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남미 아즈텍문명의 신비
이희수 /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로스앤젤레스를 출발한 비행기가 멕시코 시티로 근접하자 짙은 숲 속에 군데군데 빨간 지붕을 가진 작은 마을이 군집해 있고 산간을 일군 계단식 논밭이 노란색 그림으로 펼쳐진다. 또 다른 한쪽에서는 멀리 44층의 라틴 아메리카타워가 나타나면서, 인구 2천만을 헤아리는 대도시의 위용이 드러난다. 해발이 2천3백 미터이니 세계에서 제일 높은 건물과 세계 최대의 인구를 가진 도시가 멕시코 시티인 셈이다. 마야, 잉카와 함께 중남미 3대 문명인 아즈텍의 신비를 이 도시에서 느끼게 될 것이다.
1521년 한낮,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향해 절정의 향기를 발하던 아즈텍이라는 한 송이 꽃은 무심코 지나가는 나그네에 의해 목이 꺾였다. 그리고 아즈텍이라는 이름과 그 꽃의 향기를 기억했던 사람들도 하나 둘씩 숙명처럼 이 세상을 떠나갔다. 스페인의 정복자 헤르난드 코르테스에 의해 전성기의 아즈텍문화는 이렇게 해서 역사 밖으로 밀려나 버렸다. 그것도 망각 속에서 4백 년 동안이나, 당시 어떤 유럽사회보다도 더욱 발전되고 분화된 사회조직과 뛰어난 건축술, 천문학과 과학적 지식을 자랑하던 아즈텍을 직접 목격했던 유럽인들이 지난 4백년간 모든 자료와 흔적들을 말살해 가면서 철저히 침묵을 지켜왔던 것은 인류사회가 저지른 또 다른 범죄였다.
아즈텍문화는 톨테카문화를 이어 13∼15세기경 멕시코 중앙 고원에서 인디오에 의해 꽃피워졌던 마지막 고대문명이었다. 북멕시코의 수렵민족이었던 아즈텍이 남하해 와 선진 중미문화에 동화되어 마야, 잉카와 맥을 같이 하는 수준 높은 문화를 이룩한 것이다. 멕시카라고도 불리는 아즈텍인들이 오랜 방황 끝에 태양신 휘칠로포츠틀리의 신탁으로 텍스코코 호반에 처음 정착한 것은 1352년이었다. 그들은 앞선 고대문화를 수용하여 독특한 아즈텍문화를 일구어 내었다. 아즈텍문화의 우수성은 1970년에 '아즈텍 캘린더'라 불리는 태양의 원형석판이 발굴되면서 다시 한번 증명되었다. 이 캘린더는 단순한 억 년의 표시를 위한 것이 아니라 아즈텍인들의 우주관과 철학, 절기에 따른 농경과 제사, 1년을 280일(종교력)과 360일(태양력)로 하는 연도의 이중계산법이 모두 포괄되어 있다. 특히 '아즈텍 캘린더'에 나타난 그들의 우주관은 톨테카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우주를 네 부분으로 구분하고 그들의 세상을 다섯 번째 태양의 시대로 상정하였다. 그리고 수평의 우주는 다시 수직면으로 9층의 천상세계와 지하세계를 두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의 위에는 최고신이 있어 자식들인 대지, 공기, 물 불 등 네 신으로 하여금 지나간 시대의 네 우주를 생성. 소멸케 하였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제5의 태양시대'에 살고 있는 그들은 그 태양이 사멸하고 우주가 멸망하는 것을 막기 위해 대규모의 인신공희(人身供犧)를 행했다. 즉 사멸을 뜻하는 허무와 암흑과 싸우는 태양에게 인간의 뜨거운 피와 살아 있는 심장을 바쳤고, 그 대가로 태양신은 영원히 아즈텍의 번영을 약속해 주었던 것이다. 매일처럼 떠오르는 태양에게 지속적인 활력을 주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산 제물이 공급되어야 했다. 이를 위해 범죄자나 정치적인 반대세력들이 우선적인 대상이 되었고, 산 제물의 확보를 위해 무자비한 정복전쟁을 치러야 했다. 그러나 아즈텍인들은 스페인의 백인 악마가 휘둘러대는 총칼과 이름 모를 괴질로 하루아침에 죽어갔고, 활력을 얻지 못한 아즈텍의 태양은 쉽게 꺼져버렸다.
텍스코코 호반에 있었던 아즈텍의 수도 테노치티틀란이 오늘날 멕시코의 수도 멕시코 시티의 심장부이다. 그러나 이 기묘한 역사의 장난이 알려진 것은 불과 15년전, 도시 수도공사를 하면서 아즈텍의 편린들이 무수히 발견되면서부터이다. 물론 1913년 대성당 뒤쪽에 건축공사를 하던 중 아즈텍 유적의 일부가 발굴되었으나 그대로 방치되었다가,1979년 무게가 8톤이나 되는 달의 신 코욜사우키신전 석판이 발견되면서 본격적인 아즈텍문화의 복원에 착수하였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오후, 그 비극의 현장에 나는 서 있다. 멕시코 시티의 중심 중의 중심인 소칼로 광장에, 리베라의 대벽화로 유명한 정부청사의 왼쪽, 그러니까 대성당의 오른쪽에 둥근 대리석의 달의 신전 터가 보이고, 엉성하게 복원된 붉은 벽돌의 도시가 아즈텍의 일부분으로 남아 있다.450년 전의 영화를 알려주기에는 너무나 초라한 몰골이다.
잠시 빼앗긴 역사의 순간인 1519년 11월 8일을 더듬어 본다. 그날 침략자 코르테스와 아즈텍의 황제 목테즈마 2세는 궁성에서 서로 만났다. 두 개의 세계와 두 개의 문화가 처음 상면하던 날, 황금가마에서 내린 인디오의 황제는 말을 타고 나타난 하얀 백인을 그들의 신으로 생각하고 궁성으로 초대하였다. 백성들은 파란 눈의 이 스페인 사람들에게 신에 대한 예를 갖추며 그들 앞에 꿇어앉았다.
그러나 채신머리없는 백인 신들은 인디오 주민들을 학살하고, 인신공양의 신전을 불살랐다. 끊임없는 약탈과 파괴가 뒤따랐다. 그로부터 1년, 목테즈마는 저주스런 침략자를 신으로 오인한 잘못으로 인디오 주민들이 던진 돌에 맞아 죽고, 다시 1년 후 아즈텍제국은 흔적도 없이 역사에서 사라져 버렸다.
아즈텍문화는 황금에 굶주린 거룩한 정복자에 의해 철저히 유린당하였다. 박물관의 전시품으로, 유럽 왕실의 장식품으로 전락한 그들의 황금만이 초라한 한줄기 아즈텍의 숨결을 간직하고 있다. 인신공회를 행하던 아즈텍인들은 그들이 기다려 왔던 백인 신들에 의해 무차별 살육을 당하였다. 광신적인 열정에 불타는 중세 기독교인들에게 그들은 한낱 야만인이고, 사라져야 할 악마에 불과 하였다.아즈텍 궁성에서 약탈된 엄청난 금은보화는 당시 유럽의 어떤 황제의 재산보다도 많은 가치였다. 그러나 한밤중에 몸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보물을 훔쳐 달아나던 스페인 병사들이 성난 아즈텍 시민의 공격을 받아 호수에 빠지는 바람에 그 보물의 행방은 아직도 베일에 가려 있다. 그리고 그 자리는 지금 성당과 관공서 건물이 빽빽이 들어선 멕시코시티의 시내 중심부가 되어 있다.
1492년 가을, 산타마리아호를 타고 금을 찾아 나선 콜럼버스를 시발로 수많은 스페인 사람들이 환상 속의 금의 섬 엘도라도를 찾아 아메리카의 구석구석을 헤집고 다녔다. 보물찾기에는 잔인한 인간사냥에 따랐다. 백인들은 닥치는 대로 학살하고, 여자들은 욕정의 제물로, 또 노예로 부리면서 멕시코 땅에 메스티조라는 혼혈의 씨를 뿌려 놓았다. 스페인과 토착 인디오의 혼혈인 메스티조가 7천만 멕시코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80%, 한 세대를 살다간 스페인 병사 하나가 평균 100명의 메스티조를 만들어 내었다는 결론이다.
스페인의 저질러 놓은 죄악의 벽에 둘러싸여 이런저런 번민에 빠져 있다가 허름한 시내의 어둠 속으로 발길을 옮겼다. 거리의 주막인 따께리야 앞을 지나자 막 구워낸 또르띠야의 은근한 냄새가 나그네를 유혹한다. 물에 불린 옥수수를 으깬 마사를 둥글고 얇게 펴서 구운 빵이 또르띠야인데, 그 속에 고기를 넣고 여러 향료로 버무린 타코스의 맛이 일품이다. 타코스는 멕시코의 대중 샌드위치인 셈이다. 골목마다에는 때때로 아즈텍의 잔향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데킬라 술에 취한 왁자지껄한 말소리엔 힘이 배여 있고, 거리의 밴드인 마리아치의 연주에 덩실거리는 몸짓 하나하나에는 아름다움과 역동이 살아난다. 투우와 플라밍고라는 스페인의 정열이 이곳에도 그대로 심어졌지만, 데킬라 맛과 마리아치의 선율에서 왠지 화려함 뒤에 숨은 인디오의 애환이 절절이 느껴져 온다. 용설란에서 제조된 증류주인 데킬라는 살짝 단맛으로 넘어가다 씁쓸한 뒷맛을 남기고, 마리아치의 애절한 민요가락에는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인디오의 슬픈 과거와 탄식이 배어 있다.
멕시코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은 아즈텍의 선진문화인 테오티와칸의 유적지이다.20만 평방 킬로미터의 면적에 20만의 인구를 거느렸던 콘스탄티노플에 버금가던 대도시 테오티와칸, 자동차로 한시간을 북쪽으로 달리자 중미 최대의 고대 도시국가 테오티와칸의 웅장한 피라미드의 모습이 방문객을 감동시킨다. 이 태양의 피라미드는 한 변이 225미터, 높이가 65미터가 되는 거대한 축조물이다. 그리고 비스듬히 맞은편에는 같은 규모의 달의 피라미드가 짝을 이루고 있다. 이 피라미드의 내부에도 일정한 역년에 따라 지어진 몇 개의 피라미드가 중첩되어 있다는 설명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이집트 피라미드의 모티프에 메소포타미아의 지구라트의 축조양식을 연상케 하는 테오티와칸의 피라미드 계단을 오르며, 나는 문득 문명의 독자발생설에 강한 의문을 던져본다. 유럽과도 아시아와도 오랫동안 단절되어 중남미 특유의 독특한 문화를 일구어 내었다는 아즈텍, 마야, 잉카의 문화에 대한 신비와 의혹이 더욱 호기심을 자극한다. 이 문명의 주인공은 누구였으며, 그들은 어떻게 사라져 버렸나? 기원전 2세기에 형성된 테오티와칸 문명은 기원후 350년∼650년 사이에 번영을 누렸다. 그리고 7세기경이 문명은 갑작스런 쇠퇴와 함께 역사 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후일 이 테오티와칸을 발견한 아즈텍인들은 이곳을 신들의 고향이라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들의 우주관의 핵을 이루는 태양과 달의 신화의 무대로 삼았다. 그리고 중남미 신화의 중심부를 차지하는 케찰코아틀 신전이있다. 깃털이 난 뱀의 형상을 한 케찰코아틀은 물과 농경의 신으로서 풍요와 낮을 상징하였다. 복원된 신전 벽면에는 아직 적색과 녹색의 채색이 원래대로 선연하게 남아있고, 릴리프된 케찰코아틀과 비의 신트랄로크의 두상이 잊혀졌던 테오티와칸의 신화를 전해주고 있었다. 이곳의 신화는 중미의 새로운 주인이었던 틀테카인들을 거쳐 마야로 전해졌고, 아즈텍인들에 의해 계승되었다. 이리하여 태양신과 달의 신을 중심으로 인신공양을 행하던 테오티와칸의 우주관과 문화형태는 중남미 전역으로 퍼져 마야, 잉카, 아즈텍 사이에 일정한 문화의 연결고리를 제공해 주었다. 지금 메스티조의 멕시코인들은 토착화된 카톨릭을 믿고 있다. 그래서 멕시코인들은 그들의 토착 성모를 만들어 내었다. 검은머리에 갈색의 피주를 가진 과달루페 성당의 인디오 성모는 멕시코인의 정신적 구심이다. 매년 과달루페 성모의 대축제가 열려 전국의 순례자들이 모여오면, 과달루페 광장의 또 한쪽에서는 주술적이고 광란적인 아즈텍 댄스가 함께 어우러진다. 아즈텍의 토착여신이 성모로 승화되면서 이제 카톨릭과 토착신앙은 하나로 융합되었다. 그들이 혼혈의 메스티조인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