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연주의 활성화와 레퍼토리의 활성화 방안
국악 발전을 위한 제언
이해식 / 영남대 교수
「레모」라는 TV 영화를 보았다.(1990. 12. 1. 밤 KBS-2TV) 영화에 등장하는 무술의 종주국이 한국이란 것도 흥미를 끌었지만 무엇보다도 영화의 배경음악 속에 젓대, 가야금, 아쟁, 꽹과리 등의 한국악기 소리가 아무런 거부감 없이 화면을 따라서 흘러가는 것이었다. 영화음악의 작곡자로서는 한국악기를 매우 조심스럽게 다루는 눈치에다 젓대의 반복되는 구절이 많았지만 텍스처(texture)에 있어서 만은 그리 손색 있는 것은 아니었다.
거기에다 아리랑의 처음 두 소절 정도를 변주하여 배경음악으로 쓰는 역량이 수준급이었다. 한국 악기든 아리랑의 변주든 한국 사람의 정서와는 별개로 전개되는 영화음악이었지만 여기서하고 싶은 말은 한국 악기가 연주 기술의 개발에 따라서 생각보다 훨씬 넓은 연주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우리의 국악기의 연주 기술이나 영역은 거의 전통적인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것은 국악 연주가들의 독주회나 국악 관현악의 프로그램이 잘 말해 준다.
국악 독주회라면 전반은 정악이라 하여 독주 아닌 실내악 편성의 곡으로 순서를 짜고 후반의 독주 순서는 으레 산조가 온다. 국악 연주자의 노소를 가리지 않고 산조음악은 마치 보물처럼 여겨진다. 누구나 산조를 귀하게 여기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과거의 선조들이 일생을 바친 산조나 판소리를 지금 국악인들은 짧은 시간에 능률적으로 배우던가 아니면 현대 생활의 감각에 맞는 연주 방향을 찾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어떤 영화 음악에 국악기를 사용한다면 그것이 꼭 산조나 수제천 같은 음악이 아니라도 자유롭게 연주해 내야 한다는 것이다. 국악기로 국악다운 음악을 연주하지 않으면 큰일난다는 생각은 고집을 넘어서 무식에 가까운 소치다.
음악이든 악기이든 사람의 생활을 위해서 있는 것이니까 그것이 시위나 대모 군중 속에 때로는 술집에, 때로는 고귀한 무대에, 아무 곳이고 있을 수 있다.
국악스러운 음악도, 서양스러운 음악도 모두 연주할 수 있음에도 어느 한쪽을 삼가야 한다는 구별을 두기엔 현대의 생활은 너무 빠르다. 음악회에서 베토벤을 듣고 집에 와서 조용필을 듣는 것이 보편적인 시대가 될수록 영화나 방송 같은 대중 매체에 국악기가 많이 사용되도록 국악인들은 더 노력해야 하고 앞서 「레모」의 배경 음악처럼 국악기가 매끄럽게 쓰일 수 있도록 상투적 음악 어법에서 벗어나도록 국악 작곡가나 연주가들은 분발해야 한다.
국악 연주와 국악 레퍼토리의 활성화방안에 처음부터 영화를 들먹거린 것은 그것이 엄청난 대중매체(mass media)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옛날처럼 민속적이면서 인격적으로 결합된 사회가 아닌 기술양식의 획일성이 강해지는 사회이기 때문에 국악도 여기에 발을 맞추어 가야한다. 3, 40분 걸리는 교향곡이나 산조를 듣는 계층보다도 김완선, 민혜경, 이선희 등의 쇼를 즐기는 계층이 늘어가는 사회에 대고 영산회상이나 여민락이 지상최고의 음악이라 한들 전문가들만이 이를 받아드릴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작금 국악계에서 퍼지고 있는 국악가요, 국악동요, 국악성가 등의 음악은 기대에 찬 기획들이라 하겠다.
지금까지의 논의들은 국악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동·서 가리지 말고 어디에든 뛰어들고 끼여들자는 주장이 되었는데, 사실 우리는 바쁘게 뛰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 너무 편안한 생각과 생활을 하는 사람들로 있기 때문이다. 그럼 이번에는 잠시 동서를 갈라 보자.
국악스러운 표현에 여러 가지 이론(理論)들이 있고 길이 있으나 필자는 그 폭을 넓혀서 한국 사람의 정서라는 관건에 국악스러운 표현의 중점을 두고자 한다. 또 국악스러운 정서의 근거는 언어에 두고자 한다. 즉 국악의 근원은 국어에 있다는 말이 되겠다. 이것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이 판소리이며 판소리 바닥의 말로는 '이면'을 그리는 것이며 이를 바꾸어 말하면 가사윤색이다.
판소리가 그처럼 재미스럽고, 슈베르트의 가곡들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음은 음악이 사실적인 의미를 좇아서 '이면'을 그리고 시를 음악적으로 윤색하기 때문이다.
고전적 의미로 시는 곧 리듬이다.
다음은 국악은 아니지만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 담담하게 애창되는 박영미의「나는 괴로움 그대는 그리움」이라는 가요다. 방점은 필자가 찍은 것이다.
"나는 외로움 나는 떠도는 구름
나는 끝없는 바다 위를
방황하는 배……"
가사에 방점을 찍은 것은 당김음(syncopation)에 의한 음가(音價)와 악센트(pitchaccent)로써 가사의 내용을 윤색(강조)하는 것이다. 대중가용에 흔한 것처럼 이 노래도 첫박을 쉬고 나오는 멜로디로 일관되어 있다. 마치 판소리의 엇붙임처럼. 판소리식으로 이야기하면 반주는 음악적 시간을 극명하게 확인하는 온각이나 노래는 온각이 아닌 불완전한 반각으로써 리만(H. Rieman)의 소절 모티브(Takmotiv)를 연상케 한다.
굳이 가요를 선택해서 긴 잔소리를 늘어놓는 것은 아무래도 전통적인 성악보다는 가요가 일반적으로 우리의 주변에 가까이 있어서 이해하기 쉬우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어적 감각이 어느 만큼 공통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럼 이번에는 국악이라는 접두어로 시작되는 국악동요, 가요, 성가쪽을 살펴보자. 첫째 국악이란 단어가 붙으면 상투적으로 거의 6/8박자로 시작해서 가락은 5음 음계로 이어진다. 5음 음계로 작곡한다해서 다 국악스러운 것은 아니다.
이 지구상에는 5음 음계의 음악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으되 한국 음악의 관습과는 분명히 다른 것들이다. 마찬가지로 6/8박자 5음 음계와 굿거리 장단에 맞춘 다고 해서 그것이 곧 국악동요나 가요나 성가일 수는 없다 할 것이다. 정서가 다르기 때문이다. 필자의 손에 입수된 국악이란 단어가 붙은 성악들은 거개가 이런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관건은 언어의 음악적 표현, 음악의 언어적 표현이다.
이 두 가지가 일치되는 동요, 가요, 성가는 바이오와 통한다고 해도 억지는 아닐 것이다. 보기를 들면 바이오 멜로디, 바이오 리듬이 되어서 어느 사이 국악의 연주나 레퍼토리는 강력하게 활성화되어 나갈 것이다. 이런 과정을 환상이라고 일축해 버릴 사람이 있을 지 모르겠으나 노력에 따라서 환상은 얼마든지 현실로 다가올 수 있다. 돌이켜보면 히트되는 가요들은 어느 구석엔가 남다른 특징이 도사리고 있다. 국악의 활성화는 데몬스트레이션 단계에 있는 국악의 대중확산운동에 언어 감각적 특징을 불어넣는 일이다.
내친김에 국악성가를 잠시 이야기하자. 몇 십 년 전만 해도 교회에 장고를 들여놓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던 시절이 있었다. "어디 술집이나 기생이 두들기는 것을…." 그러나 지금은 교회에서 판소리뿐만 아니라 추수감사절에는 사물놀이 농악도 친다.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필자는 오랫동안 신학교에 출강한 적이 있다. 신학생들에게 민요에 가스펠 가사를 붙인 다음 교회에서 실습한 보고서를 제출케 하였다.
그때만 해도 70년대인데 교회의 장로나 목사의 몰이해에 부딪쳐서 실패로 끝난 경험이 있다. 민요 가스펠이란 "옹혜야 메추리란 놈이 옹혜야 알을 낳네" 대신 "할렐루야 예수 그리스도 할렐루야 나의 구주" 이런 식이다.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 후 당시 독일민요들을 성가로 차용한 것을 보면 우리 민요로 성가를 부르는 것이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기독교의 선교 초기부터 민요성가를 불렀더라면 오늘날 우리 국악의 양상은 많이 달라졌으리라. 동남아나 아프리카에서는 자기네 음악으로 예배를 치른다는 것을 알자. 어쨌든 성가를 국악으로 부른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겠지만 기독교의 보다 넓은 토착화를 위해서, 국악의 대중 선전을 위해서 동전처럼 앞면과 뒷면의 관계가 되어야 할 것이다.
선전(PR)이란 말은 원래 종교목적에 의해서 의식적으로 이용된 종교단체의 선교, 즉 전도 조직의 활동에 대해서 붙인 명칭으로 포교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종교(기독교만 지칭하는 것이 아닌)는 포교를 위해서 국악은 선전과 활성화를 위해서 서로 필요한 것이 아닌가.
멀리 조선시대의 향당교주(조선음악과 당나라 음악의 교대연주)까지 거슬러 가지 않더라도 현재의 육군본부 군악대에는 국악군악대가 있어서 의장행사 때 브라스 밴드와 교차 또는 동시 합주하는 일이 오래 전부터 있어 온다. 찬송가나 찬불가 책 속에 국악성가를 끼어 넣는 일을 주저할 것이 아니요, 교회나 사찰에 조그만 삼현육각이나 국악관현악단을 두어서 교수 또는 합주하면서 서로의 선전 효과를 올릴 수 있을 텐데….
밀스(C. Mills)에 의하면 대중매체는 대중에게 자아의식과 기술과 도피처를 함께 준다는 것이다. 이런 매스커뮤니케이션 가운데 권위주의적인 요소가 나타나면 대중은 거기에 일체화되거나 비합리적 행동을 일으킬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어떤 의미에서 대중매체는 맹목일 수 있는 것이다.
매스컴(mass communication을 일본 사람들이 줄인 것임)탄다는 말처럼 대중매체에 국악이 많았으면 하는 것이 모든 국악인들의 바람일 것이다. 그러나 예술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대중문화를 들여놓기를 요구하는 것이 대중매체의 본질이다. 설사 예술을 다루더라도 흔히 대중의 기대에 맞게 이를 재구성하는 것이 속성이다. 마당놀이 같은 것이 그 쉬운 보기이다. 마당놀이 같은 국악이 있으면 그와 다른 국악이 있음을 당연히 보여 주어야 하건만 그렇지 않음이 대중 매체의 생리적 문제다.
일찍이 라자스펠드(P. Lazarsfeld)는 라디오를 원자폭탄의 위력과 같다고 간파했으니 오늘날 텔레비전의 위력은 어디에 비교될지 자명하다. 텔레비전 같은 매체에 민속적 예술이 맞지 않는다는 주장이 학문적 견해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다지 옳은 주장은 아니라고 본다. 깊이 모르는 분야를 프로그램으로 하기는 좀 쉬운 일이 아니다.
피상적 국악 지식으로 국악 프로를 제작한다는 것은 맨날 그 타령에서 맴돌 뿐이다. 언론사의 운용으로 흥행되는 전통국악은 성황을 이룬다. 이처럼 방송사에 숙달되고 연구하는 수완이 있다면 성공적인 국악 프로를 제작할 수 있을 것이 분명하다. 방송에서의 국악을 심야나 새벽에만 편성하는 것은 무책임한 전철을 밟는 것에 다름 아니다.
방송 이야기가 나왔으나 좀 더 계속해보자. 어느 날 청소년 대상의 라디오 프로를 듣고 있었다(활동하면서 듣기 때문에 정확한 날자나 프로의 이름은 알지 못함). 될수록 말을 많이 하고 아는 체를 해야 유능한 디스크 자키라는 착각의 프로에서 "…궁, 상, 각, 치, 우가 우리나라의 음계인 줄 알았더니 중국의 음계라더군요. 우리나라의 순수한 음계는 황, 태, 중, 임, 남인데 제가 학교 다닐 때는 중, 임, 무, 황, 태로 배웠습니다…." 이렇게 이야기 한 뒤 국악을 한 곡 틀어 주겠지 하는 기대와는 달리 전혀 다른 음악이 스피커를 울린다. 다음 또 한가지 보기. "…우리나라 음악에 취타(吹打)라는 곡이 있는데,…타잔 영화에 나오는 치타가 아니고, 불고 친다는 행진곡을…." 그러면서 대취타, 만파정식지곡까지 들먹이며 길게 설명한 후 정말로 취타를 틀어주니, 아 이런 얼마나 싱그러움 음악인가. 비록 취타를 원숭이에 비교했을지언정 앞의 음계설명처럼 틀린 것도 아닌데다 방송바닥의 말로 튀지도 않고 오히려 이채롭다. 넓은 의미에 대중음악 방송이라면 국악이 빠져야 될 이유가 없다. 앞서 언론사의 조직적 운용으로 국악 흥행에 성공하는 것처럼 정령 역량 있는 진행자의 프로나 기량 있는 텔레비전 프로라면 국악편성이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우리의 언어, 역사, 음악을 국어, 국사, 국악이라고 한다. 그리고 한국미술, 한국무용(일부에서는 국무라고도 부른다), 씨름 등 여러 가지 고유의 한국문화가 있다. 우리는 음악을 듣기 전에 먼저 해설을 듣는 일이 많다. 해설이 음악을 이해하기 위한 보조 수단의 한계를 넘으면 그것은 이미 지루하다. 그런데 유독 국악만이 구차스러운 해설이 따른다. 여기서 구차스럽다는 말은 오류가 많다는 것이다.
국악이 아무리 전문적인 분야라도 해설 없이 이해할 수 없다면 우리의 과거가 얼마나 슬펐고 현실은 또 얼마나 한심스러운가 ? 여기서 한심스럽다 함은 국악독주회에도 결혼식장의 사회자처럼 해설자를 내세우는 관습이 늘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해설자는 국악의 특징을 나열하면서 연상 국악은 어려운 것이라고 반복 강조한다. 젠장 누구나 무대에 설 수 있으면 왜 국악이고 예술이겠는가 ?
가뜩이나 멀리 있는 국악을 어렵다고 겁(?)주면 어떡하란 말인가. 탄복이라도 하란 말인가. 단기 4294년에 출판된 장사훈 박사의 「국악개요」라는 책이 있다.
오늘날의 국악해설이라는 것이 이 책을 껑충 뛰어넘지 못하고 몇 십 년씩 반복되고 있다. 한두 번 접해본 사람이라면 천편일률적인 해설에 귀 기울일 수 있을는지 의심스럽다.
국악 연주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길게 여운이 남는 해설이 필요하다. 국악레퍼토리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해설은 쉽고 당대의 감각에 맞는 사회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사회성이라 함은 인접 학문과의 포괄적 연계성을 의미한다.
민속음악이나 대중음악은 곧 춤이라는 것이 공통이다. 어떤 음악이든 자기 흥에 맞으면 어깨춤이라도 나오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다. 사람은 놀지 않고 살수는 없다. 놀면서 노래 부르고 춤추고 몸 속에 쌓인 것이 있으면 씻어 내고 마음속에 걸린 것이 있으면 풀어낸다. 그래야 사람답게 사는 것이 사람이다.
우리의 전통무용은 어디에 내어놓아도 참으로 아름답다. 그런데 여기서 얘기하려는 것은 우아한 전통 춤이 아니라 일반 사람들이 추는 격식 없는 춤이다. 유원지에서 장고 장단에 맞추어 벌이는 디스코판을 부정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그런 놀이판에 국악기가 많이 동원되게 하는 것도 국악 활성화의 한가지 길이라는 의견에 웃을 사람이 있으면 조선시대에도 활발한 디스코 춤이 있었음을 알라. 아니 그보다도 더 먼저 원시적부터 디스코 춤이 있었을 것이다. 삭스(C. Sachs)에 의하면 원시인은 춤이 곧 일상적 생활이었다.
젓가락 장단이 점잖지 못하다고 생각해 온 사람들에게 세계의 여러 민족들이 음식을 먹는 도구(숟가락이나 젓가락 또는 그릇)의 소리에 맞추어 춤춘다는 인류학적 사실은 좋은 본보기이다. 그런 뜻에서 우리의 젓가락은 참으로 우수한 리듬 채(rhythm stick)요, 국악기이다. 제주도 부녀자들의 놀이에서는 젓가락으로 항아리 두드리는 장단에 맞추어 노래부른다.
국악의 활성화를 위한 필자의 의견은 정면보다는 우회작전이다. 판소리나 시조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문학을 병행한다. 장고는 춤과 모든 국악에 두루 통한다. 장고는 처음부터 어려운 장단을 배울 것이 아니라 농악놀이부터 시작함이 좋으나, 여러 무용학원에서 탈춤이나 장고 배우는 이가 많음은 국악의 활성화에 낙관적 시각을 갖게 한다. 여러 대학과 마을에 농악단이 있는 것처럼 새해에는 유수한 재벌 기업들이 농악팀을 설치해 봄직하다. 자기 회사의 운동팀 응원에도, 사원 친목회에도 도움이 되리라.
노사 분규가 순조롭게 해결되거나 분규 빈도가 낮아지리라. 장고나 꽹과리를 사장으로 대입시켜서 두드리면 무엇인지 풀릴 테니까, 그리고 전국 민속경연대회나 농악경연대회에 나가면 기업 선전도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