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댕 미술관 로댕관
김화영 / 고려대 교수· 불문학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주불 한국 대사관은 파리의 북쪽 17지구의 빌리에 대로변에 있었다. 악명 높은 동백림 사건의 기억 때문인지 건물의 인상이 음산했었다. 그후 매우 다행스럽게도 대사관은 파리의 유서 깊은 지역으로 옮겨 앉게 되었다. 세느강 좌안의 이른바 『포브르 셍 제르맹』 거리에 당당히 자리잡게 된 것이다. 20세기 중엽 실존주의 작가들 때문에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 곳이 『셍 제르멩 데 프레』 거리요, 그곳의 카페 『되 마고』, 『플로르』 등이지만 그 지역에는 아득한 옛날부터 『셍 제르멩 데 프레』 수도원이 있었다 하여 그 이름이 그렇게 전해내려 온 것이다. 『포브르셍 제르멩』이라면 바로 그 수도원이 있는 중심지 근방의 변두리 동네란 뜻이다. 이 동네가 크게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이후다.
당대의 귀족들과 부호들이 이 지역에 으리으리한 저택을 짓기 시작하면서 이곳의 면모는 전혀 달라졌다. 특히 거대한 마차가 드나들 수 있는 대문들부터가 행인들의 시선을 압도했다. 육중한 대문이 열리면 마차가 당도하는 넓은 뜰이 나타나고 뜰의 저 안쪽에 주인이 거처하는 건물들이 그 위용을 자랑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 건물들 뒤쪽으로는 광대한 숲을 이루는 정원이 펼쳐진다. 이렇게 지어진 저택들의 문은 프랑스 대혁명으로 파손되거나 굳게 닫혀버렸다. 그리고 소유주가 프랑스 정부나 외국대사관으로 바뀌었다. 포부르 셍 제르멩 거리가 다시금 황금시대를 맞는 것은 19세기 초엽, 왕정복고시대였다. 183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발자크의 『인간희극』에는 바로 이 거리의 대저택이 자주 등장한다. 그의 유명한 소설 『고리오 영감』에서 시골의 몰락한 귀족가문의 아들 으젠 드 라스티냐크가 청운의 뜻을 품고 상경하여 찾아가는 먼 친척, 당시 파리의 귀족 사교계를 주름잡는 귀부인 드보쎄앙의 저택도 바로 포부르 셍 제르멩 구역의 그르넬 거리에 있다. 오늘날 주불 한국 대사관은 바로 그 그르넬 거리 125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드 보쎄앙 부인이 몽트리보 장군에게 실연한 슬픔을 못 이겨 노르망디로 은퇴하기 직전 그 장려하고도 서글픈 고별 무도회를 열었던 바로 그 저택을 대한민국 정부가 구입한 것일까 ? 그러나 보쎄앙 저택은 소설 속의 집일뿐이다.
이 동네의 자자한 명성도 루이 필립의 7월 왕조, 그리고 특히 루이 나폴레옹의 제2제정과 더불어 사양길에 접어들었고 세인들의 관심은 점차 샹젤리제 거리로 옮아갔다.
그러나 아직도 이 지역에 프랑스 정부의 청사들과 외국대사관이 밀집해 있다는 것은 바로 18세기와 왕정복고시대의 영화를 간접적으로 증언한다. 이 모든 기관들은 바로 광대한 대지 위에 대문, 뜰, 건물, 정원의 기본적 골격을 갖춘 옛날의 대저택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그르넬 거리에만 해도 교육성, 보훈처, 공업성, 스위스 대사관이 등이 있다. 특히 이 거리의 명물로는 한국대사관 정문과 마주보는 프랑스 지리원 건물이다. 1722년에는 지어진 이 저택은 「느와르무티에 관」이었고, 20세기 초엽에는 프랑스군 총사령부였었다. 포슈 장군은 여기서 운명했다.
파리 한국대사관에 볼일이 있어 들르게 되는 여행자는 잠시 마음의 여유를 얻어 바로 이와 같은 동네의 유서 깊은 역사와 내력을 상기하면서 대사관의 대문과 뜰 현관과 건물, 그리고 다행히 기회가 주어진다면 건물 뒤쪽으로 펼쳐진 드넓은 뜰을 감상해 볼일이다. 그리고 조금만 더 시간을 낼 수 있다면, 대사관의 대문에서 나서면서 왼쪽으로 불과 20여m 걸어나간 후 엥발리드 대로를 따라 다시 몇 걸음만 걸으면 나타나는 바렌느 거리의 첫 번째 저택 「비롱관」을 찾아가 볼 것을 권하고 싶다. 여기가 유명한 조각가 로댕의 작품을 소장한 로댕 미술관이다. 한국대사관에서 불과 도보로 5분 남짓, 그리고 약 1시간이면 미켈란젤로 이후 최대의 조각가라는 이 대예술가의 작품들을 두루 감상할 수 있다.
위대한 이 예술가의 작품들 못지 않게 우여곡절과 일화로 가득 찬 내력을 가진 것이 이 저택이다. 이 지역의 다른 많은 건물들과 마찬가지로 이 비롱관 역시 18세기에 지어졌다. 시골에서 가난뱅이로 상경하여 가발장사로 치부한 페랑크 드 모라스를 위하여 건축가 가브리엘과 오베르가 1731년에 완공한 건물이다. 이듬해 집주인이 사망하자 저택과 드넓은 땅은 뒤멘느 공작부인이 세내어 사용했고 1753년에는 튜울립 꽃을 미칠 듯이 사랑했던 비롱 원수의 소유로 넘어갔다. 비롱관이라는 명칭은 여기서 유래한다. 대혁명 이후에는 교황의 총독인 카프라라 추기경이 거처하기도 했고 러시아 대사관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 뒤에는 예수의 성심수도회에서 경영하는 상류사회출신 소녀들의 교육기관이 되었다. 후일 나폴레옹 3세와 결혼하여 으제니 황후가 될 몽티죠 백작부인도 이곳에서 소녀시절 교육을 받았다.
1904년 정교분리가 이루어지자 수도회가 나가고 저택은 거의 버림받다시피 되었다. 명목상 국가의 소유로 변했고 국가를 대리한 청산인이 그 용도를 아직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동안 임시로 이 저택의 놀라운 분위기에 매혹된 예술가들이 세를 들어 쓰게 되었다. 오늘날 나폴레옹의 석관이 안치된 엥발리드의 돔이 바로 머리위로 바라다 보이는 파리의 한복판에서, 돌연 마주치게 되는 이 한가한 시골 같은 분위기와 균형 잡힌 성곽의 우아함-여기에 반하지 않을 예술가가 어디 있겠는가 ? 당시 젊은 문학청년이었던 장 콕토의 술회에 귀를 기울여보자.
『학교를 빼먹고 어슬렁거리던 어느 날 바렌느 거리에서 나는 그 길과 엥발리드 대로가 만나는 모퉁이에서 우연히 어떤 저택의 뜰로 발을 들여놓게 되었기에 수위한테 그 집안에 들어가 구경을 좀 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비롱관이라 불리는 그 저택은 정교분리 이후 국가 청산인이 관리하는 동안 조각가 로댕이 건물의 몸체를 빌어 살고 있으며 나머지는 세를 놓는데, 따라 들어가 보겠다면 아직 사람이 들지 않은 방들을 보여주겠다는 대답이었다. 그중 어떤 것이 맘에 든다면 청산인 앞으로 신청만 하면 된다고 했다.
그날 저녁으로 당장 나는 그 저택의 큰 방 하나를 가지게 되었다.(수녀들이 경영하던 학교에서 춤과 음악을 가르치는 교실로 쓰던 방이었다). 싸구려 호텔 방을 한달 동안 빌리는 값 정도를 지불하고 나는 그 방을 1년 동안 쓰기로 계약한 것이었다.
건네 받은 커다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니 궁륭이 나타났고 궁륭은 정원으로 나 있었다. 정원인지 공원인지 채전인지 알 수도 없는 그런 숲이었다. 사춘기 특유의 아무 것도 모르는 눈으로 보았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놀라 자빠질 지경이었다. 아니 그래 파리가 이 같은 침묵의 섬을 에워싼 채 살아서 걸어다니고 있었더란 말인가 ? 침묵이란 소음과 대조를 통해서만 비로소 존재하는 것이라 지만 그래도 그곳의 침묵에는 정말이지 압도하는 그 무엇이 있었다. 침묵은 귀를 잠재우고 오직 눈으로만 보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풀과 나무들에서 솟아 나와서 그 침묵은 습관의 힘에 의하여 한 도시의 떠들썩한 소음을 지워버리는 것이었다. 침묵은 바로 버림받은 정원의 특권이었다. 이를테면 그 저택이야말로 '침묵의 장관'이라 할만한 것이었다. 따분한 되풀이에 지친 귀를 대신하여 결국은 눈으로 듣기에 이르는 특이한 현상인 것이다. 파리에서 수천 리나 떨어진 시골에 와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돌연 나를 가득한 침묵 속으로 던져 넣는 것이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잔해가 쌓여 있고 들장미가 향기를 뿜으면서 모래와 잡초의 둥근 골짜기에 뒤엉켜 있었다. 엉겅퀴와 나뭇가지들이 뒤덮이지 않은 유일한 곳이었다. 다른 데는 걷잡을 수 없도록 무질서하게 자란 식물들이 작은 처녀림을 이루고 있었다. 이끼가 돋아난 계단들, 녹색유리창이 난 건물의 정면, 해시계가 그 모든 무질서의 풍경을 굽어보고 있었다. 반면 내방의 창문 겸 출입문들은 융단처럼 빽빽하게 자란 물망초들 때문에 열리지 않았고 그 앞으로는 그야말로 초목의 터널들이었다.』 시인 장 콕토는 이처럼 대조각가 로댕이 느꼈을 이 저택의 인상을 오히려 더 생생하게 말해주고 있다.
비롱 저택이 정부관리로 넘어가 임시로 세를 놓게 되자 그곳으로 가장 먼저 들어가 살게된 사람은 여류 조각가 클라라 베스토프였다. 그 여자는 후일 『두이노의 연가』나 『말테의 수기』로 널리 알려진 오스트리아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부인이었다. 릴케는 빈의 어느 출판업자의 청을 받아 로댕에 관한 책을 쓰기 위하여 파리로 왔다가, 서투른 프랑스말 실력에도 불구하고 1905년 9월부터 로댕의 비서로 채용되어 뫼동에 있는 이 조각가와 함께 살았었다. 그러나 작업으로 피곤해진 로댕의 비위를 거스르게 되어 이듬해 5월, 시인 자신의 표현을 빌리건대 '도둑질한 하인처럼' 쫓겨나고 말았었다. 그러나 로댕에 대한 열렬한 찬미자였던 리께는 원한을 품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아내 덕분에 이 비롱관을 발견하자 이 저택이야말로 로댕에게 어울린다고 판단하여 즉시 그에게 연락을 했다.
그로부터 약 20년 전인 1889년, 로댕은 산책을 하다가 이탈리아 대로변, 클로 페이양에서 우연히 다 낡은 저택을 하나 발견했었다. 「라폴리 뇌부르」라는 버림받은 장원이었는데 나폴레옹의 시의였던 코르비자르, 나중에는 죠르쥬 상드와 시인 알프레드 드 뮈세가 들어 살았던 집이다. 이 집은 그리하여 로댕과 그의 아름다운 제자요 정부였던 카미유 클로델이 은밀하게 숨겨둔 채 만나 사랑을 나누었던 거처가 되었었다. 1895년 건물이 붕괴위험에 직면하자 로댕은 그곳을 떠나 뫼농으로 옮겨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모든 아틀리에들 가운데서 그가 가장 떠나기를 아쉬워했던 곳이다. 카미유의 추억이 서린 곳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18세기의 아름다운 건물을 애호했던 로댕에게 비롱관은 바로 무너져버린 「클로 페이양」을 고상하게 승격시키고 더욱 크게 확대해 놓은 그같은 장원이었다.
즉각적으로 결정이 내려졌다. 이제 스무 살 남짓한 학생 장 콕토가 그렇게 손쉽게 빌릴 수 있는 집이라면 당대 최대의 예술가요 옥스퍼드 대학의 명예박사인 68세의 로댕에겐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 방대한 비롱관의 1층 전체를 1년간 세내는데 불과 5900프랑이었다. 이리하여 1908년이래 지금까지 줄곧 비롱관은 부분적으로건 전체적으로건 「로댕의 집」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 비롱관에 들어있던 사람은 로댕, 클라라 베스토프, 릴케, 콕코만이 아니었다. 유명한 무용가 이사도라 던컨이 이 집에 무용교실을 열고 있었고 젊은 화가 마티스도 여기서 살았다. 반면 카페에서 노래하는 통속가수 잔느 블로크까지 으제니 황후가 드나들었던 이 집에 들어 산다는 사실이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더군다나 비극 배우 에두아르 막스(예명 드 막스)는 저택 안의 옛 예배당에 들어 살면서 남색행각을 일삼았다 하여 대예술가 로댕의 복잡한 여자관계와 아울러 도덕군자들에겐 지탄의 대상이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저택의 관리를 맡은 청산인은 이 같은 여론을 빌미 삼아 건물을 철거하고 건물 및 정원이 차지하고 있는 4만3천㎡의 광대한 땅을 45개의 필지로 쪼개어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재정적인 시각에서만 본다면 이것은 분명 현명한 처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비롱관에는 로댕이 들어앉아 있었다. 예술가의 친구들이 발벗고 나서서 항의했고 청년 콕토 역시 신문사의 친구들을 동원하여 여론형성에 분주했다. 이리하여 우선 18개월의 전세계약을 다시 맺은 로댕은 비롱관을 손에 넣을 계획을 세웠다. 돈으로 매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작품, 수집품 기타 소장품들과 함께 자신의 미술관을 만들어 국가에 헌납하는 계획이었다. 당시 법무장관 아리스티스 브리앙, 장차 외무장관과 국가수반이 될 폴 봉쿠르, 후일 대통령이 될 두 사람 폴 두메르, 레몽 프엥카레, 그리고 클레망소 등 거물급 인사들을 차례로 접촉했고 재무장관 역시 어느 정도 설득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구체적인 실무에는 첩첩한 난관이 남아 있었다, 무려 10여 개 부처의 허가를 받아야 하고 법안을 상정하여 상·하원의 동의를 얻어야 했다. 게다가 로댕 자신이 무관심해지기도 했다. 허물어지고만 클로 페이양 저택이 카미유 끌로델과 깊은 관계가 있다면 비롱관은 이 무렵 로댕의 주변에 돌연 나타난 드 슈와죌 공작부인과 깊은 관련이 있다. 팔레 르와얄 공원에서, 「앉아 있는 빅토르 위고」상 제막식을 할 때 이상하게도 「양키」 액센트가 심하게 섞인 말씨의 「여제자」로 로댕을 동반하면서 그녀는 처음 공석에 모습을 나타냈다. 로댕은 그를 「마담」이라고 불렀다.
미국 뉴욕에서 프랑스계 변호사로 널리 알려진 인사의 딸인 그녀는 루이 15세의 재상의 후손이지만 빈털터리인 슈와죌 공작과 결혼했다. 빈털터리일 뿐만 아니라 치유할 길이 없는 노름꾼인 남편은 돈이 생기는 일이라면 자기 아내의 복잡한 남자관계에도 잘 적응했다.
당시 미국에서 로댕의 인기는 상승일로에 있었고 예술가의 「뮤즈」로 자처하는 슈와죌 부인은 상류사회의 폭넓은 지면을 활용할 수 있어 그야말로 로댕의 대리인으로서는 적임자였다. 그러나 전 작품을 국가에 바치겠다는 로댕의 미술관 계획은 이 야심 많은 뮤즈의 사업에는 큰 장애였다. 슈와죌 부인은 1909년부터 1912년 가을까지 비롱관의 절대적인 여주인으로 행세하면서 로댕으로 하여금 오직 비롱관에서만 기거하고 수십 년의 반려인 로즈를 뫼동의 아틀리에 버려 두도록 만들었다. 슈와죌 공작과 부인은 이렇게 하여 로댕과 그 주변사람들 사이를 철저하게 가로막았다. 「오직 당신한테 돈을 뜯어낼 생각만 하는 그런 사람들은 상대도 하지 마세요.」 이리하여 수십 년간 친구요 찬미자요 협조자였던 모든 사람들이 다 멀어져 갔다.
이런 괴이한 고립 가운데 3년이 흘러가고 마침내 1912년 10월, 로댕은 슈와죌 공작 부부를 비롱관에서 추방해버리고 나서 벨기에로 여행을 떠나버렸다. 로댕은 오랜 알코올 남용으로부터 깨어나기 시작했다. 지난날의 작업조수들과 일을 재개했다. 기나긴 외출에서 돌아오듯 그는 로즈에게로 돌아갔다. 「나의 착한 로즈, 그대를 내 곁에 두신 신의 선물이 얼마나 위대한가에 대한 깊은 성찰로 이 편지를 그대에게 보내요. 이것을 그대의 너그러운 가슴속에 담아두시오, 나는 화요일에 돌아가겠소. 그대의 친구, 오귀스트 로댕」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편지들 중 하나로 손꼽히는 이 편지는 1913년 8월 24일 로댕이 로즈에게 보낸 것이다. 마침내 「로댕씨가 국가에 헌납하는 재산의 최종 인수에 관한 법안」은 1916년 9월 상원에서 치열한 논란 끝에 통과되었고 같은 해 11월에 하원을 통과함으로써 비롱관은 「로댕 미술관」으로 그 법적 지위를 획득했다. 로댕은 이 미술관에 대리석 작품 56점, 청동 작품 56점, 석고상 193점, 1백여 점의 테라코타, 2천 점이 넘는 스케치와 그림, 수백 점의 가치 있는 그리스·로마·고대 이집트 골동품, 그리고 고흐와 르느아르 등 거장들의 그림들을 기탁하면서 로즈가 살아있는 동안 국가가 연금을 지불한다는 조건을 포함시켰다. 그러나 대통령 프엥카레는 로즈가 로댕과 정식 결혼한 부인이 아니므로 연금을 지불하는 것은 위법이라고 반대했다. 해결책은 하나뿐이었다.
이리하여 1917년 1월29일, 77세의 백발노인 예술가 로댕은 1964년 24세 청년시절의 만나 53년간의 기나긴 생애를 함께 살아온 (카미유와 슈와죌 부인과 그외 많은 다른 여인들에도 불구하고) 로즈 뵈레와 뫼동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일차대전 중이어서 석탄도 때지 못하는 추운 날이었다. 결혼식을 마친 지 2주 후인 로즈와 로댕은 독감으로 세상을 떠났다. 국가는 연금을 지불한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로댕이 빚은 그녀의 반신상은 로댕 미술관 2층으로 올라가는 층계에 지금도 영원한 동반자의 모습으로 서 있다.(카미유 끌로델의 모습은 1층의 제6전시설, 슈와죌 부인의 모습은 제8전시실에서 만날 수 있다.)
로즈가 죽은 지 10개월 후, 1917년 11월 24일 로댕도 77세의, 격동에 찬 생애를 마치고 파리근교의 뫼동 옛집의 뜰에 로즈와 함께 묻혔다. 그들의 무덤돌위에서 유명한 조각 「생각하는 사람」이 천근같은 무게로 생각에 잠겨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