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문예 / 영어권

욕망 하는 주체

-대중문화를 통해 라캉을 이해하기




권영택 / 경희대 영문과 교수

너는 왜 서울로 가면서 서울로 간다고 내게 말해서 대구로 가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었니?

나는 너를 사랑해, 하지만 너에겐 뭔가 내가 감지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있어 너를 증오하게 만든다.

너는 왜 내가 너를 생각하는 곳에서 나를 생각해 주지 않는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섬이 있다. 사랑하는 사이에도 건널 수 없는 섬, 아니 사랑할수록 더 커지는 낯선 섬. 도망치려 할수록 더욱 사로잡는 이 낯선 힘 때문에 사랑은 어느 순간 갑자기 찾아오고 그리도 쉽게 증오로 바뀐다. 혹시 인간 사이의 의사소통이란 이 낯선 타자가 있는 것을 모른 채 이루어지는 '성공적인 오해'는 아닐까. 그건 타자의 존재를 모르면서 '타자에게 말하기'인지도 모른다.

아내가 그를 버리고 다른 남자와 함께 떠나 버린 텅 빈 집을 향해 그는 터벅터벅 걷고 있었다. 땅거미가 지는 공원을 지나는데 젊은애들 몇이 동상 틈새에 무슨 종이를 숨기고 간다. 암호 해독에 특기를 지닌 그는 그 종이를 읽고 그것이 첩보원에게 전달되는 비밀문서임을 알게 된다. 그는 아내를 빼앗은 남자를 제거하라고 적어 넣는다. 어느 날 그의 원대로 그 남자는 죽는다. 그러나 사실 젊은애들은 첩보원 놀이를 하고 있었고 그 남자는 우연히 죽은 것이었다. 메시지를 통해 의사를 소통한 양측 사이에는 낯선 섬이 있었고 그의 꿈은 이 타자의 개입을 모르고 이루어진 성공적인 오해였다. 영원히 우리를 가로막는 이 타자는 무엇인가.

어떤 사람의 사진보다 캐리커처가 더 그 사람 같아 보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성화(聖畵)는 왜 보는 이를 즐겁게 하는가. 포르노는 왜 보는 이를 사로잡지 못하고 천박한 느낌을 주어 우울하게 하는가. 연인이 나를 사로잡는 매혹은 어디에서 오는가. 히치콕은 어떻게 미묘한 몇 장면으로 관객의 감흥을 바꾸어 놓는가.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힘은 무엇인가.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이성절대주의를 선언하고 평면 광학이 시작되던 르네상스 시대에 홀바인은 〈대사들〉이란 그림을 그려 데카르트적 주체의 소멸을 암시했다.

두 남자가 그림 속에 서 있고 그 사이 책상 위에는 책과 과학적 발견에 의해 이루어진 각종 도구들이 널려 있다. 그런데 인간의 창조력을 과시하는 이런 물건들 아래로 비스듬히 반쯤 세워진 길쭉하게 부푼 것은 무엇인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옆으로 돌아서는데 무언인가 힐끗 눈에 들어온다. 해골이다. 그 길쭉한 것은 인간의 창조력을 헛되고 헛된 것이라고 비웃는 듯한 해골이었다. 옆 눈으로 보아야 얼핏 드러나는 해골.

그것이 그림이 지닌 욕망의 시선(응시, gaze)이고 이 응시에 의해 데카르트적 통합된 주체는 해체된다. 응시는 주체가 대상에 의해 '보여짐'을 뜻하고 이것은 타자를 품는다는 뜻이다.

사진보다 캐리커처가 더 실물 같아 보이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그림에는 무언가 사람을 끄는 힘이 있어 단순한 재현을 뛰어넘어 보는 이를 매혹한다. 그림은 관객을 응시한다. 성화는 그리스도나 신이 욕망 하는 것을 그리기에 신의 응시 아래 놓인다. 화가는 신에 의해 보여지고 신의 욕망을 그리기에 충만해지고 관객은 자신만의 사악한 시선을 벗어나 신의 응시 아래 놓이기에 편안하다.

젊은 시절 어느 날 자크 라캉은 해변가에 나갔다. 햇볕이 내리비치는 물 위 저편에 무언가 물체가 반짝거렸다. 그것은 작은 정어리 통조림이었다. "우린 저것을 보는데 깡통은 우리를 보고 있지 않는군요" 따라가던 꼬마가 말했다. "아니, 저 깡통도 우릴 보고 있어요" 라캉은 말했다.

나는 저 깡통을 보고 있지만 저 깡통은 나를 보고 있지 않다는 생각과 깡통 역시 우릴 보고 있다는 생각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전자는 보는 시선(eye)만 있고 보여짐(gaze)을 모르는 경우요, 후자는 바라봄과 보여짐을 둘 다 인정하는 경우이다.

전자는 주체가 보고 있는 대상은 실체여서 나는 그것을 그대로 그려 낼 수 있다고 믿는 쪽이고(재현), 후자는 주체가 보고 있는 대상 역시 주체를 응시하기에 이미지는 두 욕망의 시선이 교차되는 어느 지점에서 생겨난다. 따라서 우리가 보는 것은 실체가 아니고 이미지라는 것이다.

"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나'는 언급되어진 주체로서 말하고 있는 주체가 아니다. 말하는 '나'는 거짓말하는 '나'를 바라보고 있고 거짓말하는 '나'는 말하는 나에 의해 보여지고 있다. 인간은 볼뿐만 아니라 보여지는 존재이다. 그러나 스스로를 객관화하면서도 인간은 그 사실을 모르고 산다. 세상은 말이 없고 인간만이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무대 위에 올려놓아진 존재이다. 그는 늘 볼 뿐만 아니라 보여진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것은 언어를 떠나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이고 언어를 사용하는 대가로 그는 가슴속에 낯선 섬을 품게 된다. 언어를 모르는 동물에게는 바라봄만이 있다. 예를 들어 암 비둘기의 생식선은 성에 관계없이 같은 종류의 비둘기를 '바라볼 때' 성숙하고, 홀로 사는 메뚜기가 모여 사는 메뚜기로 변할 수 있는 것은 바라보기만 하는 것에 의해 일어난다.

동물은 인간과 달리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어 있지 않다.(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는 인간의 슬픔이 케레닌이라는 동물에 비유되어 아프게 그려진다)

보여짐이 없는 삶은 얼마나 단순하고 행복하랴, 그러나 불행히도 인간은 바라봄만이 있는 낙원에서 추방되었다. 아담과 이브가 지식의 열매를 먹고 처음으로 부끄러움을 느껴 서로의 몸을 감추려 한 것은 바로 보여짐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보다 더 불행한 것은 보여지는 데도 보여짐을 모르는 것, 그래서 자신의 욕망을 대상의 욕망과 일치시키는 경우이다.

어느 날 우연히 사랑이 시작되면서 그녀는 그를 피하기 시작한다. 그에 대한 생각이 한시도 떠나지 않는 속마음과 달리 겉으로는 무관심한 척 위장을 한다. 마치 속마음을 들켜 버리면 그를 영영 놓칠 것 만 같기에 꽁꽁 싸 놓고 딴청을 부리는 것이다. 그리고는 저쪽에서 속마음을 내보이기를 한사코 기다린다. 한 번 가지고는 충분치 않아, 다시 한번 더 고백을 듣자, 아니 그것으로도 확신할 수가 없어…….

아무렇지도 않던 그가 갑자기 커 보이고 능력 있고 매력이 넘쳐서 다른 여자들에게 그가 내보이는 하찮은 관심까지도 그녀에게는 상처다. 의심하고 질투하고 무관심한 척하고……. 그녀는 영원히 건널 수 없는 깊은 심연을 앞에 놓고 그를 마주본다. 이 심연을 좁히는 길이 없다면 되돌아서는 게 낫겠지. 그러나 그도 역시 그녀 앞에서는 늘 자신을 부풀려야만 했고 질투를 감추어야만 했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그녀는 앞으로 나아갔을지 모른다. 남녀 사이의 사랑이 가면의 극치 속에서 이루어지고 그녀의 고통이 그를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 의해 보여지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그녀는 고통을 줄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고통 그 자체가 곧 사랑이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시선과 응시의 어긋남에 의해 연인은 영원히 포착할 수 없는 이미지를 앞에 놓고 상대방이 누구인가를 알려고 애쓴다. 그러나 알아내려는 욕망이 클수록 이미지는 더욱 흐려지고 확대된다. 데카르트의 인식주체에 보여짐이라는 대상으로부터의 빛을 첨가한 것이 라캉의 주체이다. 데카르트의 주체는 대상의 응시를 모르기에 주체의 욕망을 대상의 욕망에 일치시킨다. 그래서 절대이성으로 대상을 분석하고 순수한 사유를 꿈꾼다. 라캉은 주체의 시선만이 있는 사유하는 주체에 대상의 응시를 첨가하여 욕망 하는 주체로 바꾼다. 따라서 욕망은 주체요, 우리를 살아가게 만드는 동력이다.

사막을 건너는 사람은 오아시스를 꿈꾸며 걷는다. 그런데 저만큼 보이던 오아시스는 막상 그곳에 가면 또 저만큼 물러나 있다. 우리 삶의 목표도 다가서면 저만큼 물러나는 신기루와 같은 것은 아닌가. 돈도 권력도 학문도 성욕도 잡는 순간 저만큼 물러나 손짓하는 끝없는 유혹이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쾌락원칙을 넘어서」에서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유일한 대상은 죽음뿐이다"고 했다. 현실원칙에 의해 자꾸만 지연되는 쾌락원칙. 신기루가 없으면 사막을 걷지 못하듯 욕망의 지연이 없으면 인간은 살지 못한다. 여기서 삶을 지속시키는 게 잉여 쾌락이다. 끝없이 투자를 가능케 하는 마르크스의 잉여 가치설처럼 라캉의 잉여 쾌락은 끝없이 대상을 추구하게 하는 삶의 동인이다.

대상이 완전히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리라고 믿고 다가섰는데 그 대상은 '흘러 넘침 (Jouissance)'이어서 늘 차액이 남는다. 그 차액 때문에 욕망은 충족되지 못하고 남아서 다시 대상을 추구하게 된다. 이 차액이 잉여 쾌락이요, 삶을 지속시키는 동인인 a(프리마)이다.

따라서 욕망의 공식은 즉 주체에는 타자가 개입되어 있어 대상(a)을 추구하지만 그 대상은 결코 주체의 욕망과 딱 들어맞지 못하고 차액을 남긴다(◇). 이제 라캉의 이론에서 핵심이 되는 잉여 쾌락, 즉 우리를 살게 하는 욕망의 동인 a를 대중소설(Robert Scheckley 의 「Store of the Worlds」)을 통해 알아보자.

주인공 웨인은 마을의 외딴 곳 황폐한 오막살이에 혼자 살고 있는 늙은 톰킨즈를 찾는다. 소문에 의하면 그 노인은 귀한 물건을 갖다 주면 묘약으로 온갖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곳으로 데려다 줄 수 있다는 것이다. 한 번도 고객을 실망시킨 적이 없다고 장담하며 노인 은 망설이는 웨인에게 집에 가서 잘 생각해 보고 다시 오라고 이른다. 집에 와서 그는 아내와 아들과 함께 집안의 자질구레한 일에 휩쓸린다. 매일같이 오늘은 그 노인을 찾아가야지 벼르면서도 늘 이일 저일에 밀려 미루게 된다. 아내와 함께 송년 파티에 가야 했고 다음엔 아들이 학교에서 일을 저지르고, 여름이 되니 아들과 바닷가엘 가야 했고……. 그렇게 한 해가 지나 버렸다. 오늘은 꼭 노인을 찾아가야지 아니 내일은 곡 가리라 이렇게 미루고 벼르다가 퍼뜩 눈을 뜨니 바로 그 노인의 오막살이에 누워 있었다.

"그래 이제 기분이 어떻소 ? 만족스럽소 ?" 노인은 물었다. 당황한 그는 그렇다고 대답하고 황망히 그 집을 나와 저녁 식사에 늦지 않으려고 부지런히 집을 향했다. 그가 지하에 있는 거처에 오니 핵전쟁으로 황폐화된 그곳엔 쥐 떼가 우르르 몰려다녔다.

이 소설에서 웨인은 꿈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꿈을 이루겠다고 벼른다. 욕망의 실현이란 바로 이 연기의 과정이었다. 사람들은 흔히 한 평생 허덕 허덕거리다 죽는 순간이 되어서야 이것이 내 삶의 전부였던가 하고 허망함을 느낀다. 이것만하고 나면 괜찮아지겠지, 그것을 얻고 나면 행복해지겠지, 늘 그런 가운데서 시간이 흘렀고 어느덧 삶을 마감하는 시점에 이르러서야 그것이 삶의 전부였음을 깨닫는다. 그리고는 헛되이 보낸 시간들을 아쉬워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그 시간들은 헛되이 보낸 것이 아니었다. 다만 우리의 욕망이 한 번도 완벽하게 채워지지 않았을 뿐이었고, 역설적으로 삶은 또 그랬기에 지속되어 온 것이다. 우수리 없는 완벽한 충족은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목적을 향해 가는 과정 그 자체가 곧 삶이기에 순간 순간을 충만 되게 살라고 했는지도 모른다.

사랑에 빠진 두 남녀는 늘 외로움에 시달린다. 고독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녀를 추구하는데 더욱 고독해지는 것이다. 사랑은 추상적인 요구(demand)인데 그가 그녀에게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성적 결합이라는 욕구(need)의 충족이고 요구와 욕구의 차액은 늘 남아 다시 그를 욕망의 회로 속으로 몰아 넣는다.

사랑이라는 목적, 혹은 대상은 '흘러 넘침'이어서 그가 도달한 성적 결합은 잉여 쾌락을 남긴다. 이 차액, 나머지가 욕망의 동인이요, 삶의 동인이다. 욕망은 살아 있는 한 충족되지 않는 결핍이요, '그 여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대상은 그것을 추구하는 과정에서는 엄연히 존재하고 그에게 삶의 목표가 되지만 그것을 손에 넣는 순간 그 찬란한 빛을 잃는다. 아프리카의 이구아나라는 뱀은 찬란하고 영롱한 색채로 보는 사람들을 유혹한다. 그러나 그 색채를 탐낸 사람들이 뱀에 화살을 꽂는 순간 영롱함은 사라지고 칙칙하고 무딘 색깔로 변한다. 찬란한 유혹이요, 참담한 소유이다. 영롱함으로 보는 이를 매혹하는 이구아나는 라캉의 용어로 대타자(O)요, 빛을 잃고 손안에 남는 칙칙함은 소타자(o) 이다. 대타자에서 소타자로 옮겨가는 과정이 욕망의 공식 요, 욕망은 완벽한 충족을 모르기에 삶은 지속된다. 매혹의 본질은 환상이었고 '그 여인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어느 낯선 여인에게서 각기 다른 세 여인에게 똑같은 편지가 온다. 첫 여자는 교육을 제대로 못 받은 순진한 간호원으로 돈 많은 환자와 결혼했고, 둘째 여자는 왕성하게 활동하는 교수로 남편보다 수입이 더 많고, 셋째 여자는 애정 없이 돈만을 보고 결혼했다. 편지는 세 여자가 집을 비운 동안 그녀가 세 남편들 가운데 한 사람을 유혹하여 도망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편지를 받은 세 여인들은 각기 그녀가 자기 남편을 데리고 도망칠 것이라 느낀다. 그녀는 경험, 여성적인 섬세함, 경제적 독립을 갖춘 이상형이었고 세 여인은 각기 자신들의 결혼이 행복하지 않았다고 느낀 것이다.

그녀는 세 번째 여인의 남편을 유혹한다. 그러나 도망치려는 순간 세 번째 남자는 마음을 고쳐먹고 자기 부인에게 돌아가 모든 것을 고백한다. 이상형으로 여겼던 그녀는 실제로 견딜 수 없는 여자였다. 그녀와의 결혼은 자신의 파멸을 의미했고 결국 모든 결혼은 나름대로 허점을 지니게 마련이란 것을 깨닫는다. 작품 속에서 그녀는 음성으로만 들릴 뿐 실제로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다. 그녀는 환상 속에서만 존재할 뿐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매혹은 우연히 거기에 있거나 인위적으로 구성된 것이 마치 자연스레 어떤 순간에 문득 발견되어지는 데서 온다. 낯설음이 낯익음이 되는 과정이랄까. 그녀는 흔하게 늘 있어 왔음에도 어느 날 하늘에서 떨어지듯이 홀연히 그 앞에 나타난다. 주체가 대상이 인위적인 것을 알게 되면 광휘처럼 감돌던 매혹은 사라진다. 연인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무관심한 척하는 것은 이런 광휘를 유지하고픈 욕망에서이다.

주체는 대상의 응시를 인식하지 못해야만 환상을 지닐 수 있다. 환상이란 주체의 시선과 대상의 응시가 교차되는 어느 시점에 생긴 이미지이다. 그러나 주체는 이 사실을 모르고 이미지를 실체라고 믿어야 하는 것이다. "아무 것도 아닌 것에서 무언가가 생겨나는 것" 이것이 욕망의 본질이요, 실재계에 난 구멍이요, 삶의 근원적 허무이다. 두 〈대사들〉 사이의 길다란 물체. 공간과 욕망의 시선에 의해 아무 것도 아닌 것에서 의미가 태어난다. 대상의 응시는 결코 주체에게 알려져서는 안 된다.

응시의 삼중주 포르노·노스탤지어·몽타주

주체가 대상의 응시를 알아채거나 자신의 욕망을 대상의 욕망과 일치시킬 때 환상은 깨어지고 도착증(perversion)이 나타난다. 시골 어느 마을에서 연속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왜 범인은 하필 그 가정들을 골랐을까. 범행의 동기를 알아내기 위해 형사는 피해 가정의 홈 무비를 돌리고 또 돌린다. 그러다 문득 한 가정의 부엌 뒷문이 낯선 것을 발견한다. 화면에 나타난 그 문은 고쳐 달기 전의 옛 문이었다. 그리고 그의 머리를 어떤 생각이 스친다. 범인은 부엌 뒷문을 열지 못해 부수고 들어갔는데 그때 사용한 연장은 맞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즉시 필름 현상소들을 뒤진다. 그리고 범인을 잡는다.

범인은 홈 무비를 현상해 주면서 가정집의 구조를 익혀 두었다가 침입하곤 했는데 그 집은 홈 무비를 찍은 후 부엌문을 새로 달았고 범인은 그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여기서 형사는 범인과 똑같은 방식으로 범인을 잡는다. 홈 무비를 통해서 무언가를 알아내려 했던 두 사람. 주체의 욕망은 대상의 욕망과 일치되어 목적을 이룬다.

전체주의 국가의 특징은 바로 이 주체의 욕망이 대상의 욕망과 일치하는 데 있다. 당 간부의 말은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 역사의 욕망이요, 국민 전체의 욕망이다. 그들은 항상 역사의 이름으로 자신들의 욕망을 수행해 나간다. 전체주의는 시선과 응시의 교차가 없고 보여짐 이 없이 바라봄만 있는 주체이다. 그래서 주체의 욕망은 곧장 객체의 욕망이고 이 직선은 환상을 억압한다. 환상이 없는 곳, 꿈이 없는 곳, 욕망이 없는 세계가 전체주의이다.

포르노 영화는 전체주의적이다. 주체는 대상의 응시에 압도당하여 환상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주체는 대상의 응시를 알아채지 못할 때 그 대상에게 매혹되는 법인데 포르노에서 화면은 관객을 유혹하려는 욕망을 너무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이제 대상이 주체의 자리에 들어서고 주체는 마비되고 경직된다 그리고 대상은 자신의 욕망을 주체의 욕망과 일치시켜 버린다.

만일 순수한 노스탤지어 영화에서 두 남녀가 포르노 같은 장면을 한 번 보이면 그 영화는 계속 이어질 수가 없다. 관객은 그 장면에 압도되어 환상이 마비되고 계속 그런 장면이 나올 것을 기다리기 때문이다. 프로노 역시 마찬가지다. 관객은 포르노를 볼 때 스토리는 으레 그런 장면을 위한 양념쯤으로 생각한다. 이 두 영화는 공존할 수 없다. 노스탤지어 영화는 시선과 응시의 교차에 의해 환상이 있는 세계요, 그러면서도 대상의 응시를 주체가 모를 경우이고 포르노는 응시가 공공연히 드러나 주체를 압도하여 환상이 제거되는 도착이요, 대상의 욕망이 주체의 것과 일치되는 경우이다. 이것이 포르노를 볼 때 관객이 수치스러움을 느끼고 숭고한 대신 우울해지는 이유이다.

서부 영화의 고전으로 여겨지는 〈쉐인〉은 서부극이 수명을 다하고 생명을 존속하기 위해 다른 장르와 접합을 시도하던 시대에 만들어진 영화였다. 진부해진 서부극을 어떻게 만들었기에 새로움과 숭고함을 부여하여 관객을 사로잡았는가. 어린 아이의 시선 아래에 사건들을 놓았기 때문이다. 어린아이가 몰래 보는 어른의 세계와 알란 랏트의 용기, 고전 서부극은 그 아이의 호기심과 놀라움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된다. 타자의 응시를 통해 대상을 보기 때문에 그 대상은 숭고함을 띠고 관객을 매혹한다. 이미 지나간 것에 황홀해 하면서 관객은 아이의 응시와 자신의 시선을 교차시킨다. 비슷한 경우로 주요섭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를 들 수 있다. 여기서는 자칫 진부하거나 천박해지기 쉬운 어머니와 사랑 손님의 관계를 옥희라는 어린 소녀의 눈을 통해 그렸기에 대상은 숭고한 광휘를 얻는다.

어떤 대상이나 사건을 직접 보여 주지 않고 인물의 시선을 통해 보여주는 경우 관객은 대상의 응시에 의해 환상을 얻는다. 히치콕은 순전히 어떻게 찍느냐에 의해 평범하고 사소한 대상을 괴기하거나 숭고한 것으로 바꾼다. 예를 들어 〈사이코〉의 끝 장면에서 라일라는 초조함 속에서 노먼의 집을 향해 간다. 이때 평범한 집에 괴기한 감흥을 불어넣으려면 집을 객관적으로 보여주거나 집안에서 누군가가 그녀가 다가서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을 찍으면 안 된다. 대상이 주체를 조정해서는 포르노처럼 환상이 일어나지 않는다. 주체가 대상을 응 시할 때 그 대상이 괴기함을 얻는다.

다가서는 라일라의 불안한 표정과 집을 함께 객관적으로 보여주고 나서 그녀의 시선 안에서 주관적으로 집을 찍어야 한다. 그녀가 다가서면서 지켜보는 집, 그 집이 화면 가득히 나올 때 그 집은 더 이상 흔한 일상의 집이 아니고 라일라가 지켜보는 괴기한 집이 된다. 그리 고 관객은 그녀의 응시를 통해 대상을 보기에 그녀의 감흥, 즉 불안과 초조를 그대로 경험한다. 〈양들의 침묵〉이 진부한 추리물로 전락하지 않는 이유들 가운데 하나도 이와 비슷한 기법에 의해서다. 마지막의 두 가지 장치가 영화의 긴장을 높이는 데 하나는 여주인공이 다가서는 집의 벨이 다른 집과 연결되어 있다는 의외성이고 또 하나는 범인이 안경을 쓰고 그녀를 추적하는 장면의 긴박감이다. 어둠 속에서 지척을 분간하지 못하는 주인공과 안경을 통해 그녀를 볼 수 있는 범인 사이의 숨막힌 격전을 객관적으로만 보여주지 않고 관객이 바로 그 범인의 안경을 통해 대상을 주관적으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관객이 범인의 응시를 통해 다가서기에 그녀의 불안과 발버둥은 리얼하게 고조된다.

영화는 일종의 몽타주 예술이다. 시점을 자연스레 이동시킬 수 있고 장면과 장면 사이를 관객이 연결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히치콕은 단지 한두 장면을 미묘하게 찍어 관객의 감흥을 바꾼다.

〈사보타주(Sabotage)〉에서 실비아는 남편이 남동생의 죽음에 관여된 것을 알고 증오심에 휩싸인다. 그녀가 식탁 위의 칼을 보며 마음이 흔들리자 이를 눈치챈 남편은 얼른 칼을 잡으러 다가선다. 이 순간 카메라는 두 사람의 얼굴과 어깨만을 비출 뿐 손 부근을 비추지 않는다. 쓰러지는 남편의 비명과 그를 부축하며 안타깝게 부르는 실비아의 모습, 여기서 관객의 가학 충동은 동정으로 바뀐다. 그녀가 남편을 찌른 것인지 남편 스스로 칼 위로 쓰러진 것인지 모르게 만들고 부축하는 실비아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둘의 욕망은 각기 분열되어 있었음을 알게 된다.

실비아의 죽이고픈 욕망과 저지하는 욕망, 남편의 칼을 빼앗으려는 욕망과 죽고 싶은 욕망은 순간적으로 교차된다. 그리고 악인을 죽이고픈 실비아의 욕망과 동일시하던 관객은 그녀의 부르짖는 모습에서 남편 역시 상처와 괴로움으로 죽고 싶어했다는 것을 감지하고 아픔을 느낀다. 히치콕은 악인의 변모를 순서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단 두 장면, 즉 손 부근을 보이지 않고 "악인의 눈에 비친 선인의 동정심"을 보여줌으로써 그에 대한 감흥을 바꾸어 놓는다. 관객은 죽음을 받아들이는 악인의 마음과 일치되는 것이다. 몽타주는 억압되어 나타나지 않는 어떤 연결 고리를 관객이 찾는 기법이다.

환상의 윤리학

목에 밧줄을 느슨히 건 형을 어깨에 받치고 선 동생에게 악당들은 하모니카를 불게 시켰다. 동생은 하모니카를 불면서 어느 순간 지친 몸을 가누지 못해 쓰러지고 형은 밧줄이 조여져서 죽는다. 동생은 그후 정상인으로서의 삶을 누리지 못하고 죽은목숨처럼 산다. 그는 현실에서 미치지 않기 위해 스스로 미치는 길을 택한다. 그것은 늘 하모니카를 불면서 살아가는 길이었다(영화: 〈Once Upon a Time in the West〉에서) 그가 현실을 견디는 유일한 방식은 최초의 상흔을 상징하는 증상에 기대어 그것을 따라가는 것이었다.(라캉은 Sinthome 이라는 단어를 만들어 이것을 표시한다)

환상은 주체가 삶을 영위하는 수단이다. 비록 그것이 허구일지라도 신기루가 없이는 사막을 걷지 못하듯 인간은 추구하는 대상이나 목표 없이 살아가지 못한다. 바라봄과 보여짐의 교차에서 생겨나는 이미지, 그 매혹 없이 인간은 고통스런 현실을 견디지 못하기에 타인의 환상을 깨트리는 행위는 부도덕하고 자칫 죽음을 부르기도 한다.

어느 마을의 술집에는 중년 남자들이 모여 앉아 마을 저쪽에 서 있는 검은 폐허의 집에 대해 얘기를 나눈다. 거미줄과 먼지로 덮인 그 집에는 늙은 미치광이가 살고 있어 누구든지 그 집을 침입하면 죽는다고 알려져 있다. 중년 남자들은 젊은 시절 그 집에서 갖가지 잊지 못 할 일들을 겪었다고 늘어놓는다. 누군가는 그 동네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녀와 그 곳에서 첫번 데이트를 가졌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그곳에서 몰래 담배를 피웠다고 말한다. 어느 날 이 마을에 낯선 청년이 나타나 자신이 그 집을 탐색해 보겠다고 나선다. 그리고 가 보았더니 그저 허물어진 텅 빈집일 뿐 아무 것도 없더라고 전한다. 그는 마을 사람들에 의해 죽는다. 마을 사람들이 현실을 견디어 내는 유일한 수단인 환상을 깨트렸기에 그는 죽는 것이다.

환상의 윤리학은 타자의 보여짐(응시)을 인정하는 것이기에 주체는 욕망을 타자의 것과 일치시키지 않는다. 말하자면 환상은 타자 의식이요, 도착증이나 새디즘, 그리고 전체주의를 막는 장치이다. 개인이 환상을 지닐 수 있는 사회는 획일성을 거부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의 '사유하는 주체'로부터 '욕망 하는 주체'를 마련한 라캉의 저의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자신의 내부에 낯선 섬이 있다는 것, 타자가 있다는 것은 대상을 일방적으로 단정짓거나 해석하거나 소유 할 수 없다는 '타자 의식'이다.

타자 의식은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기에 남성의 욕망을 여성의 욕망과 일치시키지 않고 백인의 기준으로 흑인을 평가하지 않는다. 남성은 여성을 바라보기만 하는 게 아니라 똑같이 여성에 의해 보여지기 때문이다.

라캉이 보기에 데카르트적 주체는 바라봄만이 있는 주체, 즉 '상상계(The Imaginary)'로서 보여짐을 모르는, 환상을 모르는 주체이다. 생후 6개월부터 18개월 사이의 어린아이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총체적인 것으로 파악한다. 그는 자신의 욕망과 타자(어머니)의 욕망을 일치시키며 자신이 어머니의 남근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아이가 언어를 사용하는 질서의 세계, '상징계(The Symbolic)'라는 보여짐의 세계로 들어서면서 바라봄만 있던 상상계적 믿음은 깨어진다. 그리고 상상계와 상징계는 시선과 응시의 교차처럼 변증법적으로 연결되어 인식주체를 구성한다.

프레드릭 제임슨이 포스트모더니즘을 소비 사회 논리로 연장시키면서 '주체의 소멸'이란 말을 쓴 이래 주체가 해체된다는 말은 얼핏 방자하게까지 들리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데카르트적) 주체의 소멸은 주변에서 흔한 일상, 아니 삶 그 자체를 설명하는 또 다른 모델이고 나름대로 도덕성이 있음을 알게 된다.

·이 글에 참고된 책은 「Ecrits」를 비롯한 자크 라캉의 주요 글들과 Slavojv Zizek의 「Looking Awry」: An Introduction to Jacques Lacan through Popular Culture (MIT press, 1992, paper back)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