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기행 ⑥ / 이집트문명. 룩소르

이집트 대중의 시대가 열렸던 곳




이희수 /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카이로 일대가 대 피라미드로 연상되는 이집트 고 왕국의 중심이라면, 카르나크 신전이 있는 테베는 침입자 힉소스의 지배를 종식시키고 새로운 이집트를 건설한 곳이다. 태양신과 동일시되던 이집트 왕 파라오는 침략자에게 무릎을 꿇으면서 그 신성불가침의 권위는 손상되었다. 귀족과 사제들의 세력이 성장하면서 대중들의 의식에도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파라오만이 부활하여 영생 불멸한다는 믿음에 회의가 생기면서 귀족과 대중도 내세의 주인공이 되고자 했다. 그들도 미라를 만들고 피라미드를 만들어 사후의 거주공간을 준비하였다. 이제 이집트 신화는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으로 대중의 삶을 대변해 주게 되었다. 파라오 중심의 역사에서 이집트 대중의 시대가 열렸던 곳이 바로 테베. 오늘날의 룩소르 일대이다.

3500년 전 나일강 상류에 꽃피웠던 왕묘와 신전의 도시. 이집트 문명의 혼과 대중적 신화가 살아 숨쉬는 룩소르를 뺀다면 이집트 방문은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할 것이다. 카이로를 출발한 야간 침대 열차는 나일강을 역류하면서 15시간을 달린다. 짐 보따리를 베고 아무렇게나 누워있는 남루한 차림 사이로 새어나오는 억센 이집트 방언이 밤새 신화를 엮어낸다. 이집트의 느슨한 정서와 열차 시트에 매캐하게 베어 있는 역겨움까지도 룩소르를 간다는 흥분에 가려 즐거운 추억으로 간직되었다. 이른 아침 룩소르 역에 도착하면서 역무원이 타주던 진한 아랍 커피의 향내는 이집트의 유혹이었다. 지금도 코끝에 또 다른 이집트 여행을 떠올리게 된다.

테베의 주신은 아몬이었다. 이곳의 수많은 신전은 아몬 신을 위한 것이다. '정선된 성스런 땅' 카르나크의 40만 평에 지어지고 폐허가 된 신전의 숫자는 아무도 모른다. '백 개의 관문을 가진 거대한 도성'이었다는 호머의 표현으로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다만 완벽한 예술성과 거대한 규모로 이방인을 압도하는 것은 역사상 가장 장대한 신전인 카르나크의 아몬 대 신전이었다. 한때는 이집트의 모든 신전이 이곳에 복속 되어 있었다고 전해진다. 입구 양쪽에 줄지어 선 양 머리 형상의 스핑크스 행렬 사이로 의장대의 사열을 받듯이 계단을 내려가면 장엄한 134개로 된 열주의 행렬과 이 신전의 건설자인 람세스 2세의 거상이 나타난다. 원래는 지붕이 덮인 신전이었다고 하는데 지붕이 내려앉고 소실되어 하늘의 태양 빛이 바로 열주 사이를 비추어 그 신비로움과 화려함에 입을 다물 수가 없다. 신전이라기보다는 조각광장이란 표현이 더 적절하겠다. 채색의 아름다움이 희미한 빛을 발하는 열주마다에는 상형문자로 신 왕국의 마지막 영광을 구가했던 람세스 2세의 역사와 이집트의 신화가 기록되어 있다.

카르나크의 신전과 열주의 양식은 그리스와 파르테논 신전의 그것에 닮아 있다. 파르테논보다 천 년이나 앞서 세워졌던 카르나크 신전의 규모와 정교함이 오히려 돋보였다. 서구 문명의 뿌리를 로마와 그리스에 두고 검은 아프리카의 이집트와 동양의 오리엔트 문명과의 단절을 시도했던 유럽인들의 오만이 너무나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이집트와 그리스 로마 문명 사이에 단순한 형태나 양식의 영향만이 나타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미라와 파라오의 부활사상은 그리스의 디오니소스 신앙으로 연결되어, 기독교의 부활개념의 근원이 되었다.

또한 이집트의 많은 신들은 이름을 바꾸고 옷을 갈아입어 그리스와 로마의 신으로 둔갑하였다. 너무나 인간적인 이집트의 신들은 인간세상의 희로애락과 선악을 모두 표상 하였다. 신들은 결혼하여 자식을 낳고, 질투하여 서로 죽이기도 한다. 심지어는 사랑에 빠져 미혼모의 갈등을 경험하기도 한다. 사랑의 여신 하토르는 아프로디테가 되고, 처녀의 몸으로 잉태한 네이트 여신은 그리스로 가서 아테네 여신이 되었고, 다시 성모 마리아로 되살아난다.

아누프와 바타형제의 이야기는 구약에 나오는 요셉과 보디발의 아내에 대한 이야기를 닮아 있다. 그러나 흰 것만이 선이고 최고라고 믿었던 유럽인들은 자신들의 가슴속에 뜨겁게 흐르고 있는 이집트의 정신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리스의 파르테논은 지금 유네스코가 지정한 인류문화유산 제1호이지만 카르나크의 의의와 존재를 아는 사람은 몇 사람이나 될는지.

북쪽의 카르나크 신전에서 양 머리 형상의 스핑크스 행렬은 10 Km를 이어 남쪽의 룩소르 신전까지 연결되었다고 전해진다. 지금은 군데군데 폐허의 잔해만이 3500년 연륜의 역사를 초라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룩소르 신전 앞에는 람세스 2세의 좌상과 입상이 있고 1개의 오벨리스크만이 조화를 잃은 채 서 있다. 태양신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이집트인들의 열망은 하늘을 향해 뾰족하게 솟은 오벨리스크를 남겼다. 그러나 그 오벨리스크들은 이제 태양신을 떠나 파리의 콩코드 광장에서, 또 이스탄불의 히포도롬에서 이집트를 다녀온 관광객들로부터 테베의 소식을 들으며 향수에 젖어 있다.

룩소르의 신전들은 떠오르는 태양을 위해 나일의 동편에 있다. 그리고 태양이 지는 나일의 서편에는 예외 없이 이집트인들의 묘지가 있다. '네크로폴리스'라 불리는 서쪽 강변의 거대한 '죽음의 도시'에는 파라오의 무덤 군으로 유명한 왕가의 계곡과 왕비의 계곡, 장제천들이 자리잡고 있다. 신 왕국 시대에 이르러 귀족과 사제 세력이 점차 성장하여 파라오의 권위에 도전하게 되자 테베의 지방신 이었던 아몬도 태양신 라와 결합하여 최고 신 '아몬-라'로 승격하였다. 파라오만이 부활하여 불멸한다는 사상은 귀족과 일반 대중으로 파급되었고, 규모가 작은 수많은 피라미드가 룩소르의 네크로폴리스를 뒤덮었다. 그 피라미드는 대부분 쉽게 손상되거나 도굴되었다. 그러자 파라오들은 깊은 계곡에 암벽을 뚫고 아무도 모르는 암굴 무덤 속에서 내세를 추구하였다. 황금 마스크의 부장품으로 20세기 최대의 발굴로 잘 알려진 투탄카멘의 무덤이 발견된 곳이 바로 이곳이다.

투탄카멘은 파라오의 권위를 회복하고자 아몬을 버리고 새로운 태양신 아본을 숭상했던 아벤헤뎁 4세의 사위이자 후계자로 알려져 있다. 이벤헤뎁은 수도를 아마르나로 옮기고, 자신의 이름을 '태양의 광휘'라는 이크나론으로 개명하면서 파라오 중심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이크나론이 죽자, 귀족들은 수도를 다시 테베로 옮기고, 10세의 어린 왕 투탄카멘을 옹립하였다. 가장 초라하고 허약했던 한 파라오의 무덤이 이러할 진데, 아직도 숨겨져 있는 수많은 파라오들의 무덤의 규모나 그 부장품은 상상이 미치지 않는다.

1922년 12월 17일, 고고학자 카터는 카아본 경과 함께 왕가의 계곡에서의 오랜 발굴과 조사 끝에 투탄카멘 왕묘의 문을 열었다. 묘실 속의 황금이 전등 빛에 화려하게 반사되는 아름다움의 극치에 세계는 전율하였다. 시신의 형태 그대로 짠 관의 뚜껑에 그려진 소년의 모습은 방금이라도 말을 건넬 것 같은 생명력을 지니고 있었다. 미라의 얼굴을 덮고 있는 황금 마스크의 얼굴은 순금이며, 눈은 아라고나이트석과 흑요석으로 눈썹과 속눈썹은 청색유리로 만들어져 있었다. 무엇보다 카터를 감동시킨 것은 초상의 이마 위에 놓여진 한 묶음의 화환이었다. 그것은 청상과부가 된 어린 왕비가 남편에게 바치는 마지막 작별의 선물이었던 것이다. 어린 나이에 등극하여 18세에 요절한 3400년 전의 투탄카멘의 왕묘는 이렇게 발견되었다.

그러나 놀라운 사건에는 그에 걸맞은 어둠이 따르기 마련이니, 소위 '파라오의 저주'이다. 이는 1923년 카아본 경이 모기에 물려 죽으면서, 2∼3년 내에 투탄카멘의 발굴에 관여되었던 20여 명이 목숨을 잃는 사건을 두고 하는 말이다. 왕묘 입구에 관 위에는 '왕을 방해하는 자에게 죽음의 날개가 펼쳐지리라'는 구절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투탄카멘의 황금 마스크의 관은 지금 카이로 고고학 박물관에서 생생한 모습으로 현대인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나일 서안의 네트로폴리스를 빠져 나오다가 마침 장례행렬과 맞부딪쳤다. 이슬람 사원에서 막 장례예배를 마친 가족과 친지들이 이캄을 앞세우고 관을 번갈아 메고 가며, 룩소르 교외의 이슬람 공동묘지로 향하였다. 그곳에는 무덤을 가리키는 축조물과 화려한 장식도 없었다. 봉분도 없이 하얀 천으로 싼 시신을 얼굴 쪽이 메카 방향으로 향하게 땅에 묻고는 자그마한 표지판을 세운다. 미라가 된 현재의 모습으로 거대한 묘지가 내세의 생활공간이라고 믿었던 고대 이집트인들과는 달리, 오늘날의 이집트인들은 알라가 주실 새로운 육신으로 피안의 천국에서 영생을 누릴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결국 그들은 부활의 믿음으로 내세에서 서로 만나 묻혀버린 이집트의 역사를 이어가게 될 것이다.

룩소르를 빠져 나와 아침 일찍 남쪽의 이스완으로 방향을 돌렸다. 에스나와 예도프의 호루스 신전이 있고, 무엇보다 아부 심벨 신전을 빠뜨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200Km 이상을 달려가야 하기 때문에 충분한 식사가 필요하였다. 우선 몰로키아라는 야채 수프에 토마토와 향료를 넣고 삶은 콩이 든 물로 식사를 시작하였다. 주식은 양고기를 다져 숯불에 구운 코프타, 기름기에다 향신료에 질린 나에게 타메이야라는 고추와 오이 짠지는 입맛을 돋구었다. 그리고 맥주대신 시원한 요구르트 한 잔으로 아침 겸 점심은 끝이 났다.

5시간을 달려 아스완의 남쪽 낫새르 호숫가에 있는 아부 심벨 대 신전에 도착하자 신전 앞에는 세계 각국의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람세스 2세가 태양신 아몬-라와 창조신 프타 그리고 자신을 위해 건립한 거대한 신전 앞에서 20m 높이로 우뚝 서 있는 4개의 람세스 2세의 거상이 나를 반긴다. 그의 두 다리 사이에는 그의 딸의 상이 발가락을 딛고 미소짓고 있다. 신전 내부에는 오시리스 신의 모습으로 형상화된 람세스 2세의 입상이 8개 서있고, 카데쉬에서의 히타이트와의 대규모 전투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고통스러워하는 병사들의 표정이나, 내뿜는 힘의 열기가 대 영주실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무엇보다 아부 심벨 신전에 더욱 애착이 가는 것은 물 속에 잠겨 있어야 할 위대한 인류의 축조물이 지상에 남아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관개수로를 통한 농업혁명을 내세우며, 이집트 정부가 아스완댐을 건설했을 때, 아부 심벨도 나일강 가에 있는 무수한 신전과 함께 수몰될 운명에 처했다. 유네스코를 중심으로 하는 문명세계는 이 위대한 인류 유산을 살려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고, 인류사회는 막대한 돈을 투자하여 원래의 위치보다 60m나 높은 현재의 위치에 원형을 옮겨 놓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조각조각 잘리어진 람세스의 근엄한 얼굴에는 현대인의 무지를 꾸짖는 뼈아픈 충고가 서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