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로 나서는 한국의 전통예술

자크란다 향기 속에 펼쳐진 전통문화 강좌

-호주 크리스피대학 한국전통문화 강좌를 마치고




노정용 / 세계일보 문화부 기자

자크란다의 향기가 코 끝을 적시는 10월 말의 호주는 한국전통 문화의 내음과 어울려 더욱 진한 향기를 뿜어냈다. 아기를 배에 차고다니는 캥거루와 하루 18시간씩 숙면을 취해 '코알라팔자'라는 소리를 듣는 코알라도 한국문화 사절단을 반겼다.

이번 문화사절단에는 서편제의 명창 성창순씨를 비롯해 부군 양명환씨,「승무」와「살풀이」의 기능보유자 이매방씨, 마당패 뜬쇠사물놀이의 권칠성(장구), 이영규(꽹과리), 이용문(징), 박윤화(북), 가야금병창의 이명선, 이지선, 선미숙, 조주선, 이복선, 남도민요의 박혜련, 신란우, 박정원씨가 참가했다. 그 동안 우리문화를 소개하는 해외공연은 여러 번 있었지만, 이번처럼 해외의 대학에서 특별강좌르 마련한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로 참가자들은 출발전부터 마음이 설레였다.

서울이 차가운 겨울날씨로 접어드는데 비해 호주 퀸즈랜드 주는 햇살 따가운 초여름날씨로 넘어가고 있었다. 아침 저녁의 기온차가 10도 안팎이어서 낮에는 다소 무더웠고, 밤에는 추위를 느낄 정도였다. 그래서 따가운 태양이 내리쬐는 황금빛 해변과 아무리 들이마셔도 기분이 상쾌한 무공해 공기는 천혜자연이 호주를 실감케 했다.

각종 공해와 교통혼잡에 찌든 서울사람이 느끼는 해방감이란 이런 것일까. 한반도 크기의 34배, 그러면서도 인구는 남한인구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1천8백만명, 겉으로 보기에 호주는 지상낙원 그 자체였다. 늘 북적대는 거리를 활보했던 우리는 뻥뚤린 도로와 사람 한점 찾아보기 힘든 시내를 보면 이런 곳에서 무엇으로 생계를 꾸려나갈까하는 의구심조차 들었다.

한국문화사절단의 호주방문은 그리피스대 로이 웹 총장과 이 대학 아시아국제대학학의 한국학과 정재훈 교수의 초청으로 이루어졌다. 그리피스대는 호주에서 시드니와 멜버른 다음으로 큰 퀸즈랜드주의 주도인 브리스번의 아담한 산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1971년 개교한 국립대학 그리피스대는 학생 수 1만 8천여 명으로 아시아관계학과 최근 콘서바토리를 편입한 음대가 유명하다. 한국전통문화강좌는 메인 캠퍼스가 위치한 네이단캠퍼스와 음대가 위치한 보타닉가든 옆 Q.E.T 콘서바토리움 두 곳에서 개최됐다.

17일 오후 9시 40분 서울을 출발한 우리 일행은 18일 오전 7시 30분(현재시간) 브리스번국제공항에 도착, 독사이드호텔에 여장을 풀고 대학을 방문하는 것으로 하루를 보냈다. 방문 이튿날인 19일 성창순명창의 판소리 및 민요 강좌로 공식일정에 들어갔다.

강좌에는 그리피스대에 유학중인 한국학생 20여 명과 아시아국제학대학 한국학 전공학생 30여 명 등 50여 명의 대학생들이 자리를 함께했다. "판소리는 서양오페라에 대비되는 한국의 오페라입니다. 단전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독특한 창법과 발림, 고수의 장단에 남자로, 여자로, 어른으로, 아기로 변하는 등 명창의 1인 다역 연기가 판소리의 백미이지요"

판소리의 세계화를 위한 첫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수강생들은 알파벳과 전혀 다른 한글로 된 판소리「춘향가」의 사랑가 대목을 들은 후 신기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판소리가 가진 대사의 중요성 때문에 세계화를 위한 장애가 있는 것은 틀림없지만, 우리가 내용을 알지도 못하는 서양 오페라를 듣고 감동을 받듯이 그들도 그런 것처럼 보였다.

수강생들은 판소리를 배우면서 진땀을 흘렸으나, 민요를 배우는 시간에는 부정확한 한국어 발음으로 노래를 따라불렀다. 이날 배운 민요는 「뽕따러 가세」와「진도 아리랑」두 곡이었다. 앞의 민요가 남녀간의 사랑을 노래한 민요라는 얘기를 듣고 수강생들은 점차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가세 가세 뽕따러 가세……"

두 번 세 번 반복하면서 어눌하던 발음도 다소 정확해졌고, 민요의 의미를 파악하고서는 더욱 흥미있어 했다. 레이첼 양(그리피스대 법학 전공)은 "호주에서는 지금까지 일본을 동경하고 연구해왔다. 한국은 일본의 변방쯤으로 생각했는데, 이같은 예술성 높은 판소리가 있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라며 "한국으로 유학해 전공인 법학을 심회시키는 동시에 전통문화의 꽃인 판소리를 배우고 싶다"고 소감을 피력했다.

판소리 및 민요강습에 이어 인간문화재 이매방 선생의 한국춤 강습이 계속됐다. 고히를 앞둔 그는 말로 설명하기보다는 직접 춤동작으로써 한국춤과 서양춤의 차이점을 보여줬다. "한국춤은 곡선이고 자연이며, 서구춤은 직선이고 정확한 기교를 중시하는데 비해 한국춤은 우리 몸 내부의 흐름(氣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손을 올리고 내리제" 그의 간단명료한 설명에 고국인 한국에서도 우리 문화를 외면했던 유학생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문화의 특징은 기와집의 처마나 아름다운 한복의 곡선에서 잘 드러난다. 이매방 선생의 설명은 바로 그것과 부합하면서 발레의 기본동작이나 스페인의 플라멩고, 한국의 승무등과의 차이를 명료하게 보요줬다. 수강생은 그의 몸짓으로 보여주는 설명 때문인지 한국춤을 처음 접해보는 사람들도 쉽게 이해를 했다.

특히 야라 클리코드 양(그리피스대 한국학 전공)과 사라양(그리피스대학 한국학 전공)은 이매방선생의 시범을 본 후 그대로 한국춤의 기본동작을 재현해 냈다. 팔동작은 남자를, 발동작은 여자를 상징하는 등 한국춤은 기본적으로 음양오행의 구조로 짜여져 있다. 이 때문에 동양정신을 잘 모르는 사람은 춤을 따라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수강생들의 진지한 모습과 동작의 재현은 우리춤 동작이 너무나 과학적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실감케 하는 것이었다.

다음날은 한국전통문화 중의 하나로 세계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사물놀이강습, 장고, 꽹과리, 북, 징으로 상징되는 사물놀이는 수강생들에게서 가장 인기있는 종목이었다. 자크란다의 향기와 함께 시작된 호주대학의 시험일정 때문에 우리 일행은 과연 몇 명이나 참여할까를 걱정했지만 그것은 기우였다.

사물의 악기가 함께 어우러지면서 뿜어내는 소리는 바로 수강생들이 찬탄하며 내지르는 '신의 소리'이자 '바람의 소리'였다. 네명의 뜬쇠들이 보여준 시범 후에는 신기한 듯 직접 장고와 북, 꽹과리와 징을 만지면서 한국전통 문화의 숨결을 느끼느라 여념이 없었다.

멀리서 바라볼 때 쉽게 보였던 사물악기가 가까이서 연주할 때는 만만치 않았는가 보다. 그래서 인지 북을 힘차게 두들기던 수강생이 아프다는 표정을 지었다. 강습이 끝나기 전 마당패 뜬쇠사물놀이의 사물놀이 시범에 수강생들은 그 리듬을 따라 고개와 몸을 흔들거나 손뼉을으로 장단을 치는 등 인기절정이었다.

이번 강습의 일등공로자는 한국에서 선교사생활을 했던 대퍼니 로보츠씨, 그는 유창한 한국말과 영어로 수강생들의 이해를 도왔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는 표현이 알맞을 것 같다. 해박한 한국문화에 대한 지식과 함께 직접 10여 년간 국립국악원에서 가야금이나 대금 등 국악기를 다룬 솜씨로 악기소개를 아주 흥미있으면서도 적절하게 설명해 나갔다.

한국유학생들은 "한국사람인 우리들도 모르는 내용을 외국인이 어떻게 저렇게 잘 알고 있을까"라며 고국에서 우리 전통문화를 외면했던 자신들을 부끄러워하기까지 했다.

강습과는 별도로 지난 달 25일 오전 12시 30분에는 그리피스대학의 총장직무대행인 조지 카니 수석부총장을 비롯해 권병현 주호주 한국대사 내외분, 필립과 캘리 호한(濠韓)재단 사무총장, 자넷 다르펫 음대학장 등 3백여 명의 학생들이 참가한 가운데 특별공연이 네이단캐퍼스에서 개최했다. 한마디로 '좋다' , '얼씨구'의 추임새가 절로 나올 만큼 환상적인 공연이었다는 게 공연을 지켜본 사람들의 평이다.

현지 유력일간지인 「더 커리어 메일」은 '브리스번의 그리피스대 학생들은 어제 보기 힘든 한국전통문화공연을 관람하는 기회를 가졌다'고 호평했다. 특히 이 신문은 한국의 인간문화재 성창순 명창의 소리인생 45년을 소개하면서 그녀의 제자인 조주선 양을 차세대 명창이라며 대서특필했다.

이때에 즈음하여「더 커리어 메일」은 성창순 명창의 호주 제자이자 한국에서 판소리를 배우고 있는 세리나 콕스양의 한국발 기사도 기재했다. 콕스 양이 한국에서 공연을 해 한국인의 가슴을 울렸다는 게 기사의 내용. 그녀는 지난해 송창순 명창이 브리습번세계뮤직페스티발에서 공연한 판소리에 감명을 받고 한국유학을 결행한 호주음악인이다.

그리피스대에서 3백여 명이나 참석한 외국공연은 한국이 처음이라는 소식에 권대사를 비롯한 공연자들은 마음이 흐믓했다. 조지 카니 수석부총장은 우리 측의 성대한 공연에 대한 답례로 오찬을 베풀어 주었다. 그는 우리를 환영하면서 한국의 대표적인 음식인 김치를 점심식사 메뉴에 포함시키는 세심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이국에서 맛보는 김치맛이란 오랜 해외여행이나 외국생활을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김치 이상의 맛임을 알수 있으리라.

강습일정으로 보면 이번 호주방문은 다소 느긋한 스케줄이었다. 그러나 한국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나라를 체험해 보기에는 너무나 일정이 빠듯했다. 우리 일행은 시간이 나는대로 사우스뱅크의 아트퍼포밍센터를 둘러보는 한편, 각종 문화시설을 눈여겨 살펴보았다.

호주의 공연장이 우리나라와 다른 게 무엇일까. 동행취재를 한 기자로서는 궁금한 점이 아닐 수 없었다. 우선 눈에 띄게 차이나는 점은 대중교통의 요충지에 공연장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최고의 문화시설인 예술의 전당은 지하철역으로부터 걸어서 10분 이상이 걸리고, 버스 편은 거의 없으며, 교통수단은 고작 자가용이 있을뿐이다.

이에 비해 호주의 문화시설은 어떠한가. 공연장 아래로는 지하철이 다니고, 공연장의 한복판에는 대중교통수단이 지나 다닐 만큼 시민들의 편리함을 우선적으로 배려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와는 정반대인 셈이다. 우리는 흔히 건물을 먼저 세우고 그 다음에 지하철을 놓고 대중교통수단을 끌어들인다.

지방자치시대를 맞아 문화의 지방화를 위해서는 우리도 이같은 시민이 편리한 문화공간을 만들어 나가야겠다. 그뿐만 아니다. 관람료도 10만 원에서 15만 원이나 하는 우리와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티켓은 대개 1백불(한화 6만 원) 이내로 고급문화를 누구나 향유할 수 있도록 정책이 배풀어진다고 한다.

호주의 문화정책에 대한 부러움을 느끼면서 우리 일행은 27일 그리피스대의 음대학생들에게「한국의 전통음악 - 판소리를 중심으로」주제의 특강을 실시했다. 성창순 명창이 판소리의 역사와 다섯바탕, 그리고 판소리 명창들을 소개하고 민요「뽕다러 가세」와「진도 아리랑」을 함께 배우는 시간을 가졌다.

음대 학생들은 역시 다르다는 말밖에는 할 수 없었다. 단 두 번을 따라하더니 자유자제로 우리민요를 불러댔다. 자넷 다르펫 음악대학장은 한국음악을 본격적으로「아시아의 음악」강좌에 포함시킬 것을 약속했고, 열띤 강연을 한 성창순 명창을 호주 그리피스애 음대의 명예교수로 위촉했다. 그리피스대는 우리의 대학과는 달리 한 단과대학에 교수는 한명뿐이며, 나머지는 모두 강사에 해당한다. 이런 점을 감안한다면 성창순 명창의 그리피스대 명예교수 취임은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

마지막으로 우리 일행은 그리피스대에 한국의 전통악기를 기증했다. 새한전통예술본존회의 양명환 회장이 가야금과 사물놀이악기 2벌, 소고, 북 등을 기증한 것이다. 그는 앞으로 5년 동안 판소리강습 및 악기기증을 계속해 그리피스대 내에 한국전통문화의 뿌리를 내리면서 별도의 한국악기관을 세우겠다고 조지 카니 부총장에게 약속했다.

물론 이번 한국전통문화강좌는 부족한 면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영문으로 된 교재의 준비소홀이나 입체적 교육을 위한 영상매체의 활용 등이 아쉬운 점으로 지적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창순 명창과 양명환 회장의 사재를 털어 외국대학에 처음으로 한국문화의 씨를 뿌렸다는 점에서 한국악사에 길이 남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 일행의 보름 동안의 호주 방문은 이처럼 커다란 성과와 함게 내년을 기약하며 마무리됐다. 동행취재를 한 기자는 10월의 절반을 먼 외국에서 보냈다는 생각에 코알라와 캥거루의 나라 호주를 떠나면서 시원섭섭하다는 느낌이 가슴을 엄습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