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해방공간(1945∼50)의 우리 문화예술*연극
해방의 환희와 이데올로기 연극
유민영 /단국대*연극평론가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함께 급작히 이루어진 민족해방은 정부수립까지 상당기간 동안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 분야에서 적지 않은 혼란을 야기 시켰다. 그런데 해방 직후의 혼란은 주로 좌*우익 이데올로기에 기인한 것이었고 그것은 문화예술계에서도 똑같이 첨예하게 드러났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첫째 아무래도 문화는 정치에 의해서 절대적으로 좌우되기 때문이고 둘째 식민지 시대부터 노선을 달리하는 두 연극세력, 즉 프롤레타리아 연극과 순수 정통예술의 줄기가 이어왔기 때문이라 하겠다. 이들은 각각 정치권의 영향을 받으면서 때로는 본의 아니게 정당의 이데올로기 선전의 도구가 되기도 했고, 때로는 노선정립을 위한 고뇌도 겪어야 했다. 그런 동안 연극계에서 예술은 정체되고 이념만 무성한 사상갈등이 횡행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연극계가 혼란스럽게 되자 저급한 대중연극이라 할 신파극과 악극이 번성하는 기현상을 자아내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 연극의 번성은 연극사상 최초의 일로서 연극인들을 당황하게 했고 동시에 대립과 분열을 초래하기도 했다. 가령, 상당수의 프롤레타리아 연극인들이 월북해서 북한연극을 성립시킨 것도, 그러한 시대적 배경에 따른 것이며 국토분단과 함께 연극도 양분된 꼴이 되었다. 그것은 대체로 1945년 8월부터 1948년 사이의 일이며 민족적 노선이 자리를 잡는 1950년 6월까지의 과정이기도 하다. 어떻게 보면1945년 8월부터 6*25 전쟁이 발발하기까지 5년여 동안은 식민지 시대에 잠복해 있었던 연극인들의 욕구가 한꺼번에 분출하여 제어력을 잃고 부유한 시기였으며 한동안 식민지 연극방식이 반복된 시기기도 하다. 따라서 해방 직후의 연극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대립 갈등하고 분열했는가를 검토해 보는 것은 뜻 있는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왜냐하면 현대연극사 정리에 있어서 해방 직후의 연극 변동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정부가 월북 문예인들을 대폭 해금함으로써 월북 연극인들의 해방 직후 활동을 일단 명징하게 검토해야 할 시기에 와 있는 것이다. 본고는 바로 거기에 초점을 맞춰서 해방공간의 연극계 움직임을 살펴보기로 한다.
해방의 환희와 혼돈
해방을 맞은 환희와 혼돈의 와중에서 정치, 사회단체 못지 않게 재빨리 간판을 내걸고 활동을 개시한 것이 문화예술단체였다. 임화(林和)가 주동이 되었던 조선문학건설본부가 1945년 8월 16일 서울 한청 빌딩에서 결성되었고, 뒤이어 연극건설본부, 음악건설본부, 미술건설본부, 영화건설본부 등이 속속 출현했다. 이들 각 단체는 곧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약칭 문건(文建))라는 연합체를 만들었고 임화를 서기장으로 하여 조직체계를 세워나갔다. 일제시대에 활동했던 모든 연극단체들이 와해된 뒤, 처음으로 조직된 연극건설본부는 송영(宋影), 김태진(金兌鎭), 이서향(李曙鄕), 함세덕(咸世德), 박영호(朴英鎬), 김승구(金承久), 나웅(羅雄), 안영일(安英一) 등이 핵심 멤버였는데 외형상의 구성원은 중앙위원장에 송영(宋影), 서기장에 안영일(安英一), 극작부에 서항석(徐恒錫), 조명암(趙嗚岩), 연출부에 이서향(李曙鄕), 나웅(羅雄), 연기부에 배용(裵勇), 서일성(徐一星), 윤부길(尹富吉), 무대예술부에 김일영(金一影), 무대음악무용부에 김해송(金海松), 송희선(宋熙善), 극단경영부에 박구(朴九), 박민대(朴民大), 심의실에 김승구, 박영호, 유치진(柳致眞), 함세덕 등이 배치되어 있어 연극계를 망라한 것처럼 보였다.
이상의 구성원을 보아 알 수 있듯이 연극건설본부가 좌익극인들만의 단체는 아니었고 실제로 처음에는 프로극의 기치도 내걸지 않은 식민지 시대 조선연극문화협회의 재판이라 할 수 있었다.1) 그러나 여기서 분명한 것은 주동인물들이 대부분 과거에 프로극과 연결을 갖고서 보호색을 띠고 동양극장에서 상업적인 대중극을 했던 연극인이었다는 점이다. 사실 유치진을 위시한 좌익민족 진영 연극인들은 일제말엽의 어용극운동으로 자숙하며 관망상태에 있었다.
물론 8*15 직후에는 좌우가 금방 갈라진 것이 아니므로 프로극의 정체가 드러난 것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연극건설본부의 조직으로 연극계는 어떤 판도를 조금씩 그려갔고, 색깔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러한 당시 상황을 짐작케 하는 안영일의 글을 참고 삼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해방이 가져온 흥분과 감격이 물결치는 파도 속에서 조선연극인은 엄숙하고 진지하고 냉정하게 민족연극의 재건을 피하였다. 민족을 위한 인민을 기초로 하는 연극창조를 위하여 모든 힘과 정열과 능력을 바쳤다. 그리고 장구한 기간 동안 우리 체내에 침투하였던 제국주의적인 독초를 청소하기 위하여 싸울 기초를 세웠고, 낡은 봉건적 유제에 대하여 끊임없는 숙청공작을 전개함으로써 새 세대를 장식할 찬란한 민족극장의 토대를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므로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를 통하여 협의 결정된 조선연극의 기본방향이 첫째로 일본제국주의에 의한 일절의 야만적이고 기만적인 문화정책의 잔재를 소탕하고 이에 침윤된 문화반동에 대하여 가책 없는 투쟁을 전개할 것, 둘째로 연극에 있어서의 철저적인 인민적 기초를 완성하기 위하여 일절의 봉건적 요소와 잔재, 특수 계급적 연극의 요소와 잔재, 반민주주의적 지방주의적 요소와 잔재의 청산을 위하여 활발한 투쟁을 전개할 것, 셋째로 세계연극의 일환으로서의 민족연극의 계발과 앙양을 위하여 필요한 모든 건설사업을 설계할 것, 넷째로 문화전선에 있어서의 인민적 협동의 완성을 기하여 강력한 문화의 통일전선을 조직할 것-등등에 있음을 확인하고 그 구체적인 조항을 채택하여 우리 연극운동의 새로운 기치를 삼았던 것이다.2)
이상 안영일의 글에서 알 수 있듯이 연극건설본부는 해방전의 모든 연극유산의 청산을 내걸고 새로 발족된 비교적 좌경극단들인 인민극장, 자유극장, 청포도, 일오극장, 동지, 혁명극장, 서울예술극장, 백화, 조선예술극장 등 9개 단체를 산하에 묶어 놓고 소위 진보적인 연극운동을 펴나갔던 것이다. 그런데 당초 그들이 지향했던 바는 종래의 저속한 상품연극을 일소하고 민주주의 건설에 전력을 다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연극연구소, 국립극장, 연극영화학교, 연극잡지 발간 등도 기획하였다.3) 그리고 회원들은 연합군 입성 환영공연 준비와 전재민의 연금모집을 위하여 가두에 나섰고, 새로운 연극의 발전과 상업주의에서의 전락을 스스로 방지하기 위한 각본 심의실을 두는 한편 연극 용어의 제정, 연극신문 발간도 서둘렀다.
그러나 연극건설본부가 해방된 흥분 상태에서 발족되었기 때문에 구체적인 연극운동과 실천을 통해서 조직되지 못한 근본적 결함과 좌우익 연극인의 혼성으로 동상이몽의 이질적 구성으로 처음부터 흔들렸다. 게다가 「투철한 사상이 있어서가 아니라 비판할 여지도 없이 유행병적인 소아병에 걸려서 공산주의연하는 것을 진보적인 것처럼 여기던」4) 당시 풍토로 해서 그 단체는 쉽게 분열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국 연극건설본부가 분열되어 유치진, 서항석 등은 탈퇴, 침묵 속에 칩거한 반면 좌익 연극인들은 프로연극동맹 조직을 둘러싸고 세 파로 갈리어 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즉 좌익 연극인들은 프로 연극동맹조직론자와 조직무용론자 그리고 인민연극론자도 분열 대립했다. 그들은 스스로 동맹조직론자를 좌파라 했고, 조직무용론자를 우파라 부르며 싸움을 했다. 이중 좌파의 주장은 「현재의 동향으로 보아서 프로예술가들은 각 부문별로 구체적인 조직체를 가지고 노동자 농민의 생활권 내에 침투하여 부문별 조직을 완성함으로써 예술운동 전체의 장래는 남로당의 외곽단체가 되는 것을 바라고 있는 것인 만큼 하루라도 빨리 프로연극동맹을 조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반면에 우파는 「연극이란 극단활동으로 비로소 시작되는 것인 만큼 개개의 극단이 형성되어 각자의 활동이 성숙한 다음에 비로소 연극동맹이 조직되는 것이라는 주장이고, 또 하나는 연극의 지금 정세가 프로 연극동맹을 조직하기에는 아직 위험한 시기니 좌익 연극인들로서는 주체적 조직을 가지지 말고 금후 족출하는 각종의 연극단체를 총망라해서 협의기관만을 갖고 그 안에서 지도해야 된다」5)는 것이었다.
한편 인민연극론자들은 현금에 「프로연극동맹이라는 간판을 내걸고서는 대다수가 진보적 경향에 있는 연극인을 한꺼번에 포섭할 수 없으니 중간적, 일시적 조직으로 인민연극동맹이라 했다가 적당한 시기에 가서 프로연극동맹으로 재편하자」는 주장이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좌익 연극인들의 주장에 여러 갈래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본질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는 것으로서 전 연극인을 좌익진영으로 끌어들이자는 데 있었다. 그 중에서는 조직무용론자들과 인민연극론자들이 신중파로서 「극단조직에 있어서는 금후 조선의 연극은 고도의 예술적 완성을 기하기 위하여 모스크바예술좌와 같은 연극을 수립하기 위해서 그 주류를 형성할 것이지 혁명적 극장을 조직해야 1927*8년 범한 예술의 정치주의적 경향에 다시 빠져서는 안 된다」는 데 견해를 같이 하면서 「현 단계에 있어서 프로연극의 기치를 내거는 것은 프로연극을 고립시키는 일로서 연극인 대다수를 끌어들이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들은 좌파를 가리켜 「예술성을 망각하고 도식주의를 초래할 극좌적인 소아병자들」이라고 비난하였다.
반격에 나선 좌파는 이들 우파에 대해서 해방될 때까지 연극을 일제선전도구화한 친일파라 몰아 부쳤다. 그러니까 좌익 연극인들끼리 일제시대에 친일을 했느냐 안 했냐로 상대방의 과거를 들추어서 싸움판을 벌인 것이다. 결국 두 파의 싸움은 극열좌파의 승리로 끝남으로서 1945년 9월 27일에 프로연극동맹이 결성되기에 이르렀다.
이는 경향극단 염군(1923년) 출현이래 1934년까지 유일하게 남아 있었던 좌익극단 신건설이 일제에 의해 해체 당한 후 만 11년만에 프로연극진영이 재건된 역사적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연출가 나웅을 위원장으로 하여 주로 극좌파로 조직된 프로연극동맹은 정치적 색채가 짙은 세 가지 강령, 즉 (1) 프로연극의 건설과 그 완성을 기한다. (2) 일절의 반연극과 싸운다. (3) 연극활동이 노동자 농민의 생활력과 투쟁력의 원천이 되기를 기한다는 것6)이었지만 처음에 가입한 극단은 청포도, 일오극장, 해방극장, 전선, 서울예술극장, 혁명극장, 자유극장 등 7개 단체뿐이었다. 그러나 우익 민족진영의 민족예술무대(약칭, 민예)와 재건 토월회, 청춘극장(10월 창립), 그리고 프로진영에서 재빨리 탈퇴한 전선 등 몇 개 극단을 제외한 대부분의 단체들이 점차 프로연극동맹의 조직망에 걸려들어 갔다.
해방 직후의 모든 좌익문화단체들이 남로당의 주구로 전락, 배후에서 조종하는 남로당의 지령에 따라 꼭두각시화 했듯이 프로연극동맹도 문화단체연맹(약칭, 문련)의 산하로 들어가서 공산주의 정치선전도구가 되어 갔다.
그네들은 좌익문화단체가 공통적으로 내건 행동강령 인 (1) 일본제국주의 잔재소탕, (2) 봉건주의 잔재소탕, (3) 국수주의 배격 등의 기본방침에 따라 선동연극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그 첫 번째 주요행동이 찬탁운동이었다. 사실 1945년 12월 26일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한국신탁통치 결정이 내렸을 때, 반탁운동은 거족적이었다. 연극인들도 46년 1월 2일에 전국연극인대회(위원장 송석하)를 열어서 신탁통치철폐운동을 벌였고, 프로연극동맹도 가세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그 이튿날 남로당이 찬탁으로 돌아섬에 따라 프로연극동맹도 찬탁에 앞장을 서서 민족진영 연극인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즉 혁명극장, 해방극장 등 극렬한 행동극단을 앞세운 그들은 마르크스-레닌의 정치혁명극을 상연하면서 장내에서 구호를 외치는가 하면, 연극공연 후에는 관객을 이끌고 가두시위를 벌이는 등 정치선전에 몰두했다. 당시 프로연극인들이 남로당의 앞잡이로서 얼마나 부화뇌동했는가는 김광주(金光洲)의 다음과 같은 글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문화인들과 예술인들은 조국의 해방과 독립을 구호로 역사적 사명을 걸머졌다고 날뛰고 있다. 이리하여 소위 「진보적」이니 「양심적」이니 하는 미명아래 조선의 무대에는 도리어 시대를 역행하는 퇴보적인 당파투쟁이나 정치야욕에 부채질하는 형식화되고 고정화된 연극이 때를 만난 듯이 횡행하였고 비양심적인 연극이 본도를 벗어난 정치적 「슬로건」이 범람하였다. 조선연극운동의 걸어온 자취가 어제나 오늘 같거늘 언제부터 진보적이었는지 고소가 터진다. 국가건설의 민족적 대업을 앞에 놓고 있는 우리에게 상아탑적 자아도취의 예술이 하품 나는 존재이라면 정당의 앞잡이가 되어 마음에도 없는 대사를 의기 양양히 고호하는 것도 연극의 후퇴요 예술의 모독이 아닐 수 없다.7)
해방 직후의 연극계는 극렬한 좌익연극인들이 독판을 치다시피했다. 이처럼 좌익 연극인들이 연극계를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당시의 좌경적인 사회풍조에 있었고 다음으로는 우익민족진영 연극인들의 조직적 연극활동이 미약했기 때문이다. 물론 우익진영에서 연극을 하려고 해도 좌익의 조직적 방해로 대단히 어려웠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극장 노동자들 마저 모두가 공산주의 손에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조직적 방해로 막을 열 수 없었다는 유치진과 이해랑(李海浪)의 다음과 같은 회고는 사실이었다.
1945년 5월, 우리는 창립공연으로 나의 「자명고」를 상연키로 했다. 「자명고」 공연 전날, 무대장치를 다 해놓고 총연습도 끝내었는데 어쩐지 심상찮은 예감이 들어 불안한 마음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과연 일은 심각한 사태로 벌어져 있는 게 아닌가 ? 무대장치는 모두 부셔지고, 막은 칼로 북북 그어져 도저히 공연을 할 수 없었다. 모두가 다 좌익계 노동조합원인 무대가설자들이 공연을 방해할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8) 민주진영으로선 유일하게 정돈된 극협의 출현은 좌파 연극인들에게 큰 위협이 됐고 따라서 그들의 방해는 대단했다. 이들은 불량배들을 내세워 극장 입구를 봉쇄, 관객들을 몰아냈으며 출연자들에게도 공갈 협박을 하였다. 그러나 뒤숭숭한 사회분위기 속에 경찰력은 이들을 몰아낼 만큼 그 힘이 강하지 못했다.9)
치안부재 속에 좌충우돌하는 좌익 연극인들은 이듬해 전열을 정비하는 중에 인민예술좌, 녹성 등 직장전속극단을 새로 조직하는 한편, 민족극과 대중극을 주창하는 우익진영을 입체적으로 공격해 갔다. 그들은 첫 번째 종합적 행사로서 46년 3월에 제1회 3*1 기념 연극공연대회를 개최했던 바, 혁명극장, 자유극장, 백화, 조선예술극장, 서울예술극장 등 5개 단체가 창작극을 갖고 참가했다.
박영호 작 「님」, 조영출(趙靈出) 작 「독립군」, 이운방(李雲芳) 작 「나라와 백성」, 김남천(金南天) 작 「3*1 운동」, 박노아(朴露兒) 작 「3*1 운동」 등 모두 일제시대의 독립운동을 다룬 작품들만 출품되었는데, 그에 대해서 김영수(金永壽)는 다음과 같이 평했다.
극단은 하나의 성전이었고 장대한 기회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우선 동일한 사실적인 소재를 가지고 서로가 여차히 형성하느냐 하는 바 최대의 관심과 주목이 앞섰기 때문이다. 다섯 극단의 다섯 작품이 모두 비슷한 소재를 다룬 것으로 역사를 회고케 함에 그치고 말았다.10)
이상은 프로연극동맹의 지나친 목적 지향적 연극행동에 대한 비판이었다.
일찍이 이재현은 해방 직후 좌익 연극운동을 3기로 나누어 언급한 적이 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45년 8월 15일부터 이듬해 3월까지 7개월 동안이 제1기로서 민족극운동의 태동기며 발아기였고, 그 후(47년) 8월까지 1년 반 동안이 성장기였으며, 동년 9월부터 다음해(48년) 8월까지 1년 동안이 침체기였다는 것이다.11) 이재현이 주장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좌익극장 활동기간은 만 3년이 되지 못한다.
실제로 그들은 47년 말부터 거의 연극활동을 못하는 상태였다. 왜냐하면 연극계를 어지럽히는 그들의 정치선전극에 대해서 군정 당국이 철퇴를 가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즉 47년 정월 장(張)경찰총감은 지나치게 사회질서를 어지럽히면서 정치선동에 열을 올리는 좌익 연극인을 통제하기 위해 「예술을 빙자한 정치선전 금지조처」12)를 공표했던 것이다. 경찰총감의 고시에 대한 좌익진영의 반발은 극렬한 것이었다. 「사상 없는 예술은 없다」(김동석)느니 「극장문화의 멸망」(심영), 「민족문화 무시, 씻지 못할 폭언」(장공린)이라는 등의 논평으로부터 「모든 정력은 오직 자주독립과 민주건설에 집중하여야 할 오늘의 현실에 있어서 예술이 인민대중에게 정당한 정치노선을 계몽하고 지지하는 임무를 가져야 할 것은 당연한 일」13)이라는 김오성(金午星)의 치졸한 반박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좌익문화단체들도 경찰총감 고시가 극장예술운동을 전면적으로 봉쇄시키는 일이라 함께 들고일어나 안영일, 함세덕, 김한(金漢), 문예봉(文藝峰), 김소영(金素英), 허위(許違), 박영근(朴榮根) 등 30여 명의 대표를 러치 미군정 장관에 보내어 고시취소를 요구하는 건의서14)를 전달하기까지 하였다.
건의서의 요지는, 첫째 예술 중에 표현되는 정치선전의 금지는 예술 그 자체에 대한 금지며 정치성을 떠난 예술은 무의미하다는 것, 둘째 대중의 의사발표 자유에 대한 억압이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좌익 연극인의 반발에 반해서 우익민족진영에서는 저들의 불순한 예술의 정치도구화를 비난하면서 경찰총감의 고시를 환영으로 받아들였다.
건의서에 대한 당국의 반응이 냉담하자 좌익인들은 최후의 저항으로 조선문화총연맹 주최로 김기림(金起林), 함세덕(咸世德), 김남천(金南天), 이서향(李曙鄕) 등을 내세워 문화옹호 문화인예술가총궐기대회를 개최하려 들었다. 이에 당국에서 적극적으로 저들의 저항을 좌절시켰고 기세를 계속 꺾어 갔다. 그 일환으로서 3월 들어 극렬좌파 연극인들에 대한 광범한 검거를 시작했고, 악질적인 사이비 연극인들이 체포되기에 이르렀다.15)
그런 속에서도 나머지 좌익 연극인들은 최후 발악인양 연극운동을 지속해 갔다. 2월말부터 3월 초순에 걸쳐서 개최된 프로연극동맹주최 제2회 3*1 연극제에서는 민중, 자유, 혁명, 무대예술연구회가 합동으로 함세덕의 「태백산맥」을 공연했고, 예술극장, 문화극장, 낙랑극회가 역시 합동으로 조영출의 「위대한 사랑」을 공연했다. 제2회 3*1 연극제에는 의외로 10여 만이라는 관객이 동원되었는데, 그것은 순전히 남로당 계열의 계획적 동원 때문이었다. 이 제2회 3*1 연극제야말로 프로극 운동의 피크인 동시에 마지막 연합활동으로 꼽히는 것이지만 프로극은 이미 46년 말부터 사양길을 걷고 있었다. 왜냐하면 프로극단들이 지나치게 마르크스-레닌의 이데올로기를 부르짖고 정치선동의 도구화로 전락됨으로써 대중으로부터 외면을 당한데다가 극렬분자들이 월북했기 때문이다. 그에 대해 이태우(李台雨)는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해방 직후의 활기는 그후 미묘한 정치적 저기압과 경제적 압력, 또는 하등의 문화적 옹호가 없는 당국의 정책, 그리고 호화로운 미국 영화의 제한 등으로 연극계는 피폐하고 연극인의 생활은 궁핍의 극에 달하였다. 이 같은 현실에 불만을 느낀 나머지 신고송(申鼓頊), 강호(姜湖), 이백산(李白山), 이재덕(李載德), 이정자(李晶子) 등 약 30여 명의 해방극단 일행은 38선 이북으로 가고 뒤따라 나웅, 송영, 김승구, 김욱, 박영신, 배용, 김두린, 이정훈, 엄미화 등은 가고야 말았다.(중략) 나는 여기서 연극의 타락을 지적하는 동시에 해방후의 모든 정치적 내용을 가진 연극이 실패한 것은 그 내용이 생경한 이데올로기적 편승이기 때문에도 흥행적 실패의 원인이 있지만 그 보다도 일제하의 선전연극의 수단에 기인하는 것이라 말하고 싶다.16)
사실 프로극에 앞장선 연극인들은 거의가 일제시대의 어용단체인 조선연극문화협회 밑에서 국민연극이라는 어용선전극을 했던 무리들로서 해방 직후에는 그러한 연극 프레임에다가 마르크스-레닌 사상만을 주입한 연극을 했던 것이다. 그런 연극을 관객이 좋아할리 없음은 자명하다.
그들은 어떤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서 새로운 창작활동을 모색하기도 했으나 과거 카프시대와 같은 유물변증법적 창작 방식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다. 즉, 판에 박힌 창작방법, 모든 나쁜 동기는 지주나 자본가, 또는 미국이나 민주진영 사람들이 한 것처럼 꾸며서 타도를 외치는 것으로 결말을 지었다.17) 극히 도식적이고 생경한 이데올로기만 넘쳐서 예술성이라든가 인간존엄성 같은 것을 찾아볼 수가 없는 것이었다.
가령 신고송의 「철쇄는 끊어졌다」, 「결실」이라든가 송영의 「황혼」 같은 작품은 그 표본이 될 만한 것들이었다. 「철쇄는 끊어졌다」라는 작품은 예술적 가치가 전혀 없는(내용면에서나 형식면에서) 것으로서 이념구호에 지나지 않으며, 「결실」은 상투적인 토지문제, 소작쟁의, 즉 토착지주와 신흥계급청년의 자연발생적 항쟁의식을 피상적으로 묘사한 작품이었다.
송영의 「황혼」도 당시 정계에 출몰하던 사이비 애국자의 정체를 폭로한 작품으로서 이사장이란 인물의 성격을 분석하여 과거 친일적인 민족반역자였다는 것을 매도하는 데 그쳤던 것이다.
그들은 유독 리얼리즘을 부르짖은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그들의 리얼리즘이란 것은 선전, 선동, 선정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 도식적 현실매도 방법에 불과했다. 그들은 능력이 없었다. 식민지 시대의 낡은 프로극 수법으로 그들의 이념극을 심화시키지는 못했던 것이다. 허집(許執)의 다음 글은 그 점을 간접적으로 지적한 것이었다.
내부의 정세는 3*1 기념연극 이후에 최악의 외부적 악조건 밑에 정상적인 발전을 못하고 있다. 국립극장운동, 소극장운동이 실현을 못보고 일부 북조선행과 물자빈곤, 물가폭승, 순회불원활, 양화범람과 최저 생활확보에도 급급한 상태에 떨어짐에 이르렀다. 연극 모리배는 예술의 사상과 섬세한 고도를 저락시켰다. 무대예술가간에도 실망과 우울이 생성하고 건설의 격정은 신형성의 급속한 발견과 낡은 연극에 대한 혁신적 습격에서 새로운 창작문법의 수립을 위한 투쟁이 있어야겠는데 없다. 연극사는 40년 전으로 역행하였다.18)
그들은 서투른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연극의 기본으로 삼았는데 그들이 금과옥조로 삼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그 종주국인 소련에서는 이미 반성기에 접어든 때였다.
47년에 들어서 제2회 3*1 연극제로서 최후의 안감힘을 써보았지만 별 성과를 못 올린 데다가 경찰총감의 고시와 극렬좌파의 체포, 그리고 일부 좌파의 월북, 관객외면 등으로 극단유지조차 어려운 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자 그들은 2월부터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기 시작했는데, 우선 프로연극동맹 중앙집행위원회를 열고 심각한 자가비판을 하는 동시에 운동방침을 근본적으로 전환하는 연극대중화운동 지침서라는 것을 발표하였다.
그 지침서의 내용은 첫째 가능한 극단으로부터 대극장공연 중심주의에서 소규모 이동공연으로 전환시키고 점차 전극단에 확대할 것, 둘째 직장, 농촌, 학교 등의 자립적 연극활동을 지도 원조하고 각 지방에 지부를 설치하며 연극서클활동을 전개할 것, 셋째 비판활동을 강화하고 희곡부의 활동을 왕성히 할 것, 넷째 저속한 가극의 옳은 지도를 위하여 노력할 것, 다섯째 예술주의에 대한 철저한 비판, 여섯째 대중화의 사업을 위하며 정기간행물과 총서 등을 발간하는 한편 전출판물을 활용할 것 등이었다.19)
프로연극동맹의 지침서가 각 좌익극단에 지령되기 전에도 그러한 주장을 하는 논조들은 있었다. 그중 대표적인 글이라 볼 수 있는 김태진의 「연극운동의 방향전환」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대저 민족연극이란 무엇인가.(중략) 우에 말한 우리 민족의 피비린내 나는 현실의 본원을 직시하고 타개하야 제시하는 것만이 당면한 민족연극인 것이다. 가령 조선사회의 역사적 과업의 하나로 그 해결의 관건이 되어 있는 바 토지개혁문제 같은 것을 제일주의적으로 들고 나와야 할 것이다.(중략) 우리 극단의 주인들과 아울러 극작가들의 새 각성과 분발이 요청되는 일대 전환기인 것이다. 또한 시민적 극단중점주의만이 연극운동의 전부가 아니라 각급의 민중 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연극의 대중화 실천의 길 즉 연창공작사업이 보다 더 긴급하다. 연극을 농촌으로 학교로 그리고 그 속에서 연극의 창조자를 육성하는 운동, 진정한 민족연극 수립의 기초가 있다.20)
이상의 논조라든가 프로연극동맹의 지침서에서 밝힌 대로 그들은 도시중심공연에서 지방공연으로 또한 조직적 독자층 관객보다는 노동자, 농민을 각 지역과 직장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두더지 작전으로 전환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공장연극, 농민연극을 조장하여 자립극단 육성도 시도했다. 이는 두 말할 것도 없이 그들의 이념대로 노동자, 농민의 생활권내에 파고들어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자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도시를 전혀 도외시한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들은 남로당의 지령에 따라 프로연극동맹 산하의 배우들을 분대하여 각 지방, 특히 농촌으로 선전계몽을 위해 파견하는 한편 극작가와 비평가를 동원, 신문잡지를 통하며 프로극을 선전함은 물론 우익민족연극에 대해 발악적 총공세를 펴나갔다. 당시 그러한 선동적 글 하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극단의 온상, 스탄다드 극단에의 중점주의를 청산하자, 감미한 현학적 예술전당주의적 관념을 버리자, 그리고 기술적, 경제적, 방법상, 운영상 제조건에 있어 심히 곤란하고 고생될 것을 각오하면서라도 영리의 지배성을 떠난 소형극단운동을 일으키어 화급히 공장으로 농촌으로 뛰어 들어가자 혁명의 결정적인 담당자, 산업전열에 싸우는 연극을 보내자. 이 소형극단은 종래의 흥행적인 성격을 떠남으로써 수입관계를 무시하여야 할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순수한 마음의 기사로서의 헌신적인 기개를 요하는 싸우는 연극의 연극군대가 될 결정 하에서 궐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운동을 시급히 일으키는 데서만 현하 연극의 위기가 극복될 것이다.21)
이상의 글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그들은 이미 예술을 떠났고, 연극을 정치목적의 수단으로 굳혔던 것이다. 그들은 일찍이 레닌이 주창한 연극의 정치목적화에 완전히 빠져들었던 것이다. 따라서 연극인은 연극 군인이고 극단은 연극 군대로 생각했다. 실제 그들은 연극 군대로서 문화공작단이라는 것을 만들어 47년 한 해만도 40여일 동안 30여 도시를 순회하면서 1백여 회의 공연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그와 같은 마지막 시도도 서서히 침몰해 갔던 것이다. 당국이 연극의 정치선전화를 가만둘 리 만무했다. 정부 당국 뿐 아니라 프로극에 대한 대중의 배타도 대단했다.
그들의 설익은 선동극에 식상했기 때문이다. 프로연극이 내외에서 협공 당하여 궁지에 몰리는 현상들 이재현의 다음과 같은 글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공연극장에 투석, 협박의 행위가 처처에서 수없이 발생되었고 연극인의 피습피검의 불상사가 속출하였다. 동맹 산하라는 이유로 극장에서 경원 당해야 했고, 당국의 부단한 감시의 눈초리를 받아야 했으니, 이와 같이 극악한 조건하에 개재한 민족연극운동에 대한 위정당국의 부단한 엄습이니 이것이 남조선의 정치적 혼란에 의거되어 발생한 사태라면 부득이한 일이나 어쨌든 바야흐로 찬란히 개화되어야 할 이 땅의 민주주의 문화예술의 자유로운 발전에 있어 중대한 지장이 아닐 수 없다. 인민이란 대사만 나와도 좌익극이란 낙인을 찍는 지나친 신경과민은 건전하게 발전할 민족연극의 커다란 암이었음은 사실이다.22)
이처럼 프로연극은 도시에서뿐만 아니라 농촌에서도 신망을 잃고 배척 당했다. 프로극의 퇴조에 따른 사회정상화와 극렬적인 프로연극인의 피보, 관객 이반 등으로 해서 극단의 유지는 더욱 어려워졌다. 상당수의 방황하던 연극인들이 좌표를 찾아 우경화했다. 극단들의 경우만 하더라도 해방 직후 창립공연으로 그쳐버린 인민예술극장, 일오극장에 이어 46년에는 청포도, 해방극장, 조선예술장, 서울예술장 등이 자진 해산했고, 47년도에 와서도 혁명극장, 낙랑극회, 그리고 군소 좌경 극단들이 8*15 기념공연을 준비하다가 당국의 중지명령으로 흩어졌다. 다만, 프로연극동맹 산하에 있으면서도 좌익 색채가 강하지 않았던 자유극장만이 공연활동을 계속했고, 그 외의 동맹산하 극단들은 47년 8월 15일을 전후하여 완전 침몰하였다. 자유극장도 정부수립 직전(7월 19일)까지만 공연활동을 하고 해체되었다.23)
이상과 같이 45년 9월 27일에 결성된 좌익 연극인들의 모임체인 프로연극동맹은 47년 8월까지만 2년여 동안 혁명극장, 해방극장 등 10여 개의 전투적인 극단들을 앞세우고 남로당의 충실한 꼭두각시로서 극예술을 가장한 서투른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만 선전하다가 목적극을 거부하는 대중과 군정 당국의 협공으로 그 종지부를 찍고 말았던 것이다. 식민지 시대 상업주의 극의 본산이었던 동양극장을 거점으로 대중극을 했던 저질 연극인들이 해방 직후 프로연극인으로 변신, 본색을 드러냈고, 이들이 다시 남로당의 나팔수가 되어 연극계를 어지럽히다가 월북하거나 우경화한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프로연극운동은 2년만에 그 막을 내렸던 것이다.
프로연극에 대항하는 조직활동
전술한 바와 같이 해방에서부터 신년 말까지는 좌익연극의 독무대로서 이데올로기 선동과 구호 가두시위, 폭력행위가 잇달은 소용돌이의 연극계였다. 당시 사회풍조도 좌익이라고 해야 양심적이고 진보적인 양 취급당했기 때문에 자연히 유약한 상당수 연극인들이 끌려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해방이 되자마자 좌익 연극인들이 활개치고 나선 것은 아니었다. 45년 8월 20일 전국연극인대회를 열었던 때만 하더라도 연극계의 분열은 없었고, 자유로운 세계 속에서의 미래상만을 구상했다. 그러던 것이 연극건설본부가 결성되면서부터 조금씩 색채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좌익예술의 이론가 구실을 한 임화가 깊숙이 관여하면서 더욱 색채가 짙게 나타났으며 드디어 46년 1월 신탁통치 문제로 좌우익 진영이 갈리면서 연극계도 좌우익으로 분열된 것이다. 그런 와중에서도 좌익극 운동에 반기를 든 연극인들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고, 극작가 이광래가 주동이 된 극단 민족예술무대를 선두로 하여 전선, 그리고 신파극단으로 청춘극장 등 몇 개가 있었다. 저간의 사정에 대해서 당시 활동했던 서항석과 이광래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좌익은 재빨리 전기 각 극단을 끌어 조선연극동맹을 결성하고 좌익극을 상연하는 동시에 신탁통치를 지지하였고, 우익은 다만 1945년 10월에 조직된 민예극단과 예원좌의 개칭인 청춘극장과 1946년에 소극장운동을 목표로 결성된 전선 등 2, 3개 극단만이 연극동맹에 대결하여 반공노선을 견지할 뿐이었다.
몇몇 신파극단을 제외한 그들은 그들 자신도 그러했지만(그러므로 월북한 그들이 환영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일화견적 기회주의들을 총망라하여 찬탁의 앞잡이도 하였다. 그들의 행패는 일제가 짓밟고 간 황망한 희곡단을 어지럽게 하였다. 다만, 민예(민족예술무대의 약칭)만이 반탁의 기치를 들고 화신 앞 로터리에서 그들과 식전을 벌였을 뿐이다.25)
앞의 이야기대로 민예나 전선 같은 극단이 좌익단체에 대항할 만한 규모나 역량을 갖춘 단체는 못되었던 것 같다. 이는 우선 지속적인 활동을 하지 못했던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해방되던 해 10개월에 「극예술연구회와 중앙무대 이래의 전위동지로서 조직되었다」는 민예만 하더라도 12월에 톨스토이의 「부활」(이광래 연출)을 창립공연으로 가진 이래 46년 2월에 김동인 원작의 「활민당」(채정인 연출) 공연, 그리고 8월 들어 이광래 작*연출의 「청춘의 정열」을 제3회 공연으로 갖고는 48년에 가서야 겨우 회생하는 정도다. 이철혁, 이해랑, 김동원, 윤방일 등이 소극장운동을 내걸고 45년 11월에 고골리의 「검찰관」 공연으로 출범한 전선도 2회 공연으로 막을 내렸다. 그 외에도 재건 토월회가 역시 동년 12월에 박승희 작 「사십 년」으로 등장하는 등 간헐적인 활동이 있었으나 조직적이며 적극적인 프로연극동맹에 대항하기에는 힘겨웠다.
이렇듯 우익 민족진영 연극이 고전하고 있을 때, 유치진 등이 다시 전면에 나서서 프로연극에 대항하는 조직적 활동을 벌이게 되었는데, 그것이 다름 아닌 연극 브나로드운동 실천위원회의 발족이었다. 즉, 46년 5월에 유치진 등이 극예술연구회를 재건하고 이들 회원을 중심으로 연극 브나로드운동 실천위원회를 조직했다.
이 위원회는 애국심에 불타는 전국 학생, 청년, 여성, 소년들을 1백 45개 실천대로 조직하여 이미 만들어 놓은 각 부군, 각 동리, 각 직장의 연극 브나로드운동본부에 나가서 연극, 음악, 웅변으로 애국심을 고취하고 계몽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1대를 10명 내외로 하여 약 1천 5백여 명으로 구성된 연극 브나로드운동 실천위원회의 레퍼토리는 「안중근 의사의 최후」, 「매국노」, 「윤봉길 의사」, 「독립만세」, 「38선 고수선」 등 민족의식과 애국심을 주제로 한 것이었다. 동년 7월 중순부터 전국을 누빈 이 연극브나로드운동 실천위원회의 규정은 다음과 같다.
(1) 학도대-방학을 기회로 지리, 인정에 밝은 자기 고향을 중심으로 활동케 한다.
(2) 청년대-각 청년단 문화단체 직장의 집단적 참가 아래 지역적으로 활동케 한다.
(3) 여성대-청년대 같이 여성들만으로 조직하여 여성을 상대로 하는데 여학생과의 혼성편대 로 조직함도 좋다.)
(4) 소년대-고아원 아동, 소년군, 동리의 소년들도 조직하여 활동케 한다.26)
연극 브나로드운동 실천위원회의 행동지침으로 보거나 시기적으로 보아 이는 프로연극의 노동자, 농민층의 침투에 대결하는 조직적 우익민족극운동이었다.
이들은 출발에 앞서 충분한 정신무장과 작품연습을 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처럼 해방직후인 45, 6년은 극예술운동이라기보다 정치운동적 성격을 띤 것이었고, 정치, 사회, 경제 혼란 속에서 연극은 침체일로를 걷고 있었다. 그러한 당시의 사정을 서항석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조선의 극계는 어떤가 ? 관청은 연극을 유해무익의 장물로 보는지 흥행허인의 절차가 필요이상으로 번잡하고 게다가 고율의 세금이 부과되어 연극의 존립과 발전에 적지 않은 장애가 되며 극장은 이윤의 쟁탈회뢰의 수수로 일삼는 복마전이 되어 있어 연극의 퇴폐와 침체에 날로 가세하는 형편이다. 이 사이에서 연극인은 그날의 생존을 위하여 보통인 보다도 더 불리한 조건하에 악전고투하고 있다. 극계는 예술적 양심을 잃었다. 의욕이 없는 바 아니지마는 무딘 지 오래다. 정히 새로운 운동이 일어나야 할 때다. 이제야말로 사력을 다하여 재기할 때다. 모이면 힘이 된다. 단결이 유일의 활로다. 우선 연극의 상업주의화를 배격하자 이는 극장의 획득으로부터 간수하여야 한다. 극장문제의 합리적 해결, 이것이 당면한 문제다.27)
당시만 해도 군정치하여서 행정상태가 틀이 안 잡힌데다가 일본인 소유의 극장들이 흥행주들에게 넘겨져 예술과는 거리가 먼 극장 대여행위가 연극침체의 원인이었다는 서항석의 견해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나, 그보다도 첨예한 이데올로기 갈등과 연극의 정치도구화가 더 큰 원인이 되었다. 그 점에 대해서 한 신문은 「해방 1년의 연극계는 전반적으로 호화스럴 법한 채 공허로 왔다. 아무리 과도적 난경과 객관적 정세에 의한 고삽이 있었다 치더라도 과격한 해방의 감격에 규열하는 대중 속에서 확실히 퇴폐비하하는 일로에 있다. 군생족출하는 연극집단은 혹은 사상적 분류에 승하여 편직협의의 경동으로서 움직이려 들고 혹은 무의도배의 집결로서 모리흥행에 눈이 어두워 그 사회적으로 영향하는 바 컸다」28)고 쓴 적이 있다.
사실 이데올로기의 균열과 프로선전극이 정치, 사회혼란과 경제침체 속에서 저질 상업극 범람과 함께 연극계의 황폐를 채찍질 한 것이다. 그런 가운데서 우익극운동은 부진할 수밖에 없었음은 자명하다.
그러나 47년 초 군정 당국의 프로극에 대한 철퇴 이후 연극계가 조심씩 안정되어 가는 듯했다. 확고한 사상도 없이 부화뇌동하던 상당수 좌익진영 연극인들이 우경화한 것도 이때의 일이었다.
그리하며 이때부터 좌우연극의 세 편도 팽팽해짐은 물론 그 계선도 점차 분명해졌다. 지지부진하던 우익민족진영 연극도 기세를 올려가기 시작했다. 그때의 사정에 대해여 박노춘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1947년에 이르러 흥분된 감정을 정리한 연극인은 눈뜬 바 되어 본연의 민족연극의 자세로 돌아와 염증 나는 좌익 연극과 결판하기 시작하였으니 반공의 기치를 내걸고 맨 먼저 일어난 극단이 극단 전선에서 극예술원으로 개칭하고 새 출발한 극예술협회(약칭 극협: 신협의 전신)이었다.29)
박노춘이 지적한 바와 같이 47년 1월 31일 전(前) 전선 단원이었던 이해랑, 김동원, 이화삼 등이 조선연극문화사라는 단체를 발족시켰다. 유치진과 함대훈을 고문으로 하고, 자금을 댄 신봉균을 회장, 이영건을 사장으로 한 한국예술문화사는 산하에 무용단과 극단 극예술원을 두고 연극운동에 나섰다 그 첫 활동이 프로연극동맹 주최 제2회 3*1 연극제에 유치진 작「조국」을 갖고 참가한 것이었다. 프로극에 대항하기 위해 3*1 연극제에 참가한 「조국」 공연이 바로 극예술협회의 창립공연이었고 동시에 그 목적에 있어서 우익민족극의 시발이었던 것이다. 민예나 전선 등 먼저 활동한 우익극단들보다 그 이념이 뚜렷하고 좌익극과의 대결 자세에서 그렇다.
2월에 「조국」 공연을 한 극예술원은 5월에 가서 발전적 해체를 하고, 극예술협회라는 명칭으로 개편*발족했다. 「극예술연구회의 신극정신을 계승하고 좌익연극과 대항하여 민족극 수립을 표방, 동인제로 조직」30)된 극협의 창립멤버는 이해랑, 이화삼, 김동원, 이상익, 김선영 등 5명이었고, 극연의 신극정신을 이어 받았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리얼리즘이 기조였다. 연기진으로 김영식, 조백령, 김영운, 장훈, 조미령, 김부자, 강정애, 한성녀 등을 확보한 극협은 제2회 공연으로 유치진 작*연출의 「자명고」를 국도극장에서 공연했다. 이 작품은 유치진의 전(前)작품 「조국」처럼 독립의식을 고취한 작품으로 한사군의 하나였던 낙랑과 고구려의 싸움을 다룬 역사극이었다. 즉 「자명고」에서는 외세를 배척하고 조국을 통일하려면 민족이 단결해야 한다는 대사가 주인공의 입을 통해 계속 되풀이된다.
이는 해방후 미*소 등 외국군대가 진주, 조국을 분단통치하고 있는 것을 간접적으로 비판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미*소를 한나라에, 민족진영을 고구려에 좌익진영을 낙랑에 비유했던 것이다. 따라서 외세 특히 소련 공화주의 세력을 물리치고 통일을 이룰 때까지 싸워야 한다고 외친 작품이 바로 「자명고」였다.
그만큼 우익민족진영 연극인들도 어쩔 수 없이 좌익과 대항하는 목적극으로 기울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와 같은 극협의 계몽주의 연극은 프로극단들에 비해 대중의 호응을 받았고, 일주일 공연에 3만여 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에 좌익신문들은 극협 공연 때마다 맹공의 필봉을 휘둘렀고, 우익 민족진영 문필인들 중의 상당수는 좌익진영의 보복이 두려워 방관만 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극협은 꾸준히 연극운동을 전개해 갔다.31)
극협은 47년 한 해만도 전기 두 작품 외에 「마의태자」, 「은하수」 등 유치진의 시대극과 번역극으로서 「목격자」 등 7회의 공연을 갖는 활발성도 보였다. 그리고 군정은 군정대로 우익민족 진영 연극을 북돋우려고 노력했는데, 그것이 다름 아닌 문교부 주최의 전국연극경연대회였다. 극협은 헤이워드부처 작 「돈기」를 갖고 참가하여 단체상을 받기도 했다.
정부 당국의 노력에 발맞춰 우익진영 연극인들도 단합되고 적극적인 연극운동을 펴나갔는데 그것이 바로 47년 10월 29일의 전국연극예술협회의 결성이었다. 민족진영의 전 연극인이 단합하여 조직한 전국연극예술협회의 강령은 첫째, 민주주의 원칙과 창조적 자유를 확보한다. 둘째, 일절의 사대사상을 배격한다. 셋째, 순수연극문화를 수립한다 넷째, 상업주의 연극을 지양한다 등이었다. 유치진을 이사장으로 한 이 전국연극예술협회는 프로연극동맹에 대항하는 우익진영 연극인의 총집결체로서 곧 한국무대예술원으로 개칭되었고, 산하에 들어온 극단은 극협을 비롯해서 12개 단체였다. 그런데 12개 극단들은 극협을 제외하고는 거의가 상업극단들이었다.
프로연극의 사양기에 화려한 기치를 내걸고 등장한 극협은 프로극 대신에 이번에는 경제불황과 미국 영화, 상업극 범람으로 고전했고, 48년에 들어서는 군정 당국의 극장입장에 10할 인상법령에 부딪쳐 빈사의 지경에 빠졌다. 물론 이는 극협에만 해당된 것이 아니고 전 연극계를 강타한 악법이었다. 48년 5월 22일자로 세율개정법이 공포되자마자 「극단이 해산을 하고 지방에 나갔던 단체가 여관 식대를 못 갚아서 억류를 당하고 극장이 한산하며 인건비조차 자충키 곤란하여 바야흐로 독립전야의 연극문화계는 침락퇴폐, 종식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32) 10할 입장세율 인상 이후 연극관객 수는 거의 반수로 격감했다. 따라서 주요한 대극장들은 극단에 대관을 않고 영화에만 대여하는 사태가 벌어져서 극단들은 자연 변두리 작은 극장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극장가는 영화가로 바뀌었다. 그래서 연극공연 회수가 영화상영 회수의 절반밖에 안되었다 가뜩이나 좌익의 목적극에 시달렸던 취약한 극단들이 급속도로 침락해갔다.
유치진도 「해방 4년의 문화업적」이란 글에서 연극사양의 세 가지 주요 이유를 미군정의 영화 검열법, 노동법, 10할 세인상법 등의 실책을 들었는데 영화 검열법은 부도덕한 미국 영화의 범람을 가져왔고, 노동법은 여성연기자 기근을, 그리고 10할 세인상법은 연극을 경제적으로 파멸시켰다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전략)(3) 입장세 10할‥‥‥마지막 악법은 금년 6월 1일부터 발효한 법령 제193호다. 이 법령은 전대미문의 악법으로서 유흥세 3할에 대하여 입장세를 10할로 인상했다. 기생을 끼고 노는 모리간상배의 유흥에는 3할이요, 가난한 대중의 유일한 오락물이자 민족예술의 전당인 극장에는 10할이란 결국 모리간상배를 양성하고 문화를 압박하자는 수작밖에 안 된다. 이 인상에 대한 재무 당국자의 이유는 이렇다. 즉, 유흥세는 훈련이 부족하여 탈세가 많고 너희들은 세금을 잘 납부하기 때문에 입장수는 일시에 대폭적으로 7할이 격감되어 3할밖엔 동원되지 않은 현상으로 무대예술계는 완전히 경제적으로 멸망부하고 말았다. 예술가는 거리에서 잠자게 되고 비예술적 10원까지 악덕흥행만이 거리를 횡행하게 되었다. 종이 한 장의 법령이 한 문구가 일조에 예술계를 암흑화 할 수 있다.33)
이에 한국무대예술원은 즉각 회의를 열고 군정 당국에 세율개정법령 철회에 대한 건의서를 내고,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에는 6월 1일부터 일체의 예술활동을 중지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발표했다.
그러나 군정 당국에서는 이를 묵살했고, 한국무대예술원은 얼마동안 강력 대처를 하는 듯하다가 정부수립 후에 본격적으로 추진하기로 하고 흐지부지 했다. 그리하여 무대예술원의 무기력이 지적되기도 했다.
요는 무대예술원의 정체의 해부와 실천의 검토를 이 날 대회조상에 올리지 않는 한 무의미하다. 간판만을 용두로 하고 국책에 순응하고 당국에 협력한다는 미명하에 무대예술원은 한낱 허망한 몇 개인의 수롱(手籠)에서 놀았다는 것을 우리는 보고 있다. 10할 가혹한 과세에도 꿋꿋이 싸워보지 못한 무대예술원이 아닌가 지금도 엄연한 혹세아래 잔존극단의 운명이 풍전에 있고 허다한 무대예술원들이 생계극경에서 잔명을 유지에도 어려운 이 판국을 정시 하였는가 ?34)
이상과 같은 비판에도 무대예술원은 어쩔 수 없었다. 무대예술원은 극협을 뒷받침하면서 5*10 총선을 향한 연극 브나로드운동에 나서는 것으로 방향을 돌렸다. 즉 무대예술원은 4월에 산하의 극단들로 총선거 선전문화계몽대를 조직하며 전국에 파견했는데, 이들은 선거유세반의 뒤를 따라다니며 「민주주의는 무엇이고 선거란 무엇이며 또 어떻게 하는 것인가」를 계몽하였다. 그리고 정부가 수립된 이듬해 외국의 정부승인을 계기로 전국무대예술인 궐기대회를 열고 민족정신 앙양과 침체일로를 걷고 있는 무대예술진흥을 꾀하고 있다. 이 궐기대회에서 정부 당국에 건의한 사항은 다음과 같다. (1) 입장세 철폐에 관한 건 (2) 외국영화에 관한 건, (3) 문화행정과 공연수속 사무일원화에 관한 건, (4) 무대예술의 질적 향상을 위한 시설에 관한 건 (가) 무대예술인의 자격심사, (나) 무대예술인 양성기관 설치 (다) 무대예술인의 후생시설에 관한 건, (5) 공연자재 수배에 관한 건, (6) 국립극장 기성촉진에 관한 건 등.35)
이러한 무대예술원의 집단적 건의에도 신정부 당국이 속시원한 해결책을 내놓지 않자, 이번에는 연극인 개개인이 5*10 선거 때의 연극인의 공로까지 들먹이며 새로운 연극정책을 요구했다. 안석주의 다음 글은 그 대표적인 것이라 볼 수 있다.
과정시에 입장세율 문제로 여론이 비등했고, 이 고율의 입장세로 말미암아 연극단체의 대격감과 잔존단체의 저속화와 신흥하려든 영화제작이 동결상태에 빠지는 등, 이 현저한 입장세율의 영향이 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개선되지 않아 문화의 기초가 흔들렸을 뿐이다. 작년 5*10 선거에 연극단체의 대출동으로 얼마나 선전공작에 큰 성과를 보았는가는 지금 기억도 새롭거니와 여기에는 과정으로서의 큰 원조가 있었고, 또한 과정의 고율의 입장세 인상으로 그 연극단체들이 경영난으로 해체를 하고 몇 단체가 잔명을 이어갈 뿐이다. 이것은 확실한 문화정책이 서지 못한 까닭이요 더 크게 말하면 국내 정세의 혼란으로 정치의 이념이 뚜렷이 자리를 잡지 못한 때의 일일 것이다.(중략) 그러면 장차 민족의 사상통일과 국방정신 고취는 무엇을 가지고 하며 사상전에 있어서 무엇으로 승리를 가져올 것인가‥‥36)
이상과 같은 연극인들의 건의와 요구에도 불구하고 세율개정법령은 쉽게 철폐되지 않았다. 따라서 극단들은 계속 불황의 늪 속을 헤맸고, 저속한 상업극만이 미국 영화와 함께 그런 대로 현상을 유지하는 듯했다. 그리고 리얼리즘을 기조로 한 본격적인 신극단체들의 연극의 질저하도 문제였다. 레퍼토리의 빈곤에도 문제가 있었지만 연극의 리얼리티는 더욱 큰 문제가 되었다. 가령 본격 신극단체의 대표적인 극협의 경우만 하더라도 유치진의 시대극 일변도가 아니면 일제시대에 극연이 공연했던 진부한 번역극이거나 대중적인 작품을 다반사로 무대에 올렸던 것이다.
극협이 서울시 문화상수상 겸 제16회 공연으로 무대에 올린 「도란기 」에 대한 다음과 같은 혹평은 그 점을 정확히 지적한 것이었다.
대극협이 왜 이러한 레퍼토리를 선정했는지 유감이다. 이 도란기 공연이 예술상수상 기념공연이라는 데 더욱 유감이다. 확실히 레퍼토리의 빈곤을 말하는 것이며 극협 앞길이 막혀 가는 걸 설명하는 것이다. 원래 극협은 우리 민족이 전심한 연극을 수립하려는 의도 밑에서 조직한 극예술연구회의 전통을 계승한 신극단체로서 첫 출발이 장하였으며, 또 기개가 고귀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극협의 이론적 경제적 지도는 유치진의 인격에 의존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특히 레퍼토리에 있어서는 유치진씨 작품이 거의 전체라 하기도 과언이 아닐 만큼 전용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협 공연은 달이 가고 해가 갈수록 부진하여 가는 건 그 원인이 하처(何處)에 있을까. 나는 이 부진상태를 이렇게 평하고 싶다. 원래 극협의 목적은 풍부한 해외 작품을 분개함과 동시에 그 경험을 발판 삼아 위대한 민족창작을 창조함과 동시에 진정한 민족연극을 수립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유치진씨의 일개인의 작품만에 의존하고 기타 작품에는 일절 방관주의로 임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왜 그런고 하면 유치진씨 자신이 신이 아닌 이상 그렇게 자주 「춘향전」이니 「마의태자」같은 우수한 작품만 연발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극협 동인이 너무 이 양반만 의존하면 「별」같은 돈벌이 작품을 또 쓰게 될 것이다. 이런 태도를 즉시 고치지 않으면 극협 자체가 고독한 처지에 빠질 것이며, 대작가 유치진씨의 예술도 땅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중략) 이 「도란기」공연에 획기적인 무대를 상상하였으나, 거의 실망하였으며 더구나 소시민을 위로하는 야담적인 공연태도에 불유쾌하였다.37)
이상의 평은 극단 극협의 취약점과 속화를 지적한 것이지만 본격 신극을 지향한다는 극단들과 연극인들에게 여러 가지 의미를 던지는 글이었다. 신극단체들의 가장 큰 결함은 레퍼토리 선정보다도 리얼리티를 상실한 점이었다. 이 진지한 리얼리즘 정신의 상실이 연극을 경박하게 만들었고, 대중과의 영합도 가져오게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 점에 대해서 김진수는 48년을 정리하는 중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던 것이다.
양에 있어서 빈약했다는 사실을 느끼는 동시에 질에 있어서 저급했다는 사실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예술성보다는 흥행성을, 순수보다는 비속성을 따른 조선극계는 작년같이 흥행성의 수난을 당한 기록은 없을 것이다. 무엇이 그렇게 했는가 ? 두말할 것도 없이 작가와 배우와 관객의 삼자가 연대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리얼리즘을 상실한 작가의 안이한 작품을 지성이 없는 배우의 저속한 연기를 통하여 보는 관중의 취미성이 비속해지지 않을 수 있을까 ? 조선연극을 구할 길은 오직 리얼리즘과 지성이라는 것을 부언해 둔다.38)
그런데 그 당시 우익진영 연극인들은 의식적으로 리얼리즘을 회피했다. 왜냐하면 프로연극인들이 리얼리즘을 열렬히 주창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익진영 연극인들의 고의적인 리얼리즘 기피는 프로극에 대한 반발에서였다. 예컨대, 유치진 작 「별」 공연에서 여주인을 구슬아기의 화려한 남장같은 것이 좋은 본보기였다고 하겠다.39) 물론 좌익진영의 리얼리즘이란 설익은 쇼시얼 리얼리즘이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프로극에 대한 반항으로서의 리얼리즘극 회피라는 궤도수정은 리얼리즘을 기본자세로 했던 당초 우익민족진영 연극인들이 자기 모순에 빠진 경우로서 리얼리즘의 착근을 스스로 막은 결과가 되었으므로 그의 토착화가 안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리얼리즘 회피행위는 연극의 기반을 그만큼 취약하게 만든 경우로 한국 연극의 답보 내지 후퇴를 가져오게 한 것이다. 이처럼 좌익이 몰락한 후에도 프로극의 후유증은 그만큼 컸었다. 우리나라 연극이 안고 있는 정치성의 경도가 해방직후에는 이데올로기의 분열과 겹쳐져서 더욱 심화되었고, 따라서 작품도 경직된 애국적 주제의 계몽극과 시대극이 많았던 것이다. 그러나 극단 극협을 선봉장으로 한 우익민족진영 연극도 50년 초 국립극장 설치를 계기로 해서 조금씩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극협도 49년말 오영진의 「도라지 공주」를 제19회 공연으로 국립극장에 흡수되었던 것이다. 리얼리즘을 정착시키지 못한 채 새 시대의 막을 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국립극장 설립과 함께 좌우익 갈등의 상처를 씻고 안정권내에 들어서는 듯하던 오소독스한 민족극도 50년 6월 25일 북괴의 남침으로 다시 좌초되고 말았다.
상업주의 연극의 절정
이상은 해방직후의 연극상황을 주로 정통극을 중심으로 하고 또 이념적 갈등과 이별이라는 측면에서 다루어 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념 연극 못지 않게 상업주의 연극 또한 전성기를 이룬 시기이기도 하다. 상업극도 물론 신파극이 주류를 이루었지만 1920년 말 신파극의 막간에서 파생된 악극 역시 하나의 장르로서 번성기를 맞기도 했다. 즉 1946년 1월에 창립된 청춘극장과 황금좌가 양대 신파극단으로 중앙의 극장가를 석권함으로써 대중을 사로잡았다. 이들은 서울이 대표적인 극장들에서 대체로 동양극장을 중심으로 공연되었던 신파극본을 재탕하거나 아니면 김춘광, 함광현, 이서구, 장정희 등이 쓴 신작을 주로 무대에 올렸다. 악(가)극 분야도 대단한 활기를 띠었는데 그것도 신파극처럼 역시 정치, 사회, 문화의 혼란을 틈타서 번성한 것이었다. 극작가 김종수가 당시의 상업주의 연극에 대하여 「해방을 만난 조선연극이 어째서 진부하기 짝이 없고 비속의 길만 걷고 있는가 ? 물론 그 책임은 전 연극인에게 있고 극단, 연극행동에 기인했다고 할 수 있지만 그밖에 경제적 조건, 정치적 조건, 사상적 조건 등등…… 거기에 또 한 가지 무의식 대중의 무비판적인 연극 감상의 경향을 들 수 있다. 최근 기고만장하게 득세하기 시작한 신파는 조선 연극계에 있어서 원자탄 이상의 세력을 가지고 극장을 압도하고 연극인을 사로잡는다. 연극인도 먹어야 산다는 조선연극인의 숙명적 고통이 조선연극을 비속한 신극의 함정으로 끌고 들어간다는 통탄할 사실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백민 통권 제3권 제2호)라고 쓴 것은 해방직후 대중연극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지적한 것이다.
그만큼 해방직후는 저질 상업주의고 절정을 이룬 것이다. 이처럼 해방직후 5년여 동안은 우리 근대극이 하나의 좌표를 찾아 몸부림친 시기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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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해랑(李海浪): 분열과 위축(萎縮)의 연극계 「민성(民聲)」 1949년 2월호
2) 안영일(安英一): 「예술연감(藝術年鑑)」 1947년도판 참조.
3) 「해일신보(海日申報)」 1948년 9월 19일자 기사 참조.
4) 박진(朴珍): 세세년년(歲歲年年)(1966) p.200 「당시는 극단도 모두 좌익적인 연극을 하지 않으면 극단 행세를 하지 못했다」
5) 신고송(申鼓頌): 연극운동과 그 조직, 「인민(人民)」 창간호.
6) 일기자(一記者): 프로예술진영의 재건, 「건설(建設)」, 제1권, 제1호 참조.
7) 김광주(金光洲): 극장예술의 고민(苦悶)-연극운동의 몇 가지 당면과제, 「문화(文化)」 통 권 제3호
8) 유치진(柳致眞): 동랑자서전(東朗自斲傳)(1975) p.215.
9) 이해랑(李海浪): 극단(劇團) 「신협(新協)」-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2) 「중앙일보」 1978. 11, 2.
10) 김영수(金永壽): 3*1 연극대회의 성과, 「해일신보(海日申報)」 1946. 4. 1.
11) 이재현(李載玄): 수난의 민족연극 「민성(民聲)」 1948년 7월호.
12) 「최근 시내 각종 흥행장에는 오락을 칭탁하고 정치선전을 일삼는 흥행업자가 있는 듯 한데, 민중의 휴식을 목적으로 하는 이외 정치나 선전을 일삼아 치안을 교란시킨 자는 엄벌에 처함」(「경향신문」 1947. 2. 3 기사)
13) 「경향신문」 1947. 2. 3 기사 참조.
14) 「경향신문」 1947. 2. 3.
15) 「경향신문」 1947. 3. 25 기사
16) 이태우(李台雨): 신파와 사극의 유행 「경향신문」 1946. 12. 12.
17) 홍효민(洪曉民): 최근창작개평(最近創作槪評) 「조선일보」 1945. 12. 18∼27.
18) 허 집(許 執): 연극운동의 편린(片鱗) 「경향신문」 1946. 12. 24.
19) 「조선일보」 1947. 2. 2.
20) 김태진(金台鎭): 연극운동의 방향전환, 「경향신문」 1946. 11. 7.
21) 김태진(金台鎭): 연극의 위기, 「대조(大潮)」 제1권 제3호.
22) 이재현(李載玄): 전게문
23) 졸 고(拙 稿): 북한의 무대예술(舞臺藝術) 「북한문화론」(북한연구소 1978).
24) 서항석(徐恒錫): 한국예술지(韓國藝術誌) 1권(1966) p.467.
25) 이광래(李光來): 현대의 희곡 「한국예술총람」(1964) p.372.
26) 「동아일보」 1946. 6. 12.
27) 서항석(徐恒錫): 연극과 연극운동, 「경향신문」 1946. 11. 7.
28) 「경향신문」 1946. 10. 8.
29) 박노춘(朴魯春): 한국신연극오십년사략(韓國新演劇五十年史略), 신흥대학교 창립 십주년 기념논문집 1959.
30) 이해랑(李海浪) 증언, 1968. 12. 2.
31) 유치진(柳致眞): 신극사개관(新劇史槪觀), 「예술원보(藝術院報)」 제3호 p.62.
32) 「경향신문」 1948. 7. 27.
33) 유치진(柳致眞): 해방 4년의 문화업적, 「경향신문」 1948. 8. 8.
34) 「경향신문」 1949. 1. 4.
35) 「조선일보」 1949. 1. 29.
36) 안석주(安碩柱): 입장세율과 영향 「경향신문」 1949. 4. 2.
37) K: 「도난기(桃蘭記)」-극협공연평 「경향신문」 1949. 4. 2.
38) 김진수(金鎭壽): 1948년 문화계 회고-리얼리즘과 지성의 상실 「경향신문」 1948. 12. 17.
39) 이해랑(李海浪) 증언, 1968. 11.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