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리뷰 / 연극

연극 비평의 역할 회복을 위하여




김윤철 / 연극평론가, 세종대 교수

연극 평론가의 수적 증가와 연극 비평의 양적 감축이라는 이율배반 속에서 오늘의 연극 평론계를 비판하는 소리들이 심심지 않게 들려 온다. '한국 연극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지 못한다', '연극의 저속화를 방관 또는 방조한다', '잘 잘못을 분별함이 분명치 못하다' 등등. 이 중에는 연극 평론가들이 전적으로 책임질 수 없는 사항도 있고, 역할의 속성상 주도할 수 없는 분야도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러한 불만의 소리들에 대부분 공감한다. 연극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이즈음에 평론이 연극 예술과 연극 종사자 및 일반 관객을 위해 어떤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지는 검토해 보는 것이 한국 연극의 발전을 위해 중요한 일이 될 것이다.

우선 우리가 답을 찾아야 할 질문이 있다. 즉, 연극 평론은 홍보 행위인가, 심판 행위인가 ? 대답이 너무 자명해 보이는 듯한 질문이다. 그러나 실상 우리 연극인들 사이에는 평론을 이성적으로는 심판 행위라고 이해하면서 심정적으로는 홍보 행위이기를 바라는 면이 많다. 그래서 공연에 혹 미진한 점이 많더라고 평론가가 그것을 냉정하게 시시비비하기보다는 되도록 공연의 긍정적인 측면들을 부각시킴으로써 연극 예술가들을 격려해 주고 관객의 발길을 잡아 주는 것이 연극의 대중적 기반이 취약한 우리 실정에 필요한 평론 행위가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이를테면 평론의 인플레이션을 요구하는 셈인데, 그것이 단기적으로는 효과가 있을지는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그와 같은 의도적 과대평가가 거듭된다면 잠재 관객인 독자들로부터 신뢰를 잃을 것이어서 오히려 역효과가 날 것이다. 평론이 진정으로 연극을 섬기려면 공연을 공정하게 심판해서 연극의 생산자에게는 제품 개선의 방법과 방향을 제시해 주고 소비자에게는 불량 제품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고 보다 질 좋은 제품을 즐길 수 있도록 유도해 주어야 한다. 바꾸어 말하면 평론이 엄격한 심판 행위일 때 진정한 홍보 효과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작품 이해, 효과 감정, 가치판단을 고유 업무로 삼는 이 심판 행위로의 효과를 발휘할 수 없도록 되어 있는 구조적 결함이나 모순에 있다고 여겨진다. 첫째, 연극 비평에 할애되는 방송 시간과 신문 지면이 절대 부족하다. 공연 기간이 길지 않은 우리 연극의 현실에서 비평은 마땅히 첫날 첫 공연을 대상으로 삼아야 하고 또한 즉시 발표될 수 있어야 하는데, 일반 대중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주요 일간지의 경우, 거의 끝나 가거나 이미 끝난 공연에 대한 비평을 월1회 정도 게재하고 있으며 방송쪽에서는 비평 아닌 홍보성의 안내만을 간헐적으로 보도할 뿐이다. 따라서 평론가의 심판이 관객이나 연극 예술가들에게 도움을 주기 어렵다. 프랭크 리치가 브로드웨이 연극에 대해 생사여탈의 막강한 힘을 행사하는 것은(다행히도 그는 이 힘을 남용하지 않는다) 뉴욕 타임지가 연극 비평을 위해 거의 매일 지면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연극 비평을 직업으로 삼는 전문 평론가가 없는 것이 문제다. 필자를 비롯하여 우리의 평론가들은 대부분 대학 교수직을 본업으로 삼고 평론을 부업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이 서울만 해도 40개가 넘는 연극 공연장을 발빠르게 돌아다니며 공연의 좋고 나쁨에 대한 판단을 신속하게 글로 써 주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애당초 무리다.

시야를 내면적인 구조로 돌려보면, 세 번째 문제점으로 특정 평론가와 특정 극단 사이의 밀착 관계가 부각된다. 물론 그런 관계들을 무조건 정치적 관계로 규정지을 필요는 없다. 한 극단의 작업을 오랜 기간 지켜보노라면 그 극단이 성취했거나 지향하는 예술적 표준에 대해서 호감을 갖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호감이 공정성을 상실할 만큼 확대될 때 발생한다. 그때 평론가는 칭찬은 과장해서 하고 비난은 어물쩍 넘겨 버리기 십상이다. 공정성을 상실한 평론은 심판이 아니라 홍보다.

네 번째의 구조적 결함은 연극 평론가들 자신에게서 발견된다. 즉 평론가마다 심판의 기준이 크게 다른 것이다. 물론 이는 연극협회 소속의 정회원 극단, 준회원 극단, 그리고 그 밖의 무소속 극단들이 예술성면에서 뚜렷한 차별 짓기에 실패하는 데서 오는 가치의 혼란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우리의 연극 평론가들이 대부분 문학도들이어서 연극 예술의 실제에 대한 체험이 극히 제한되어 있고, 또 그렇기 때문에 평론을 지나치게 문학적으로 접근하는 데에 보다 큰 이유가 있는 것 같다. 물론 연극 비평이 희곡에 대한 이유를 포함하기는 하나 그보다는 대체로 연출자의 작품 해석과 그 해석의 타당성을 따져 보고, 그런 의도가 무대 위에서 얼마나 효과적으로 실현되었느냐를 판단하는 쪽에 더 큰 비중이 주어진다. 실제에 대한 체험과 이해의 부족은 종종 엉뚱한 칭찬과 빗나간 비난을 낳게 되고 그것이 거듭되다 보면 평론이 관객과 연극인들로부터 신뢰를 잃게 된다. 배우와 연출자가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작품에 연극 평론가들이 선정하는 연출상, 연기상, 또는 작품상이 주어진다면, 그때는 평론가가 심판하는 꼴이 된다.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이미 해결책도 제시한 셈이다. 주장을 보다 분명히 하기 위해 부언하겠다. 우리의 평론이 좀더 활성화되려면, 첫째 신문과 방송으로부터 보다 많은 지면과 시간을 할애 받을 수 있도록 연극인들이 강력한 로비 활동을 펼쳐야 하겠다. 물론 연극 공연이 값진 문화 행사가 될 수 있도록 예술적 완성도와 상업적 기획을 높여야만 이 로비가 실료를 거둘 것이다.

둘째, 이제는 직업 평론가가 나타나서 공연장들을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각 공연의 시대적, 역사적 의미를 정리 해주고 또한 그 예술적 성취도를 신속하게 심판해줌으로써 연극 종사자와 연극 관람자 모두에게 봉사해 줄 수 있어야 하겠다.

셋째, 연극 평론가와 연극 예술가들의 관계는 연극을 사랑한다는 의미에서는 친밀해야겠지만, 연극을 창조하고 그것을 가치 판단한다는 의미에서는 긴장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평론가에게는 일반 관객과 연극인들로부터의 신뢰가 인기보다 중요하다. 피터 부르크라는 이 시대의 걸출한 연출가가 말하기를 <평론가들은 제대로 된 연극보다는 엉터리 연극을 보는 일이 훨씬 많을 것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시간을 불평하는 것으로 보내야 옳고, 또 엉터리를 지적해 낼 때 그는 진정으로 연극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된다>고 했다. 그는 이어서 <연극을 즐기지 않는 평론가는 죽은 평론가임이 분명하지만 또 연극을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를 모르면서 무조건 연극을 사랑한다는 평론가도 죽은 평론가가 된다>라고 주장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연극 예술가들도 평론가들의 부당한 칭찬의 대해서는 거부할 줄도 알아야 하고 합당한 비판에 대해서는 기꺼이 수용하는 자세를 배워야 한다. 비평 문화의 성숙, 그것은 연극 평론의 기능과 역할 회복을 위한 필요 충분조건이다.

넷째, 이제는 연극 비평에 있어서의 문학과 연극, 이론과 실제의 괴리를 극복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연극학을 전공하고 연극의 제작적 측면에 대한 현장 체험과 이해가 풍부한 쪽에 비평의 문호를 활짝 개방해야 할 것이다.

비평의 역할이란 결국 좋은 연극을 살리고 나쁜 연극을 도태시키는 것이 될 것임으로 연극의 발전을 위해서는 비평 작업이 보다 활발해져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상에서 지적된 문제점들을 직시하고 그 해결책들을 실천에 옮기는 일에 열과 성을 바쳐야 할 것이다. 끝으로 피처 부르크가 그의 값진 책 「빈 공간」에서 제시한 이상적 평론가 상을 소개하며 이 글을 맺는다.

<살아 있는 평론가는 연극의 이상과 가능치에 대해 분명한 개념을 갖고 있는 평론가이며, 새로운 연극 행사에 참여할 때마다 필요하다면 그 개념을 수정하거나 버릴 수 있을 만큼 용기 있는 평론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