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더니즘의 문화 논리
이승훈 / 시인, 한양대 국문학과 교수
포스트모더니즘의 개념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모더니즘의 특성과 한계를 정확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용어 자체가 모더니즘과의 관계를 암시하기 때문이다.
첫째는 모더니즘과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입장, 둘째는 모더니즘과의 단절을 강조하는 입장, 셋째는 모더니즘과의 절충을 강조하는 입장이 그것이다. 이런 입장들은 모두 나름대로의 시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을 새롭게 이해하려는 지적 열망을 표상한다. 나는 다른 글에서 이상 세 가지 입장을 간추리고 나대로의 견해를 밝힌 바 있다1). 따라서 이 글에서는 그때 좀더 찬찬히 해명할 수 없었던 문제들을 중심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의 개념을 살피기로 한다.
1. 미적 현상과 사회적 현상
포스트모더니즘은 평가 개념이라기보다는 이 시대가 보여주는 문화 현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더니즘과의 관계를 전제로 말하는 경우에도 단순한 미적 범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동안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관계가 명료하게 분별될 수 없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두 개의 사조를 지나치게 미적 범주로만 인식했기 때문이다. 좀더 시간을 넓혀 광의의 문화 현상으로 수용하는 경우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성은 한결 뚜렷이 드러난다. 일반적으로 문화 현상은 사회·경제적 현상과 대립된다. 마르크스의 논리에 따르면 문화 현상은 상부구조, 사회·경제적 현상은 물적 토대에 해당된다. 이 시대의 문화 현상은 포스트모더니즘을 규정하는 경우 우리가 관심을 두어야 할 부분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앞 시대의 문화 현상과 변별되는 특성, 다른 하나는 그런 변별성을 전제로 드러나는 문화적 구조이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문화적 구조란 문화 자체의 내적 구조와 외적 구조를 함께 일컫는다. 외적 구조란 말은 다소 이상하게 들릴지 모른다. 내가 굳이 이런 용어를 쓰는 것은, 문화 현상을 좀더 거시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모든 문화 현상은 아무리 자율성이 강조된다고 하더라도 물적 토대, 그러니까 사회·경제적 현상과의 관계를 벗어날 수 없다. 여기서 사용되는 문화의 외적 구조라는 말은 문화 현상과 사회·경제적 현상의 관계를 의미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이 시대의 문화 현상으로 간주하면서 그 외적 구조에 관심을 기울인 이론가로는 이 땅에도 소개된 바 있는 제임슨F. Jameson을 들 수 있다. 그는 세 편의 논문을 통해 포스트모더니즘의 문화 현상을 해명하고 있다. 첫 번째 논문은「포스트모더니즘과 소비사회」(1985), 두 번째 논문은「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자본주의의 문화 논리」(1984), 세 번째 논문은「해석 없이 읽기:포스트모더니즘과 비디오-텍스트」(1987)이다. 이상 세 논문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관계, 포스트모더니즘의 내적 구조와 외적 구조를 이해하는 데에 많은 도움을 준다. 따라서 나는 이 글에서 제임슨의 견해를 토대로 포스트모더니즘의 문제점을 살피기로 한다.
첫 번째 논문에서 제임슨이 강조하는 것은 문화 현상과 사회 현상의 관계이다. 그는 이 시대의 문화 현상으로 이른바 혼성모방pastiche의 개념을 들고 있다. 혼성모방이란 쉽게 말하면 미술의 경우 다른 화가의 여러 작품에서 부분적인 모티브들을 인용하여 다시 조합해 마치 하나의 독립된 독창적인 작품과 같이 만드는 기법을 뜻한다. 이런 기법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차이점을 비교적 분명하게 보여준다. 혼성모방의 형식은 모더니즘이 보여주는 꼴라쥬 기법과 유사하다. 그러나 모더니즘의 경우 통합된 개성, 표현의 깊이가 있음에 반해 포스트모더니즘의 경우에는 그런 특성이 소멸한다. 말하자면 혼성모방의 형식은 문체의 다중화, 그것도 깊이 없는 다중화의 현상을 보여준다. 한 마디로 모더니즘의 꼴라쥬가 통합된 개성과 깊이를 보여줌에 반해 포스트모더니즘의 파스티시는 분열된 개성과 깊이 없음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예술은 '자아상실의 정신분열증적 경험'을 표현한다. 정신분열증적 경험이기 때문에 시간에 대한 인식도 모호하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는 문체의 다중화, 패션의 증대, 광고, 전자 미디어가 날로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이런 사회적 특성을 제임슨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사회라고 정의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사회적 특성과 포스트모더니즘의 문화적 특성은 서로 대응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문화적 특성으로 규정한 정신분열증적 파스티시, 역사 감각의 소멸은 바로 위에서 말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사회적 특성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특성은 단순히 사회 현상과의 관계만으로는 제대로 해명되지 않는다. 제임슨이 두 번째 논문에서 시도하는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문화 현상과 사회·경제적 현상과의 관계이다.
이 논문은 첫 번째 논문을 수정 보완한 것으로, 여기서 그는 이 시대의 사회·경제적 현상을 마르크스가 예견한 것 같은 자본주의 체제의 몰락이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가 더욱 강화되고 심화되는 단계로 인식한다. 그가 이 시대의 사회·경제적 현상을 그렇게 인식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만델Mandel은 자본주의의 3단계 확정설을 주장한 바 있고, 제임슨은 만델의 견해를 빌려 포스트모더니즘과 자본주의의 관계를 새롭게 해명한다. 그에 의하면 자본주의는 크게 시장자본주의, 독점자본주의, 다국적자본주의로 발전한다. 시장자본주의의 단계는, 시기적으로는 1700년부터 1850년까지 나타나며, 이 단계에서는 산업 자본이 국가 시장 속에서 성장한다. 독점자본주의의 단계는 흔히 제국주의의 단계로도 불리는바, 시기적으로는 1850년 이후부터 1950년까지 나타나며, 자본이 국가 시장의 범위를 벗어나 세계 시장으로 침투한다. 이때는 식민 정책이 자본 축적을 도우며 식민지는 원료와 저임금 노동력을 제공함으로써 착취의 대상이 된다. 끝으로 다국적자본주의의 단계는 1950년 이후 나타나며, 제임슨은 이 시기를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로 부른다. 이 시기가 되면 자본은 국제적 협동을 통하여 성장하며, 따라서 국가 경제의 범위를 초월한다. 자본주의의 첫째 단계는 증기기관의 발명과 관계되고, 둘째 단계는 전기의 발명과 관계되고, 셋째 단계는 전자 및 핵장치들과 관계된다. 따라서 이런 3단계는 최초의 산업혁명 이후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에 의해 생산된 기술상의 세 가지 혁명에 그대로 대응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로 불리는 다국적자본주의 혹은 후기자본주의 혹은 소비자본주의의 시대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문화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2. 후기자본주의의 문화 논리
후기자본주의 시대에는 다국적성 혹은 소비성이 암시하듯이 일체의 문화 현상이 상품으로 둔갑한다. 낡은 마르크스의 사회이론에 따르면 문화 형식, 이른바 이데올로기는 허위 의식으로 정의된다. 이데올로기는 물적 토대, 곧 사회·경제적 현실과 대립되는 경험·사상의 집합적 표현을 뜻한다. 이데올로기가 허위 의식을 지니지 않는다고 주장한 이론가는 엥겔스이다. 그에 의하면 이데올로기는 물적 토대를 은폐하는 왜곡된 거울 혹은 베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론에 의하면 광고, TV, 기타 대중 매체를 포함하는 일체의 문화 형식들은 이데올로기적 베일, 그러니까 왜곡된 거울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생산품으로 인식된다. 말하자면 이런 문화 형식들은 생산품으로서 시장경제의 원리를 따른다. 교환가치, 시장성, 소비성의 지배를 받는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문화 형식이 보여주는 두드러진 특성은 이런 모순성, 그러니까 문화 형상이 사회·경제적 현상과의 변별성을 상실한 점에 있다. 이 시대에는 문화 현상과 사회·경제적 현상, 상부구조와 하부구조, 이데올로기와 물적 토대의 대립이라는 말이 효용가치를 상실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지, 문체, 재현같은 문화 개념들은 경제적 생산에 부수되는 장식품이 아니라 그 자체가 훌륭한 생산품이 된다. 나아가서 정보기술의 개발은 정보 자체를 상품으로 만든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가 보여주는 이런 문화 형상을 제임슨은 한마디로 문화 폭발이라는 말로 요약한다. 이 시대에 우리가 체험하는 것은 문화의 거대한 확장 현상이다. 말하자면 사회·경제적 현상과 변별되는 문화 현상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일체의 사회 현상이 문화 현상과 동일시되고, 또한 이런 문화 현상은 사회·경제적 가치와 동일시된다. 그렇다면 이 시대 문화의 내적 구조는 어떤 특성을 보여주는 것일까. 일반적으로 문화 현상은 자연현상과 대립된다. 인간이 물질적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것이 자연스런 현상이라면, 그런 욕망을 초월해서 정신적 지적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것은 문화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 형식을 물적 토대와 대립시켜 파악하는 것은 이런 사정 때문이다. 나아가 문화 형식과 물적 토대는 서로 대립될 뿐만 아니라 상호 반영의 관계로도 나타내고, 변증법적인 관계로도 나타난다. 문화 형식들은 존재의 차원이 아니라 의미의 차원에 있다고 할 수도 있다. 기호론의 시각에 따르면 문화 현상과 물적 토대의 관계는 지시물과 기호의 관계에 대응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문화적 특징을, 그것도 내적 구조를 살피기 위해서는 그 기호론적 특성을 살피는 일도 시사하는 바가 많으리라고 본다.
제임슨이 세 번째 논문에서 시도하는 것이 그렇다. 그는 만델이 제시한 자본주의의 3단계 발달설을 중심으로 이른바 기호와 지시문의 관계가 어떻게 변하는 가를 해명한다. 자본주의의 첫째 단계에서는 기호와 지시물이 분리된다. 그렇게 되는 것은 부르주아 자본주의의 사회가 시작되면서 우리가 체험하는 이른바 분화 개념이 계기를 이룬다. 초기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자본과 노동이 분화된다. 이런 분화 현상은 널리 알려진 것처럼 사회적 관계를 비인간적인 사물로 인식케 하는 이른바 문화 현상reification을 낳는다. 초기의 영웅적 자본주의의 확장은 자본과 노동, 교환가치와 사용가치, 소유자와 노동자의 분화에 힘입은 바 크다. 이런 문화 현상이 언어의 영역에 대입되면 그것은 기호와 지시물의 분리라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기호와 지시물이 분리되면서 기호는 지시물을 통제하고 규제한다. 기호와 지시물이 분리되었다는 사실은 둘 사이에 거리가 생겼음을 뜻하고, 또한 이 거리 때문에 기호는 지시물을 비판할 수 있게 된다. 언어나 예술 현상에 대입하면 이런 현상은 리얼리즘의 태도로 나타난다. 리얼리스트들은 기호의 추상적 과학적 가치를 중시하면서, 곧 과학적 지시적 언어를 중시하면서 지시물, 곧 사회·경제적 현상을 객관적으로 묘사하고 동시에 비판한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둘째 단계에 오면 위에서 말한 분화 개념은 더욱 심화되고, 따라서 문화 현상이 더욱 두드러진다. 그렇기 때문에 기호와 지시물의 분리 현상 역시 심화된다. 비록 지시물의 세계를 완전히 상실한 것은 아니지만, 이 시대가 되면 기호는 지시물로부터 현격히 분리되기 때문에, 관점에 따라서는 기호가 탈지시적인 특성을 보이는 것 같다. 이런 기호적 특성을 예술 현상에 대입하면 그것은 이른바 모더니즘의 태도로 나타난다. 모더니스트들은 언어의 절대적 자율성을 강조한다. 이때의 자율성이란 탈지시성을 뜻한다. 이들은 언어의 자율성을 강조하면서 기호가 지시물과 무관하듯이 문화 현상 역시 사회·경제적 현실과 무관함을 주장한다. 모더니스트들은 사회·경제적 현실을 비판하되, 거리를 두고 객관적으로 비판하는 게 아니라, 사회·경제적 현실을 초월하는 다른 세계를 상징하면서 비판한다. 이른바 유토피아에의 꿈을 간직한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문화 과정은 지속된다. 자본주의의 셋째 단계, 곧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에는 기호가 지시성을 다시 회복한다. 그러나 이때의 기호와 지시물의 관계는 분리되기 이전의 관계라기보다는 매우 특이한 양상을 나타낸다. 특이하다는 것은 이 시대의 기호적 특성이 자본의 힘과 관계되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시대의 자본은 문화 현상을 지배한다. 따라서 언어의 영역이라고 해서 이런 자본의 힘으로부터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자본의 힘은 언어, 그러니까 기호에도 침투한다. 광고나 TV가 문화 현상이면서 동시에 경제 현상이 되듯이, 기호 역시 기호이면서 동시에 지시물이 된다. 소쉬르Saussure가 지적했듯이 모든 기호는 기호와 지시물, 소리 심상과 개념, 음성적 요소와 의미적 요소, 물질적 요소와 추상적 요소로 나누어진다. 전자를 시니피앙signifiant, 후자를 시니피에signifie라고 부른다. 광고나 TV가 문화 현상이면서 동시에 경제 현상으로 인식된다는 것은 소쉬르의 용어에 의하면 그것이 시니피에이면서 동시에 시니피앙임을 뜻한다. 물질적 가치와 문화적 가치가 동일시된다. 자본의 힘에 의한 이런 동일시 현상은 언어기호의 영역에도 그대로 나타난 셈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언어, 혹은 예술은 그런 점에서 시니피앙과 시니피에가 분리되지 않는다는 특성, 따라서 제멋대로 노는 시니피앙의 유희라는 특성을 보여준다. 모더니즘의 경우에도 시니피앙이 강조되었다. 그러나 이때에는 시니피에와의 관계가 전제되고, 따라서 자율적인 시니피에, 곧 사물의 본질을 추구한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의 경우에는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관계가 소멸하기 때문에 무슨 자율적인 시니피에, 그러니까 사물의 본질 같은 개념은 설자리가 없게 된다. 남는 것은 언어 기호의 물적 현상인 시니피앙의 순수하고 우연적인 유희뿐이다.
3. 과학적 지식과 서사적 지식
포스트모더니즘이 보여주는 이런 언어기호적 특성은 어떤 사회적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리요따르J. Lyotard는 이런 언어 형식을 담론 특히 서사narrative와 관련시켜 그 사회적 의미를 해명한다3). 그가「포스트모던의 조건」에서 특히 관심을 두는 것은 현대 과학의 특성이다. 현대 과학의 특성은 관점에 따라 여러 가지로 규명된다. 그는 서사의 이론에 입각해서 현대 과학의 특성을 해명한다. 서사의 이론에 따르면 현대 과학 역시 다른 지식 분야가 그렇듯이 하나의 담론discourse으로 인식된다. 과학적 담론 혹은 과학적 지식은 그런 점에서 특수한 서사의 형식을 보여준다. 따라서 현대 과학의 서사적 기능을 살피는 일은 곧 현대 과학의 특성을 살피는 일과 통한다. 먼저 서사 혹은 서사적 지식이 나타내는 사회적 기능은 무엇인가. 리요따르는 서사적 지식을 크게 두 가지 유형에 의해 정의한다. 하나는 원시사회의 서사, 다른 하나는 리듬 형식의 서사이다. 전자의 보기로는 남미의 캐쉬나후아 인디언들 사이에 유행하는 것을 들 수 있다. 그 내적 규칙은 고정된 원리에 의존한다. 이런 서사에서는 이야기꾼이 자신을 캐쉬나후아인으로 명명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하는 바, 이런 명명에 의해 그는 자신이 속한 종족의 정통성을 주장하고 따라서 이야기꾼으로서의 권리를 지닌다. 이런 유형의 서사는 이른바 자아합법성의 기능을 나타낸다. 말하자면 이런 방식으로 이야기함으로써 이야기꾼에게는 이야기할 정당한 권리를 소유하게 된다. 그런가 하면 후자, 그러니까 리듬 형식의 서사는 일정한 율격 혹은 맥박을 실현함으로써 자연적 시간의 불규칙성을 고정시키는 기능을 나타낸다. 이런 서사는 흔히 서사의 특성으로 인식되는 서사 자체의 고유한 시간적 전개가 아니라 시간에 대한 감각 자체를 무화시킨다. 이런 유형의 서사는 자아합법성이 아니라 집단합법성의 기능을 나타낸다. 집단의 자기동일성을 증명하는 셈이다. 그리고 이때의 집단합법성의 기능은 문화합법성의 기능과 통한다.
18세기 이후 모든 과학은 리듬 형식의 서사가 나타내는 이런 집단합법성의 개념에 반대한다. 과학적 지식은 서사보다는 외연을 강조함으로써 사회를 결속시키는 서사적 특성을 상실한다. 또한 과학적 지식과 수사적 지식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존재하게 된다. 원시 서사의 경우 합법성은 실제 수행performance에 의존한다. 말하자면 어떤 논증이나 증명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과학적 지식의 경우에는 그 합법성이 자체의 수행만으로는 성취되지 않는다. 과학적 지식이 서사적 지식과 다른 점, 곧 사회적 집단적 결속을 가능케 하는 교통 형식과 분리된다는 사실은 과학적 지식의 합법성에 대한 질문을 낳는다.
리요따르에 의하면 과학이 어쩔 수 없이 서사의 세계로 회귀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런 사정 때문이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서사에 의해서만 과학적 지식의 합법성과 정통성이 인정되기 때문이다. 그동안 과학이 기댄 서사의 유형으로는 크게 두 가지가 지적된다. 하나는 정치적 서사, 다른 하나는 철학적 서사이다. 전자는 계몽주의와 관련되고, 후자는 헤겔의 철학과 관련된다. 헤겔에 의하면 정신의 본질은 자의식성에 있으며 이런 정신은 자의식을 모르는 물질로부터 벗어나 점진적으로 발전한다. 이런 두 가지 서사에 의하면 우리의 삶은 최후의 목적을 향해 진행하는 여정으로 인식된다. 리요따르는 이 두 가지 서사를 초서사meta narrative혹은 거대서사grand narrative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다른 서사들은 이런 서사에 종속되고, 이런 서사에 의해 조직되고 언급되기 때문이다. 결국 과학적 지식은 한편으로는 서사성을 거부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합법성의 서사라고 할 초서사 혹은 거대서사에 의존한다.
과학적 지식이 나타내는 이런 역설을 전제로 그는 과학적 지식이 처한 당대의 조건을 해명한다. 모든 과학적 지식은 오늘날 초서사의 틀을 벗어난다. 그 이유로는 자본주의적 자유기업의 발전과 과학의 기술공학적 발전을 들 수 있다. 이런 문맥에서는 과학은 그 합법성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제 과학의 목표는 진리가 아니라 수행성performativity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수행성의 원리에 따를 때 과학의 합법성과 원시서사의 합법성 사이에는 대응 관계가 성립한다. 따라서 과학은 거대서사에서 미시서사micro narrative의 세계로 전환한다. 그러나 과학적 합법성의 토대인 수행성의 원리에는 단점과 약점이 존재한다. 단점으로는 이 수행성의 원리가 합리적 이성의 세계가 아니라 우리가 지배할 수 없는 합리성의 원리, 프랑크푸르트학파가 악령으로 규정한 바 있는 도구적 이성의 세계를 지향한다는 사실이 지적된다. 그러나 장점으로는 기존 범례 paradigm로부터 비약할 수 있는 가능성이 지적된다. 이상의 단점과 장점이 결합된 보기로 TV를 들 수 있다. TV는 이 시대의 악령이면서 동시에 기존 범례로부터 비약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한다. TV가 악령이라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합리적 이성의 세계를 배반하는 하나의 문신임을 말한다. 그러나 TV는 또한 선택의 자유와 생산의 다양성을 보장한다.
그런 점에서 포스토모니즘의 과학은 논리가 아니라 배리Paralogism에 의존한다. 말하자면 탈중심의 서사가 된다. 리요따르는 이런 현상, 그러니까 미시서사가 나타내는 특성을 언어경기의 이질성beterogeneity으로 요약한다. 이질적인 요소들이 뒤섞인 언어유희의 공간, 여기 포스트모더니즘의 서사적 특성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이런 언어유희의 세계는 또한 어떤 사회적 의미를 나타내는 것일까. 그것은 거대서사가 은폐하고 있는 문화적 제국주의를 공격한다는 의미를 띤다. 문화의 경우 이질적 요소를 인정하지 않고 동질성만을 고집한다든가, 동질성과 중심성을 고집하는 행위는 모두 제국주의적 특성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미시서사는 문화적 보편주의를 부정한다. 미시서사의 세계, 수행성의 세계가 강조될 때 과학자는 부정적 영웅의 자리를 확보한다.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에는 모든 사회 현상이 미적 현상으로 내면화된다. 과학과 서사의 기능이 동일시되는 마당에 무슨 사회 영역이 따로 있고 예술 영역이 따로 있겠는가. 그런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숭고성sublime의 세계를 지향한다. 숭고성의 세계란 한마디로 인간의 능력으로는 표상할 수 없는 세계를 뜻한다. 표상할 수 없는 세계를 표상하려는 노력,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드는 노력은 모순과 역설의 미학을 낳는다.
4. 포스트모더니즘의 원리
이상에서 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문화 현상을 사회와의 관계, 후기자본주의 시대의 논리, 미시서사의 개념을 중심으로 간추려 보았다. 이 시대에 오면 문화 현상과 사회 현상은 단순한 반영의 관계가 아니라 동일시되며, 나아가 사회 현상이 문화 현상으로 둔갑한다. 따라서 이데올로기와 물적 토대, 혹은 상부구조와 하부구조의 대립성이 무화된다. 그렇다고 상부구조도 하부구조도 모조리 소멸하는 것은 아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문화적 특성은 그런 점에서 모순성을 내포한다. 상부구조는 하부구조를 감싸면서 하부구조 속에서 자신을 지양한다. 이제까지 상부구조는 하부구조를 반영하거나, 아니면 일정한 거리를 두고 하부구조를 비판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에는 상부구조와 하부구조가 동일시되면서, 따라서 상부구조는 하부구조 속에 들어가 그것을 초월한다. 예술의 경우 이런 특성은 모순의 원리 혹은 아이러니의 원리로 요약된다. 이런 모순성은 상부구조와 하부구조의 관계뿐만 아니라, 포스트모더니즘의 예술적 특성으로 규정할 수 있다. 모순의 개념을 중심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의 예술, 특히 문학의 특성을 해명한 학자로는 허천Hutcheon을 들 수 있다. 그의 견해를 중심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의 예술적 원리를 간단히 살피기로 한다.
첫째로 포스트모더니즘의 예술은 시간 개념을 중심으로 할 때 모순성을 드러낸다. 예컨대 포스트모더니즘의 건축이 보여주는 재료의 절충주의를 생각할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론가 후이센Huyssen은 1982년 독일 카젤시에서 열린 제7차 도큐멘타전을 보면서 그 미술관이 모더니스트 시대의 전형적 재료인 철과 유리를 좀더 자연적인 재료인 모래와 나무로 둘러싸였음을 발견한다. 그는 이런 재료의 절충주의를 혼성모방적 표현주의와 연결시키고자 노력한다. 그런가 하면 그는 최근의 미국의 건축에서 역사주의적 절충주의를 본다. 그것은 무작위적인 역사적 인용과 기능주의적인 유리 커튼 벽과의 혼성 형식으로 제시된다5). 포스트모더니즘의 건축이 보여주는 이런 현상이 과거에 대한 신보수주의적 향수를 나타내는지, 아니면 후기자본주의의 창조력의 쇠퇴를 의미하는지 하는 문제는 이 자리에서는 충분히 이야기할 여유가 없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의 건축이 암시하는 과거와 현재의 관계는 모순의 원리에 입각하면 순수한 역사의 신이라기보다는 아이러니칼한 역사 의식으로 인식된다. 아이러니칼하다는 것은 과거를 비판하되, 일정한 거리를 두고 비판하는 게 아니라 과거를 감싸면서 그 과거를 초월하는 몸짓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거와 현재의 상호 조명은 복고적 향수와는 거리가 멀다.
둘째로 이런 모순의 원리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소설의 개념에도 나타난다.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은 리얼리즘의 소설처럼 현실을 반영하지도, 현실을 재생산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모더니즘의 소설처럼 텍스트의 자율성을 고집하지도 않는다. 리얼리즘이 세계성을 강조하고, 모더니즘이 자율성을 강조한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의 소설은 상호 텍스트성을 강조한다. 여기서 텍스트라는 말은 작품과 세계 양자에 두루 적용된다. 따라서 세계라는 텍스트와 작품이라는 텍스트는 상호 조명의 관계에 있게 되고, 또한 한 작품은 다른 작품과의 상호 텍스트적인 관계 속에 놓인다.
셋째로 포스트모더니즘의 예술은 이른바 2항 대립성을 부정한다. 그러나 좀더 엄격하게 말하면 부정한다기보다는 그런 체계가 상호 모순의 관계에 놓인다. 2항 대립적 체계는 본질/현상, 관념/물질, 소리/문자, 남자/여자, 중심/주변 등에서 알 수 있듯이 두 항목이 대립적인 관계에 놓일 뿐만 아니라, 왼쪽 항목이 높은 위계를 형성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예술에서는 이런 위계 질서가 파괴된다. 예컨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을 본질과 현상의 대립이라는 측면에서 살피기도 한다. 모더니즘의 예술은 사물의 현상 뒤에 숨어 있는 사물의 본질을 추구한다. 언어기초의 이론에 의하면 현상은 시니피앙, 본질은 시니피에에 해당된다. 그러나 후기자본주의의 논리에 의하면 시니피에와 시니피앙은 동일시되며, 남는 것은 시니피앙의 유희뿐이다. 리요따르는 이런 현상을 미시서사 혹은 언어경기의 이질성이라고 부른 바 있다.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예술이 모더니즘의 예술과 대립적인 관계에 놓인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둘의 관계 역시 모순의 원리에 지배된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예술은 모더니즘의 미학을 수용하면서 동시에 비판한다는 특성을 보여준다. 예컨대 모더니즘의 미학 가운데 자율성, 그러니까 삶과 예술의 분리개념, 개인적 주관성의 표현, 반대중성 등은 비판되고, 자기 지시성, 반어적 다의성, 반응 재현성, 반휴머니즘 등은 수용된다. 그러니까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을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초월한다는 아이러니의 특성을 보여준다. 이런 사정은 리얼리즘의 경우에도 비슷하다. 그것도 모순의 원리는 리얼리즘/모더니즘, 모더니즘/포스트모더니즘, 리얼리즘/포스트모더니즘의 대립적인 관계를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다.
넷째로 포스트모더니즘이 보여주는 이런 개발과 정복의 책략은 예술 작품의 독창성, 작가성의 문제에도 적용된다. 예술 작품의 독창성이란 바로 작가의 개성과 관련된다.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에 따르면 예술 작품에서 중시되는 것은 작가성이다. 그러나 이 작가성은 리요따르가 말한 거대서사를 수용한다. 그리고 이 거대서사는 총체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비판된다. 총체성이란 모순을 허용치 않는 문화적 제국주의와 통하기 때문이다. 총체성을 강조하는 태도는 문화의 제국주의적 특성을 드러낸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예술이 모순성, 아이러니, 역설을 새로운 문명에서 수용하는 것은 이런 개념들이 대립성, 총체성, 독창성, 작가성 따위를 지적으로 비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포스트모더니즘을 후기자본주의가 생산하는 덧없는 문화 현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최근에 나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앞 시대 모더니즘의 유형, 곧 영웅적 모더니즘과 논쟁적 모더니즘 가운데 후자를 계승한다고 주장한 논문을 읽은 바 있다. 그는 포스트모더니즘 대신 늦은 후기late 모더니즘이라고 명명하자고 주장한다6). 그러나 이런 주장 역시 포스트모더니즘의 원리를 너무 도식적으로 미적으로만 생각했기 때문에 나온 게 아닌가 싶다.
·필자 註
1) 이승훈, '포스트모더니즘은 가능한가', 민족과 문학, 1990, 봄.
2) 이 글에서는 제임슨의 견해를 간결하게 요약한 S. Connor, Postmodernist Culture An Introduction to Theon'es of the Contemporary, Basil Blackwell, 1989, pp.43∼50을 주로 참고했음.
3) J. F. Cyotard, The Postmodern Condition-A Report on Knowledge, trans. by G. Benningron & B. Massumi, Theom & Histom of Lit. Vol. 10, Univ of Minnesota Press, 1984.
특히 S. Connor, 위의 책, pp.27∼43 참고.
4) L. Hutcheon, A Postics of Postmodernism―Histom, Theory, Fiction Routledge, New York & Landon, 1988, pp.37∼56 참고.
5) A. 후이센, 『포스트모더니즘의 위상정립을 위해』, 정정호 역, 포스트모더니즘론, 정정호·강내희 편, 도서출판 터, 1989, pp.263∼265 참고.
6) G. Jencks, 'Postmodern & Late Modern―The Essential Pefinitions, Esthetics Contemporary, ed. by R. Kostelanetz, Prometheus Books, Buffaso, New York, 1989, pp.285∼289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