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포먼스 개념의 일관성
김영재 / 미술평론가
서평이라는 양식을 통하여 먼저 퍼포먼스의 개념 정립을 시도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퍼포먼스란 비교적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행위미술의 양상을 지칭하는 말이지만 이 개념은 퍼포먼스라는 보통명사의 폭넓은 용법에 힘입어 귀걸이가 되었다가 코걸이가 되기도 하는 애매모호한 말이 되어버렸다. 이것은 퍼포먼스를 다루고 있는 몇 개의 책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오류이다.
퍼포먼스에 대한 접근방식으로서 박정진의「한국문화, 심정문화」와 심우성이 번역한 로슬리 골드버그의「퍼포먼스」를 선택하고, 보다 구체적인 행위미술의 양상으로서 르네 블록이 쓰고 전경희가 번역한「플럭시스」를 방증으로서, 그리고 퍼포먼스라는 개념이 포용될 수 있으리라 생각되는 바 미학적인 배경으로서 김채현이 번역한 피터 풀리의「모더니즘 이후의 미학」을 다루어 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여의치 않은 것이 서평이라는 것이었다. 시작이 절반이라는데 시작도 하기 전 책이름과 개념에서 문제가 생겼던 것이다. 심우성이 선택한 로슬리 골드버그의 대본에서 비롯되는 이 문제는 서문의 맨 처음 구절로 연결되고 있다. 그것은 부득불 어떠한 번역본의 경우일지라도 원전을 대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지금까지의 경험을 상기시켜 주는 사건이었다. 그리하여 네 편의 책을 중심으로 쓰려고 했던 서평은 원전이 구비되지 않은「플럭시스」와「모더니즘 이후의 미학」을 제외함으로써 두 편으로 줄어들었다.
그 사건이라는 것은 사실상 역자인 심우성의 탓은 아닐 터이지만 로슬리 골드버그의 1978년 서문을 대본으로 했다는 사실은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심우성이 번역한「퍼포먼스」의 서문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다.
퍼포먼스가 예술표현의 매체로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그 때문에 과거 예술가들의 모든 활동 분야의 전모는 대부분 그대로 지나쳐졌으며, 그들이 퍼포먼스라는 매체를 사용하게 된 것을 충분히 조사한 적도 없었다.
그런데 '1978년 2월과 1978년 1월'이라고 명기된 원전의 서문은 이와 다르게 시작되고 있다.
퍼포먼스가 그 자체로서 당연한 예술적인 표현의 매체라고 인정되게 된 것은 1970년대의 일이다. 70녀대는 컨셉추얼 아트(개념미술)의 전성기로서 개념미술이란 예술이 창작을 통한 예술적 산물이라기보다는 아이디어이며 예술이란 매매의 대상일 수 없다는 주장을 담고 있는 예술양식의 하나로서 퍼포먼스는 이러한 주장을 설명하거나 행동으로 옮겨서 보여준다는 측면을 갖고 있었다. 퍼포먼스는 그러므로 아이디어만이 무성했던 당시의 예술양상에서 가장 명확하게 눈으로 볼 수 있는 예술양상이 되었다. 주요 국제 아트센터에 퍼포먼스를 위한 예술공간이 주어질 정도로 퍼포먼스의 위치는 격상되었고 미술관에서는 페스티벌을 후원하고, 미술대학에선 퍼포먼스과정을 신설하였으며 퍼포먼스 전문 잡지가 등장하였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차이이다. 실제 퍼포먼스라는 말은 그 자체 예술사조가 아니며 그것이 예술사조의 하나로서 소개되고 인식되어진 것은 70년대에 들어서의 일이기 때문이다. 서문상의 차이점을 좀더 알아보기 위해 다시 심우성의 번역을 보기로 하자.
퍼포먼스의 역사는 연극의 역사와 동일하며 대본, 부독본, 사진, 관객의 기술에 의해 구성될 수밖에 없었다. 일찍이 보여졌거나 들려오던 것들은 오늘날의 상상력으로 재구성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다행한 일은 러시아 및 이탈리아 미래주의부터 시작하여 현재에 이르기까지, 퍼포먼스의 역사를 포괄적으로 돌이켜보는데 필요한 자료들이 여러 가지 형태로 풍부하게 존재하고 있다.
아마도 골드버그가 초판과 재판의 공백기간에 퍼포먼스의 개념을 체득한 결과이겠지만 초판의 서문에서 퍼포먼스라느 용어는 적어도 그리스에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두루 쓰일 수 있는 말로 소개되고 있고 이것은 서문이 바뀐 재판에서도 서문이 수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내용은 변함없이 수록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는 골드버그의 오류로 시선을 돌릴 필요가 생기게 되었다. 그렇다면 왜 퍼포먼스라는 용어가 문제가 되는지를 사전을 통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퍼포먼스Performance라는 말에 대하여 민중서림의 1980년 제2판 에센스 영한사전에는 1. 실행, 수행, 성취 2. 일, 작업, 행위, 동작 3. 성능 4. 성적, 성과 5. 선행, 공적 6. 연기, 연주, 솜씨, 기예 7. 공연, 흥행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1987년 제2판 Longman Dictionary of contemporary English에는 1. 대중 앞에서 행하는 극이나 음악, 트릭 등의 연기 2. 일솜씨 3. 성능 4. 행동하는 꼴로 되어 있다. 그리고 Collins의 1988년판 Dictionary of Art & Artists에는 '해프닝 란을 보시오'라는 주석이 전부이다. 민중판은 이미 미국에서는 쓰이지 않는 퍼포먼스의 용례가 주요용법으로 소개되고 롱맨 사전은 비교적 우리가 알고 있는 퍼포먼스를 정의하지만 어떠한 순서와 비중으로 해설하건 미술용어로서의 퍼포먼스와는 전혀 무관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콜린스 판은 이에 퍼포먼스를 해프닝의 범주에 묶어버리고 있지만 미술사전이니만큼 당연히 미술상의 퍼포먼스를 논하고 있다. 가로되, "퍼포먼스 아트는 가끔 해프닝과 동의어로 쓰이기도 하지만(해프닝에 비하여) 보다 연극적이고 주도 면밀하게 계획된 이벤트로서(해프닝이 특별히 창안된 환경 속에서 관객 참여를 허용하는데 비하여) 관객 참여의 형태로 나타나는 경우는 드물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렇게 장황히 퍼포먼스라는 말의 사전적 정의를 설명하는 이유는 퍼포먼스라는 말이 미술상의 용어로 등장하게 된 것이 1970년대이기 때문이다. 엘벤 존슨이 1982년 펴낸 American Artiuto on Art의 225페이지에는 이 퍼포먼스라는 양상이 Avalanche라는 잡지를 통하여 주로 소개되었다고 적고 있다. 구체적으로 브루스 노만과의 인터뷰에서 퍼포먼스가 거론되는 것은 1971년, 미로 아콘치의 퍼포먼스가 1971년, 크리스 버튼의 '보관함'이라는 퍼포먼스가 1971년, 로리 앤더슨의 퍼포먼스가 1980년 각각 퍼포먼스라는 이름으로 소개되거나 퍼포먼스라는 말이 하나의 전문적인 용어로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용어의 등장시기를 확인하기 위하여 딴 책을 뒤적일 수도 있다.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이다. 1984년판 Art After Modernism에서는 퍼포먼스가 아예 행위미술이라는 대명사로서가 아니라 연기나 흥행 등의 뜻으로만 쓰여지고 있을 따름이며 이러한 사정은 비교적 최근의 미술서적에서도 공통된 현상이다.
행위미술이라는 것은 Tafel(질료)와 Malerei(매체)를 이용하여 시각적 질서를 가진 구조물을 구축하는 형태의 미술양상―이를테면 회화나 조각 등에 비하여 행위를 질료로 삼고 예술가 자신이 매체가 되어 보여지는 시각적 현실을 말하는 것으로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두루 실험되어 왔던 예술의 한 분야이다. 이를테면 중국 명말, 오위, 장모, 왕약, 주단의 왕래사학파의 광란적인 미술행위에서 직접, 간접적인 영향을 받은 바 있으며 1940년에서 50년대 유럽을 강타했던 타쉬즘Tachisme과 앙포르멜Informel들은 행위미술의 한 양상이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결과적으로는 행위를 이용한 시각적 구조물의 구축이 목적이었으므로 우리는 그것을 행위미술이라고 따로 떼어서 생각하지는 아니한다. 그러나 1956년 도쿄의 오하라 홀에서 열린 구라이 그룹의 카즈오 시라가, 사부로 무라가미, 지로 요시하라가 보여준 행위는 1957년 알란 카프로가 보여준 행위와 함께 해프닝happening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게 된다. 이로부터 해프닝이라는 말이 바로 행위미술이라는 뜻으로 쓰이게 되는데 그렇다고 이들의 행위가 세칭 행위미술의 원조는 아니다. 왜냐하면 1952년 존 케이지와 로버트 라우센버그, 메르스 커닝햄이 보여준 이벤트event가 선례로서 기록되기 때문이다. 존 케이지의 이벤트는 행위미술의 골격인 무연과 무용의 용등의 개념을 정립하는 중대 사건이며 이후 미술계에서 하나의 장르로서 숱하게 실험과 검증을 거치게 되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케이지 자신의 음악이론을 행위로 표출한 것이라는 평가와 함께 단지 행위미술의 원조라는 입장에서는 언급이 회피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알고 있는 행위 미술은 이벤트, 해프닝을 거쳐 퍼포먼스라는 이름에 따라 의미와 개념이 바뀌어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 미술계의 외곽에서 몇몇 사람들이 해프닝을 '엉뚱짓'으로 고치자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퍼포먼스라는 말로써 행위미술의 모든 시대와 모든 양상을 설명하려는 것은 자다가 책상다리 긁는 식의 엉뚱한 해프닝이 되는 것이 아닌가? 골드버그는 이 책을 통해 1909년 2월 20일 마리네티가 피가로지에 발표한 '미래파선언'을 미래파의 퍼포먼스로, 다다의 1919년 카페 볼테르에서 있었던 행위를 부조리 퍼포먼스로, 1920년 1월 23일 파리에서 쟝 큐모, 막스쟈콥, 앙드레 부르몽, 드리스탕 짜라에 의해 보여진 행위를 초현실주의의 퍼포먼스로, 바우하우스의 쉴레머가 발표한〈제스튜어 댄스〉를 퍼포먼스 이론으로 소개하고 있다. 심지어는 어느 정도 객관적인 공인을 얻고 있는 용어인 존 케이지의 1952년 블랙 마운틴 이벤트조차 골드버그는〈제목이 붙여지지 않은 사건event〉으로, 알란 카프로의〈6부로 구성된 18개의 해프닝〉조차도 카프코의 발언을 빌려 퍼포먼스라 부를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여기서 시사한다는 표현을 쓴 것은 이 퍼포먼스라는 말이 소문자로 표기되고 있기 때문이지만 골드버그가 퍼포먼스를 소문자로 썼는가 대문자로 썼는가가 이 시점에서 논의의 대상은 아니다. 문제는 애당초 '행위미술=퍼포먼스'라는 고착된 시각으로 논지를 이끌어 나감으로써 기존의 개념과 범주를 혼동하고 있다는 데서 심각한 혼란이 야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만약 골드버그가 해프닝이나 이벤트에 대하여서까지 퍼포먼스라는 말을 고집할 양이면 의당 지금까지 기정사실화 된 개념을 뒤엎을 만한 확실한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여야 한다는 것은 퍼포먼스 논의 이전에 기본적인 논리의 문제일 것이다. 해프닝의 개념 규정을 위하여 전력한 마이클 커비, 알란 카프로, 아드리안 헨리 등의 노력이 이미 객관적인 공인을 받고 있음에 비추어 골드버그의 퍼포먼스 이론은 그것들을 뒤엎을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지는 않는다. 구렁이 담넘어가듯 어물쩍 행위=퍼포먼스로 얼버무리고 있는 것이다.
물론 역사라는 것이 접근하는 시각과 기술의 방식에 따라 개념이나 사건 자체의 비중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골드버그가 이미 1970년대 이후의 행위 양상으로 굳혀져가고 있는 퍼포먼스라는 개념을 1900년대 초기까지 소급하여 기술하려한다는 것은 의미의 혼란만 가져올 따름이라는 것이다. 전문용어로 제작되어 질 수는 있지만 굳이 기존의 의미체계를 깨뜨리기 위해서라면 충분한 근거와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논리가 뒤따라야한다는 상식조차 이 책에서는 지켜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골드버그가 '미래주의', '러시아의 미래주의와 구성주의', '다다'등으로 분류한 소제목들에 대하여 심우성이 '미래주의자 퍼포먼스', '러시아 퍼포먼스' '다다의 퍼포먼스' 등으로 고쳐 번역하고 있는 것은 근본적으로 로슬리 골드버그가 당초에 잘못 설정하고도 어물쩍 넘어가려고 하는 애매한 개념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개념 자체를 왜곡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지않을까?
이쯤에서 박정진의「한국문화, 심정문화」를 들여다보자. 이 책은 '예술인류학서설'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저자 박정진이 오랜 각고 끝에 제창하는 한국적인 예술학이자 인류학이다. 한국적인 멋에 의해 한국문화를 창달하고 해석하고자 하는 것이 저자의 의도이며 구체적인 연구의 목표로서 무당, 무속 및 무교, 한철학을 들고 있는데 이 추구의 과정은 '구조의 즐김=퍼포먼스Performance-연행(演行)' 이라고 일컬어진다.
예술인류학 연구의 저변에는 신화적 원형을 찾는다는 목표가 설정되어 있는데 마음의 본질, 자연의 본질인 기(氣)를 한국적 상징성으로 확대하며 구조나 언어적 상징보다는 느낌을 우선한다는 추구의 방법이 제시된다. 그리하여 예술인류학은 논문과 기존의 언어체계, 혹은 사변적이고 고식적인 사고방식의 모든 것을 포기하게 된다.
이 모든 논의는 '한' 이라는 시간성, 마당이라는 공간성이 상호교호하는 바 '한마당 굿판'을 궁구하는 설명들로 나타나고 있다. 예술인류학이 한마당의 철학을 해설하는 방편인만큼 한국적인 이기(理氣)와 음양의 개념이 율곡과 서화담의 이론으로 무장하면서 사물과 언어를 하나가 되게 하는 주술적 기능이 사상적 핵심으로 등장한다. 구체적으로 언급하자면 이(理)는 존재적이고 기(氣) 생성적인데 한은 양자를 공유하는 상호보완적인 개념이라는 것이다. 원초적인 언어의 상징화 과정으로서의 굿판=행위는 신화적 원형으로서 디자인에서 태극, 행태에서 연줄, 문화에서 음양이 상징-의례의 형식으로 그리고 페스티벌로 표상되어 나타난다. 한마디로 예술인류학이 결론짓는 바 한국문화의 핵심은 신내림의 문화이다. 이것을 박정진은 역동적인 장의 개폐이론(DSCO)으로 설명하고 있다.
박정진의 예술인류학 서설은 한국문화와 신화적 원형의 설명들로서 매우 훌륭한 업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 심지어 이 연구는 일본인이 한국인의 형태를 분석하여 '적당함의 문화' 라고 부르는 배경까지가 설명될 수 있는 개연적인 뼈대를 가지고 있으며 나아가 한국인의 소탈함, 한(韓)으로 치환된 한(恨)의 실체까지도 설명될 수 있는 체계이다. 그러나 이러한 학문의 연구에 있어서 기본적인 마음가짐을 '심정'과 '느낌'으로 일관한다는 것은 분명히 논리적 오류를 내포하게 될 가능성을 가지게 된다. 비록 예술인류학이 체질적으로 이러한 논리적 추구를 거부한다 하더라도 논리적 오류를 지적하는 도전에 대응할 수 있는 논리는 가져야한다. 이러한 것이 구체적으로 지적될 수 있는 것이 연구의 전 과정에서 보이는 초월적 사고와 가끔씩 엿보이는 개념의 오류이다.
이러한 지적은 퍼포먼스라는 개념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박정진은 예술(상징) 인류학이 집단의 실체적 성격을 상징으로 환원시킴으로서 집단의 변화를 파악하려는 것으로서 기본 구조보다는 인간의 마음이 어떻게 재구성되는가를 경험적인 차원에서 보여주려는 것이며 이러한 상징화한 집단의 변화를 잘 살펴볼 수 있는 것이 의례이기에 예술(상징) 인류학은 의례Ritual에서 그 본래의 모습을 찾는다고 설명하고 있다.
예컨대 여러 가지 상상의(언어적) 세계들은 (비언어적) 신체적인 연행Performance에서 하나가 되고 역동적이고 일원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연행의 세계는 모순적이고 역설적인 것들이 한덩어리가 된다. 연행의 세계는 비언어, 무의식, 신화의 세계이다. 이는 상징 인류학이 의례Ritual에서 그 본래적 모습을 찾음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이것은 결코 무리한 상황 설정이 아니다. 퍼포먼스라는 보통명사로서 의례와 상징을 설명하는 것은 연행이라는 말로 이를 설명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박정진은 퍼포먼스가 공연예술, 행위미술, 일상행위의 의미로 쓰임을 주지시키면서 그중 행위미술은 미술의 생활로의 확대, 일상행위는 생활 속의 아름다움의 발견이라는 관점으로 논의를 펴나가고 있다. 또 페스티벌이나 제의, 올림픽들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개념에서 이미지, 행위에 이르기까지 퍼포먼스라는 개념 아래 통일이 되고 있다고 본다. 그리하여 퍼포먼스는 때로는 운동으로 살아 있어야 하고 새로운 의미로 분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퍼포먼스의 제의성을 상징과 기, 또 언어와 사물의 교호작용으로 보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문제점을 찾을 수 없다. 그것이 퍼포먼스이건 연행이건 의도하는 바를 설명하는 보통명사로서 설득력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미술사상의 퍼포먼스를 1960년대 말에 나타난 것으로 기술하는 것은 다분히 문제가 있다. 이 연대에 따른 명칭은 최소한 로슬리 골드버그에서, 나아가 행위미술을 기술하는 모든 학자들의 견해와 다르다. 즉 골드버그가 1900년대초의 행위 양상까지를 퍼포먼스로 보고하기 전의 문헌상으로는 퍼포먼스가 미술 전문용어로 수록된 일이 없기 때문이며 골드버그의 어휘 사용상 문제점은 이미 지적된 바 있다.
그리고 행위미술의 장르가 해프닝, 프럭서스, 보디 페인팅, 퍼포먼스로 나뉜다는 견해는 아직 공인되기에 만족스런 분류는 아니다. 즉 장르라는 말이 '풍속화'를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고 보면 당연히 예술의 부문, 종류, 양식, 행동을 뜻하는 말로서 독립된 하나의 분야를 일컬을 터인데 예시된 행위미술들은 분야라기보다는 동시 다발적으로 혹은 동시적으로 꼬리를 물고 일어난 행위의 양상에 붙어있는 이름들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해프닝-퍼포먼스는 동시적인 계승의 양식이고 해프닝-플럭서스는 미국과 독일에서 알란 카프로와 요셉 보이스로 대표될지언정 지정학적인 차이와 약간의 개념차는 있을지라도 동시대적이고 유사한 양상으로 간주된다. 그리고 보디페인팅은 이브 끌렝의〈인체측정학-Antropometrior〉등의 작품에서 비교적 밀도있게 시도되긴 했지만 하나의 장르라기보다는 여타 행위의 종속개념으로 간주될 수도 있는 형태와 양상이다. 사실 행위미술이라 했을 때 신체에 뭔가의 치장을 하지 않는 경우란 드문 것이다. 해프닝의 범주에서 취급되고 있는 짐 다인의〈자동차충돌〉, 길버트와 죠지의〈살아있는 조각〉, 그리고 플럭서스의 대표격인 요셉 보이스의〈어떻게 죽은 토끼에게 그림을 가르치란 말인가〉, 퍼포먼스로 불리우는 신디 서먼의〈무제〉를 위한 분장 등에서 작가는 어떤 형태건 몸에 치장을 한 형태로 보여진 바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논의를 진전시켜 가면 서평이라기보다는 퍼포먼스라는 어휘를 트집잡아 오랜 각고와 집념의 결산인 저서와 역서를 꼬집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학문이 반석 같은 굳건한 체계로 성립하기 위해서 먼저 필요한 것은 자체 방어의 철통같은 논리 체계이다. 어떻게 보면 학문이나 논리는 공격적이라기보다는 편집광적인 수비의 성격을 가지고 있고 그 수성의 논리란 바로 자기합리화의 논리라 말할 수 있다. 이 자기합리화의 과정이 얼마나 철저한가와 얼마만큼 객관적인가에 따라 그 학문의 심도와 밀도가 평가되는 것이다. 개미 한 마리가 둑을 무너뜨린다고 한마디 한마디 말과 개념의 선택이 얼마만큼 중요한가를 일깨워주는 예로서 서평에 가름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