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리뷰 / 문학

포스트 모더니즘, 세기말적 상상력, 장정일




장석주 / 시인, 문학평론가

지난 8월에 동숭동의 한 작은 갤러리에서 일군의 젊은 시인, 화가, 전자음악가, 영화연출가, 현대무용가, 그리고 각 분야의 비평가들이 모여서 이른바 포스트 모더니즘 축제라는 걸 벌였다. 그리고 바로 지난 10월 하순에는 민족문학과 포스트 모더니즘을 주제로 하는 심포지엄이 열렸다. 앞의 축제나, 뒤의 심포지엄에는 각각 주최측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성황을 이뤘다. 최근 여러 잡지들에서는 또 다투어서 포스트 모더니즘 관련 논문을 수록하거나 좌담을 게재하고 있다. 이와같이 포스트 모더니즘은 문학, 사회, 예술 등의 분야에서 20세기 후반기의 문화 현상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개념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 포스트 모더니즘에 대해서 비판적 입장을 보이고 있는 사람들은 이것을 후기산업시대의 자본의 상업주의와 저급한 대중문화의 문화적 논리, 혹은 제국주의적 서구 자본주의의 시장 확산과 그 유지를 정당화해 주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한 변형쯤으로 여기며, 포스트 모더니즘이 내세우고 있는 해방의 논리를 현실 변혁 운동에 장애가 되는 거짓 해방의 논리라고 몰아세운다.

또 포스트 모더니즘을 적극 옹호하는 사람들은 포스트 모더니즘이 '가변성, 다양성, 차별성, 기동성, 커뮤니케이션, 지방 분권화, 그리고 국제화'되고 있는 20세기 후반기라는 이제까지 우리가 경험 해보지 못한 미증유의 '새로운 시대'에 다양한 형태로 생산되고 있는 새로운 예술들과 현상들을 설명해 주는 패러다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특히 포스트 모더니즘에 관한 논의가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분야가 바로 문학 분야이다. 그것은 아마도 다른 어떤 영역보다도 문학적 상상력이야말로 고성능의 지진계와 같이 시대의 지각변동을 가장 먼저 예민하게 포착하기 때문이리라. 80년대 이후 이성복, 황지우, 그리고 박남철과 같은 젊은 시인들이 보여줬던 전통적 시 형식에 대한 해체와 파괴의 양식화나, 그 이후 하재봉, 윤성근, 기형도, 송찬호, 유하 등과 같은 '경계선이 붕괴된 이후의 상상력'을 보여주는 젊은 시인들의 단절과 일탈의 상상력의 시들과, 구체성과 일상성을 전면에 내세우는 도시시들, 그리고 이인성과 최수철의 일련의 실험소설로부터 최근의 박인홍, 김수경, 장정일 등이 보여주는 세기말 징후군 소설들은 바로 '합리주의와 이성'의 신화가 거세된 이후의 열린 형식으로서의 문학, 즉 포스트 모더니즘 형식의 문학이 서서히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들의 문학을 지배하는, 현저하게 돌출하는 유희성이나 임의성, 탈이념화, 의도적 깊이없음, 도덕적 엄숙주의에 대한 야유, 정치적 허무주의, 주체의 소멸 등은 이제 한국 문학의 지평 속에도 포스트 모더니즘의 징후들이 더 이상 가려진 채 있지 않고 겉으로 불거져나오고 있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들의 문학은 그 전세대의 문학과는 확연하게 변별되는, 후기 자본주의적 포스트 모던 사회의 물적 기반과 현상을 두드러진 특징으로 머금고 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이 이미 '포스트 모던'한 사회적 조건이라는 토대 위에서 성립되고 있는 사실의 자연스러운 반영이다. 그러나, 아직 우리는 포스트 모더니즘이 무엇인가 하는 그 개념과 본질에 관해 확정된 합의 없이 그 용어를 혼란스럽게 사용하고 있다. 물론 그렇게 된 데는 일정한 이유가 있다. 즉 포스트 모더니즘이 하나의 신념이나 사상체계, 고답적 전통과 권위주의의 획일성, 그리고 총체적인 가치체계에 대한 해체와 거부로부터 시작된 포괄적 개념임으로 그것을 단일성의 논리로 설명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포스트 모더니즘이란 무엇인가. '탈'모더니즘이냐, '후기'모더니즘이냐. 그것은 모더니즘의 연장인가, 그것과의 단절인가. 그것을 한마디로 말하기는 쉽지 않다. 우리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포스트 모더니즘이 모더니즘 '현상 다음의 현상'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탈전통화, 탈중심화, 탈정전화의 특징을 보여준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모더니즘적 본질들, 이를테면 '불확정성, 파편화, 반리얼리즘, 전위적 실험성, 아이러니와 패러독스, 형식주의, 비역사성과 비정치성'들을 계승하면서, 그것의 극단화로 나아간다. 그것은 '자아나 주관성에 대한 새로운 입장, 패러디와 파스티쉬의 내용, 행위와 참여, 임의성과 우연성, 주변적인 것의 부상,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 탈장르화나 장르 확산, 자기반영성'등의 측면에서 모더니즘과의 단절, 변별적 입지를 갖는다. 따라서 포스트 모더니즘은 모더니즘과의 관계에서 단절과 이탈로서의 '탈'의 요소와 계승과 지속, 그리고 극단화로서의 '후기'의 요소를 동시에 끌어안고 있는 것이다.

내 나이 열아홉 살, 그때 내가 가장 가지고 싶었던 것은 타자기와 뭉크 화집과 카세트 라디오에 연결하여 들을 수 있게 하는 턴테이블이었다. 단지, 그것들만이 열아홉살 때 내가 이 세상으로부터 얻고자 원하는, 전부의 것이었다.

장정일의 최근 소설「아담이 눈뜰 때」는 이렇게 시작된다. 80년대 후반의 약속 없는 세대, 환멸의 세대의 한 사람인 장정일의 소설은 90년대 소설의 지형학에서 그 포스트 모더니즘적 요소 때문에 독특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장정일은 그의 시집들「햄버거에 관한 명상」,「길안에서의 택시잡기」,「서울에서 보낸 3주일」등을 통하여 경기관총처럼 쉬지 않고 쏟아붓는 요설과 재치, 경박함과 재기발랄함으로 80년대 후반기에 활동한 해체시의 제2세대의 선두 주자로 평가받아 왔다.

그가 희곡으로, 시나리오로, 소설과 비평으로 장르 확산을 시도하고 있는 것은 그리 놀랄만한 일은 아닐지 모른다. 그의 전작 소설「그것은 아무도 모른다」가 나왔을 때만 해도 나는 그의 소설들을 그다지 신뢰할 수가 없었다. 그 소설은 소재의 포스트 모던적 요소에도 불구하고, 아직 소설적 육화가 충분하지 않은, 다분히 서툴고 미숙한 소설이었다. 작가가 '길게' 써야한다는 강박 관념의 짓눌림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채 그가 이전에 써서 발표했던 온갖 잡동사니들을 아무런 내적 필연성도 없이 마구 쑤셔넣어 가까스로 장편소설의 형태를 만들어내기는 했지만, 그것은 조악한 제품이었고, 그것을 읽는 것은 대단히 고통스러운 경험이었다.

작가의 미숙성 탓에 그 '의미 부재'가 흉하게 불거져 보였던 전작「그것은 아무도 모른다」에 비하면 이번의「아담이 눈뜰 때」는 대단히 뛰어난, 완성도가 높은 소설이었다. 포스트 모던한 사회의 물적 기반과 그 황량한 문화의 미로를 헤매는, 대학입시에 실패한 한 열아홉 살의 청년의 내면과 경험의 외관을 경쾌한 언어로 그려내고 있는「아담이 눈뜰 때」는 분명히 주목할 만한 포스트 모더니즘 계열의 소설 중의 하나이다. 장정일의 소설의 포스트 모더니즘적 요소들은 하드락이나 디스코테크와 같은 대중문화에의 깊은 탐닉, 무절제하고 무분별한 정도의 아무런 도덕적 책무감, 혹은 혼 없는 섹스, 충동적이고 찰라주의적인 작중 인물들의 행동양식, '나는 일찍 죽은 자들만 믿을 뿐이야/나는 마약을 먹고 미친자들만 믿을 뿐이야'라는 구절 속에 언뜻 언뜻 비치는 기존의 권위주의적 질서나 문화에 대한 반항과 일탈의 정열, '나는 내게 맡겨진 투표용지에, 엿먹어라 자식들아, 라고 썼을 것이다.'라는 문맥에서 보여지는 정치에 대한 극단적인 혐오감과 야유, 현저한 자기방기와 탈이념화, 가부장적인 권위의 지움, 여관방 순례, 그리고 혼음과 남색…등 수없이 찾아진다. 작가 자신은 이와같은 포스트 모던적 삶과 일그러진 내면에 대한 탐색에 '세기말적 상상력'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다.

췌언을 하나 덧붙이자면, 이 소설의 결말은 지나치게 진부하고 낡아서 역겹기조차 하다. 그러나 장정일은「아담이 눈뜰 때」라는 이 한편의 소설로 90년대의 새로운 포스트 모더니즘 소설의 선두주자로 떠올랐다. 어쩌면 우리는 장정일 이후 더 많은 새로운 포스트 모더니즘 작가들의 소설을 읽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