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논단

신화분석 및 스펙타클 이론과 예술 인류학

-한국문화의 예술적 이해를 위한 시론-




박정진 / 세계일보 문화부 차장

질베르 뒤랑의 신화분석방법에 비추어 본 예술인류학

성상파괴주의iconoclasme

질베르 뒤랑Gilbert Durand은 프랑스의 상징주의 철학자, 상징주의 인류학자이다. 그는 서구의 사상 특히 프랑스의 철학에서 평가절하된, 이미지, 상상력을 인식의 기능으로 부각시킨 인물이다. 그는 상상력이라는 심리적 기능을「오류와 거짓의 원흉」으로 점찍어 온 역사에 다름 아니라고 서구의 사상사를 단정한다. 그는 오귀스트 콩트와 같은 실증주의 철학자가 제시한 인류 문명의 변천과정인⸁신앙의 단계⸂형이상학의 단계⸃과학정신의 승리단계를 완전히 거꾸로의 방향에서 인간의 상징적 기능이 축소되어 온 과정으로 규정한다. 그는 한마디로 이것을 성상파괴주의iconoclasme의 승리과정이라고 이름짓는다. 서구의 역사는 인간의 인식기능이 진보되기는커녕 직접적으로 지각될 수 있는 현상계로 축소되어 온 과정이라고 한다.

예술인류학은 확실히 상징symbol을 통한 기(氣)의 현현(現顯)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것은 의미를 추구하기는 하지만 그것에 그치지 않는다. 이는 곧 정태적인 지각이미지sense image의 통합과정을 전제로 한 동태적, 역동적인 의미의 세계를 부각시킴으로써 우주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주고자, 느끼게 하고자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인류학적 도정

氣의 개념이 정립되지 않은 서양의 경우에서 이같은 논리와 학문적 경향에 흡사한 것은 질베르 뒤랑의 신화분석방법론이라 할 수 있다. 서구의 합리주의적 전통을 비판하는 뒤랑은 서구의 주지주의적 전통이 이미지와 단어를 혼동함으로써 상상력의 역할 자체를 왜소화시켰다고 주장하는 한편 이미지를 상징으로 정의 내림으로써 상상적인 것의 유효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역설한 인물이다. 그는 또한 상징이란 기호론의 영역에 속하는 것도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독특한 의미론의 원천(하나의 의미 이상의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모든 사고의 근원으로서 상징적구조화를 내세운다. 상징체계의 발생인 구조의 동기를 인간의 본원적 충돌이나 사회 표층의 구조, 기능에서 찾는 심리학자psychologist와 문화학자culturalist들을 비판한 뒤랑은 인류학적인 도정le trajet anthropologique이라는 개념설정을 통해 그들의 모순을 극복하려 했다. 인류학적 도정이란 주체적이고 동화하는 충돌들과 우주적이고 사회적인 환경으로부터 발산되는 객관적인 소관 사이에 상상적인 것의 위상에서 존재하는 끊임없는 상호교환작용을 말한다.

여기에서 문화 콤플렉스의 개념이 등장하게 된다. 상상적인 국면에서의 사회변동의 매커니즘에는 이러한 억압과 억압해소의 매커니즘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주어진 시대의 어디로나 퍼져나가는 다원결정sur detemination의 매커니즘과 온갖 영역 속에서 작용하는 주도적 원형체계의 절대적 지배의 매커니즘이 작용한다. 즉 한 시대의 특징을 이루는 신화적 주체는 하나의 억압으로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주제 주변에 온갖 학문, 예술, 종교 등 다양한 문화현상들을 모여들게 한다. 한 시대의 다양한 문화현상들은 이러한 복잡한 매커니즘의 얽힘 관계에서 탄생한다. 따라서 모든 주어진 시대에는 시대형성의 동기가 되는 두 개의 대립적인 매커니즘이 겹쳐 있는 셈이다. 하나는 사회학적인 의미에서의 억압적인 매커니즘이며 다른 하나는 반대로 변증법적인 대립의 모습을 띠는 것으로서 대립되는 상징들을 자극하는 매커니즘이다. 결국 인간의 상상력은 역사에 의해 강요되거나 결정되어 있는 유형학적인 운명론으로부터도 벗어나고 인간이 발딛고 있는 구체적 환경과 무한한 개인적인 충동의 영역으로부터도 벗어난다. 인간의 모든 삶은 그 상상적인 위상에서 행해지는 상호 가역반응(可逆反應)이 형성하고 있는 모습이며, 거기서 상상력은 인간의 실제의 삶을 변형시키는 실천적인 힘, 현실적인 능력이 된다.

세계의 동사적 표상

뒤랑은 「상상적인 것의 인류학적인 구조」에서 표상scheme, 원형archetype, 상징symbole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심리학적인 실마리로서 세 개의 반사지배, 즉 자세지배dominante de position, 영양지배dominante de nutrition, 계합반사reflexe copulatif 등을 인간의 몸짓 및 신경중추와 상징적 재현 사이에는 긴밀한 관계가 존재한다는 가설하에 채용한다. 그리고 그는 반사지배가 세 개의 동사적 표상, 즉 ⸁분열적이고 수직상승적인 표상⸂하강과 내제화의 표상⸃율동적인 표상으로 분산되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이러한 구분이⸁분열형체적Schizomorphe구조⸂신비적mystique구조⸃종합적synthetique구조로 세분될 수 있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하는 점은 그 구조가 굳어 있는 구조가 아니라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그의 인류학적 도정내에서는 끊임없이 변형하는 역동적 구조만이 존재하고 있다.

뒤랑은 이성적인 것을 중시하는 개념주의는 이미지가 형성하는 여러 체제 가운데서 특수하게 한쪽으로 치우친 구조에 불과하다고 보고 서구의 합리주의는 따라서 인간의 인식기능 가운데 한 부분을 다른 인식영역보다 우월한 것으로 내세우는 데 오류가 있다고 본다.

서구적 문화컴플렉스

뒤랑은 인간현상의 특수성을 무시하지 않은 채 객관적인 탐색을 시도한 마르크스와 프로이트는 물론 문학비평에서 발생론적 구조주의를 표방한 골드만L.Goldmann, 심리비평의 모론C.Mauron도 인간의 창조적 주체성을 객관적인 현상으로 환원하여 해석하는, 서구적인 인식구조에서 그다지 자유롭지 못하다고 평한다. 또한 서구의 언어학적 구조주의의 이면에는 객관화하여 설명하려는 서구적인 문화컴플렉스가 자리잡고 있다고 한다. 뒤랑은 ⸁절대교환 혹은 절대소통communication의 공리⸂형태적 닫힘이라는 구조주의 언어학에서의 두 개의 공리를 비판한다.

뒤랑은 언어학에서 의미론적인 작용은 교환exchange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사용usage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언어학적인 순환에서 빠져나오는 길은 능기(能記,singifiant)와 소기(所記,signifie)의 층위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함으로써만이 가능해진다고 한다. 이는 교환 이전에 자연변이에는 상징적 기능이 있으며 소통이라는 것은 그 결과에 불과할 뿐이라는 입장이다. 하나의 구조라는 것은 그 스스로 변화할 수 있는 형상적 구조이다. 그 형상적 구조structure figuratif가 굳어 있는 언어구조보다 우위에 선다는 것은 인간의 구체적 상징적 행위(祭爲)가 문법학자의 담론으로 완전히 번역도딜 수 없다는 점을 보아도 자명해진다고 한다. 예술의 창조행위는 단순히 구조적 형태로 환원되지 않고 창조행위 자체가 능동적으로 사회적 주제, 양식, 한 사회의 상상적 체제를 형성해 나간다. 따라서 작품을 설명한다는 욕구도 작품의 굳어 있는 형태를 발견해 내는 식으로 이루어질 게 아니라 작품을 세계에 의미부여하는 하나의 구조의 건축과정으로 이해하는 식으로 행해져야 한다. 즉 작품의 이해라고 하는 것은 독특한 창조행위 가운데 위치할 역동적 의식의 포착을 뜻한다.

뒤랑은 나아가 하나의 작품을 이해했다는 것은 그 모순들을 환원, 설명할 수 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순을 발견해서 그것들을 대립적 긴장에 의해서만 포착할 수 있게 해주는 세계속에 위치시키고, 그 모순을 인정함을 의미한다.

신들의 전쟁

뒤랑이 구조인류학의 대가인 레비스트로스를 비판하면서 우리가 신화에서 추출해 내야 하는 깊은 의미는 그런 표면상의 형태적 구조, 혹은 모든 신화를 완벽하게 환원하여 설명할 수 있는 통합적 구조가 아니라 이질적인 요소들 사이의 역동적인 긴장관계라고 말한다. 이 긴장관계는 한마디로 「신들의 전쟁la querre des dieux」으로 요약될 수 있다.

신들의 전쟁은 인간운명, 혹은 휴머니즘이 지닌 한계를 보여줌과 동시에, 그것이 인류학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영역임을 보여주기도 한다. 인간이 지닌 근원적으로 모순되는 속성은 인간을 고통스럽게 하지만 역으로 그 모순되는 속성 사이의 찢김이 인류문화의 역동성을 보장해 주고 인간을 동물과 구별짓게 해준다. 신화는 바로 역사의 깊은 곳을 측량하는 척도가 된다.

뒤랑은「신화비평은⸁테느에서 루카치로 이어지는 구비평은 혹은 사회학적 비평⸂보두엥, 모롱으로 대표되는 심리비평psychocritique 혹은 정신분석비평⸃야콥슨, 그레마스Greimas 등으로 대표되는 형식주의 비평들의 유효성을 배제하지 않은 채 그것들의 중심에 위치할 수 있는 하나의 종합적 비평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그런 다양한 방법에 의해 읽혀진 시퀀스들은 각각 뒤랑의 이른바 신화소mytheme를 이룬다.

읽히는 자, 읽은 자, 그 역동적 관계

신화비평의 중심은 바로 읽히는 자Ce qui est lu(세상이면서 작품)와 읽는 자Celui gui lit(작품이면서 독자)의 교류사이에 위치하여 그 상호 주고받기의 역동적 관계를 탐구한다.

결국 신화비평의 의도는 한 시대, 하나의 환경과 마주한 작품 안에서 주도적으로 작용한 신화들 및 그것의 의도론적인 변화를 한 작가에 국한해서 밝히는 데 있다. 여기서 신화비평은 집단적인 문화나 역사적 순간의 커다란 신화적 움직임을 밝혀낸다는 또하나의 작업, 뒤랑이 신화분석이라 부른 작업으로 넘어간다.

항시 신화적인 소청을 지니고 있는 인간들은 사회적인 분석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신화 속의 신들과 영웅들은 역사의 어느 순간에 심리학적 밑그림으로 항상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문화적 역사의 순간들에 「박자로 맞추는 리듬」에 의해 나타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기 때문에 심리학적인 신화분석이 그 자체 심리현상에 갇혀 사회적 현상을 심리적으로 환원하는 태도가 아님을 뒤랑은 강조하고 있다. 이는 뒤랑이 신화분석이라는 용어를 실제로 정신분석학에서 빌어오고 있지만 그것이 사회현상의 심리학적인 의미와 사회학적인 의미를 동시에 추구하고자 하는 데서 기인한다. 다시 말하면 정신분석이 의미하고 있는 개인의 전기적 차원을 문화적 차원으로 확장하며 프로이트의 상징적 환원방법의 단순성을 뛰어넘어 심리현상의 충돌들의 다원주의를 긍정하는 입장에 섬을 말한다.

인간은 죽게 마련이다.

뒤랑의 이같은 입장은 레비스트로스식의 구조적 작업과 주제비평적 탐구와 내용의 의미론적인 탐구방법에서 힌트를 얻어 종합화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신화분석은 그 대상을 문학으로 국한하는 편협한 관점에서 벗어나 「인간에 관한 것이면 아무 것도 낯설지 않다」는 인류학적인 자리로 돌아온다. 신화분석이라는 작업은 어느 개인이나 편협한 학파에 의해 행해질 작업이 아니라 인간 현상을 탐구하는 여러 가지 학문에의 참조 및 그것과의 제휴를 통하여서만이 가능한 방대한 작업이다. 그 작업안에서 하나의 사회는 엄격한 객관적 분석의 대상에서 벗어나 그 자체 살아 움직이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역동적 구조체가 된다.

뒤랑의 상징적 상상력의 기능은 죽음의 인식을 뛰어넘는 기능으로부터 신의 현현, 즉 초월까지 광범위하게 작용한다. 상징적 상상력의 기능은⸁「인간은 죽게 마련이다」라는 사실에 항거하는 기능을 갖는다. 죽음의 위협을 완곡화, 잠재화시킴으로써 하나의 휴식, 하나의 잠으로 상상케 함으로써 죽음을 소멸시킨다.

⸂심리적, 사회적 균형잡기의 기능이다. 건강한 정신이란 항상 하나의 체제를 다른 체제에 의해 균형잡게 하는 노력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사화집anthologie이라는 박물관을 통해 인간종족의 온갖 희망과 두려움이 혼합된 하나의 도표를 세워, 인간 누구나가 거기에서 자신의 모습을 알아보고 자기 자신을 확인할 수 있게 만든다는 범인류학적인 보다 높은 야망을 갖는다. 즉 인간 종족으로서의 같은 영혼을 알아볼 수 있게 하는 기능이다.

⸄생물학적인 죽음에 대해 삶을 굳건히 대립시키고 생물학적인 삶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영혼의 삶을 우뚝 솟아오르게 해 종국에는 인간들의 도시가 확고한 신의 도시로서 하늘에 투영되며, 최고의 존재 현현에 이른다. 즉 신을 다시 찾는 궁극적 기능을 상징은 갖는다.

대립성의 끝에서 동물과 신을 만난다

종국에는 이상에서 상징적 상상력의 기능은 인간 속에 내재한 대립적인 긴장을 인정하고 그 대립성의 끝에서 늘 만나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을 동물과도 만나게 하고 신과도 만나게 한다.

이상에서 질베르 뒤랑의 신화분석방법의 개요를 살펴보았다. 이것을 앞에서 필자가 여러 곳에서 서술한 예술인류학의 특징과 비교해 보면 양자의 성격을 보다 분명히 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서양철학 안에서의 도발, 도전

먼저 뒤랑과 필자의 주장의 출발점이랄까, 그 배경을 살펴보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예술인류학은 우선 학문과 예술, 종교라는 세 장르의 통합을 목표로 하고 있음을 표방하고 있다. 이것은 인간의 심리적 제일성psychicunity과 보편성을 전제하는 것일 뿐 아니라 인간 이상의 神, 또는 인간에 의해 고안된 모든 문화적 표상, 그리고 물리적인 세계까지도 인간을 매개체로 서로 통할 수 있다는 것을 가정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세 장르의 소통communication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예술인류학이란 이름 붙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예술이 세 장르 가운데 중간적 성격을 갖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결국 우주의 중간적 존재인 인간과 예술을 통합하여 예술가의 눈으로 인간생활 전반을 연구대상으로 함으로써 장르통합을 기도하고 있는 것이 예술인류학인 세이다. 이같은 통합논리의 기초를 이루는 것이 동양의 전통철학인 氣철학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따라서 이같은 예술인류학의 지향성은 서구의 자연과학science에 대한 지나친 편중을 비판하게 되면서 자연히「하군을 위한 도정」이라 할 수 있는 서구의 근대연사를 회의하게 되고 반면에 예술을 보다 보편적인 인간의 의사소통수단이며 인식수단으로 보게 된다. 심지어 학문science은 예술적 활동의 극히 일부분적 활동으로까지 보고 있다. 예술은 또한 의 세계를 다루는 종교와도 관계를 확대하게 되는데 요컨대 예술은 학문과 종교사이의 중재자로 자리잡게 된다. 이같은 사정은「언어language ↔ 상징 ↔ 氣」라는 도식에서도 표방되고 있는데 학문은 언어, 예술은 상징, 종교는 氣에 해당되며 이들은 서로 가역반응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이에 비하면 뒤랑은 어떤가. 필자의 예술인류학과 뒤랑의 신화분석의 가장 큰 차이점은 전자가 氣철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데 반해 후자는 적어도 서양의 철학, 사상을 극복하고자 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서양의 철학적 전통 안에서의 도발이라 할 수 있기 때문에 여기서 기인하는 한계에 부딪힌다는 점이다. 그러나 氣철학이란 용어는 쓰고 있지 않지만 예컨대 앞에서 소개된 「신들과 영웅들은 역사의 어느 순간에 심리학적 밑그림으로 항상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문화적 역사의 순간들에 박자로 맞추는 리듬에 의해 나타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기 때문에」등의 표현에서 氣와 유사한 개념을 가정하고 있거나 아니면 서양학자들 가운데는 여기에 가장 가까이 와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예술인류학이 서양의 근대는「학문을 위한 도정」이라는 개념설정을 통해 서양의 근대를 극복하고 있다.

뒤랑은 서양의 근대에서 과학정신의 승리를 완전히 역의 방향에서 인간의 상징적 기능이 축소되어온 과정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이것은 성상파괴주의iconoclasme의 승리과정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또한 이렇게 말한다. 서구의 주지주의적 전통이 「이미지=단어」로 봄으로써 상상력의 역할을 왜소화시켰다고 주장하면서「이미지=상징」으로 정의되어야 상징적인 것의 유효성이 회복된다고 역설하고 있다.

이는 달리 표현하면 지각이미지가「이미지→단어」도식과 같이 일반적으로 단어화하려는 것을 막고 「이미지→상징」의 도식과 같이 상징적인 것을 회복시키려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를 보다 단순화하면「단어→상징」의 도식과 같이 가역 반응하려는 것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필자와 뒤랑은 같은 공감대 위에 있게 된다. 단지 뒤랑에겐 氣에 대한 가정이 없는 점이 다르다. 그러나 뒤에서 상술되겠지만 뒤랑은 신화분석은 충분히 氣의 세계를 가정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뒤랑은 진정 상징인류학자라 할 수 있는데 그가 레비스트로스를 비롯 구조인류학자와 입장을 달리하는 것도 상상력의 인식의 기능에 대한 보다 확고한 신념 때문이다.

예술인류학과 상징인류학의 차이

예술인류학이 구조인류학과 상징인류학의 학문적 전통 위에 있다고 여러 차례 언급하면서도 필자가 새로운 인류학의 장르를 설정한 까닭이 사실은 상상력에 대한 확고한 신뢰에 있음을 밝힌바 있는데 필자가 강신표의 BSTD모델과 필자의 DSCO모델을 비교하면서 DSCO모델이 상상력을 기초로, BSTD모델이 이성을 기초로 하고 있음을 주지시킨 것도 다 이와 관련이 있는 것이다. 혹자는 필자에게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예술인류학과 상징인류학이 다른 점이 무엇인가? 이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대답은 뒤에서 신화분석과 필자의 氣개념의 차이가 어떤 것인지를 설명할 때 이루어지겠지만 여기서 우선 대답할 수 있는 것은 상징인류학자 가운데서도 뒤랑은 필자의 생각에 매우 근접해 있는 사람이다. 상징인류학자 가운데도 상징에 대한 견해에 상당한 차이점이 있다. 예술인류학은 神과의 직접 소통도 연구대상으로 하는 점이 뒤랑의 신화분석과 차이점이 된다. 필자는 신화도 중시하지만 말의 표현물 이전의 神을 더 중시함으로써 우주의 가장 본질적인 氣를 바탕으로 언어, 상징, 사물의 세계를 연구하고자 한다. 다시 말하면 예술인류학은 氣의 개념설정과 함께 정, 기, 신을 우주의 본원적 존재로 보고 있기 때문에 소위 신화에서의 화(話), 즉 말로 이루어진 표현물보다는 말 이전의 氣의 소통을 우선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필자가 여러 곳에서 비언어적 소통nonverbal communication을 주장하게 되는 소이도 여기에 있다.

신과 신화

다시 말하면 말의 방편적 성격을 강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뒤랑의 경우도 말의 방편적 성격을 인식하고 분석수단으로 사용하고 있음은 사실이다. 뒤랑과 필자의 차이는 미묘한데, 결국「神⇔神話」라는 도식에서 필자는 神의 편에 있고 뒤랑은 신화의 편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양자는 역시 가역반응의 관계에 있으니까 구체적인 학문적 논의에서는 매우 유사하게 나타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예술인류학이 애시 당초 종교를 통합의 세 장르에 포합시킨 것과 긴밀한 관계에 있다.

뒤랑이 바판한 서구의 주지주의적 전통에 의한 성상파괴주의의 사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필자가 앞에서 제시한 <도표1>과 잘 대조되고 있다. <도표2>는 학문, 예술, 종교를, 언어-상징, 감각-통각의 두 축에 의해 상호관계를 규정하고 이들 사이의 성격을 확실히 한 것이다. <도표2>는 언어축의 운동방향을 상징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며, 과학은 사물의 언어화와 시각의 상호작용물로 자리잡게 하고 있다. 그리고 언어화하려는 것이 기호화로 표시되고 있다. 이것은 결국 근대 서구문화의 경향을 언어화에 두고 있는데 서구문화는「언어+시각」의 콤플렉스문화임을 표방하고 있다.

데카르트에서 비극은 탄생

17세기의 데카르트주의, 18세기의 경험주의, 교권주의, 개념주의, 분석적 추론, 사실만의 중시 역사주의는 분명히 상징의 추락과 함께 19세기의 가장 편협한 상징주의를 낳았다. 이것이 기호화의 도정이었음을 <도표1>은 보여준다. <도표2>와 <도표1>은 종국에는 상징의 회복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일치하고 있다. 필자는 이것을 예술인류학적 모델로 표방하고 있는데 뒤랑은 「인류학적인 도정」으로 표현하고 있다.

뒤랑의 인류학적인 도정이란 「주체적이고 동화하는 충돌들과 우주적이고 사회적인 환경으로부터 발산되는 객관적인 소관 사이에 상상적인 위상에서 존재하는 끊임없는 상호교환작용」을 말한다.

시각+언어, 청각+상징

필자의 예술인류학은 지각이미지의 통합에 의한 통각(統覺)을 지향하는 또 하나의 감각축을 설정함으로써 지각이미지가 언어로 고착화되는 것을 지양하고 있는데 이것은 뒤랑의 「상상적인 위상에서 존재하는 끊임없는 상호교환작용」과 상통하고 있다. 요컨대 매우 동적인 이미지의 활동과 소통을 양축이 다 가정하고 나아가 목표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도표2>에서는 상호텍스트로 표시되고 있기도 한데, 랑그langue보다 파롤parole을 우선하는 것으로 표현될 수도 있다. <도표2>는 이같은 논의를 한걸음 더 진전시켜 서구문화의 「서구+언어」대신에「청각+상징」으로 도식화되는 서구문화와 반대되는 문화를 암암리에 상정하고 있다. 이「청각+상징」의 문화야말로 예술과 종교가 제대로 자리하는 문화의 영역이며, 또한 문화특성이기도 하다. 청각의 특성가운데 가장 첫째 가는 것은 보이지 않는 세계invisible에 대한 인식이라는 점과 주기성(週期性)을 가진 소리의 파동(波動)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과학에서 말하는 기계론적인 우주관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전자가 생성적becoming, 후자가 존재적being 세계관에 해당됨은 물론이다. 「청각+상징」의 문화도 물론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서구문화가「언어+시각」컴플렉스에 의해 표음문자를, 동양문화가 「상징+청각」컴플렉스에 의해 표의문자를 발달시킨 것은 그 좋은 예이다.

문화는 확실히 그 표층과 심층을 달리하면서 표층과 심층이 상호보완관계를 유지하도록 되어 있음을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개인의 심리가 보상을 요구하는 것과 같다. 필자는 여러 차례에 걸쳐서 동아사아 문화야말로 상징이 가장 발달된 문화임을 천명한 바 있다. 그리고 같은 이치에서 예술인류학이 한국에서 맨 먼저 주장될 수 있는 문화적 배경을 우리 자신이 갖고 있음을 주장했다. 동아시아 문화, 이것이야말로 상징과 신이 가장 활발히 움직이는 문화이며 따라서 예술과 종교의 문화임을 필자는 확신하고 있다. 약간 비약이긴 하지만 이것은 텍스트문화가 아니라 컨텍스트문화이다. (이 말이 결코 테스트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하나의 절대적인 텍스트를 형성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함이 옳다)

절대 교환, 형태적 닫힘

한편 뒤랑은 이성적인 것을 중시하는 개념주의는 이미지가 형성하는 여러 체제 중에서 특수하게 한쪽으로 치우친 구조라고 말한다. 또 서구의 언어학적 구조주의의 이면에는 객관화하여 설명하려는 서구적인 문화컴플렉스가 있다고 했다. 뒤랑은 따라서 ⸁절대교환과⸂형태적 닫힘이라는 구조언어학의 두 가지 공리를 비판하고 있다. 이것은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필자의 DSCO모델이 폐쇄상태(close=c)와 개방상태(open=o)를 인정함으로써 구조, 상징인류학의 폐쇄성을 극복하려는 것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이같은 사정은 필자가 단자(單子)와 정반대되는 기소(氣素)의 개념 창출을 통해 우주가 무한히 중층적으로 차원을 달리하면서 생성소멸하고 있음을 나타냄으로써 오히려 가장「상대적인 교환체계」를 가정하고 있는 것이다.

상징⇔氣

뒤랑은 언어학에서 의미론적 작용은 교환exchang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사용usage의 영역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언어학적인 순환에서 빠져나오는 능기와 소기의 층위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함으로써 가능해진다고 한다. 이것은 자연언어의 상징적 기능에 기인하는 것인데 의사소통이라는 것은 그 결과에 불과할 뿐이라는 입장이다. 뒤랑에게는 상징, 그것은 자연이나 우주를 읽을 수 있는 직접적인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뒤랑은 이같은 입장은 사실 예술인류학이 표방하는「상징⇔氣」라는 도식을 연상케 한다. 우주의 본래 모습인 는 상징으로 표현, 전달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뒤랑이 추구하는 신화적 주제는 매우 의미심장하다. 그의 신화적 주제는「하나의 억압으로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주제 주변에 온갖 학문, 예술, 종교 등 다양한 문화현상들을 모여들게 한다. 한시대의 다양한 문화현상들은 이러한 복잡한 매커니즘의 얽힘 속에서 탄생한다」이것은 예술인류학이 학문, 예술, 종교를 통합한 차원에서 보려는 입장과 너무나 흡사하다.

뒤랑은 모든 시대에는 시대형성의 동기가 되는 두 개의 대립적인 매커니즘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사회학적인 의미에서의 억압의 매커니즘이고 다른 하나는 변증법적인 모습으로 대립되는 상징들을 자극하는 매커니즘이다. 뒤랑은 인간의 삶이 상상적인 위상에서의 상호 가역반응이라고 규정한다.

코드=학문=거울, 비유=예술=가면

이에 비해 필자는 인간의 삶이 대립적인 세계를 코드화하려는 힘과 비유화하려는 것의 갈등으로 보며 코드화는 비유의 한층에 불과한 것이라고 보고 따라서 인간의 삶과 우주는 매우 메타포리컬한 환상적인fantastic 세계라고 가정하고 있다. 뒤랑은⸁사회학적인 억압의 매커니즘은 필자의 코드화의 같은 것으로 볼 수 있고⸂상상적인 위상에서의 상호가역반응을 필자의 비유화에 해당시킬 수 있을 것 같다.

이것은 또한 학문의 길과 예술의 길로도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앞장에서도 거울과 가면으로 설명한 적이 있다.

사회학적 억압=코드=학문=거울

상상적인 상호가역반응=비유=예술=가면

이제 앞서 잠깐 언급한 신화와 神들의 얘기로 돌아갈 때가 됐다.

뒤랑은 하나의 작품을 이해했다는 것은 그 모순들을 환원, 설명할 수 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순을 발견해서 그것들을 대립적 긴장에 의해서만 포착할 수 있게 해주고 그 모순을 인정함을 의미한다고 했다. 그는 나아가서 레비스토로스를 비판하면서 우리가 신화에서 추출해 내야 하는 것은 형태적 구조, 또는 신화를 완전히 설명할 수 있는 통합적 구조가 아니라 이질적인 요소들의 역동적인 긴장관계라고 말한다. 뒤랑은 이것을 「신들의 전쟁」이라고 요약한다. 신들의 전쟁-이것은 뒤랑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영역이다. 그는 이것이 인류문화의 역동성을 보장해 준다고 감히 말한다. 이때 즉 신화비평은 사회학적 비평, 심리비평, 형식주의 비평의 유효성을 백제하지 않은 채 그런 다양한 방법에 의해 얽혀진 시퀀스들은 이른바 신화소로 구성되는 것이다.

이상에서 볼 때 뒤랑의 신화비평은 한편의 신화를 쓰기 위해서, 또는 써가면서 기존의 학문적 방법의 시퀀스를 「신화소화」「신화적 원형화」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신들의 전쟁→신들의 조화

그렇다면 예술인류학은 어떤가.

예술인류학은 우선「신들의 전쟁」보다는「신들의 조화」를 꿈꾸고 있다. 전쟁이란 단어는 역시 서구적인 냄새와 뉘앙스가 풍기고 조화는 동양적인 역사와 전통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 전쟁도 크게는 분명 조화속의 한 양상이다. 그러나 전자가 분열이라면 후자는 통일을 나타낸다.

예술인류학이 상징과 신들의 세계를 다룬다는 점에서는 뒤랑의 신화분석과 같지만 전자는 말에 의한 신들과의 소통보다는 비언어non-verbal의 소통을 주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신화적이 아니라 종교적이다. 또 말에 의하지 않고도 소통이 가능함을 가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이것은 氣의 개념을 설정했다는 데서 원천적으로 뒤랑의 신화분석과 또다른 차원의 세계라 볼 수 있는데 뒤랑이 상징력 상상력의 기능을 통해 인간 속에 내재한 대립적인 긴장을 인정하고 그 대립성의 끝에서 신을 만나게 하고 있는데 예술인류학은 신을 만나기도 하지만 스스로 신과 일체감, 신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는 점이 다르다. 은자(隱者)문화의 전통을 가진 한국인이면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가를 쉽게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서양의 절대적 대상으로서의 신이 아니라 인간의 일체가 되는 신과 인간이 공존하는, 인내천(人乃天) 전통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실로「신들의 한복판에 있다」

뒤랑은 「신들의 전쟁」이나「신의 회복」보다는 「신들의 조화」혹은 「신인(神人)일체」를 가정하고 있는 것이 예술인류학이라 할 수 있다. 흔히 서구문화의 전통은 신을 대상화 시키기 쉽다. 그러나 신과의 끊임없는 교류를 한국문화의 전통을 잃지 않고 있다.「신의 객체화」가 아닌 「신의 주체화」즉 신과의 교류, 소통이 뒤랑의 신화분석과 다르다. 앞서 언급한 「神→神話」 가 예술인류학의 입장이고「神話→神」이 뒤랑의 신화분석이다. 즉 어디에서 출발하느냐에 따라 뉘앙스가 다르다. 여기서도 뒤랑은 서구문화를 가장 심각하게 비판하고 있지만 언어 콤플렉스의 서양인임이 드러나고 필자는 비언어nonverbal language 즉 氣의 선호를 통해 동양인임을 심층에서 보여주고 있다. 서양은 언어language, text 문화이고 동양은symbol, context 문화이다.

뒤랑은 인간의 몸짓 및 신경중추와 상징적 재현 사이에 긴밀한 관계가 존재한다는 가설을 설정하고, 세 개의 동사적 표상을 들었다. 즉⸁분열, 수직상승적 표상⸂하강적, 내재화의 표상⸃율동적 표상이다. 그는 나아가 이를⸁분열형체적 구조⸂신비적 구조⸃종합적 구조 등 구조적 장르로 대입시킨다. 뒤랑의 이같은 표상이나 구조는 사실 앞장의 <도표2>에서 보여준 바 있는 필자의 ⸁수직⸂수평「圖」⸃수직, 수평모델과 매우 흡사하다.

뒤랑의 분열 수직상승적 표상이나 분열형체적 구조는 필자의 수직모델과 쉽게 연결될 것 같다. 단지 필자의 수직모델에서는 뒤랑과 같이 「상승적」표상이라는 세분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 다르며 실지로 필자는「상승적」또는「하강적」표상을 수직모델에 함께 함축하고 있기도 하다. 물론 수직에는「분열」적 표상은 당연히 따른다. 수직선이 공간을 분열시키는 것은 토론이 필요 없는 것 같다.

뒤랑의 하강내재화의 표상이나 신비적 구조는 필자의 수평모델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수직이 분열적인 것이라면 수평은 다분히 이를 통합하려는 성질을 갖고 있다. 뒤랑의「내재화」의 표상, 「신비적」구조는 다분히 분열적인 것을 하나로 하는 의미를 갖고 있는 용어들이다. 여기서도 뒤랑은「하강」적 표상이 세분화되어 있음이 필자와 다르다.

뒤랑의 율동적 표상이나 종합적 구조는 필자의 수평, 수직(圖)모델에 해당된다. 「율동적」「종합적」이라는 말을 원운동을 통해 대상의 통합을 추구하여 대상의 본질을 파악하려는 필자의 「수직, 수평(圖)」과 상통한다.

따라서 뒤랑과 필자의 차이는 필자의 「수직」을 뒤랑의 경우「상승」과 「하강」으로 세분한 것이 다르기는 하지만 종국에는 종합이나 통합, 즉 통태적이고 율동적인 하나(圖), 일원적 장(場)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같다고 할 수 있다.

뒤랑은 그의「상징적 상상력」에서 두 가지 해석학을 언급했다. 하나는 상징을 부수적인 현상, 결과, 상부구조, 징후에 불과한 것으로 환원시키고 해석학이고 다른 하나는 상징을 확대하여 상징 그 자체의 통합력에 의해 생생한 초의식에 도달하게끔 될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해석학이다. 폴 리꾀르도 이 두 가지 해석학에 대해 정확한 진단을 내리고 있다.

폴 리꾀르는 전자를「고고학적인 방법」후자를「종말론적인 방법」으로 보았다. 고고학적 방법은 전기저거, 사회적, 계통발생적이고 과거에 치중하는 데 반해 종말론적인 방법은 근원적인 질서의 소환, 즉 우리가 천사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소환방법이라고 했다. 이것은 또한 탈신비화demystification, 재신화화remythisation의 해석학으로 리꾀르는 요약했다.

필자는 편의상 리꾀르의 차원scheme 즉 「고고학」「종말론」으로 논의를 하고자 한다. 위의 고고학적 방법은 필자의 예술인류학과 좋은 관계를 이룬다. 이를 구조언어학적으로 보면「고고학」은 시니피앙, 예술인류학은 시니피에를 우선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고고학이 전기적, 사회적, 계통발생적이라면 예술인류학은 현재적, 개인적, 개체 발생적이다.

한편 위의 「종말론」은 필자의 예술인류학의 경우「개벽론적 방법」으로 대칭시킬 수 있다. 여기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종말론」은 절대적 신관을 가진 서구종교가 필연적으로 맞게 되는 결과인데 「개벽론」은 서구의 종말론을 단지 우주운행은 질서가 바뀌는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특징이다.

필자는「氣철학에서 본 증산교」라는 논문에서 「개벽론적 우주관」이나「개벽론적 신과」을 밝힌 적이 있지만 이것은 동양의 종교나 신관에서는 결코 생소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일반적인 특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은 서구의 경우 상징성을 찾는다해도 그들의 문명적 특성, 즉 시니피앙을 우선하는 것을 피할 수 없음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서구문명의 한계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고고학」과 함께 「종말론」이 짝지워지는 것은 나름대로 일관성이 있는 것이다.

이상의 서술에서 리꾀르의 「고고학/종말론」에 대해 필자의 예술인류학은「예술인류학/개벽론」을 대치함으로써 예술인류학이 언어를 통한 氣의 재발견이라는 과제를 추구하는 일단을 드러내는 셈이다. 사실 서구의 상징주의적 접근이 일견 동양의 것과 비슷한 인상을 주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서양은 언어를 통해 상징을 발견하는 데서 머무른다.

특히 종말론과 개벽론의 비교에서 이같은 사정은 첨예하게 드러난다.

「종말론」의 서양은 끝까지 神을 대상으로서 보려는 성향이 강하게 남아있다. 이는 그들의 神의 현현에서도 엿볼 수 있다. 「개벽론」의 동양은「신인합일」의 성향을 보이는 점에서 다르다. 이것은 신을 대상으로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주체화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필자는 예술인류학자를 「시인으로서의 고고학자」또는 「고고학자로서의 시인」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는 고고학자가 계통발생적 차원에서 과거에 몰입하여 언어적, 사물적인 것을 찾는데 반해 예술인류학은 같은 상황에서 메타포나 상징, 원형을 찾아 개체발생적인 현재에로 회복시켜 의미를 재창조한다는 것을 뜻하기 위함이었다. 고고학자는 결국 시간의 한 층(地層)에서 의미를 밝혀주는데 반해 예술인류학자는 여러 층에서 역동적인 의미를 조명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전자이든 후자이든 신화적인 세계와 필연적으로 만나지 않을 수 없는데 그 대처하는 방법에서 서양은「창조에 따른 종말」로 동양은「개벽에 따른 개벽」으로 귀결되어 나타난다. 뒤랑의 신화분석이 신의 현행에 머무른 것은 서양문명의 한계 때문이다. 이에 비해 필자의 예술인류학이 신일합일에 이르는 것도 동양문화의 특성 때문이다.

예술인류학은 학문, 예술, 종교의 역동적 통합을 주장했었다. 예술인류학은 위의 세 영역을 문학의 장르들에 견주어 문화의 장르로 보면서 역설적이게도 장르해체론을 동시에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예술인류학의 역동성 때문이다.

예술인류학은 고고학을 그것의 한 층으로 본다. 이는 학문을 예술의 한층으로 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예술인류학은 종교를 예술의 연장extension으로 보고 있다. 이는 종말론을 개벽론의 한 현상으로 보는 것에서 알 수 있다. 따라서 예술은 학문보다 높고 종교는 예술보다 높다.

신화는 신을 상징하긴 하지만 예술의 영역에 머물고 神 자체는 종교의 영역이다. 뒤랑의 신화분석이 전자에 머물고 예술인류학은 그것의 통합적 성격 때문에 신의 영역(精·氣·神)에까지 뻗어나간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아직도 언어의 영역에 머무는 신호가 아니라 비언어적 영역도 포함하는 신의 세계에까지 이른다는 말이다.

신화적인 것에서 종교라는 것을 독립시키는 필요성은 종교는 신화 이상의 바로 살아 있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학문과 예술, 종교가 어떻게 서로 상호연관성을 가지느냐를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고백하면 필자의 예술인류학은 동양의 철학적 전통(특히 氣철학)에 힘입은 바 크다. 氣철학은 음양론, 정, 기, 신(존재론)은 우주가 뉴우튼적 물리관의 세계가 아니라 매우 역동적인 세계임을 가리키고 있다. 필자는 이것을「氣의 커뮤니케이션」으로 집대성할 생각을 갖고 있다. 우리는 흔히「氣가 막힌다」「氣가 통한다」라는 말을 자주 들어왔다. 이것은 氣 의 커뮤니케이션의 한 단면이자 말단적 현상이지만 분명히 우리네 전통에 비언어적 소통nonverbal communication에 대한 인식이 있었음을 뜻한다.

뒤랑이 자주 거론하는「상징적 균형잡기」는 다름 아닌 우리네 전통철학의「陰陽」을, 「상징적 울림」은 바로「氣의 커뮤니케이션」에 흡사한 것이다. 뒤랑은 서양의 언어적 전통의 최단 거리에서 동양의 상징(음양·氣)의 세계를 건너다보고 있는 셈이다.

그의「인류학적 도정」은 필자의「예술인류학적 도정」으로 연결될 때 상징이 아닌 氣의 세계에서 神과의 만남을 성취하는 것이 될 것이다. 결코 니이체처럼「신은 죽었다」고 선언하지 않고서라도.

뒤랑과 함께 서양문화에서 특이한 존재는 바실라르인데 뒤랑의 「상징적 상상력」도 바시라르의 시학(詩學)을 인류학으로 확대, 발전시킨 것이다. 바실라르의 상징적 우주론, 4원소설-물, 대지, 불, 공기-은 동양의 음양(日·月) 오행(火·水·木·金·土)에 비길 수 있다.

양자에서 물(水) 불(火) 대지(土)는 일치하고 있다. 바실라르의 「공기」가 오행에서는 목(木) 금(金)으로 대치되고 있는 셈이다. 「공기」를 가시적인 형태로 전환시키면 즉 고체화하면 생명을 나타내는 목과 무생명을 나타내는 금으로 된다고 볼 때 양자는 매우 유사한 발상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바실라르가 공기(空氣)라고 한 것은 바로 氣철학과 연결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없을까? 왜냐하면 바실라르의 학문적 성향으로 볼 때 공기라는 것을 원소주의에 입각해서 본 것이라 하기 어렵다. 바실라르의 탁월함은 서양의 성상파괴주의를 초월하는 방법으로 「과학적 비평」과 함께「꿈의 침잠방법」을 동시에 숙고해야만 가능하다고 제기한 점이다.

뒤랑은 따라서 바실라르 이후에는 「몽상의 시학」의 국한된 인류학을 일반화할 길밖에 없다고 격찬하고 있다. 바실라르의 시학을 인류학의 넓은 무대로 확장, 발전시킨 장본인인 뒤랑은 필자의 예술인류학에 가장 근접한 서구학자임에 틀림없다고 하겠다.


J. J. 메커룬의 스펙타클spectacle 이론에 비추어 본 예술인류학

올림픽, 그 문화적 영상의 모자이크와 神들의 잔치 >

메커룬은 경기나 스포츠가 현대사회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이지만 오늘날의 조직적 스포츠는 서양사에서도 약 1세기가 넘지 않은 발명품이라고 한다. 경기나 일반적 놀이형식은 서구사회의 가치구조를 갖는 사회에서 가장 역설적인 것으로 규정한다. 그러나 이러한 역설적인 것의 기능이 특정사회, 나아가 세계를 한덩어리가 되게 하고 의사소통을 하게 한다고 결론짓고 있다. 원시사회에서 어른들의 경기는 종교적, 신화적, 사회, 문화적 과정과 밀접한 연관되었다. 바로 이러한 원시사회의 경기의 기능을 오늘의 경기나 올림픽은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메커룬이 제시한 놀이형식의 역설은 ⸁형식적 구조 ⸂정의(情誼)적/ 경험적 질 ⸃동기적/ 기능적 차원 ⸄의미론적/ 상징적/ 의사전달적 체계 등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경기는 언제나 공공적 규칙, 미리 결정된 역할, 잘 정의된 목표, 그리고 연행된 질을 평가하는 명시된 기준 등을 갖추고 있다.

규칙과 강제성, 자율과 선택

규칙은 강제성을 띠고 있다. 규칙을 존중하는 점에서 경기는 어김없는 하나의 사회체제로 된다. 그러면서도 개인적 자율성이 강조되고 임의적이고 다양한 역할을 선택할 수 있고 강제적 규범에 대하여 모욕감을 가지거나 계급 및 신분적 계층 등으로 특정지워지는 문화에도 결코 파괴적인 침해를 주지 않는다. 또한 경기규칙은 인간행동의 가능성 가운데 인위적으로 매우 좁은 영역을 한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기는 인생살이처럼 광범위한 것으로 보인다. 즉 규칙과 강제성, 자율과 선택의 역설이 공존하고 있다고 메커룬은 대비시키고 있다. 경기의 정의적, 경험적 질은 경기규칙의 편협성과 갈등 관계를 이룬다. 규칙을 어기는 것이 재미fun이고 이것은 나아가 놀이의 스펙트럼 효과를 통해 양극화된다. 즉 경기/재미/여흥의 역설이 공존한다.

동기적, 기능적 차원에서 보면 경기는 또한 매우 자유스럽고 자의적인 활동이다. 경기는 자기목적적, 자기만족적, 자기실현적인 것인데도 심리적,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으로 중요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경기는 과학예술, 전쟁, 상업, 정치의 발생적 과정의 한 근간으로 비유될 수 있다. 특히 엄숙한 삶에 비유된다. 즉 경기는 자기 만족, 사회, 심리적 결과 초래, 엄숙한 삶의 비유 등으로 역설이 공존하고 있다.

의미론적, 상징적, 의사전달적 체계로서 경기는 언뜻 보면 매우 단순하다. 한 사람이 경기규칙을 알면 쉽게 언어적 경계를 넘어 놀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기의 의미는 매우 역설적이다. 놀이의 상징물은 매우 다의적multivocality이고 다의미적(多意味的)이다. 극단적인 경우에 투머V.Tumer가「의미의 양극화」라 부르는 것을 형상화하려고 한다. 예컨대 체육인의 신체는 초상icon으로 「감각적 극」에서 환유적 기능을 하고 다른 한편「인지적 극」에서는 은유적 기능을 한다. 즉 환유적, 은유적 기능이 공존한다.

규칙과 피끓는 도취

올림픽과 같은 경기를 보편적 언어라 부른다. 그러나 그것은 코드의 수준에서는 가능하지만 방언(方言)의 수준 메시지mesage의 수준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더욱이 메시지의 수준에서는 연속적이 번역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바벨 탑(塔)이 될 수도 있다. 현대생활의 무미건조한 일상성과는 대조적으로 사람들은 경기규칙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규칙이 있기 때문에 피끓는 건강도 도취」가 가능하다.

카니발 연구에서 다마타Robert Damatta는 두몽Dumont의 이론에 좇아 위계적인 사회에서 연극으로 드러내 보이는 것은 평등화시키는 것이라 한다면 이데올로기상 평등한 사회에서는 위계적 서열을 생산해 내는 것이라고 말 한 바 있다. 그런데 두 가지를 동시에 해내는 것이 운동 경기이다. 즉 위계, 평등의 모순이 공존한다.

근육공화국, 평등사회

승자와 패자는 위계적 사회관계이지만 경기는 동시에 평등한 사회체계를 이루어 놓는다. 성취상achievement의 불평등이지 귀속ascription상의 불평등이 아니다. 경기는 경쟁적이고 동시에 행동적이다. 자발적 경쟁이다. 또한 사건을 생산하는 것이지 사고 팔 수 있는 대상물object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다. 연행performance이론의 입장에서 경기에 대한 역설적 의미의 공존을 분석한 메커룬은 경기 중의 경기라 할 수 있는 올림픽을 거대한 스펙타클로 본다. 이것을 인기있는 민족지a kind of popula ethnograhy, 다양한 문화적 영상의 모자이크로 표현하고 있다.

메커룬은 경기를 통해 규칙language과 역설symbol이 공존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일종의 사건event에서 언어와 상징의 역동적 관계를 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그의 이론에서 경기라는 것이 인간의 신체를 동원한다는 점에서 더욱 양극적 의미를 갖고 있다. 앞에서 언급되었지만 신체는 감각적 극에서는 환유적 기능, 인지적 극에서는 은유적 기능을 동시에 하기 때문이다. 메커룬은 경기에 대한 의미분석은 의사소통체계에서 클라이막스를 이룬다는 점에서 예술인류학이 철학의 커뮤니케이션을 목표하고 있는 점과 상통함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언어⇔ 상징⇔ 신체, 언어⇔ 상징⇔ 신화

메커룬은 경기의 규칙과 시합은 마치 텍스트text와 컨텍스트context의 관계처럼 다의적multil-vocal이라고 본다. 메커룬은 상징을 신체에서 찾지만 필자는 상징을 氣에서 찾는다. 이를 필자의 도식「언어⇔상징⇔氣」에 대입하면 즉「언어language⇔상징⇔신체(물진)의 도식이 가능하다.

상징적 차원에서 보면 신체야말로 매우 극단적인 상징성을 갖고 있다. 이는 앞장에서 뒤랑이 신화분석에서 즉「언어⇔상징⇔신화」로 커뮤니케이션 체계를 이룬 것과 매우 대조적이다. 결국 필자에게는 상징이 氣나 神으로 발전되었는데, 뒤랑에서는 神話, 메커룬에게서는 신체로 대체되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텍스트이든 사건event이든 경기game이든 모두「언어⇔상징⇔氣」의 커뮤니케이션으로 설명될 수 있음을 뜻한다. 기가 왜 신체나 신화와 관계하는지, 또 이것들의 가장 원초적인 근거가 되는지를, 나아가서 氣자체가 神인지를 설명하는 것이 필요하다.



언어⇔ 상징⇔氣

이것은 더그러스Mary Douglas가 말하는 존재의 한계성으로서의 배물사상fetishism이나 인간의 적응력으로서의 사교성socialibity이 인간생활에서 최선이라는 것과 다르다.

어떠한 것으로도의 환원reductionism도 부정하는 것이다.

메커룬은 이밖에도 최근 그의 저서「Rite Drama Festival Spectacle」(의례, 극, 축제, 장관)에서 경기를 비롯 올림픽의 문화적 연행의 장르인 의례Ritual, 극Drama, 축제Festival, 장관(壯觀,Spectacle) 등 네 장르가 서로 중첩되는 한편 한 장르가 다른 장르의 존립근거가 된다고 말함으로써 형식적인 분류가 배타적 결정성을 갖는 것이 아님을 표명하고 있다. 이것은 예술인류학이 학문, 예술, 종교라는 문화장르의 통합가능성과 함께 분류코드code가 결정성이 없음을 나타낸 것과 상통하고 있다.

메커룬은 서양문학사에서 소설이라는 장르가 18세기에 개인주의가 만연했을 때 발생하였듯이 현대 기술산업사회에 와서 장관이라는 문화적 연행의 새로운 장르가 등장하기 시작했다고 보고 있다. 장관은 여타 장르의 통합적 성격이 강한 장르이다. 산업사회는 기술화 이외에도 전문화로 인해 문화의 장르가 너무 분화되고 장르와 장르 사이에 심각한 벽이 드리워져 있다. 필자의 예술인류학은 학문, 예술, 종교라는 장르의 벽을 허물므로써 마치 메커룬의 장관과 같은 역할을 문화 전반에서 기대하고 있다. 예술인류학은 그 한 구체적인 방법론으로 제시된 것이다.

인간사회도 열역학 제2법칙과 같이 엔트로피entropy가 증가하고 커뮤니케이션의 다의미성은 엔트로피의 증가로 커뮤니케이션의 불확실성을 증가시키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결국 인간 존재의 멸망이나 의사소통 불능을 예고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체계의 도래를 함께 의미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쪽의 멸망이 다른 한쪽의 탄생으로 나타나는 것이 우주 본래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술인류학이 이미 전제한 것이기도 하다. 세계는 자기완결적인 것이다.

예술인류학의 거시모델

지금까지 예술인류학을 질베르 뒤랑의 신화분석, J. J. 메커룬의 스펙타클 이론과 비교함으로써 그 학문적 성격과 방법론의 성격을 어느 정도 조명해 보았다.

결과적으로 볼 때 이들 사이에는 많은 공통점이 있는 반면에 약간의 차이점이 있음을 현명한 독자는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이같은 점을 요약해보면 먼저 의 개념이 있으냐 없느냐에 따라 경계선이 마련된다는 점이다.

뒤랑과 메커룬은 철저한 이(理) 또는 법(法)의 문화인 서구사회의 학자이지만 서구문화의 자체적인 한계 안에서 이를 벗어나려는 맹렬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고 여겨진다. 뒤랑은 신화분석의 입장을 형상적 구조가 스스로 변화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굳어 있는 언어구조보다 우위에 선다고 보고 있다.

놀이형식의 역설, 스펙타클의 다의미성

메커룬은 경기의 여러 차원 즉 형식적 구조 정의적/경험적 질, 동기적/기능적 차원, 의미론적/상징적/의사전달 체계 등으로 분석하고 서양적 놀이형식playforms의 역설을 논했다. 그리고 스펙타클의 다의미성multivocality을 보여준다. 두 학자는 언어구조나 규칙보다는 형상적 구조나 상징적 의사전달 체계에 관심을 더 기울이고 비중을 더 주고 있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언어→상징」의 입장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같은 내용을 텍스트이론으로 설명하면「텍스트→컨텍스트」의 도식으로 볼 수 있고 양자 사이에는 여러 차원, 중층적 구조가 존재한다고 가정해 볼 수 있다. 결국 인간은 끊임없이 컨테스트를 텍스트화textualize하거나 텍스트를 컨텍스트화contextualize 하고 있다.

이상을 하나의 커뮤니케이션 체계로 만들어보면 「언어⇔ 상징, 텍스트⇔ 컨텍스트」등 가역반응의 형식을 나타내게 되는데 필자의 예술인류학이 위의 세 학자와 그들의 입장과 다른 점은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氣철학을 기초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氣의 존재가 상징이나 컨텍스트를 가능하게 한다고 보고 있는 점이다. 그런데 氣는 언어의 형태로 간주할 때는 개념임이 분명하지만 氣는 개념 이상의 것이다. 오히려 대립과 분열을 일으키는 또는 통합을 이루는 우주의 근원적 동인(動因)이며 우주 그 자체라고나 할까? 따라서 氣가 언어 이상의 또는 언어 이전의 존재가 되기 때문에 상징과 氣를 다시 분화시켜 위의 도식을「언어⇔상징⇔氣⇔사물」로 종합했다.

「언어⇔ 상징」사이에 존재하던 다의성multivocality은 이제 언어의 의미성을 떠나 氣의세계, 다시 말하면 精·氣·神의 세계인 종교의 세계와 연결되게 된다.

이같은 이유 때문에 뒤랑이「신들의 전쟁」이라 이름붙인 신의 세계는 예술인류학에 이르러「神들의 유희」로, 메커룬이 「일종의 민족지a kind of popular ethnogrphy」「다양한 문화적 영상의 모자이크」라 표현한 올림픽의 스펙타클은 「신들의 잔치」로 승화된다. 예술인류학의 목적을 「 氣의 커뮤니케이션 체계」를 이루는 것이라고 한다면, 뒤랑과 메커룬이 상징의 세계에 대한 조명으로 우주나 인간의 삶이 전통적인 학문이 세계보다 훨씬 풍부하고 다양하고 변화무쌍하다 는 것을 보여주는 데 성공한 것이라면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술인류학을 상징이 氣, 즉 신의 세계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인간세계에 신의 개입intervene을 인정하고 있다.



메타랭귀지→다의성→음양세계

神의 세계는 신화 즉 말, 이야기가 아니다. 또한 문화적 표현이나 설명도 아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상징의 세계도 아니다. 상징은 고작 신들의 세계를 비추는 거울에 불과하다. 마치 말이 물리적 세계의 거울이듯이, 한편 뒤랑과 메커룬은 신화나 올림픽을 메타랭귀지meta language화하여 다의성의 회복과 함께 동양의 음양시계에 접근하고 있다.

음양은 무엇인가? 역동적 대립성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는 한 방법이다. 그리고 이것은 세계의 본래적인 모습이다. 음양은 인식-존재론(존재-인식론)이며 생성적becoming 세계상이다. 음양은 대립의 인식이라는 점에서 법칙적 인식과 다르며 음양은 대립적 존재라는 점에서 다차원multi-dimension적이다. 언어와 법칙은 한 차원의 것이고 상징과 대립은 다차원의 것이다. 전자는 서구문명, 후자는 동양문화를 나타낸다. 전자는 법률가의 문화, 후자는 시인의 문화이다. 또한 전자는 시장문화, 후자는 극장의 문화이다.

1은 2이며 2는 1이다(一卽二 二卽一)

언어는 법칙을 상징은 대립적인 것의 교환을 통해 세계를 이해한다. 그러나 氣의 세계는 엄격히 말해서 교환도 아니다. 세계의 운행 그 자체이다. 그러나 이것을 언어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개념, 기소가 필요하다. 기소는 있음의 없음(有와 無), 없음의 있음(無와 有)을 나타내는, 우주를 설명하는 메타랭귀지이다.

뒤랑은 절대교환이나 형태적 닫힘을 거부한다. 이것은 음양이 「1은 2를 찾고 2는 1을 찾는」불확실한 교환이며 끊임없이 미분, 적분(微分·積分), 취산(聚散)을 거듭하는 열림의 구조라는 점과 만나고 있다.

상징, 그 현란한 자유

J. J.메커룬은 신체를 자연적 상징natual sumblo으로 사용함으로써 신체의 물질적 한계를 탈피, 세계를 상징체계로 전환시키고 있다. 이에 비해 예술인류학은 열려진 물리의 세계open physics를 가정한 바 있다. 이것은 열려진 마음open mind이상의 것이다. 요컨대 신체의 상징화는 상징적으로 물리적 체계를 초월하는 것이라면 열려진 물리적 세계는 상징에서 남아 있는 언어의 흔적을 완전히 벗어나는 비언어적 소통의 세계를 시사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신체 자체의 우주적 소통을 전제함으로써 우주와의 직접적인 소통에 더 중점을 두고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氣와 통함은 물론이다. 이것은 또한 우주의 층층적 구조를 초월함을 뜻한다.

J. J.메커룬의 스펙타클(壯觀)이론은 무엇보다도 스펙타클이라는 범주 속에 의례, 드라마, 페스티벌이라는 장르를 설정하면서도 동시에 장르 사이의 불가침적 경계를 부정함으로써 상호작용을 강조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이러한 점에서 문화의 장르를 학문, 예술, 종교로 나누면서도 동시에 장르를 해체하는 예술인류학과 장르론에게 공통점을 갖고 있다.

장르론의 이같은 공통점은 그 연구결과에서도 상징적 의미를 추구하는 것으로 수렴되기도 하는데 양자는 상징이론들이 공통적으로 포함하고 있는 절대적 진리에 대한 부정과 역설을 수용할 자세를 갖추고 있다. 말하자면 모순을 역설로써 극복함으로써 이원적, 절대적 세계의 이율배반을 해결하는 것이다. 이것은 좀 비약해서 설명하자면 시니피앙, 시니피에의 끊임없는 반복으로 초자연, 무의식의 상징세계를 투사한다고 볼 수 있다. 예컨대 상징의 극단적 예로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라는 말이 정반대로 「나는 당신을 미워한다」로 의미 해독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메커룬은 올림픽을 V. 터너의 커뮤니타스communitas이론의 틀에서 접근하여 일종의 올림픽 커뮤니타스론을 주장하고 있다. 가장 딱딱한 인간의 신체가 가장 큰 상징효과를 내고 그 결과 적대국들이 하나가 되고, 「지구촌」의 이름으로 세계가 일체감을 형성하는 것은 커뮤니타스이론의 가장 좋은 본보기임은 물론이다. 메커룬은 커뮤니타스에서 역치성(橥値性, liminoid)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필자의 예술인류학이 추구하는 것과 일치하고 있다. 경계(境界) 선상에 있는 여러 항목들을 연구하여 경계선의 양쪽에 주지어선 것들의 의미를 밝히고 소통시키는 것이 예술인류학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단지 메커룬이 올림픽을 대상으로 본다면 필자는 보통사람의 일상적 생활을 대상으로 상징의 의미를 발견하려 함으로써 커뮤니타스이론을 일상으로 확대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한 편이다. 예컨대 일상 생활 속에서 비언어적 의미를 찾는 행위는 연구대상을 훨씬 넓히는 것이다. 전자는 신체에서 어떤 의미를 찾고 나아가서 본질적으로 「인류는 하나다」라는 사실을 환기시킨다면 후자는 일상의 언어나 사물 속에서 의미를 찾고 종국에는「우주는 하나다」라는 깨달음에 도달한다고 비유할 수 있다. 예술인류학이 철학, 즉 기일원론(氣一元論)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메커룬이「올림픽 커뮤니타스」의 주장자라면 필자의 예술인류학은「문화커뮤니타스」의 주장자가 되는 셈이다. 메커룬이 고대 커뮤니타스를 올림픽에서 다시 발견한 것이라면 예술인류학은 보통사람의 일상생활을 커뮤니타스이론에 입각해서 해석함으로써 고대와 현대를 연결하는 작업을 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열심히 자기영토의 구획정리를 하면서 동시에 그 구획을 지우는 작업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징적 동물이다. 그「지우기 작업」은 문장, 생활, 우주에까지 이른다. 이를 물리학에 비유하면 인간은 고체화되어 가는 상징을 액체화시키지 않으면 안되고 끝내 기체화를 통해 그것의 심층을 거울처럼 맑은 수심을 들여다보듯 하거나 수면에서 수증기(초의식)을 증발시켜 神의 현현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고 종국에는 신인합일이 되어야 한다.

올림픽뿐 아니라 보통사람의 일상생활, 그것도 장관을 이룬다. 반대로 올림픽도 일상생활의 연장인 것이다. 사람의 신체와 문화 장르의 영토권 주장이 예술인류학이라는 상징적 제국주의 앞에 무력해지기 마련이다. 그것은 달콤한 무정부주의를 동시에 배태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징이야말로 가장 현란한 자유이다. 상징의 절정은 이다.


이상의 논의를 종합해 볼 때 예술인류학은 <도표6>에서의 빗금친 분야에 해당된다고 말할 수 있다. 사물과의 관계를 가지되 끊임없이 언어와 氣를 상징적인 차원에서 연구한다.

이같은 연구는 언어와 氣의 사물화를 추구하는 과학적 입장과는 다르다. 과학은「개념」「결정적」또는「시간에 따른 운동」을 다루는 반면 예술인류학은 의미의 다차원성, 구조의 재생산 또는 순환을 다룬다. 과학은 인간이 신체를 담고 있는 물리적인 세계를 하나의 조건 위에서 가정을 통해 다루지만 예술인류학은 인간의 마음의 세계를 구조의 순환이라는 입장에서 다룬다. 인간이 알고 있는 진리는 매우 다원다층적인 세계의 한 층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제 하나의 층에 구속된 학문은 해방되어야 한다. 학문이 세계의 본질을 규정할 수 없다. 「본 것만큼 세상은 있는 것이다」「필요한 만큼 세상은 나타난다」결국 예술인류학이 인간, 또는 인간문화를 통합적으로 고찰하고자 한다고 볼 때 <도표6>의 ⸁물리적인 영역⸂과학적인 영역⸃예술적인 영역⸄종교적인 영역은 매우 긴밀한 상호작용을 한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 네 영역은 다시 말하면 사물, 사실의 네 차원으로 볼 수 있는데⸁영역은 뉴우튼역학과 상대성이론이 적용되는 차원이고⸂영역은 자연과학과 구조언어이론⸃영역은 구조언어이론과 상징이론⸄영역은 상징이론과 기철학적패러다임이 적용되는 차원이다. 이들 영역에 적용되는 구체적 법칙은⸁은 운동 및 전자기의 법칙⸂는 운동 및 구조의 법칙⸃은 구조 및 다차원의 법칙⸄는 다차원 및 전자기의 법칙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의 관계는 서로 순환적이다. 따라서 사물을 통합하고자 할 때 구조적 법칙, 전자기적 법칙, 운동의 법칙 등 세 법칙으로 설명하면 가능하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이를 더 축약하면 구조적 법칙과 운동의 법칙이다. 전자기적 법칙도 구조적 법칙의 동태적 형태이기 때문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면 운동의 법칙도 구조적 법칙에 환원될 수 있다. 운동의 법칙은 고정화된 구조와 구조 사이에 일어나는 현우주를 운동적으로 볼 때는 구조의 발견이 중요하고 그 반대로 고정된 구조적으로 볼 때는 그것이 무한히 역동적으로 움직인다고 하는 대전제인 「생성적 우주관」이 필요하게 된다. 「구조와 운동」은 보는 입장에 따라 서로 상호보완적인 역할을 한다. 예술인류학이 기초한 氣철학은 바로 위의「생성」의 대전제 위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대전제에 의해서 다차원의 구조가 학문적 타당성을 갖게 된다. 결국 하나의 법칙을 찾아가든가 다차원의 의미구조를 찾든가, 둘 중에 하나를 하거나 또는 둘 다를 찾고 행하는 것이 인간의 활동이다. 이것은 「운동이냐」「관계냐」를 선택하는 의사결정 과정이다. 관계가 전제되어야 운동이 있고 운동이 전제되어야 관계가 드러난다. 예술인류학은 둘 다를 역동적으로 통합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