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이 낳은 문화
-사막의 스핑크스
이희수 /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오천년 고대문명에서 인간이 배울 수 있는 것은 겸손 뿐이다'라는 어느 고고학자의 고백을 떠올리며, 숙연한 마음으로 카이로에 도착한 시각은 아직도 어둠이 짙게 깔린 겨울의 이른 새벽이었다. 짐을 풀고 고층 호텔의 창문 커튼을 열어 젖히자 시내 중앙을 흘러가는 나일강의 선물이라는 헤로도투스의 표현을 굳이 빌지 않더라도 전국토의 97%가 사막인 이집트에서 나일강이 가지는 필수적인 기능은 쉽게 피부로 느껴졌다.
아비시니아 고원에서 또 빅토리아 호수에서 아프리카의 육천km를 남에서 북으로 흘러온 나일이 그 하구에 만들어 놓은 마지막 선물이 카이로이다. 그 카이로를 중심으로 피라밋 시대인 고왕국의 수도 멤피스와 태양신 '라'신앙의 발상지인 헤리오펠리스가 펼쳐져 있다. 그러고 보니 카이로 일대야말로 고대문명의 요람이요 '문화'라는 인류 최고의 산물을 본격적으로 일구어낸 실험장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비옥한 델타의 배꼽에 해당하는 이 지역은 역사의 향방에 따라 끊임없는 투쟁과 처절한 생존의 무대가 되어야 했다. 삼면이 사막과 바다라는 지리적 고립으로 이집트 문명의 독자성을 지킬 수 있었던 카이로는 삼천오백년 전 처음 힉소스의 침입을 받은 이후 수많은 이민족으 침입과 약탈을 경험했다. 기원전 8세기에 이디오피아의 지배를, 그뒤에는 페르시아와 알렉산더 제국의 통치를, 그리고 기원후 7세기부터는 이슬람 세력의 정복을 각각 받아 들여야 했다.
나일의 출렁거리는 햇살의 반사로 멀리서 기자의 세 피라미드와 그 피라미드의 수호신으로 알려진 스핑크스가 희미한 형체로 모습을 드러냈다.
태양은 고대 이집트인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주었다. 그것은 어둠과 절망 속에서 거룩한 광명을 기억시키는 더없이 훌륭한 상징이었고, 나일의 풍요에 대한 분명한 약속이었다. 그리하여 거친 속세에서 빛을 숭상했던 이집트인들은 스핑크스라는 거대한 석조물을 태양신께 바쳤다. 피안의 지평선을 넘어 어김없이 찾아오는 그 첫 햇살이 스핑크스의 두 눈을 정확히 비추고 있음을 확인한 나는 스핑크스가 더 이상 피라미드의 수호신이 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피라미드보다 훨씬 먼저 세워진 스핑크스는 빛에 대한 열정을 불태운 고대 이집트들의 신앙 작품인 것이다. 이집트 왕족들의 무덤인 피라미드가 죽어간 생명을 거두기 위하여 나일강의 서안에 자리하고 있는 것과 같이, 스핑크스는 다시 태어나는 생명을 맞이하기 위해 동쪽을 향해 놓여 있는 것이다. 지평선 아래로 사라졌던 태양이 다시 중천으로 떠올라가는 것처럼 인간 또한 부활하여 영혼의 세계로 승천하여 이승의 삶을 계속하는 것이다. 알수 없는 신비의 오천년이란 시간의 흐름 앞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잃는다.
해가 올라 피라미드 사이에 걸릴 때 쯤이면 카이로는 금방 천만이라는 각양의 사람들이 빚어내는 거대한 시장으로 변한다. 길을 메우는 사람과 자동차, 왁자지껄한 소음과 경적, 그리고 하루를 보내기 위해 몰려나온 할일없는 군상들과 남루한 가난, 세속에 찌들어 시간이라는 중병을 앓고 있는 카이로의 도시문명을 피라미드는 그저 묵묵히 안타까운 듯 지켜보고 서 있다. 카이로의 기자에는 이집트 문명의 상징인 세 피라미드가 스핑크스를 앞에 두고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동서남북 방향의 사면체 피라미드는 고대 이집트 절대 군주인 파라오의 묘로써 크기대로 쿠푸, 카르라 및 멘카우라의 것으로 4천 5백년 전에 축조된 것이다. 피라미드의 축조에만 20년이 소요되었다고 전해진다. 또 그에 사용하는 노동력이 필요했을 도로건설과 부대 시설들. 한면의 길이가 250m, 높이가 170m, 6백만톤의 돌이 사용된 이 완벽한 축조물 앞에서 나는 몇 시간이고 인감의 초월성이라는 숙제를 생각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피라미드 축조를 노예와 같은 인간의 강제 노역의 아픔이라고 표현 했지만, 그 피라미드에는 단순한 압제나 세속적 노력을 뛰어 넘는 인간의 위대한 생명력과 절대적 신앙이 배어 있다. 태양신의 아들로서 파라오를 신으로 모시는 백성들의 정성과 믿음이 그의 영원한 사후 세계의 안식처인 피라미드를 있게 한 것일테다. 그들에게 피라미드는 신전이었고, 그 속에 살아있는 파라오를 수호신으로 받들게 됨으로써 자신과 불멸의 파라오와의 일체감을 달성했던 것이다. 달리 설명할 방도가 없었다.
낙타를 타고 근처에 있는 오아시스를 몇 군데 둘러보았다. 원초적인 삶과 가난이 피라미드라는 거대한 인류유산과 너무 적나라하게 대비되어 이방인의 가슴을 저미게 하였다. 그리고 토담집 군데군데 박혀있는 피라미드 벽돌 조각들을 보는 순간 오천년의 시간이 문득 한 점에서 정지되는 충격을 받았다. 모처럼 맞이하는 관광객이라 집주인 하산은 이천오백 년이나 되었다는 미이라를 가지고 나왔다. 거의 완벽한 형체를 가진 자신의 조상을 이제는 불멸의 신앙으로써가 아니라 생계의 방편으로 집집마다 애지중지하고 있었다. 구경을 시켜주고 사진을 찍게 하고는 얼마간의 돈을 받아갔다. 파라오만이 불멸한다던 믿음은 점차 확대되어 귀족이나 일반대중도 영생의 사후세계를 위해 미라를 준비하였다. 미라의 민주화가 이루어지면서 집집마다 한두 개의 미라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살아있는 미라와 현대인, 진정 그들은 오천년이라는 시공의 단절을 메우고 공존하고 있었다.
살아 숨쉬고 있는 미이라와 대화하는 동안 나는 문득 한 세미나에서 만났던 프랑스 생화학자 모리스 뷔까 이유의 고백이 생각났다. 세계적인 미이라 연구가인 노학자는 평생을 고대 이집트인들의 미이라의 화학적 처리에 관한 방법을 규명하는 데 바쳤다. 그는 평생의 연구 결과를 한마디 독백처럼 우리에게 던졌다. "그것은 자연과학도가 건드릴 수 있는 인간의 영역이 아닙니다. 신의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얼마후 그는 무신론자에서 현대적 이집트 신인 알라에 귀의하였다.
미이라의 풍습은 사후에도 육신과 영혼이 생전의 상태로 부활되어 불멸한다는 오시리스 신앙에서 연유한다. 이러한 영육 부활의 신앙은 후일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내세관에도 깊은 영향을 주었다. 나일의 신이었던 오시리스는 형제인 세트에게 토막살해 당한 뒤, 미이라의 여신인 아누비스의 수습에 의해 부활되었다. 그러나 나일강에 던져졌던 오시리스의 남근만은 물고기가 먹어버려 목근으로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지금도 이집트인들은 나일강의 물고기를 금하는 풍습을 고집하고 있다.
카이로가 오늘날의 모습으로 변신을 강요당하는 시기는 7세기였다. 아랍의 이슬람 세력이 북아프리카 전역을 정복한 이후 이집트는 오늘날까지 아랍-이슬람문화의 또 다른 중심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인류 문명의 모태에 이슬람이라는 새로운 문화가 접목되어 성장해 왔고, 그것이 오늘날 카이로인들의 사고 방식을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카이로란 지면이 생긴 것은 10세기 경의 일이다. 당시 이집트를 지배하던 파티마왕조(909∼1171)의 장군 자우하루가 이 도시를 자신의 칼리프(왕)인 무이즈의 이름을 따서 '무이즈 카헤라' 즉 '무이즈의 승리'라고 명명한 데서 유래하였다. 따라서 '승리'라는 의미의 아랍어 카헤라에서 오늘날의 카이로가 생겨났다.
이슬람 카이로의 모습이 생생히 살아있는 곳은 올드 카이로와 이슬람 지역이다. 올드 카이로에는 아랍의 이집트 정복을 상징하는 아무르 사원과 동방 기독교 일파인 곱트교회와 이슬람 지역에는 세계 최초의 대학인 알-아즈하르가 있고, 전통적인 아랍의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오스만 시대이 대표적인 사원인 무하마드 알리 모스크에서 일모예배를 알리는 코란의 낭송이 시작되자 이집트인들은 태양신 '라' 대신 알라께 경배를 드린다. 미처 사원에 자리잡지 못한 은세공 가게 주인은 자신의 가게 모퉁이에 예배용 깔개를 깔았다. '라'를 형상화하여 자신이 정성들여 만든 은제 원반을 향해 두 손은 하늘을 향하여 알라를 염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이 경건한 기도 속엔 이미 초월자요 절대자인 알라와 라가 하나되고 있었다.
이처럼 카이로는 과거와 현대를 잇는 역사의 다리이다. 그러나, 오천년 전 파피루스에 위대한 역사와 신화를 당당히 기록했던 이집트인들은 오늘날 대부분 문맹으로 뜻도 모르는 파피루스를 모사하며 생계를 꾸미고 있다. 나일의 범람을 예측하던 뛰어난 측량술과 천문학, 그리고 관계기술은 아스완 댐이 대신 연결해 주고 있다. 역사는 반드시 앞으로만 나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는 카이로에서 문득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