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기획 / 세계 고도들의 옛모습 보존과 현대건축물 수용에의 변화와 조화

세계의 고도 / 이태리 로마(Rome)

베니스의 곤도라, 로마의 유적 그리고 미켈란젤로




윤재원 / 건축가

삼천여 년의 역사의 도시

세계 패션의 원상지, 가톨릭의 종주국이기도 하며 최고의 범죄조직의 대명사이기도 한 마피아가 공존하는 나라 이태리. 그곳의 수도 로마.

3000여 년간의 역사의 증표들을 겹겹이 담고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

로마는 지중해의 따가운 햇빛에 까무잡잡하게 그으른 미켈란젤로의 조각품과도 같은 젊은 청년들과 강렬한 인상의 소녀들과 함께 고색찬연한 고전 건축물들과 신전들이 한데 어울려 3000여 년 역사의 화려한 극을 연출하고 있는 듯하다. 로마는 한겨울에도 길가에 테이블을 내어놓고 차를 마실 수 있을 정도로 따뜻해 겨울나기가 그리 힘들지 않다. 적절한 자연조건과 선조들이 남겨놓은 역사적 걸작들과 건축유산, 그에 걸맞는 사람들 등…….

이러한 환경에서 하루하루를 생활하는 그들이 정열적이고 낙천적이기도 하며 인간적이며 역사를 존중하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현상인 듯까지 한다.

로마를 둘러보면 도시 전체가 한 개의 역사 예술박물관으로 약 350만의 로마인들은 선조의 창조적인 장인정신으로 빚어놓은 예술의 산물들을 잘 보존하고 있다. 이미 고대 로마인들이 그리이스의 문화유산들을 잘 보존하고 재 사용하였듯이 근대사회의 15∼16세기부터 보존에 대한 관심은 그들 생활의 한 부분이 되어 있으며, 또한 이러한 모든 문화유산들을 후손에게 손상됨 없이 잘 물려줄 것이다.

로마는 나의 기억들을 담고 있다. 십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곳에 그렇게 예전의 그 모습 그대로 변함없이 남아 당시의 기억을 더욱더 생생하게 하고 있다. 아마도 수십 년이 흐른 후 다시 로마를 찾게 되더라도 역시 그곳에 그렇게 남아 있으리라.

피라미드가 창문을 통하여 시야에 들어온다. 창문을 연다. 바로 내 눈앞에 한순간 2000여 년의 역사의 증표들이 파노라마를 보듯이 펼쳐진다. 기원전 11년에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본따 만든 사각뿔형의 무덤과 이를 연결하는 300년대에 축조된 성벽, 1900년대 초반의 파시스트 스타일의 건물들, 20세기 중반의 근대 건물들과 바로 성벽을 나서면서 보일 듯 말 듯 낮으막하면서도 얌전한 형태로 70년대 축조된 소위 하이테크적 철골 건축물이 구석에 조용히 자리잡고 있으며 요 몇 달 전에 새로 들여온 멋진 전차가 그 곁을 지나간다.

좁은 도로와 차 한 대가 겨우 지나다닐 수 있는 거리를 거닐다보면 갑작스럽게 거대한 광장을 만나게 된다. 18세기 트레비분수 광장, 기원 전후의 판테온 광장, 4세기경의 경기장 형태의 나보나 광장 등 시내의 크고 작은 수백의 광장들이 역대의 예술가들에 의해 제작된 작품을 담고 로마시민과 전세계에서 방문하는 관광객에게 고전의 미를 감상할 수 있는 기회와 휴식처를 제공하고 있다.

십여 년의 로마 생활을 마감하고 서울로 돌아오기 전날 밤 평소에 그의 너무나도 인간적인 공간감에 매료되어 자주 찾았던 꽃의 광장(CAMPO DEI FIORI)에서 마지막 밤을 기억하기 위하여 들렀다. 필립 존슨(건축가 87세)은 로마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역사의 창조물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삶을 즐길 수 있는 도시이기 때문이며 20년 후에는 꽃의 광장 옆의 화려한 나보나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한 집에서 마지막 여생을 즐기고 싶다고 한다. 그러나 이 꽃의 광장은 바로크 시대의 건축가 베르니니와 보로미니의 작품이 있는 나보나 광장처럼 거창하지 않고 트레비 분수같이 유명하지 않으며 바티칸처럼 권위적이지도 않아 좋다. 오랜 친구를 다시 만나 듯이 그저 가까이 가면 나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곳. 낮에는 노천시장으로 이용되며 저녁에 광장에 탁자를 내어놓고 식당으로 사용하는 인간적인 규모의 이태리의 전형적인 광장(piazza)이다. 현재는 프랑스 대사관으로 길 건너편에 있는 파리네세가(家)의 건물을 증축하기 위하여 이곳을 400여 년 전 미켈란젤로가 자주 들렀을 만한 캄포 데이 휘오리. 십년 전이나 작년 이태리를 떠날 때나 항상 변하지 않는 훈훈한 매력을 풍기며 우리를 맞아 주는 곳이다.

로마 도시 전체가 박물관 - 보존, 로마의 과제만은 아니다

역대의 걸작들과 역사의 증표들이 각 시대의 생활과 문화를 제거함 없이 누적시켜가며 진화되어 온 도시 전체가 박물관처럼 형성되어 있는 전세계 인류문화의 보고 로마를 어떻게 잘 보존하여 후세에게 우리들이 물려받았던 대로 잘 되돌려 줄 수 있을까? 이 문제는 단순 로마인들의 과제만은 아닐 것이다. 바로 인류문화 발전의 증표로서 그들의 미적 의미와 역사적 의미를 담고 손상됨 없이 존재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로마의 대부분의 건축물들과 조각들은 대리석으로 축조되어 있으며 특히 외기에 면하고 있는 부분들은 자동차 매연으로 인한 산성비에 치명적이다. 빗물과 대리석 표면이 화학작용을 일으켜 섬세하게 조각되어진 표면들을 부슬부슬하게 녹여버리며 형태조차 알아볼 수 없도록 퇴락시켜버리고 만다. 자동차 매연으로 인한 이러한 현상들은 수천년 이상을 잘 보존되어 오던 세계 공동의 문화유산들을 하루하루 잠식시키며 파괴되어져 가고 있다.

자동차 매연을 줄이기 위하여 몇 년 전부터 로마 시는 성벽 내부의 역사적 기념물이 밀집에 있는 도심지에 자동차 통행을 아침 7시부터 저녁까지 금지시켰다. 드디어 문화유적을 매연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최후의 처방을 내린 것이다. 평상시 조그마한 일로도 파업을 하고 데모를 해오던 로마 시민들도 문화재를 보호할 수 있다는 뜻에서 그들은 도심지에서 자동차의 사용을 포기하였다.

서울에서의 경우처럼 교통편의를 위하여 고가도로를 역사적 건축물 위에 축조한다든가, 일제의 잔재라 하여 이를 헐어내어 공원을 만든다든가, 민족의 정기를 되살린다 하여 이미 파괴되어 한세기가 지난 후 1대1로 복제품을 만들어 숭배하도록 하고 길이 비좁다하여 유구한 도시사의 증표들을 나래비로 쓸어 없애는 행위 등은 역사도시 속에 살고 있는 평범한 로마시민으로서도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역사 자체를 부정하는 행위로 비추어질 것이다.

아마도 80년대 초였던 모양이다. 서울에서 온 한 건축가가 로마여행을 하고 있었다. 고건물들이 여기저기 불규칙하게 산재해 있어 꼬불꼬불해진 좁은 도로를 지나면서 더덕더덕 누더기를 기워 입은 듯 이곳저곳에 철띠를 두르고 조각조각난 돌들을 접합시켜 일으켜 세운 모습을 보여주며 로마의 유적들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는 관광 안내원의 이야기는 듣는둥 마는둥 뒷자리에 앉아 한숨만 쉬고 있는 것이었다. 세계 경제계의 중요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일본인들이 로마공항을 자신만만하게 웃고 떠들며 들어선다고 한다. 그러나 여행을 마치고 돌아갈 때는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침울하게 돌아간다는 말은 있으나 이러한 역사 유적 앞에 별로 관심이 없다는 듯 답답해하는 그의 한숨소리는 이상하였다고 한다. 하루종일 뒷켠에 앉아 관광하고 차에서 내리면서 한다는 소리가 "여기도 새마을 사업을 해야겠군"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도로는 좁디좁고 건축물들이 길을 가로막아 구불구불한 데다 전쟁을 방금 치른 듯 다 허물어져 벽체만 남아 있는 폐허들하며 건축자재들은 이거저것 더덕더덕 붙여 놓고 벽은 퇴색이 되어 지저분하기 짝이 없고 반듯한 건물은 보기가 쉽지 않으니 그의 눈에는 이러한 것들이 안쓰럽고 한심하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아마도 역사적 기념물 위를 통과하는 깨끗하게 쭉쭉 뻗은 고가도로와 차량소통을 잘되게 하기위하여 가로변의 역사적 건물들을 모두 헐어내고 네모 반듯한 고층 건물들로 메워가고 있는 서울을 연상하며 로마 역시도 언젠가는 서울처럼 발전하여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음직 하고 이러한 것이 그의 로마시내 관광중 서울의 모습이 몇 번이나 자랑스럽게 그의 뇌리를 스치게 하였을까?

복원 대신 보수를 한 콜로세움 근대 보수이론과 맥을 같이해

고대 로마인들은 전 유럽과 그리스의 신전과 극장 위에 증축을 하였으며 아프리카, 아랍권의 가장 중심지에 그들의 건축물들을 축조하여 중심지에 그들의 자취를 남기게끔 하였던 그들의 도시 로마 역시도 서울에서 볼 수 있는 현 중앙 박물관과 같은 건축물을 그들의 도시 한복판 가장 높은 곳에 두고 있다.

19세기 초엽에 프랑스 식민지 당시 많은 건축물들이 헐려지고 프랑스식의 광장과 건축물들이 건조되어 현재의 로마 경관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중심지 왼쪽의 가장 높은 언덕에 프랑스식 신고전주의 스타일의 '나폴레옹 1세 광장'이라는 이름(현재도 동일한 이름을 그대로 사용)의거대한 광장과 로마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스페인 광장의 가장 높은 곳에 건립되어졌던 성당 역시 프랑스 혁명군들에 의하여 완전히 파괴 복구되어 현재 프랑스 성당으로 활용되어지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내용을 알고 있는 로마의 지식인들은 당시 프랑스인들의 행위에 분노한다. 그러나 헐어없애려 하지는 않는다. 이 역시도 로마 역사의 한 부분이기에…….

또한 거대한 규모의 콜로세움을 2000년 전의 모습으로 원형 크기로 복원하여 민족 정기를 되살리 겠다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폐허가 되어버린 역사의 증표를 복제품으로 전락시키는 우둔한 행위는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떠한 방법으로 역사적 건축물들을 이해하고 보존하여 왔는지 콜로세움과 바티칸 성당 축성의 에피소드와 함께 문화재 보존과 건축 역사의 차원에서 고찰하여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로마 시내를 바로 들어서면 거대한 원통형의 고대 로마시대에 원형경기장으로 쓰였던 콜로세움(Colosseo)이 2,000여 년간의 수많은 사연과 거대한 자태를 나타내고 있다. 콜로세움은 장축이 180m에 단축이 156m의 타원형으로 높이 약 50m에 7,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경기장으로 지진을 흡수하고 건물의 하중을 지탱하기 위하여 12m 깊이의 콘크리트를 타설하였으며 기원 70년부터 약 8년간 짧은 공사기간 동안에 완성되었으며, 격투경기를 위해 5,000마리 이상의 동물들과 오십여 명 이상의 기독교 순교자들이 이곳에서 죽어갔다.

500년에 마지막으로 극을 공연하기도 하였으나, 지진이나 외적의 침입 등을 거치며 많은 손상을 입었으며, 15세기 경 성 베드로성당과 주요 건물을 축조하기 위한 자재원으로 쓰여지기까지 하였다. 18세기경 교황 베네딕트 14세는 이곳을 순교자들이 죽어간 혼이 담겨 있는 장소로서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하여 이의 보호령이 내려졌으며 경기장 내부에 거대한 십자가를 설치하여 고대 로마시대에 가톨릭 순교자들을 위한 참배지로 활용하도록 하였다.

건축가들은 교황에게 파손되어질 위기에 있는 콜로세움의 벽체에 버팀벽을 설치하여 보호할 것을 제안하였다. 약화된 기존 벽체를 안전하게 보수하기 위하여 상부에 남아 있는 위험한 부분을 헐어내고 보강벽을 설치할 것을 제안하였으나, 인위적이라 하여 결국 원형을 그대로 벽돌을 사용하여 보강, 보존하기로 하였다. 교황은 고대 로마의 기념물이자 순교자들이 순교한 역사의 증표를 파손의 위험으로부터 안전하게 보수한 것에 대하여 상당히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다.

또 당시의 건축가는 "당대의 역사적 증표를 보호하는 것은 후세에게 우리의 선조를 가까이서 느낄 수 있게 하는 작업이 될 것이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는 현대적 의미로서의 고건축 보수이론에의 새로운 장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사실 19세기 초 유럽의 각지에서는 그들의 민족주의와 국수주의의 상징으로 고전 건축물을 마구 복제하는 신고전주의가 난무하는 시대로서 독일의 괴테, 스탕달 등이 로마에 머무르며 고전의 아름다움을 흠모하였고, 본국으로 돌아가 국수주의의 상징으로 국민들에게 이러한 행위를 인식시켰던 시대였기도 하다. 건축가들은 그리이스, 로마, 고딕양식을 국가주의의 심볼로 이해하고 있었던 시대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이러한 시대적 흐름에도 불구하고 고대의 영광을 되찾고자 하여 콜로세움을 복원하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수한 것은 근대보수이론과 맥을 같이하고 있기도 하다.

도시 전체가 집안의 거실 같은 포근한 분위기와 로마시

로마제국의 몰락과 함께 건축문화 역시 향후 천여 년간 별다른 발전을 보이지 못하였으나, 교황청의 점진적 세력확장과 함께 300년대에 건축된 구(舊) 성 베드로 성당은 헐리고 1506년 그 위에 그리이스 십자 모양의 새로운 성당이 르네상스의 기라성 같은 작가들 브라만테, 미켈란젤로, 카를로 폰타나, 베르니니 등에 의하여 120여 년간에 걸쳐 건축되어진다. 1499년 몇몇의 건축가들의 제안중 그리이스 십자가 모양의 평면과 판테온의 돔을 닮은 브라만테의 제안이 채택되었으며 천년 이상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구 베드로 성당은 새로운 성당의 축조를 위하여 브라만테에 의하여 철거되었다.

이로 인하여 그는 파괴적인 사부(maestro distruttivo)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종종 한 젊은 청년이 브라만테의 작업을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곤 하였다.

그가 바로 미켈란젤로였고 당시 교황의 무덤을 디자인하기 위해 그곳에 와 있었다. 그의 천재적 예술성은 브라만테로 하여금 미움을 샀고, 결국 이에 위험을 느낀 미켈란젤로는 잠시 피렌체로 돌아가게 되었다.

교황 줄리우스 2세와 브라만테의 죽음으로 인하여 미켈란젤로가 로마에 머무르게 된지 30여 년 만인 1547년 드디어 72명의 건축가를 이끈 바티칸의 총 책임자가 되었고 고딕형 돔 형태를 한 피렌체 성당의 돔을 많이 참조하여 설계되었으며, 그는 영광스러운 신과 성베드로를 위하여 급료를 마다하고 헌신을 하였으며, 중앙의 돔은 그가 죽은 후(1564) 30여 년 후 완공되었다. 미켈란젤로의 라틴식 평면은 구성당의 영역을 완전히 덮지 못하여 성령들을 보호하지 못하고 기가 빠져나간다고 하여 세로축을 늘려 축조하였으며, 이미 성당을 축조하기 시작한 지 백여 년이 흘렀고 건축양식은 이미 베르니니가 주임건축가로 임명될때(1629)는 르네상스와 매너리즘을 거쳐 이미 바로크 양식을 취하고 있어 건축양식이 세 번이나 바뀐 후였으며 결국 베르니니의 광장 마무리 작업을 마지막으로 20명의 교황과 역대의 거장 10명의 건축가들의 손을 통하여 베드로성당은 120년 만에 완성을 보기에 이르렀다.

셀 수 없이 많은 문화유산들은 현대의 로마인들에게 많은 것을 제공한다.

휴식처로서의 수백 개를 헤아리는 광장들과 분수들, 그리고 신전, 성당 등과 이들 주위의 식당과 카페 등이 어울려 도시 전체가 집안의 거실과도 같이 포근한 분위기로 역사, 인간, 생활을 연계시켜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