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해외소개의 의미
서지문 / 고려대교수 영문학
한국 문학의 외국어 번역을 하고 있는 한국사람과 외국사람이 함께 만나면 자칫하면 감정을 상하기가 쉽다. 그것은 외국인들은 한국인이 도저히 외국어를 네이티브 스피커(Native Speacker)처럼 쓸 수가 없기 때문에 번역 그 자체로서 매끄럽고 매력 있는 작품을 만들어내지 못한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이고, 한국인들은 외국인들이 한국 문학 작품 속에 들어있는 지극히 한국적인 많은 상황들, 정서를 도저히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고 한국말의 그 구수하고 정감 어린 표현들을 십분 내면화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확신을 하기 때문이다. 물론, 양쪽 다 실제 번역에서 서로의 어이없는 실수나 결함을 증빙할 수 있는 예를 얼마든지 볼 수 있다.
두말할 나위 없이 이런 다툼은 매우 생산적이지 못한 싸움이다. 한국 문학을 외국어로 번역을 한다는 자체가 한국과 한국인들을 외국인들에게 더 잘 이해시키고 한국인이 세계 속에서 다른 나라 사람들과 더 조화로운 삶을 살 수 있기 위해서인데, 그 큰 목표에 기여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끼리 대립과 반목을 한다면 아이러니가 아니겠는가.
문학 작품의 번역이 원작의 뜻을 전달하는 것이 더 중요한가, 아니면 번역된 텍스트로서 매끄럽게 읽히는 것이 중요한가하는 논리는 사실상 매우 어리석은 논의이다. 그러나 둘 중에서 하나를 꼭 희생해야된다면 필자는 완성품의 매끄러움보다는 원작의 의의를 살리는 쪽을 택하고싶다. 이것은 물론 필자가 한국인이고 필자가 한국 문학 작품을 애써 번역하는 이유가 외국인들에게 즐거운 독서거리를 주기 위함 보다 한국인 고유의 가치체계, 정서, 한국적 전통의 유래와 의미, 이런 것을 외국인들에게 알리고 싶은 간절한 소망에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번역자가 목표언어를 제대로 구사할 수 없을 때 아무리 원작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더라도 그 원작의 뜻과 묘미를 전달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다.
솔직히 말해서 외국인들이 영역한 한국 작품을 읽을 때, 외국인들이 한국인과 한국적 사고, 한국인의 감정 이런 것을 정말 제대로 이해하기는 너무나 어려운 것이라는 점을 자주 느끼게 된다. 물론, 많은 경우 동시에 외국인들이 그 정도로 한국을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며 그만큼 훌륭하게 전달을 했다는데 대해서 경탄을 하고 감사를 하기는 한다. 그러나 역시 외국인들이 한국인들의 사고방식과 감정 구조를 완전히 파악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자주 느끼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한국인들이, 외국인들이 한국에 완전히 동화도리 수 있도록 자신들의 생활 속에 받아들이지를 않기 때문에 한국인의 많은 면모가 한국에서 생활하는 외국인들에게도 가려져 있기 때문이고, 또 외국인들 편에서는 한국에서 나서 한국에서 성장한 외국인들도 대개가 외국인 학교를 다니고 정말 한국인으로서 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주원인이 외국인의 우월감이든 한국인의 배타성이든 간에 현재까지는 외국인들이 한국인의 관습이나 사고방식, 감정체계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그래서 문학작품의 이해와 해석에 난점이 많다. 아주 간단한 예를 하나들자면, 어떤 작품에서 17∼8세의 가정부가 그 집의 6∼7세나 되는 아들을 늘 업고 다니면서 누룽지도 몰래 감췄다 주고 하는 등 친누나 이상으로 정을 쏟는데, 자기가 동네 총각과 몰래 데이트를 하는데 이 아이가 울음을 터뜨리고 방해를 하니까 야속해서 아이를 한번 쥐어박는 대목이 나온다. 그런데 이 작품의 외국인 번역자는 이 식모가 아이를 학대하는 어른의 권위를 내포한다는 매우 서양 심리학적인 해석을 담은 것을 보았다. 이런 오해를 대할 때, 서양과 동양의 단절의 골이 너무나 깊다는 생각을 하고 낙담을 하게되지만, 사실상 그럴수록 우리가 우리의 문학 작품을 더욱 더 많이 영역을 해서 외국인들에게 우리의 고유한 인간미와 우리의 정서의 특성과 가치를 인식시키는 것이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또한 우리말도 우리가 느끼는 이상으로 외국인들에게 까다롭고 함정이 많은 것이다. 한국어가 유창한 어느 외국인이 <여간...하지 않다>는 대목을 <not very...>로 번역해 놓은 것을 보았다. 외국어의 구사에 있어서는 사실 쉬운 말이 더 어려운 경우가 많다. 그 외에도 <허리에 한 권총>을 <colt pistol at the waist>라고 번역해 놓은 것, 싸구려 술집에서 술안주로 콩팥을 요구하는 대목을 <beans and red beans>로 번역을 한 것, '원형(元兄)'을 사람의 이름으로 오인한 것 등을 볼 때면 한국말이 까다로워서 미안하다고 외국인들에게, 특히 한국 문학을 번역하는 외국인들에게 사과를 하고 싶어진다.
한국인 번역자들이 영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오역 내지 실수로 말할 것 같으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그 사례가 많고 기상천외한 것들이 많지만 여기서 한 가지만 예를 드는 것으로 대신하겠다. 어떤 작품에 어떤 임신한 부인을 보고 지나가던 중이 그 태중의 아이가 <태인전의 자미 대제 현신>이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는데, 그 영역은 <It is the impersonation of the Great Emperor of Jami residing at the Palace of Tae-il>로 되어 있다. 여기서 Jami라던가 Tai-il 같은 고유명사들이 아무런 설명 없이 사용된 것도 문제지만, 결정적인 것은 '현신'이 'impersonation'으로 번역된 것이다. 'impersonation'은, 물론, 어떤 사람이 누구의 대역을 하거나 가짜로 누구의 행세를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태중의 아이가 'impersonation' 한다는 것은 전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고, 독자들은 어리둥절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종류의 오역은 이제까지 비일비재했을 뿐 아니라 사실, 모든 한국인 번역자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누구나 조금씩 범하게 되는 실수이다. 그러므로 번역자는 한도 끝도 없이 외국어 실력 향상에 정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한국인 번역자들이 범하는 실수에는 이런 언어 실력의 차원이 아닌 것도 많다. 한국인 번역자라도 우리 고유의 관습이나, 지극히 한국적인 사고와 감정의 궤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작품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했고, 따라서 그 뜻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아주 간단한 예로 어떤 시에서 시인 이 자기 아내를 '그 사람'이라고 지칭한 곳이 있는데, 이것은 물론 한국 사람들이 자기 아내를 더 친밀하거나 명백한 말로 지칭하는 것이 점잖지 못하고 면구스러운 이로 생각하기 때문에 흔히 행해졌던 관습이다. 그런데 일찍이 한국을 떠난 어느 한국인 번역자는 '그 사람'을 그만 'that person'으로 번역을 했다. 물론, 번역자 자신이 '그 사람'이 필자인 시인 자신의 아내를 지칭하는 것이라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빚어진 일이지만, 그러나 그는 번역자로서 난데없이 그 시속에 왜 'that person'이 나타나는지 의문을 가지고 해결을 해 보려는 노력을 했어야 했다. 이런 예를 보고는 외국인들에게 한국적인 것을 이해 못하고 번역을 한다고 비난을 할 수가 없어진다.
그밖에도 한국인이 한국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번역을 해서 오역이 나오는 경우는 허다하다. 한국 시중에서 가장 자주 번역된 시집이 한용운의 「님의 침묵」인데, 다른 번역자가 같은 시를 번역해 놓은 것을 보면 도저히 같은 시라고 생각을 할 수 없는 것이 많다. 도대체 그 시를 쓰는 '나'를 남성으로 상징하느냐 여성으로 상징하느냐 하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에서부터 번역자간에 해석이 상반되고 있으니 시의 세부적인 해석에 이르러서랴.
화자의 성별이 밝혀지지 않고도 수십 편의 연작시가 쓰여질 수 있다는 것은 분명 한국어의 특징에 힘입은 것이겠지만, 한국어의 구조에 내재하는 모호성(built-in ambiguity) 때문에 생기는 혼동은 많다. 역시 한용운의 「님의 침묵」에 <손가락을 가슴에 대이고, 당신의 코와 입과 두 볼에 샘 파지는 것까지 그렸습니다>라는 행이 있는데, '가슴에'를 김재현 교수는 'on breast'로, 김종길 교수는 'on my breast'로 옮겼다. 어느 해석이 옳다는 판정은 문법적으로는 할 수 없고 그 시의 분위기와 전후 문맥을 면밀하고 민감하게 살림으로서만 할 수 있다. 이런 예도 일일이 열거하자면 수십 권의 책이 되고도 남을 것이다.
해석을 잘못 하지 않았더라도 번역자가 그 작품에 너무나 심취하게 되면 자신과 같이 한국적인 감수성을 갖지도 않았고, 한국적인 것에 대한 진한 감정적 애착도 갖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한국적인 관습, 생활환경에도 익숙지 못한 외국독자들에게 감동을 일으킬 수 있도록 작품 내용을 전달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잊고 그냥 문자 그대로의 번역(literal translation)을 해놓고 마는 수가 있다. <이렇게 기막힌 작품을 읽기 위해서는 읽는 서양놈들이 동양학 사전이라도 찾아가면서 읽어야 한다>는 식의 큰 소리를 치는 번역자도 가끔 보게된다. 이런 번역자는 한마디로 무자격 번역자이다.
외국인 독자들이 한국의 문학 작품에 장독대에 독들이 나란히 놓여있다는 대목을 읽고 향수를 느끼지 않는다고 해서 그 독자는 감수성 내지 문학성이 부족하다고 할 수가 있을까 ? 또,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에서 젊은 한국 여성이 담배를 피우며 등장할 때 경악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서양인 독자를 상상력에 결함이 있는 독자라고 제쳐둘 수가 있을까 ?
독자는 외국인이 한국 사람의 관습과 정서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번역으로 전달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고, 그러니까 그 이상을 전달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은 낭비라는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상 어려서부터 서구, 미국의 영화를 보고 소설과 잡지를 읽고 그들의 사회와 관습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우리들이 서양과 서양인을 이해하는 것 보다 성년이 될 때까지 동양을 거의 접해보지 못한 서구인들이 우리를 이해하는 것이 더 힘든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상상력을 행사함으로써 어느 정도까지는 다른 사람, 다른 세계를 대리 체험을 할 수가 있는 것이고, 그러므로 우리는 한국 문학의 번역을 읽는 모든 미국인이나 구라파인을 한국학 전공자로 바꾸어 놓을 것을 기대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들에게 한국은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관습과 전적으로 부조리한 사회제도와 기이한 감정체계를 가진 사람들이라는 인식은 바꾸어 놓을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번역자는 외국인들과 될 수 있으며 자주 깊이 있는 접촉을 가짐으로써 그들의 생활습성과 그들의 사고체계를 이해하고, 그리고서 그들의 입장에서 그들에게 이해되기 어려운 것, 그들에게 기이하고 부자연스럽게 느껴질 것은 어떤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그들의 이해를 최대한 돕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러려면 그들에게 부조리하게 느껴질 것 같은 관습이나 태도 같은 것은 될 수 있으면 작품 전체의 분위기로서 드러나도록 하고,(예를 들어서 가문의 중요성이라든가 나이 차이에 의한 서열 같은 것) 필요한 경우에는 주를 첨부하여 상세한 내용과 사회학적인 설명을 해주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될 수 있으면 필요한 설명이 텍스트에서 간접적이고 시사적으로 되도록 하는 것이 좋겠지만 주가 필요한 데도 혹시 딱딱하고 현학적인 인상을 줄까봐 생략해서는 안될 것이다. 깊고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면 되도록 텍스트 안에서 자연스럽게 지나는 말처럼 설명을 해주는 것이 좋다. 예를 들어 감옥에서 나오는 사람에게 소금을 뿌리는 대목이 나온다면 <다시 감옥에 가는 것을 방지해준다고 생각하는 소금 뿌리기를 했다>는 식으로 가볍게 처리해 주는 것이 좋다.
그리고 번역자로서 부단한 언어의 연마와 더불어 목표언어를 쓰는 사람들의 언어습관을 잘 관찰하고 그들의 언어습관에 일치하는 그런 글을 쓰도록 노력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한국어에서는 사람의 고유명사를 계속 쓰는 것이 신경을 거슬리지 않지만, 외국에서는 한번 사람의 이름을 쓰면 그 다음에는 거의 인칭대명사를 쓴다. 그러므로 <은실이가 어디에 들어와서 은실이가 어떤 행동을 했고 은실이가 무슨 말을 했고 은실이는 무슨 생각을 했고 은실이가 오디로 나갔다>는 식으로 고유명사를 계속 쓰는 것은 외국독자에게는 여간 신경을 거슬리는 일이 아니다. 그리고 같은 말이나 문구를 여러 번 반복해서 사용하는 것을 한국작가들은 별 생각 없이 하는 경우도 있고 때로는 어떤 후렴과 같은 효과를 내기 위해 하는 경우도 있는데, 구미어에서는 그것을 매우 세련되지 못한 글쓰기이고, 읽는 사람을 짜증나게 하는 언어습관이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순이는 아버지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버지가 순이를 쳐다보며 말했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쳐다보며 말했다> 등 어떤 인물이 말을 할 때마다 그 말을 하는 대상을 쳐다보고 말을 하는 것 같은 것은 <순이는 아버지의 반응을 살피면서 말했다> <아버지가 미안해하는 표정으로 순이에게 말했다>하는 식으로 좀더 정확하게 묘사를 하고 가끔은 그냥 생략해서 지루하고 장황한 느낌을 주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다. 이 모든 것이 아무리 사소한 부분일지라도 번역자가 그냥 예사로 넘겨서는 성공적인 번역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필자의 경우 사실 이렇게 번역이 너무나 고달프고 완전한 만족을 얻기가 힘든 작업이어서 최근 2, 3년 동안은 번역에서 손을 놓았다. 그 바로 전에 이룬 이문열의 「금시조」와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를 번역했는데 너무나 힘이 들었었다. 외국에는 존재하지도 않은 이름(갓장이 이야기에 나오는「충도자」,「양태」,「관자」,「풍장」,「포영」,「특영」,「갓판」 등 수십 가지 갓의 부분과 갓 제작의 도구들의 이름 같은 것들)을 지어내어야 하는 것은 오히려 직업적인 문제였고, 서양에는 존재하지 않는 모붐이니 채미니 쳇봉다리 싸움 같은 관습이나 행사에 한마디로 가장 근사하게 그것의 아이디어를 전할 수 있는 명칭을 생각해 내고 이국적인 흥미와 함께 그것들이 한국인들의 생활에 갖는 의미와 활력, 이런 것을 전달 할 수 있도록 세밀하고도 유창한 번역을 하는데는 능력이 부쳤다. 무엇보다도 문중이 한국인에게 부여하는 압도적인 의미와 문중을 비롯한 많은 무형의 유산들이 언제나 한국인들을 속박한 것은 아니었고 한국인들에게 소속의식과 윤리적 지침을 준 이로운 전통으로 작용한 때가 더 많았다는 것을 인식시키는 막중한 사명이 필자를 압박했다.
그래서 보통 작품을 번역하는 것 보다 몇 배의 힘이 들었는데도 영 마음에 차지가 않았고, 개인적으로 사례를 하면서 외국인들의 도움도 받으면서 몇 번이고 다듬었는데도 계속 만족스럽지가 않아서 적극적으로 출판사를 교섭해 보지도 않고 잡고만 있다. 그러나 충분히 되면 한국 문학의 진가를 높이는데 중요한 기여를 할 것으로 기대를 하고 있고 필자 자신이 순진한 사명감을 갖고 뛰어들어서 여러 가지 험한 꼴도 보았으면서도 계속 헌신적인(?) 종사를 해온 번역 작업에 큰 보람을 느끼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출판사를 구하는 이야기가 나왔으니 필자의 출판사 교섭에 대한 경험을 이야기하기로 한다. 처음, 1970년대 초에 멋모르고 번역을 시작했을 때, 한국 문학 작품이 외국독자에게 읽히기 위해서는 외국에서 출판되어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외국출판사와 교섭을 해보기 시작을 했는데, 그야말로 완전히 암중모색이었다. 무조건 필자의 서가에 있는 책들을 내서 그 책들 뒤에 간혹(자기네 회사에서 출판된 책의 주문을 받기 위한) 주소가 나와 있으면 그 주소에다가 필자가 영역한 단편 하나를 보내면서 필자가 10여 편의 한국 단편을 번역했는데 귀사에서 출판을 위해 검토해볼 생각이 있다면 전부를 우송하겠다는 편지를 냈다. 그때는 필자의 서가에 있는 책들이 거의 값 싼 페이퍼 백 들이었는데 페이퍼 백 출판사에서는 이미 다른 회사에서 하드 커버로 출판되어 성공한 책들을 재출판하는 일밖에는 안 한다는 것조차 모르고 편지를 띄웠으니 얼마나 무얼 몰랐던가.
그때 약 10곳의 출판사에 편지를 내었었는데, 출판을 하겠다고 나선 회사는 없었지만 한 6곳쯤의 회사에서 상당히 친절한 답장을 받았다. 번역은 매우 우수하고 작품도 흥미가 있지만 자기네는 오리지널 출판을 안 하기 때문에 할 수가 없다던가, 또 어떤 곳에서는 자기네가 막 아시안 스토리(Asian Stories) 선집을 냈는데, 몇 달만 일찍 보내주었다면 그 선집에 필자의 스토리를 포함 시킬 수가 있었겠는데 좀 더 일찍 필자 서신을 받지 못한 것이 유감이라고도 했고, 동경에 있는 터틀(Tuttle)사에서는 챠알스 터를 사장이 직접, 작품은 매우 매력이 있고 번역도 지극히 우수한 데, 한국 작품은 시장이 전무하기 때문에 유감스럽지만 출판을 할 수가 없다는 대답을 보내왔다. 지금 같았으면 그 소득을 제로라고 생각하고 낙담을 했을지 모르는데, 그때는 그만큼이라도 번역 자체에 대한 칭찬을 받고 완전히 무시를 당하지 않은 것에서 큰 격려를 받았다. 결국 여러 해가 지난 후에 유네스코 파리 본부의 지원을 따낸 후에 유네스코 본부에서 영국의 ONYX 출판사에 교섭을 해서 「The rainy Spell and Other Korean Stories」가 출판될 수 있었다. 실로 번역을 시작한지 11년만의 결실이었다.
한국 문학 작품을 출판하고자 하는 외국 출판사는 분명 증가일로에 있다. 이번 8월 하순에 시애틀에서 열린 한국 문학 번역인들의 모임은 무척 의외가 있었는데 한국 문학의 영역이라는, 고독하고 힘든 작업에 애정을 가지고 꾸준히 정진하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사실에 말할 수 없이 큰 격려를 받았던 것이 제일 큰 성과이고 또 이제는 한국에 대한 인식이 그만큼 달라졌기 때문에 출판사들도 한국학 관계 서적 출판에 적어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도 중요한 성과였다. 시애틀 소재 워싱턴 주립대학의 대학출판사 대표도 자기네들이 일본 관계 책도 상당수 내었고, 중국 기타 관계 서적들도 내었는데 한국 서적은 아직 내지 않았으므로 한국 관계 서적도 출판할 단계라는 얘기를 했고, 실제로도 최근 몇 년 사이에 미국, 영국, 불란서 등지에서 한국 문학 영역, 불역서들이 상당수 출판되었다. 한국 여성 작가 중편선이 여성 문학을 전문적으로 출판하는 미국의 The Seal Press에서 출판된 것을 비롯해서 영국의 Kegan Paul International에서 여러 권의 한국문학 서적들이 나왔고 불란서에서도 최근 이문열의 중·단편을 비롯해서 상당수의 불역들이 나왔고 좋은 서평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또 Australia같은 곳에서도Queensland대학 출판사와 Adelaide에 있는 한국 관계 연구소에서 영역 한국학 작품이 출판되었다.
이제 세계가 한국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주로 최근에 급성장한 한국의 경제력 때문이지만, 한국학의 신장과 함께 한국 문학에 대한 관심도 확장이 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 문학이 대다수의 외국인들에게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것과 같은 깊은 의미와 감흥을 줄 것으로 기대할 수는 없다. 가령 우리 문학의 금자탑인 「토지」가 아무리 번역이 훌륭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외국인들에게 우리에게와 같은 깊은 향수와 감동을 불러일으키기를 기대할 수는 없을 뿐 아니라 사실상 교포 자녀들도 그 벅찬 감동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토지」가 훌륭하게 번역이 된다면 반드시 이국인들에게 큰 감동을 줄 수 있고, 또 한국 문학과 한국인들에 대한 새로운 존경심을 심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환상에 매달리지 말고 우리에게로 향한 세계의 일시적 관심이 실망과 함께 곧바로 스러지지 않도록 이 기회를 현명하게 활용하는 지혜가 절실히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