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 / 대를 잇는 예술가족. 4 / 국악인 정재국. 정계종
음악동반자의 닮은꼴과 다른꼴
송혜진 / 국악평론가
우리나라 정악 피리의 일인자로 꼽히는 정잭국(중요무형문화재 제46호 보유자)은 최근들어 아쟁을 연주하는 아들 계종과 함께 집을 나서서 국립국악원으로 향한다. 단국대 국악과 4학년에 재학중인 아들 계종이 12월 9일에 있을 국립국악원 제10회 한국음악창작발표회의 객원연주자로 선발되어 한동안 함께 출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비록 한 무대에서 연주하게 된 것을 아니지만 며칠째 아들과 함께 국악원으로 들어서는 아침 느낌이 아버지 정재국에게는 사뭇 든든하기만 하다. 누구보다도 친근한 음악동반자를 하나 얻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들 계종의 심정은 좀 복잡하다. 국악원의 대선배 연주자들과 함께 연주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이 더없이 기쁘고 자랑스러우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국악원에 드리운 아버지의 넓고 깊은 음악 그늘을 생각하면 손짓 하나 발움직임 하나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행여 아버지에게 누가 되면 어떻게 할까'라는 부담과, '과연 내가 다른이들의 기대만큼 해낼 수 있을까'라는 걱정도 크다.
오전, 오후, 연습을 마치고 과외로 스승 김한승에게 특별지도까지 받고난 정계종을 만났을때도 이런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아버니와 아들의 국악입문
아버지와 아들의 국악입문은 한세대 동안 일어난 우리 사회의 변화만큼이나 판이하게 달라 보이면서도 실은 닮은골이다. 정재국은 국악에 대한 별다른 경험이나 지식이 없이 여의치 않은 가정형편 때문에 국비로 운영되는 국악사 양성소에 입학하면서 국악인의 길을 걷게 되었지만 아들 정계종은 아버지가 일궈놓은 튼튼한 기반 위에서 아버지의 따뜻한 권유로 행복(?)하게 국악의 길에 들어섰다. 정재국이 국악을 시작한 50년대는 국악이 소중한 문화유산이라는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회적 분위기로 인하여 위축되고 소외된 시대였지만 지금은 어떻게 하면 제대로 전통예술을 계승하고, 어떻게 전통예술을 기반으로 한 한국문화를 창출할 수 있을까라는 점에 적지 않은 관심이 쏠려 있다. 이것 역시 아버지 세대가 마련해 준 음악생활의 기반이다.
그러면서도 정재국과 정계종의 입문의 닮은꼴인 점은 처음부터 돋보이는 음악적 재능을 가지고 출발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늘날 정악피리의 일인자로 꼽히는 정재국의 경우도 우연한 기회에 아주 덤덤하게 국악의 길로 들어섰다가 차츰차츰 자신의 음악 열정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 음악의 길이 비로서 천직임을 알았다.
그런 것처럼 정계종은 어릴적부터 아버지의 연주생활을 보아왔고, 아버지의 권유로 국악의 길에 들어섰지만 지금까지 자신에게 특별한 음악적 재능이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은 거의 없다. 더구나 대학생활 중간에 군대에 가느라 경연대회에 나간다든지, 협연을 해본다든지 하는 '튀는' 기회를 가져보지도 못했다. 그러나 군악대의 아쟁연주자로 활동하면서 점차 국악인으로서의 삶을 골똘히 생각할 기회를 갖게 되었고, 아주 짧은 기간이긴 하지만 국악원의 객원연주 기회를 통해 전문 연주자의 길을 걷는 자신의 앞날이 제법 뚜렷하게 구상되는 것 같기도 하다.
세대를 달리하는 부자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두 사람 모두 음악생애의 시작은 덤덤하였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음악에 대한 열정을 더욱 크게 키워나가는 닮은꼴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정재국, 계종 부자의 이런 다른꼴과 닮은 꼴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피리 연주자 아버지와 아쟁 연주자 아들
아버지의 전공인 피리는 우리날 음악 합주에서 언제나 곡을 이글어가는 자라에 있지만 정계종이 요즘 주력하는 아쟁은 관현합주의 전체적인 조화를 떠받쳐 주는 보이지 않는(?) 자리에 있어 피리와 대조를 이룬다. 그러나 전체를 이끌어나가는 피리나, 전체를 떠받쳐주는 아쟁이 모두 뛰어난 음악적 포용성을 전제로 한다는 점은 같다.
계종의 본래 전공은 해금이지만 지금은 아쟁의 매력에 폭 빠져 있다. 해금은 수수한 겉보기와는 달리 꼼꼼하고 세밀한 음악성을 요구하는데 비해 아쟁은 모두 악기의 소리를 떠받쳐주는 안정되고 편안한 맛이 있다. 바로 이런 악기의 성격이 자신과 딱 맞아떨어지는 걸 느낀다. 연주자의 길이 허락된다면 아쟁과 한평생을 같이 할 것이라는 생각을 더 확고히 굳혀가는 중이며, 언젠가는 아버지가 관현악단의 맨 뒷자리에서 목피리로 음악을 이끌어가고, 자신은 관연악단의 맨 앞자리에 앉아 그 음악을 받쳐가며 함께 연주 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도 가져본다. 또 오랜 수련을 통해 터득되는 우리 음악의 아름다움을 생각하면 어느 세월에 아버지와 같은 수준의 음악을 연주할 수 있을까 까마득하게도 보이지만, 욕심같아서는 부자음악회를 한번 열어보고 싶은 생각도 해본다.
다양한 음악에 관심을 갖는 부전자전
음악의 갈래에 구애받지 않고 여러 가지 음악에 관심을 갖는 것에 대해서 부자의 생각은 일치한다. 정재국은 국립국악원의 수석 피리주자로서 일찍부터 정악 피리의 일인자로 평가받아 왔지만 한편으로는 1972년 피리연주자로서는 처음으로 독주회를 열면서 피리산조와 창작품을 연주하여 피리 음악세계의 영역을 넓혀왔다. 그런가 하면 태평소와 생황연주에도 남다른 관심을 가져 지금은 그의 주전공인 피리가 아닌 태평소 연주로 중요무형무형재 제46호 보유자로 인정되었다. '조용한 개혁자'라는 표현이 어울릴 음악생애를 산 셈이다.
이런 점은 정계종에게서도 보인다.
"지금은 국악 창작품에 관심이 많아요. 국악 창작품은 음반으로 나오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에 음악방송 등을 통해 새로운 곡이 나올 때마다 녹음을 해가며 열심히 듣고 있고, 그러다보니 여러 작품의 특징과 작곡가들의 작품 경향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연주회도 자주 가고, 연주회 팜플펫 같은 것도 열심히 모으면서 우리 시대의 국악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앞으로 어떤 작업을 선택하게 될지 아직 잘 모르겠지만 일찍부터 어떤 틀을 가지고 음악생활을 제한하기보다는 살아있는 여러 경험들을 통해 안목을 넓힐 작정입니다."
평소 말이 별로 없고 자신을 드러내놓고 표현하기를 꺼려하는 아들의 성품을 익히 알고 있던 정재국은 아들의 이런 태도와 음악관을 대견스럽게 여긴다. 아직 아침 출근길의 운전을 맡기기도 불안하지만 하고, 사실은 '아직 어린애일 뿐인데……' 라는 생각 때문에 지면에 소개되는 것조차 내심 편치가 않았었지만 제 앞에 놓인 음악의 길을 조심스럽게 앞가림해 나가는 걸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물처럼 자연스럽게 흐른 음악의 맥
정재국과 정계종의 대를 물려 음악을 하는 일은 전통을 이어야 한다는 사명감이나 아버지의 뒤를 이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결정된 이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결정된 일은 아닌 것 같다. 어릴적부터 모범적으로 연주생활과 가정생활을 이끌어 오신 아버지가 자신에게 국악을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권유했을 때 계종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아버지의 권유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지금은 그 길이 자신에게 맞는 길임을 느끼고 있으니 정재국 부자의 음악 대 잇기는 마치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이 이루어진 셈이다. 그리고 아버지의 생각도 마찬가지다.
"눈여겨 보니 음악을 하면 그러대로(?) 할 것 같고, 조용하고 온순한 성품을 생각해서 해금을 권유했던 것인데……어떻게 잘할지……잘 모르겠어요……" 말끝을 제대로 여미지 않는 정재국의 어법에서는 자식을 음악가로 키우기 위해 어릴적부터 극성스런 조기교육을 시도하거나 요즘 부모의 모습은 보기 어렵다. 우리 음악의 길이 반짝이는 재간과 기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술맛이 익어가듯 오랜 세월동안 무르익어 가는 것임을 알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그처럼 오래오래 올곧은 태도로 음악의 길에 매진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느낄 수도 있었다.
지난해에는 정재국이 중요무형문화제 46호 보유자로 지정되었고, 미국의 뉴 뮤직 작곡가의 초청으로 미국 5개 도시를 순회하며 피리 독주회를 가지면서, 음악인생의 새로운 활력을 얻었다. 미국에서는 그 동안 자주 볼 수 없었던 우리의 피리 음악에 대한 관심과 뛰어난 연주력으로 문화를 초월한 음악적 공감을 불러일으켰다는 평을 얻었고, 또 국립국악원 소극장에서 열린 독주회 때에는 성경린, 황병기 등이 자신의 음악생애를 이런 식으로 평가해 주기도 해서 피리연주가로서 참다운 보람을 느꼈다.
'정재국이 부는 피리소리는 윤기 흐르는 듯한 세피리와 소리와 유월의 신록처럼 싱싱한 향피리 소리가 마치 두 사람의 연주처럼 들린다. 그런가 하면 생황을 연주할 때의 모습이나 노랑 철릭을 입고 태평소를 불 때의 모습도 영다르게만 보인다. 정재국은 피리에만 빼어나지 않고 생황도 일가를 이루고 태평소로, 정악 산조 대취타, 신곡 등 어느 악곡 어느 악기에도 실로 환히 통달하여 막힘이 없다.'(성경린)
'정재국은 한마디로 꾸밈을 모르고 안팎이 없는 진솔한 사람이다. 그러나 자신의 음악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하다. 나이와 기력이 허락하는 한 피리를 분다는 신념이 확고하다. 이러한 성품과 신념이 그를 정악피리의 정상으로 올려놓은 가장 근원적인 힘인 것같다. 이제 그의 정악에 대한 해석과 기교는 원숙의 경지에 들어서서 가히 타자의 쫓음을 허락하지 않는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지만 우리가 더욱 높이 사야 할 일은 그가 조금도 자만함이 없이 쉬지 않고 정진하는 신인정신을 견지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음악세계는 미(美)뿐만 아니라 선(善)을 다하는 우리 선인들의 참다운 정악의 정통을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황병기)
국악계의 원로 스승들이 정재국의 음악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런 평가에 대해 정계종은 섣불리 뭘 언급하기를 저어한다. 아직 어버지의 음악을 알기에 부족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연주하고 가르치는 것 외에 별다른 관심이 없으신 아버지 정재국의 모습이 계종에게 음악인의 전형처럼 각인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육체적인 나이에 구애 받지 않고 젊은이 못지않게 국내외 무대에서 펼치는 아버지의 이런 음악적 열정은 아버지로서뿐 아니라 가장 존경스런 음악인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아버님도 그렇고, 저도 그렇게 말수가 많은 편이 아니어서 평소에 대화를 많이 하는 편이 아닙니다. 그런데 군대생활을 하는 동안 제가 철이 들었다고 생각하시는지 최근에는 음악에 대한 말씀도 종종 해주시는데, 제일 강조하시는 것은 '언제나 완벽하게 해라……'입니다." 30여 년 넘는 음악생애를 살면서 한결같은 마음으로 피리를 잡고 음악생활을 영위한 아버지가 아들에게 대를 물려 남기고 싶은 음악의 정신은 이 짧은 한마디에 담겨있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