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달의 우리 영화

전통과 실험의 대결

-「금홍아 ! 금홍아 !」,「301·302」




오정국 / 문화일보 기자

우리 영화가 비로소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다. 1년 중 가장 손님이 적게 든다는 4월, '잔인한 4월'을 지나자 주목할 만한 방화들이 비로소 올 상반기 흥행기록을 향한 출사표를 던지기 시작한 것이다. 태흥영화사의 「금홍아 ! 금홍아 !」를 비롯 박철수 필름의 「301·302」, 그리고 선익 필름의 「테러리스트」가 그것들이다. 여기에다 강우석 프로덕션의 「엄마에게 애인이 생겼어요」, 우진 필름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가 일제히 개봉되어 관객동원 기록경쟁에 나섰다. 모처럼 "백화쟁명" 시즌이 온 것 같은 기분이다.

김유진 감독의 「금홍아 ! 금홍아 !」는 천재시인 이상의 일대기를 바탕으로 1930년대 예술가들의 광기 어린 삶을 그린 영화이다. 이야기의 중심 축은 이상과 기생 금홍이와의 사랑이다. 여기에다 이상의 친구인 곱추화가 구본웅이 끼어 들어 묘한 삼각관계를 이루는데, 구본웅은 금홍이를 사랑하지만 언제나 이를 지켜보고 이상과의 관계가 잘되기를 바라는 후견인 역할만 한다.

1932년 봄, 일본 유학을 마치고 경성으로 돌아온 화가 구본웅의 귀국전 전시회장, 여기서 두 예술가가 첫눈에 의기투합, 콤비가 되는데 바로 이상과 구본웅이었다.

이들은 예술적 동반자이자 지기가 되는데, 이상은 늘 여자들에게 인기다. 자유분방한 여자관계를 가지던 중 구본웅의 약혼녀까지 섭렵, 구본웅은 우정과 예술에 대한 혐오를 느낀다. 그러나 다시 만난 이들은 이상의 폐병을 치료하기 위해 백천 온천으로 요양을 떠난다. 여기서 기생 금홍이를 만나게 되고 변동일과 결혼했으나 실패하고 자신의 도피처인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6개월만에 숨진다.

관객들은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30년대 광인들의 삶 속으로 빨려 들러간다. 도피처인 듯 이상향인 듯 영화 속의 세상으로 몰입해 들어간다. 바로 이상이란 인물이 주는 이상한 매력과 배우들의 연기 때문이다. 첫 출연작 「태백산맥」으로 올해 대종상 남우주연상을 거머쥔 연극배우 출신 연기자 김갑수가 이상으로 등장하고 CF와 TV 드라마를 몇 편 정도 해본 신인 이지은이 일약 이번 작품의 타이틀 롤을 맡았다. 여기에다 김수철이 「고래사냥」이후 10여 년만에 영화에 출연, 곱추화가 구본웅 역을 맡았다.

김갑수는 평생 빗질 한번 해보지 않았다는 이상 역을 맡아 실제로 자신이 30년대의 인물로 돌아간 듯 궁상을 떨고 허세를 부리는 광기를 뿜어낸다. 게다가 그 웃음은 이상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어 관객들의 뇌리를 파고든다. 처음엔 다소 과장된 듯한 연기가 눈에 거슬리는 듯 하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관객은 김갑수의 연기에 몽환적으로 빠져든다. 이상 역을 연기하면서도 김갑수는 김갑수의 매력으로 관객을 사로잡는 셈이다.

이지은은 천박하고 음란하며 백치미가 그만 이라는 금홍 역을 맡아 천박하고 음란한 연기는 제대로 소화를 하지 못했지만 백치미만큼은 절묘하게 잘 살려냈다. 희디흰 피부와 짙고 굵은 눈썹, 커다란 눈에 오뚝한 코, 이국적인 마스크로 얼핏 일본인으로 연상케 하는 데다 몸을 아끼지 않는 과감한 섹스 신으로 관객들에게 싱그러운 볼거리를 제공하기도 한다.

아쉬움이 남는다면 30년대의 한 많은 기생, 그 천착된 모습을 한번쯤 보여줬으면 하는 것이다. 이지은 의 금홍이는 사실 발랄하기 그지없는 신세대형인 셈이다.

가수 김수철의 연기력은 10여 년의 세월이 말해주듯 안정적이다. 관객의 마음을 더없이 편안하게 해주며 영화 속에서는 물론 실제 연기에서도 김갑수와 이지은을 잘 받쳐주었다.

다음은 세트의 문제. 30년대의 거리 풍경과 의상이 꼼꼼하게 재현돼 영화의 사실 감을 높여 주었는데, 문제는 이런 세트들이 너무 새것들이어서 세트란 걸 단번에 알아차리게 한다는 것이다. 손대 묻은 흔적, 세월의 비바람이 스쳐간 연륜을 드러나게 할 방법은 없을까. 한국의 시대극을 볼 때마다 필자는 늘 이것이 불만이었다. 또 이 작품이 시인 이상의 예술적 고뇌보다 여성편력을 너무 부각시키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 같은 정통적인 스토리 텔링에다 안정된 화면과는 달리 관객들을 시종 불안하게 하는 또 하나의 영화가 있다. 실험과 도전에의 야망으로 눈에 광기가 번뜩여야 할 젊은 감독들은 선배감독들이 만들어 놓은 영화문법을 답습하기에 바쁘고 50대의 한 감독은 '이 상태로는 나의 영화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흥행에 실패해도 좋다. 새로운 것으로 승부를 해야 한다'고 나섰다.

박철수 감독의 「301·302」는 한마디로 충격적인 영화이다. 이른바 '컬트무비'를 표방하고 제작된 이 영화는 스토리가 존재하지만 스토리의 서술을 최대한 억제하고 화면의 이미지로 관객들에게 스토리를 보여준다. 종전의 한국 영화 서술방식을 떨쳐버린 파격적이고도 실험성이 왕성한 작품이다.

소재도 특이하다. 영화 전편에 걸쳐 음식을 요리하고 먹는 장면이 끈질기게 나온다. 그럼에도 지루하지 않다. 불안하고 긴장된다. 화면의 구도가 색다르고 음향 또한 시종 관객들의 신경을 건드린다. 그래서 편안하게 영화를 볼 수 없다.

주요 인물은 음식을 요리해서 먹이려는 아파트 301호 여자(방은진 분)와 이를 거부하는 거식증 환자인 302호 여자(황신혜 분), 남편으로부터 소외당하고 남편의 애완견을 요리했다가 이혼을 당한 여자가 바이오 아파트 301호에 이사를 옴으로써 사건은 시작된다. 302호 여자는 고교 때 의붓아버지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기억 때문에 섹스 기피증과 거식증에 걸려 있다. 두 여자의 갈등과 반목 속에 영화는 진행되며 충격적인 결말로 영화는 끝난다. 그 결말은 302호 여자가 301호 여자의 요리 재료가 되는 걸 자청하면서부터 숨가쁘게 진행된다. 301호 여자는 기꺼이 302호 여자의 목을 자르고 시체를 냉장고에 보관하며 이를 요리해서 먹는다. 이 세상에서 자신이 존재할 이유가 없다는 302호 여자. 그녀는 301호의 여자의 요리재료가 됨으로써 301호 여자와 비로소 화해를 하게 되고 마침내 이 지상에서의 존재 이유를 찾게 되는 셈이다. 끔찍한 결말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에서의 음식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음식을 소재로 한 외화(外畵)가 최근 잇따라 국내에 소개되고 있는데 「바베트의 만찬」은 음식이 곧 화해를 상징한다. 중국영화 「음식남녀」에서의 음식은 이와 달리 여자의 고독과 광기를 표현해내는 매개물로 사용된 것이다.

이들 두 편의 영화는 사실상 '극과 극'이다. 한 편은 정통적인 영화문법으로 관객들에게 영화적인 재미를 한껏 제공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은 사실상 관객들을 고문하는 셈이다. 전통과 실험‥‥‥

5월은 독자들과 함께 「금홍아! 금홍아!」와「301·302」에 대한 관객들의 반응을 지켜보기에도 좋은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