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해방공간(1945∼50)의 우리 문화예술*대중예술
내일을 지향하는 대중예술의 가치관 정립
황문평 / 작곡가
해방전후를 통한 대중예술의 범주를 구분해 볼 때 서민사회에서 생활문화의 하나로 수용할 수 있는 것 중에 통속적인 대중연예물로 국한시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이것을 다시 카테고리별로 세분화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무대공연(악극, 가극, 위문대 쇼 공연)
(2) 가수와 레코드 문화
(3) 경음악(무대연주단, 댄스홀, 미8군 쇼단)
(4) 방송국을 통한 대중음악
(5) 영화(멜로물, 영화음악)
(6) 기타 서커스 연예물
(7) 출판물(악보출판, 대중오락잡지)
1945년 8*15 직후의 대중예술의 상황
1945년 8월 20일 서울 종로 2가 19번지 기독교서적 빌딩에 무대공연(주로 연극관계 인사들)에 종사하던 인물들이 중심이었다. 극작가 연출가 서항석(徐恒錫)*박진(朴珍)*함세덕(成世德)*송영(宋影)*윤세중(尹世重)*이서향(李曙鄕)*안영일(安英一)*박영호(朴英鎬)*김예진(金銳進)*김승구(金承九)*고여성(高麗星)*신고송(申孤松)*조명암(趙鳴岩)*박상진(朴尙進)*박춘명(朴春明), 연기자 나웅(羅雄)*서일성(徐一星), 무대미술가 원우전(元雨田)*강호(姜湖)*김일영(金一彩), 극단장 김춘광(金春光)*이백산(李白山)*유장안(柳長安)*김용환(金龍煥) 등 외 다수였다. 이들의 중론은 광복과 더불어 무대공연(주로 연극)의 새로운 질서 그리고 여태껏 총독부에서 통괄하던 조선연극문화협회의 자산을 어떻게 인수하여 처리하느냐는 등 중지를 모으고 있었다. 이 모임은 만주에서 소련군이 곧 입성하느니 인천 앞 바다에 미군이 상륙한다는 등 걷잡을 수 없는 새로운 상황에서 공연질서의 재정립이 주목적이었다.
다음날 좌중에서 곧 미군과 소련군대가 입성한다는데 우리는 이 해방군을 환영하는 노래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왔다. 고여성이 작사, 김용환이 작곡한 노래 「사대문(四大門)열어라」를 등사판으로 인쇄, 보급용 팜플렛을 만드는 한편 필자가 합창으로 편곡을 해 이곳에 드나들던 남녀 가수들을 모아서 녹음했다. 종로 1가 화신백화점 맞은편 한청 빌딩 3층에 간이녹음실을 이용했다. 당시 민속무용가 조영숙(趙英淑, 김민자*홍청자 등과 같이 활약하던 사람)의 부군이 이 녹음실을 운영하고 있었다. 알루미늄판에 왁스(납)를 칠한 원시적인 녹음원판에 수록했다.
(1) 사대문을 열어라, 인경을 쳐라
삼천리 곳곳마다 물결치는 이 기쁨
민족의 꽃은 다시 피었네
영광된 내 조국 영원무궁하리라.
(사대문을 열어라 중 이절 삼절 기억 못함)
녹음된 왁스판(원판)을 당시 건국준비위원회가 접수하고 있던 정동방송국(JO. DK. KBS. 전신)에 가지고 가 2, 3일 동안 방송하다가 중단되었다. 레코드가 녹음원판이라 곧 잡음이 나기 시작, 방송 불능이 되고 말았다.
해방직후 연극인들이 조선연극문화협회의 자산을 접수하려 했던 문제의 협회 연혁을 설명해 둘 필요가 있다.
조선총독부는 소위 그들의 성전(聖戰)완수에 목적을 두고 모든 문화예술 단체를 통제해 왔었다. 1942년 7월 이미 만들어져 있던 조선연극협회와 조선연예협회를 통폐합 「조선연극문화협회」로 하고 이것을 어용단체로 만들어 모든 무대 공연물에 획일적인 통제를 실시했다. 감독기관은 총독부 학무국 정보과 소관이었다. 이 협회의 회장에는 당시 경성제국대학 교수이던 일본인 가라지마(辛鳥曉(신도효))를 임명했다. 가라지마는 일제가 미국선교재단이 설립한 연희전문학교를 접수 아세아전문학교라고 개명, 이 전문학교의 총장직까지 맡고 있었다. 실질적으로 협회실무를 집행하는 상무직책은 한국인에 맡겨졌었다. 첫 번째 상무는 동양극장 사업부에 관계하던 김관수(金寬洙, 창씨명 기시모도 岸木寬(안목관))라는 사람, 그의 친형 김인수(金仁洙, 첼리스트). 제2대 상무직은 0.K 레코드 사업부에 있던 김상진(金尙鎭, 창씨명 미끼 三木(삼목), 해방직후 서울 중앙극장 경영)이었고, 1944년 제3대 상무이사는 영문학 전공 경성제국대 교수이던 김동석(金東錫, 해방 후 월북)이었다. 모든 무대공연 예술인들을 전공 분야로 분류해서 연극, 악극, 창극, 연예(주로 곡예*마술)의 각 분야별로 경기도 경찰국에서 발행하는 기예증(技藝證) 소지자만이 공연활동을 할 수 있도록 통제했다. 소위 전시에 후방요원이라는 특혜를 주는 것처럼 배급물자를 주었다. 무대장치를 위한 모든 물자(광목), 목재, 페인트 등까지 통제 단체마다 배급제로 신작공연물에 공급을 해주었다.
협회의 직영단체로 산업전사들의 위문공연을 빙자하는 목적극(전쟁 완수, 생산증대, 내선일체 등)을 만들어 농촌, 광산, 공장 등지로 순회 공연단체인 이동(移動) 극단 2개 단체(한 단체 20명 내외)를 만들어 한국 내 순회공연은 물론 일본, 만주 지방까지 순회공연을 시키고 있었다. 일제 말기 전국에 극장 수는 약 2백 개나 되었으나 학교강당, 공장이나 광산촌에는 가설무대를 꾸며 순회공연을 강행시켰다.
정동소재 배재중학교 교정 뒤에 있던 아펜젤러 2세의 사택이 바로 이 협회 사무실이었는데 많은 물자와 자산(은행예금 등)을 어떻게 인수하느냐가 바로 8월 20일 종로 기독교회관에 모였던 연극인들의 중론이었다.
1945년 8월 해방 당시 전국의 극장 분포를 살펴보면 서울과 경기도에 28개, 황해도 7개, 평안남도 14개, 평안북도 18개의 상설극장이 있었다. 경남 26개소, 경북 18개소, 전남 10개소, 전북 10개소, 충남 11개소, 충북 3개소, 함남 22개소, 함북 22개소, 강원도 11개소 등 전국의 극장은 195개소였다(한국극장사, 박노홍(朴魯洪) 저술). 이런 전국의 극장이 대부분 일본인들의 소유물이었다. 조선연극문학협회의 접수와 전국의 극장을 접수 운영하는 것이 당시 무대공연예술 중진들의 소박한 꿈이었다. 다시 말해서 이제 곧 우리 정부가 들어섰을 때 협회운영을 한국인들이 주체성 있게 장악하고 일본인들의 자산을 접수, 전국을 통제 운영해 보자는 원대한 포부와 궐기를 나름대로 해 보았던 것이다.
8월 20일 소련군은 원산에 상륙했고 22일에는 평양 진군 포고문을 발표했었는데 미군은 25일 인천에 일부만 상륙했다. 9월 8일에 가서 미국의 하지 장군 휘하 군대가 인천 상륙 9일에 일본인 총독 아베(阿部)의 항복조인을 받고 미국 동 사령부에서 남한에 미군정 실시 포고령을 발표했다.
문인 김광섭(金珖燮), 이헌구(李軒求) 등이 중심이 되어 중앙문회협회를 결성한데 비해 좌익계통의 「프로문학동맹」, 「프로미술동맹」, 「음악동맹」 등 많은 예술단체들이 조직을 갖추었던 것이 45년 말까지의 문화사회 현상이었다. 특히 「연극동맹」의 극장공연 등이 가장 왕성했었다.
무대공연
대중예술 계통의 무대공연단체로서는 악극단, 가극단, 위문대 후신인 쇼 공연단체들이 우후죽순격으로 흥행단체의 성격을 띠고 생겨나기 시작했다.
일제시대 특히 1940년 이후 극심한 통제로 단체등록이 힘들었던 시대에서 일시에 무제한의 해방시대 즉 간단한 공연 신고로 공연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1940년 현재 「콜롬비아 악극단」이 개편 「라미라극단」으로 「빅타 가극단」이 「반도가극단」으로 개명, 운영방식의 전환기를 맞이했다. 또 하나 규모가 큰 단체로 「제일악극단」 그리고 O.KHE 레코드사 직영 「조선악극」 등이 가장 규모가 큰 단체였다. 1943년 일본인 경영체제인 성보악극단은 성보극단 직영단체(현 국도극장) 그리고 1944년 야초(若草)극장 직영(현 스카라극장)인 「야초(若草)악극단」이 있을 뿐 전시체제에 순응하는 위문대 형식의 공연단체로 다마가와(玉川(옥천)) 위문대, 가요작가 김수린(金壽麟) 단장*가요작가 김용환(金龍煥)이 만든 「태평야(太平洋)위문대」, 성악가 최창은(崔昌殷)이 인솔했던 「중앙위문대」, 비극의 여주인공 전옥(全玉)여사가 조직한 「남해위문대」, 태평레코드사 후신인 「하나(花) 악극장」 등 이외에 잡다한 위문대들이 활동하던 것이 일제말기의 공연무대이었다.
오페라 형식에 가까운 각본과 비교적 수준 높은 창작곡(독창, 중창, 합창)으로 무용을 가미한 무대로서 노래나 무용을 반주하기 위한 악단편성이 다양하며 악단은 무대 앞에 오케스트라 박스를 꾸며 공연하는 단체가 가극단이라는 명칭을 쓰고 있었다.
무대공연 레퍼토리를 대개 1, 2부로 나누어 제1부에서는 애정물 혹은 코믹터치의 경연극 내용에 가요곡 형태의 노래나 효과음악을 사용한 드라마 중심의 연극을 상연한다. 제2부에는 경음악단이 무대를 꾸미고 가수, 무용, 개그, 원맨쇼 등을 뒤섞은 소위 「버라이어티쇼」라는 형식 공연물을 위주로 하는 단체들이 악극단이라는 호칭을 많이 사용했다.
인기 스타(주로 인기가수)나 인기 코미디언 또는 원맨쇼가 능숙한 사회자, MC 중심으로 다양한 무대를 구성하는 공연물은 「쇼단」이라고 했다. 1940년 8월 「콜롬비아 악극단」을 인수한 언론인 설의식(薛義植)은 연극인 서항석과 함께 창작가극 운동의 개척자 역할을 한 셈이다. 서항석 극작*연출, 안기영(安基永) 작곡의 가극 「콩쥐팥쥐」(전7경)를 무대에 올렸다. 이 작품은 한국 최초의 가극 형태를 갖춘 작품이었다. 41년 늦가을이 스텝이 가극단 「라미라」라고 개칭. 「콩쥐팥쥐」 보다 내용이 충실한 본격적인 창작 오페라를 목표로 설의식 가사, 서항석 구성 연출, 안기영 작곡 「견우 직녀」를 부민관에서 막을 올렸다. 출연진도 음악학교 출신이 참가하여 「가극(歌劇)」운동의 선구자임을 자처하고 나섰다. 테너 송진혁(宋鎭赫), 소프라노 성애라가 주연이었다. 라미라 가극단은 1942년 일본의 동경, 대판 등의 순회공연을 가진 뒤 「견우 직녀」와 속편격인 「은하수」를 상연한 후 재정난으로 대판출신 교포 김윤주(金潤柱)에게 단체운영권을 넘겨주었다. 김윤주가 주관하던 라미라 가극단의 후신은 가요인 김용환, 전옥 등이 등장하는 통속적인 가극단으로 변모해 버렸다.
빅타 악극단을 인수한 서민호(徐珉濠)가 자기 조카를 내세우고 「반도가극단」이라고 개명, 주로 우리의 고전 설화를 주제로 한 가극을 상연했다. 출연 멤버로는 이인근(李仁根, 성악가이인범(李仁範)의 동생, 6*25 납북)과 가수 박단마(朴丹馬)가 주인공이었다.
1944년 10월 연극문화협회 직속단체인 이동극단 제2대 공연을 위해 악극 춘향전(10경)이 부민관 무대에 올려졌다. 각본 조명암(趙嗚岩), 작곡 이면상(李冕相), 연출 김승구, 무대장치 강호(姜湖), 편곡 황문평(黃文平)이었다. 이 작품은 이면상이 남한에서 작곡한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각색 조명암, 연출 김승구, 장치 강호 등은 1947년까지 모두 월북하였다.
김윤주가 운영하던 라미라 가극단은 1945년 8월 동양극장에서 박노홍(朴魯洪) 각본, 송희선(宋熙善) 작곡, 김정항(金貞恒) 장치로 가극 「바보 용칠(龍七)」(9경)을 상연했는데 이 작품의 주인공 장동휘가 신인 연기자로 등장했다. 장동휘는 1957년 이후 영화배우로 출세했다.
8*15 해방과 극장가
1944년 후반 연극문화협회 상무직에서 물러난 김상진(金商鎭)은 삼일로에 있는 일본인 경영 중앙극장을 운영하게 된다. 당시 서울 시민들의 생활문화권은 청계천 북쪽이 한국인, 청계천 이남이 일본인들 지역이었다. 종로 4가에 제일극장, 3가에 단성사, 관철동에 우미관 그리고 서대문에 동양극장 이렇게 4개소뿐이었다. 서울의 인구 약 45만(불확실)에서 60만이었는데 20개소 정도의 극장은 대개 일본인 거주지역에 있었다. 일제는 일체 외국영화 수입금지와 전쟁 완수를 위한 목적극 같은 영화만 상영하다보니 극장의 수요 공급이 깨지고 영화 대신실연무대 공연물로 점차 극장운영이 변질되어 갔다. 일본인 전용 관람관이던 명동의 명치좌(해방 후 국제극장이라 칭함)에 조선악극단이 공연함으로써 뜻밖의 성황을 이루어 일본인 거주지역에 있던 극장주들도 한국인 공연물 상연에 무관심할 수 없었다. 김상진은 중앙극장 측(일본인)의 요구조건대로 계약(50개월 간 임대차 계약)하고 무대공연들 전용무대로 개량 변조한 연극, 악극단 등의 중앙공연(주로 신작) 무대로 제공할 계획이었다. 한 걸음 나아가 극장직영제의 연극단 1개 팀, 악극단 1개 팀을 만들었다. 당시 서대문에 있는 연극전문극장인 동양극장이 「청춘좌」, 「화화선」 이렇게 두 연극 단체를 직영해서 흥행적인 성공을 보아왔기 때문에 자신이 생긴 것이다. 기성단체의 권리금(명의변경)으로 각 5만원씩에 매수하고 출연진(연기자들)의 전속금 등 20만원이라는 거금을 투자했다. 전속 작가로는 김태진(金兌鎭, 월북), 송영(宋影, 월북), 안영일(安英一, 월북) 등 스텝이 개관공연을 위한 작품 집필 중 8*15 해방을 맞았다. 급변하는 사회상 중에 연극인들의 좌익적인 행동이 표면화되었다. 「연극은 예술가의 것이지, 단장의 것은 아니다. 모든 계약은 무효 백지다. 단장은 물러가라」였다. 수많은 공연장의 상연물 중 좌익적인 극단들의 횡포가 극심해 갔다. 1945년 말경 일본인들의 소유이던 시내 각 극장의 관리인들 10여 명이 한자리에 모여 「한성극장협회」를 결성했다. 회장에 홍찬(洪燦 수도극장, 스카라극장), 부회장에 김상진(중앙극장 주인), 김동렬(金東烈, 성보극장 현 국도극장) 그리고 이사 4명이 선출되어 미군정 당국의 행정적인 협조를 얻어 공산분자들의 극장 장악을 막을 수 있었다.
1946년 2월 7일 미군정청은 극장 및 흥행 취체령을 공포했다. 해방직후 개정휴업 상태이던 서울의 극장가. 이유는 출처불명의 외국영화 상영만으로 메꿀 수 없어 실연무대 공연물이 성행했기 때문이었다. 소위 리얼리즘 연극이라는 미명 아래 좌경적인 연극공연의 성행 뿐이었다. 한편 악극단 계통은 부정물자로 돈을 만든 건달패(협객들)가 만든(자본금을 대준) 흥행사들 농간에 공연질서가 문란해져 갔다.
1946년 말경 미군정 재무당국은 재무부 장관명으로 극장의 입장세를 1백 퍼센트 부과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동경(일본)의 맥아더 사령부가 일본에서 실시한 것과 동일한 세제법령이었다. 더 가혹한 것은 2백 퍼센트 입장세를 1945년 8월 15일로 소급해서 징수한다는 가혹한 법령이었다. 각 극장은 밀린 입장세 납부에 큰 부담을 안고 심지어 극장이 파산직전이었다. 서울의 극장협회는 각 시도별로 극장협회를 조직하도록 종용하는 한편 전국극장연합회를 결성했다. 다음해 봄(1947년), 1백 퍼센트 입장세 반대를 내걸고 총파업을 단행했다. 파업이 일주일간 계속되던 어느 날 미군정 경무부장인 조병옥(趙炳玉) 박사가 극장협회 회장단을 초치했다. 미국이 막대한 물자를 원조, 조국 독립을 돕고 있는데 한국인 스스로도 애국하는 마음으로 협조하라는 간곡한 종용에 더 이상 파업할 수 없어 이때부터 입장세를 가산한 입장료를 책정하기에 이르렀다. 계속되는 물가고로 인한 걷잡을 수 없는 인플레 현상 등으로 급격하게 극장의 입장객은 감소하고 있었다.
참고로 미군정 3년간의 인플레를 보면 통화발행고 지수가 1945년 8월을 1백으로 할 때, 군정이 끝난 1948년 9월에는 5백으로 다섯 배가 팽창하고 물가지수는 같은 기간에 1백에서 1천 6십으로 무려 10배 이상 치솟았다. 1948년 8월 대한민국이 수립됐어도 입장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1949년 말에 가서야 국회 재정위원회에서 입장세 개정안이 상정되었다. 그 동안 극장연합회 그리고 각 매스컴, 무대예술인들의 진정과 로비활동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개정된 입장세는 영화 6퍼센트, 일반공연물(실연무대) 30퍼센트로 개정 실시되었다. 이 시절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을지로 6가(훈련원 앞)에 가설극장을 경영하던 김갑기(金甲基)는 기발한 아이디어로 대중요금(입장료) 10원을 받았다. 당시 세제법상 10원 이하는 세금을 부과하지 않았다. 잡다한 2, 3류 악극단이 즐겨 이 가설무대에 썼다. 좌석제도가 아닌 이 극장에는 무조건 손님이 몰려들었다.
실제로 일반 극장보다 악극단측의 수입이 좋았다. 나중에는 일류 단체를 자처하는 악극단들도 다투어 이 극장에서 공연을 했다. 김갑기는 화수분 단지 같이 늘어나는 수입으로 벽돌 한 장을 쌓아 어엿한 극장으로 개축할 수 있었다. 속칭 「십원빵」이라는 유행어가 흥행가에 나돌았다. 당시 또 하나의 흥행풍조는 공공연하게 사회단체가 공연권을 매입해서 공연을 하는 것이었다. 공익사업기금 모집이라는 명목으로 공연허가를 받아내면 면세조치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공연단체측에서도 안심할 수 있는 극장수입으로 단체를 운영하기 위해서였다. 예를 들어 ×× 사회단체 심지어는 철도경찰 후생사업 명목으로 흥행(공연물)을 주관했었다. 호남지방에서는 모지방 검찰청이 후원, 공연을 주최해 주고 직원들의 후생사업비로 나누어 먹기식 흥행도 했다. 서울 수도청 경찰국 문화반을 위해 국도극장에서 악극계의 스타, 국악계의 명인 명창들이 총동원 무료 봉사해 주는 공연까지 했다. 신문사 주최로 국방기(비행기) 현납모금 공연, 수도청 주관 교통질서공연(캠페인)을 빙자해서 흥행을 하는 단체도 있었다. 본래 사상성이 투철해서 북으로 가는 연극인들이 많이 있었지만 평양에 가면 예술가로 대접해주고 주택도 제공, 생활에 위험 없이 좋은 공연을 할 수 있다는 유혹에 빠져 사상성보다는 당장 먹고살기 위한 목적에서 동무 따라 강남 가듯 그들을 따라 38선을 넘어 북으로 간 연극인도 있었다.
1950년 2월 초 서울의 큰 극장 주인 3명에게 긴급 구속영장이 발부되었고 서울지방 검찰청 명모 검사의 손으로 10여 명의 극장주들이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극장세 미납으로 거액 체납자라는 것이었다. 명월관, 태서관 등 요릿집 주인들도 구속되었다. 중앙극장 경영자 김상진은 10일 만에 석방되었지만, 2주일에서 2개월 이상 구금된 사람도 있었다. 소위 입장세 미납사건이 미해결인 채 6*25 동란을 겪게 되었다.
뮤지컬시대 개막
1946년 정월 동양극장 무대에서는 조선악극단의 뮤지컬 「카츄샤」(톨스토이 원작, 부활)의 막이 올랐다. 극작가 조영출(예명 조명암)의 각색을 송진근(宋珍根, 일제 때 방송국 아나운서, 단파도청사건으로 투옥, 8*15와 함께 출감)이 연출했고 작곡은 김형래(金炯來)가 맡았다. 작곡자 김형래는 일본 제국음악학교 출신으로 1943년 O.K 레코드사 사장 이철(李哲)이 청계천 광교 옆 빌딩 지하실에 개설한 O.K 음악무용연구소의 음악교육 담당자였다. 1944년 이철 사장이 사망하자 그의 미망인 현송자(玄松子) 여사에게서 조선악극단 운영권을 인계 받은 사람이 당시 문예부장이던 방예정(方禮汀)이었다. O.K 전속 즉, 조선악극단의 중요멤버들이 새로 생긴 약초 악극단(김해송(金海松), 이난영(李蘭影), 장세정(張世貞), 남인수(南仁壽) 등)으로 대거 입단했기 때문에 방예정은 김형래를 중심으로 뮤지컬 형식의 참신한 무대를 꾸몄던 것이다. 이 뮤지컬의 중요 멤버로는 O.K 음악무용연구소 제1회 졸업생 중 가창력이 뛰어난 김백희(金白姬)를 주인공(카츄샤 역)으로 송달협(宋達協)을 상대역(네플르토프 백작 역)으로 기용했다. 무용팀으로는 이 연구소의 발레 교수이던 정지수(鄭志樹, 일본에서 발레수업, 일본예명 사다이 노보루 貞井昇(정정승))가 일본에서 활약하다가 서울에 와서 연구생들에게 본격적인 무용교습을 실시했다. 김백희와 같은 반에 주리현(朱莉現 스페인 무용가), 최선희, 강윤복 등 한국 최초의 발레단이 구성되었다.
김형래의 음악(작곡, 편곡) 경향은 종래의 가요곡(유행가)풍의 음악보다는 한층 차원이 높은 세미 클래식한 작품이었다. 주제음악, 무용곡, 합창 등 본격적인 뮤지컬 무대가 만들어졌다. 조선 악극단 단장 방예정의 기획과 김형래의 음악은 성공했다. 종래 흔히 있었던 악극과는 본질적으로 색다른 신선감이 풍기는 무대였다. 이 새로운 형식의 뮤지컬은 호평 속에 연일 만원사례였고 특히 김백희의 가창력이 뛰어나 젊은 학생층에 새로운 팬이 생기기 시작했다. 흥행적으로도 성공한 조선악극단은 5월 28일 국도극장의 개관 공연 무대를 장식하게 되었다. 이때까지 해방전 일본인이 경영하던 성보극장을 국도극장이라고 새로 개명, 장내도 새로 개축하고 본격적인 공연무대로서 모든 연예인들에게는 본격적인 종합무대 물을 공연할 수 있는 무대로 인식하게 되었다. 조선 악극단의 새로운 극장무대의 개관 기념 공연물은 뮤지컬 「가면무도회」라는 레퍼토리였다. 뮤지컬 「가면무도회」의 극작은 역시 조명암이었고 그가 연출까지 맡았다. 작곡 김형래, 여주인공 김백희였다. 상대역은 김영필(金永弼)이었으나 의도적으로 김백희 중심인 각본이었다. 이 뮤지컬로 김백희는 당시 공연무대에서 신데렐라 같은 존재였다. 이 뮤지컬 역시 흥행적으로도 성공한 작품이었다. 작곡가 김형래는 이 뮤지컬의 주제가 「그리운 장미화」(조명암 작사, 김형래 작곡)의 악보를 인쇄 입장한 손님에게 일금 십 원씩 판매했다. 뮤지컬의 주제가 악보를 인쇄 배부했다는 것 역시 첫 시도였다. 입장객 중 젊은이나 학생들은 이 주제가 악보를 사들고 마지막 피날레 부분에서는 따라 부르기도 했다. 당시 새 노래로서 대중에 유행되었다. 방송이나 레코드도 아닌데 새 노래가 극장무대에서 그리고 악보로서 가요팬을 구축한 것 역시 처음 있던 일로 악극무대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악극단은 부산, 대구, 마산 등 지방공연에 나섰다. 그러나 당시 지방극장의 무대시설이 빈약하여 서울에서 가지고 간 대형 무대장치를 제대로 꾸밀 수가 없었다. 악극단 공연하면 지독한 신파조의 인정비극 그리고 소위 버라이어티쇼가 곁들이는 것이 통례인데 조선 악극단의 뮤지컬은 너무 고급스럽다고 할까, 지방손님들에게는 큰 환영을 못 받았다. 방예정은 경제적 손실을 무릅쓰고 서울에서 신작공연을 준비했다. 그 해 11월 서울 수도극장(현 스카라극장) 무대에 가극 춘희(椿姬)로 막을 올렸다.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를 그대로 축소 번안한 각색 물인데 역시 조명암 작*연출이었다. 김형래는 새로운 창작음악을 하지 않고 베르디의 오페라 아리아를 그대로 편곡 삽입해서 김백희가 노래 부르게 했다. 엄격히 말해서 본격적인 성악곡을 소화시키는 데는 좀 무리가 있었다. 또한 상대역(김영필)도 오페라의 아리아를 소화시키지 못하였다. 이중창 같은 다까라즈카(寶塚(보총))의 상연물로서 일본인 작가 시라이(白井鐵雄(백정철웅)) 원작으로 중국의 설화 만리장성을 쌓을 때 열녀(烈女) 맹강녀(孟姜女)의 이야기로써 원제목은 도화선(逃花扇)이었다. 이 작품은 조명암이 번안*각색, 김형래가 작곡한 것으로 1945년 봄 O.K 음악무용생들의 시범작품이었는데 이때 김형래의 작곡 실력을 인정받게 되었다. 이 작품은 다시 본격적인 뮤지컬로 개작해서 공연했다. 김백희의 노래는 실패했다. 관중들 역시 본격적인 오페라 음악을 제대로 소화시키지 못하는데 실망했다. 조명암은 이 작품을 마지막으로 서울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는 북으로 간 것이다. 무용선생 정지수도 북으로 갔다.
1947년도 신춘특집으로 조선 악극단은 뮤지컬 「만리장성」을 상연했다. 명동 한복판에 있는 국제극장 무대는 주한 중화민국의 후원이라는 특별 선전문구가 이색적이었다. 뮤지컬 「만리장성」은 본래 일본 소녀가극단이 가창력이나 연기력으로 인정받았던 작품인데 개작 재상연한 것이었다.
조선 악극단의 대작주의 작품이 계속될 수 없는 경영난으로 빈사상태에 빠졌다. 주리(朱莉), 강윤복을 중심으로 한 무용단과 경음악단이 합심 동인제 형식으로 무용과 세미클래식 음악 연주만을 가지고 「장미악단」이라고 개칭 극장공연을 5*6회 해보았지만 많은 관객을 동원할 만큼 인기를 얻지 못했다. 가요곡, 코미디 등이 없는 순수한 감상 무대로 성장하지 못하자 김형래는 자기의 조카(생질)벌 되는 연기자 김진규(金振奎, 후일 영화스타)에게 단체운영권을 넘겨주었다. 김진규의 처 이민자(李民子)의 인기를 등에 업고 장미악단을 통속적인 악극단 형식의 무대로 꾸몄다. 1948년 개월 당시 「삭량영단」의 후원으로 농촌계몽극(쌀 증산 운동)을 가지고 단성사에서 막을 올렸다(아름다운 새벽). 이때 이승만 박사가 단성사 공연을 참관하러 왔었다. 이 박사가 환국 이후 처음으로 대중예술 공연을 감상했다는 기록을 남긴 셈이다.
가극단과 악극단 공연
1945년 해방으로부터 1950년 6*25까지 활발하게 활동(공연)했던 단체로는 조선악극단, 반도가극단, 라미라가극단, 희망악극단, 백조가극단, 태평양가극단, 악극단 K. P. K, 부길부길쇼, 현대가극단, 남대문악극단, 새벽악극단, 무궁화악극단, 태양가극단, 악극단 신천지, 대도회악극단, 아리아악극단, 서울악극단, 백민악극단, 은방울악극단 등 외 십여 단체(주로 지방전문 순회공연체)를 합하면 20여 개의 공연단체가 된다.
극작가로 서항석(徐恒錫), 이서구(李瑞求), 박노홍(朴魯洪)(이부봉(李扶鳳)*이사라(李史羅)), 조명암(趙鳴岩)(이가실(李加實)), 박신민(朴新民), 김화랑(金火浪)(이익(李翼)), 김건(金健), 김상화(金尙火), 김용호(金用浩), 반야월(半夜月), 김석민(金石民), 유호(兪浩), 박두환(朴斗煥), 연출가로는 이진순(李眞淳)(李水山), 백사선(白思善), 허남실(許南實), 김정섭(金正燮), 이유진(李有眞) 등을 손꼽을 수 있다.
본격적인 가극에 가까운 작품을 공연한 단체로는 반도가극단을 경영하던 박구(朴九, 후일 영화감독)로 그의 끈기 있는 나름대로의 예술관을 인정할 만하다. 서항석 각본*연출, 안기영 작곡으로 된 가극 「장화홍련전」 그리고 같은 스텝의 작품 「에밀레종」은 수준 이상의 가극작품이었다. 다만 창작극이라면 으레 고전설화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광수 원작 「꿈」을 서항석의 생질 서림(徐林)이 각색, 김희조(金熙祚) 작곡(음악담당)이 이채로운 작품이었다.
1948년 3월 새별악극단이 「백마강 달밤」이라는 악극을 상연했는데 작곡을 조두남(趙斗南)이 담당해서 이색적인 작품으로 주목을 끌었다. 조두남은 1940년대 중국 연변지방을 순회하던 태양악극단의 공연작품 「울지 마라 봉선화야」라는 작품도 작곡한 일이 있었다. 이 악극의 주제가를 해방 후 「그리움」이라는 가곡으로 발표(고진숙 작시)했다.
1946년 중앙극장 경영자 김상진이 직영단체로 「희망가극단」을 창단, 악극 「왕자 호동 낙랑공주」를 제작 공연했다. 이 작품의 작곡자 한상기(韓相基, 후일 해병대 군악대장)의 작곡인데 수준높은 음악극으로 기억되고 있다.
창작 오페라의 선구자적 역할을 했던 가극단 라미라의 경영주가 김윤주로 바뀌면서 통속적인 가요극 형태의 무대를 꾸미기는 했지만, 가장 규모 큰 악극단으로서 무대출연 사오십 명이 등장하는 매머드 무대를 지속적으로 기획 공연했던 단체였다. 1946년 정월 수도극장 무대에서 상연했던 악극 「의사 안중근」(박노흥 작*연출, 송희선 음악), 같은 스텝으로 악극 「마의 태자」(3월, 수도극장) 등은 많은 관객을 동원했던 작품이었다. 이 단체의 여주인공으로 신인 백설희(白雪姬)를 출세시켰다. O.K 음악무용연구소 3기생 출신이던 그녀는 본명이 김희숙인데 라미라가 극단에서 악극 「백설공주」를 공연했을 때 백설공주 역할을 맡아 인기가수로 주목을 받기 시작 예명을 백설희로 개명했던 것이다.
당시 유행하던 재즈음악과 한국의 민요를 잘 접목시켜 명연주를 들려주던 K.PK 악단인 김해송(작곡가 겸 단장)이 뮤지컬 플레이 형식에 흡사한 작품 천리춘색(千里春色)이라는 작품을 1947년 2월 국도극장에 올렸다. 1일 4회 공연으로 입장객 6천에서 7천명이라는 최고기록을 세웠다. 김해송은 당시 가요계의 최고 스타격 인물들을 총동원 본격적인 뮤지컬 무대를 꾸몄다. 48년도 작품(천국과 지옥)과 49년도 「카르멘 환상곡」 그리고 오페렛타 형식무대 「로미오와 줄리엣」 등은 가장 세련된 호화무대로 호평을 받았다. 이 작품은 연출가 서항석과 이진순의 도움을 받아 만든 짜임새 있는 뮤지컬 무대였다. 왕년의 인기가수 장세정이 좋은 가창력으로 연기력을 과시했다. 가극 「살로메」의 번안극도 상연했었다.
눈물의 여왕, 전옥이 주관하던 백조가극단은 신파조의 인정비극 「항구의 일야」, 「목포의 눈물」, 「눈 나리는 밤」 등의 작품으로 전국을 순회하면서 관객동원 최고의 기록을 남긴 단체로 모든 흥행단체의 선망의 대상이 되던 단체였다. 이 단체에 필적할만한 현대악극단은 박노홍이 주관했는데 악극 「울지 마라 두 남매」 역시 통속악극으로 손꼽히는 단체였다.
1948년 8월 중앙극장에서 정부수립 경축악극 경연대회가 개최되었다 참가 단체로는 백조, 반도, 새별, 대도회, 태양, 희망 등 6개 악극단이 공연했다. 작품상과 단체상은 김석민 작품, 허남실(許商實, 일명 허석(許碩)) 연출, 김현(金鉉) 음악의 악극 「종(鍾)」, 그리고 이 악극을 공연한 새별악극단이 수상했다. 연기자 황해(黃海)가 이때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악극작가 김석민 역시 가장 젊은 작가로서 계속해서 악극 대본을 집필 악극 전성시대에 가장 많은 작품을 쓴 작가이다.
한국무대예술원
1947년 정월 연극연출가 박춘명(朴春明, 월북)이 악극연출가 김정섭(金正燮, 월북)과 함께 극작가 박노홍을 찾아가 조선가극동맹을 조직하자고 하였다. 박노홍은 거절했다. 얼마 후 가극동맹이 결성되었고 박노홍이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고 통보했다. 박노홍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당시 상황은 좌익적인 공연단체가 활발했던 시절이었다. 1947년 1월 31일 주도경찰총감 장택상이 정치성을 띤 연극공연은 엄중 단속한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또한 6월 4일에는 문련(文聯) 대표가 미군정 러치 장관에게 1만 2천명의 피검 문화인의 석방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제출했다. 1947년 봄 중앙극장에는 악극계의 중진들이 모여 「악극협의회」를 조직했다. 이 협의회의 회장직에는 김상진, 부회장에 극작가 박노흥 그리고 최일(崔一, 백조가극단 운영자)이 선출되었다. 한편 극작가 유치진(柳致鎭), 이해랑(李海浪)이 중심이 되어 「연극협회」를 결성하고 있었다. 이 두 단체는 무대공연에서 좌익과 대항하기 위해 1948년 봄 두 개의 조직 단체를 통합 「한국무대예술원」으로 개편했다. 이때부터 전국의 극장 공연 질서와 민족주의적 우익단체의 성격을 띤 대중예술 단체 구실을 했다.
초대원장에 유치진, 부원장에 극작가 이서구(李瑞求)가 선출되었다. 한 가지 특색은 당시 공연물로 새로운 각광을 받고있던 창극단, 국극단들도 자진해서 무대예술원 산하단체로 가입했다. 한국무대예술원은 명실공히 공연예술의 총본산이 된 셈이었다.
1948년 4월 한국무대예술원의 공식적인 첫 사업으로 5*10 선거에 대비 이방에 최초로 실시되는 국회의원 선거 계몽대를 조직 각 지방으로 선거계몽과 더불어 민주주의 선전홍보 활동을 시작했다.
유치진 작 「콩과 팥」, 오영진 작 「작품여미상」을 가지고 지방 공연도중 좌익계통의 테러가 종종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의 한 몫을 담당한다는 긍지로 많은 연예인들이 참여했었다. 1952년 1*4 후퇴 때는 부산에서, 1953년 10월 환도 이후에는 서울 중앙극장에 본부 사무실을 두고 공연단체들의 전국공연 질서확립과 무대예술 향상을 위해 무대예술원의 조직은 어떤 의미로서는 절대적이었다.
무대예술원상 제도를 실시, 제1회 수상자는 전옥 그리고 연극인 변기종(卞基種)이 수상했다. 무대예술원은 문총(文總)의 기관체의 하나로 그 존재 가치가 뚜렷했었다. 1960년 4*19와 함께 건국이래 10여 년의 역사를 지녔던 한국무대예술원은 해산했다. 당시의 조직체제를 보면 극작연출가협회(회장 박진(朴珍)), 연극연기자협회(회장 이해랑(李海浪)), 악극연기자협회(회장 이종철(李鍾哲)), 기획가협회 (회장 김화랑(金火浪)), 무대음악인협회(회장 황문평(黃文平)), 무대미술협회(회장 김정환(金貞桓)), 무용협회(회장 김민자(金敏子)), 가수협회(회장 백년설(白年雪))였다.
군예대
1948년 3월 5*10 선거 계몽선전대를 결성 전라도 지방을 순회 공연하던 단체가 있었다. 제1부 민족악극 「봄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극작 정화랑, 연출은 박호(朴虎)가 맡았다. 제2부 반공쇼 이북통신 「내가 넘은 38선」을 박호 구성*연출로 무대에 올렸다.
박호는 북간도 용전 출신으로 40년부터 북만주 일대에서 만주출신들만으로 구성되어 있던 태양악극단의 간부 멤버였다 .8*15를 맞고 광복 조국을 찾아 북한 땅을 밟았으나 2년 동안 공산 치하에서 공산당 선전극 이외에는 아무런 예술활동도 할 수 없다는 북의 체제를 체험하고 1947년에 서울 땅을 밟았다. 그가 직접 구성 연출한 반공쇼 「북한통신」이란 그의 체험기이기도 했다.
1948년 10월 여수*순천에서 군부대의 반란사건이 크게 번져 갔다. 이때 국방부 정훈국에서는 선무공작단(宣撫工作團)을 창설하게 되었다. 박호와 동향(同鄕)인 정훈국 보도과장 김종평(金宗平) 중령이 공작단의 단장격으로 민간인 박호를 총감독으로 내세웠다. 공작단의 목적은 반란군 지역에 있는 군부대 위문과 이역 민간인들에게 반공의식을 높여주는 일이었다. 반란군의 세력은 확장일로에 있어 소위 지리산 일대의 공비토벌작전이 장기화되고 있었다. 지리산 전투지구 사령관 정일권 군장 역시 박호의 동향 선배였다. 박호가 인솔한 연예인들의 선무공작대는 지리산 지역에서 공연을 강행하고 있었다. 이때 반란군의 대장이던 김지회(金智會)가 전투 중 사살되었다. 이 사건을 실화로 엮어 최초의 반공악극을 만들었다.
1949년 3월 시공관에서 김종평 중령 감수, 윤부길 극작, 박호 연출로 「지리산의 봄소식」이라는 반공악극을 상연했다. 윤부길과 박옥초의 열연으로 새로운 군사극에 매료되기도 했다. 다시 5월달에는 같은 스텝의 작품 「민족의 꽃」이라는 반공악극이었다. 6월부터 「지리산의 봄소식」, 「민족의 꽃」 두 작품을 가지고 전국의 극장가를 순회 공연했다. 무대를 충실히 꾸미기 위해 악극계의 중진들이 모여들었다. 이때 악단연주 멤버로 길옥윤, 박춘석 등이 참가해 같은 대원으로 활약했다. 연예인들로 주축이 된 선무공작대가 당시의 시기로 보아 성과를 거두자 군민(軍民)간의 유대를 강화하고 군의 사기를 앙양시킨다는 데 착안 「군예대」를 본격적으로 창설했다. 1949년 8월 당시의 육군본부 정훈감실에서 육군 군예대를 창설했다(정훈감 이창정(李昌禎) 대령). 박호는 민간인으로서 운영위원장에 취임했다. 군예대 제1소대 화랑악극소대의 소대장은 정훈장교 1기생인 이용상(李龍相) 소위가 임명됐다(李龍相은 후일 문공부 예술국장이 되었다). 제2소대 양양악극소대 소대장 역시 정훈장교 1기생인 백도흠(白道欽) 소위가 임명되었다. 이들이 창립공연의 막을 올린 것은 1949년 10월 태평로에 있던 옛날 부민관(현 세종문화회관 별관) 무대였다. 공연 레퍼토리로는 제1부 반공악극 「남풍(南風)」(김건(金建) 작*박호(朴虎) 연출), 제2부 버라이어티쇼 「노래하는 육해공군」이라는 호화무대를 꾸몄다. 1950년 6*25가 발발하자 군예대의 멤버들은 화랑반공지하공작대를 조직했다. 조직 장소는 파고다 공원이었다고 한다.
공작대장에 박호, 부대장에 김향(후일 창극단을 경영), 총무에 왕일문(王一文), 정보에 조덕성(趙德成, 후일 영화배우), 연락책임에 허영(許泳)*김백홍(金白弘) 등이었다. 1950년 9월 26일 서울이 수복되기 이틀 전 공작대원 총무 왕일문과 그의 모친 연락대원 김백홍 등 6명이 공산군에게 붙들려 화신백화점 뒷마당에서 총살되고 맡았다.
이 지하공작대의 활동으로 9*28 수복 직후 공산군 점령 90일 동안 그들에게 자진협력(부역자)한 연예인을 색출하는 데 공정을 기할 수 있었다. 동란 중 대구에서 육군 군예대가 재편성되었다. 대장에는 정훈장교 변형두(邊亨斗) 대위, 고문에 연극인 박진 그리고 문예부장에 악극작가 김석민이 작품구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 당시 군예대의 주연 멤버로는 황해, 허장강, 방훈, 최수경 등을 손꼽을 수 있다. 전란 3년 동안 전후방을 있는 위문공연에 젊은 정열을 쏟았다. 군예대 공연에서 「민족악극」, 「반공악극」이라는 공연물이 큰 의미를 갖게 됐다.
1949년 11월 8*15 이후 5대째가 되는 중앙방송국장 HLKA에 노창성(盧昌成)이 취임했다. 1950년 1월 10일 방송국 직속으로 방송문화사(放送文化社)를 설립했다. 사장에는 노창성 국장의 생질이 되는 노병철(盧炳哲)이 취임했다. 이 방송문화사에 연극계 원로인 유치진(柳致眞)을 운영위원장으로 위촉 음악, 방송극, 전속악단, 가수, 연극인들의 방송국 출연 알선과 더불어 대외적으로 활발한 공연사업을 기획하기에 이르렀다.
방송문화사가 50년 4월 종합무대로 군사극 「육탄 10용사」를 명동 시공관 무대에 올렸다. 6*25 동란 이전에 38선에서는 군사적인 충돌이 자주 있었다. 그 중에서 개성의 뒷산(송악산) 전투는 규모가 큰 충돌이었다. 이때 국군에서는 송악산을 탈환하기 위해 적지에 돌진 장열하게 전사한 10명 군인을 추모, 반공의식을 고취시키고자 본격적인 음악극을 구성했던 것이다. 이영순(李永純) 중령의 원작을 극작가이자 소설가이던 김영수(金永壽)가 각색 연출했다. 당시 극단 신협(이해랑, 김동원)을 중심으로 한 연기자와 악극계의 스타 이예성, 황해, 허장강, 이예춘 외 인기가수, 무용단, 성우 그리고 대편성인 경음악단 등이 총동원되었다. 이 매머드 무대는 건국이래 처음 있는 종합무대공연이었다. 박시춘 작곡인 「육탄10용사」를 주제가를 장훈(張勳)이라는 가수가 레코드 취입까지 했다.
1948년 10월 여수*순천 반란사건 이후 지리산 지구의 국민들이 공포와 불안 속에 방황할 때 보병 제5사단은 지리산 전투지구 특별 선무공작대를 조직 연예인들이 선무공작에 성과를 거두었다. 당시 임대순(任大淳) 대령 지휘하에 악극작가 김석민을 중심으로 연예인 30명 대원들이 반공과 계몽귀순공작 그리고 일반인 거주민들의 위안공연의 성과를 인정받게 되었다. 3개월 후 보병 제2사단 주관인 중부전투지구 반도(叛徒) 귀순촉진회 소속 연예인 공작대로써 안동을 중심으로 태백산 지구에 약 3개월 동안 순회 공연하면서 정훈공작 활동에 역점을 두었다.
9*28 수복과 함께 국군이 북진할 때 크게는 사단본부에서 작게는 연대본부에까지 정훈공작대를 편성 수많은 연예인들이 종군하게 되었다. 국방부 정훈국 선전과 직속으로 문예중대를 편성 제1소대는 연극인 중심(이해랑, 이진순)으로 극단 신협 멤버들이었다. 그리고 제2소대는 가협(歌協)이라는 명칭으로 악극계의 중진이 중심 창작 진영에 박시춘, 극작 유호*김영수*김화랑*이보라 그리고 연기진으로 장동휘*신카나리아*송민도*금사향 등 김호길이 주관하는 경음악단 등 제일선과 후방에서 종군했다.
북진하는 국군과 더불어 평양에 입성한 연예인들이 있는가하면 8사단에 종군했던 연예인들은 11월 중공군의 남침으로 포위되어 전사 또는 행방불명된 연예인들도 있다. 이 중에서 가요 작곡가 서영은(徐水恩)과 연기자 김문자(金文子, 희극배우 김희갑(金喜甲)의 부인)는 양덕 맹산에서 적의 진중을 돌파 민간인 부부로 가장 남하하면서 중공군을 10여 차례 조우 구사일생으로 서울에 도착한 것이 50년 말이었다. 동란 3년 동안 수많은 연예인들은 군번 없는 용사로서 전후방을 통해 연예활동으로 나라에 봉사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중음악(경음악)
1946년 가을 명동에 있는 시공관 무대는 안드레가 지휘하는 탱고 오케스트라가 감미로운 라틴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객석에서는 열광적인 박수로 이 연주회의 열기를 더해 갔다. 생각보다 다양한 레퍼토리로 오래간만에 고급스런 경음악 연주를 감상할 수 있는 뜻깊은 기회였다. 커튼콜로는 한국의 전통악기 가야금 연주에다 스트링 오케스트라의 무드 있는 반주로 오래간만에 차원 높은 한양합주(韓洋合奏)로 대중음악의 신기원을 기록한 명연주회였다.
일제가 소위 태평양전쟁에 돌입하면서 적성(敵性)음악이라고 낙인, 서양음악 금지령을 내렸다. 다행히 독일과 이태리와는 파쇼 동맹국이라서 이 두 나라의 음악은 허용했다.
순수음악(클래식) 계통은 별 지장이 없었으나 영*미국의 경음악(노래포함)의 일체 연주는 감상할 수 없이 우리의 귀를 막았었다. 다행하게도 라틴계통의 음악도 제한을 받지 않았다. 탱고음악 계통은 대개 라틴 계통의 명곡이 많이 유행되었고 컨티넨탈 탱고 역시 독일과 이태리 계통으로 명곡이 많이 있었다. 당시 자연스럽게 이런 계통의 유행음악 즉 대중음악으로 만족했었고 외국음악(대중음악계통)하면 탱고음악으로 패턴을 이룬 음악들은 감상과 연주곡으로 대중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해방직후 모든 외래문화를 자유스럽게 향유할 수 있었다. 일찍 일본에서 음악공부를 하고 돌아온 마산출신 이 앙드레는 사재(私財) 2천만 원을 투자 20여명으로 구성된 탱고 오케스트라를 조직했다.
대중음악의 질을 높이기 위해 연주회를 가짐으로써 이 땅에 본격적인 대중음악의 새로운 장을 열기 위해 정열을 쏟았다.
이 탱고 오케스트라의 중요 멤버를 살펴보면 바이올린의 일인자라고 할 수 있는 백해제(白海帝), 그의 동생 백고산(白高山)은 북한에 있었다. 그리고 임유직(任裕稷), 첼로에 전봉초(全鳳楚), 아코디언에 황병열(黃炳烈, 그는 클래식적인 주법으로 전 일본 콩쿠르에 입상한 경력 소유자), 그리고 김호길(金虎吉) ,피아노에 한상기(韓相基, 작곡가) 등 외 해방 당시 A급 연주자들을 총망라한 셈이었다.
이 앙드레는 계속해서 다음 공연(연주회) 레퍼토리를 준비하는데 재투자, 연주회를 계속했으나 관객동원이 예상과는 달리 저조, 선전비에도 신경을 써 비용이 과중, 입장객의 수입만 가지고는 단체유지가 힘들어 의욕을 상실하고 말았다.
해방직후 대중문화적 측면에서 볼 때 하나의 이변은 이 땅에 처음 등장한 댄스홀의 출현이라 하겠다. 도시문화라고 할까 서울에는 크고 작은 규모에 댄스홀이 우후죽순격으로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런 현상은 부산*대구 등지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서울에서 가장 규모가 큰 댄스홀은 현재 미도파백화점 5층(당시 죠오지야 이름의 백화점)과 신세계백화점(당시 미스코시 백화점) 5층에 있는 전속경음악단으로 본격적인 재즈밴드(20인조의 스윙 밴드)와 현악기 중심인 탱고밴드를 두고 두 악단이 교대로 연주했다. 소위 사교춤보다도 일류악단의 연주를 듣기 위해 가는 손님도 있었다.
이렇게 큰 댄스홀에서는 명 연주자들을 스카웃 하기 위해 전속금을 많이 주고 초빙경쟁을 벌이기도 했다. 중국대륙이나 만주 등지에서 댄스홀 뮤직 플레이어로 활약하던 연주가들이 많이 귀국했다.
그 중에서 임정박(林正博 심포니 지휘자 임원식(林元植)의 형)과 그 악단의 연주는 이색적이었다.
해외에서 돌아온 이정백(李淨白)과 탱고밴드 그리고 동경음대 출신 피아니스트 노병열과 탱고밴드는 한때 장안의 화젯거리기도 했다. 국내에 있던 연주자들은 대개 악극단, 가극단에 속해 있던 경음악 연주자들이었는데 이중에서 새로운 연주장, 즉 주한미군부대 캠프촌을 전문으로 순회하는 경음악단이 많이 생겨 연주자들의 부족현상까지 나타나기도 했다. 미군부대전용악단에서 활약하던 연주가들은 북경에서 귀국한 노명석(盧明奭, 아코디언 주자, 후일 동아방송 전속악단장), 치과전문학교 출신 김영순(金英淳, 트럼펫), 바이올린 연주자 김인욱(金仁郁) 그리고 만주에서 귀국한 송민영(宋旻榮) 등을 손꼽을 수 있다. 주한 미군부대 내에 산재해 있는 각종 클럽은 여러 층으로 구분되어 있어 그들 기호에 따라 경음악단을 선호하는 경향이 선명했다. 미군의 사병(士兵) 클럽전용 연주자들은 일정한 보수를 받는 것이 아니고 하루저녁 연주하는 데 미군 맥주 몇 박스 또는 위스키 몇 병이었다. 악단을 중개하는 소위 매니저(한국인)가 없어 물건으로 받은 보수 사제물건을 남대문시장(암시장)에 내다 팔아서 악단원들에게 현찰로 분배해 주는 진풍경이 상식화되었던 시절이기도 했다. 조금은 고급스러운 장교 구락부 같은 곳은 한국인 연주자들에 대한 보수나 예우가 좋은 데도 있었다. 독일 유학에서 스위스학회 박사학위를 획득했던 음악가 주정식(柱貞植, 바이올리니스트) 박사도 실내악단 형식에 작은 멤버로 활약했으며 성악가 김천애(金天愛) 여사의 노래를 곁들이는 연주를 했다. 이것은 장교 구락부에 정기출연으로 생계를 유지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던 당시의 음악가들의 생활 단면을 드러내 주는 것이었다. 주한미군 부대만 순회하는 경음악 연주자들은 당시 유행하던 미국의 경음악(주로 재즈음악) 계통의 악보를 손쉽게 구할 수 있었고 매달 신보로 출간되는 팝송 악보 힛킷 Hit Kit을 수시로 제공받아 해방 후 미국의 신흥음악을 익히는데 지름길이 되기도 했다. 대중음악 계통에서 정통파에 속하는 재즈음악의 수련 또는 재즈음악의 특수성을 체득, 많은 연주자가 확산되고 있는 맥락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해방 후 미군부대를 통해 새로운 미국의 유행음악을 개척했던 선구자들이 탄생되었던 시기이기도 했다. 팝송 가사의 깊은 뜻도 모르면서 영어가사 발음을 한글로 적어 앵무새처럼 팝송을 부르며 미군부대를 드나드는 신흥 팝송가수도 생겨났다. 그러나 가창력과 영어 실력을 길러 팝송을 제대로 소화해서 미군들에게 인기가수로 지목 받던 가수도 많이 있었다. 일본중앙음악학교 출신 팝 싱어 박혜옥(朴惠玉) 그리고 백일희(白一姬), 가요가수이던 박단마(朴丹馬), 이해연(李海燕) 등은 당시 당당한 팝송가수로서 전국가요계에서도 주목받던 팝송의 선구자들이다. 이들은 현재 모두 미국에 살고 있다.
1945년 9월 일찍 조선음악동맹 결성 때 중요멤버로 활약했던 박영근(朴榮根)이 1945년 6월 종로 YMCA 강당에서 주로 대중음악분야의 연주가들을 모아놓고 음악동맹의 필요성을 역설 경음악가들도 음악동맹에 가입할 것을 역설했다. 경음계에서 지식인(이론가) 취급을 받던 한의송(韓義松, 베이스악기 연주자)이 주동이 되어 경음악 계통의 인사들을 많이 가입시켰다. 음악동맹에서 행사가 있을 때마다 경음악 연주자들은 취주악분과회원이라는 신분으로 가두행진, 또는 아지프로에 자주 동원되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음악동맹 측 일부(순수음악파)에서는 대중음악은 유흥업소, 즉 소비문화에 속하는 것이고 자본주의 사회에 필요악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매도하기 시작했다. 같은 동맹원인데도 차별을 하는 느낌이었고, 동맹에 가입했다 해서 당장 생활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었다.
1946년이 저물 무렵 예술가들도 인정하지 않는 음악동맹에 미련을 두지 말고 떳떳하게 대중음악협회를 따로 만들자는 여론이 성숙되어 갔다. 1947년 4월 홍순일(洪淳一, 피아노 연주, 가요 작곡)이 중심이 되어 대중음악협회가 결성을 보게 되었다. 1백 명에 가까운 경음악인들이 모여 투표로 선출한 초대회장직에 가요작곡가 김해송(金海松)이 취임했다. 홍보선전부장 홍순일, 창작(작곡*편곡)부장에 김형래(金炯來), 사업부장에 이준영(李俊泳), 평론부장에 황문평(黃文平) 등이었다. 전관을 정리하고 우선 회비로 협회를 운영키로 했으나 협회 사무실 유지에도 급급했다. 무보수로 연주회(쇼 형식)를 개최 소위흥행을 해서 기금을 만들기로 간부회에서 결정했다. 일부비 가입회원들 중에서 김해송 정도가 회장인 협회에 가담 할 수 없다는 불평에 밀려 대중음악협회는 유명 무실한 단체가 되고 말았다. 협회를 끝까지 소생시켜 보려는 홍순일의 동분서주하던 모습이 애처롭기조차 했다. 1948년 8월 대한민국이 수립되면서 모든 좌익단체는 불법단체로 규정 음악동맹도 지하로 잠적했다.
과거 좌익단체에 가담했던 예술인들은 「보도연맹」에 가입 대한민국에서 전향자로 인정해 주었다. 음악동맹원을 고집하던 김인욱(金仁郁)은 자진 월북했다. 6*25 당시 부산에서 일하던(댄스홀 미군장교구락부) 한의송과 서오준(徐伍後)은 보도연맹원이었다는 것 때문에 수사기관에 체포 처형되었다.
6*25 때 정부가 남하하면서 과거 보도연맹원이었던 인물은 대개 수사기관에서 재심, 처형된 사람이 많았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방송과 대중음악
1947년 6월 서울중앙방송국 HLKA에서 방송 전속 경음악단을 발족시켰다.
악단편성은 18인조로 관악기 위주에 약간의 현악기를 가미한 악단 편성이었다. 악단장은 테너 색소폰 주자 서영덕(徐永德)이 리드했다. 악단 지휘는 가요작곡가 박시춘과 손목인(孫牧人)이었고 편곡담당은 이봉룡(李鳳龍)과 황문평(黃文平)이었다. 경음악단 편성과 동시에 방송국 전속 가수제도를 실시했다. 일차로 남자가수 이예성(李藝星), 원방현(元芳鉉), 여가수로는 김백희(金白姬), 송민도(宋旻道), 옥두옥(玉斗玉), 이계운(李桂雲)이었다. 2차로 전속가수팀에 참가한 사람은 고대원(高大原), 여가수 금사향(琴擡響)이다.
전속가수와 경음악단의 연주는 매주 토요일 또는 일요일에 특집 프로형식으로 생방송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당시 경음악단원의 전속료(월급 형식)가 8천 원이었다. 매주 일 회 방송이라 1개월 4회 정도 출연이고 보니 1회 출연료 2천 원 꼴이였다. 가끔 특집프로에도 경음악단은 출연, 연주 활동을 했다.
해가 바뀌어 1948년 1월 왜색 가요를 일소하고 우리 가곡과 가요(창작 가요)를 방송하기 위해 새로 가수 모집을 실시했다. 그리고 건전가요 또는 국민가요 등 라디오 방송을 효과적으로 방송하기 위해 방송합창단도 만들어졌다. 전속제도는 아니었지만 합창단의 정기출연도 실시했다. 합창지휘는 최희남(崔熙南)이었다. 최희남은 6*25 때 납북되었다.
방송가요 「자유의 종」은 합창곡으로 널리 애창되던 노래였다.
명동 시공관에서 오후 5시 반 어린이 시간부터 뉴스 그리고 라디오 드라마, 가요와 민요, 경음악단 연주 등 다양한 프로가 진행되는 시간 다시 말해서 방송국이 하루 프로를 시공관 무대로 옮겨놓은 것이다. 이 공개방송 프로를 보기 위해 청취자들에게 무료로 배부한 입장권이 암표로 팔리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때부터 시민들의 관심에 방송국 프로가 절대적인 위치로 상승하기 시작했다.
시중의 인기 있는 악극, 가극단의 중앙공연 무대를 직접 중계하는 프로도 청취자들의 귀를 즐겁게 해 주었다.
레코드산업과 인기가수들
해방직후 한국의 레코드 생산은 그야말로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고 하겠다. 그 원인을 살펴보고 일제의 레코드 산업(기업 )이 이 땅에 어떻게 진출했었나를 살펴본다. 1930년대를 전후해서 영미에서 레코드 제작판권을 얻어낸 일본의 기업들은 서울에 지사를 두고 본격적인 레코드 제작과 판로를 개척했다.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콜롬비아, 빅타, 포리돔, 일본 제축(帝蓄) O.K, 태평(太平) 기타 군소업소들이 서울에 한국 지사를 설치, 본격적인 기업으로 성장해 나갔다.
기록에 의하면 1935년경 한국의 축음기 보급은 35만대를 넘어섰고 한국에서 판매된 레코드(S.P 레코드) 매수는 백만 장 정도였다 한다. 그 중에 한국인을 상대로 한 한국말 레코드는 한달 평균 30만장을 넘어 섰다고 한다.
이렇게 레코드 산업이 호황을 누렸지만 서울에 녹음실을 설치한 것은 1937년 O.K 레코드사 뿐이었고 1940년대에 포리돔, 콜롬비아 등이 간이 녹음실을 설치했었으나 이 때는 태평양전쟁에 휘말려 모든 물자 부족현상으로 인해 유명 무실한 녹음실이 되고 말았다. 아주 오랜 기록을 살펴보면 1907년경부터 한국의 명창들이 일본에 건너가서 레코딩을 하기 시작, 1940년대 초기까지 레코드 제작을 위한 취입은 대개 일본에 건너가서 녹음했던 것이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한국 내에서는 레코드 프레스 공장이 단 한 군데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1944년경 일본에 한 레코드 메이커가 레코드 프레스 공장시설을 한국으로 옮겨다 놓고 공장을 차릴 계획을 세우던 중 2차대전이 끝났다.
O.K 레코드 사장 이철(李哲)의 매부뻘 되는 김성흠이 일제말기 일본(大阪(대판))에 건너가서 레코드 원판(모반(母盤)) 제조기술 그리고 프레스 공법을 습득하고 돌아왔었다.
레코드의 원판 제작은 동판에다 케미(화학작용) 작법을 통해 니켈판(자반(子盤))을 만드는 것인데 김성원은 신문로에 멕키 공장을 소규모로 꾸몄지만 개점 휴업상태였다. 레코드 원판(마이크를 통해 직접 파장을 기록하는 것)인 아세테이트 판을 구하기란 기적에 가까운 상태였다. 아세테이트는 오늘날처럼 자기녹음(녹음 TAPE) 발명되기 이전에 동시녹음에 사용되는 원판을 말하는 것인데 당시 미군 계통이나 일본에서 구입해야 했다.
1946년 가을 부산에서 코로나 레코드라는 라벨에는 김호길 작곡, 부산 블루스라는 노래가 있었다. 어떤 경로로 레코드가 만들어졌는지 자세한 기록은 없다. 거의 같은 때 서울에서도 레코드가 만들어졌다.
이인표(李仁杓)가 투자해서 만든 레코드사 명이 서울 레코드였다. 레코드 취입가수를 모집한다는 가요콩쿠르에서 입상한 신인가수 박재홍(朴載弘)이 노래한 자명고 사랑이란 노래였다. 해방 후 처음 만들어진 레코드가 김인숙 「부산블루스」, 박재홍 「자명고 사랑」이었다는 데 기록적인 의미가 크다. 1947년 충무로 입구에 있던 「일본악기점」(산엽(山葉)악기점)을 접수 경영하던 피아니스트 최성두(崔聖斗)가 「고려 레코드사」라는 이름으로 인기가수 남인수가 취입한 「가거라 38선」(이부풍(李扶風) 시(詩), 박시춘(朴是春) 곡)은 장안의 화제를 모았다. 국산 레코드가 만들어진다는 소문에 미리 돈을 맡겨 놓고 기다렸다는 일화를 남겼다. 기름 짜는 압축기를 개조 레코드 프레스의 원초적인 방법으로 하루에 20매 정도 생산이 가능했다고 한다. 남인수의 신곡 「달도 하나 해도 하나」(이풍용(李風龍) 곡)라는 노래가 아세아 레코드라는 라벨로 시판되었다. 광복과 더불어 조국이 분단된 민족의 비극적 어두움을 애상적으로 노래한 유행가의 속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을 표현한 노래가 대중들에게 공감을 주었던 노래들이었다. 가요작가 김해송(金海松)이 O.K 레코드라는 라벨로 「울어라 은방울」(조명암 작사, 장세정 노래)이라는 노래를 발표했다. 당시 서울인구 45만에서 급증했으나 대중교통수단으로 서울내에서 전차밖에 없었다. 여기 새로 등장한 것이 역마차라는 것이었다. 광복 당시의 서울 풍물시 같은 노래로서 왕년의 인기 여가수 장세정의 주가를 높여준 노래였다. 1948년 명동 한복판에 본격적인 녹음실을 완비한 럭키 레코드사에서는 일전에 중국에서 귀국한 남성가수 현인(玄人)이 무대에서 인기곡목으로 불렀던 「신라의 달밤」(유호 작사, 박시춘 곡)을 레코드로 출반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다.
무대에서 그리고 레코드로 신곡이 계속 발표되었다. 처음으로 밝고 명랑한 노래 「럭키서울」 그리고 멀리 남방에서 고국을 그리는 노래 「고향만리」 등이 연속 히트, 레코드 문화의 새로운 장이 열렸다. 도회지적 멜랑꼬리한 노래 「서울야곡」은 당시 유행하던 탱고리듬을 타고 크게 유행했었는데 현인 자신이 작곡한 노래로서 그는 처음으로 싱어송 라이터가 된 셈이다. 방송가요로 등장했던 노래 「아내의 노래」(손목인 작곡)를 방송 전속 가수 김백희가 레코딩했고 「고향초」를 송민도가 불렀다. 1*4 후퇴, 부산에서 처음 마그네틱테이프 (TAPE)를 시중에서 구입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고 소위 녹음기를 손쉽게 구입할 수 있었다. 임시로 적당한 장소에다 방음 장치를 설치하고 포터블 녹음기를 이용, 가요곡 녹음을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대구에서 가요작가 이병주(李炳主)가 오리엔트 레코드사를 창설 본격적인 레코드 취입시대를 맞이했다. 부산에서도 가수 한복남(韓福男)이 도미도 레코드사라고 이름하여 대중가요를 위한 레코드 제작에 착수했다. 부산에서 제물포 악기점을 경영하던 김흥산(金興山)이 출자하고 손영준(孫泳俊)이 기획 제작한 레코드사가 바로 스타 레코드사였다.
부산 HLKB(부산방송국) 녹음실을 이용 야간작업(악단반주와 가수가 동시녹음)을 해서 황금심(黃琴心), 박단마(朴丹馬) 등이 취입한 녹음테이프를 가지고 일본에 건너가서 S.P 레코드를 제작해서 수입형식으로 반입 시중에 판매한 레코드 중에 히트한 노래가 「삼다도 소식」과 「슈산보이」 정도였다.
악보출판
해방 후 악보출판물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희귀한 것이었다. 각 학교의 음악교재용으로 등사판을 이용한 복제출판물이 더러 있었으나 시중에 판매를 목적으로 하는 악보출판물은 없었다. 1946년 5월 뮤지컬 작가 김형래가 그의 뮤지컬 가면무도회의 주제곡 「그리운 장미화」를 활판인쇄로 출판했다. 김형래는 오선사(悟線社)라는 악보출판사를 개인적으로 운영, 외국 민요나 국내 가곡 등을 출판했었으나 사업부진으로 악보출판의 의욕을 잃었다. 1948년 최초의 음악영화 「푸른 언덕」의 주제곡과 삽입곡을 출판(황문평(黃文平)) 영화개봉 때(1948. 5) 입장객을 상대로 정가에 판매했다.
1948년 럭키 레코드사에서 현인의 노래 「서울야곡」을 출판했다. 그후 시중에 유행하는 가요곡들이 가끔 출판되었으나 부진한 상태였다. 이화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임동혁(任東赫)이 「여성창가집」을 편저, 고려문화사 발행으로 시판한 것이 1946년 5월이었다. 본격적인 악보 출판은 1951년 3월 이강렴(李康濂)이 국민음악연구회라는 출판사를 창설 「국민 애창곡집」을 출판한 이래 음악교재용 전문 출판사로 확장해 나아갔다. 1951년 부산에서 당시 미국 팝송 가수 페티 페이지의 히트송을 악보로 출판한 것이 상업적으로 성공하자 국내가요를 피스물로 출판했었지만 역시 실패하고 말았다. 대중가요 악보출판은 1954년 환도 이후 전문출판사가 창설되기 시작했다.
영화음악
해방 이후 최인규 감독 제작인 극영화 「자유만세」를 필두로 극영화, 문화영화 등을 합쳐서 1950년까지 총 59편이 제작 상영되었다. 59편을 연도별로 구분해 보면 1946년 8편, 47년 12편, 48년 25편, 49년 19편, 50년 5편이다. 영화 전편에 걸친 배경음악은 대개 기존 레코드음악을 선곡해서 영화음악구실을 했었다. 영화를 위해 레코드 선곡을 담당했던 음악가들을 소개하면 임원식(林元植), 박용구(朴容九), 박태현(朴泰鉉)이 각기 한 편씩 담당했었고 그 나머지는 조백봉(趙白峰, 후일 동아방송 부국장 역임)의 독무대이었다. 총편수 59편 중에서 악단을 동원 전편에 걸친 배경음악을 작*편곡해서 녹음한 음악가로는 김성태(金聖泰), 박시춘(朴是春), 황문평(黃文平) 등 세 사람뿐이었다. 박시춘은 47년도에 「새로운 맹서」(신경균 감독), 49년도 「대지의 아들」(신경균 감독), 50년도 「여인애가(女人哀歌)」(신경균 감독), 김성태 담당영화 49년도 「여성일기」(홍성기 감독), 50년도 「흥부와 놀부」(이선경 감독) 등이었다. 황문평 담당 작품으로는 47년도 「조국의 어머니」, 48년도 「푸른 언덕」(유동일 감독), 49년도 「청춘항로(靑春航路)」(장광연 감독) 3편이었다.
해방 후 최초의 음악영화라는 명제로 제작되어 48년에 개봉한 「푸른 언덕」은 당시 김생려(金生麗)가 조직한 「서울관현악단」(50명 편성)을 동원 녹음했었다. 당시 인기가수 현인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한 음악도의 출세담과 러브스토리를 엮은 멜로드라마였다.
최초로 동시 녹음을 시도한 녹음기사 조종국(趙鍾國)의 기술개발로 관현악단의 출연장면에서 싱크로나이즈에 성공(케미컬사운드로 생필름에 광감처리 )한 작품이었다. 1948년 5월 음악영화 푸른 언덕이 수도극장(현 스카라극장)에서 개봉되었다. 이때 영화에 주연한 가수 현인이 무대에 등장 인사말과 주제가를 열창해서 그의 인기를 상승시키기도 했었다.
북으로 간 연예인, 남으로 온 연예인
해방 이후 6*25 이전에 자진해서 북으로 간 연예인들 중에 연극을 전문으로 하는 극작가, 연출가 그리고 배우(남녀)는 많았으나 악극이나 가요인들은 극히 적었다. 직업가수로는 현정남(玄正男), 채규엽(蔡奎燁) 단 두 사람뿐이다. 채규엽은 한국 최초의 직업가수(1930)로 오랫동안 인기가수 대열에서 선망의 대상이었다. 해방 후 연예사업(흥행가)가로 변신, 사업에 실패하자 북에 있는 이면상(李冕相)을 믿고 북으로 갔다. 그의 고향은 원남 원산이었다.
6*25 동란 직후 정확하게 말해서 6월 30일 당시 국립극장이던 곳(현재 세종문화회관 별관)에는 많은 예술인들이 모여들었다.
이때 붉은 완장을 끼고 설쳐대는 젊은이들이 있었다. 이름하여 연극동맹 서울지부 가극반에 소속되어 있다는 사람들이었다. 평소 연예계에서 낯익은 얼굴들은 아니었다. 분명, 6*25 이전에는 가극동맹이란 말뿐이었지 존재하지는 않았다. 7월달에 접어들면서 을지로 입구에 있는 한 건물(현재 프레지던트호텔 자리) 이층에 가극동맹이라는 간판이 걸려 있었다. 가극동맹위원장은 연극계 인물로 연출을 하던 박상진(朴尙進)이라는 사람이었고 서기장직은 가수 계수남(桂壽男)이었다. 북한에는 가극동맹이라는 조직체는 없었다.
6*25 당시 남한(서울)에서 갑작스럽게 생겨난 조직체였다. 가수들 그리고 악극계 연기자들이 모여 북한에서 부르는 노래를 배우는 것이 일과였다. 9*28 수복직전 박상진은 북으로 갔고 계수남은 합동수사본부에 자수했다. 계수남은 비상조치법(단심제)으로 재판을 받고 무기수로 복역하다가 1958년 재심청구로 다시 재판을 받아 8년간 옥중생활을 끝으로 자유의 몸이 되었다.
공산군에게 학살된 연예인으로는 군예대원이었던 왕일문, 김백홍 그리고 코미디언 이복본(李福本)과 뮤지컬 작가 김형래(金炯來)가 있다. 납치인사로는 가요작곡가 김해송(金海松), 그의 처 이몽녀(李夢女) 그리고 라미라 가극단 소속이던 테너가수 김홍열(金弘烈)이 있다. 악극 「아리랑」에서 주인공이던 강남춘(江南春)도 납북되었다. 원로가수 신카나리아 역시 체포 구금되어서 북으로 끌려가다가 구사일생으로 서울에 돌아왔다. 북진하던 8사단 정훈공작대원이던 가수 주경선(朱敬仙), 이월희(李月姬, 가요작가 이인권(李寅權)의 처), 악단원 금동철(琴東哲, 바이올리니스트) 등이 중공군에게 학살당했다. 북으로 끌려가다가 북진하는 국군에게 구출된 악단원들도 10명 정도 된다. 원로가수 고복수도 의용군으로 징발되어 북으로 끌려가다 국군에게 구출되었다. 공산군이 서울을 점령하면서 「인민군협주단」이라는 공연단체가 조선일보 건물과 부민관을 장악하고 있었다. 인민군협주단에 속해 있는 교향악조의 멤버로 강제 징발되어 그들이 북으로 후퇴할 때 같이 따라가야 했던 연주가들이 있다. 트럼펫 주자 현경섭(玄慶燮), 지정호(池貞浩), 혼 주자 현수광(玄秀光), 플롯 주자 이기윤(李基潤) 그리고 바이올리니스트 이계성(李桂成)과 트롬본 연주자 김재성(金在成)이 있다.
남한출신만으로 서울에서 조직 편성되었던 경비대협주단(극단 고협단장이던 연극배우 심영이 육군 중좌가 되어 협주단 단장이 됨)에 소속되어 있던 연극조의 단원 몇 사람도 북으로 동행했다. 이 협주단 합창조에 소속되어 있던 성악가 바리톤 고종익(高宗益)과 가수 이규남(李奎南)이 있다. 이들도 북으로 갔다. 이규남은 동경제국음악학교 출신으로 최초의 유행가 가수가 된 사람이다. 일제 때 현재 북에 있는 이면상 작곡 「진주라 천리 길」을 불러 히트송이 되기도 했다. 이규남은 북에서 가곡 작곡으로 활약하고 있다는 최근의 소식이다.
반도가극단에서 주역으로 활약했던 김옥춘(金玉春)이 1*4 후퇴 때 서울에 남아 있다가 행방불명이 되었다.
1950년 말 중공군의 남침으로 수많은 피난민이 남하했을 때 이북에 살던 예술가 중에 우선 작곡가 김동진(金東振)과 김대현(金大賢)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서울에서 음대교수로 봉직하며 영화음악에 깊이 관여, 많은 작품을 남겼다. 대학교수로서 대중예술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해야 한다. 평양음악학교 출신 장일남(張一男) 역시 월남 초창기에는 대중음악에도 많은 기여를 했다. 황해도 신천(信川) 출신인 전정근(田正根)은 6*25 때 구월산부대(의용군)에 가담했다가 남하, 공군음악대를 거쳐 현재 영화음악전문가로 활약하고 있다.
일찍이 빅타 레코드 전속이었던 가수 한정무(韓正茂)와 문일화(文一華) 역시 1*4 후퇴 때 대동강을 건너 남하했다. 부산 피난 그리고 수복 후 서울에서 가수로 활약하던 한정무는 1960년 초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문일화 역시 야간업소 무대에 출연중 졸도 타계했다. 성보가극단원으로 있다가 고향인 함남에서 8*15를 맞은 가수 현해남(玄海男)은 북에서 김홍열(金弘烈)과 함께 우익 빨치산으로 활약하다가 흥남 철수 때 남하해서 부산에서 다시 현역 가수로 무대에 섰었다. 그도 타계했다. 한국의 유일한 클래식기타 연주자로 활약하고 있는 배용식(裵勇植) 역시 흥남부두에서 LST(미군수송선)를 타고 부산에 왔다. 50년대 중반 가수로, 영화배우로 활약했던 가수 나애심(羅愛心) 역시 꽃다운 처녀 18세 때 대동강 다리를 건넜다. 북에 명배우였던 아버지 강홍식(姜弘植) 버리고 남한에 살고 있는 어머니 김옥(全玉) 여사를 찾아 남하한 강효실(姜孝實) 역시 이제는 원로 연기자가 되어 있다. 북에서 오페라 각본을 집필했었다는 김문응(金文應)은 이남에 와서 대중가요 작사가로 변신 많은 가요작품을 썼다. 그의 작품 중 명국환(明國煥)이 불러 크게 유행시킨 「방랑시인 김삿갓」(전오승 작곡)이 있다. 60년대 최고 히트곡이었는데 일본곡(길전정(吉全正) 작곡) 표절이라는 낙인이 찍혀 현재는 대중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가고 있다. 70 고개를 넘어 80을 바라보는 김문응은 외로운 시인으로 여생을 보내고 있다. 조국분단의 슬픔을 홀로 달래면서 김문응은 그야말로 외로운 방랑시인 신세가 된 것이다.
1951년 정월 5사단에 속해 있던 종군 연예인단의 색소폰 연주자로 종군했던 김준영(金俊榮)이 있다. 그는 중공군의 포로가 되어 북으로 끌려가 압록강 상류 벽동에 있는 포로수용소에서 고생 끝에 1953년 7월 말 정년을 맞이했다. 남북 포로 교환 때 기적적으로 살아 남아 판문점을 통해 자유의 다리를 건널 수 있었다. 그 후 김준영은 지방순회공연단(곡예단) 천막 속에서 색소폰을 불고 있었다. 인생유전 ! 해방과 더불어 38선이 이제 휴전선으로 바뀐지 30여년이라는 연륜의 앙금만이 남았다. 남과 북, 이산가족이 자유롭게 오고갈 수 있는 평화와 통일이 하루 속히 이루어지기를 기원하면서 내일을 지향하는 대중예술의 새로운 가치관을 정립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