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치미술
오상길 / 작가
인스털레이션(Installation)이란 설치, 혹은 가설, 장치 등을 의미하는 다분히 구성적인 개념으로, 대략 1970년대 후반 이후 본격적인 미술형식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편의상 붙여진 용어이다. 장소로서의 조각을 위시한 환경예술, 또는 전시공간 자체를 대상화한 일회성 작품들을 총칭하며, 이미 1960년대 비디오아트 분야에서 이 용어를 사용한 바도 있다.
-「미술수첩」, 1985년 8월호
설치미술이란 무엇인가
설치미술(Installation)은 기존의 회화형식을 해체시키고 조각의 영역을 확장한 가장 20세기다운 미술형식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새로운 기법의 출현은 회화가 액틀을 벗고, 조각이 받침대를 떠나는 현상, 그리고 오브제의 등장 등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미술작품의 대상성에 대한 자각은 더 이상 우리의 현실과 미술작품의 현실을 혼돈하지 않으려는 근대적 인식의 전환과 맞물려 있는데, 미술작품을 그 자체로 한정지으려는 이 의지가 또 다른 측면에서 미술작품 자체를 우리의 환경, 즉 현실이 되게 하는 보다 적극적인 보여 주기 방식을 만들게 했다는 점은 매우 흥미로운 부분이기도 하다.
작품이 액틀 안에, 혹은 조각대 위에 존재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 이것은 미술작품이 더 이상 감상의 대상이기를 거부하고, 그 자체로 엄연한 하나의 현실적 존재이기를 원하는 총체예술(Total work)로서의 가능성을 열어 놓는 일이 되었다.
이 설치미술의 시작을 오브제의 등장과 관련된 회화의 틀의 해체-일루저니즘의 무력화-와 조각품이 그 받침대를 떠나 화랑의 맨바닥과 직접 만나게 된 사건과 관련지어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것은 약간 거칠고 단순하게 말해, 설치미술과 결코 분리할 수 없는 오브제의 출현이 결과적으로 회화의 일루저니즘에 직접적인 타격을 주었으며, 단순한 시각적 영역을 망막적 경험 이상의 체험-이를테면 촉각 같은-의 영역으로 확장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보는 관점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마르셀 뒤생이 1913년 자전거 바퀴-현실 파편-를 전통적인 조각품의 받침대에 해당할 만한 네발 달린 의자 위에 올려놓음으로써 기존의 예술 문맥에 혼선을 빚게 하여 전통적 예술의 형식과 내용의 개념적 해체를 시도한 것이나, C. 브랑쿠지가 자신의 조각품을 맨바닥에 내려놓았던 일, 이것은 일면 서로 대치되어 보이는 방법의 배후에 공동의 과제를 함께 교차시키는 결과가 되었고, 이것을 결국 기존의 조각 영역을 확장한 새로운 형식, 즉 설치미술의 출현 근거로 보는 것이다.
한편 C. 안드레는 근대조각(Modern Sculpture)의 발전 단계를 형태로서의 조각, 구조로서의 조각, 그리고 장소로서의 조각으로 나누고, 그러나 장소로서의 조각은 그 받침대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을 전제로 하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의 장소로서의 조각은 실제로 발을 딛고 있는 현실의 공간 속에서 관람자가 움직임에 따라 달라지는 장소성을 체험하게 하고, 또 다른 측면에서 조각이 받침대 위에서의 수직적인 형태 구조에서 미술관의 바닥을 따라 수평적으로 공간을 확장해 가는 구조상의 변화를 가져옴으로써, 예술작품이 점유하는 공간이 벽면과 바닥, 그리고 심지어 천장까지 확장되는 일과 나아가 미술관에서 해방된 새로운 형태의 예술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의 설치미술들은 정보망에 의존하거나 퍼포먼스의 결합, 또는 장소와 물질을 매개하는 신체의 상징기능과 함께 매우 다양하고 다차원적인 양상으로 발전한다.
설치미술의 한국적 수용
한편 한국 현대미술에 나타난 최초의 설치미술 작품들은 당시 새로운 미술 형식의 기류를 따라 일종의 실험작업이라는 이름과 함께 소위 전위예술로 시도되고 소개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는 앵포르멜 회화 열풍 이후 그 차세대들에 의해 대응의 미술양식이 모색되던 때이기도 했다.
이들에 의한 초기의 설치미술품은 물(物)과 그 현상에 한정된 두드러진 경향을 보이며, 일본 모노파의 강한 영향을 받은 흔적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의 설치미술들은 당시 미술 문맥 흐름의 범주 안에 머물고 있으며 장소성과 상태성, 상황성이라는 전형적인 특징을 띠고 있다. 바꾸어 말해서 이들은 이 새로운 형식을 낯설게 수용하고 실험하는 차원 이상으로 발전, 심화시키지 못하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일부는 개념화되고 다른 일부는 평면성과 물성적 표현으로 옮겨감으로 해서 한동안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설치미술은 발표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 맥은 1980년대 중반에 이르러 나타난 신세대 작가들에 의해 다시 이어지면서 본격적으로 시도되는데, 그러나 이들 신세대 작가들의 설치미술은 그 이전 세대들의 그것과 뚜렷이 구분되는 새로운 성질을 갖고 있으므로 해서, 본질적 의미에서의 계승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들 신세대들의 출현 배경에 관조적 세계관과 극도로 절제된 화면으로 상징되는, 소위 1970년대 평면주의의 과도한 팽창과 그 권위주의로부터 심리적 압박을 느끼고 있었다는 정황이 전제되고 있었으며, 이것을 극복하기 위한 새롭고 좀더 적극적인 표변 양태가 요구되는 절실함이 이 설치미술이라는 미술형식을 보다 다각적으로 해석하도록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기에 걸친 작업들과 1980년대의 그것들을 굳이 구분하여 말한다면, 전자의 설치미술이 작품의 존재방식의 실험적 대상이었다면 후자들은 이를 전적인 보여주기 방식의 도구적 수단으로 전환시키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이 차이는 이들이 서로 추구한 미적 질서의 지향성에서 비롯하며, 하나는 목적에, 다른 하나는 수단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A.G 협회나 S.T 그룹 등이 중심이었던 1970년대 초기의 설치미술들이 비교적 단조로운 경향을 가지고 있는 것에 비해, 1980년대 이후의 작품들이 그 성격에 있어 사실상 다양한 양상을 드러내 보이고 있는 이유도 이 작가들이 대부분 공통된 이념을 갖고 있지 않으면서 서로 다른 감성과 표현방식을 구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은 자신들의 설치미술을 개개인의 미학과 방법론을 구현하는 또 하나의 표현영역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의 신세대들의 양상은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모색하기 위한 열기가 뜨거웠던 것에 비해 그 실제적 내용면에서 다분히 혼돈 되어 있어, 극히 부분적으로 제한된 몇몇 작가들만이 이 1980년대적 성격을 충실히 드러내고 있을 뿐이었다.
이 문제는 금명간 폭넓은 논의의 장에서 보다 구체적이고 깊이 있게 검토되어야 할 과제 중의 하나라고 생각된다.
최근 1990년대 들어 시도되는 설치미술은 단순한 보여 주기를 넘어서 보다 능동적인 표현과 교감의 적극성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이들이 빛과 영상, 음향 등과 시간성 재료들을 다양하게 도입하고 있는 것도 새로운 일이지만 이보다는 작품이 관람자의 의식 속을 파고들어 심리나 잠재의식을 자극하고 관람자들을 실질적으로 그 작품 안에 참여하도록 시도하는 또 다른 양상으로 변화되어 가고 있다는 점이 더 주목을 끌게 하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형식과 내용의 관계
언제부터, 그리고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설치미술'이라는 말이 마치 무슨 새로운 미술의 장르를 지칭하는 양 공공연히 통용되고 있다. 특히 1980년대 중반 이후 나타난 작품들에 대한 이렇다 할 구체적인 분석과 비평이 결여된 상황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이 용어가 생겨났다는 점은 그 나름으로 여러 가지 시사성이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이 '설치미술'이란 말은 벽면미술, 조각대 미술이라는 말과 견주어질 만한 용어이며, 현대 미술 문맥의 그릇된 이해와 피상적 수용의 결과를 단적으로 비추어 낸 말 이상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설치미술'이란 용어의 사용이 그 형식의 수용과 해석의 문제와 더불어 먼저 적극적으로 검토되지 않은 상태에서 보편화 될 수 있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반복되는 말이지만 설치미술은 보여 주는 방법의 하나일 뿐이며, 이것이 또 하나의 형식 영역으로 간주되는 것은 이 형식이 갖고있는 무한한 표현 가능성 때문이다.
따라서 '설치미술'이라는 소모성 논의보다 이 설치미술 작품들이 그 그릇 안에 무엇을 어떻게 담고 있는가 하는 형식과 내용의 관계를 분석하는 일일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 미술은 서구 미술에 대한 종속구조를 형성해 왔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터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