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르포 / 제 16회 서울연극제 공식 참가공연 총평

'92 서울연극제를 갈무리한다




김윤철 / 연극평론가, 세종대교수

올해로 서울 연극제는 16회째를 마감했으니 이제 성년의식을 치를 나이도 머지 않았는데 아직도 서울 연극제는 예술적으로나 상업적으로 이렇다 할 성장을 보이고 있지 않다. 한국 연극이 발전하는데 중요한 구실을 할 수 있는 서울연극제가 올해 또 한 번 필자의 기대를 배반했지만 평자로서 기록을 해야겠기에 공연된 순서를 따라 되돌아 보고자 한다.

1. 핀터레스크한 구성 완성도는 미흡

·「누군들 광대가 아니랴」

신인 박평목이 쓰고 중견 연출가 김도훈이 연출한 이 작품은 핀터레스크한 구성을 연상시키면서 현대인의 삶을 감시하는 자와 감시받는 자의 대결구도로 집약한다. 그런데 감시하는 자는 무대 바깥에서, 또는 주인공 형우(윤여성)의 마음속에서만 존재한다. 따라서 감시하는 자의 존재를 유일하게 주장하는 형우와 무대 위에서 생활하는 주변 인물들, 즉 과거가 있는 듯한 아내(방은진)와 신문기자인 친구 기철(이찬우) 등이 감시자의 존재여부를 놓고 극적 갈등을 구축한다.

극은 형우가 보이지 않는 집단감시자들의 폭력에 대항하다 굴복하면서 사회로부터는 물론 아내와 친구로부터도 소외되기까지의 과정을 형상화하고 있는데, 이런 구성으로 미루어 보아 지배집단의 권력(폭력)앞에 자기정체를 상실당하는 현대인의 실존을 정치화 한 것이 작품의 주제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러한 주제는 극에서 확연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작가가 의도적으로 무대위의 상황을 모호하게 가져가기 때문이다. 결국 작가는 모호하게 가져가기 때문이다. 결국 작가는 이와 같은 불확실성을 현대의 부조리한 리얼리티로 이해하고 있는 셈이다. 작가 박평목은 간간이 자의식을 드러내기는 했지만 신인으로서는 보기 드문 언어 표현력을 과시했다. 좋은 귀를 갖고 있음이 틀림없다. 또한 극중인물들을 흥미롭게 창조하고 유지시키는 능력도 뛰어나다. 다만 형우의 증언을 의심하는 모든 이를 대변하는 기철의 성격창조가 형우에 비해서 너무 부실했기 때문에 두 친구간의 대립이 힘을 갖지 못했다.

작가는 특히 부조리주의자들의 세계관과 해롤드 핀터의 극구성에 영향을 받고 있는 듯 싶은데, 핀터를 비롯한 많은 예의 부조리극작가들이 오늘날 그들의 부조리한 세계관을 더욱 더 사실주의적으로, 분명한 컨텍스트안에서 제시하는 경향이 증가하고 있음을 주목하기 바란다. 이를테면 의사 소통의 불가능성조차도 의사 소통이 가능한 언어로 표현한다. 연극의 속성상 관객을 배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극을 속도 있게 이끈 김도훈의 연출은 작가의 의도를 충실히 섬겼으나, 정당화되지 못한 섹스의 표현이 과도하여 행동의 초점을 흐렸다. 아내역의 방은진이 절제된 내면연기로 믿음이 가는 역창조를 이룩한 반면 형우역의 윤여성은 광잉연기로, 기철역의 이찬우는 과소연기로 인물의 초목표를 실현하지 못했다.

2. 일관된 주제 눈길, 극적 구성은 미흡

·「이방인들」

이방인들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끈질기게 관심을 가져온 중견극작가 이재현이 네번째로 그 포로들의 문제를 다룬 작품이다.

6·25 당시 인민군 중위였던 연기섭(이호재)은 강우집 대좌(김종칠)와 함께 중립국 포로로서 인도의 뉴델리에 정착하여 무국적자로서의 새 삶을 개척한다. 강우집이 망향의 일념으로 서울을 방문하던 중 뇌졸중으로 객사하여 심한 허탈감에 빠져있던 연기섭에게 남한과 북한의 공판원들이 접근해 온다. 그러나 연기섭은 무국적자이기를 고집한다. 결국 그 고집은 양미혜(임수아)라고 하는 남한 정보부의 미인계 앞에 녹고 만다. 사랑에 취해 남한에서의 삶을 한창 꿈꾸고 있을 때 연기섭은 북의 공관원으로부터 양미혜의 정체를 폭로받고 또 다시 무국적자로서의 삶에로 복귀한다. 그러던 중 가족들이 월남하여 서울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오랜 번민 끝에, 그는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서울행을 결심한다.

작가 이재현은 주제를 연극적으로 효과있게 구성하는 데 실패했다. 우선 극이 복잡화의 과정으로 진입하기까지가 너무 길고 완만하여 흥미의 촉발과 유지라는 극 구성의 기본조건이 충족되지 않았다. 게다가 송태희 기자(원근희)의 실크로드 취재를 둘러싼 서브플롯이 극의 주제를 보완해 주지 못하고 오히려 극의 진행을 방해했다. 무엇보다 연기섭의 주변인물들이 인간적인 흥미를 유발시킬 만큼 살아있게 창조되지 못했다. 작가자신이 아닌 제3자가 연출을 맡았더라면 위에서 지적한 여러 결함들이 사전에 보다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을까 싶다. 연기섭역의 이호재가 단연 돋보였지만 그의 연기가 늘 그렇듯이, 어딘지 내재적인 서사성이 있어 관객의 감정이입을 차단하고 있었다. 귀한 배우 이호재가 극복해야 할 과제이다.

3. 시사성 돋보이나 교훈극 묘미 못살려

·「청계마을의 우화」

원로극작가 차범석의 이 작품도 정보 사터 사기사건과 같은 희한한 행각이 가능한 오늘의 황금만능적 세태를 꼬집은 시사극이다. 극은 청계마을이라는 어느 두메마을의 한 가정을 무대로 하는데, 그 마을이 댐공사로 인하여 곧 수몰지구가 될 거라는 정보를 장남 영국(문희원)이 가져오면서 가족들이 고향을 지키자는 쪽과 소문이 퍼지기 전에 팔아서 실리를 챙기자는 현실파로 갈라진다. 결국은 막내아들 정국(나재균)이 정보의 사기성을 밝혀냄으로써 고향을 지키게 되는 해피엔딩이다.

작가의 초점은 이야기의 전달에 있다기보다는 사건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일부 가족들이 노정하는 추악한 물질주의를 고발하는 데 있다. 이 작품도 앞의 이방인들에서 지적했던 유사한 문제점들을 대부분 나눠 갖고 있다.

첫째, 아버지(허현호)와 장남이 충돌하면서 극이 비로소 발전하게 되는데 이 공격점에 이르기까지 소요된 시간이 거의 20분이나 되었다. 게다가 극이 분명하게 복잡화과정에 진입한 뒤에도 연극적으로 별달리 흥미롭지 않은 수많은 이야기들이 삽입되어 극의 흐름을 정체시켰다. 결과적으로 인물간의 갈등이 점층적으로 축조되지 못했다.

둘째, 인물창조가 도식과 표피에 그쳤다. 교훈극의 묘미는 인물들의 선악이 분명한 경계를 긋지 않고 혼재되어서 설령 악쪽에 기운 인물로부터도 얼마만큼의 인간적인 매력을 느낄 수 있는 데서 찾아질 텐데, 이 극에서는 장남과 차남 상국(김명중) 및 그 부인들 (윤광희, 이은향)이 단세포적인 물질주의자들로밖에 그려지지 않아 관객이 어느 편에 서야 할 것인지에 대해 전혀 고민할 필요가 없었고 따라서 극의 결말도 너무나 자명해 보였다.

어머니역의 박승태가 상투적 연기의 유혹을 물리치고 주어진 환경에 충실, 강한 주의집중과 분명한 목표설정으로 인상적인 역창조를 보여주었다.

4. 연출의도냐 작품이냐, 일관된 연극 논리 절실

·「영자와 진택」

이 작품은 칠산리 이후 극작가 이강백과 연출가 정진수가 다시 만나 인간의 구원문제를 다룬 메타드라마다. 흥미로운 것은 극작가와 연출가가 전혀 상반된 구원관을 갖고 제작에 임했다는 사실이다. 이강백은 독실한 크리스천으로서 인간보다는 하나님에게 궁극적인 기대를 갖고 있으며, 정진수는 스스로 무신론자임을 주장하며 하나님이 아닌 인간에게 모든 기대와 희망을 두고 있다. 그러니까 다분히 구원이라는 종교적인 문제를 놓고 신앙인과 무신앙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것인가 하는 문제는 흥미로울 수밖에 없다.

무대는 어느 소년감화원, 재정난을 극복하기 위해 원생들의 가족과 지역 유지들을 모아놓고 모금을 위한 연극공연을 한다는 것이 극 구성의 바깥 틀이다. 그러나 이 틀은 극의 처음과 끝을 신호해 줄뿐이고, 극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중간의 극중극은 이 세상을 축약한 봉제공장에서 원생들이 근로자가 되어 선과 악, 의와 불의 사이에서 갈등하고 투쟁하는 과정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인간의 선과 의에 대해서 낙관하는 공장장 진택(신종주)과 그것을 철저히 불신하는 감독(홍성수)은 진택의 애인 영자(윤정원)의 소유권 내기를 한다.

즉, 그녀가 물건을 훔치면 그녀는 감독의 처분에 맡겨지며, 그렇지 않으면 진택은 자기의 이상대로 공장을 운영할 수 있다는 것이 게임의 조건이다. 이러한 설정이 자못 작의적으로 해석될 위험이 없지 않으나 작가는 감독과 진택을 배다른 형제로 설정하여 사실은 두 인물이 한 사람의 양면성을 각각 대표하고 있음을 강력하게 시사하므로써 설정상의 무리를 극복한다. 영자는 결국 실제로 훔치지 않았으면서도 동료들을 위해 그들의 죄를 뒤집어쓰고 희생양이 되어 진택으로 하여금 패배를 맛보게 한다.

여기까지는 종교관이 전혀 다른 극작가와 연출가가 불안하지만 그런대로 조화를 이루어 나갔다. 그런데 작가는 패배한 진택이 절망을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선임공장장들과 똑같은 타락의 길을 걷고 오로지 영자만 외로운 희생양으로서의 삶을 마감하면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케하므로써 기독교적 대속에 의한 구원의 가능성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더구나 마지막 장면에서 영자는 복숭아 나뭇가지로 피투성이가 되게 매질을 당하는데, 이는 우리의 민속적인 이미지를 차용하여 예수의 십자가형을 재현한 것에 다름아니다.

반면에 연출자 정진수는 진택이 비록 선임공장장들처럼 술 취해 비틀거리기는 하지만 인간의 선과 의에 대한 신념을 포기하지 않은채 쇠사슬에 매달린 영자를 복숭아가지로 때리는 역할을 맡기므로써 기독교적 구원보다는 인간에 의한 인간구원이라는 실존주의적 결론을 유도하고 있다. 그러나 연출자의 결론은 무리스러웠다. 왜냐하면 진택이 술취해 비틀거린다는 것은 그의 타락과 패배를 암시하는 것인데, 기껏 그를 시각적으로 선임공장장들과 일치시켜놓고는, 그만큼은 선임자들과 달리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지 않음을 강조하여 영자에게 회개의 채찍까지 가하게 했기 때문이다.

결국 극작가와 연출가의 존재론적 견해차이가 끝내 극복되지 못하고 갈등 요인을 그대로 남겨둔 채 병치되었기 때문에 연출자의 친절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극의 결말이 모호에 빠지고 말았다. 요컨대, 연출자는 작가의 의도나 내러티브를 충실히 따르던지, 아니면 작품이 자신의 인간관과 세계관을 섬기도록 충분히 수정하여 일관된 연극적 논리를 확보했어야 했다.

인간사회의 계급을 세 층으로 나눠 시각적으로 정치화한 무대가 기능적이었고, 많은 등장인물들을 깔끔하게 지휘한 연출자의 무대구성력이 돋보였다. 윤정원, 이윤미, 최은미, 강애심, 강지은 등의 중견 여배우들이 극적 상황에 충실하면서 인상적인 앙상블을 보여준 것이 좋았다. 남자연기자 중에서는 박봉서가 오랫만에 적역을 맡아 무능력, 무기력, 무관심한 관리인 역을 잘 소화해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글쓰기면에서 그의 역이 연극적으로 충분히 정당화되지 못한 것이었다.

5. 소재의 상투성 극복하는 치밀한 구성 미흡

·「거울 속의 당신」

농촌을 배경으로 현실문제를 즐겨 다루던 노경식이 이 작품에서는 색다르게 무대장소를 서울의 강남으로 옮긴다. 장소설정이 이미 주제의 상당부분을 드러내주고 있지만, 작가는 여기서 우리 사회가, 특별히 무슨 신앙처럼 배금주의를 섬겼던 기성세대가 세태를 핑계대고 스스로 선택했던 타락과 비인간화에 의해서 무참히 와해되는 과정을 도해한다.

사기, 협잡, 공갈로 신흥부자가 된 최사장(김인태), 한때 그의 정부였으며 매춘을 바탕 삼아 여류사업가로 변신한 오여사(김민정), 두 사람은 초라한 과거를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 재력을 바탕으로 곡예를 떨치며 상류사회로 진입한다. 극은 뜻밖에 최사장의 아들 석진(심영민)과 오여사의 딸 수영(김경애)이가 사랑에 빠져 결혼을 승락해 줄것을 요청해오면서 급전한다. 최사장과 오여사는 서로의 부끄러운 과거를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두 젊은이들의 순수한 사랑을 필사적으로 막는다. 젊은이들은 끝내 가출을 하고, 오여사는 자살을 하며, 최사장은 무너진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이 극은 극적인 요소들을 많이 갖고 있다. 문제는 소재 자체가 너무 상식적이라는 데 있다. 이런 상투적 소재가 어필하기 위해서는 극 구성이 빈틈없이 치밀하던지 아니면 인물묘사가 잔인하리만큼 진실하여 관객의 심미적 거리를 최소한으로 줄이던지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극은 비교적 이른 공격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복잡화의 과정으로 쉽게 전이되는 구성상의 장점을 획득하고는 있지만, 클라이막스라고 할 최사장과 오여사의 대결이 똑같은 쟁점을 둘러싸고 끊임없이 반복되어서 오히려 극의 정점에서 지체되는 비효과를 나타낸다. 그리고 최사장과 오여사로 하여금 각자의 목표에 충실하게 놔두지 않고 각자 걸어온 길에 대해서 변명을 넘어 평가까지 하게 함으로써 인물묘사에 작가의 의도가 지나치게 드러났고 그 결과 주인공들이 살아있는 인물로서의 흥미를 충분히 유발시키지 못했다.

정글을 연상케 하는 무대장치는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도시생활의 장으로서 적합하게 느껴졌고, 심재찬의 연출은 비교적 안정스러웠지만 젊은 연출가다운 패기가 없었다. 최사장역의 김인태와 오여사역의 김민정은 각각 무감각과 감상으로 유기적 역 창조에 실패했다.

6. 복잡한 구조 시도, 상징의 인위성 노정

·「오로라를 위하여」

김상열이 쓰고 연출한 「오로라를 위하여」는 70년대초부터 미국에서 반체제운동을 주도하던 오유석(정동환)이 6.29선언 이후까지 행동하는 지성인으로서 시대의 아픔을 정면에서 치유하려다가 조국과 동지들과 가족으로부터까지도 외면당하면서 절대고독에 이르는 과정을 추적한다.

극은 3중구조로 되어 있다. 알래스카의 최북단에서 경비행기를 타고 가다 조난사고를 당한 오유석일행에 대한 경찰의 조사가 겉 구조이고, 조난을 당한 오유석이 동행한 상희(김호정)와 더불어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과정이 가운데 구조, 또는 극중극이다. 그리고 이미 죽은 오유석이 마지막 심경을 메모한 수첩을 따라가며 그의 친구인 「나」(김갑수)가 오유석의 행적을 더듬는 것이 안 구조, 또는 극중극중극이다. 구조가 복잡하여 극의 내러티브를 따라가기가 어려울 것처럼 기대되나 작가는 겉구조의 경찰조사와 안 구조의 「나」의 역할을 거의 명목적인 데 극한 시키고 있기 때문에 이야기는 중간구조만 있는 단선구조로 이해되기 싶다.

인간의 가장 현실적인 문제와 씨름하는 인권운동가가 기억 속에 미화된 「과거의 시적 잔영」인 오로라를 찾아 떠난다는 발상은 그 상징의 인위성으로 말미암아 극적인 힘을 많이 잃었다. 그리고 극한상황에 처한 두 남녀 사이에 이렇다 할 관계발전이 형상화되지 못했기 때문에 이야기의 흥미가 크게 훼손된 것도 작품의 두드러진 결함이었다.

신선희의 무대미술은 알래스카의 환영을 창조하는 데는 어느 정도 성공하고 있었으나 극의 중심을 이루는 오유석의 여러 현실장면들의 배경으로서는 부적합했다. 오유석 역의 정동환은 민주투사와 조난자의 역할을 조화시키지 못하고 지나치게 차별화하므로써 혼돈을 일으켰다. 김상열의 연출은 백악관 앞에서의 시위장면처럼 역동적인 장면을 가끔 창조해냈으나 전체적으로 극의 템포를 관객의 상상력 혹은 이해력에 상응하게 처리하지 못했다.

7. 우화에 내포된 상징적 사실성의 간과

·「선녀는 땅위에 산다」

민화 「나뭇꾼과 선녀」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많은 작가들이 고전, 전설, 신화, 민화 등을 오늘의 시간과 공간 속에 대입하여 시사성을 찾으려해 왔는데, 그들이 가장 즐겨 사용했던 방법은 이 옛 이야기들로부터 신화적이며 환상적인 요소들을 제거하고 그 대신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상황을 설정하여 현대인의 의식과 시대정신에 호소하는 것이었다. 작가 김영무도 같은 맥락에서 이 민화를 손댔다. 즉, 선이 존재하고 선행이 가능했던 아득한 시대를, 선이 조롱 받고 경멸을 당하는 이 시대로 환치하고서 이야기를 진행시켜 본 것이다.

선녀는 산지기(권성덕)의 딸 산희(오지연)로 둔갑한다. 목욕하는 선녀의 옷을 훔쳐 그녀를 아내로 삼는 메인 에피소드는 완전히 해체된다. 즉, 산회를 탐내는 마을 청년이 목욕하는 산희를 겁탈하려 할 때, 바로 칠석(손병호)이가 달려들어 그녀를 구출하고, 그 보답으로 산희는 칠석이를 사랑하게 되면서, 산희의 순정과 칠석이의 의리가 주변 사람들의 탐욕, 정욕, 악의에 의해서 희생당하는 것으로 끝난다. 「선녀님, 이제 다시는 이 땅에 내려오지 마세요!」라고 외치는 칠석이의 절규는 악이 승리하는 이 시대에 대한 작가 김영무의 절망을 대변한다.

원래 작가는 나무꾼을 해설자로 만들어 이야기를 우화형식으로 구성하면서 선악의 문제를 정치화시켰었다. 그런데 연출자 김완수는 그에게서 해설자라는 서사적 기능을 빼앗고 산지기로부터 사슴을 훔쳐내는 박서방(마흥식)이라는 1차원적 인물로 축소시켰다. 여기서 이미 드러나듯이 연출자는 더욱 더 사실주의적인 맥락으로 이야기를 구술코자 했는데, 이것이 결국 공연의 가장 치명적인 결함이 되고 말았다. 등장인물들이 사슴들과 대화를 하는 이야기는 어차피 우화적일 수밖에 없다. 오히려 우화성을 부각시킬 때 그 속에 내재된 상징적 사실성이 더 잘 드러날 것이고, 또한 시간과 공간과 상황의 논리적 구속으로부터 해방되어 관객과의 지적인 의사소통이 훨씬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박서방과 한 패가 되어 도둑질을 했던 산지기의 아들(이영석)이 아버지로부터의 힐책이 극적으로 누적되지 않은 상태에서 칠석이한테 거짓자백을 강요하다가 끝내 그를 죽인다는 결말처리는 연극적 상식과 미학을 너무나 이탈한 처리였다.

험준한 산 속의 배경보다는 공연의 시작과 끝에 잠깐 보여줬던 도시적 배경이 극의 장소로 오히려 더 적합했을 것 같았다. 권성덕의 성실한 연기는 인상적이었다.

8. 주제의 혼돈, 현대화의 명분 못살려

·「트로이의 여인들」

유리피데스의 원작을 김창화가 번안하고 연출한 「트로이의 여인들」도 고전을 현대화한 또 하나의 예다. 번안자 스스로 밝혔듯이 원전이탈이 그다지 크게 눈에 띠지 않았다. 신들의 존재를 없앤 것, 헬리콥터의 음향효과를 사용한 것, 특히 남자 점령군들의 의상을 공수부대군복으로 가져 간 것, 핵무기에 의한 파멸을 언급한 것 등등의 파편적인 현대화 장치가 거의 전부다. 이 정도의 변화를 위해 굳이 번안이 필요했는지 의문이다.

현대화의 명분은 시간적인 현재화와 공간적인 지역화를 통해서 고전의 시의성을 발굴하자는 데 있을 것이다. 사실, 원작이 담고 있는 여러 주제들, 즉, 민중의 피를 담보로 한 정치인들의 사사로운 전쟁놀이, 남녀간의 사랑과 증오, 용서와 복수, 지배자의 피지배자의 갈등, 여인들의 종족번식본능, 인간과 신의 관계 등등은 우리의 역사 가운데에도 늘 발견되는 인류 보편적인 현상이다. 보다 전격적인 시공상의 한국화 작업이 이루어졌다면 연출자가 의도했던 대로 관객과의 거리가 많이 좁혀졌을 것이다.

무대만들기에서 가장 미흡했던 부분은 정복자와 피점령자 사이에, 치자와 피치자 사이에, 아군과 적군 사이에 시각적 구분이 이루어지지 않아 그 대립관계에서 찾아지는 주제들이 자주 혼돈 속에 묻힌 것이었다. 그리고 연출자 겸 번안자가 시도했던 「격렬한 감정의 표현」을 남녀배우들이 모두 한 가지 방법, 즉 소리 높여 울부짖는 것에 전적으로 의존했기 때문에, 공연이 시작된지 얼마 되지 않아서 배우들의 연기가 예측 가능해졌고 결과적으로 극적 상황에 관심과 흥미를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시각적 상상력과 다양한 강조법이 무대만들기에서 얼마나 중요한가를 새삼 느끼게 해준 공연이었다.

멘탈리티 벗어나는 제도개선 시급

서울연극제가 연극계 최대의 행사이면서 예술적 빈곤과 관객의 외면이라는 악순환에서 헤어나지 못해 연극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근본적인 치유책이야 물론 연극인들의 자질 향상을 위한 열정적인 훈련에서 찾아질 것이다. 그렇지만 이 연극제에 현재 적용되고 있는 반예술적이고 관료적인 운영방식이나 제도를 개선하는 것도 단기적인 부양책으로서 충분히 고려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필자는 기본적으로 경연대회라는 멘탈리티에서 벗어나 축제성을 회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므로 그 실현을 위한 개선책을 두 가지만 제시해보겠다.

첫째, 참가작 전체를 실연심사로 선정하는 것이다. 이는 우선 지원금을 목표삼는 졸속제작을 방지해 줄 것이다. 서울연극제와 관계없이 각 극단이 충분한 준비기간을 갖고 자체공연을 마련할 때 연극예술적으로는 물론 연극 산업적으로 보다 바람직한 제작이 이루어지지 않겠느냐는 생각이다.

모든 참가작을 실연심사로 결정할 때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가장 큰 효과는 그것이 희곡쓰기의 이상적인 방법론을 제시하고 그 실천을 유도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점이다. 연극은 철저히 공연예술이기 때문에 현장에서의 실습과 체험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한국의 극작가들이 타 장르에 비해 낙후를 면치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전속극단을 갖고 있지 못한 데 있음을 감안하면 이 제안의 배경이 쉽게 이해되리라고 생각한다.

둘째, 한 극단의 연속 3회 이상 참가 금지를 규정한 조항을 폐기하는 것이다. 물론 이 조항을 만든 궁색한 사정을 짐작 못하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예술에 기회균등이란 있을 수 없다. 뛰어난 집단이 특혜받는 것을 탓해서는 안된다. 연극인들 자신의 자질향상을 위해서도 그렇고 애꿎은 관객을 위해서도 그렇다. 예술이 발전되기 위해서는 적자생존의 원칙이 철저히 지켜지지 않으면 안된다.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의 평준화도 질의 하향을 가져왔는데, 선택된 소수의 예술작업이 기회균등이라는 미명하에 무차별 취급을 당할 때 연극수준의 하향평준화는 불가피해진다. 서울연극제에 관객의 반응이 미온적인 까닭이 이 반예술적인 제도와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