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하는 사람들

영혼을 갈구하는 껴안음의 춤

-무용가 이정희론



김영태 / 시인, 무용평론가

살풀이는 끝나지 않았다

춤의 성격이 뚜렷한 안무가를 선정하라면 이정희는 그 중의 한 사람이다. 이정희의 안무 패턴을 연대기적으로 구분한다면「살풀이」연작 (1980∼1993년),「필름, 비디오 춤」,「거리의 춤」,「검은 영혼의 노래」 연작(1988∼1994년)을 들 수 있다.

나는 이정희를 가리켜 '그릇이 크다'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그 말속에는 이정희의 춤의 스케일, 안무가의 시야와 고집, 현실을 직시하는 역사의 반영이 들어 있다.

이정희의「살풀이」 연작은 1993년 「살풀이 아홉」으로 일단 대단원의 막을 내렸지만 나는 '살풀이는 끝나지 않았다'고 썼었다 (1993년 「살풀이 하나」,「살풀이 아홉」, 지방순회공연 프로그램). 「살풀이」의 개념은 앞으로도 이정희 춤의 근간으로 변형 변주될 것이다. 섣부른 현실발언을 우리는 저간의 춤 무대에서 수없이 목격해 왔다. 예술적으로 여과되지 않은 이러한 생경한 발언이 춤이 될 수 없는 것은 물론이다. 1980년 광주항쟁의 상처부터 춤의 주제가 된 「살풀이」 연작은 비디오 실험 무대, 흙의 무대, 모차르트의 「휘가로의 결혼」 중에서 칸초네 「그대는 아세요 ? 사랑이 무엇인지」, 강송원과의 2인 무로 삶의 축소판 격문을 드러낸 「살풀이 여덟」이나 남북 분단 문제를 다룬 끝 작품까지 그것은 이정희 춤의 육성을 들려주었다. 이정희의「살풀이」연작을「아홉 개의 비가」로 보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70년대와 80년대 초까지 여성 군무들이 진을 치던 현대무용 작품에 이정희는 남성 무용수의 비중을 일깨워 주었다. 1980년「살풀이 하나」에 출연했던 조규현(재미), 강송원의 등장은 그 예고이고, 지금도 이정희 아래 세대 푸름 무용단의 정현옥 같은 신인들을 배출했다. 뿐만 아니라 작곡가 이건용·우종갑, 극작가 이강백·홍원기, 의상 선미수, 화가 김구림·오경숙, 영상에 이동현 등과 손을 맞잡았다.

이정희의「살풀이」연작에 대해 박용구는 '무용적 조형의 차원에서 무용음악의 차원에서 무용수들의 기량의 차원에서 또 그 무용 적인 내용에서「살풀이」연작은 무용 적인 증언으로 남게 될 작품이다. 시간과 공간 속에서 육체언어가 뜨거운 입김처럼 실상을 체험 시켜 주는 세계'라고 진단했다.

나는 1992년 서울무용제에서 아무 상도 수상하지 못한「살풀이 아홉」을 보고 서울무용제 출품작 중 수작이라고 경향신문 무용평란에 썼었다. 남북 협상 테이블 위에서 춤은 전개된다. 즉흥적 움직임과 얼굴에 회칠한 분장 출연자들의 무표정은 협상의 교착 상태를, 계속해 서 테이블 가를 맴도는 이정희의 '기다림'은 끝내 이정희가 빗자루로 테이블을 쓸어버리듯 겨레의 비극을 암시했다. 허울좋은 협상이고, 나발이고, 이념이 좁혀질 수 없는 노파의 분노는 삶의 현장과 맞아떨어지는 침묵이 도배된 춤 언어의 진실한 '말' 이었다.

나는 이정희라는 큰 그릇 속에「살풀이」연작은 막을 내렸지만 그 이후로도 이정희의 춤에는 살풀이가 적재되어 있기 때문에 끝나지 않을 살풀이를 다음 무대에서도 만날 것으로 내다보았다.

비디오 춤 실험 작과 거리의 춤

'춤은 무한대로 열려 있으며, 무대는 새로워야 한다.' 이정희는 자신의 좌우명을 이렇게 요약한 적이 있다. 이정희는 무용가가 작품을 안무할 때 관객들에게 '어떻게'보다 '무엇을' 보여주는가에 중점을 둔다. 이정희는 1986년「19860130」을 안무하면서 '시간성과 공간성에 대한 문제들을 무대라는 고정 공간 속에 유입시킴으로써 표현양식과 그 내용에 있어서의 동질성과 이질성'을 찾는 실험을 했다. 창무 춤터에서의 비디오·춤 작업이 그것이다.

창무 춤터 무대에 놓인 일곱 대의 TV 화면에는 녹화된 필름이 방영된다. 화면에는 이정희의 무대 공연 실황, 거리의 스냅 풍경, 신생아 실에서 탄생하는 아기, 그런가 하면 아프리카의 난민들 모습도 비친다. 현장의 두 대의 카메라는 네 출연자들의 표정도 놓치지 않고 잡는다.

녹화된 필름, 현장 중계, 4인 무는 춤의 동질성과 이질성을 대변하고 있다.「19860130」은 이정희 와 이동현의 첫 딸 루나의 생년월일을 의미한다. 신생아 실에서의 아이의 탄생이 필름, 비디오, 춤의 주제지만, 생명의 외경은 여러 개의 겹치는 풍경의 전이에 의해, 그리고 현장 춤에 의해 시공간을 초월한다. 춤이 영상을 수용하고, 영상(화면)은 춤을 포용한다. 객석에서 보면 이중으로 드러나는 '그림자 놀이' 역시 이 퍼포먼스의 특징이라 할 것이다. 풍경과 사물, 모니터가 잡은 춤추는 출연자들이 클로즈업되는 과정도 이색적인 순간 포착으로 기억에 남아 있다.

이정희는 꿈, 환청 장면을 청각·시각·공간 속에 즐겨 활용했다. 색이 다른 셔츠를 입은 무리들의 갈등이 셔츠를 벗고 알몸으로 어울리는 막간이라든가, 꿈 장면이 처연했고 아름다웠던「살풀이 여덟」2인 무에서 강송원의 검은 정장 차림, 눈부신 흰 드레스 차림인 이정희의「추억의 사진첩」등은 인상에 남아 있다. 무스를 발라 머리칼을 위로 솟구친 외계인 같은 강송원은 첫 장면 때 검은 우산을 다음 장면에서는 흰 파라솔을 들고 나온다. 강송원은 우산을 접고, 고물 축음기를 튼다(모차르트의 아리아). 흰 드레스를 입은 신부와 맨살에 정장 차림의 신랑은 시큰둥하게 팔짱을 낀다. 이런 시큰둥한, 정지된 추억의 사진첩 해설자 박은화의 상황 솔로도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의 압권은 피날레였다. 하늘 가득히 희고 검은 우산들이 내려오던‥‥‥.

1982년 1회 현대무용제 때 이정희가 안무한「의자」와 1980년 외국에서 초연 된「테이블 위에 화분 하나」를 보고 나는 시 한편을 썼었다(김영태 시집「결혼식과 장례식」, p.109, 1986년, 문학과 지성사).

거리에는

검은 띠 두른

한얀 葬禮車가 지나가고

손가락 七絃에 넣어 후벼파듯

난 아쟁처럼 울었다

메마른 흙 속에

살아 남은 풀줄기

미쳐 버릴까

(그래, 미쳐 버리렴!)

거리에는 장례차가 지나가고

난 머리 풀고

그러면 우는 아쟁

「의자」는 무대 막을 중간쯤 개방했었다. 이러한 시도는 무기물인 의자와 그 옆에서 광란의 춤을 추는 우리의 등가 개념을 암시했다. 의자들을 무대 중앙으로 모두고, 회귀하는 새들처럼 군무들이 자리를 찾아 앉거나 의자 뒤로 몸 숨기기, 의자를 들고 줄달음치기, 또는 의자를 바닥에 내던질 때의 굉음은 이정희의 감정 폭발, 심리 상태와 무관하지 않다. 존 케이지의 불협화음을 배음으로 선택한 「의자」는 냉전시대를 살아가는 그의 자화상이었다. 「살풀이 하나」의 주제가 한(恨)이었다면(박용구는 이정희가 계속 풀고자 한 살, 즉 독소는 이정희 작품 속에 드러난 문제의식의 과녁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살풀이 둘」은 무대에 흙이 깔린 토속적 풍경이었다. 「살풀이 여덟」의 정장 차림이나, 의자들이 뒤엉킨「카페 뮐러」의 실내, 무대가 온통 카네이션 꽃밭인 '피나 바위시' 작품과 이정희의 작품들은 표현주의의 동질선상에 있다 하겠다. 이정희의 흙의 무대는 광란이나 시위하고는 다른, 풋풋한 대지의 입김과 삶의 희열을 노래한다.

'‥‥‥언젠가는 우리들도 흙 속에 묻힐 몸부림이며, 삶의 고통스러움을 해소하는 지열(地熱)이다.' (김영태 무용평론집,「갈색 몸매들, 아름다운 우산들」, p.314, 1985년, 知文社)

「의자」는「살풀이 셋」에 확대 접목된다. 광대한 우주가「살풀이 셋」의 주제인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 속에 떠 있는 항성(恒星)에 지나지 않는다면 우주의 신비야말로 무한대로 열린 공간을 의미한다. 별의 운행과 질서, 상상력과 꿈, 인간의 대화는「살풀이 셋」에서 춤에 의해 발광체 구실을 한다. 그 발광체들은 흩어지고, 다시 귀환한다.'(知文社

같은 책, p.243)

이정희가 거리의 춤(일명 「봄날 문밖에서 춤」)을 시도한 것은 1984년부터이다. 거리의 춤(야외 무대)은 안성에 있는 중앙대 교정에서부터 서울 방배동 삼호 아파트 단지, 덕수궁, 동숭동 마로니에공원, 여의도광장, 국립극장 분수대(1984년), 대학로(1985년), 경동 교회 옥상, 임진각(1980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뉴욕 센트럴 공원, 하와이 와이키키 해변(1987년), 크리스천 아카데미, 국립 현대미술관, 1회 한강 댄스 페스티벌 때 한강 고수부지(1990년), 춤 의 해 청소년 예술제 국립극장 야외마당(1992년), 청와대 앞길 (1993년 거리의 춤 10주년 기념) 등에서 공연되었다.

미국에서 거리의 춤은 보편화 된 추세지만 10년 동안 지속되어 오고 있는 이정희의 거리의 춤은 그의 주장대로 자연으로, 인간으로 돌아가자는, 고정된 프로시니움 아치 무대로부터의 탈피였다. 그리고 극장 관객이 아닌 시민들과의 격의 없는 만남이요 거리문화를 창조하려는 의욕이었다. 거리의 춤 시도는 공연장의 확산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이정희의 거리의 춤은 현대무용의 표현 공간을 확산시킬 뿐 아니라 춤이 생활 속으로 파고드는 계기를 마련했다.' (조동화)

'거리의 춤은 인위적인 스포트라이트나 분장, 의상, 공연 안내장을 거부하며 극장 밖에서, 태양 아래서, 도시의 빌딩 사이에서 우연히 만난 관객들에게 기존 무대의 관념에서 뛰쳐나오는 춤 공연의 한 형태를 보여주었다.' (장광열)

'이정희는 춤을 무대 안에서 무대 밖으로 끌어내었다. 이정희의 춤은 그렇다고 해프닝하고는 다르다. 조명·분장·소도구 같은 꾸밈도 없는 자연과 만나는 춤이다.' (김영태)

'50년대까지 프로시니움 아치의 울타리 안에서 발레와 실랑이하던 현대무용은 60년대에는 그 공간을 훌훌 털어 버리고, 소박한 공간들을 찾아 나섰다. 회랑·교회·빈 사무실 등의 공연장으로 바뀌었고, 주차장·풀밭·광장·수영장 심지어 지붕 꼭대기까지 공연장으로 바뀌었다.

주차장을 이용한 매르디스 멍크는 1994년 9월 맨해튼과 퀸즈 사이에 위치한 작은 섬 루세벨트 에서「미국 인류학·1」을 안무했었다. 센트럴 공원 잔디밭에서 춤을 춘 트와일라 타프 등이 있지만 옥외 공연의 절정을 이룬 무용가는 지붕 위의 공간을 이용한 트리샤 브라운일 것이다. 휘트니 박물관의 벽을 걸어다니는 춤을 통하여 무용공간의 탐색을 시도한 그녀는 1973년 맨해튼 남단 부의 여러 건물의 지붕을 이용해 춤을 추었다.

'이정희의 거리의 춤은 미국과의 시대적 거리는 있어도 매우 의미 있는 작업임에는 틀림없다.' (김우옥)

1986년 군사 분계 점 임진각에서의 거리의 춤은 그의「살풀이」의 별장(別章)에 해당된다. 메조 소프라노 이경애가 한복 차림으로 부른「비가」(김연준 작곡)는 남북 이산가족들의 응어리진 설움이며 망향의 시름을 달래는 통일의 기원이었다.

'‥‥‥30여 분 진행된 임진각자유의 다리 앞에서의 춤은 이정희를 비롯해 아홉 명의 출연자들이 삼베옷을 입었었다. (중략) 필립 그라스의「사건가」음악에 맞춰 아스팔트 위에 여한을 남긴 춤은 천 개의 풍선을 하늘에 날려보내며「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란 합창으로 끝맺음을 장식했다.' (김영태 무용평론집,「막간」, 청하, p.233)

70년대 6인의 무용가 발탁과 초기 작품

이정희의 초기 작품은 움직임의 동선들이 주축을 이루었었다. 서울에서 태어난 이정희는 이대 무용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그의 스승이었던 육완순이 1975년 컨템포러리 무용단을 창단 했을 때 이정희는 창단 단원이었다. 창단 공연이 1975년 12월 6일 크리스천 아카데미 팔각정에서 막을 열었을 때 이정희는「꼭두인간」을 안무했고, 연극배우 최주봉이 객원으로 출연한 소품은 주목을 끌었다.

이정희는 70년대 무용가 6인 (이순열·경경옥·조동화 추천)으로 선정되기도 했는데 진수방 ·임성남·박외선·육완순·홍신자 중 최연소 자였다.

이정희가 1976년 공간 사랑 춤과 음악과의 만남「실내」(김윤성 시, 백병동 작곡)에 김기인 ·서영희 등과 출연했을 때 나는「공간」지에 평을 썼었다.

'백병동 작곡「실내」는 소프라노와 기악과 춤의 대화를 시도한 작품이다.「실내」는 밀폐된 상황을 암시하는데 공중에서 내려온 밧줄은 이 드라마를 상징적으로 대변한다. 무대에는 춤추는 세 사람과 소프라노 연주자 9인이 부여받은 역할을 이행한다.

우·아·치·칫·촉·하·하·얏·핫‥‥‥

이것은 소프라노들의 발성이다. 이런 불길한 의성음 뒤를 이어 트럼펫, 호른, 트럼본의 파열음이 가담한다. 세 개의 악기에서 고조되는 음은 평면 위의 무수한 돌기를 피해가며 각축전을 벌인다. 그러나 밀폐된 상황에서 의식의 갈등을 표출하는 것은 세 무용수들의 인체의 난립이다.

그들은 생명의 태처럼 늘어져 있는 밧줄을 향해 근원의 시선을 던지고 있다. 세 인체의 격렬한 몸부림은 한 사람의 이탈자를 저지한다. 이탈과 저지의 반복, 그래서 아무도 그 밧줄을 잡고 밖으로 탈출할 염두를 내지 못하는 절망적 분위기‥‥‥‥.

어디로 향한 시간인가

거기 계절도 없이

스스로 한 개의 질서와 생명과

모습을 이루었으니……

소프라노들과 기악주자들은 허공을 향해 질문을 던지고, 춤은 제각기 그 물음에 화답하고, 혹은 거부하다 끝내 추락한다. 백병동의 인성(人聲)과 이정희 등이 관객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는 이 시대에 표류하는 인간들의 울부짖음 같다. 그들은 멍석 위에 주저앉아 저주스럽게 그 자리에서 맴돌았다.'(知文社, 같은 책,「표류하는 무리들」, p.335)

이정희는 도미하기 전「서기 2천년」,「누군가 내 영혼을 부르면」등의 몇 작품을 안무했고, 1977년 홍신자 귀국 무대에서 연극배우 양서화(楊西化)와「두 사람에 의한 여섯 가지」(구 명동예술극장)를 춤추었었다.

1977년 말 이정희는 미국 유학 길에 올랐다. 뉴욕대학, 콜롬비아대학에서 수업을 받는 한편 마사 그레이엄 무용 학교, 머스 커닝햄, 호세 리몽 등의 현대무용 클래스에서 3년간 테크닉을 전수 받았다. 이정희는 1980년 뉴욕 소호에 있는 퍼모밍 갈라즈에서「살풀이」등으로 데뷔공연을 가진 뒤 그 해 귀국했다. 뉴욕 데뷔공연은 한국적 정서와 현대적 감각을 춤 속에 혼합시킨 유학 3년여의 미국체류 결산무대였다.

이정희는「살풀이」연작 시각에 대해 '남들은 뭐가 그리 풀 게 많아 13년을 같은 살풀이에 매달렸느냐는 질문을 하지만 나에게는 그것이 삶의 주제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인생을 비극적인 눈으로 바라봅니다. 살아가는 것 자체가 풀어야 할 살로 가득 차있으니까요‥‥‥.' (정지영 영화감독과의 대담)

'춤이란 언제나 앞서가는 것, 새로운 실험장'임을 표방했다. 이정희의 귀국 공연「살풀이 하나」는 1980년 2회 서울 무용제에서 안무 상을 수상했다.

「검은 영혼의 노래」 작은 비가(悲歌)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이정희는 컨템포러리 무용단을 탈퇴하고 중앙대 전임으로 부임했다. 1981년「살풀이 둘」(3회 대한민국 무용제 당시 명칭), 1982년「살풀이 셋」(4회), 1983년 「살풀이 넷」(5 회)을 잇달아 안무했다. 무용제에 한 무용단이 계속해서 작품을 올린 것도 드문 일이다. 이정희는 1982년 판 소극장 개관 때「가로등」을, 1983년 한·일 교류공연 때 「세 사람」을 안무했고, 1984년 에「자연인」(비디오 영상 이동현 합작) 연작을, 1987년 1회 춤 작가 12인 전「낙원 추방」(강송원 2인 무)은 주목에 값했다. 1988년 2회 춤 작가 12인 전에 선보인「검은 영혼의 노래」는 그의 춤 안무에 전환점을 마련해 주었는데「TV 나무」도 그해 작품이다.

이정희는 1989년 비엔나 오데온극 장에서 개최되었던 국제 안무가 경연대회에「검은 영혼의 노래·1」을 출품해 특별상을 수상했다. 「검은 영혼의 노래·1」과「살풀이 아홉」, 두 작품이 1994년 파리 국제 무용제(말레이시아 쿠아라룸푸르 시티극장)에서 공연되었을 때, 가장 각광을 받은 작품은 프랑스 작품(10대로 구성된 다국적 모임)과 이정희였다.

"검은 의상을 입고 출연한 이정희는 무당이나 여자 마법사로서 표현할 수 없는 능력을 가진 무용수였다. 그녀는 나무 의자에 앉아서 깊은 곳에서 솟아 나오는 영혼의 단호함과 무게를 모방하였다. 그녀가 입은 긴 수의(壽衣)처럼 그녀의 머리칼도 길고 검은 색이었고 무대에서 오랫동안 그녀의 얼굴을 가리웠다. 음침한 모습으로 그녀는 손가락으로 머리칼을 가르고, 구근 모양의 눈, 날카로운 송곳니와 혀처럼 어두워 보이는 몸을 결합했다.

의자의 앞, 뒤 혹은 맨 윗 부분에 앉거나 혹은 웅크리고, 능숙하고 사악한 동작으로 자신의 공간을 정성스럽게 제한하고, 각(角)이 진 동작을 조심스럽게 연출했다. 그녀의 옆으로 닫혀져 있는 양측 커튼은 영원한 미궁처럼 뒤편에서 환하게 빛나는 원형 파노라마(하늘 기둥처럼 보이는)와 대조를 이루었다.

그곳에 앉아 있는 이정희의 모습은 마사 그레이엄의 춤「비탄」에서 본 적이 있는 육중한 금지의 분위기를 연상시켜 준다. 그녀가 표현해 내는 형용할 수 없는 힘은 인간 속에 자리잡고 있거나 인간이 소유한 바로 그런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안무가의 놀라운 개성은 원초 적인 힘, 추미(醜美)이며, 능숙함과 사악함이 혼합된 안무는 어두우면서 생기가 사라진 조명 효과로 더욱 돋보였다. 이정희의 작품은 단순히 피상적인 경지를 넘어 그녀와 우리가 모두 가지고 있는 형용할 수 없는 '영혼을 파헤치는' 작품이다."(필리핀 무용평론가 바실리오 E 빌라루스 평)

이정희의「검은 영혼의 노래·1」은 발레 인터내셔널 탄츠 악튀엘(10월호)지에「살풀이 아홉」등과 소개되었고, 그런 인연으로 이정희는 몸담고 있는 대학의 안식년을 맞아 1995년 2월, 6개월간 체류 예정으로 서독 엣센에 있는 폴프방 학교-구르트 요스가 창설한 이 학교의 전통은 현재 피나 바위시 등의 교수진을 비롯해「욕조」를 안무한 스잔 링케, 라인하르트 오프만을 배출했다-에 교환 교수로 떠났다.

이정희 작품 중에 가면(假面)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살풀이 여섯」부터이다.「살풀이 여섯」(1985 년)을 보고 나는 '오지(奧地)에서 생존하는 잉여 인간들이 얼굴을 가면으로 가지고 있다가 끝내 가면을 벗을 때의「자기 고해」'에 대해 쓴 적이 있다(「막간」,같은 책, p.152).

이정희의「검은 영혼의 노래」는 '비가 중의 작은 비가'이다. 그러나 그 '작은 비가'의 흑백 톤, 인간의 고뇌, 슬픔의 만다라는 괴이하면서도 아름답다. 이정희가 가면을 쓰고 있을 때와 가면을 벗는 순간의 찰나가 솔로인 극 무용의 열쇠이다.

1989년에 만난「검은 영혼의 노래」두 작품은 그러므로 이정희 춤 인생의 터닝 포인트였다. "‥‥‥검은 색(흑색과 백색 대비)은 가장 아름다운 색이다. 나는 검은 색을 그렇게 보고 싶다.「검은 영혼의 노래·2」는 뒷모습과 나중에 앞모습 상체가 누드이다(누드처럼 분장했다). 앞면의 가면은 매우 일그러져 있다. 김구림의 미술, 철사 풀들은 조명을 받아 비가의 현장을 담선들, 혹은 뭉치들로 드러낸다. 그것은 철사 꾸러미 같고 꽃이 피지 않는 나무등걸 같다.

이정희는 관객들에게 침묵을 종용한다. 침묵을 말아먹거나 침묵을 마음의 물결로 고정할 때 그 침묵의 소리나지 않는 아우성이 살아 있다.

「검은 영혼의 노래·3」에서 이정희는 1·2번과 반대로 그의 정면을 보여준다. 그것은 공개되는 현장이다. 웃음기 없는, 침울한, 이 시대의 그 음울한 색소의 전신은 그래서 바로크풍적인 요소도 있다.「검은 영혼의 노래」1·2번이 침묵의 강변이라면 3번은 화해의 기미가 엿보인다. 「살풀이」 이후 그의 소품 연작은 자신의 무기력함을 재충전하는 의식의 일깨움, 어느 면에서 비극을 묵과하지 않는 '떨림'같은 것들이다."(김영태 무용 평론집. 「연두색 神혀 家具들」. p.187, 1991년 시와 시학사).

1993년에 만난 이정희의「검은 영혼의 노래·5」는 빗속에서 듣은 엘레지였다.

'‥‥‥막이 오르기 전, 그리고 막이 오른 후에도 계속해서 억수같은 비가 쏟아진다(녹음 효과). 검은 비닐지가 구불구불한 진창길을 만든다. 삼각형으로 버틴 철제 사다리 위에는 영혼 하나가 절규하고 있다. 이정희의 절규는(산발한 머리칼도, 육신도, 토해내지 못하는 말도, 신음도) 빗물에 젖은 검은 선, 혹은 입체(立體)였다. 사다리를 내려와 진흙탕에 뒹구는 자신을 추슬러 다시 사다리로 기어오르는 그 검은 선의 비애에 젖은 몸뚱이는 조그마한 가축이 아닌 들짐승의 포효(砲酵)였다. 이정희는 변신을 거듭하는 천사와 마녀 사이 일란성 쌍생아 ? 그런 것 같다. 그러나 그의 무대 현장으로 우산을 들고 엄마를 찾아온 딸을 그가 껴안았듯 빗속의 모정은 또 얼마나 끈끈한가.' (「무용예술」1993년 5·6월 호 공연 리뷰 p.88, 1993년 무용예술사)

나는 1990년에 이태섭 무대미술이 작품 분위기와 맞아떨어졌던, 연작 중 처음으로 붉은 의상을 입고 나오던「검은 영혼의 노래·4」의 그로테스크한 무대를 만났고, 도니제티의 곡 「남 몰래 흘리는 눈물」을 게리 카가 콘트라베이스로 연주한 6번의 1995년 근작에서 이정희라는 큰그릇의 상상력과 춤 이미지가 인간을 껴안음을 목격했다.

이정희는 부단히 변모하는, 자기 갱신을 성취하는 무용가이다. 교환교수 6개월 후에 그가 독일에서 돌아와 또 어떤 춤의 변모를 우리에게 보여줄지 기대된다. 그의 춤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생존과 죽음, 열락(悅樂)과 상처의 흑백 대비는 삶의 종이 한 장 차이이다. 초기의 동적인 춤은 1988년 이후 정적인 것으로, 그의 말을 빌자면 '동작의 극소화가 죽음과 영혼의 무게를 체득'하고 있다. 이정희의 20년 춤 현장을 중간 결산하면서 '이정희는 더 이상 인간을 껴안으려 하지 않는다. 자신을 냉대한다. 그러나 영원을 갈구하는 그의 춤은 궁극적으로 껴안음의 춤'이라고 결론을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