가 그것이다.
오늘날 방짜유기업의 번성은 다음 몇 가지 사회적 현상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먼저 전통관습의 현대적 재현에서 필수적으로 따르는 전통악기의 수요가 방짜유기의 전승을 뒷받침한다. 70년대이래 일기 시작한 전통문화의 현대적 계승은 전통관습에 우선된다. 특히 연희·놀이적 요소가 풍부한 관습인 탈춤, 세시의례, 무속의례 따위의 집단관습이 주가 된다. 그러나 이 관습이 가지고 있던 의례적 의미는 사회변화에 따라 사라지거나 약화되고, 혹은 현대적 상징성을 부여받는다. 말하자면 전통 풍어제(豊漁祭)는 오늘날의 사회에서 더 이상 기능하지 않으며, 관습의 대동제적 성격은 7, 80년대 우리 사회의 민주화운동이나 노동운동의 과정에서 집단응집력을 촉구하는 기능을 가졌다는 점이 그것이다. 이러한 기능상의 변화, 사회적 맥락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전통관습의 외형적 모습은 그 본연의 '전통적'을 추구하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대다수의 관습에 수반되는 옷과 장식 및 도구가 그러하며 악기도 예외가 아니다.
이 과정에서 대표적인 민중음악인 풍물은 전통시대를 무색케 할 정도로 그 수요가 치솟는다. 풍물의 일부인 꽹과리와 징의 수요는 방짜유기업의 호황과 직결된다. 한편 특이한 점의 하나는 풍물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사물놀이의 경우, 현대음악과의 접목에서 전통악기가 소리의 변화를 가져왔다는 점이다. 저음의 파장을 생명으로 하는, 마치 소 우는 소리를 연상시켜야 하는 징의 소리가 빠른 템포와 고음을 요구하는 현대음악의 감각에 맞게 고음과 짧은 음으로 변화되어 제작되기도 한다.
다른 한편에서 현대 한국사회의 종교적 현상과도 직접 연관된다. 불교의 전통 계승에 따라 불교의식용품 수요가 지속적임을 차치하더라도, 특히 무속신앙 호황은 무속도구의 수요의 증가를 가져와 이 역시 방짜유기업의 호경기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끝으로 전통 추구에 대한 사회적 수요를 들 수 있다. 앞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고급 한식점에서 전통식기의 수요가 급증하여 방짜유기로 만든 식기의 주문이 쇄도한다. 심지어 상류계층에 속하는 일부 사람들 중에는 구리와 주석의 합금으로서의 놋쇠에 만족하지 않고 거기에다 금을 추가하여 식기와 식사도구의 제작을 주문하기도 한다. 이러한 부유층의 사치적 취향을 무시하고 보면, 머지않아 동절기의 식기가 과거처럼 전통유기로 바꿔질 가능성이 있다는 가정이 성립된다. 왜냐하면 다수 사람의 문화와 다르고자 하는 상층사회의 문화적 경향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고, 나아가 그것이 다수 민중문화의 모방 모델이 되는 사례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화과정은 이미 여러 문화현상 또는 문화요소의 사회적 확산과정에서 증명된 바 있다. 멀리는 사대봉사의 전통이나 족보제작의 전통이 그러한 문화적 과정을 거쳐 보편화되었다. 가까이는 서양문화 유입과 보편화 과정에서도 동일한 양상을 보여 주었다.전통회귀 현상의 하나로 상층사회에서 일기 시작한 옛 물건의 인테리어화 경향도 다른 예가 아니다.
방짜유기의 예는 전통상품 또는 전통기술의 문화적 과정의 한 면을 보여준다. 전통상품의 현대적 계승은 산업사회의 기술을 수용하여 생산의 합리화와 동시에 그 전통문화 요소가 현대사회에서 가지는 문화적 과정이 관건이라는 것이다. 이점에서 전통문화에 대한 행정적 방향이나 앙가주망을 가진 사람들의 시야가 그러한 문화적 과정을 정확히 읽어낼 수 있다면, 전통문화의 현대적 계승의 구체화는 결코 멀리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이는 현대사회에서 전통문화의 문제를 고려할 때 문명비관론 입장에서 바라보거나, 낭만적이고 보수적일 필요가 없음을 알 수 있다.
김문익 선생의 희망은 방짜유기 공방의 설치이다. 이러한 공방은 김 선생의 희망만이 아님을 우리는 여러 차례 경험하였다. 전통상품을 옛 모습대로 제작하는 과정을 재현할 수 있고 그것을 전시할 수 있는 '민속자료관'의 설치는 전통장인의 공통된 관심이다. 그럼으로써 전통의 계승을 효율화하고, 후대의 민족문화의 교육적인 기능도 가지고, 전통문화의 관광상품화 효과를 모두 지니게 된다는 것이다. 다만 아직 이에 대한 정책적 관심과 지원이 요원함이 전통장인의 안타까움이고, 일부에서 상업성에만 치중하여 흉내만 내는 현실이 있어 그들을 개탄스럽게 한다.
희망적으로 본다면, 이들의 고민이 우리 것에 대한 앞으로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킬 주춧돌이 될 것이다. 문화의 세계화는 바로 우리 문화를 바로 보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점은 이제 소수 몇 사람의 소리 없는 메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지난 세기말이래 지금까지 지속되는 무분별한 문화 혼돈기를 벗어나는 노력은 21세기를 눈앞에 둔 우리 세대의 시대적 과제로 모두가 인식하여야 한다. 우리 것에서 뿌리내려진 진정한 문화정체성을 주장하는 것은 결코 쇼비니스트의 자기만족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