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종 공연과 일반시민을 위한 문화공간
이상면 / 연세대 독문과 강사
영국 런던의 왕실국립극장(National Royale Theatre)
런던에 있는 영국의 국립극장은 1963년에 올드 빅(Old Vic) 극장에서 첫 공연을 시작했고, 1976∼1977년 현재 위치해 있는 건물의 세 극장이 완성됨에 따라 이사해 온 후 자기 극장에서 공연을 시작하게 되었다. 현재의 국립극장 건물은 세 극장 공간과 여러 사무실, 작업장과 부대시설들을 갖춘 거대한 건물 복합체로서 전망이 아주 좋은 곳인, 템즈 강 남쪽편 사우스 뱅크(South Bank)에 위치하고 있다.
극장 건물 내에서 강 건너편을 바라보면 런던 시내가 보이고, 건물 내의 로비와 연결된 테라스 쪽으로 나가면 강가에서부터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느낄 수 있다. 이곳에서 런던 시민들은 연중무휴로 개관하는 국립극장의 공연들을 관람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 곳에서 주관하는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전시회 구경을 하고, 로비에서의 음악 연주도 들을 수 있다. 그래서 이 극장의 특징은 단순히 공연 행사만을 위한 곳이 아니라, 일반 시민들의 문화적 생활을 위한 곳이라는 데 있다. 또한 극장 내에는 서점도 있고, 음식점, 카페, 칵테일 바 등도 있으며, 넓은 로비가 있음으로 해서 누구든 공연 전후에 와서 휴식을 취할 수도 있고, 서로간의 만남의 장소가 될 수도 있다.
거대한 극장 건물 내에는 대극장인 올리비에(Olivier) 관(館), 중극장인 리틀턴(Lyttelton) 관, 소극장인 커티스로(Cottesloe) 관과 더불어 극장 뒤쪽으로는 넓은 작업장을 갖추고 있다. 이 모든 공간들이 한 건물 안에 있는 런던의 국립극장은 상당히 큰 규모가 될 수밖에 없으며, 그 운영을 위해 적지않은 경비가 드는 것은 물론이고, 이곳의 모든 부분들이 완성되는 데도 상당히 많은 시간이 걸려야 했다.
이 흥미있고도 주목해볼 만한 극장에 대해 상세히 알아보기 위해 이 글에서는 극장의 소사
(小史)와 목적, 건물의 구조, 극장 내의 조직, 그리고 재정 등으로 나누어서 차례대로 서술해보려 한다.
극장의 간략한 역사
<설립에 이르기까지의 힘겨운 과정들>
런던 국립극장의 역사는 이제 30년 정도로서 오래 되지는 않았으나 그것의 설립을 위한 노력은 실제로 100여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이미 16세기 말경에 세익스피어, 말로, 존슨등의 극작가를 위시하여 엘리자베스 조(朝)시대에 연극 황금기를 이룬 바 있는 영국에서는 400년 이래로 매우 발달된 연극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서 19세기 중엽, 1848년에 국립극장을 설립하기 위한 계획안이 에핑햄 윌슨에 의해 처음으로 제기되었다. 그는 진보적인 출판업자로서 세익스피어 연극을 위한 공립(公立)극장의 설립을 주창하며(A House for Shakepeare), 이곳에서 세계의 위대한 극문학 작품들이 공연되기를 희망했다.
그 후 19세기 후반에도 국립극장의 설립을 위한 몇 번의 제안들이 더 있었으나 진지하게 고려되지 못했다. 20세기 초 1903∼1904년에 비평가인 윌리엄 아처와 작가겸 배우, 연출자인 해리 그랜빌바커가 공동집필한 책에서 국립극장에 관한 상세한 계획을 서술하여 주목을 끌었다. 이 두 사람은 세익스피어 기념 국립극장(Shakespeare Memorial National Theatre)을제안하였으며, 이것의 설립을 위해 기금 모금 운동도 벌였다. 여기에는 버너드 쇼, 갈스워시 등의 작가와 더불어 연기자들뿐만 아니라, 윈스턴 처칠 등 많은 정치·사회계의 유명 인사들도 협력을 했다.
이 계획은 빠른 시간 안에 호응을 얻음으로써 실현이 될 것 같았으나, 1914년부터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무산되고 말았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도 국립극장에 대한 생각들이 수차례 제기되었으나, 전쟁기간 동안 경제적 상황이 악화되었으므로 본격적인 진전은 종전 후에야 가능했다.
40년대 후반의 재무상 스태포드 크립스 경(卿)은 국립극장 건설을 위해 재정 지원을 약속했으며, 1949년 국립극장 예산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그러나 종전 후의 좋지 않은 경제 사정으로 인해 이 계획의 실현은 좀더 시간이 걸려야 했다. 또한 극장의 장소 문제로 토론이 벌어져서 몇 번이나 장소가 변경된 끝에, 1951년 엘리자베스 여왕(현재 여왕의 모친)이 국립극장을 위한 초석을 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가들은 실제적인 진전을 위해 별반 노력을 기울이지도 않았고, 여왕이 놓았던 초석은 템즈 강 남쪽, 사우스 뱅크의 위아래로 옮겨졌다. 심지어 1961년 수상이었던 셀윈 경은 국립극장을 위한 재정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고 공공연히 말하여서, 국립극장에 대한 희망은 사라져버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러한 국립극장을 땅 속에 묻어버리려는 생각에 대한 반발이 국립극장 계획을 소생시키게 되었다. 연극인들은 예술원과 연대를 맺고, 정부가 국립극장에 대한 책임을 부정하려는 태도를 반박하고 나섰다. 그러자 얼마 후에 곧 런던의 주의회는 극장 건설을 위한 신축기금 중 일부의 금액(거의 30%에 해당되는 금액)을 지불하겠다고 했으며, 건물에 대한 임대료를 받지 않는 장소를 제공하겠다고 나섰다. 그리하여 정부는 이전의 생각으로 돌아가서 극장에 대한 재원을 마련하기로 했다.
이듬해 1962년 국립극장 상임위원회가 올리버 리틀턴을 회장으로 결성되었고, 사우스 뱅크 국립극장과 오페라 극장 상임위원회도 각각 뒤따라 조직되었다. 치체스터 축제 극장장이던 로렌스 올리비에는 초대 국립극장장으로 임명되었다.
이 당시 국립극장의 상임위원들은 새로운 극장 건물이 완성되기를 기다리기보다는 다른 곳에서라도 공연을 올리려고 했다. 그래서 1963년 10월 22일 런던 시내에 있는 올드 빅(Old Vic) 극장에서 국립극장은 첫 공연의 막을 올렸고, 출발을 세상에 알렸다.
<창단 공연부터 현재까지>
국립극장은 창립 공연으로서 삭제되지 않은 「햄릿」을 올렸다. 극장장 로렌스 올리비에가 연출을 했으며, 햄릿은 피터 오툴이 맡았다. 이와 함께 치체스터 축제로부터 온 「바냐 아저씨」(체홉)와 「장교 선발」(파큐하) 들이 모두 성공적으로 국립극장을 개관하는데 기여를 했다.
국립극장 건물의 건축 담당으로서 데니스 래스던이 임명되었고, 그는 모두 9명으로 구성된 연출위원회(피터 브룩과 피터 홀도 당시 여기에 속했음)와 더불어 무대장치가, 연기자, 극장 경영자, 문학 담당자 등과 함께 상의하면서 문제점들을 연구했다. 창단 2년째 되는 1964년에 로렌스 올리비에가 주연한 「오셀로」는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이듬해에 국립극단은 소련으로 해외공연을 가기도 했다. 또한 동독에서는 베를리너 앙상블이 와서 브레히트의 작품들과 그의 세익스피어 번안극 「코를리아너스」를 공연하기도 했다.
극장 신축비가 처음에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들게 됨에 따라, 오페라 극장은 포기되었다. 정부는 추가로 드는 건축비용을 승인하였고, 1969년에서야 비로소 국립극장 기공식을 갖게 되었다.
극장 건물이 건축되는 5년여 동안 국립극장은 올드 빅 외에도 소극장으로서 영 빅(Young Vic)극장과 케임브리지 극장을 임대하여 사용하고 있어서, 이 시기에 국립극장은 분산된 곳에 있는 세 극장을 운영하고 있는 셈이었다. 로랜스 올리비에는 건강상 이유로 1974년 극장장직을 사임하였고, 피터 홀이 제2대 극장장을 넘겨받았다. 70년대 초반의 오일쇼크로 인한 재정위기, 파업 등으로 극장 건물의 신축은 여러 번 연기되었으며, 1975년에서야 세 극장중 중극장인 리틀턴 극장이 완성되었다. 이곳에서 1976년 3월 피터 홀의 연출로 다시 삭제되지 않은「햄릿」으로써 개관 공연을 갖게되었다. 잇따라서 올리비에 대극장이 같은 해 10월에, 그리고 소극장인 커티스로가 1977년 3월에 각각 개관을 하게 되었다(세 극장 이름은 국립극단의 초창기에 주요한 역할을 했던 연극인들의 이름을 이어받은 것들이다). 이제 국립극단은 자체 극장을 소유하게 되면서 더욱 활발한 프로그램을 갖고 공연을 보여줄 수 있었다. 또한 공연 외에도 극장 내에서 전시회와 음악회도 개최할 수 있게 되었으며, 해외로부터 유명 극단의 방문공연도 받을 수 있어서 매우 다양한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이 당시 해외의 극단들로는 서베를린의 샤우뷔네가 페터 슈타인 연출의 「여름 방문객」(고리키)을, 스페인 누리아 에스페르트 극단이 빅토르 가르시아가 연출한 「디비나스 팔라브라스」(인클란)를 보여주었다. 물론 지방의 유명 극단들도 런던의 국립극장으로 와서 공연을 했다.
70년대 후반, 국립극장은 고전 이외에도 동시대 작가들 작품들을 여럿 공연하여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이들 가운데에는 에드워드 본드의 「그 여인」, 해롤드 핀터의「배신」, 톰 스토파드의 슈니츨러작품 번안인 「미발견된 시골」, 그리고 당시까지 최대의 성공작이 되었다는 피터 세퍼의 「아마데우스」(피터 홀 연출)가 있었다. 영화로서 유명한 「아마데우스」는 바로 이 연극의 희곡을 토대로 만들어진 것이다.
80년대 초에 피터 홀은 기념비적인 연출을 보여주었다. 그는 희랍 비극인 에스킬러스의 「오레스 테이아」 3부작을 새로 번역하여 작업하는 데 있어서 뛰어난 연출을 하였다. 이 연극은 텔레비전에서 녹화하였고, 82년에는 그리스의 에피다우루스에 있는 고대 희랍의 야외 극장에서 다시 공연이 되기도 했다. 그 외에도 80년대 초반에는 리차드 에이어가 연출 한 뮤지컬 「사내들과 인형들」(1982)이 상업적으로 대성공을 거두었고, 그는 다시 존 게이의 「거지들의 오페라」를 연출했다.
마침내 1984년에는 스튜디오가 설립되었다. 피터 질이 담당하게 된 이 스튜디오는 사설(私設) 단체들의 후원을 받아 운영하게 된것인데, 올드 빅 극장의 별관에서 프로그램이 진행되었다. 이것은 국립극장 단원들의 기술을 다시 훈련시키고, 작가들에게는 새로운 창작의욕을 북돋워주며, 실험정신을 일깨워주는 기회를 주기 위해 마련되었다. 80년대 중반, 한때 재정난으로 인해 소극장인 커티스로우 폐쇄 위기에 처하기도 했는데, 극장장인 피터 홀은 급속히 소집된 기자회견에서 정부의 문화비삭감에 대해 강력하게 항의하는 표시를 했다. 공연상에서는 여러 성공작품들이 계속 이어졌는데, 앨런 액번의 「부정(否定)의 코러스」, 체홉의 「벚꽃 동산」등이었다.
1986년, 피터 홀은 조지 오웰의「동물농장」을 국립극장의 세 극장 모두에서 공연을 시도했고, 이후 닐 사이몬의 작품이며, 마이클 러드맨이 연출한 「브라이튼 해변가의 추억」, 데이비드 헤어가 연출한 「리어왕」(앤소니 홉킨스 주연)등이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하여 국립극장은 이러한 성공작들을 갖고서 어느때보다도 더 많이 해외로, 즉 프랑스, 오스트리아, 스위스 등 유럽과 미국, 캐나다로 나가 공연을 가졌다. 또한 기업체의 후원을 받아 국제적인 연극제를 주관하기도 하였다. 이때에 페터 슈타인이 이끄는 서베를린의 샤우뷔네, 잉그마르 베르히만이 이끄는 스톡홀름의 왕실 드라마 극단과 더불어 모스크바의 마야코프스키극단, 일본의 니나가와 극단 등이 초청되었다. 국립극단에서 국제적인 교류가 빈번해지게 된 것이다.
피터 홀은 1988년 세익스피어의 세 작품 연출을 끝으로 극장장직을 사임하였다. 그 뒤를 이어서 역시 연출가인 리차드 에이어가 극장장이 되었으며, 이 당시 그는 미들턴과 롤리가 쓴 「도전하는 것」을 연출하고 있었다. 국립극장의 역사 25주년이 되는 1988년에 여왕은 그동안의 업적을 기려 왕실 국립극장(Royal National Theatre)이라고 명명하도록 했다. 현재 수석 연출은 왕실 세익스피어 극단에서 오랫동안 활동했던 제니스타 매킨토시이고, 1989년 이후로 극장 상임위원회 회장은 솜스 여사가 맡고 있다.
극장의 목적
국립극장은 영국에서 전통있는 연극예술의 발전과 시민들의 문화생활을 위해 존재한다. 그러므로 국립극장은 우선적으로 영국 사회에서 영국인들 삶의 모습들, 생의 단면들을 보여주며, 그들의 생각들과 행동들을 드러내주는 영국 극작가들의 작품을 주로 공연한다. 그렇다고 해서 영국 외의 작품이 소홀히 취급되는 것은 아니다. 서양의 고전들과 현대 드라마들도 자주 공연되고, 전세계에서 소홀히 된 작품들도 이에 포함된다고 한다. 이러한 작품들을 최고의 수준인 연극으로 보여주는 것이 국립극장의 예술적 목적이라고 한다.
또 한편으로 국립극장이 어린이와 젊은이들을 위한 공간이기 위해 어린이극과 실험적인 시도들도 배제되지 않으며, 학생들을 위한 여러 종류의 할인과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공연뿐만 아니라 그 외의 극장 내의 시설(전시회, 서점, 카페테리아, 음식점 등)도 이용할 수 있어서 일반 시민들의 문화공간이자, 서로 만나고, 대화를 나누는 장소로서 국립극장이 제공되어 '사회적 센터(Social Center)'와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한다.
또한 극장 내에서는 교육 프로그램이 진행되어 연극에 관한 이해를 돕고 문화교육에 이바지한다. 이를 위한 프로그램으로는 연극 작업 설명과 유명 극작가에 대한 강연회, 연출가와의 대담, 극장운영에 대한 설명 등이 있으며 소년연극제, 워크숍 등이 마련된다(교육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극단의 조직과 운영 부분에서 상세히 언급하기로 한다).
극장 건물과 그 구조
<위치와 내부시설>
템즈 강 남쪽 강변에 위치한 국립극장은 사실상 런던에서 문화적 중심지라고도 할 수 있는 곳이다. 런던의 강남과 강북을 잇는 워털루 브릿지의 다른 한쪽에는 이미 여러 예술기관들이 들어서서 왕실축제홀, 엘리자베스 여왕홀, 헤이워드 화랑, 국립영화관과 영화 박물관이 있다. 교통편도 좋아서 런던의 시내 중심지에서 전철로 20분 안에 도달할 수 있으며, 특히 코벤트 가든 같은 도심에서 매우 가깝다. 좋은 자연적 조건과 편리한 교통편과 위치를 갖춘 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극장의 건축 설계를 담당했던 데니스 래스던은 "이곳은 마술적인 위치다. 아마도 런던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소 같다"라고 말했다.
국립극장 건물은 거대한 규모를 지니고 있는데, 무엇보다도 여러 가지 시설들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극장의 전면, 강이 바라보이는 쪽으로 테라스와 로비가 있고, 휴게실, 음식점 등이 있으며 극장 안쪽으로는 서점, 칵테일바 등이 있다. 극장 뒤쪽으로는 연습실이 있고, 의상과 소도구, 무대배경막을 만드는 큰 작업실이 있다. 물론 각기 다른 형태를 가진 세 극장들이 건물 내에서 공간을 가장 많이 차지하고 있다. 건축설계자 래스던은 건물에서 개방성을 중시하면서 "이곳은 와서 문을 두드려서 들어오라고 말하기를 기다리는 곳이 아니라, 이미 열려 있는 곳"이라고 했다. 실제로 국립극장은 연중무휴로 항상 개방되어 있으며 언제든지 관객의 방문과 이용을 기다리고 있다. 본래 그 극장 건물은 그 그곳이 사람들로 채워지지 않을 때에는 미완성인 것처럼 보이게끔 설계되었다고 한다.
<세 극장 공간에 대해>
극장이 건설되기 전에 건축위원회는 우선 두 공연장이 필요하다는 데에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하나는 개방된 무대 형식으로서 보다 현대적인 연극을 위한 공간이고, 다른 하나는 프로시니움 무대로서 과거 300여 년 간 행해진 전통적인 연극을 할 수 있는 곳이어야 했다.
여기에 또다른 작은 공연장이 중요하게 생각되었는데, 연극이란 시대에 따라 항상 변하기 마련이며, 이런 변화들이 종종 소규모 극장 공간에서, 보다 소수의 관객 앞에서 먼저 실험적으로 시도되기 때문이다.
첫번째로 올리비에 극장은 대극장으로서 1,160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으며, 반원형의 무대가 객석 앞으로 나와 있는 구조를 하고 있다. 고대 희랍 연극이 야외공연장을 연상시키는 이 극장은 객석이 부챗살처럼 펼쳐지는 모양을 하고 있어서, 큰 극장이지만 무대와 객석이 가깝게 느껴지고 객석의 어느 각도에서도 무대 관찰이 별 차이없이 가능하다. 여기서는 현대연극뿐만 아니라 고전연극도 가능하며 사실상 시대를 막론하고 연출자의 의도에 따라 모든 작품을 올릴 수 있다. 이 극장무대의 주된 특징은 원통 회전식 무대이동 장치가 있다는 것인데 두 엘리베이터와 회전무대의 장점을 결합하여, 공연 도중에 배경풍경과 소도구들을 옮길 수 있다.
두번째로 프로시니움 무대를 갖춘 리틀턴 극장은 890석의 객석을 갖추고 있으며 다소간 전통적인 극장이다. 객석 앞 부분은 밑으로 내려가서 오케스트라석을 형성할 수도 있고, 무대 중심부는 경사면을 이룰 수도 있도록 만들어졌다.
끝으로 커티스로 극장은 보다 실험적인 연극을 위한 소극장으로 400석을 갖추고 있으며 단순한 직사각형 형태이다. 일명 '블랙 박스(무대와 객석이 검은색이어서)'라고도 불리는 이곳의 객석은 2층에도 있어서 耆자 모양으로 둘러져 있고, 1층의 객석은 무대로 변형 가능하도록 되어 있다. 이 세 극장은 도합 약 2,500여 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다.
그 외에도 공연무대는 극장 바깥에도 있다고 할 수 있는데, 로비에도 '플랫폼 공연'이라고 하는 짤막한 장면들의 공연이 매달 4∼5회씩 정식 공연 전에 보여진다.
공연시간보다 일찍 온 관객들은 지나가다가 자연스럽게 서서 이들을 구경하면 된다. 또 '로비의 음악(Foyer Music)'이라고 하는 생음악 연주회가 종종 로비 여기저기에서 열린다.
연극 외의 시설물들로는 많은 사무실들과 뷔페식 음식점, 카페테리아, 테라스 카페, 칵테일 바, 서점, 주차장 등이 있다. 이러한 국립극장의 건축비용은 당시의 액수로 약 2천만 파운드(현 환율로 약 2,400억원)이 들었다는데 대부분(약3/4)을 정부가 내고, 나머지는 대런던 시의회가 보조했다.
극장의 조직과 운영
<조직>
극장의 조직은 극장장을 위시한 상임위원회, 비서실, 경리부, 연출부, 스태프 및 기술진, 행정부와 언론담당부, 광고·홍보부로 구성되어 있다. 이외에 올드 빅 극장에서는 국립극장 소속의 스튜디오가 있어 워크숍 같은 것을 수시로 열고 있다. 극장에 소속된 전임 행정요원 및 스태프는 약 750명에 이르고, 연기자는 120여 명 가량으로, 총 870여 명의 연극 관련자들이 일하고 있다. 거의 모든 시즌(1년) 동안 7∼8 작품들이 계속 번갈아 가며 공연되므로 (한 작품이 끝나고 다음 작품을 올리는 방식이 아님), 연기자들은 한 시즌 동안에도 동시에 여러 가지 작품들에 출연하여 다양한 역을 맡아볼 수 있다. 그래서 어떤 배우의 경우(워렌 클라크)는 하룻밤에 국립극장의 세 극장에 모두 출연 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또한, 행정부에는 전시장, 프랫폼 공연과 로비 음악을 관리하는 부서와 매표소, 안내소, 건물관리부, 식음료 판매부서 등이 포함된다.
극장내에서 중요한 분야 중의 하나가 출판물 분야이다. 일반인들에게 '언제 무슨 공연이 있는가'에 대해 널리 알려야 하기 때문이다. 언론담당부는 방송국, 신문, 잡지 등에 정보를 제공하고 알린다. 사진이 곁들여진 안내책자들이 거의 매일 출판되고, 연극 관련 책들이 때때로 발간된다.
마케팅 부서는 광고를 맡고, 포스터 부착, 소책자 배포, 관객 시장 조사, 입장권 판매의 범위와 요금에 대해 수시로 알아본다. 또한 이 부서는 극장 세일즈 부문의 연결망과 우편 전달 리스트(회원을 위한 제도)를 관리한다. 그래픽 팀은 팜플랫, 포스터 등 모든 광고, 홍보물의 디자인을 담당한다. 실제로 오늘날 마케팅 부서의 역할과 기능은 점점 중요시 부각되고 있다. 연극예술의 생존뿐만 아니라, 타극단과의 경쟁, 또 영화, 비디오 등 다른 분야와 관객을 얻기 위한 경쟁에 있어서 연극이 어려운 입장에 놓일 수 있으므로 마케팅을 강화해야 한다. 물론 컴퓨터 자료정리 시스템을 갖추어서 과학적이고도 조직적으로 마케팅전략을 세우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것을 서양의 큰 극장들은 알고 있다.
연극을 문화상품으로서 인식하고, 판매·광고에 아이디어를 총 동원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이런 판촉활동은 공연의 상업적 성패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극장의 운영, 재정상태와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객을 소비자로 여기면서 다양한 신상품을 개발하여 고객 확보에 나서야 한다.
예를 들면, 런던의 국립극장은 폭넓게 회원제 운영뿐만 아니라, 회사 및 학생 단체 할인권, 노인 우대권 등과 더불어 매일 스탠바이 티켓(예약되지 않은 표를 할인하여 판매) 판매, '학생의 날'의 할인표 제공, '회원의 날'등, 여러 가지 관객(소비자)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교육부는 극장과 학교를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며, 일반 관객을 위해 실제 연극작업 현장을 보여 주는 무대견학(backstage tour) 같은 것을 담당한다. 이 프로그램은 하절기 기간동안에는 거의 매일 2∼3회씩 있어서 연극작업에 관심있는 이들과 학생들, 그리고 영어 학원의 수강생들도 어학교사를 따라오기도 한다. 이 외에도 교육부가 주관하는 교육 프로그램들이 있어서 좀더 상세히 알아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교육 프로그램>
교육부의 교육 프로그램은 1982년부터 시작되었는데, 그 주된 내용들은 연극의 실제 작업과 작가, 연출가에 대한 강좌, 설명 등이다. 시기와 횟수, 참가비 등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각 주제마다 다르며, 그때그때의 사정에 따라 교육 내용들도 바뀐다. 이 프로그램의 범주에는 연출, 무대장치 제작, 조명 디자인 등의 연극작업 현장을 둘러보고 설명을 듣는 경우와 극장 행정 분야, 즉 언론, 광고·홍보 담당부, 마케팅 분야와 관련된 교육들이 포함된다.
예를 들면, 지난 93년 8월부터 11월 사이에 있었던 단기교육 프로그램으로는 우선 영어교사와 희곡 전공자들을 위해 「멕베스」, 「헨리5세」. 「벚꽃 동산」의 연출작업에 대한 설명회(1∼2일)가 있었고, 연극 조명에 관한 워크숍(1일)과 어린이 연극을 위한 워크숍(1일)이 있었다. 또한 작가에 대한 특집으로서 「브레히트 워크숍」(1일)이 열렸고, 연출가와의 대담 프로그램으로 「피터 브룩과의 대화」(1일)가 열려, 그의 연출작업과 연극관에 대해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연극의 제작과정 - 작품선정에서 공연까지>
국립극장 소속의 연출가는 그의 동료들과 상의한 후에 작품을 결정한다. 모든 연극 대본은 작품부에 보내져서 읽혀지고 평가되며 문학담당자(상임 드라마투르그)는 작품 추천서를 작성한다. 이것이 극장 소속 연출가와 작품선정을 하는 일반적인 순서이다.
어떤 작품이 일단 결정되면, 연출자는 연기부의 도움을 받아 연기자들을 선정한다. 그리고 무대장치의 의상이 디자인되는데, 이 둘은 종종 다른 사람이 맡기도 한다. 국립극장은 제작된 장치와 의상을 모두 보관하는데, 후에 다른 공연 제작시 다시 수정되어 사용 될 수도 있고, 타극단에 대여해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기본적인 무대장치는 극장 바깥에서 만들어지고 그 외에 배경막, 소도구들은 극장 내에서 제작된다.
작품이 총연습을 할 준비가 되었으면 무대감독(Stage Manager)은 총연습을 관리할 팀을 조직하고, 총연습과 공연까지 지도한다. 국립극장의 세 극장들은 각기 한명의 제작자를 두고 있으며 그는 무대 조정자(Stage Coordinator)와 워크숍 담당자와 함께 기술진 스태프, 연출자들을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또한 제작자는 특정한 예산 내에서 공연 제작이 되는 것을 관리한다. 대부분의 공연에서 음악이 사용되므로, 연출자는 극장 소속의 음악 감독에게 작곡을 의뢰할 수 있다.
극장의 재정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여러 종류의 시설들을 운영하며, 고전과 현대의 명작들을 훌륭한 수준으로 보여주려는 런던 국립극장의 의도는 상당히 많은 경비를 요함을 추측할 수 있다. 이 모든 경비는 관객의 관람료만으로는 충당될 수 없는것은 당연하므로 국가와 기업체들의 재정적 후원을 필요로 한다.
정부로부터의 지원은 예술원 (The Arts Counsil)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지난 92/93년 시즌동안의 1년 지원액은 1,080만 파운드(약 135억원)이었다. 극장측의 수입은 주로 공연 매표소와 사적인 후원단체들을 통한 것이다. 극장내에 있는 음식점, 카페, 서점 등으로부터 이익금과 공연의 텔레비전 방송권과 출판물로부터도 이익금이 생겨나서 극장의 재정을 돕는다.
극장 관람권의 요금은 런던의 다른 극장들보다 낮은 편이어서 대략 8,000원부터 입장권을 살 수 있다. 더구나 올리비에와 리틀턴극장에서는 시연회들이나 토요일 낮의 공연 같은 경우도 더 싼값으로 표를 제공하고 있다. 모든 공연일의 10시부터 또, 두 시간 전부터는 그날 공연의 판매되지 않은 표들을 상당히 할인된 가격으로 제공한다.
국립극장의 수입과 지출 경비를 91/92년의 1년 시즌 경우에서 다음의 도표를 통해 알아볼 수 있다. 도표 수입 부분에서 보이듯이 사적인 후원금도 적지않음을 알 수 있다. 국가로부터 막대한 경비 지원을 모두 받을 수 없으므로, 기업체나 문화재단 등과 같이 사적인 차원에서도 지원을 끌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바로 이들이 문화예술의 후원자(Patron)라고 볼 수 있는데, 과거 서양의 중세, 근세의 시대에서 왕족과 귀족들이 예술보호 (매체나텐툼 Mazenatentum)를 위해 재정적 후원을 했던 것에 비교될 수 있다. 현대의 산업사회에서는 기업체들의 사회의 공익과 자신의 민족문화 보존과 발전을 위해 과거의 왕족, 귀족의 역할을 맡아야 한다.
국립극장을 후원하는 기업체 가운데에는 어떤 한 공연에 대해서만 후원하는 수도 있고, 1∼2년 단기적, 혹은 4∼5년 이상 중 ·장기적으로 지원을 약속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부호들이 문화예술을 위해 개인적으로 돈을 희사하는 수도 있고, 유산으로 증여하기도 한다.
우선 공연제작을 후원하는 회사로는 아메르다 헤스 주식회사, 부릿빅 음료회사, 런던 전기회사, 영국 석유회사, 데이터 제너럴, 디지털(이 둘은 컴퓨터 회사), 마크스 앤 스펜서(의류 회사) 등이다. 특별 프로젝트의 후원가로는 은행가 연합사, 제4텔레비전 방송국, 이브닝 스탠다드 신문사가 있고, 교육 프로그램은 영국 석유회사, 로이드 은행, WH스미스에서 후원을 받는다. 스튜디오는 존 에스 코헨과 KPMG 경영상담소들이 기술진 스태프와 극작가들을
후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