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기획 / 대중문화의 수용

키치와 「진지한 예술」




서성록 / 안동대교수·미술평론가

사회적 환경은 역시 예술의 변화를 추동 하는 가장 강력한 요인 중 하나가 아닌가 싶다. 그 사회적 환경 중 「대중적 이미지」만큼 빨리 일반에게 어필하고 전달되며 유포되는 것도 없지 않을까 ? 흡수력, 파급력으로 친다면 그것은 대중음악 이상이다. 이와 관련한 예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수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광고전단, 텔레비전으로부터 기어 나오는 형형 색색의 기발한 시각 이미지, 길거리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각종 포스터, 이러한 대중적 이미지는 상품광고나 일반 매체 속에 그 뿌리를 굳건히 내리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런 이미지 과잉현상에 대해 영국의 미술평론가 피터 풀러(Peter Fuller)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 있다. 「우리는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시각 이미지들에 에워싸여 있다. 이러한 시각 이미지들은 텔레비전, 영화, 신문사진, 칼라도판, 그리고 온갖 종류의 복제물이 쏟아내는 메가톤 급 시각적 전통으로 구성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는 찬란한 빌보드와 거리에 나붙은 상업광고 포스터도 포함된다. 이런 거대한 흐름은 우리가 어디를 가든, 또 어느 순간이든 우리를 압도한다. 이러한 막대한 메가톤 급 시각전통은 국제적인 독점 자본주의로 중병을 앓고 있음을 실증시킨다.」

참문화에는 무감각, 오락이 목적인 키치 열풍

일상생활과 더 이상 분리될 수 없는 대중적 이미지는 자연스럽게 고급예술 속에도 스며든다. 그리하여 예술을 세속화시키고 일상화시킨다. 좋든 싫든 그것이 오늘의 문화의 요소들로 길들여지고 있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뻔한 내용의 TV 연속극과 스포츠신문, 랩 뮤직과 팝송, 범람하는 비디오, 직배 수입의 영화들, 흥미 위주의 소설, 현란하게 나붙은 광고물들, 최근의 노래방까지 여기서는 「참된 문화의 가치에는 무감각하면서도 특정한 문화만이 제공 할 수 있는 오락을 갈망하는 사람들을 위해 생겨난 대중문화, 즉 키치(Greenberg)」가 문화, 삶의 중심권에 자리 잡게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고급예술과 더불어 키치를 생활의 동반자로 삼지 않으면 안되었고 우리 스스로 「키치 중독자」라는 혐의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게다가 외연적인 키치의 품질과 성능이 놀랍게 향상됨으로써 그것은 지난날 고급문화가 지녔던 세련미와 완숙도를 이미 추월하고 있다는 인상마저 가져다줄 뿐만 아니라 한술 더 떠서 「키치 세대」에 의해 「키치 문화」를 건설하려는 「야심에 찬」탐구가 고조되어 갈 무렵, 「키치 돌풍」에 대한 어떤 신중한 분석과 검토가 요청된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키치를 산업사회의 대표적인 문화현상으로 지적한 클레먼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에 따르면, 그것은 일종의 허깨비로서 「대중적이고 상업적인 예술과 원색화보가 있는 문학지, 잡지의 표지, 삽화, 광고, 호화판 잡지나 선정적인 싸구려 잡지, 만화, 유행가, 탭 댄스 할리우드의 영화 등을 말한다.」 또 그것은 고안, 속임수, 술책, 어림짐작, 테마 빌어오기 등을 원용하면서 대리적인 경험, 꾸며진 감각, 기계적이고 일정한 공식을 주입시킨다고 비판한 바 있다. 요컨대 그에게 키치란 문화적 오락을 추구하는 대중의 취향에 대한 아첨으로 비추어졌던 것이다.

그린버그가 말한 것처럼 「키치가 오락을 갈망하는 사람들을 위해 생긴다 대용문화」라고 볼 때, 또 그것이 「대중」의 무절제하게 남용되는 오락욕구와 관련된다고 볼 때, 이와 유사한 시각은 오르테가 이 가세트(Ortegay Gasset) 나 엘리어트(T. S. Eliot)와 같은 보수주의자들에 의해서도 표명된 바 있다. 그들은 단호한 어조로, 「대중의 반란」(the revolt of masses)이 전체주의적 공포를 가져온 이래 유일한 희망으로 남은 것이란 오래된 계급장벽을 새롭게 구축하고 대중을 다시금 관료적 통제 아래 두는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이 같은 입장이 대중을 「하찮고」,「세속적」인 존재와 동등하게 취급한 데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한편 진보적 맑시스트들과 자유주의자들은 대중에 대하여, 루소(Rousseau)의 「고상한 야만」(noble savage)이라는 개념처럼, 대중은 본질적으로 건전하지만 키치에 군림하는 기업주(the Lord of kitsch)에 의해 문화적 착취를 당하는 「멍청이」,「제물」로 묘사한다. 이에 대해 드와이트 맥도날드(Dwight Macdonald)는 고급문화와 키치로서의 대중문화의 관계를 다음과 같은 말로 재치 있게 비유하면서 키치의 위험성을 경고한 바 있다. 그 관계란 『나뭇가지와 잎사귀와 같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잎사귀와 잎사귀를 먹고사는 잎 나방의 관계와 같은 것이다. 이러한 키치는 마구잡이로 지하자원을 캐내기 위해 흙을 파헤쳐 놓고 알맹이만 빼먹고 내버리는 절제 없는 개척자들처럼 고급문화를 마구「채굴하는 것이다.」』

만약 대중에게 키치 대신 좋은 문화가 제공된다면 과연 그들이 좋은 문화를 어떻게 섭취할 것인가 ? 대중문화의 수준은 과연 향상될 수 있을까 ? 이러한 진단은 물론 잘못 제시된 것으로 보인다. 대중문화는 실제로는 「대중」(masses)의 표현인데도 사람들은 대중 문화를 민속예술(Folk art)과 마찬가지로 「서민의 표현」으로 간주하거나(보수주의적 관점) 「인민의 표현」일 수도 있는(진보주의적 관점) 것이라고 여겨진다.

문화욕구의 배설형태의 키치와 대중문화

「대중의 표현」이 비록 키치 위에 군림하는 기업주들(the Lord of kitsch)에 의해 조정을 당하고 있기는 해도 그 자체로서 가치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그것 나름대로 억압당한 욕구의 충족이라는 의미를 지니면서 태어났다. 대중예술에 대한 문제를 처음으로 제기한 몽테뉴(Mentaligne)의 관점에 따르면, 인간의 본능적 욕구는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이며, 그렇다면 그렇게 본능적 욕구를 최대한도로 발현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그러한 본능적 욕구를 만족시켜 줄 수 있는 쾌락을 전적으로 부정만 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몽테뉴의 견해에 대해 극히 종교적이고 금욕적인 인물인 파스칼(Pascal)은 인간의 정신적인 발전을 크게 믿으면서 오락과 현실도피는 인간이 갖고 있는 불가피한 욕구이기는 하지만 인간만이 갖고있는 보다 고상한 금욕의 고독 속에서만 보다 고양될 수 있는 것이며 오락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고 그로부터 구원의 길로 인도될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물론 대중문화에 대한 이러한 상반된 시각이 지금까지도 유효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몽테뉴의 이론은 현대 대중문화론에서 심각한 문제로 제기되는 수용자를 피동적인 존재로 만들거나 대중조작의 가능성에 대해 고려하지 않았으며, 파스칼 역시 문제범주는 다르지만 너무 안일하게 대중문화의 문제를 취급하였기 때문이다. 문제가 엉뚱하게 대중문화 쪽으로 가버린 듯하지만 키치나 대중문화가 공히 문화욕구의 배설형태를 취한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보이지 않으며, 따라서 키치의 성분을 파악한다는 의미에서라도 대중문화의 문제를 검토하는 데 좀더 많은 지면을 할애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대중문화의 문제는 고급예술과 달리 초창기부터 전혀 다른 역사적 맥락을 지니고 태어났다는 점에 있다. 몽테뉴가 수용자에게 참여자로서 깊은 의미를 부여한 것은 그의 논거를 정당화해 주지만, 그것은 현대의 대중 문화 흥행사들이 주장하는 「대중은 오락을 원하고 또 필요로 한다」는 논거와 흡사하다. 실제로 대중문화는 중산층을 탄생시킨 「사회적 변화」와 관련되어 있으며 그들의 오락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로웬탈(Leo Lowental)은 이 점을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분석한 바 있다.

「특권층, 즉 유한계급, 지주, 귀족층들이 점차로 그들이 지금까지 누렸던 지도적 위치를 포기하도록 종용되는 당황스러운 처지에 놓이게 되는가 하면, 중산층으로 발돋움하는 도시인이 된 대중들이 그들 스스로 여가를 갖게되고 대중들은 기분전환을 위한 여러 가지 문화 내용과 오락을 원하게 되었으며 이를 위해 그러한 문화내용을 충분히 공급할 준비를 갖춘 상품시장이 등장했다.」

다시 말해 대중문화란 대중을 위해 탄생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상품으로 거래되는 수단에 불과하며, 오락적 기능을 갖는 것 같지만 내용적으로는 정신적 가치를 질식시키고 판단을 마비시키는 기능을 갖는 것이다. 그리하여 워즈워스(Wordsworth)가 묘사한대로 종국에는 「끝없는 공허, 쉬임 없는 변화」로 우리를 궁지에 빠뜨리는 것이다.

고급문화와의 경합, 위험수위에 이른 키치

이론적으로 왜 대중문화가 면밀한 주의를 요하는 문화이며 그렇게 밖에 될 수 없다는 논거의 하나는, 모든 문화란 인간을 위해, 인간에 의해 태어났을 것이라는 착각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인간이 대중으로 분류되는 한에서 그들은 자신의 인간적 정체성과 특수성을 잃어버린다고 맥도날드는 분석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군중」이 공간적인 차원의 집단존재라 할 때 「대중」은 역사적 시간의 집단존재이다. 이러한 많은 사람들로 이루어진 집단에서는 사람들은 그들을 인간 존재로 표현하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다른 사람들과 개인적으로 뿐만 아니라 집단의 구성원과 관계를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들은 상호 관계가 단절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저 멀리 거리를 두고 있는 상태, 즉 비인간적. 추상적. 원자적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야구게임에 열광하는 군중 속에서, 텔레비전 상자 앞에서, 하루 일과의 반을 고스란히 바치는 대중 속에서 우리는 데이비드 리스만(David Riesman)이 미국사회를 두고 표현한 「고독한 군 중」(the lonely crowd)이란 말을 떠올리게 된다. 이처럼 군중이든 대중이든 오늘의 인간은 오늘날 다른 수천, 수백만의 원자들과 거의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똑같이 획일화, 평균화, 무개성화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을 견고하게 에워싸고 있는 대중문화의 한가운데서 누가 감히 「인간적 관계」,「개성」,「프라이버시」를 들먹일 수 있다는 말인가 ?

실상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문제의 모든 것을 「대중문화 속의 파편화된 인간」에게 돌릴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대중문화와 민속예술 그리고 고급 문화의 장벽이 무너진대서 온 결과로서의 분석도 가능하다. 서구의 경우, 대중문화는 산업혁명 전까지만 해도 일반서민의 문화였던 민속예술의 연장인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 대중문화와 민속예술의 관계를 보면, 서로 비슷하기보다는 너무나 뚜렷하게 다르다. 민속예술이 하위계층으로부터 생성되었으며 자발적이고 토착적인 표현이며 고급문화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고 하위계층 자신의 필요에 의해 이루어진 문화요, 예술인데 반해, 대중문화는 위로부터 강요된 문화이며 기업인이 고용한 기술자에 의해 가공된 것임과 아울러 그 수용자는 수동적이기 만한 소비자들이며 따라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오로지 대중문화라는 상품을 살 것인가 말 것인가를 선택할 정도로 제한되어 있다.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관계에서 볼 때도 대중문화는 고급문화의 그 높은 장벽을 무너뜨렸고 대중을 저속한 형태로 고급문화에 통합시키고 종국에는 그것을 악덕 기업가들과 같이 정치가들은 정치적인 지배 도구로 이용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고급문화가 일반대중을 무시하고 감식가(cognoscenti)로의 위안부 역할에 충실했다면, 표준화, 동질화를 특성으로 삼는 키치는 대량생산·대량보급·대량소비의 문화 패턴에 발맞추어 저 고결한 고급문화와 경합을 벌이거나 잠식해 가는 위험 수위까지 도달했다는 분석이 가능할 것이다.

우리 미술의 경우, 이와 사정은 다르지만 고급문화가 대중문화와 경합을 벌이는 것은 다분히 「고급문화의 일상화」,「엘리트 문화의 대중화」라는 측면이 고려되어 있는 것 같다. 말하자면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역학관계에서 볼 때 전자가 후자에게 일방적으로 압도를 당한 적이 없으며 반대로 항상 우월한 고지를 점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적어도 양적 차원에서라기보다는 질적 차원에서 보면 그러하다. 이런 맥락에서 「경합」이란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 물론 거기에는 대중문화에 대한 약간의 경멸감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고급문화의 턱 낮추기, 이를 통한 수용층의 확대, 일상세계로의 열린 시각, 대중문화가 지닌 탁월한 기술적 효용성 연구, 그리고 더 이상 지연할 수 없는 매체확장이라는 몇몇 관점에서 고급예술은 대중문화에 비해 비교적 관대하며 신축적인 자세를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 비교적 근래의 일이었음을 상기할 때, 「고급예술의 대중화」라는 명제는 다분히 의도적으로 상정되었고 또 실천적으로 추진되어왔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90년대 양상은 이러한 방향과는 무관하게 고급예술에 대한 적개심, 내키는 대로의 욕구분출, 풍속 내지 저질문화에 대한 무비판적 수용이 날로 가속화 되어간다. 민주화 사회로 들어서면서 싹트기 시작한 사회적 이완의 분위기, 개인주의적 성향의 만연, 몰가치한 것에 대한 무분별한 탐욕, 시장논리에 예속 당한 지배적 예술에의 불신 따위가 혼란스럽게 뒤엉키면서 만들어 낸 이런 현상은 결국 이발소 그림이나 간판그림, 광고를 판에 박은 듯한 동일 수법의 전용, 싸구려 이미지를 도용한 형태이거나 골치 아픈 사고의 기피, 즐겁고 관능적인 메시지의 착색 따위로 말하자면 전형적인 키치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물론 일부 작가들의 경우, 「현란한 젊음의 쇼윈도」를 방불케 하는 소비문화의 추악성을 들추어내고 정밀 검증하는 자세를 취하지만, 그러한 설교조의 아방가르드주의가 얼마나 효력이 있을지는 의문으로 남는다.

대중문화의 현주소 「파리애마」의 충격

이에 관한 아주 충격적인 사례를 소개하면, 필자는 지난 해 육태진이라는 젊은 작가의 작품전을 우연히 본 적이 있었다. 이 작가가 주제로 삼은 것은 역시 우리 시대 대중문화의 현주소를 실증하듯 「파리애마」의 형상 이미지에 관한 농염한 재현, 각기는 흡사 포르노 영화관처럼 전시공간을 어둡고 은밀하게 꾸며 「파리애마」를 상영하는 분위기를 갖추었다. 그리고 자막 대신 파리애마에 출연했던 육체파 여배우들 즉, 안소영·염혜리·오수비의 인물 이미지를 콜라주 시켜 벽면에 부착했다. 천정에는 붉은 불빛이 쉴새없이 껌뻑이고 특수 장치를 한 벽면에서 흘러나오는 네온불빛의 조명효과로 작가는 스타들의 농염도, 육감도를 한층 더 말초적으로 강조하고자 했다. 그의 작품은 누가 보아도 외설적이었을 것이며, 통속문화의 저질스러움을 고스란히 껴안고 있었다.

작가의 외설스러움은 전시도록에 실린 다음과 같은 시의 인용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파리애마 안소영 염혜리 오수비 시절/단조로운 피스톤 운동과는 스케일부터 달라/이젠 백마 콤플렉스 훌훌 던져 버리고/코스모폴리탄적으로 대범하게 놀자는 말씀/역시 제주도에서 벌거벗고 말 타는 것보다는/파리에서 한복 입고 말 타는 게/국위선양도 될 겸 보기에도 포토재닉하구만/‥‥‥/장작불 타오르는 페치카 옆/백마에 짓눌린 애마부인의 교성 디퍼, 디퍼 .」 물론 이것은 육태진의 글은 아니다. 시인 유 하의 〈파리애마〉라는 시의 부분을 인용한 것이며, 작자는 대중스타의 이미지를 훔쳐왔듯이 유 하의 시를 훔쳐 자기작업에 요긴한 수단으로 삼았다. 이렇듯 「힘들이지 않은 작업」 자체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중문화를 패러디화 하자는 것인지 아니면 예찬하자는 것인지 전혀 구분할 수 없었다는 점이 필자를 더욱 괴롭혔던 셈이다.

이러한 해프닝이 있은 직후 필자는 여러 가지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급속도로 확산이 되어 가는 상품광고와 각종 미디어를 타고 전해지는 대중적 이미지 앞에서 고급예술은 무너져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마저 들었고, 따라서 현재 우리 사회에 맞이하고 있는 놀라운 소비성향과 놀이문화의 팽창 속에서 과연 형식, 순수 지향의 예술은 건재할 수 있으며 우리가 그 동안 열심히 쌓아 올린 기름진 심미성은 결국 상아탑의 아성을 벗어나기에 역부족인가 하는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아주 극단적인 예를 살펴보았지만, 이와 비슷한 예, 즉 그토록 성감을 자극하는 경우는 아니더라도 상업적 이미지를 전용하거나 상품광고 대중스타의 이미지를 차용하면서 지하문화의 성격을 표방하는 경우는 점차 늘어가고 있다. 물론 이와 같은 경향은 60년대에 풍미한 미국의 팝아트에서 그 단서를 잡을 수 있다. 하지만 팝아트가 일상의 매체들, 가령 신문, 잡지, TV, 빌보드, 영화, 만화, 그리고 상품 이미지들의 차용을 통해 라우쉔버그(Rauschenberg)의 저 유명한 말처럼 「아무도 손대지 않았던 예술과 삶의 공백을 메우고자 했으며」 그리하여 물질만능의 사회를 패러디 하고자 했음에 비해, 이들에게는 그러한 가치기준이 불분명하며, 오히려 풍요로운 소비사회를 부추기는 듯한 전도의 양상마저 엿보인다. 물론 그러한 발상이 그 동안 좋은 시절을 누렸던 추상미술의 권위, 엘리트주의, 형식 만능주의, 교조적 이념의 지배, 미적 독단주의에 대한 반발에 기인한 것임은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그 「반발」이 예술적 아나키즘, 니힐리즘, 그리고 키치 영합 쪽으로 가는 것에 대해서는 납득할 수 없다.

「그리기」의 포기와 버려진 「장르개념」

이들은 공통적으로 회화가 요지부동의 경전으로 모셔오던 「그리기」를 전적으로 포기하고 「오리기」나 「합성하기」,「글자 넣기」,「치부 드러내기」와 같은 수법을 방법론으로 섬기면서 상품과 광고, 그리고 키치로 표백된 한국사회의 단면을 드러낸다. 또한 장르개념을 버리고 회화, 사진, 컴퓨터 그래픽, 프린트, 설치, 입체, 퍼포먼스 사이를 자유롭게 왕복 운동하는 것을 볼 수도 있다.

〈아! 대한민국〉(92년 자하문미술관), 〈대중매체를 통한 이미지〉(92년 갤러리 도올), 〈도시 대중 문화〉(92년 덕원 미술관), 〈표현중독〉(92년 관훈 미술관), 〈젊은 모색전〉(92년 국립현대미술관) 등의 전시가 그 표본이라 할 수 있으며, 또한 그것은 〈Sub Club〉, 〈황금사과〉, 〈선데이서울〉, 〈New Kids in Seoul〉,〈On & off〉와 같은 그룹들에 의해 주도되어 간다. 물론 이들은 이미지의 단순복제를 넘어 상상력의 복제까지 꿈꾸는 테크놀로지에 대한 주목, 일상세계와의 접촉, 다양한 매체탐구 및 매체확장 등에 강조점을 찍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들 작업의 주종을 이루는 것이란 과잉 노출된 성에 대한 집착, 광란을 방불케 하는 이미지의 현란성, 통속문화와의 공공연한 짝패현상 따위일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작업을 「그럴싸한 키치」이거나 「저질 자체의 키치」, 그리고 이중 아무 것도 아니라면 「키치를 가장한 키치」로 가늠하는 것도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너무 혹독한 평가인지 모르지만, 이들이 추구하는 키치란 그들이 교육받지 않은 비제도의 작가가 아닌 이상 논리적으로 성취되기 힘들기 때문이며 「비제도로서의 키치」라는 명제 또한 고급모더니즘에 대한 생리적 반사작용으로서의 자리 매김은 가능할지 모르지만, 아직 많은 숙제를 지녔다고 보이는 지식인 문화로서 그 속에서 전망적 좌표를 얻어내기 힘들기 때문이다.

약간 다른 시각에서 보자면, 대중은 키치를, 엘리트는 고급예술을 즐긴다. 통념을 넘어 대중문화는 모든 문화의 주도권을 행사하게 되었다는 인상마저 품게 한다. 실제로 미술관에 가는 사람보다 영화관을 찾거나 텔레비전 쇼를 시청하는 사람이 더 많고 심각한 소설의 독자보다 「야한 소설」의 독자가 더 많은 것을 감안하면, 「문화적 패턴이 여과지에 송송 뚫린 투과성 입자처럼 열려 있다」고 말한 드와이트 맥도날드의 말처럼, 대중문화가 지닌 대단한 침투력을 실감할 수 있다. 앞에서 말한 「키치 돌풍」도 따지고 보면 여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아무리 고고한 예술가라도 대중문화로부터 감염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매스미디어의 영향을 받고 자라난 세대에게 있어서 그 영향의 강도가 어떠하리라는 것은 눈을 감고도 짐작할 수 있다.

이 점에서 키치 세대는 이를 숨기고 품위, 고상함, 체면만을 고집하는 작가들보다 정직하다고 할 수 있다. 적어도 그들은 이러한 사실을 기피하거나 애써 외면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정직성이 비순수, 비정통, 몰가치와 무분별하게 혼동될 때, 또 정직이란, 지배문화를 완전히 분해시킬 때에만 얻어진다고 보는 견해는, 가시적 성과를 가져오는데 유익할지 모르지만, 자칫 자신의 자해행위로 말미암아 예상치 못했던 결과를 자아낼 수도 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양질 문화는 통속문화의 집요한 추격을 받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후자가 쉽게 이해할 수 있고 즐길 수 있는 이점을 지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용이한 접근의 장점을 살려 그것을 막대한 시장에서 키치를 팔고 결과적으로 양질의 문화를 통해 성취해야 할 것을 가로막는다. 그린버그가 경고했듯이, 키치가 지닌 특별한 미적 성질이란 「감상자에게 예술을 이리저리 요리하여 그에게 노력을 줄여주고 그리하여 순수예술에서 반드시 요구되는 번거로움을 피하게 하여 예술을 즐길 수 있는 지름길을 제공해주는 것」이라고 비판했던 것이다. 비단 대중문화 비판론을 지지했던 그린버그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예술적 메커니즘을 거부하는 일부 키치 작가들을 만나노라면 그에 대한 극단적인 처방책이라 할 수 있는 덧없음에의 탐닉, 대중문화에의 무임승차만이 최선책인지 되묻게 된다.

키치 작가들 대부분 컬러 TV 세대인 20代

위에서 육태진의 경우를 살펴보았지만, 키치에서 새로운 미감을 발견하려는 작가들은 컬러 TV를 보며 자라난 세대로 분류됨직한 20대의 작가들을 중심으로 해서 본격 검토되고 있다. 그들은 유치한 것, 게걸스러운 것, 조야한 순수예술을, 자판기에 동전을 넣으면 아무런 예술이라도 고를 수 있듯이 혼성모방의 형태로 소화하기도 하지만, 키치 작품의 유형은 대부분 대중문화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으며 삶의 유희본능, 규제 없는 자아발산, 무원칙·무규준의 틀 안에 운신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따라서 이들의 직업을 종래의 평가기준, 말하자면 완성도, 세련도, 밀도, 구성력과 같은 개념으로 측정하는 것은 무익한 일이 되고 만다. 장형진의 전자오락 프로그램 이미지, 이동기의 폭주족 만화, 이혁발의 에로틱한 상업광고, 김범수의 싸구려 마네킹 두상 따위 앞에서 문화는 혼란스러운 잡동사니와 같은 것으로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것으로 허구적 신념에 둘러싸인 것으로, 모순 투성이의 보따리와 같은 것으로 묘사된다. 이외에도 몇 가지 실례에서 우리는 이 점을 보다 뚜렷하게 의식할 수 있다.

백종옥의 〈인간의 욕구에 대한 가장 현명한 제물들‥‥〉, 〈그림자의 예감〉, 〈손대지 마시오〉 그리고 〈세 아가씨들〉 따위의 작품들은 모두 상품광고와 관련된 것들이다. 그는 「골드스타」,「말보로」와 같은 특정 기업이나 기업의 브랜드를 발췌하여 화면 속에 재구성시킨다. 외제담배 자동판매기의 동전 투입기를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평면에 그대로 전사(轉寫) 시키는가 하면 그러한 이미지에 말 타고 달리는 카우보이의 이미지를 병치시켜 외국자본의 한국경제 침식을 액면 그대로 고발한다. 육태진보다는 현실을 보는 시각이 부정적이지만, 작품의 메시지가 상상력의 여과 없이 널브러지게 흘러나와 맥이 풀린다.

저속성을 고의로 강조하는 작가는 김도경이다. 그는 디즈니 영화사의 흥행성공작인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 만화영화의 포스터를 소재로 삼는다. 만화를 회화의 영역에 과감히 끌어들였다는 점에서 그의 작업은 모험적이며 또 현란한 조명으로 섹스신을 영상화한다는 점에서는 도발적이기도 한다. 그리고 환등기에 의해 반사되어 나온 이미지가 3류 포르노 잡지의 누드라는 점에서 다분히 향락주의적이지만, 병든 관능으로 파멸되어 가는 현대인의 초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교육적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역시 가공 없는 소재(만화, 누드)를 폐수를 방류하듯이 무책임하게 방류하고 있어 보는 이에게 작품 읽기에 대한 깊은 성찰을 저지시킨다.

물론 대중 이미지를 차용하는 시도는 벌써 10년 전 〈현실과 발언〉 작가들에 의해서도 시도된 바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이태호의 〈행복어 사전〉은 분명한 목적의식을 정제된 수사학으로 풀어내는 경우다. 그는 유명 탤런트를 모델로 기용하는 상품광고가 약속하는 행복의 허구성과 광고전략 속에 개입되어 있는 성의 논리를 파헤친 바 있다. 이 경우 단순한 이미지의 차용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상업광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거짓된 약속」의 선전 문구까지 차용하여 상업 메커니즘의 속성을 풍자한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박불똥의 포토콜라주 작업도 이와 같은 맥락 속에 위치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대다수 신세대 작가들에 있어서는 현실 문화를 바라보는 입장이 유보되어 있거나 아예 부재한 편이다. 백지숙처럼 신문지상의 TV 프로그램들 열거하여 영상 이미지에 의해 마모된 정서, 의식을 보여주는 예를 제외하면 대부분은 스스로 예술 자체를 키치의 쓰레기통으로 전락시키는 아슬아슬한 상태까지 이르고 있다. 거의 태반이 성의 문제와 연루되어 있고, 말 그대로의 유치함, 조악함, 저질스러움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림 그리기」를 전통의 낡은 유산으로. 즉 제도미술의 찌꺼기쯤으로 둘러대거나 자신들이 섬기는 「아방가르드」의 저해요소로 치부하는 등 역논리를 펴는데 혀를 내두를 뿐이다. 말하자면 이들은 키치가 소비자본주의로 인해 멍든 일상 생활계를 반영, 직시할 수 있을 것으로 믿지만, 그들 스스로 상품사회 및 성의 포로가 되어 있다는 점을 은폐하면서 「문화비평가」인 양 행세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로 일어난 것은 예술의 자진반납이요. 관능에의 예속인 동시에 눈에 띄는 것이라면 닥치는 대로 집어삼키는 대중문화에의 투항임이 두말할 것도 없다.

키치, <현실과 발언〉의 「도시와 시각전」이 진원지

우리는 여기서 키치가 왜 이토록 요란하게 법석을 떨게 되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또 그것의 진정한 효용가치는 무엇인가를 묻기 위해 그 진원지를 찾아 나서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이러한 소비사회의 이미지에 대한 접근이 처음 시도된 것은 1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도화된 예술로부터의 탈피를 모토로 삼아 출발한 〈현실과 발언〉은 제2회 그룹전을 롯데화랑에서 「도시와 시각전」이라는 주제전을 꾸몄는데 이때 이들은 주된 관심사를 대략 생산에 의한 대량소비의 제반 사회적 현상에서 찾았고 이런 자신들의 의도를 한층 명료화시키기 위해 다음과 같은 취지문을 발표했다.「격심한 도시화의 혼란 속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이에 대한 미술적 반응이 거의 없어왔다는 것은 우리 주변의 기이한 현상 가운데 하나다. 이 말은 빌딩들이 늘어선 큰길이나 주택가의 정경을 그린 그림 따위가 없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 이상을 넘어서서 도회적 삶의 핵심에 파고 들어가고자 하는 작가로서의 의식과 시선이 결여되었다는 뜻이다… 고개를 돌려 외면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보는 용기 있는 시선이 요청된다. 도시 자체가 바로 하나의 거대한 형상이요. 스펙터클이며,「자연」이다. 도시화 이전의 자연은 도시의 배경으로서만, 공원으로서만 존재한다. 도시를 무턱대고 받아들이거나 또는 배척하는 것이 문제의 해결방법이 아니다. 이미 도시는 우리 외부의 풍경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일부이기 때문이다.」(현실과 발언.「도시와 시각전」 1981년, 서문 중에서)

〈현실과 발언〉 그룹은 자신들은 기획전을 단지 「도시화의 혼란 속에서 (‥‥)이에 대한 미술적 반응」에 두었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소비사회의 이미지가 어떻게 미술작품에 영향을 주고 있는지, 또한 고급예술과 대중문화의 관계가 대립적이어야 할 지 아니면 보완적이어야 할 지와 같은 문제까지 언급하지는 못했지만, 전체적으로 미술이 산업화의 구체적 현실에 주목할 것을 요구했다는 점에서 형식적 획일성에 구금되었던 추상 미술에서 해방될 수 있는 하나의 전기를 마련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 점은 팝아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확인된다. 그들은 종래의 청교도적 추상미술에 대한 부정과 함께 고도로 발전된 매스 미디어의 사회 속에서 미술이 어떻게 그것에 반응해야 하는가를 보여 주었다. 팝 아티스트들은 매스 미디어가 그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작품마저 규준화 된 레퍼토리 속으로 흡수한다는 점을 직시하면서 이러한 범주 안에서 자신들의 영역을 넓혀가고자 했다. 그리하여 평범한 것, 예사로운 것, 일상적인 것은 작업 속에 들어왔고 이와 상투적 도상(clicho)이 지닌 가치를 열린 시각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물론 그들이 잡지표지나 광고판, 만화 따위로 표상 되는 상투적 도상에 절대적인 미적 가치를 부여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에게 상투적 도상은 「시대의 기호」(Tilman Osterwold)로서, 다시 말하면 한편으로는 고급 모더니즘에서 구제되지 못했던 부분을 재평가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소비사회의 문화상황을 지시하는 담화적 수단으로 기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때 그들에 의해 시도된 소비사회의 모습이란 곧이 곧대로의 재현에 그치는 것은 아니었다는 점을 강조해야 할 필요가 있다. 생활세계의 허구성을 각성시키고자 했던 팝 아티스트들이 고의로 클리쉐, 포토콜라주, 극적인 대비 따위의 색다른 수법을 활용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이것은 기존 매체를 왜 인용하느냐 하는 근본 이유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만일 대중 매체에 무분별하게 소개되는 상업광고가 수용자의 입장과는 무관하게 주입식으로 경험되는 것이라면, 그리하여 상품광고의 목적을 기능적으로 수행한다면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올바른 커뮤니케이션」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대중문화에서 흔히 발견되는 이러한 소통현상은 수용자에게 일방적인 주입만을 강요할 뿐이기 때문이며,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전도된 현실을 보여줌으로써 섹스와 유흥심을 조장할 뿐이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서 작가의 재현적 재구성의 필요성이 요청되는 것이며, 기존 광고나 대중매체의 이미지가 제공하는 「허상」의 해체를 통한 새로운 의미전달 과정을 밟아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의 경유가 결국 주어진 현실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촉진시킨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즉 소비사회의 모습은 이렇게 됨으로써 도상 속에서 「올바른 커뮤니케이션」의 가능을 수행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교환가치로 전락하는 고급예술의 운명

그러나 상업 메커니즘이 복잡하게 사회의 모든 영역에 침투해 있고 장악하는 상황에서 과연 「올바른 커뮤니케이션」이 실현될 수 있는지는 미지수이다. 광고물에 의한 이미지들은 지위향상을 노리는 대중들에게 늘 「사회적 지위, 자존심, 안정」과 같은 꿈들이 소비를 통하여 실현될 수 있음을 공약하고, 그럴수록 새로운 소비자들은 보다 많은 허영심과 사치욕구를 충족시키려 들면서「스펙터클의 사회」(Guy Debord)를 가슴 설레며 동경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장애요인으로 지적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기대하는 고급예술의 현실견제기능도 이제는 그처럼 낙관할 수만도 없다는 점이다. 고급예술마저 사용가치를 잃고 일개의 교환 가치로 전락해 가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것은 유명작가의 작품이라면 무턱대고 사들이는 졸부들의 행태처럼 원작을 보지도 않고 「좋겠거니」하는 대중심리에서처럼 기호가치로 변질되어 간다. 즉 어느 유명 패션디자이너의 상표가 붙은 상품이라면 거들떠보지도 않고 구입하듯이 고급예술에서도 그러한 현상이 태연하게 일어난다. 일개 명성이 질적 가치를 판가름 짓는 그런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 경우 예술이 지녀온 사용가치, 즉 용도와 기능을 갖춘 모습은 자취를 감추고 「투자」와 「재산가치」 그리고 이름 있는 작가의 작품소유로 신분상승효과를 노리는 「과시의 허위의식」이 한층 가중될 것이라는 것을 쉽게 예측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키치로서의 대중문화를 상대로 한 「진지한 예술」의 싸움은 예술 자체의 생명력을 부지하기 위한 시험이기도 하며, 넓게는 예술적 활로를 트기 위한 「한판 승부」에 다름 아닌 것처럼 보인다. 또한 여기에는 예술 자체의 출구 찾기를 향한 비상한 각성이라는 뜻도 담겨 있지만, 대중적인 상업 이미지가 내세우는 「허위공약의 폭로」를 통한 대중의 정직한 현실의식이라는 중차대한 문제도 내포되어 있음은 두말 할 것 없다. 미디어와 패션, 팝송과 쇼핑 몰, 온갖 광고물과 스포츠가 판치는 「새로운 사회」의 「새로운 소비형태」속에서 과연 예술이 좌절하지 않고 당당하게 응전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 이 막막하고도 어려운 문제가 우리 코앞의 문제로 다가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