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기획 / 세계 고도들의 옛모습 보존과 현대건축물 수용에의 변화와 조화
세계의 고도 / 터키 이스탄불(Istanbul)
비잔틴과 오스만제국의 수도
김성곤 / 동아대 교수, 건축가
유서깊은 역사를 지닌 도시
이스탄불은 세계사의 주역이었던 비잔틴이나 오스만제국의 수도였던 도시이고 그것도 1600년이란 기나긴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이와 같이 유서깊은 역사를 지닌 도시로서는 이 지구상에서 당연히 으뜸이 된다.
600만이 넘는 거대도시이고 인지도가 높은 국제도시이지만 오늘날 터키의 수도는 앙카라이다. 이것은 1923년에 오스만제국이 붕괴하고 새로운 터키 공화국의 성립으로 아시아측 내륙으로 옮겨졌기 때문이다.
지리적으론 이스탄불은 유럽땅의 동쪽 끝에 있는 도시이다. 동쪽으로 보스퍼러스 해협이고 그 건너편이 아시아의 땅 아나토리아 반도의 서쪽 끝이다. 해협이라기보다 강과 같아서 건너편의 집들이 손아귀에 잡힐 듯 가깝고 움직이는 차량도 보이는 거리이다. 해협에는 큼직한 화물선이 오가고 있으며 간혹 군함도 보인다.
아시아의 유럽을 가로지르는 보스퍼러스해협은 그 폭이 좁은 곳은 불과 660m에 불과하고 흑해에서 말마라 해에 이르는 해협의 길이는 32km이다. 특히 해협의 평균 수심은 70m로서 잠수함이 잠수한 상태로 항행이 가능하다고 한다.
이와 같이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결절점이고 또한 흑해와 지중해를 잇는다는 지정학적 사유로 인해 일찍부터 이스탄불은 전략적 요충이었다. 그래서 여러 힘있는 민족이 탐을 내어 밀고 밀리는 역사가 반복되었던 고장이다.
이스탄불의 역사를 보면 기원전 1000년경에 새미스트라인이 정착했던 곳이다. 그리고 기원전 7세기에는 그리스의 도시국가 메가스의 비자스가 식민지를 건설함으로써 그의 이름을 따라 비잔티움(Byzantium)이라 부르게 되었다. 메가라에 이러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베르가몬 등으로 지배자가 바뀌고 기원전 148년에는 로마의 영토가 되고서 약 500년간은 로마의 지배를 받았다.
그리고 기원후 330년에 비잔틴(동로마 제국)의 수도가 되고부터는 역사의 주역도시가 되었다. 도시 이름도 비잔티움에서 콘스탄티노포리스(Constantinopolis)로 개칭되고 1100여 년간 지속되었다. 그리고 1453년에는 오스만 터키가 이 도시를 함락함으로서 비잔틴제국은 멸망되고 약 500년간 오스만제국의 수도가 되고 이름은 다시 이스탄불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른다. 콘스탄티노포리스 시대의 1100년과 이스탄불 시대의 500년등 대제국의 수도로서 1600년이란 길고도 뜻깊은 역사를 지닌 도시이다.
이슬람과 기독교가 함께 하고 아시아와 유럽의 요소가 공존
초기의 비잔티움시대 500년간을 헬레니즘시대라고 하지만 이때에 만들어진 유적은 전혀 없다. 이것은 일개 도시국가의 식민지였던 점도 있겠으나 2세기 말 그리스인의 모반으로 배신당했던 로마의 그리스 유적 파괴도 그의 원인이 된다. 그러나 로마, 비잔틴 및 오스만제국 등의 이천년이 넘는 시간대에 남겨진 민족과 문화를 달리하는 유물이 가득한 역사도시이다. 특히 15세기 중반에 이 도시를 점령한 오스만터키인들은 그들과 무관했던 로마와 비잔틴이 만들어 놓았던 건축물이나 도시시설을 파괴하는 일없이 오히려 그들 스스로의 도시로 개조하고 발전시켰다는 점은 참으로 돋보인다. 그래서 아시아와 유럽의 요소가 공존하고 이슬람과 기독교 문화가 함께 있는 도시 이스탄불은 참으로 값진 유적도시라 할 수 있다.
대제국의 수도로서 깊은 역사를 지닌 도시이면서도 우뚝 솟은 과시적인 궁궐이나 기념광장이 중심이 된 도시 구경도 아니다. 민족과 종교를 달리하면서도 먼저 유적보전을 위해 이를 피하는 도로도 내고 건물을 짓는 도시개발을 한 셈이다.
따라서 상징가로나 광장조차도 없으나 시대를 초월한 문화유산을 듬뿍 껴안고 있는 것이 이스탄불의 특성이고 감정이다.
이스람의 가르침에는 도시란 반복되는 파괴의 위협에 있는 것이어서 도시건설에 적극성이 강조되지 않는다.
따라서 계획에 의한 도시건설에 대해 무관했던 것이며 도시란 그들에게 다만 모스크나 기타의 공공 건축물이 있는 장소로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유서깊은 옛 왕도(王都)로서의 이스탄불은 금각만(金角灣) 남측의 구시가지를 말한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진 반도이고 시가지 서편의 육지부는 견고한 성벽이 있고 해안에도 성벽이 이어진 요새화된 성곽도시이다. 금각만의 북측은 신시가지라하여 19세기 이후에 개발되었으며, 고층화된 비즈니스 센터를 중심으로 고급주택과 아파트 군이 확산되어 있다. 근래에는 보스퍼러스 해협 건너편이 아시아 측으로 크게 확대되어 인구 분포도 유럽측과 아시아측이 각 300만으로서 600만에 이르는 거대도시가 되었다.
구시가지의 성벽은 비잔틴의 초기인 4세기말에 창건된 것이 오스만시대에 재차 보강된 것으로써 그 원형이 거의 남아 있다. 성안의 시가지에 들어서면 바렌스 수도교(375년에 건조)가 가로지르고 있다. 지금은 쓸모없는 것이지만 당시 시가지의 서북측 19km되는 곳에서 취수해서 청량수를 공급했던 송수로로서 높이 26m의 2층 형식의 연속아치로 길이 800m 가량이 남아 있다.
수도교를 지나 동쪽으로 가면 금각만을 바라볼 수 있는 언덕 위에 4개의 미라넷과 중앙돌이 우뚝 솟은 대사원이 보이는데 이것이 슈레이마니에 대사원(1558년 완공)이다.
이 건물의 중앙 돔(dome)의 직경은 26m이고 그 높이는 55m에 이른다. 중앙돔의 주위에 작은 돔을 둠으로서 돔에서 생기는 횡력을 무리없이 밑으로 전달토록 된 것으로서 오스만 건축을 대표하는 가장 짜임새 있고 훌륭한 걸작품이다. 또한 이 사원의 주위에는 신학원, 병원, 도서관, 무료급식소, 대상 숙소 등의 부속건물을 거느린 복합시설군이 정연히 배치되어 있다.
동편의 산타소피아 대성당 서편의 술타나메트 대사원
슈레이마니에 대사원의 바로 남측에는 이스탄불 대학과 오스만 최초의 대사원인 바야짓트 쟈미(1505년 완공)가 있고 그의 동쪽으로 그란드 바자르가 이어져 있다. 이 바자르는 콘스탄티노포리스의 함락 직후인 1456년에 목조 건물로 건립되었던 것이 수차례의 화재를 당한 후 1894년에 벽돌과 돌로써 재건되었다. 5000여개의 점포가 몰려있는 이 시장은 입구가 18개소에 업종 별로 구획되어 있다. 사람들이 몹시 붐비며 활기 넘치고 이스람적인 분위기를 듬뿍 느낄 수 있기에 꼭 들러볼 만한 곳이다.
여기서 동남쪽으로 가면 넓은 녹지대를 사이에 두고 동편의 산타소피아 대성당과 서편의 술타나메트 대사원의 웅장한 모습이 나타난다. 대 스펙타클이다. 도시 속에서 이러한 스케일과 경관을 만난다는 것은 드문 일이다. 특히 이스람 나라에서 기독교의 옛 성당을 그대로 보존하고 이를 더욱 으뜸되는 자리로 만든 터키인의 도량이 돋보인다.
이 대성당은 AD 537년에 완공되었으니 천오백년에 가까운 나이가 든 셈이다. 오랜 시공을 넘기면서 원형 그대로가 보존된 것은 매우 드문 사례이다. 중앙돔의 직경은 32m이고, 그의 높이는 55m이며 건물의 평면은 72×77m로서 미니 축구장만 하다.
술타나메트 대사원(1616년 완공)도 중앙돔 형식이고 주변에 여섯개의 높다란 미라넷이 있다. 돔의 구성형식이 소피아 대성당과 엇비슷해서 이의 모조품인양 평가 절하시키는 험구가도 있다. 그러나 이 사원의 돔 구성은 슈레이마니에 대사원과 같으며 소피아 성당이 갖는 구조적 취약점의 개선으로 내부 기둥의 굵기를 축소하므로써 내부공간의 확대를 기했다는 점은 참으로 훌륭하다.
술타나메트 대사원 북쪽에는 로마시대 경마장(AD 211년 완공)의 유적이 있다. 창건 당시는 4만 관중을 수용하는 스타디움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경마장 부분은 잔디로 덮혀 있고 중앙부에 이집트에서 옮겨온 높이 26m의 기념주인 오베리스크가 있다. 이 옆에는 그리스에서 옮겨온 뱀이 꿈틀거리는 모습의 기념주와 콘스탄틴의 기념주로 불리우는 금속주 등이 거리를 두고 일렬로 배열되어 있다.
소피아 성당에 가려서 시가지에서 볼 수 없으나 뒤돌아가면 동편에 포스퍼러스 해협을 바라보는 해안 언덕 위의 숲속에 2중 성벽으로 둘러진 토프카프 궁전이 있다. 동서양에 걸쳐 대제국을 이루었던 오스만제국 황제의 궁전이다. 접견실을 중심으로 도서관, 사원, 학교, 정각 등이 여러 동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부분이 황제의 공적(公的) 시설이고 후궁들이 거처했던 할렘이란 사적(私的)시설 등이 함께 있는 거대한 복합시설이다.
궁전 입구 북측에는 오스만 제국의 초기에 건축된 별궁 친리 쾨스크(1472년 완공)는 청색과 녹색의 타일로 마감된 2층 형식이다. 이 별궁과 더불어 19세기에 건축된 신고전주의 양식의 건물까지 합쳐서 지금은 고고학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전시된 내용물로 볼 때 세계적인 것이다.
민족과 종교 초월한 문화와 예술의 포용으로 탄생한 걸작품
이상의 여러 유적은 약 2Km범위의 시가지 속에 산재되어 있다. 살아있는 도시공간 속에 우뚝우뚝 치솟은 옛 건축물은 현재와 강인한 대조를 이루며 매우 인상적이다. 2천년이란 시공(時空)을 달리하는 대건축물을 대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감개무량하며 특히 이 지역은 걸어서 두루 찾아 볼 수 있다.
민족이 다르거나 종교가 다른 것에 대해 가혹했던 유럽인과는 근원적으로 다르다. 기독교 국가 비잔틴제국을 패망시키고 유럽 깊숙이 들어가므로써 종교적인 앙금이 격했던 오스만시대에 기독교의 성당을 이스람 사원으로 전용한 경우는 있어도 성당을 부셔서 석재를 사원 신축에 도용한 일은 결코 없었다. 일방적으로 이스람을 강요치 않았던 오스만은 다양한 문화나 예술을 포용하므로써 많은 건축의 걸작품을 탄생시켰던 것이다. 이것은 이스탄불을 알찬 예술의 도시로 승화시킨 결과이며 또한 그들이 지녔던 아시아적인 관용의 덕이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