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특집 / 미술

백남준 예술의 이해




이용우 / 미술평론가, 동아일보 기자

미술을 다른 예술 형식과 적극적으로 구분 지으려던 태도는 20세기 초 모더니즘으로부터 연유된 것이나 이것 역시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 미술과 다른 예술의 접목을 「순수성의 침해」로 보았던 것은 19세기 후반의 혼란과정 끝에 획득된 모더니즘의 성과를 개별화하고 독자성을 부여하려던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술이 갖는 축제적이고 놀이의식적인 본질에 밀려 다시 총체화되고 극화(劇化)되면서 예술이라는 동일 공간 속으로 잠입해 버렸다. 조형예술과 공연 예술은 더 이상 서로 다른 것이 아니며 시간과 공간을 각기 다르게 사용하는 포장의 차이일 뿐이다.

모더니즘의 시발로부터 분리되었던 예술의 개별적 의미론이 다시 통합하기 시작했던 1960년대, 플럭서스의 분방하고 총체적이었던 정신성은 그보다 앞서 보여준 다다이즘이나 키네틱 아트보다 더욱 적극적인 것이었다. 플럭서스가 다다이즘으로부터 정신성을 수혈했다는 조심스러운 지적은 예술의 개별화가 이미 일찍이 효력을 상실해 가고 있었다는 부언이며 플럭서스에 앞서 우리는 회화의 조각화, 회화의 모빌화를 이룬 키네틱 아트가 갖는 위대한 퍼포먼스를 기억하게 된다. 비디오 아트를 총체예술의 상징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이는 회화와 조각 퍼포먼스, 음악·건축·연극적 요소를 부분적으로나마 모두 갖고 있는 연계성에서 찾아야 한다.

또 그것이 테크놀로지에 의한 미혹이라 하더라도 비디오 테크놀로지를 예술로 승화시킨 총체적 감각은 창안자, 전달자의 공(功)이다. 백남준에게 붙여지는 여러 가지 호칭들, 이를테면 작곡가·조가가·행위 예술가·화가 등은 비디오 아트의 기능적 표현적 특성과 가장 잘 어울린다는 점에서 비디오 아트를 공개념화시킨 창시자의 자격을 부여받은 것이며, 그것은 백남준의 비디오 예술이 갖는 설득력으로 풀이된다. 이것은 언어예술인 문학 등 문자서술 형식과 공연 예술인 퍼포밍 아트, 그리고 공간예술로서의 조형성, 테크놀로지 아트로서의 미래에 대한 공감대가 동시에 조화를 이룬 것이다.

화제도 풍성한 비디오 아트의 전개 과정

갖가지 예술 형식이 어우러진 비디오 아트의 전개 과정에는 백남준 개인의 생활 이야기에서부터 작업의 진행 과정에 드러난 통합된 화제가 풍성하다. 이것은 오늘날 현대미술의 전개 과정을 10년 단위로 묶어내어 「10년간의 정의」(Definition of Decades)를 과장되게 표현하는 논리적 관념과는 별개의 것이다. 백남준의 작업은 1950년대와 1960년대 또는 1970년대와 1980년대가 서로 다른 형식을 갖지 아니하며 표현과 기능에서 차이를 수반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거의 습관적으로 부여하는 「10년간의 정의」와는 별개의 것이다. 시간은 복제되어 나타날 수 있으며, 그 복제된 시간은 예술의 자율성을 온갖 수사와 의미로 단절시킬 위험이 있다. 가령 지난 10년간의 동향을 「논리는 가고 형식만 남았다」고 말할 때「형식」과 「논리」가 갖는 상반된 의미 전달 구조는 지나치게 극단적이며 비예술적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극히 불완전한 수사학으로 시간의 의미를 과감하게 포장한다. 예술은 해독하거나 개별화하기보다는 감성과 감각, 지각에 의한 자율신경 구조로 파악되어야 하며, 이것은 백남준 예술의 동양적 의미구조를 설정하는데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태리 미래주의자 쟈코모 발라(Giacomo Balla)는 1917년 스트라빈스키의 「불꽃」을 주제로 배우 없이 무대장치만으로 공연을 성사시켰다. 발라는 무대 뒤에서 색채 오르간으로 빛의 움직임을 연출했고, 무대와 관객은 물론 극장 전체를 빛으로 가득차게 했다. 예술의 개별화가 극렬하게 시도되던 모더니즘 초기로서는 상반된 의식의 연출이었다. 다다운동에서는 대중 앞에서 시가 낭송되고 무용·음악이 함께 공연되어 퍼포먼스식 예술, 종합예술로의 회복을 알리는, 다시 말해 초기 모더니즘에 대반 반기를 들었다. 장 팅겔리(Jean Tinguely)는 「뉴욕에의 경의」(Homage to New York)에서 조각이 배우이자 동시에 무대가 되는 키네틱을 통해 동일 공간에서의 축제를 연출했으며, 이는 전후예술에서 예술의 놀이개념을 극명하게 노출시킨 신호탄이었다. 백남준의 예술공간이 우리에게 생소하지 않은 것은 이같은 전례와 선험적으로 연결되었기 때문이며, 예술의 자율성이라는 유전자를 닮아 난 것이다.

백남준이 1986년에 펴낸 자전적 에세이「보이즈 복스」(Beuys Vox)의 맨 앞장에는 매우 토속적 한국인의 생각이 담긴 몇 마디의 고백이 있다.

「나도 이제 쉰에서 다섯이 넘었으니 차차 죽는 연습을 해야겠다. 예전 어른이면 지관을 데리고 이상적인 묘처를 찾아다닐 그럴 나이가 되었으나, 나는 돈도 없고 요새는 땅값도 비싸졌으니 그런 국토낭비계획은 없애고 오붓하게 죽는 재미를 만드는 것이 상책이다.

내 인생의 행운의 하나는 케이지(John Cage)가 완전 성공하기 전에, 보이즈(Joseph Beuys)가 거의 무명 때에 만나 놓은 것이다. 따라서 금세기의 두 연장자와 역경 시대의 동지로서 동등히 교우를 유지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인간적 체취 담은 자전적 에세이「보이즈 복스」

문학적 독백에 가까운 이 글은 백남준의 예술세계와 인간적 체취를 이해하는데 결정적 도움이 된다. 17세 때 한국을 떠나 의지생활 42년, 그의 언어는 한국어·일본어·독일어·불어·영어가 모두 어눌하지만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낸 한국에서의 원초적 기억이 전 생애와 예술의 모태로 작용하고 있음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백남준을 만나본 사람이면 누구나 그의 독특한 예술가적 기질과 빈틈없는 판단력, 그리고 유유자적하는 선비기질에 놀라게 된다. 이것은 테크놀로지를 다루는 작가에게서 예기치 못하는 마력과도 같은 것이다. 이것은 그가 일본의 동경대(東京大)에서 미학(美學)을 전공했고, 완고한 아버지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어린 시절 피아노 도둑 레슨을 받았던 사실, 또는 독일 플럭서스 운동으로부터 초기 뉴욕시대에 이르기까지 활발하게 펼쳤던 퍼포먼스 작가로서의 단련된 기질이 뒷받침되고 있다. 게다가 백남준은 동양학의 본질적 유교사상의 뿌리깊은 가문에서 육신적 체험을 통해 성장했다는 점이 이해의 폭을 넓혀 준다.

비디오 아트 30년을 통하여 작가 백남준을 조명하는 방법은 장르별 분류 방법을 편하게 도입할 수 있으나 이같은 장르상의 분석은 그의 총체적 예술 작업을 자칫 분석적 미학의 카테고리에 억류시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또 각 분류별 탐구는 이미 데이비드 로스(David Ross), 존 핸하르트(John Hanhardt), 에디트 데커(Edith Decker), 볼프 헤르조겐라트(Wulf Herzogenrath), 장 폴 파지에(Jean Paul Fargier), 토마스 켈라인(Thomas Kellein), 마이클 나이만(Michael Nyman), 피에르 레스타니(Pierre Restany), 아키야마 쿠니하루(秋山邦晴), 유루기(萬木), 다카지마(高島)등 탁월한 이론가들에 의해 시도되어 우리에게 백남준 예술의 메커니즘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따라서 이제 백남준 작업의 평가에서 남겨진 몫은 그의 예술의 본질적 근간을 이루는 혁명과 창조자로서의 삶의 궤적을 통해 여행하여 보는 일일 것이다. 다행히도 백남준 작업 속에는 속속들이 이같은 근거를 담고 있으며, 그것이 굳이 백남준 작품이 아니라 할지라도 익명적 동양인의 감성과 유유히 맞닿을 수 있다는 점이다. 이같은 논리적 배경을 전제로 할 때 비디오 아트의 테크놀로지는 서구에서 발현된 것이지만 그것을 매만진 소프트웨어 백남준은 동양인이라는 사실이 오늘날 비디오 아트가 시각예술의 과대포장 시대에서도 명분있게 살아 남는 증거가 될 것이다.

테크놀로지가 예술과 결합한다는 사실은 비록 후기 산업사회에서도 쉬운 일은 아니다. 오늘날 숱하게 쏟아져 나온 예술 속의 테크놀로지들은 대개 시각적 과대 노출이 심화되어 있거나 테크놀로지와 고도 문명사회의 관계를 연결시키는 나열식 방법이 사용되고 있다. 비디오 아트도 그 범주 속에 예외가 아니며, 백남준의 비디오설치나 비디오조각, 멀티 모니터 작업 등 대부분에서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보다 심도있게 지켜보아야 할 것은 예술에서 테크놀로지의 역할에 관한 문제다.

1963년 독일 부리탈(Wuppertal)의 갤러리 파르나스(Galerie Parnass)에서 그가 시도한 첫 비디오 작품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은 불규칙한 TV 조합에 의해 예견된 우연한 시각적 효과를 노리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이것은 텔레비전이 갖는 소비사회의 우상을 해체시키려는 퍼포먼스식 도전이었으며, 그후 그의 비디오 예술은 항상 퍼포먼스식 전개방식을 수반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이는 테크놀로지를 인간적 삶의 알레고리와 해학에 접목시키려는 발상이며 기계와 인간 사이의 메타 커뮤니케이션(meta communicati-

on)으로 풀이할 수 있다. 백남준의 첫 비디오 작업을 통해 우리는 오락기구, TV, 혹은 인간생활의 습관적 우상물을 예술에 끌여들였다는 공감대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보다 물리적인 재료 구실을 하고 있었다는 것, 텔레비전을 입체 조형예술로 끌어들여 미적 대상물로 자리잡게 했다는 사실이다.

TV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사회적 공감대

텔레비전이 작업 소재로 등장한 것은 분명 TV에 대한 또 다른 인식과 사회적 공감대를 불러일으킬 만한 것이었다. 대중의 오락적 소유물로만 여겨졌던 TV는 백남준의 손에 의해 1차적으로 테크놀로지의 단순 기능을 벗어나 예정된 프로그램을 방영하는 「다중에 의한 소유물」에서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백남준은 1960년대 초 TV를 예술작업의 오브제로 다룬 유일한 예술가는 아니었지만 그 외의 누구도 이 매체가 독자적인 예술형식으로 발전하는데 그만큼 기여한 사람은 없다.

백남준 예술의 또 다른 점은 테크놀로지의 순열과 조합을 토대로 한 잃지 않는 균형감이다. 이 균형감은 백남준이 존 케이지(John Cage)나 조지 매키어너스(George Maciunas)등과 어울려 동양적 음감(音感)과 서양적 스케일을 적절히 배합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음악과 퍼포먼스 조각, 비디오 순으로 전개된 그의 작업은 의견상 무작위성, 우연성으로 연결되어 보인다. 우리는 이것을 플럭서스(Fluxus)운동이 지닌 유연한 상호 연관성(transaction)으로 풀이한다.

그러나 보다 깊게 연관지어지는 것은 노(老)·장(莊)의 무위자연설(無爲自然說)에 입각한 무질서 속의 질서와 같은 자연주의 사상과 가깝다. 노자(老子)·장자(莊子)의 무위자연설은 독립된 개인주의나 신비주의로부터 벗어나 자연속의 개체나 사물이 스스로 얽혀 스스로 생존하고 진가를 발휘하는 개체론적 존재의 조화와 같은 것이다. 이같은 접근은 특히 백남준의 미니멀 비디오나 폐쇄회로 작업, 멀티 모니터 인스텔레이션 컨셉추얼 비디오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이미지 영상으로 처리되는 백남준의 시간성·공간성에서도 그러하다.

플럭서스의 개성처럼 백남준은 기존적 유머에 대한 통렬한 공박을 가하거나 기성의 쾌락구조에 대해 반대의견을 제시한다. 1979년에 가진 어느 인터뷰에서 백남준은 「텔레비전이 재미있는 것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오히려 따분한 프로그램을 만들 것」이라고 말했고, 「똑같은 작품을 되풀이하느니 나 자신을 타락시키겠다」고 항변했다. 1964년 9월 슈톡하우젠(Stockhausen)의 「괴짜들」(The Originale)이 공연되었을 때 조지 매키어너스(George Maciunas), 아이오(Ay-O), 사이토 다카코(Saito Dakako), 토니 콘라드(Tony Konrad), 헨리 플라인트(Henry Flynt)등이 소위 문화 제국주의자인 슈톡하우젠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때 백남준과 히긴즈는 작품의 등장인물이었다.

백남준은 슈톡하우젠을 통해 뉴욕 무대에 등장할 기회를 얻었기 때문에 이같은 일은 내심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플럭서스의 내분, 혹은 플럭서스가 더 이상 지탱할 능력을 잃고 내분되어 가는 모습에 대한 데모에 참가했다. 이 데모에 참가한 백남준의 의도는 명확한 데가 있다. 「나는 훌륭한 작곡가는 아니었다. 후진국에서 온 어떤 동양인이 슈톡하우젠의 스타일로 작곡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좋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게 재능이 있다면 그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진 것보다 더 많은 완벽함에의 요구이다. 나는 2류의 슈톡하우젠이 되고 싶지는 않다.」 지난 1982년 위트니 미술관 회고전 직후 그가 뱉어낸 말이다.

음향 기기 및 「조정된 피아노」로 비디오 텔레비전에 관심 가져

백남준이 비디오 텔레비전을 매체로한 예술작업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음악의 시각화 또는 소리의 다변화에 대한 관심에서 성숙된 것이지만, 직접적인 것은 음향 기기 및 「조정된 피아노」(Prepared Piano)등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옮겨간 것이다. 누보 레알리스트인 세자르(Cesar)가 1962년에 「안타고니즘(Antagonismes)-오브제(Objet)」전시회에서 기능이 살아있는 TV 한 대를 받침돌 위에 올려놓은 것이 TV를 첫 예술작업의 미디어로 활용했는데, 이는 예술적으로 TV를 작업에 끌어들인 첫 경우에 속한다. 그러나 이것은 비디오 예술의 명징스러운 출발이 아니라 유일하게 한 번 모니터를 오브제로 사용했다는 기록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또 독일의 볼프 보스텔(Wolf Vostel)이 1962년 텔레비전을 교란하고 영사막 위에 그림을 올려놓아 텔레비전 영상을 가려버리는 이른바 말소(Verwischung)의 원리를 선보였다.

그러나 백남준의 경우는 1963년 부퍼탈의 파르나스(Parnass) 갤러리에서 가진 13개의 상이한 변형들은 전자음악에서 많은 종류의 소음이 지니는 미묘한 차이들처럼 악기 대신 TV 모니터를 받침대 위에 올려놓았거나 TV를 그림으로 막아 「교란과 말소」의 의미를 시도한 보스텔의 시도와는 예술이 지니는 연속성의 문제, 작가의 실험적 과정에서 나타나는 디지털 테크닉의 질에서 엄청난 차이를 지닌다. 플럭서스 활동을 함께 해 온 볼프 보스텔은 한동안 비디오 아트의 원류에 관한 논쟁에서 누가 먼저인가를 주장하는 근거를 단지 작업의 시도 연도에서 주장하였으나 1958년부터 1963년 사이의 작업 내용, 작가 자신의 진술, 그것을 뒷받침하는 당시 동료 딕 히긴즈(Dick Higgins), 에릭 앤더슨(Eric Anderson)의 진술 등이 서로 어긋나 구체성을 인식 받지 못하고 있다.

비디오 아트의 본격적 시작이 백남준이었다는 점, 또는 그 고유의 영역을 깊게 갈아 새로운 경작지를 이룩해 놓았다는 점은 이제 더 이상 논쟁거리가 아니다. 세자르, 보스텔, 백남준은 비슷한 연대에 서로 개성있는 독자적 작업을 실행했다고 볼 수 있으나 이들 작업의 연개성은 별개의 것이고 작업의 맥에서도 상호 연관성이 없다. 일반적으로 예술가들이란 상호 자극을 받게 되어 있고, 특히 플럭서스 작가들 사이에서는 거의 동시대적 메커니즘에 의한 작업방식으로 전개되어 명확한 영역의 구분이 어렵다.

그러나 세자르, 보스텔과 백남준이 딛고 간 길은 겹치는 점이 거의 없다. 다만 1958년에서 1962년 사이, 보스텔이 같은 독일권에서 동일한 미디어를 활용했다는 점이 비디오 아트 생성의 간극을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다. 한가지 명확하지 않은 것은 이같은 논란을 뒷받침할 만한 당시의 자료가 백남준 이외는 없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해 에디트 데커는 「백남준은 보스텔과 공동작업을 한 사실은 없고, 당시 텔레비전 스튜디오밖에는 아직도 비디오가 존재하지 않았다. 또 양자는 텔레비전 카메라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백남준이 13대의 모니터를 구입하게 된 자본은 그의 선친이 마지막 생활비를 보내준 것을 한꺼번에 탕진한 것이었다. 거상이었던 선친의 마지막 송금, TV모니터에 열렬한 재미를 붙이고 있던 백남준, 전위음악의 불규칙한 소음 효과를 비디오의 시각적 패러디로 연결시키려던 의도, 게다가 파르나스 갤러리의 전시 제의 등이 맞아떨어져 그의 예술적 기질은 결국 비디오 아트의 선봉적 전위대로 몰아 넣었던 것이다. 그후 백남준은 비디오 아트의 본격적 창시자란 이름을 얻은 대신 선친의 막내아들로서의 기대를 저버린 전통적 한국사회의 가족윤리에서 멀어졌다. 따라서「백남준 비디오」의 탄생은 1년 생활비라는 육신적 삶을 던진 예술 순교자적 실험 정신에서 나온 것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백남준의 요소 「한국성」

백남준의 작품에 등장하는 동양정신, 그 가운데서도 한국성은 작곡가·행위예술가·비디오 아티스트 등 3개 분야로 개괄하여 관찰할 수 있다. 자세한 것은 후반부에 다시 다루게 되겠지만 우선 작곡가로서는 1947년, 그가 15세이던 해부터 1953년까지의 것으로 한국의 민속음악이 가미된 현대음악과 1953년 엄격하게 일련번호가 매겨진 바이올린 독주 변주곡들, 1957년까지의 「현악4중주」가 그것이다. 그후 그는 기존 음악에 대한 저항과 공격, 샬로트 무어맨(Charlotte Moorman)과의 연주곡 등은 전위적이면서도 실험성이 가미된 상이점을 발견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음악 속에는 한국의 서정성이 담겨 있다. 특히 6·25동란으로 분실된 그의 1946년 첫 작곡 「나의 만가」가 두 번째 곡 「향수」(1947)는 가곡형식에다 느린 산조형식이 가미되어 있다.

1964년 무어맨을 만나기 이전의 그의 음악은 자료의 제한으로 철저한 파악이 어렵다. 또 한국적 정서와 서구의 전위적 요소가 혼재하는 1950∼1960년대 백남준의 음악에 대해서는 더욱 가까이 하기도, 이해하기도 어렵다. 그의 옛 자료는 플럭서스(Fluxus)의 출판물이나 전시회 목록, 알려지지 않은 잡지들에 간혹 실려 있을 뿐이다. 이같은 자료는 백남준 연구에 결정적 증거임에도 구체적으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이 자료들은 플럭서스 작가 모두가 그러하듯 대체로 종이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 고작이어서 지금 연주되어질 수 있다거나 재생될 것은 아닌 하나의 회상과 기억일 뿐이다. 그것의 연주자가 바로 백남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백남준의 비디오에 관한 언급으로는 1960년대 그의 「확장된 교육」이란 논문에서 치밀하게 드러난다. 이 논문에는 이미 비디오를 통한 교육의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열거하고 있으며 「음악을 기록할 방법은 없다. 악보 이외에. 그것은 유일하게 비디오만이 그들의 스케치를 대신하는 유용한 대체물이 될 것이다」라고 선견지명이 있는 말을 남겼다.

한때 플럭서스 작가들 가운데 칼하인츠 슈톡하우젠(Karlheinz Stockhausen)이나 조르지 리게티(Gyorgy Ligeti)등은 백남준의 연주나 퍼포먼스를 다른 사람들의 교육용 자료로 쓰기 위해 영화로 만들자는 제안까지도 있었다. 그러나 백남준은 이를 거절했다. 영화가 이미 비디오 아트보다 훨씬 전에 있었던 것이며 그것 역시 시각예술의 한 범주일 수 있으나 본질적으로 서술 위주의 영화는 시각예술로서의 기능적 요건이 약하다는 철학적 이유에서였다. 백남준의 이같은 시각은 진지한 뜻을 내포하고 있다. 즉 그의 퍼포먼스는 동일한 내용으로 두 번 되풀이되지 않는다. 또 누군가 모방해서는 그와 같은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 퍼포먼스에 관한 한 그는 전위예술이라는 아름다운 수식어가 쓰여졌을 뿐 기실은 무당기에 가까운 영감(靈感)과의 교신이다.

이것은 인간의 지식과 관련된 문제가 아니며 삶이라는 거대한 컴퓨터에 수록된 소프트웨어에서 흘러나오는 하나의 계시와 같은 것이다. 동일한 것을 반복하는 문자적 윤회는 불교나 유교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비창조적 행위의 반복에 관한 논리는 곧잘 기계와 비교된다. 백남준은 퍼포먼스를 반복한다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가진 것이 아니라 바로「기계적」이라는 반미학적 의미론과 연결시킨 것이며, 자연계의 섭리조차 동일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반복하는 것이 없다는 공자(孔子)의 유교사상과도 어울린다.

그는 「빌헬름 박하우스(Wilhelm Backhaus)는 일생에서 단 한 번 카덴차를 잘 연주했다」고 의미있는 지적을 했다. 그렇다고 그가 동일한 동작을 반복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1969년「플라톤 철학 연구와 단순한, 머리를 위한 선(禪)」(Simple, Zen for Head and Etude Platonidue No.3)을 연주할 때 그는 일련의 동작을 반복했다. 그것이 얼마나 지루한 것인가를 다시 깨닫게 된 백남준은 동작의 템포를 느리게 빠르게 하여 관객을 놀라게 하거나 관중들에게 콩을 던지기까지 하였다.

백남준은 1970년대 중반 새로운 형식의 지루한 미국 음악에 대해 머리를 내두르면서 자신의 입장을 설명한 적이 있다. 「미국인들은 부자이기 때문에 항상 즐거워하거나 자극 받을 필요는 없다. 미국에는 지루한 음악을 가능케하는 마음의 부(富)가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지루한 음악을 작곡하지 않는다. 나는 가난한 나라 출신이고 나 자신도 가난하다. 나는 매 순간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어야 한다」

백남준이 퍼포먼스에 사용한 소도구는 그의 생각을 읽게 해 주는 좋은 자료가 된다. 그는 1960년대 자주 사용한 비명 지르기에서부터 소도구인 콩, 장난감, 돌, 달걀, 깨진 유리, 양철통, 살아있는 닭, 오토바이, 피아노, 모니터, 사인 웨이브, 소음 등이 그것이다. 또 효과음악으로는 베토벤 교향곡 5번, 독일 민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콘체르트2번, 쇤베르크음악 등이 있고 전화로 알려오는 복권당첨 소식, 통일독일 문제를 놓고 열리는 국제회담 소리 등이 함께 사용되었다. 이같은 소도구와 효과음은 그의 퍼포먼스가 때로는 선불교적 동양정신 구조를 보여주다가도 경우에 따라서는 매우 시사적이면서 청중들의 반응에 민감하게 소통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퍼포먼스는 역시 청중과 함께 교감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그러나 1990년 한국에서 열린「조셉 보이즈를 위한 추모 굿」(Homage to Joseph Beuys)에서 사용한 소도구는 완전히 색다른 것이었다. 퍼포먼스의 장소가 한국이라는 편안함도 있었겠지만 본질적으로 백남준은 굿이라는 형식을 빌려 조셉 보이즈의 혼을 달랜다는 취지를 담고 있어 진짜 무당과 박수, 무당의 양푼과 제사용구, 모니터와 피아노 등 백남준 심벌의 온갖 복합 소도구가 등장했다. 그리고 자신은 보이즈의 혼을 부르는 영매(靈媒)역할을 했다. 보이즈가 나폴리의 지진에 대한 연민으로 「테라모토」(Terramoto)를 제작했던 것과 같이 백남준은 보이즈를 위한 굿이라는 테라모토를 제작한 것이다. 이 굿에서 백남준은 종전과는 달리 퍼포먼스를 지극히 완만하게 진행시켰고 청중과의 교감보다는 자신의 행위에 충실하고 있었다. 형식적으로는 퍼포먼스였으나 역경시대를 함께 보낸 진짜 보이즈의 혼을 진혼하려는 듯한 진혼제의 성격이 강했다. 무당들은 보이즈의 혼을 부르며 추렴했으며 한국의 제사법과 영혼위안의식은 전통적 방법에 의해 치러졌다.

굿판을 벌이며 보이즈의 영혼을 위로한다

원래 백남준과 보이즈는 1988년 서울 올림픽 때 진짜 굿판을 벌이기로 다짐했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보이즈는 이 계획을 실행에 옮기지 못한 채 먼저 갔고, 올림픽이 치러진 1년 뒤 혼자 남은 백남준이 굿판을 벌이며 보이즈의 영혼까지 위로하는 풍경이 벌어진 것이다. 보이즈는 2차대전 당시 타타르족과 얽힌 인연 등으로 아시아와의 묘한 사연을 갖고 있다. 만주·몽고의 무당에 큰 관심을 보이던 보이즈, 본질적으로 몽골리언의 피를 가진 백남준이 한국에서 굿판을 벌이기로 의기투합했던 것은 어찌 보면 놀라운 일이 아니다.

존 케이지는 백남준에게 「영어가 유창해지기 전에 네 책을 내는 것이 훨씬 예술적」이라고 만한 적이 있다. 천재성이란 완숙하다는 것과는 역시 거리가 있는 것. 백남준 작업에서 풍기는「의외성」이나 「기발함」을 익숙하게 보아온 케이지의 이런 생각은 일생을 전위예술가로 자처한 두 기인의 자연스러운 귀결일지도 모른다. 백남준 비디오 작업에서 나타난 미니멀리즘의 세계는 이런 의외성과 기발함이 더욱 두드러진다. 「TV시계」(TV Colck)나 「달은 가장 오래된 텔레비전이다」(Moon is the Oldest TV), 더 나아가서는 매우 개념성이 강한 「TV부처」에 이르기까지 동양적 심성의 세계가 두드러진 이 작품들은 대부분 초기 작업이나 멀티 모니터 설치물들에게서 찾아보기 힘든 다른 것이 담겨 있다. 「TV시계」「달은 가장 오래된 텔레비전이다」는 카메라나 비디오 테이프가 없이 이루어졌다. 이들은 텔레비전의 조작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며 백남준의 초기 작업에서 나타난 극히 간단한 기기나 모니터 조작의 과정과 일치한다. 그리고 거기에 나타난 영상은 정적이며 자연주의적 관조의 세계가 담겨 있다. 이것은 폐쇄회로 작업「TV부처」에서 더욱 심화되며, 서로 전혀 다른 소재인 TV모니터와 부처가 일체감을 이룬다. 그의 초기 작업에서 극명하게 나타나는 이같은 현상은 서로 마주보는 오브제끼리의 대조가 아니라 결과론이지만 기계매체인 TV모니터와 정신세계의 극치인 붓다를 결합시켰다는 교묘함이 더욱 드러나는 것이다. 이것은 동양정신의 알레고리이기도 하며 테크놀로지를 예술로 구원시키는 중요한 형식이기도하다. 백남준의 이같은 미니멀한 시도와 관조적 방법론은 수많은 모니터의 결합을 통해 구성된 멀티비전에서도 밑바탕을 이루고 있다.

특히 주역을 바탕으로 한 그의 동양적 수리(數理)에 대한 관념은 「달이 가장 오래된 텔레비전이다」에서 두드러지는데, 1965년 보니노 화랑에서 열린 「전자예술」(Electronic Art)쇼에서 비롯되었다. 초생달에서 만월까지의 간격을 12개의 모니터를 통해 보여준 이 작업은 1년 열두 달에 대한 암시와 각 달마다 가지는 계절적 순환구조를 아름답게 표현했다. 또 지극히 미니멀한 회화구조를 보여주는 이 작업은 러시아 절대주의자 카지미르 말레비치(Kazimir Malevich)가 보여준 「표현의 절제」나 「무기교의 기교」보다 오히려 자연과의 친화력을 강조한 자연예술로 나타난다. 에디트 데커는 이것을 「달과 별이 유일한 원천이었던 인류의 태초를 시적으로 암시한 것」이라고 표현했다.

백남준과 관련된 이론적 연구

지금까지 백남준과 연관된 연구는 캘빈 톰킨즈(Calvin Tomkins)의 「비디오평전」(Video Visionary)이 학계에서 매우 고무적인 평가를 받고 있으며, 1976년 조애너 질(Johanna Gill)이 학위논문으로 발표한 「비디오 작업 10년」(Atrists Video: The first Ten Years)이 초기 비디오 연구의 주요한 성과로 분류된다. 1977년에는 리차드 로버(Richard Lorber)가 「비디오 댄스」(Videodance)로 학위를 받았고, 1982년에는 다니 블로슈(Dany Bloch)의 논문 「예술과 비디오」(Artet Video 1960∼1980/82)가 출간되었다. 또 1976년 비평가 더글러스 데이비스(Douglas Davis)가 쓴 논문은 비디오를 사진에 비교하기도 했으며, 1988년에 에디트 데커(Edith Decker)가 비디오 아트와 특히 백남준 작업을 철저하게 파헤친「백비디오」(Paik Video)를 출간하여 그동안의 성과를 종합하였다. 이밖에 1990년 발간된 「비디오 문화」(Video Culture)가 존 핸하르트(John Hanhardt)에 의해 편저(編著)로 나와 비디오 이론과 실제, 비디오와 텔레비전, 영화와 비디오의 차이점과 미래에 대한 이론가 15명의 글을 싣고 있다.

이론적 연구 이외에 비디오 아트를 조명해 보는 주요 전시로는 1969년 하워드 와이즈(Howard Wise)화랑이 마련한「창조적 매체로서의 텔레비전」이 맨 처음 마련된 전시회로서 의미가 깊다. 또 1970년 로즈 아트 미술관(Rose Art Museum)이 마련한 「비전과 텔레비전」, 1968년 뉴욕 근대미술관의 「기계시대의 종언을 알리는 기계」전과 에버슨 미술관(Everson Museum)이 마련한 백남준의 첫 회고전, 그리고 쾰른 예술가 연맹회장이던 볼프 헤르조 켄라트(Wulf Herzogenrath)가 1976년 마련한 독일에서의 백남준 첫 회고전 등이 있다.

이 책은 한국의 정서, 한국의 미학을 본질적으로 체득하고 있는 백남준의 작업세계를 규명하기 위해 첫머리에 그의 가족구성과 교육환경, 그리고 그가 한국에서 성장한 당시의 사회환경 등을 짚어보고자 한다. 틴에이저 백남준이 왜 서울의 골동품가를 뒤지며 칼마르크스의 책을 찾았는가, 난해한 쇤베르크의 음악에 몰두했는가에 대한 그의 바탕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그의 청소년기는 한국이 일본에 의해 강점되어 모든 환경이「역경의 시대」였던 점을 뒤돌아 보아야 하며, 그가 한국을 처음 떠난 1949년은 해방 좌우익의 대결로 정치적 혼란이 극에 달하던 미명의 시대였다는 사실을 환기해야 한다.

백남준 작업에서는 역시 테크놀로지에 관한 탐구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테크놀로지가 예술로 기능을 발휘하는 바탕은 열렬히 동양적이라는 점이다. 이같은 미학적 형성구조는 그동안 서구에서 제시된 백남준 연구의 여러 제안들에 반드시 첨가되어야 하는 부분일 것이다. 이는 앞서 잠시 열거한 초기 미니멀 비디오나 컨셉추얼한 작업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나 TV인스털레이션, TV조각을 비롯하여 퍼포먼스와 그의 작곡 등에서까지 어렵지 않게 찾아진다. 그는 어느 미국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부(富)와 가난」이 가지는 철학적 가치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했다.

「만약 그대가 좋은 화장실과 좋은 마누라, 좋은 음식을 갖고 있다면 당신은 모든 것을 가졌기 때문에 확장은 없다. 플럭서스 예술가 가운데 토마스 슈미트(Tomas Schmit)는 찬물만 나오는 아파트 4층에 살았는데, 더운물로 목욕하기 위해 매일 1층까지 걸어다녔다. 그는 최소한 매일 1층과 4층을 오르내린 경험을 가졌으며, 이것은 단순한 노동원리가 아닌 극명한 예이다. 물질적 부는 상대적인 것이다. 미국은 할렘이라도 더운물은 나오지만 아직도 미국인들은 충분치 않다고 느끼지 않는가. 그렇지만 젊은 시인 토마스 슈미트는 한층 더 높은 5층이라도 뛰어다닐 것이다.」

플럭서스적 철학에 대한 중요한 검증

또한 본서는 백남준이 플럭서스적 철학을 가장 적극적으로 옮긴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 사이의 콘서트, 그리고 1964년부터 본격화되는 텔레비전 오브제 작업등을 다루게 되며 비디오 조각의 근간을 이루는 폐쇄회로 원리에 대해 탐구하게 된다. 이 폐쇄회로는 텔레비전 예술이 시각예술에서 혁명을 가져온 일대 사건이며 모니터를 사용한 조각과 설치미술로서의 징검다리이기도 한다. 백남준이 색채와 형상에서 혁명을 이룩한 신디사이저나 멀티 모니터 인스텔레이션, 비디오 테이프 등은 결구 폐쇄회로를 통한 비디오 조각의 원리에서 발전한 것으로 이에 대한 검증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는 1980년대 들어 대륙과 대륙을 연결하는 인공위성 프로젝트에 몰두하여「굿모닝 미스터 오웰」(Good Morning Mr. Owell)과 「바이 바이 키플링」(Bye Bye Kipling), 「세계는 하나」(Wrap Around the World)등 대형 인공위성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이것은 지구의 평화주의자로서가 아니라 비디오 예술의 적극적 확장으로서의 의미가 크며 아직도 공격적 패턴에서 팽팽하게 살아 숨쉬는 백남준의 치열한 의식이 기존의 틀에서 새롭게 소생시키려는 예술의 생명성, 치유본능과도 같은 것이다. 그것은 1986년 「로봇 가족」의 제작과 더불어 건강한 휴머니즘으로의 회귀가 엿보이고 있다.

백남준의 「로봇 가족」(Robot Family)은 종래의 공격적이고 전위적이던 그의 작업방식으로부터 놀이와 화해, 해학을 선사해 준 비디오 아트의 결정체이다. 백남준의 가족구조 또는 3대가 늘 함께 공동생활을 하는 한국의 가족구조를 연상시키는 이 작품은 때문에 한국 전통사회의 혈연구조와 뿌리의식에 깊게 관계된다. 로봇 가족은 후에 사회 의식과 역사의식에 연결되어 보다 폭넓은 외연의 문제로 발전한다. 그의 이런 생각은 1990년대에 들어 더욱 다양하고 인간의 목소리를 가진 의인화된 로봇 조각을 통해 통로로 넓혀가고 있다.

퍼포먼스와 비디오 아트로 대표되던 그의 예술 장르는 1990년대 들어 평면작업과 서서히 연계를 꾀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영역확장이 아니다. 1989년 보이즈를 소재로 한 평면작업(사진 콜라주와 페인팅)이 선보인 이후 이같은 복합적 형태는 사설적 설명과 함께 색다른 비디오의 배경으로 침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