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기획

경제와 문화, 그 협력의 시대

-한·일의 문화 소개 행사 사례




조현중 / 문화체육부 국제교류과 사무관

해외에서 열린 두 개의 자국 문화 소개 행사

지난 4월 25일 프랑스 파리 샹제리제 거리에 인접한 롱 푸엥 르노바로 극장의 대·소공연장과 전시장에서 개최되었던 '한국종합예술제'가 막을 내렸다. 이 예술제는 예술제가 열린 르노바로 극장의 극장장이며 문화예술 행사 기획사인 '세계 문화의 집(Maison des Cultures du Monde)'의 대표이기도 한 카즈나다르(C. Khaznadar)가 르노바로 극장의 1993년도 주요 기획 사업으로 예정하고 있던 세계 각국의 문화예술 집중 소개 행사의 하나로, 한국의 문화예술을 파리를 중심으로 프랑스 및 유럽 지역에 종합적으로 소개하는 행사를 갖기로 하고 이 행사의 추진을 주불 한국문화원에 제의하여 옴으로써 태동된 것이었다.

4월 2일부터 25일까지 거의 한달(조각 작품 전시는 3월 18일에 시작되었으므로 엄밀히 말하면 한달 반)에 걸쳐 유럽 문화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파리에서 개최된 이 예술제는 현지 언론으로부터 '수천 년 역사를 가진 한국 문화가 정체성을 간직하면서 한편으로 현대적인 창작 과정도 잘 수용하고 있다. 이는 한국 문화의 위대함을 증명하는 것이다. 또한 중국의 영향을 받았지만 문화적 독자성으로 이를 재창조하여 일본에 전하였으며, 지정학적인 위치로 인해 끊임없이 받은 외부의 간섭을 문화적인 승화로 극복하여 왔다'는 등 대단한 찬사를 받았으며 해외에서 열리는 한국 문화 행사의 새로운 지평을 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이 예술제는 인근 유럽국가로 그 개최 범위를 넓힘으로써, 이 지역에 한국문화에 대한 확고한 이미지를 심어 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뒷받침하는 국내 지원의 부족으로 파리 한 군데에서 개최된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이것과 비교해 볼 때 역시 영국의 임프레사리오로부터 제의 받아 추진되기 시작하여 영국에서 개최된 사상 최대의 외국 문화 소개 행사로 발전하였던 '제팬 페스티벌(Japan Festival 1991)'은 같은 자국 문화 소개행사라도 국내의 관심과 지원의 폭에 따라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좋은 사례가 된다. 이제 우리는 양 행사의 내용과 그에 대한 지원 형태를 비교하여 봄으로써 문화예술 활동에 대한 지원의 필요성을 생각해보고자 한다.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한국종합예술제'의 경우

파리 '한국종합예술제'는 프랑스 파리 롱 푸엥 르노바로 극장(le Rond Point-Theatre Renaud Barrault)의 극장장이며 문화예술행사 기획사인 '세계 문화의 집(Maison des Cultures du Monde)'의 대표(관장) 인 카즈나다르(C. Khaznadar)가 자신이 경영하고 있는 르노바로 극장에서 세계 각국의 예술을 나라별로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행사의 하나로 1993년 3월 인도 예술 소개에 이어 4월에 한국 예술의 소개를 계획하고 유럽인의 관심을 끌 수 있는 한국 예술로서 '봉산탈춤', 전통에 바탕을 둔 현대극 2편, 국악합주 '수제천', '진주 검무', '대금독주', '민속무용', '판소리', 무용 '춘앵전', 불교 의식무 '작법', '사물놀이' 등의 전통 음악과 무용 그리고 여기에 현대 음악, 무용 작품을 더한 공연 및 조각가 문인수의 시멘트 조각 작품전(1992년 봄 방한한 바 있는 「르 피가로(le Figaro)」지 조각 담당 평론가 미셀 누리드 자니(Michel Nuridsany)가 추천), 행위미술가 초청 실연 등의 전시행사와 함께 한국 음식 소개, 공예품 등 특산품 판매, 한국의 시 소개 등의 부대 행사를 곁들인 종합적 한국 문화 소개 행사를 개최할 것을 1992년 봄 주불 한국문화원장에게 제의하여 옴으로써 시작되었다.

카즈나다르는 이 프로그램 중 전통 음악과 무용, 봉산 탈춤, 작법 등은 프랑스 내 각 지방을 순회하며 공연하길 희망하였고, 나아가 이 예술제를 독일, 스위스, 네덜란드, 벨기에, 이태리, 헝가리 등 인근 유럽 국가를 순회하며 개최할 수도 있음을 우리측에 알려 왔다.

예술제에 소요되는 경비는 프랑스 측에서 참가 인원에 대해 숙식, 현지 교통비, 공연 경비, 공연 단원에 대한 최저 사례금을 제공하며, 예술제를 위한 행정·기술 인원을 제공하고, 현지 언론 대상 보도 자료 제작 및 배포 기자 회견개최, 포스터 및 전단의 제작 배포(5만 매)를 맡고, 한국에서 참가인원의 국제 항공료, 카탈로그 제작, 예술제 참가 작품에 관한 비디오 테이프·사진 자료 제공 등을 부담하는 형식이었다.

이 예술제는 어쨌든 우리의 문화를 유럽 국민에 널리 인식시키는 행사이므로 이익은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위의 조건들은 가히 파격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나중에 실제로 프랑스 국영 2TV를 통한 예술제 참가자 및 책임자의 기자 회견, 파리시에서 설치·운영하고 있는 시내 중심가에 설치된 야외 전광판을 통한 홍보까지 이루어지는 등 현지 주민대상 홍보도 더 이상 바랄 수 없을 만큼 거의 완벽하게 이루어 졌다.

이와 같이 '한국종합예술제'는 해외에서 개최된 과거 어느 한국문화 소개 행사보다도 효과적으로 우리 문화를 소개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당초 이 기획을 접한 조성장 주불 한국문화원장은 곧 국내에 그 내용을 알려오면서 적극적으로 추진하길 제의하였다. 이렇게 해서 이 예술제의 개최가 국내에 알려지게 되었는데 그 시기는 1992년 6월경이었다.

이에 따라 국내에서는 문화부와 공보처 해외 공보관이 중심이 되어 예술제 추진 방안의 검토에 착수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검토 작업은 한편으로는 국제화 시대에 우리 문화예술 해외 교류의 장애 요인으로 계속적으로 지적되어 오고 있는 국제 문화교류추진기구의 분산 및 기능의 중복이라는 높은 벽에 걸려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 예술제의 제안이 1993년도 예산 편성 기간을 지나서 제기되었기 때문에, 예술제 개최에 소요되는 예산의 확보가 시기적으로 곤란해져 버린 사정 등으로 인해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하였다.

특히 국제 문화교류추진 기능의 분산 즉 문화 프로그램의 구성·해외 보급 행정의 전담 부서는 문화부이나, 해외 교류의 전초 기지라 할 수 있는 해외 한국문화원과 홍보 및 문화 교류를 담당하는 재외 공관 주재 공보관이 문화부와 공보처가 분리되면서 공보처 산하로 남게된 데서 오는 국제 문화교류 업무 추진 체계의 기형성은 이를 다소나마 보완하기 위한 이들 기관간의 유기적 업무 협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느 부서도 적극적으로 나서 예술제를 추진해 나갈 수 없도록 만들어 버렸다.

국내에서 이런 문제로 주저하고 있는 가운데에서도 파리에서는 카즈나다르가 1992년 8월 31일자 르노바로 극장의 기관지에 1992년 하반기 및 1993년 상반기 문화 행사 계획을 발표하면서 1993년 4월을 한국문화 소개의 달로 정하는 등 본격적인 홍보에 나서고, 주불 한국문화원에서는 국내에 예술제 개최 조건에 대한 최종 입장과 이미 시기적으로 추진하기 어려워져 가고 있는 프랑스 지방 공연을 위한 프로그램 소개 자료 송부를 급히 요구하여 왔다.

이에 9월말 관계 부서 관계자 회의가 다시 소집되고 이 자리에서 전통 음악 및 무용, 봉산탈춤, 연극공연 및 조각가 문인수의 작품전을 추진키로 방침을 정하고, 이를 위한 예산 조달 방안 강구에 나서는 한편 관련 홍보자료를 현지로 우송하였다. 이후 전통 음악 및 무용 공연을 위해서는 항공료를 국고예산 부담 하에 국립음악원 예술단을 파견키로 하였고, 봉산탈춤과 연극 공연을 위해 필요한 우리측 부담 예산은 한국 문화예술진흥원에서 지원하며, 문인수씨 작품의 운송 문제는 대한항공에 협조 요청하는 것으로 추진되어 나갔다.

참고로 이 예술제를 위해 우리나라에서는 예술단 파견 항공료 7천 5백만 원, 전시 작품 운송료 1천 6백만 원(추산), 예술제 홍보위원 현지 언론인 초청료 6백만 원 그리고 예술제 개막 기념 리셉션 개최비 2백 8십만 원 등 약 1억 원을 부담하였다.

1993년 3월에 들어와 이 예술제의 국내 준비 상황 및 한국 예술에 대한 기획 특집 기사 취재를 위해 프랑스의 주간지 「누벨 옵세르바퇴르 (le Nouvel Observateur)」지 라파엘(Raphael de Guvernatis) 기자와 '세계 문화의 집' 예술부 프랑스와즈(Francoise Grund) 부장이 3월 8일 방한하였다.

이들은 일주일간 한국에 머물며 예술제 출연 공연단의 실연을 관람하고, 공연 책임자와 조각가 문인수를 차례로 면담하며 취재 활동을 하여 이를 현지 보도하였다. 특히 '세계 문화의 집' 예술부장은 예술제 홍보 장식물을 르노바로 극장 외부에 설치하길 희망하여, 디자인 전문가인 안상수 홍익대 교수의 도움을 얻어 우리의 전통 탈을 중심으로 그 위와 아래에 예술제의 주제인 '한국이 파리로(la Coree A Paris)'라는 글귀를 새긴 세로 2.5m 가로 1.8m의 홍보용 장식물을 제작 지원하여 예술제 기간 르노바로 극장 외부 벽에 설치하였다.

3월 18일 르노바로 극장 전시실에서 조각가 문인수 작품전이 개막되고 4월 2일 같은 극장 대공연장에서 국립국악원 예술단의 전통 음악과 무용 공연이 열림으로써 이 예술제는 본격적인 막을 열었다. 이후 4월 25일까지 계속된 이 행사는 앞서도 말한 바와 같이 현지 언론의 비상한 관심과 찬사 속에 진행되었다.

언론 보도 상황을 정리하여 보면 현지에서는 프랑스 국영 2TV 등 방송 매체 6개 사가 8차례 예술제를 보도하였고, 활자 매체로는 「르몽드」,「르피가로」 등 6개지가 7차례 기사화 하였다.

현지 특파원에 의한 국내 순환 홍보도 활발하게 이루어 졌던 바, 예술제 계획을 알리는 것에서부터 현지 언론의 반응을 전하는 기사까지 13개 일간지와 TV 3사가 모두 25회에 걸쳐 이를 크게 보도하였다.

이들에 의한 예술제에 대한 평가도 통상 측면을 지원하는 의미를 갖는 한국의 문화 이미지 고양을 통한 한국 상품의 이미지 제고와 수출 증대로 이어지는 정책의 추진 가능성을 시사한 행사였으며, 해외 한국 문화 소개 행사가 어떠하여야 하는지를 보여 주었다며 크게 받기는 것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한편 문화체육부에서는 한국종합예술제의 추진 방향이 정해지고 예술단의 구성 등 세부 사항들이 가닥이 잡혀가자, 가능하면 예술제 참가 작품 중 일부만이라도 인근 국가에서 순회 공연케 하고자 여러 가지 방안들을 검토하였다.

당시 1993년도 유럽의 문화 수도로 선정되어 연중 각종 문화 행사가 열리고 있던 벨기에의 앤트워프 시의 앤트워프 민족학 박물관에서 한국 도자기 문화의 우수성을 선보이는 '한국의 도자기전'(정식 명칭은 '한국, 그 자연 종교와 도자기'(Korea: Nature-Religion-Ceramics전)이 개최되고, 독일의 베를린에서 유럽의 한국 연구자 모임인 유럽한국학회 주최로 유럽한국학 총회가 개최되는 것에 맞추어 이들 지역에서 예술제에 참가하는 국립국악원 예술단이 공연을 갖는 것을 검토하였는데, 벨기에에서의 공연은 시일 촉박 등의 사정으로 실현되지 못하고 베를린에서 국립국악원 사물놀이패가 공연하는 것으로 추진되었다. 이와 같이 이 예 술제를 인근 지역에서 확대 개최하고자 하는 시도는 있었으나 위에서 말한 국제 문화교류추진 기능의 분산에서 오는 비효율로 인해 최초 단계에서부터 적극적으로 검토되지 못하였고, 여기에 정부는 물론 기업 등 국내의 지원과 관심의 부족이 더 해져 보다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막을 내린 것은 많은 아쉬움을 남긴다.

영국에서 열린 일본 문화축제 '제팬 페스티벌 1991'의 경우

'제팬 페스티벌 1991'은 일·영 친선에 공헌해 온 영국 'Japan Society' 창립 백주년에 맞추어 영국에서 제안되어 양국 '제팬 페스티벌 1991 위원회'에 의해 1991년 9월부터 약 4개월간 영국에서 실시된 일본 문화의 종합적 소개 행사였다. 전시, 무대 공연, 음악, 심포지엄, 영화, 스모 등의 스포츠, 정원 건설, 시민 축제 등을 포함 폭 넓은 분야에 걸쳐 63개의 단위 기획물이 3백 50여 회 이상, 약 50억 엔을 들여서 런던뿐 아니라 북 잉글랜드, 북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 등 영국 전역에서 개최되었다.

페스티벌 개최에 맞추어 양국 왕세자가 명예 총재로 취임하고, 또 일·영 양국 정부의 후원을 비롯하여 양국의 정부 관계 기관, 민간 단체의 협력과 기업의 지원 등에 의해 페스티벌은 영국에서 개최된 외국 문화 이벤트로서는 사상 최대의 규모가 되었다. 전통에서 현대에 이르는 수많은 기획물들이 일본의 풍부하고 다양한 문화 및 일본인의 전체 상을 조망케 해주었다. 이 '제팬 페스티벌 1991'이 하나의 계기가 되어 문화 소개 사업이 대형화 또한 종합적인 기획으로 되는 경향이 있다. 또 이것은 공공 기관과 민간 단체 그리고 여기에 기업이 협력하여 복수의 조직이 공동으로 행한 문화 사업이 모델로 되고 있다.

'제팬 페스티벌 1991'의 구상은 영국에서 탄생되었다. 1991년은 영국의 'Japan Society(민간단체)' 창립 백주년이 되는 해로 일·영 교류 백주년을 맞는 해였으며, 한편으로는 1981년 10월부터 1982년 2월까지 영국의 'Royal Academy of Arts'와 일본 국제 교류기금의 공동 주최로 개최되어 대단한 평판을 얻었던, 10년이 지나도 그 감동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고 할 정도인 '에도 대미술전'이 개최 된지 10년째가 되는 해였다.

이에 영국의 친일 및 지일 인사 그룹이 1991년에 'Japan Society' 1백주년을 기념하는 문화 사업으로 '에도 대미술전'을 능가하는 문화 사업을 실시할 것을 강구하게 되었고, 여기에 2년에 한 번씩 독일이며 프랑스를 주제로 한 이벤트를 개최해 오고 있던, 마틴 캠벨 화이트와 재스퍼 패롯이라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프로모터가 일본의 문화를 영국에 가지고 오려고 했던 상업적 동기들이 합쳐져서 생겨난 것이다.

당시 주영 대사로서 이 발상을 접한 야마자키 페스티벌 일본 위원회 부위원장은 영국에서 개최되는 다른 유럽 국가의 문화 행사들이 서로 비슷하여 별다른 감동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서, 서구와 다른 일본의 문화를 집중 조명하는 이벤트를 개최하면 큰 반향을 일으킬 것으로 확신, 그것을 실현시켜 보려는 강한 열의를 맞게 되었다.

1987년 가을경 제기전 이 발상은 그 뒤 야마자키가 대사 임기를 마치고 귀국하여 '일·영 협회'이사장으로 부임하면서 그 실현을 위해 발벗고 나섬으로써 구체화된다. l988년 가을 야마자키는 이 기획의 실현을 위해서는 재계의 뒷받침이 가장 큰 관건이라고 판단, '경단련 (經團連)' 부회장이며 도시바의 상담역인 사나미를 찾아가 협조를 구하는 한편, 그를 회장으로 하고 본인이 부회장으로 되는 행사 실행을 위한 일본 위원회를 구성하여 자금 확보를 비롯한 본격적인 행사 준비에 착수하였다.

'제팬 페스티벌'의 운영·추진 체제는 일·영 양국에 각각 '페스티벌 실행 위원회'가 개설되었으며, 영국에서는 중앙의 위원회 외에 북 잉글랜드, 북 아일랜드, 스코트랜드, 웨일즈 등 4개의 '페스티벌 센터'가 조직되어 런던뿐만 아니고 지방 도시에 있어서도 활달한 사업 전개를 도모하였다.

이들 지역 페스티벌 센터는 중앙위원회의 지부로서가 아니라 그 지방에서의 페스티벌 개최를 책임지는 독립 조직으로서 런던으로부터 순회하는 전시며 공연뿐만 아니라 그 지방 독자의 이벤트를 각각 기획·추진하였다.

'페스티벌 실행위원회'는 양측 모두 페스티벌 실시의 최대 관건인 자금 조달 문제를 염두에 두고 재계 인사를 위원장으로 하여 구성되었는데, 특히 일본의 경우는 주요 경제 단체장, 유력 기업 대표 등 70여 명의 재계 인사를 위원으로 영입하는 등 페스티벌의 재정적 뒷받침을 위한 기반을 굳건히 하였다.

제팬 페스티벌은 약 4개월 동안 32개의 주요 도시를 비롯해 영국 전역 2백여 곳의 장소에서 3백 50여 회에 걸쳐 개최되는 각종 이벤트로 구성되었다. 이렇게 많은 페스티벌은 프로그램들이 처음부터 완전한 계획 하에 조직된 것은 아니었다.

영국의 프로모터이며 '페스티벌 영국 위원회'의 사무국장을 맡았던 마틴 캠벨 화이트가 당초 기획하고 있던 일본 교향악단 공연 등의 프로그램과 대영 박물관에서 구상하고 있던 가마쿠라 조각전 등 타 기획물의 편입, 그리고 여기에 영국인에 인기 있는 스모 경기 시범, 가부키 공연 등을 추가하고 페스티벌 전체를 통해 가장 중심이 되는 전시 사업을 주 사업으로 추진한다는 식으로 구성되어 나갔다.

이 과정에서 특히 '페스티벌 영국 위원회' 위원장이 된 영국 국영철도 총재 피터 파카 경은 페스티벌 프로그램 구성의 중심 인물로 그에 의해 '제팬 페스티벌'의 규모가 획기적으로 커지게 되었다.

그는 이 페스티벌에 대단한 열의를 가지고 일본의 과거와 현재, 영국에 넘치고 있는 전기 제품, 카메라, TV, 자동차 등의 일제 상품의 이면에 있는 문화, 특히 그러한 물건을 만들어 내고 있는 환경, 백 그라운드라고 할 수 있는 일본의 문화를 종합적으로 전 시대에 걸쳐 전국 규모로, 그리하여 영국의 인텔리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도 그 문화를 피부로 느낄 수 있도록 하는 행사로 이끌고자 많은 사업을 개발, 페스티벌이 대규모로 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일본은 이 페스티벌을 통해 영국인의 일본에 대한 단순하고 한정된 이미지 즉 차를 따르는 기생, 사무라이, 현대에 있어서는 제복으로 몸을 감싼 공장노동자, 지나치게 일만 하는 샐러리맨 등의 고정 관념을 불식시키고, 다양한 문화를 지닌 국가라는 것을 인식시켰으며, 또한 일본이 모방에만 능한 것이 아니고 훌륭한 예술의 창작 등 창조적인 면도 갖추고 있음을 이해시켰다.

그리고 페스티벌을 끝마치면서 90만 파운드(약 10억 원)를 영국 청소년의 일본 및 일본 문화 교육사업 경비로 기탁함으로써 미래의 주역이 될 이들 세대들이 일본에 대해 바른 인식을 가질 수 있도록 제도화하였다.

페스티벌 참관자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 의하면, 회답자의 93%에 달하는 압도적 다수가 페스티벌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인 것으로 나타났다. 4%는 '좋다', '매우 좋다', '훌륭하다'고 하였으며 불과 2%가 '좋지 않다'고 답하였다. 페스티벌이 이들에게 미친 영향을 보면 소수이기는 하나 33%의 사람이 '이전에 비해 일본 문화에 대해 호감을 갖게 되었다' 혹은 '대단히 호감을 갖게 되었다'고 답하였고, 그 비율은 페스티벌이 진행됨에 따라 증가되었다. 또 흥미도를 보면 71%가 '휴가 때 일본에 가 보고 싶다'고 하였고 40%가 '좀더, 일본에 대해 배우고 싶다'고 하였으며 40%가 '일본의 행사에 좀더 참가하고 싶다'고 답했다.

페스티벌 개최를 위한 자금 조달과 기업의 참여 과정을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89년 가을 경 일본 위원회가 활동을 개시하고 착수한 최초의 업무는 자금 모음이었다. 페스티벌의 중핵 이벤트로 'Visions of Japan'이라는 전시회가 있었기 때문에 이것을 위한 경비를 우선 염두에 두고 페스티벌 전체적으로도 상당한 경비가 소요 될 것으로 판단(대략 총 40억 엔 쇼요 예상)하여 기업으로부터 10억 엔을 조금 웃도는 금액을 모금키로 하였다.

이를 위하여 사나미 위원장(경단련 부회장 주식회사 도시바 상담역)과 야마자기 부위원장(주영 대사 역임, 일·영 협회 이사장, 미츠비시 고문) 등 '페스티벌 일본 위원회' 관계자는 '경단련'과 협의, 목표액의 반 정도를 27개 업종별 단체(각종 '공업회' 등)에 부탁하고, 나머지는 공장을 갖고 있다든가 하는 영국 진출 기업을 중심으로 모금키로 하여 이들 단체 기업 등을 돌며 모금 활동을 폈다.

그 중에서 수십 개의 회사에 대해서는 이 모금과는 별도로 추가 모금을 하기도 하여, 결국 총 1천여 개 사로부터 14억 여 엔을 모금하게되었다. 이 과정에서 기업들은 모금이 '경단련'을 통한 기업 단체모금, 개별 기업 모금, 영국 진출기업 모금 등 세 가지로 추진되었기 때문에, 회사에 따라서는 심지어는 6차례나 모금 제의를 받고도 응한 곳이 있는가 하면 구체적 사업규모도 정해져 있지 않는 막연한 계획 단계에서 페스티벌의 자금 제공을 약속하는 등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이 페스티벌의 개최에는 총 50억 엔(약 350억 원)이 소요된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당초 페스티벌에 소요되는 경비는 일본은 프로그램의 제작 및 영국까지의 운송을 책임지고, 영국 내의 경비는 영국이 부담하는 형식으로 추진할 계획이었으나, 행사 규모가 점차 확대되면서 영국의 재정 형편상 도저히 국내 경비를 다 부담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던 관계로 그리고 영국의 주 모금 대상 또한 영국 내 일본계 기업이었던 점 등을 고려할 때 총 경비의 2/3나 3/4 혹은 그 이상을 실제로 일본측이 부담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기업이 지원에 참여하면서도 이들 기업은 스스로의 이름을 크게 알리는 일은 하지 않았다. 수많은 이벤트들이 있었기 때문에 일부 이벤트의 경우는 홍보물에 그 이벤트를 지원한 기업의 이름을 스폰서로 나타낸 경우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경우는 말미에 눈에 잘 띄지는 않는 작은 글씨로 또한 지원 정도의 다과에 따른 배려도 없이 페스티벌 개최에 협력한 전체 기업들의 이름을 게재한 것이 고작 이었다.

이는 문화 소개라는 미명하에 수출 증대를 기도하고 있다는 식의 거부 반응을 염두에 둔 것으로, 해외에서 개최되는 문화예술 사업에 대한 기업의 지원이 어떠한 형식이어야 하는지를 시험해 보는 계기도 되었다. 그러나 페스티벌을 참관하러 온 영국인은 카탈로그 말미에 깨알같은 글씨로 적혀 있는 기업의 이름들을 하나 하나 짚어 가며 읽어보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두 행사의 비교

이상에서 비슷한 동기에서 비롯된 한국과 일본의 문화 소개 사업들이 각각 어떻게 전개되었나를 살펴보았으며, 사업 기획을 접한 정부의 대처 방식, 사업의 규모, 지원의 정도 등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비교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우선 이러한 행사의 개최를 위해 일본은 3년여의 기간을 갖고 준비하였으나 우리의 경우는 그 기간이 채 1년이 되지 않는다. 이렇게 짧은 기간에 해외에서 개최되는 대규모의 행사를 효과적으로 조직하는 것은 불가능 할 수밖에 없다.

둘째, 행사의 규모이다. '제팬 페스티벌'의 경우는 모두 63개의 단위 기획물들-현대 일본 종합 소개전, 'Vision of Japan' 등 전시행사 22개, 가부키, 분라쿠, 노 등 무대 공연물 14개, 동경 교향악단 연주회 등 음악회 8개, 일본 영화 특집 '감독 50선' 등 영화·방송 사업 2개, 환경, 일본의 교육, 기업, 가족 등 심포지엄 8개, 야외 이벤트 1개, 스모 등 스포츠 행사 3개 동경 주간이라는 제하의 불꽃놀이, 인간문화재 10인 선 등 4개 행사, 일본식 정원 건설 등-이 32개 도시 2백 곳의 장소에서 3백 50여 회에 걸쳐 개최되었는데, 한국 종합 예술제는 7개의 기획물-조각 작품전 1개, 국악·연극 공연 등 무대공연 5개, 문학 소개 행사1개-이 파리 한곳에서 26회 개최됨으로써 전체적으로 일본의 4/1의 규모였다.

셋째, 참여 기관·단체의 수이다. '제팬 페스티벌'은 협력 기업단체, 페스티벌 실행 위원회, 운영위원회, 사무국 등에 정부, 공공 및 민간 단체, 기업 등 6백 30여 기관, 단체(이는 페스티벌 결과 보고서에 게재되어 있는 기관, 단체의 수를 헤아린 것인데, 관계자들은 이보다 훨씬 많은 1천여 개 사였다고 말하고 있음)가 참가하고 있는 반면, 우리의 경우는 문화체육부(국립 국악원 예술단 파견), 공보처 해외 공보관(개막 리셉션 개최 지원), 한국문화예술진흥원(봉산탈춤, 연극 공연단 국제 항공료 지원), 한국 프레스 센터(프랑스 언론인 초청), 대한항공(조각 작품 운송지원), 주식회사 해태(예술제 홍보지에 광고 게재) 등 6개 기관 단체가 참여하였다.

마지막으로 양 행사에 소요된 경비는 일본 50억 엔, 한화 약 3백 50억 원, 한국 약 3억 원이었다.

물론 이런 차이의 배경에는 일본이 미국에 이은 세계 제2위의 경제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영국과의 오랜 교류기간 동안 형성된 일본에 대해 매우 우호적인 영국 내의 친일 및 지일 인사 그룹이 존재하고, 일본의 수많은 기업이 영국에 진출 또는 투자하고 있는 등 사업전개에 훨씬 유리한 조건들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제팬 페스티벌'이 그렇게 큰 규모로 성대히 치러질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일본의 기업 등 재계가 그러한 행사를 아낌없이 후원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라고 하겠다. 일본에서 보통 '메세나' 활동이라고 일컬어지는 이러한 기업의 문화지원 활동은 1990년 2월 기업의 문화 지원 활동을 가속적으로 촉진할 여건의 조성을 주목적으로 하는 '기업 메세나 협의회'라는 단체가 설립되면서 체계화, 활성화되었다.

여기서 '메세나(Mecenat)'라는 말은 국가, 민간을 불문한 광범위한 문화 지원 활동을 일컫는 프랑스어로서, 기원전 70년경에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신하도 황제에게 당시의 대시인인 베르길리우스, 호라티우스 등의 적극적 후원을 건의하는 등 문화예술의 보호에 앞장서 예술 진흥에 크게 공헌한 고대 로마의 정치가 마에케나스(Gaius Cilnius Maecenas)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다.

일본의 '기업 메세나 협의회'는 '제3회 일·불 문화 서미트'를 계기로 하여 성립되었다. 일·불 문화서미트는 자크랑 전 프랑스 문화성 장관의 제창으로 프랑스 문화성과 일본 아사히 신문사에 의해 1984년에 시작된 일·불 양국의 문화 관계 인사, 예술인들이 참가, 격년으로 양국 교대로 개최되는 예술·문화 협의 모임으로 프랑스는 장 마우 퐁피두센터 관장이 일본은 나가이 미치오 국제 문화회관 이사장이 지속적으로 양국 의장직을 맡아오고 있다.

1987년 프랑스에서 열렸던 일·불 문화 서미트 실무 회의에서 시세이도사 사장 후쿠하라가 참석, 기업과 문화에 관한 시에이도사의 실례와 그 이념을 설명하였는데, 이것이 정부 주도의 문화 정책으로부터 민간의 문화 지원 활동으로 눈을 돌리고 있던 프랑스 측의 큰 관심을 끌어 교토에서 개최될 '제3회 일·불 문화 서미트'는 양국의 많은 경영자를 참석시켜 '문화와 기업'이라는 주제로 회의를 개최키로 결정하게 된다.

이 '제3차 일·불 문화 서미트에 참석한 프랑스 측 멤버의 한사람으로 프랑스의 문화 지원을 위한 순수 민간기업 연합조직인 '아드미컬(ADMICAL 상·공업 메세나추진 협의회)'의 회장인 자크 리고(라디오·TV 룩셈부르크 사장)가 유럽에서는 문화 지원 단체 연맹이 결성되어 활동중인데, 일본에서도 같은 성격의 단체를 만들어 연대활동을 해 나가자는 제의를 함에 따라, 이 회의에 참석하고 있던 사지 게이스 산도리 사장, 츠카모토 와코루 사장, 스스미 세종 그룹 대표, 이네모리 경(京)세라 사장, 그이고 후쿠하라 시세이도 사장이 그 실현 방법을 찾아보기로 하고, 이후 세계 각국의 유사한 종류의 단체에 대한 조사, 발기인들간의 합의 과정 등의 준비 단계를 거쳐 1990년 2월 발족하였다.

이 협의회는 기본적으로 개개 메세나(예술 문화 지원)활동은 각 기업이 자주적으로 행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협의회는 이들 개개 기업의 메세나 활동을 가속적으로 촉진할 여건의 조성, 즉 세제상의 혜택 부여를 위한 정부의 사회에 대한 계몽 활동, 기업 내부에 있어 문화에의 관심 고양, 그 위에 기업과 문화 단체, 기관간의 밀접한 관계 형성 등을 당면 주요 과제로 하여 계몽, 보급 사업, 정보 수집 배포, 중개 사업, 조사·연구 사업, 협력·후원 사업 등을 행하고 있다.

'기업 메세나 협의회'에는 1992년 6월 현재 대기업으로부터 중·소기업을 포함하여 전국의 기업 2백 17개 사가 참가하고 있으며, 1991년에는 기업 메세나 협의회 회원 기업 포함, 일본의 기업 2백 56개 사가 문화예술 활동에 대해 1천 4백 3건 2백 53억, 3천 7백 46만 엔(약 1천 7백 50억 원)에 이르는 자금원조를 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기업의 문화예술 활동에 대한 참여는 오늘날 일반적으로 기업에 대해 요구되고 있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완수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 완수는 장기적으로 기업에 이익이 된다. 이것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 수행이 공중의 기업 이미지를 좋게 하는 하나의 방법이 되기 때문이다.

기업이 문화예술 활동을 지원하는 것은 문화예술의 다양성과 민간주도의 발전을 촉진하는 것 이외에 기업 경영 환경을 개선하는 데 구체적인 도움을 준다. 전인간적인 대우를 원하는 종업원과의 노사관계 개선, 기업 이미지의 형성과 개선, 그리고 기업 마케팅의 효율화라는 측면에서 기업에 장단기적으로 이익을 제공하게 된다.

요컨대 기업이 문화예술 활동을 후원하거나 직접 문화예술 활동에 참여하는 것은, 그 나마의 문화예술 발전에 기여함은 물론 기업의 생산성을 향상시키고 기업의 경영 환경을 개선하는 데 도움을 주게되는 것이다.

우리도 이와 같은 인식 위에서 기업은 노사 관계 개선 방안으로서, 기업 이미지 개선과 광고 전략으로서, 또한 영리 사업으로서 문화 투자 전략을 채택, 추진해 나가는 것이 필요하며, 공공 문예 기관에서는 각 기업에 문화 투자를 위한 정보의 제공, 기업의 문화 담당 부서의 홍보실 직원의 연수 교육실시, 기업의 수요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문예 프로그램 개발, 문예투자가 기업의 이미지 개선, 상품판매에 미치는 효과 등에 관한 연구 및 사례 개발 등 기업의 문화투자 유도를 위한 시책들을 적극적으로 펴 나갈 것이 요청된다.

이러한 노력은 향후 참여를 검토할 미국 휴스턴 국제 페스티벌, 벨기에 유로팔리아 행사 등의 국제행사에서 우리나라의 문화를 집중적으로 소개하는 사업들이 훌륭한 성과를 거두도록 하기 위해서는 특히 서둘러야 할 사항이다.

축제 개최국은 물론 이웃 국가들의 관심과 시선을 집중시키게 될 행사에 정부나 공공 문예 기관이 자신감을 갖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구성, 추진하는 일은 기업 등 재계의 전폭적 지원 없이는 실현하기 어려운 것이다. 국내의 모든 역량을 총결집하여 해외에서의 한국 문화 축제가 성황리에 개최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