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특집 / 미술

지성에 대한 우리의 관심




이재언 / 미술평론가, 서울시립대강사

문화 각 방면의 출판붐을 타고 미술 분야에서도 많은 책들이 최근 쏟아지고 있다. 특히 우리 미술계가 90년을 지나면서부터 일명 포스트모더니즘 증후군을 둘러싸고 야기된 논쟁이 가열되면서, 많은 전환기의 철학이나 미학 및 미술이론서들이 출간되어 학생들이나 작가들에게 큰 호응을 얻기 시작하였다. 일각에서는 지적 유행이니 사치니 하는 비판도 있지만, 어떤 반응이 있다는 것은 우리 시대의 지성이 무언가 고뇌하고 있음을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비판적이든 우호적이든 그 논의들이 미친 영향은 새로운 세계관에 대한 눈을 뜨게 하고 종래의 가치질서를 새로운 시각에서 보게 하는 나름대로의 기여가 인정된다.

그러나 이러한 붐이 이제는 어느 정도 소강상태에 접어드는 느낌을 준다. 그런 가운데서도 두드러지는 것은 다양한 주제의 내용들이 다루어지고 있다는 점과, 다시금 지성의 관심이 우리의 문제로 복귀하고 있는 분위기가 되살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미술계에서 나온 책들 가운데 우리 미술의 상황이나 미술사의 문제를 다룬 책들이 많은 것도 결국 이러한 판도를 전해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동안의 이론적 논쟁을 일단락짓고 구체적인 양식의 문제나 표현의 문제를 다루지 않으면 안되는 지식층의 필요를 반영하고 있는 면도 부정할 수는 없겠다. 최근 몇 달 동안 이러한 지적 동향과 관련하여 출간된 미술관계 서적들 중 눈에 띄는 세 권의 책이 있다.

우리의 미술사 현황을 심층적으로 접근한 책으로는 한림과학원(원장 김원룡)이 주최한 심포지움에서 발표된 논문과 논평을 수록하여 한림과학원이 편저한 「한국미술사의 현황」(도서출판 예정)이 주목되고 있다.

그리고 우리 근대사 속에서의 한국미술을 현장 중심과 자료 중심으로 다룬 「근대 한국미술사의 연구」(이구열 저, 미진사)가 저자의 회갑기념 논문집을 겸하여 출간되었다.

한편 서구의 모더니티와 포스트모더니티가 혼재하고 있는 70년대의 미술이 보여 온 다양한 양식들에 관해 소개하고 있는 번역서「모더니즘 이후의 미술」(Edward Lucie-Smith저, 시각과 언어 편집부 번역, 원저: Art in the Seventies)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한림과학원이 편저한 「한국미술사의 현황」

한국미술사 학계의 중심적인 학자들 14인이 지난 5월 16, 17 양일간에 걸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가진 심포지움의 논문들을 중심으로 하여 수록한 이 책은 몇 가지 면에서 눈길을 끌었다. 우선은 짜임새 있는 진행에 의해 연구범위가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로 안배가 되어 있다는 점이며, 산발적인 자료들이 보다 넓은 독자층을 향해 책으로 묶였다는 점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시각이나 사관들이 부분적으로나마 표명되고 있어 미술사 연구에 중요한 전기를 마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종래의 학술지가 거의 앤솔로지 형식이나 소수 식자 중심으로만 주로 보급되는 회원지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보다 널리 독자층을 형성하지 못했던 것을 감안한다면 상당히 획기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대체로 굵직한 시대의 미술정신이나 혹은 시대별 양식 및 장르에 관한 연구가 비교적 심층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커다란 소득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별도로 지정된 논평자에 의해 논문마다 덧붙여진 논평은 나름대로 독자들에게 논문의 가능과 한계를 입체적으로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신선하고도 의미있는 작업으로 간주된다.

주제를 시대별로 크게 보면 선사시대와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로 나뉘어지고 있는데, 필진 구성을 보면 다음과 같다. 노혁진(한국의 선사미술), 김리나(삼국시대의 불상), 이성미(삼국시대의 회화), 최병현(신라토기), 강우방(통일신라조각론), 김정기(한국 석탑양식의 분석적 연구), 이난영(신라, 고려의 금속공예), 문명대(고려, 조선시대의 조각), 윤용이(고려청자의 기원과 발전), 장경호(고려, 조선의 목조건축), 홍윤식(고려, 조선시대의 불화), 안휘준(조선왕조시대의 회화), 강경숙(분청사기), 정양모(조선백자, 청화백자)등. 모두 면면이 우리 미술사학계의 증진들이다.

이들의 연구 가운데 주목되는 것들을 간략히 소개해 보겠다. 선사시대에 관한 노혁진의 기본입장은 「우리 나라 선사미술의 제 양식은 기본적으로 문화적인 것이고, 따라서 해당문화의 본질과 체제 안에서만 제 의미의 파악과 구성이 가능하다」는 것으로, 총체적 문화사 속에서의 선사연구로의 전환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 눈길을 끌고 있다. 여기서는 선사문화의 성격과 형성 과정에 주안점을 두고 있어, 우리의 선사가 가지는 통시적 보편성을 규명하고자 하는 데로 눈을 돌리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물론 미술의 양식 자체를 체계화하고 개념화하는 데는 다소 소홀히 하고 있는 점은 있어 보인다. 이런 점은 모든 건축이나 축조물과 같은 것들이 총체적으로 심미적인 함수관계를 필연적으로 가질 것으로 전제하고 있는 데서 잘 나타나고 있다. 또한 여기에서는 한국의 선사가 가지는 지역적 조건의 규명을 미제로 남겨 놓고 있다는 논평자의 지적도 음미할 만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안휘준은 이러한 총체적 사관에 대해 경계하는 입장을 표명하고 있어 좋은 대조를 이룬다. 회화의 화풍이나 양식은 사상에 의하여 결정되기보다는 작가마다의 미의식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고자 하는 것이 안휘준의 기본입장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렇듯 역설함으로써 보편사로서의 양식사가 가지기 쉬운 독단과 편향에 제동을 걸고 있는 것이다.

한편 김리나는 종래의 삼국시대 불상을 연구하는 방식이 삼국별로 이루어진 것을 지양하고 양식의 계보별 정리에 치중하여 새로운 불상연구의 장을 열고 있는 것 또한 이 책의 소득이라 할 수 있다. 이 밖에도 대부분의 논자들이 현장답사와 발굴의 실증과 고증을 중심으로 전개하고 있는 한국미술사 연구는 아주 귀중한 연구자료로 평가될 만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기대하기는 무리한 요구일지도 모르지만, 다음과 같은 사항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몇몇 사람들의 새로운 시각과 입장의 제시라는 측면은 소득이라면 소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가장 중요한 미술사의 철학이나 방법론의 빈곤이 역력하게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고증의 풍부함에 비해 그것의 의미와 가치를 풍부하게 해석해 낼 수 있는 철학과 방법론이 없다는 사실은 미술사 연구에 아주 심각한 모순이 된다. 원론적인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역사란 단순한 사실의 열거만이 아닐진대, 심층적인 해석작업의 중요성이 학계 전반적으로 환기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바로 이러한 방법론의 정립이라는 과제가 선결되었을 때 우리에게 항상 문제가 되고 있는 식민사관이나 체제수호사관 등을 척결할 수 있는 요체가 됨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현장과 자료 중심으로 다룬 「근대 한국미술사의 연구」

저자인 이구열은 일찍부터 「한국근대 미술연구소」를 설립하여 남달리 개화기를 전후로 한 한국의 미술에 미술사적·비평적 연구를 하여 많은 기여를 해 왔다. 우리의 한국미술은 대체로 추상일변도의 현대미술이 지배하는 구조로 말미암아 「근대」라는 미술사적 영역을 별도로 분리하여 차별화하는 모순을 범하곤 하였다. 이러한 근대는 곧 소외의 역사이자 소외의 공간이었던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바로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남다른 열정으로 평생을 바쳐 근대에 대한 연구를 했다는 것은 나름대로 평가를 받을 만한 대목이다.

크게 6부로 나뉘어져 있는 책의 구성은 파트별 소재가 없으나, 요약컨대 1부-근대회화의 발아, 2부-근대미술의 수용, 3부-근대의 거장들(한국화), 4부-근대의 거장들(양화), 5부-근대미술의 특징, 6부-한국미술의 정신적 배경 등으로 열거 할 수 있다. 그 가운데 서양미술의 수용과정과 정착의 배경 등에 관하여 밀도있는 기술을 하고 있는데 상당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근대미술에 있어 한국화의 전통계승과 새로운 활로의 모색에 대한 문제에도 나름대로의 현장감각을 동원하여 맥을 짚고 있다. 특히 기술 방식에 있어 결코 현학적인 용어나 개념을 사용하지 않고 쉽게 내용을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있는 점은 중요한 사항이 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평론집이 그러했듯 보다 총체적이고 체계적인 사관에 의해 미술사를 정리하기보다는 단편들을 묶은 것으로 보다 거시적인 진단이나 전망이 결여되어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즉 시대적 상황에 대한 정확한 분석과 그 맥락에 대입한 의의나 성과들을 종합적으로 다루지 못한 것은 증대한 결함으로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근래에 새로운 민족미술의 이념문제를 다룬 것에 있어 그 모순의 원천에 대한 진단과 전망 및 과제를 너무 피상적이고 안이하게 다루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떠한 그러한 방대한 연구량에도 불구하고 한국적 정서의 본질이나 미감의 원천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를 규명할 수 있는 계기가 주어지지 못했다는 것은 다소 유감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70년대의 다양한 양식 소개한 「모더니즘 이후의 미술」

원저자인 에드워드 루시-스미드는 20세기 전후의 서구현대미술에 대한 쉽고 체계적인 기술로 정평이 나 있는 미술사가이다. 원제에서 밝혀져 있듯 70년대의 서구 현대미술이 처해 있는 인식론적·양식적 전환의 내용을 다루고 있다. 이 책에서 주목할 만한 특징은 다소 60년대를 모더니즘의 끝으로 보고 70년대를 포스트모더니즘의 벽두로 보고 있는 연대기적 도식을 담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70년대의 미술을 60년대 미술의 연장선상에서 보기도 한다는 점이다.

역시 오늘날 거의 무정부주의적인 담론의 혼재와 양식의 혼재 상황의 단초를 70년대로 보는 것이 루시-스미드의 기본적인 시각이다. 특히 종래의 논리와 방법에 이의와 의문을 제기하고 끊임없는 회의와 새로운 미감의 분출을 노출시키고 있는 현상들의 배후를 바로 모더니티와 포스트모더니티의 논의 속으로 이입시키고 있는 것이 주된 특징으로 지목될 수 있다.

대체로 양식의 문제를 많이 다루고 있으나 미학의 본질적 문제를 거의 직관적 차원에서 도출해 내고 있는 점은 그의 탁월한 식견과 감각에 기인한 것이다.

이 책에서 70년대의 주된 양식을 분류하고 있는 것들이 크게 8가지로 정리되고 있다. ①후기팝과 고급취미-대상들에 대한 무절제와 관용을 특징으로 하고 있는 60년대의 팝아트와는 달리 대중문화적 맥락 속에서 신랄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 후기팝으로 규정되고 있다.

한편 고급취미의 아성은 역시 미니멀아트가 구축하고 있으며 그것의 지속이 가능한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②추상회화-70년대에도 회화가 예술에 있어 주도적인 양식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③환영주의미술-추상적 환영이라는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 ④구상회화-특유의 서술성을 기반으로 고급취미에 일격을 가하고 있다. ⑤물신숭배미술과 해프닝-주변미술 혹은 소수의 미술에 많은 관심을 할애하고 있다. ⑥정치적 미술-내용으로의 복귀와 두드러지는 사회적 언급 등이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으로 부각되고 있다. ⑦환경미술과 대지 미술, 기념비적 미술-종래의 제도적 공간을 박차고 나선 미술의 제 환경과의 유기적 교감이 부각되고 있다. ⑧하이테크와 제3세계-과학기술의 진보에 따른 기계의 부조리성을 폭로하는 계기와 문화적 식민주의 현상을 언급한다.

이러한 진단은 대체로 70년대를 다양한 요구가 분출하는 다원주의의 시대로 보는 시각과 일치하고 있다. 결국 70년대는 60년대의 양식들을 부분적으로 계승 혹은 수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자체에서 문제를 발견하여 물음을 던지는 변증법적 지양의 의식을 단면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시기이다. 문제는 이 책이 69년에 썼던 「후기현대」Late Modern의 증보판 형식에 다름없는 성격을 띠고 있는 것으로, 명료한 용어의 정리나 해설이 없는 산문체라는 점이다. 복잡하고 다양한 현대미술의 현상을 이해하기보다는 더 혼란을 가중시키는 역효과가 일반 독자들에게 충분히 예상되고 있다.

특히 이질적인 몇 개의 양식들을 함께 묶어 정리하고 있는데 대한 명확한 설명이 없으며, 작위적인 해석이나 논평도 문제로 지적되지 않을 수 없다.

이렇듯 세 권의 책을 보았을 때 우리의 미술출판 문화가 보이고 있는 실상을 알게 해 주고 있다. 양적으로는 역시 크게 성장하고 있지만 질적으로는 아직 만족스런 수준에 이르지 못하고 있음이 역력하다. 특히 비평이든 미술사든 아직 조직적인 연구소의 프로젝트가 활성화되지 못하거나 혹은 사회 각계로부터의 후원이 미흡하여 필자 구성이 항상 전문연구가보다는 직함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도 문제이다. 또한 각자의 연구가 풍부한 소화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음 또한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한편 최근의 번역서들도 중대한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보통 번역이 시류와 시점을 맞추려는데 급급한 나머지 문장해석의 오류는 물론 중요한 용어의 개념의 정리를 제대로 하고 있지를 못한 실정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역자 자신들이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러한 과정이 없기 때문에 충실한 주석작업을 통해 원저의 내용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전해 주는 것이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비단 미술만의 문제가 아니며, 여기서 소개하고 있는 책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대체로 우리의 출판문화가 아직은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요컨대 저서든 번역서든 혹은 엔솔로지이든 책의 기획단계부터 보다 문화적인 의식을 가지고 독자들을 생각하는 책쓰기와 만들기에 관심을 가져야 할 때임을 강조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