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그 억압으로부터의 해방
권택영 / 경희대 영문과 교수, 문학평론가
정신이상에 걸린 아내는 남편의 처방으로 공기가 맑은 시골저택을 빌려 휴양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의사인 남편과 하녀의 감시를 피해 가며 아내는 자신의 심경과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틈틈이 기록한다. 아내를 아이처럼 돌보는 남편은 아무런 일도 하지 말고 특히 아무런 상상도 하지 말고 맑은 공기와 여행과 휴식을 취하면 병이 나으리라고 믿는다.
그러나 아내는 이런 처방을 믿지 않는다. 그녀는 오히려 마음에 맞는 일을 하여 적당한 자극을 받기를 원한다. 사회가 자신을 받아주고 그 속에서 자신의 능력을 살리는 일, 글쓰는 일이 하고 싶다. 남편의 진단이 틀리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내는 그의 세심한 주의를 받아들이는 척하면서 교묘하게 충돌을 피해간다.
그러나 한가지 견딜 수 없는 일이 있었다. 그녀가 묵고 있는 방의 노란색 벽지였다. 그 방은 원래 아기방이었다가 놀이방이 되었었기에 창엔 창살이 쳐 있다. 낮에 보면 노란벽지의 겉에 드러난 무늬는 창살모양이었는데 밤에, 특히 달밤에 그 창살 속에서는 여자가, 아니 수많은 여자들이 뛰쳐나오려고 발버둥치고 있는 것이다.
아내는 벽지가 참을 수 없이 싫은데 그런 그림을 볼 수 없는 남편은 곧 떠날 것이라고 관심을 두지 않는다.
드디어 남편이 외출한 달밤, 그녀는 벽지를 모두 벗겨내고 그 모양을 본 남편은 정신을 잃고 쓰러진다.
길먼(Charlotte Perkine Gilman)이 1892년에 쓴 단편,『노란벽지』(The Yellow Wallpaper)는 거의 한세기가 지난 포스트모던 시대에 와서 여성이론가들에 의해 발굴되고 재평가된다.
이 소설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해체적이다. 우선 벽지의 창살과 그 속에서 나오려는 여인을 합리적인 세계(낮)에 대한 비합리적 충동(달밤)으로 보아 온갖 상상력을 막는 이성중심세계에 대한 반항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일을 막는 남성중심사회에 대한 반항으로 읽으면 대단히 페미니스트적이다.
일을 막았을 때 나타나는 광기, 그리고 갇힌 미친 여자는 음성이 지워진 여성이고 마지막에 그녀가 벽지를 뜯어내는 것은 자신의 모습이기도한 벽지 속의 여성(여성들)을 해방시키는 행위이기도 하다. 특히 정신을 잃고 쓰러진 남편이 길을 가로막아 넘어갈 수밖에 없노라는 미친 여자의 마지막 말은 환자가 의사를, 광기가 이성을, 여성이 남성을 전복하는 암시를 담고 있어 데리다의〈9페랑스〉나 바르트의〈S/Z〉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런데 이제는 여성비평의 고전이 되다시피한 이 텍스트는 최근의 관심사 가운데 하나인 새역사주의(New Historicism)의 텍스트가 되기도 한다.
포스트 코로니얼, 새역사주의, 그리고 페미니즘
일찍이 1960년대부터 데리다, 푸코, 라캉, 바르트는 제각기 자신의 영역에서 구조주의를 넘어선다. 어떤 논리도 어떤 중심도 반대논리를 억압하고서만이 설 수 있다는 해체론은 지금까지 억압된 것, 주변으로 물러난 것을 귀환시키는 역사성을 품고 있었다.
비록 데리다는 텍스트, 푸코는 역사, 라캉은 정신분석에서 해체를 시도했지만 그들은 모두 매끄러운 독자성에 틈새를 내고 억눌린 다른 음성을 드러내 언어, 역사, 인식주체의 불연속성을 통해 타자의식을 심어주었다.
억압된 것이 귀환하되 또다시 타자를 억압할 수는 없고 온갖 우월의 경계가 무너지되 그것이 논리의 아포리아 혹은 미결정성으로 해석되어 정치성이나 역사성이 없다고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그래도 해체, 혹은 후기구조주의는 어느 쪽도 억압할 수 없는 꼭 그만큼의 정치성을 지닌다.
이런 의미에서 페미니즘, 새역사주의, 그리고 포스트 콜로니얼은 후기구조주의가 낳은 이 시대 정치의식들이라고 볼 수 있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푸코의 이론을 받아들여『오리엔탈리즘』을 썼다. 서구인들이 어떻게 자신의 욕망과 정치성으로 타자(팔레스타인)의 문화를 그리는지 그리고 그 타자는 또한 어떻게 자신의 욕망과 정치성으로 이에 대응하는 보여준다.
이 책은 드러난 음성 뒤에 숨은 제3의 음성을 들추어 매끄러운 역사에 틈새를 내었다. 이런 타자의식은 소설가 아이작 드네슨의『아프리카의 밖에서』나 나딘 고디머의 작품들에서도 비슷하게 반복된다.
서구인들은 식민지 아프리카를 결코 그들의 의지대로 바꾸어 놓거나 소유할 수 없다는 반성이다. 사이드가 제3세계인으로서 서구인의 왜곡된 서술을 들추었다면 이들은 서구인으로서 제3세계의 음성을 보여준다.
그런데 과연 제3세계의 음성은 고유하게 복원될 수 있는가. 이미 그 음성은 제1세계에 의해 침투된 것은 아닌가.
「포스트 모더니즘의 포스트는 포스트 코로니얼의 포스트인가?」(『크리티컬 인쿼리』, 1991년 겨울호)라는 글은 결코 온전히 복원될 수 없는 음성, 그래서 다만 권력과 지식의 가공할 위력을 깨닫고 타인을 지배하거나 억압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사이드의 경고를 떠올리게 한다.
자기전통의 기준으로 타자의 문화를 재지 말라는 것은 포스트 모더니즘의 핵심이론이다. 그래서 서구인들은 아프리카인이 만든 조각품,〈자전거 타는 사람〉을 보고 정말 전통적으로 아프리카적이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아프리카인의 안목에서 자전거는 새것이다. 물론 그것을 만든 사람은 포스트 모더니즘을 알리 없고 모더니즘이 없는 아프리카에서 포스트 모던 예술이 나온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게다가 아프리카에서 포스트 식민시대 지성인들은 대학이나 출판업자, 독서 등을 통해 모두 서구문화가 연결되어 있다. 좌파조차도 서구 좌파의 영향을 받는 등 그들의 이론은 알게 모르게 이미 서구의 것에 의해 침투되어 있다. 그래서 타자의식은 자칫 서구에서는 고유성을 강조하는 상품사회의 변명으로 전락할 수 있고 포스트 식민지에서는 눈먼 급진주의를 부를 수도 있다.
단순한 방법론에서 구체적인 방법론으로
이렇게 서로 얽혀있기에 포스트 코로니얼이 단순한 방법론에 개발하기 어려운데 비해 새역사주의는 구체적인 하나의 방법론적으로 축소될 수가 있다.
제롬 맥건(Jerome J. MeGann)과 그를 추종하는 낭만시 연구가들의 새 역사주의는〈차이〉에 이념성을 합친 것이다. 인간은 흔히 지나간 일은 쉽사리 매끄럽게 논리화할 수 있듯 역사를 현재의 안목으로 논리화하기 쉽다.
예를 들면 19세기 낭만시를 현재비평의 안목으로 무심코 재단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시가 발표되던 당시에는 어떤 안목으로 평가되었던가. 그 당시의 역사적 자료들을 뒤져 그 시가 어떤 반응을 얻었는가 본다. 그리고 또 현재에는 어떻게 평가되고 있는지 조사한다. 그러면 같은 시에 대한 다른 평가를 얻게 되고 그 차이가 곧 시대의 이념이라는 것이다. 역사의 불연속성, 혹은 매끄러운 역사의 틈새를 밝히는 작업이다. 역사는 겉보기엔 한 면인 듯싶지만 자르면 색깔을 달리하는 수많은 단면들로 이루어진 지층과 같다.
이제 여성비평의 고전 텍스트인 ‘노란벽지’에 새역사주의를 대입해서 두가지 이론을 연결시켜 보자(「페미니즘, 새역사주의, 그리고 독자」,『미국문학』1991년 12월호).
「노란벽지」는 정신이상자의 서술이다. 게다가 작품 속에서 그녀는 호전을 보이기는커녕 완전히 의사의 진단을 뒤엎고 발광하는 상태로 끝난다. 서술자는 정상인이 아니고 의사인 남편이나 남동생은 환자의 징후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다.
작품 안에서 권위있는 해석자는 누구인가. 하녀는 감시자일 뿐이고 그 외 등장인물은 없다. 그렇다면 이 작품의 해석자는 작품 밖에 있는 독자이다(물론 웨인 부스의 개념을 따라 내포독자이다.)
당시 지적인 전문인으로서「여성과 경제학」(1988)등 네권의 페미니스트 책을 저술한 저자, 길먼이 기댈 수 있는 유일한 해석자는 독자뿐이다. 「노란벽지」는 작품내의 인물을 넘어서 저자와 독자 사이의 지적인 교류와 전문의식에 의지한다.
이처럼 텍스트 안에서 텍스트 밖의 세계로 나가기에 이 작품은 사회영역으로 그 의미가 확장되고 새역사주의가 개입될 여지가 마련된다.
길먼은 자신이 쓴 글,「왜 나는 ‘노란벽지’를 썼는가」에서 그녀 자신이 정신과 의사의 치료를 받으면서 병이 점점 악화되어 거의 허물어져가는 상태에 이른 적이 있음을 고백한다. 그때 그녀는 의사의 치료를 거부하고 다시 일상의 일로 돌아섰을 때 병은 치유되었다. 실제로 이 작품이 환자를 구원하기도 했다지만 길먼의 의도는 광적인 여성이 일을 통해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도록 돕자는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저자의 의도에 가장 적합한 독자란 지적이며 전문적인 일에 종사하는 여성이라고 쉽사리 말해버릴 경우 그러면 당시에 이런 조건이 구비된 여성독자란 얼마나 되었는가를 볼 필요가 있다.
여성이 법률가로서 공적인 인정을 받은 것은 1870년에 이르러야 가능했고 1880년 의료계에 진출한 여성인구는 2.8%에 불과했으며 1900년에도 5.6% 정도였다. 당시의 독자는 이 두 가지 조건을 구비하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현재의 압도적인 여성전문인력과는 비교가 안되는 것이다. 그러므로「노란벽지」는 여성의 전문성을 지향하려는 잠재적인 의도만을 가졌을 뿐 양대의 지적인 여성문화를 이끌거나 반영하는 것이 아니었다.
작품의 역사성은 독자에게 달려있다
다시 말하자면 당시에는 지적이고 전문적인 여성독자란 하나의 이상이었을 뿐 현실이 아니었고 이 이상과 현실의 틈새에 의해 작품은 다르게 해석된다.
독자는 자신이 속한 시대 상황에 따라 작품을 다르게 해석하기에 하나의 작품은 독자를 매개로 역사성을 지니게 된다. 그리고 그 독자가 여성인가 남성인가에 따라 시대의 이념성이 달라지기에 역사비평은 여성비평과 손을 잡는다.
그것은 남녀라는 이분법적 가름을 고착시키지 않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다르게 구조되는 잠정성을 부여하므로 여성이론을 절대론에 빠지지 않게 하고 또한 역사비평 역시 절대론에 빠지지 않으려면 성(gender)을 중요한 항목으로 고려해야 한다.
얼핏 평온해 보이는 역사는 그 속에 무궁무진한 자료를 숨기고 있는 울퉁불퉁한 지층이며 끝없는 다면체이다.「노란벽지」의 독자는 특정한 역사적 순간에 처해 있던 여성독자이며 그 순간은 전문의식이 막 태동하던 시기였기에 여성해방은 암시적이고 부추기는 의미를 지닐 뿐이다. 그리고 이 작품이 페미니즘 뿐 아니라 해체적인 읽기도 가능하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듯하다.
「노란벽지」를 재발굴해내어 억눌린 여성의 음성을 드러냈던 여성비평 이론은 최근 가장 성공적으로 다양한 시도를 보이고 있다. 1990년 가을호「미학과 예술비평」지는 여성비평 특집을 싣고 있는데 프로이드의 오이디푸스 신화를 디미터와 페르세포네의 신화로 대치하는 재미있는 글,「어머니와 딸들 : 고대와 현대의 신화」가 주목을 끈다.
프로이드는 오이디푸스 신화로부터 정신분석의 기본틀인 아버지-어머니-아들(혹은 딸)의 삼각구조를 만들었다. 아들은 아버지를 질투하고 어머니를 흠모하지만 철이 들면서 아버지의 위협을 느끼고 어머니를 단념한다. 그는 어머니와 같은 젊은 여자를 얻기 위해 또하나의 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프로이드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사회질서체계로 보았기에 어머니와 딸의 관계를 주변적으로 다루었고 특히 딸이 어머니로부터 등을 돌리고 아버지를 흠모하는 사례연구를 한다.
이제 여성이론은 초점을 어머니와 딸에 두고 둘의 관계가 배척이 아니고 일생동안 서로 찾고 영향을 주고받으며 돕는 관계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끈은 디미터신화에서 동기를 얻어내 조모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여성끼리의 세대에 걸친 상호결속이다.
희랍신화에서 디미터는 비옥함과 추수의 여신이었다. 그녀가 흠모하는 딸 페르세포네는 어느날 꽃을 찾다가 수선화의 유혹에 걸려든다. 아버지 제우스가 동생 하데스를 위해 만든 함정이었다.
명부의 왕으로서 하데스는 페르세포네에게 반했고 이를 알게 된 제우스는 남동생을 위해 어머니와 딸을 갈라놓는 셈이다. 페르세포네가 꽃을 꺾자 땅이 갈라지며 하이드가 금마차를 타고 나타난다. 그녀는 구원을 청하지만 허사였다. 디미터는 슬픔에 잠겨 땅과 바다를 헤매며 딸을 찾으려 한다.
음식과 목표를 거부하고 자기파괴적이 된 그녀
분노와 공격이 대상을 찾지 못하고 안으로 스며들자 그녀는 9일간이나 음식과 목욕을 거부하고 자기파괴적이 된다. 그러다가 제우스의 책임량을 알고 분노가 극치에 달한 그녀는 다른 여자의 아들을 납치하여 도마뱀으로 바꾸는 등 그의 어머니에게 상처를 준다. 그리고 다른 여자와의 공격적인 관계가 그녀를 구원한다.
공격과 분노를 밖으로 발산한 그녀는 적극적이 되고 힘을 얻어 제우스에게 복수하기 시작한다. 땅은 메마르고 곡식은 여물지 않으며 한발과 기아가 계속된다.
한편 페르세포네는 어머니를 그리워하지만 약물에 의해 남편과 결속이 되어 명부의 여왕이 된다. 이때 할머니 레아가 나타나 디미터와 제우스 사이를 중재한다. 그리고 타협의 결과 일년의 반은 어머니와 반은 남편(혹은 다른 책에는), 2/3를 어머니와 나머지 1/3을 남편과 같이 보내게 된다.
디미터 신화는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딸에게 이어지는 사랑의 결속이 뼈대이고 제우스나 남동생은 주변 인물들이다. 필자인 스피츠(Ellen Handler Spitz)는 하나의 가설로서 디미터 신화를 오이디푸스 신화의 자리에 놓으면서 최근 여성작가들의 경우를 예로 들어 그런 뼈대를 더듬는다.
어릴 적에 헤어진 어머니를 갑자기 만난 딸은 그녀의 얼굴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고 어머니는 자신의 살을 떼어 할머니를 간호한 얘기 등을 통해 조금씩 딸과의 관계를 회복해간다(The Joy Ludk Club).
카리비언에서 성장하고 어머니와 같은 이름을 가진 딸은 몹쓸 병에 걸리고 할머니는 약초를 구해 조제하고 어머니와 함께 딸을 치유한다(Annie Johe).
여성이론 학자를 어머니로 둔 스물 두 살 난 딸이 어머니와 불화를 일으키고 문제아처럼 되어 고국을 떠난다.
어느 날 그녀는 예루살렘에서 전화를 하여 그곳에서 유태인을 위해 싸우겠다고 알린다. 어머니와 딸의 신념은 서로 달랐으나 결국 엄마가 되는 것으로 두 사람은 결속된다. 아무리 신념이 달라도 어머니가 되는 것은 같은 경험이며 딸은 자신의 자식을 기르며 어머니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신디아 오직크(Cynthia Ozick)는 「쇼울」(The Shawl)에서 어머니가 갓난 딸애를 죽이고 폴란드 유태인 포로수용소에서 살아남는 얘기를 그린다. 저자는 그런 경험을 해본 적이 없으나 늘 할머니의 격노에 찬 비탄의 소리를 들어왔고 그 소리는 손녀딸에게 하나의 의무처럼 짐이 되어 온 것이다. 할머니를 대신하여 증언할 의무이다.
대략 이런 작품들 속에는 어머니와 딸 사이의 깊은 육체적 일체감이 있고 어머니가 되는 것의 의미와 신비한 위력이 있고 헤어질 때 겪는 모녀 사이의 슬픔이 있고 세대간 여성결속의 중요성이 있다.
이처럼 여성심리소설이나 이론에서 디미터와 페르세포네의 신화는 중요한 근거를 제공하여 정신분석의 새 모델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보수주의 물결타고 성숙한 작품들로 변화
'60년대부터 일어난 포스트 모던 문화의 한 현상으로서 여성운동과 그 운동을 뒷받침하는 여성이론들은 초기의 격렬한 반발과 항의의 단계를 지나 '70년대 중반에 이르면 보수주의 물결을 타고 좀더 내면적으로 성숙한 작품들로 변모한다. 특히 거창한 이념이나 운동보다 평범한 일상의 문제로 눈을 돌리는 소설의 전반적인 변모와 함께 여성작품들도 일상과 가정의 문제에 많은 비중을 두게 된다.
앨리스 워커의「컬러 퍼플」은 자매가 겪는 고통과 사랑과 유대관계를 엮으면서 성차별이나 흑백의 문제를 암시적으로 다룬다. 마릴린 로빈슨의 잔잔한 소설「살림 꾸리기」(House Keeping)라든가 앤 타일러의 거의 전 작품들은 모두 가정을 바탕으로 가족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자식과의 관계에서 겪는 모정은 캐나다의 앨리스 먼로의 작품들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이들은 비록 초점은 어머니나 딸의 심리에 맞추고 있으나 그속에 사회문제가 암시적으로 깔려있어 훌륭한 작품으로서 손색이 없다.
이외에도 신디아 오지크, 그레이스 페일리, 앨리스 아담스, 보비 앤 메이슨, 메어리 고돈 등 '80년대의 오·헨리 수상집이나 미국과 캐나다에서 발표된 단편들 가운데 우수작을 모은 모음집을 보면 많은 여성작가들이 나타나고 그들의 단편이 거의 대부분 여성의 경험을 다루면서 어떤 식으로든지, 남편, 애인, 자매 특히 딸과의 연결을 맺고 있다.
또 스피츠의 글에서 보듯 접촉과 결속을 근원에까지 거슬러 올라 세대간의 결속을 암시하는 작품들도 눈에 띈다. 이들의 기법은 '70년대 중반 이후의 새 사실주의로서 압축된 간결한 서술이다. 심리를 묘사하되 결코 저자의 감정이 넘치거나 직접 설명하지 않는다. 일종의 표층전략이랄까. 사물의 겉에서만 냉정하게 맴돌며 말을 아끼고 엄격하고 묘사하기에 독자의 상상력과 해석이 요구되는 암시적인 수법이다.
포스트 콜로니얼 비평, 새 역사주의, 페미니즘… 포스트 모던 시대 후반기에 자주 논의되는 이론들 가운데에서도 페미니즘이 가장 성공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후기식민지 사람들, 묻혀진 역사의 층, 지워져온 여성의 음성, 모두 억압된 것이 귀환하는 것은 같은데 여성문학과 여성이론은 먼 곳에서 보기에 부러울 정도로 풍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