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적 숭고미 - 정지용의 시세계
이태동 / 문학평론가, 서강대 교수
정지용은 1930년대에 우리 시단에서 눈부신 활약을 했다가 49세가 되던 해, 6.25 동란이 일어나서 북으로 끌려가 평양감옥에 이광수, 계순 등 납북문인들과 함께 수감되어 있다가 얼마 후 비행기 폭격으로 폭사당해 비극적인 일생을 마친 우리의「천재시인」이다.
만일 지용이 식민지 시대의 시인이 아니었고, 또 외세에 의한 이데올로기 전쟁의 희생물이 되지 않았더라면, 그가 지금쯤 우리들에게 얼마나 더 훌륭한 많은 시를 남길 수 있었을 것인가는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러한 예측과 가정은 그가 우리들에게 남긴 두 권의시집「백록담에서」와「정지용 시집」이 우리 현대시사에 한 장(章)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으로 충분히 증명이 되고 있다.
그의 시가 이렇게 훌륭했기 때문에 유종호는 정지용을 「한국 현대시의 아버지」라고 했고, 오탁번은 그가「이땅의 현대시를 자주(自主)했던 미당, 청마, 두진, 목월, 지훈1) 등의 정신적 배후에서 항상 대부노릇을 했다」고 말했다. 어찌 그것뿐이랴. 그의 시적 영향은 김춘수, 박재삼, 황동규, 오세영, 박제천, 조정권 등과 같은 우리시대의 시인들 사이에서 아직까지 숨쉬고 있다.
촉수와 번민을 함께 투시해 보는 정지용의 시적 성공과 좌절
그러나 시속에서 특별한 교훈적인 의미(didacticism)는 물론 감성주의적인 늪과 깊은 관계가 있는「한」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그의 시를 두고 「한낱 언어유희」에 지나지 않는다고 탓한다. 이들과는 반대입장에 서 있는 최동호 역시 그의 주변환경을 의식한 듯 그의 탁월한 논문「정지용의 〈장수산〉과 〈백록담〉에서」「그의 감각이나 언어가 참신한 것이기는 하였지만 그가 취하는 근원적인 자세가 전진적이었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의 시적 방법과 내용이 서로 엇갈린다」고 쓰고 있다2). 그래서 최동호는 결론적으로 정지용의 시적 성공과 좌절에 대한 진정한 평가는 그의 날카로운 감각적 촉수와 엇갈리는 인간적인 번민을 함께 투시하는 전체적인 조망에 의거해야 가능한 것이다」는 숙제를 우리에게 남기고 있다.
본고에서는 정지용의 시적내용이 무엇이며, 그것이 그의 시적방법, 즉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과 진정으로 엇갈리고 있는가 아니면, 서로 걸맞는 유기적인 관계가 있는가를 살펴보고, 그의 날카롭고 섬세한 언어감각이 지니고 있는 인간적인 의미가 무엇인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지용의 시세계에 지배적으로 나타나는 풍경은 자연풍경이고, 그것은 산과 고원, 어둠과 별, 바람과 구름, 꽃과 고향, 시내와 바다 등과 같은 이미지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그의 시를 읽는 사람들의 시각에 따라 다르겠지만, 필자에게 그것은 도륭(屠隆)의 말과는 달리 실제 경치보다 더욱 아름답고 격조높게 느껴진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사물의 존재 의미와 아름다움을 관찰하는 시인의 직관적인 눈과 그것을 보다 확대시켜 완성시키려는 상상력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시인 지용이 산을 비롯하여 나무와 꽃, 비와 구름, 눈과 얼음, 강과 바다 등을 노래한 것은 그것들에서 다른 어느 것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아름다운 조화의 도덕적 현상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리라.
동양적인 우주관과 크게 유사한 자연관을 나타내고 있는 워즈워드 시학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신이 자연의 아름다운 조화를 통해서 그 스스로를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이러한 자연의 조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거나 자신의 의식을 그것에 투영시킴으로서 인간의 도덕적인 성격과 정서가 형성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당시 영문학을 전공했던 지용이 연구한 바 있는3) 워즈워드에 의하면,「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근본적이고 특징적이며 값진 것은 자연세계에 구체화된 아름다움과 착함, 그리고 완벽한 질서에 대해 성숙한 반응을 보일 수 있는 본능적인 정서와 상상력이다. 그래서 워즈워드 시의 목적은 이렇게 아름답고 조화로운「자연형태」에 대해 능동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끼는 인간의 모습을 그리는 것이다. 또 가장 오랫동안 지속되는 구어체(idiom)를 시어로서 사용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워즈워드의 언어이론은 위에서 말한 시적 주제와 깊은 관계가 있다. 왜냐하면 허영적인 도시생활 그리고 여러 가지 특수한 직업에서 사용하는 기술들은 인간의 내면세계에 있는 가장 근본적이고 영원한 진실보다는 일시적이고 우발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에 대해 여러 가지 연상작용을 일으키게 만들고, 또 이러한 연상작용이 우리의 순수한 언어를 어둡게 물들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워즈워드가 말하는 「가장 오래 지속되어온 관용적인 언어」는 「자연의 영원한 형상」에 의해 연상작용을 일으키고 또 그것에 의해서 정서가 함양된 사람, 다시말해서 자연 가운데 있는 가장 아름다운 대상과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 사이에서 발견되는 언어이다.
워즈워드에게 있어서 시의 주제는 자연이 지니고 있는 가장 영속적이고 기본적인 양상에 관한 것이고, 그것의 표현 방법은 위에서 말한 영원하고 조화로운 아름다운 자연형태가 인간의 영원하고 본질적인 성격에 가장 효과적으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우리의 시, 인간 정서의 정수
시의 가치는 얼마만큼의 예리한 통찰력으로 진실된 인간과 아름다운 자연 사이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신비스러운 현상을 정확히 직관적으로 포착해서 우리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가의 여부에 달려있다. 그래서 우리는 시를 인간정서에 가장 중요하고 의미깊은 질적인 정수라고 말할 수 있다.4)
워즈워드가 말한 이러한 시적현상은 정지용의 시 가운데 영원한 민족정서의 회복을 위한 숨은 의도와 함께 여기 저기 나타나고 있다.
우리들에게 가장 친숙하고 잘 알려진 고향을 주제로 한 두 편의 시를 읽고 한번 생각해 보자.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롬 휘적시든 곳,
-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傳說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러치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안해가
따가운 해걁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줏던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집웅,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어 도란도란 거리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향수」의 전문
넘쳐흐를 듯이 풍요롭지만, 지극히 절제된 정서 속에서 원시적인 언어처럼 느껴지는 순박하고 자연스러운「영속적인 관용」적 구어로서 그려진 이 작품속의 자연풍경은 가난하고 소박한 전형적인 한국의 전원 풍경이다. 그런데 이 시가 시인 자신은 물론 우리들에게 지울 수 없는 지문과 정서적인 올림의 파문을 울밑에서 일으키는 것은 여기에 나타난 토속적인 이미지들로 이루어진 한국 특유의 전원적인 삶의 풍경이 모든 억압적인 힘을 해체시킨 후 보다 자유롭고 질박해진 상태의 시적공간에서 우리 마음 가운데 있는 가장 본질적이고 영원한 부분에 조용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리라.
「옛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회돌아」나가는 방죽가에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 우는」황소의 평화로운 모습과 식어가는 질화로 재와 더불어「짚벼개를 돋아 고이시고」태고의 바람소리를 듣는 아버지의 졸리운 모습은 모두다 잃어버린 낙원의 평화로운 모습을 상징하고 있다. 그리고 검은흙에서 파아란 하늘로 쏘아올린 소년의「화살」은 미래로 향한 원형적인 인간의 욕망의 표상이자 연결고리이다. 또 가을 들판 위에서 어린 누이의 귀밑머리가 바람에 날리는 모습을「傳說바다에 춤추는 밤물결」의 이미지와 비유함은 추수한 들판 위에서 이삭을 줍는 누이와「발벗은 안해」의 모습이 얼마나 순박하게 아름다우며, 시원적인 것인가를 나타내주고 있다. 마지막 연에서도 초가집에 비치는 불빛을 태고적에 만들어진 별들이 모래알처럼 흩어진 은하수와 비유함으로써, 그것을 원초적인 아름다움과 영원함을 지니게 하고 있다.
고향, 그곳을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집웅」은 한국의 원형적인 겨울 풍경으로써 이것 역시「고향」이란 일치되는 듯한 원시적인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겨울 하늘을 나는 까마귀는 그것이 지닌 검은색과 함께 우리들을 그 옛날 원시시대의 순수함으로 되돌아가게 하고 있다. 여기에는 인위적으로 만든 도시적인 화려함이나 형이상학적인 위선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전원적인 가난함이 지니 질박하고 원시적인 아름다움 속에서 구원적인 자유와 귀속적인 안도감을 발견하고 흐뭇한 행복감마져 느끼게 된다. 그래서 도시를 떠돌아다니는 시인은「고향」,「그곳을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하고 향수 어린 노래를 한다.
작품「향수」와 동일한 계열에 속하는 「고향」역시 위에서 살펴본 시의 내용과 언어와 많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더뇨.
산꽁이 알을 품고
뻐꾹이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고향 진히지 않고
머언 港口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메끝에 홀로 오르니
한점 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 나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고향」의 전문
이 시는 워즈워드처럼, 자연을 대상으로 해서 인간과 자연을 연결짓는 신플라톤적인 영혼불멸 사상을 노래하지 않고, 실향의식을 짙은 서정으로 노래하고 있지만, 김학동도 지적한 바와같이 영원한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다. 이 시의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산꽁」이나「뻐꾹이」그리고「꽃」이나「하늘」과 같은 자연의 이미지들은 불변의 영속적인 속성이다.5)
시인 지용의 마스크를 쓰고 있는 시속의 화자는 이국땅 도시를 헤매는 동안 자신의 감수성이 무디어져서 자연과 일치되는 동질성을 자신 가운데서 찾지 못하고, 유동적인 상태에서「머언 港口로 떠도는 구름」 같지만, 고향이 지니고 있는 영속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못한다. 그래서 이 작품에 나타난 불변하는 고향의 아름다운 전원풍경은 흰구름처럼 떠도는 자신의 마음과 대조를 이루어 더욱 더 영원한 아름다움을 창조하고 있다.
지용이 만일「향수」나「고향」등과 같이 낭만적인 색채가 짙은 실향의식과 그것을 회복하기 위한 시적인 노력에만 머물렀다면, 그는 우리 문학사에서 그렇게 큰 자리를 차지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다음단계로 그는 비록 자연의 영원성과 아름다움을 계속적으로 탐색하고 있지만, 「난초」등에서 볼 수 있듯이 인간의 견인력과 지조를 자연적인 사물에다 투영시키고 있다.
蘭草닢은
차라리 水墨色
蘭草닢에
엷은 안개와 꿈이 오다.
蘭草닢은
한밤에 여는 담은 입술이 있다.
蘭草닢은
별빛에 눈떳다 돌아눕다.
蘭草닢은
드러난 팔구비를 어쨔지 못한다.
蘭草닢에
적은 바람이 오다.
蘭草닢은
칩다.
-「난초」의 전문
그러나「백록담」에 와서 산정과 산정에 서 있는 나무 그리고 그곳에 피는 청초한 빛을 더해가고 있는 야생 꽃, 고산식물, 그리고 그 속에 살고 있는 십장생 가운데 하나인 노루 등과 같은 자연이미지에다 삶의 의미와 그것이 지닌 도덕적인 가치를 투영시켜 명경지수와도 같이 맑고 투명한 시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이러한 탁월한 시세계는 인간의지, 즉 인간의 견인력과 깊은 관계가 있는 비극적인 숭고미를 나타내고 있다.
김학동은 이러한 시적인 현상을「일체의 세속적인 비애나 고뇌 같은 감정의 속성을 금욕하는 단계」6)라고 말하고, 김우창은「주관이 해소되고 객관적인 세계에 대한 투명한 인식만이 있는 세계를 암시한다」7)고 쓰고 있다.
이렇게 그가 산과 정상을 중심으로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묘사한 것이「백록담」의 시세계에서 절정을 이루고 있지만, 그가 여기서 인간의지를 투영시킨 시세계가 비극적인 숭고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은 그의 시론에 가까운「밤」이라는 글에서 그가「비극은 반드시 울어야 하지 않고 사연하거나 흐느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실로 묵하는 것」8)이라고 쓴 것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시집「백록담」의 여러 시편에는 비극적인 숭고미가 꽃향기처럼 흐르거나 은빛 구름처럼 승화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면 송욱이「내용이나 형식면에서 실패한 것」9)으로 보았다고 말했지만, 최동호가 그것의 문학성을 탁월하게 분석해서 빛을 보게 한, 산을 주제로 한 가장 훌륭한 시「장수산」을 다시 한번 살펴보기로 하자.
伐木丁丁 이랫거니 아람도리 큰 솔이 베어짐즉도 하이 골이 울어 멩아리 소리 쩌르렁 돌아옴 즉도 하이 다람쥐도 좃지않고 뫼걁새도 울지 않어 깊은산 고요가 차라리 뼈를 저리우는데 눈과 밤이 조히보담 희고녀! 달도 보름달 기달려 흰 뜻은 한밤 이골을 걸음이랸다? 웃절중이 여섯판에 여섯 번 지고 웃고 올라간 뒤 초찰히 늙은 사나히의 남긴 내음새를 줏는다? 시름은 바람도 일지 않는 고요에 심히 흔들리우노니 오오 견뒤랸다. 차고 凡然히 슬픔도 꿈도 없이 長壽山속 겨울 한밤내-
-「장수산1」의 전문
이 시에는 최동호가 지적한 입체적인 시적공간을 「내적 울림으로 형상화」하기 위한「청각적 영상」10)은 말할 것도 없고, 비극적인 숭고미를 나타내지 않는 이미지가 없다. 「시경」에서 빌려왔다11)고 하는「伐木丁丁」은 청각적인 효과를 위해서 사용되었지만, 그는 거대한 소나무로 상징되는 자연적인 힘과 대결하는 데서 오는 비극적인 숭고미를 경험하는 인간적인 존재를 나타낸다. 또 역으로 수많은 시간 속에 온갖 시련과 어려움을 견디고 서 있던「아람도리 큰 솔」이 톱날에 베여 쓰러질 때, 「쩌르렁」하고 산속을 울리는 메아리 소리 또한 비극적인 장엄함을 지니고 있다.
산속의 흰 밤과 고향은 어둠과 싸우는 비극미를 형상화
또 산속에 내린 눈으로 말미암아 「조히보담」흰 밤과「뼈를 저리우는」밤의 고요는 모두다 어둠과 치열하게 싸우는 견인력에서 오는 비극미를 형상화하고 있다. 이와 같은 미학적인 현상은 보름달이 「흰 뜻」을 가지고 어두운 밤을 밝힌다는 놀라운 표현에서도 훌륭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웃절 중이 여섯판에 여섯 번을 지고 웃고 올라간 초찰히 늙은 사나히」의 이미지와 겨울밤의 시름을 바람도 일지 않는 차가운 고요속에 묻겠다는 인간의지를 상징하는 장수산의 이미지와 일치된 시인의 말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이러한 비극적인 견인력으로 승화된 아름다움은「장수산 2」에 있는 돌산의 이미지에 더욱 견고하게 나타나고 있다. 시인이 바라본 산정은 풀도 떨지 않는 돌산으로 비바람 속에서 영겁의 세월을 두고 서 있지만, 얼음처럼 차갑고 말이 없어서 그 속을 흐르는 맑은 물소리만 귀또리처럼「峲峲」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한덩이」돌처럼 서 있는 산정은 죽은 것이 아니라, 그 무서운 고독 속에서도 온갖 아픔과 시름을 이기면서 고요하고 고요한 숨결 속에 비극미를 형상화시킨「흰시울」을 소리없이 내리게 하고, 산허리에 있는 절벽을「진달래꽃 그림자」로 붉게 물들인다.
이 시집 속에 견인력에서 오는 고요하고 투명한 아름다움을 형상화한 것은 이것만이 아니다. 인생이라는 이름의 산을 오르는 것과도 같은 견인력과 함께 오는 명징한 깨달음의 인식세계를 나타내는 백록담의 맑은 물은 말할 것도 없고, 산을 오를수록 꽃의 키가 점점 작아지는「뻑국채꽃」,「암고난, 환약 같은 어여쁜 열매」, 훨훨 옷을 벗은 백화, 풍란이 풍기는 향기, 사람과 가까이 하는「해발 육천척」위의 말 망아지와 송아지, 그리고 착하디 착한 어미소의 모습, 또 이마를 시리게 한 먼 산정의「춘설」, 눈속에서 인동차를 마시면서 거울을 보내는 노인, 산을 찾아간 사람의 변신인 듯한 호랑나비 등은 모두다 인간의지로서 승화된 비극적인 숭고미를 탁월하게 형상화해 주고 있다.
그런데 정지용이 노래하고 있는 비극적인 숭엄미는 서양의 그것과는 달리 어떤 대상과 처절한 대결적인 갈등속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견인력을 통해 그것을 수용하는 역설적인 희열에서 오는 것이다. 그래서 서양의 비극미는 연속적인 갈등에서 오는 순간적인 것의 연속이지만, 지용이 형상화하고 있는 그것은 산위에 오르면 평탄한 길과 산밑에 있는 사람은 아무도 보지 못하는 아름답고 청초한 야생화를 발견하고 그것들과 더불어 휴식을 취할 수 있듯이, 자아세계를 잃지 않으면서 자연과 친화하고 노인이 꽃을 가꾸는 것과도 같이 평화로운 낙원의 세계를 발견한다.
골작에는 흔히
流星이 묻힌다.
黃昏에 누뤄가 소란히 싸히기도 하고,
꽃도 귀향 사는 곳,
질터걁 드랫는데
바람도 모이지 않고
山 그림자 설핏하면
사슴이 일으나 등을 넘어간다.
-「구성동」의 전문
지용이 비극적인 숭고미를 얼마나 심도 깊게 집요하게 추구했는가는 금강산 구만물 위에서「예장(禮裝)을 하고 아래로 뛰어내린 어느 신사가 비극적인 죽음을 한 후에도 흰눈의 이미지를 빌려와서 장엄한 의식까지 벌이면서 산정에 대해 겨우내 부복하며 경건함을 표시하도록 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한겨울 내-흰손바닥 같은 눈이 나려와 덮어 주곤 주곤 하였다 壯年이 생각하기를 「숨도 아이에 쉬지 않아야 춥지 않으리라」고 주검다운 儀式을 가추어 三冬내-俯伏하였다. 눈도 희기가 겹겹이 禮裝같이 봄이 봄이 짙어서 사라진다.
-「예장」의 일부
언어란 창조적 메타퍼에서― 인간은 자연과 형제가 된다
에즈라 파운드 시대에 중국문학을 오랫동안 연구한 에네스트 페노롤로사(Ernest Fenollosa)가 중국시에 관해서 강연하면서 언어란「창조적인 메타퍼에서 생겨나는데, 그 속에서 인간은 자연과 형제관계를 갖는다」12)라고 말했다. 이와 같은 현상 때문인지 지용에게 만일 산의 견인력과 닮은 인간의지의 견인력을 치열한 의식속에서 변형시켜 그의「촉수」와도 같은 독특하고 예리한 언어감각과 사물의 아름다움을 포착하려는 구도자적인 집념과 정열이 없으면, 자연을 주제로 한 그의 시에 나타난 이러한 비극적인 숭고미는 성공적으로 형상화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지용이 시는「언어와〔육화된〕일치」13)라고 말한 것은 이러한 상실을 뒷받침해 준다.
아무튼 그의 시를 읽는 독자는 누구나 그의 시적인 언어의「촉수」가 프로베르가 말한 외과의사의 메스처럼 날카롭기 때문에, 그가 시적인 대상의 미세한 부분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투명하고 절묘하게 정확히 표현하고 있다고 느끼게 된다. 그러나 지용의 시적 언어는 너무나 예리하면서도 부드럽고 온기가 있으면서도 차갑고 예리하다. 그러나 그의 언어는 워즈워드의 그것처럼 때묻지 않아서 자연스럽고 소박한 순수함을 지니고 있다. 그렇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투명한 지성의 빛을 발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다른 어느 유명 시인의 언어 못지않게 치열한 자기의식과 자기절제의 용광로 속에 오랫동안 뜨겁게 달구어진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곧 경험하게 된다.
실제로 지용은「가장 정신적인 것의 하나인 시가 시어의 제약을 받는다는 것은 차라리 시의 부자유의 열락이요 시의 전면적인 것이요 결정적인 것으로 되고 만다」고 말하고 있다.14) 다시말해, 그는 자연을 소재로하고 시를 썼지만, 자연이 지닌 아름다움을 선택적으로 사용해서 그것이 지니고 잇는 조화로운 신비에 시적으로도 동참하면서도, 그자신의 인간의지와 상상력이 짙게 담겨 있는 연금술적인 언어를 통해 거치른 자연적인 요소를 인간적인 렌즈로 굴절시키고 변형시켜, 그것이 삶의 진실과 도덕성을 올바르게 육화시켜 비쳐주는 거울이 되게끔 만들고 있다.
이러한 현상의 또다른 한 몫은 그의 시적인 표현과 언어가 문학사 속에서 숨쉬고 있는 여러 대시인들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를테면, 오탁번과 문덕수가 지적한 바와 같이 그는「시경」을 포함해서 태백과 두보의 시는 물론 그가 영문학도로서 가르치고 공부했던 블레이크, 워즈워드, 그리고 20세기의 이미지스트들의 영향을 입었다.
그러면「영향」이 시적공간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는가? 휴케너(Hugh Kenner)가 연구한 바와 같이「영향이란 적절한 은유가 아니라 일치된 상호 관계의 체계」이다.15) 이러한 체계는 고정된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상적인 인간의 의미에서 생성적인 풀롯의 문법」과도 같이 새로운 힘을 창조하는 바탕인 동시에 그 장이 되고 있다. 이러한 문학적 현상은「오레스테이아」(Oresteia)에 영향을 입은「햄릿」, 호머의「오딧세이」에 바탕을 두고 있는 조이스의「율리시즈」, 그리고 프레이져의「황금가지」에 나오는 신화에 영향을 입은 T.S 엘리옷트의 「황무지」는 물론 중국시와 일본시에 영향을 입은 파운드 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다시말하면, 영향은 과거를 단순히 모방하거나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상상력을 통해서 그것을 새로운 것으로 창조하는 하나의 발전과정을 의미한다.
자연의 움직이는 과정이 미래 위한 상징이 된다
그런데 시인 지용에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고전적인 작품들만이 아니다. 그가 그의 시적대상으로 빈번히 사용한 자연의 창조적인 생성과정도 그의 마음이 자연을 상대로 그의 시에서 구체화할 아널로지의 체계와 미래의 비젼을 위한 여러 가지 단서를 제공해 주고 있다. 사실 자연의 움직이는 과정이 발전적인 미래를 위한 훌륭한 상징이 되고 있다는 점은 아무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지용이 보드레르와 같은 눈으로 하늘에「백목단처럼 피어오르는…흰 구름송이」의 변화과정과 「하리잇 하게… 귀중한 靑石玆의 육체에 悠悠한 세월이 흐르우고 간 고운 손때와 같은 한바람 실 오래기 그름」16)의 아름다움을 사랑하고 노래한 것은 그가 변화하지 않는 것에서 변화하는 것을 발견하고, 그 속에서 자신의 상상력을 통한 변신의 꿈을 꿀 수 있었기 때문이리라.
시적인 공간에서 사물의 변신은 시인의 상상력과 섬광과도 같은 직관을 통한 치열한 의식의 확대로서만 가능하다. 치열한 의식의 확대는 비극적인 숭고미와 깊은 관계가 있다. 지용의 시가 항상 사물을 흰빛으로 표백해서 우아한 미를 나타내 보이는 것은 앞에서 누누이 말한 비극적인 숭고미 때문이 아닌가 한다.
실제로 비극미로 이루어진 시는 표면적인 현실세계를 초월해서 존재하는 영원하고 본질적인 어떤 아름다운 세계, 즉「보다 깊은 진실의 세계」를 추구하며 상승하려는 순간에 나타난다. 이러한 시점에서 볼 때,「선취」와「바다」시리즈,「풍랑몽」시리즈,「갑판우」「유리창」시리즈, 그리고 카톨릭에 귀의한 후에 쓴 몇편의 훌륭한 시들은 산과 산정을 중심으로 한「백록담」의 여러 시편들과 심층적으로 그 맥과 뿌리를 같이 하고 있다.
혹자는 정지용의「날카로운 감각적 촉수」가 인간적인 번민과 엇갈린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날카로운 언어감각이 처절한 인간적인 번민과 견인력과의 싸움에서 얻어진 확대된 의식의 결과로서 얻어진 것이란 사실을 잊지 말아야만 하겠다.
시는 산문과는 달리 현상적인 자연세계는 물론 내밀한「사물의 꿈」과 자의식적인 인간의 비젼을 투시하는 창이자 거울의 기능을 한다. 그가 그의 많은 부분의 시에서 동양정신에 바탕을 두고 자연의 숭고하고 신비스러운 아름다움을 노래한 것은 그것이 자연은 물론 시인 자신과 식민지시대에 그와 함께 억압받고 살아가는 백의민족의 정신적인 얼과 그 움직임을 들여다보는 창이고 또 그것을 비춰주는 거울이 되기 때문이다.
또 어떤 사람은 지용의 시는 눈으로 볼 수 있는 효용성이 결핍된「한낱 언어유희」에 머문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시를 가리고 있는 아널로지적인 가면을 논외로 한다고 하더라도, 그의 시는 그의 독특한 언어감각의 힘을 통해 다른 어느 한국시인의 작품들보다 우리 마음에 조용한 충격의 물결을 일으켜, 우리들로 하여금「착하고 선한 것」을 사랑하게끔 보이지 않는 「감정교육」을 시키고 있다.
그리고 그의 시에서 지배적으로 형상화되어 강조되고 있는 견인력은 이 풍진 세상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해서 사람이 사람다운 생활을 고고히 하며 살아가는데 무엇보다도 필요하다고 하겠다.
「백화 옆에서 백화가 촉루가 되기까지 산다. 내가 죽어 백화처럼 휠것이 숨없지 않다」
참고문헌
1)오탁번, 「현대시사의 영광과 비극」(「정지용:시와 산문」, 서울, 깊은샘, 1987). p.243
2)최동호, 「정지용의 〈장수산〉과 〈백록담〉」(「정지용:시와 산문」, 서울, 깊은샘, 1987), pp.286∼287
3)정지용, 「시와 언어」(「정지용:시와 산문」, 서울, 깊은샘, 1987), p.233
4)W.J.Bate, Criticism : The Major Texts(New York : Haicount Brace Jovanovich, Inc. 1970), pp.331∼335
5)김학동, 「정지용 연구」(서울, 민음사, 1987), p.21
6)김학동, 앞 책, p.54
7)김우창, 「한국시의 형이상」(「궁핍한 시대의 시인」, 민음사, 1977), p.52
8)정지용, 「밤」, 앞책, p.125
9)송욱, 「정지용 즉 모더니즘의 자기부정」(「시학평전」, 일조각, 1963), p.206
10)최동호, 앞 책, p.276
11)오탁번, 지용시의 환경(「현대문학 산책」, 고대 출판부, 1976) p.117
12)Hugh Kenner, The Pound Era(Berkeley :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p.289
13)정지용, 「시와 언어」, 앞 책, p.234
14)정지용, 「시와 언어」, 앞 책, p.234
15)Hugh Kenner, 앞 책, p.169
16)정지용, 같은 책, pp.134∼1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