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인 해외연수

긍지와 자부심으로 우리만의 무대를 꿈꿔본다




우상민 / 연극인. 민예극단

본격 연극무대와 만난 후 늘 연습과 공연의 반복으로 나의 세계에만 빠져있던 나에게 문예진흥원으로부터 보내온 1993년 해외연수 지원 대상자(연극분야)의 소식은 샘물과도 같은 신선한 기쁨이 아닐 수 없었다. 연륜이 더해 갈수록 무대가 결코 쉬운 자리가 아니라는 자각을 하게 되면서 때때로 작업 현장에서 부딪치는 연기자로서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재훈련에의 필요를 원했던 아주 적절한 시기에 다가와준 여섯달의 연수기간, 더욱이 여자 연기자들에게는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던 기회였음에 그에 따른 책임이 가중되긴 했지만 여간 고맙고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 기회의 배려야말로 무대를 지키고 있는 무대인들에게는 더없이 큰 용기의 선물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한다.

몇 차례 해외공연의 경험은 있었지만 나는 언제나 시끌짝한 단체의 일원이었었고 항상 안내자가 함께 했었다. 그러나 철저한 나그네임을 절감하면서 출국 수속을 하고 연수지에 도착하여 숙소를 정하는 일로 시작하여 새로운 도시에 적응해야 했던 나의 일상, 또 한 나의 연기의 연속임을 실감하며 그렇게 시작한 뉴욕에서의 시간들, 하루를 쉬어도 무언가 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아서 마음도 분주했던 여섯 달이 너무 빠르게 지나갔다. 무대의 본거지인 브로도웨이의 다채로운 무대의 표정을 읽고 느낄 수 있었던 소중했던 기회의 제공을 다시 감사하고 싶다.

철저한 프로의식을 바탕으로 관객과 만나고 있는 브로드웨이 중심의 무대들은 우선 관객과 끈끈한 믿음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여행자들에게 있어서 거금의 입장료가 결코 아깝지 않도록 그들은 최선의 땀과 열정으로 무대를 채워내고 있었다. 대체로 낮공연은 수요일과 토요일에 있었고 밤공연은 8시에 시작되어 짧게는 1시간 30분에서 길게는 3시간 30분 이상 공연되고 있기 때문에 끝나는 시간은 밤 10시나 11시가 훨씬 넘지만 공연장 주변은 언제나 인파들로 붐비었고 그 시간이면 지하철 안에서도 그 인파가 이어져서 소문처럼 위험을 느끼지 않아도 되었고 낯선 이국땅임을 잊게 하였다. 문명의 이기, 인적 자원과 기술, 자본의 뒷받침 이면에 작품의 성공을 유지시키는 힘이 관객들임을 또한 실감할 수 있었다. 예술적이냐 상업적이냐 하는 판단에 앞서 그들은 서로의 만족을 채우고 채워주고 있었다. 수많은 채널이 종일 안방을 찾아가고 있는데도 공연장을 찾게 하는 프로정신으로 무장된 그들의 저력에 도전을 받으면서, 때때로 장기공연에서 오는 무력감에 긴장을 풀고 습관적으로 임했던 나의 무대에서의 수치를 돌아보며, 어떠한 이유도 핑계도 허락될 수 없는 곳이 무대임을 다시 절감하기도 했다. JOHN GOLDEN 극장에서 공연되었던 연극「MIXED EMOTION」관람 때에는 남녀 조인공이 등장하자 노장년층이 주류를 이루고 있던 관객들이 그들의 출현에 화답이라도 하듯이 갑작스럽게 뜨거운 박수를 보내던 순간 받었던 가동을 잊을 수가 없다. 한 배우를 지켜보면서 또한 응원하는 팬들과 함께 나이를 더해 가는 그들의 고리가 부럽기도 했고, 아름답고 훈훈했다.

내가 처음 「레 미제라블」 공연장을 찾았을 때 새 쟝발장 FIS-HER는 그저 평범하게 그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40여일후 다시찾은 무대에서의 그는 거인처럼 커져 이었다. 남을 것 같은 에너지로 청중들을 매료하는 그에게 박수를 보내면서 동일한 무대에서 변신하는 배우를 보는 진한 쾌감이 있었다. 뮤지컬의 경우 어느 작품을 보더라도 거의 비슷한 창법으로 불려지는 노래들이 지루함을 주기도 했지만 동작은 절제되어 있었고 일상의 몸짓과 같은 자연스러움이 브로드웨이 무대 위에서 뛰고 있는 배우들로부터 받은 공통된 느낌이었다. 기회만 되면 오프나 오프 오프 브로드웨이의 공연장을 찾곤 했지만 브로드웨이와도 달라서 공연장을 오고가는 길에서 손에 진땀을 쥐며 긴장을 해야 했는데도 기대보다는 더 큰 실망을 안고 돌아오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주제와는 너무도 동떨어진 목적을 두고 재구성하여 꾸며졌던 셰익스피어의 「뜻대로 하세요!」소문과는 달리 믿음의 무너짐을 의미하듯 3-40여명의 관객들을 그냥 구경꾼으로 앉아 있게 했던 「넌센스」……등등. 소란하고 과장되고 산만한 무대를 볼 때마다 무대에서의 힘의 안배를 체크하기도 했다. 그래도 인상깊게 남아있는 소극장 작품들이 있다. TOKO ONE이 쓰고 PHILLER OSESTERMAN이 연출하고 KENETH TOSTI 안무의 뮤지컬 「NEW YORK ROCK」은 하나쯤이라는 예외를 허락하지 않았던 출연자 10명 전원의 완벽한 가창력에 살아있는 동작. 공간의 처리. 무대장치에서 기술적인 문제까지도 섬세하게 배려되었던 소극장 뮤지컬의 완성작을 보는 듯한 감격이 있었다. 내용보다는 구성이 돋보였던 소극장에서의 신선한 충격을 잊을 수가 없다.

PAN ASIAN REPERTORY를 통하여 말로만 들었던 Staged reading 작업에의 참여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작품이 선정된 후 스텝과 출연진이 구성이 되면 비교적 짧은 기간 안에 연습하여 막을 올린다. 그 막이 내린 후 작업에 참여했던 자들과 관객들이 무대와 객석에 마주앉아 그 날 올려진 작품에 대한 토론으로 이어진다. 그런 경위로 작품의 가능성이 타진되고 나면 작품을 선정, 보완하여 차후 그들의 정규 공연에 붙여진다고 했다. 우리의 워크숍과는 많이 달랐다. 물론 참여자들에게는 사례금이 지급된다. 우연히 그 무렵 TAWN HALL에서 뮤지컬「THE NEW YORKERS」를 관람하게 되었었다. 1일 1회 공연이라는 선전 문구 앞에 상당히 추운 날씨였음에도 불구하고 극장 앞엔 사람들이 청사진을 치고 있었다. 극장에 들어간 후에야 그 작품이 Staged rdading임을 알게 되었다. 이미 열려져 있던 무대는 뮤지컬 연습실을 연상케 했다. 물론 소도구는 생략이 되어 있었고 꼭 앉아야 할 장면에서는 철제 의자를 사용하고 있었다. 의상이나 장신구 역시 느낌만 비슷하게 갖추고 있었다. 노래와 춤은 완벽하게 연습이 되어져 있었지만 대사는 역시 대본에 기대고 있었다. 자신에게 편리한대로 파일을 들기도 했고 대본의 낱장을 들고 진행해 나갔는데도 전혀 어색하다거나 지루하다는 느낌을 받지 않았다. 상수쪽에 피아노 한대, 마이크의 사용없이 진행되었던 무대였음에도 불구하고 대극장을 채운 관객들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받았다. 무대도 배우도 또한 배우 지망생들도 많기에 무대로 향한 길목에는 훈련장도 많았지만 선생들이 많은 것도 그들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인 듯했다.

H, B Studio musical theatre시간에 원하기만 하면 언제라도 작은 무대가 꾸며지곤 했다. 수업장 칸막이 뒤엔 소도구 일체가 준비되어 있는 것을 보며 공연 당일이 임박해서야 겨우 소품을 접해보는 우리의 무대 상황이 비교되었다. 기본 훈련 내지 재훈련을 하기 위해서 인원을 구성하고 선생을 선택하며 또한 시간을 정하여 연습할 장소를 물색하기까지 애쓰는 우리 동료들의 생각이 간절했다. 무대에서 공연하는 그들을 바라볼 때마다 우리 배우들의 능력도 저들 못지 않다는 자부심도 갖게 되었고 우리 무대의 가능성을 다시 확인해 볼 수 있었다. 시간시간 뛸 수 있는 항상 열려져 있는 어느 훈련장 마룻바닥에 앉아서 너무 늦게 왔다는 생각으로 안타까워하기도 했지만, 이미 겪었던 체험 앞에 그동안 우리 무대에서 좋은 이웃과 더불어 건강한 작업을 했다는 자긍심을 갖게 되며 나의 것, 나의 정서, 우리 소리를 찾아 돌아앉게 된다. 주체성 없이 남의 것이나 모방하며 복제품이나 날라다가 선보이는 그런 양심은 버려야 한다는 도전을 받기도 했다. 우리 것에 대한 가치를 인정해 줄 관객과의 진정한 악수를 소망하며 우리의 향기를 문화 속에 담을 헌신의 용기가 필요할 때라는 생각과 만나진다. 한 무용수의 얼굴에서 튀어오른 땀방울이 공중에 잠시 머무는 순간을 포착했던 Lincon center New York State 극장의 무대에서 받았던 그 감동이 무대인이라는 긍지와 자부심을 갖게 했듯이 이제 우리 문화와 밀착된 삶으로 유도할 우리만의 무대를 꿈꿔보면서. . (국내의 문화예술인들을 대상으로 해외에서의 연수를 지원하는 문예진흥원 사업중 '93 문예인 해외연수, 연극부문 대상인 우상민씨가 지난해 10월 16일부터 4월 17일 까지(6개월간)미국의 Silk Road Playhouse등 3곳에서 연수를 받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