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시론/한국문화의 예술적 이해를 위한 시론 (Ⅱ)

예술인류학의 신화적 원형과 사례 연구




박정진 /

한양대 국문과 졸업. 영남대 대학원 문화인류학과 박사과정 수료.

한양대, 단국대, 서울교대 강사 지냄.

현재 경향신문 문화부 차장

지난호에 필자는 예술인류학을 예술(을 대상으로 한)인류학과 예술(적 접근의) 인류학으로 나누었다. 전자는 서구적 특수성의 보편성으로서가 아닌, 비서구민족의 민족예술의 특수성을 토대로 한 새로운 보편성의 추구를 목적으로 하고 있고 후자는 인간의 생활이나 행위 자체를 예술로 이해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전자의 경우 민족적 상징(또는 신화적 원형), 나아가서 세계적 보편성을, 즉 세계의 보편적 상징을 찾는 것이고 후자의 경우 생활이나 행위를 「상징-의례」의 틀로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한마디로 문화 속에서 상징(의례)을 발견하고 이해하는 것이 예술인류학인 셈이다.

이번 호에는 예술작품들 대상으로 한 인류학의 한 예로 첫째,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의 신화학」을 논하는 한편 인간의 생활이나 행위를 예술적으로 보는 인류학의 한 예로 둘째, 「커뮤니케이션 인류학의 신화학」을 논하고자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위의 두 예는 모두 종국적으로 커뮤니케이션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보여주는 것인데 하나는 디자인의 상징(원형)을, 다른 하나는 행위의 상징(원형)을 탐색함으로써 그것을 달성한다. 둘다 한국문화를 그 대상으로 함은 물론이다.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의 신화학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개념은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상징을 통해 의미를 교환하는 것이다. 필자는 문화의 개념논의에서 그것이 가시적이든 비가시적이든, 유형이든 무형이든 의미가 궁극적인 핵심임을 이야기한 바 있다. 결국 의미가 어떠한 상징으로 커뮤니케이트 되는가를 따지는 것이다.

한국 디자인에서 어떻게 신화적 상징을 추출해 낼 수 있을까? 그 신화적 상징은 무엇일까?

디자인은 시각예술이다. 그러나 인간의 지각이미지sense image는 몸 속에서 하나로 통합되는 매커니즘을 갖고 있다. 따라서 디자인의 원형을 발견하는 것은 동시에 모든 예술의 원형을 발견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인간은 또 개인적이면서도 집단적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 개개인은 각기 개성과 유전의 혼합을 문명적인 경험으로써 가지게 된다. 그러면서도 하나의 문화가 성장하는 전체경험은 개인적으로 좌우된다. 인간은 문화를 창조하지만 똑같이 문화가 인간을 만들고 있다. 인간과 문화는 변증법적인 역동관계에 있다.

이러한 변증법적인 역동관계의 한복판에 있는, 또는 그러한 역동관계의 힌국적 원형이 바로 신화적 원형이다.

과연 한국의 예술적(미적) 원형은 무엇일까? 한국을 논하기 전에 필자는 서구의 예술적 원형을 균형, 또는 대칭(대립)으로 보고 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조각·회화의 균형감과 조형미(특히 리얼리즘의 조각)는 서구 예술의 원형을 보여준다. 기하학적 공간구성과 원근법은 그 대표적인 것이다.

양호일(梁浩一)은 그의 평론집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의 신화학」 (1988)에서 한국의 원형적 심상을 한국의 옹기문양의 방사선향 만다라mandalas에서 찾았다.

또 티베트의 얀트라Yantra 만다라(Tantra밀교의 상징), 그리고 만다라의 동심원과 방사선 대칭이 동질적인 것으로 보았다.

양호일은 또 위의 책에서 결론적으로 「인간과 사회는 원이라는 시각적 개념의 자연 속에서 양 핵이 서로 독립·침투하고자 하는 태극Tao의 회전 속에 진행된다」고 했다.

필자는 양호일의 원형적 심상의 일반화에 근본적으로 동의를 하지만 티베트(필자는 티베트나 인도 등을 동양으로 보기 보다는 동아시아를 기준으로 볼 때 서구적이라고 본다. 정확히 말하자면 동서문화의 접점이라고 본다.)의 만다라와 동양(동아시아)의 태극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 차이를 밝히는 것이 만다라와 태극을 원사상으로 일반화하는 것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본다. 예술인류학은 민족심성의 지역적 특수성을 우선하고 그 다음 일반화를 시도하기 때문이다. 양호일은 동서양의 미적 원형의 차이점 보다는 일반화에 더 치중한 탓으로 예컨대 만다라의 원(圖)과 태극(太極)의 원이 어떻게 다른가를 따지는 데 소홀한 감이 없지 않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동서양은 같은 원을 추구하지만 그 이면에는 차이가 있다고 보여진다. 서구는 직선의 연장으로써 원을 추구하는데 반해 동양(동아시아)은 곡선의 표현으로써 원을 추구하고 있다. 이 점이 중요하다.

이것은 만다라와 태극의 차이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도표1>을 보자.

만다라는 동심원과 방사선 대칭Concentric and Radial symmetry을 디자인의 기본 패턴으로 하고 있다.

<도표 1>


만다라

태극

보편성

원(圓)

원(圓)

특수성


동심원

기하학적공간

대칭

직선, 곡선

양극

소용들이공간

비대칭

곡선


또 만다라의 원 속에는 기하학적인 수직·수평의 구도가 자리잡고 있다. 다시 말하면 삼각·사각 등 각종 직선의 만남으로 이루어지는 구도를 포함하고 있다.

이밖에도 만다라의 동심원은 계속적으로 같은 모양의 기하학적 구도로 세분(미분)된다.

한마디로 말하면 만다라에서는 서구의 기하학적 심상(직선)과 동양의 원형적 심상(곡선)이 만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에 비해 태극은 어떤가? 태극은 원을 추구하지만 철저히 직선을 배제할 뿐 아니라 원의 중심보다는 양극과 비대칭을, 그리고 방사선과 같이 외부로 확대되는 것이라기 보다는 소용돌이와 같이 안으로 감싸는 모양을 보인다.

한마디로 말하면 태극은 철저히 곡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만다라와 태극의 차이는, 만다라에는 어딘가 서구적 냄새가 난다는 점이다. 서구의 원형적 심상은하나(일)를 강조하고 동양(동아시아)은 하나 속에 둘(이)을 내포하고 있는 점이 다르다. 하나를 결정론적으로 주장하는 입장에서의 둘은 매우 대립적 경향을 나타내고 따라서 오히려 하나(I)를 실현하지 못함으로써 하나(I)는 영원한 이상(理想)에 머물게 된다. 결국 그러한 문화(문명)의 인간은 끊임없이 새로운 하나를 찾아나서는 불안정한 입장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하나(I) 속에 둘(Ⅱ)을 포함하는 입장에서의 하나는 결정론적이 아니며 둘이 대립보다는 상호 보완적인 경향을 나타내고 따라서 끊임없이 하나(I)를 찾아 헤매기 보다는 어떠한 도정(途程)에서도 쉽게 하나를 찾고 만족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이미 자족한, 안정된 입장이라 할 수 있다.

이상을 우주관에 비교하면 서구의 경우 하늘과 땅을 대립적으로, 동양(한국)의 경우 하늘과 땅을 상호 보완적으로 보는것에 견줄 수 있다.

태극은 비대칭의 균형이다. 또는 역동적 균형잡기이다. 대칭의 균형은 외부적으로 새로운 균형을 추구하지만 역동적 균형잡기(비대칭의 균형)는 내부적으로 균형을 이미 확보하고 있다. 이것은 동(動)과 정(靜)의 역설적 양상이다.

우리는 생활주변에서 태극무의와 그것의 변형인 소용돌이 문양을 흔히 볼 수 있다.

이러한 태극은 우리 예술의 비기하학적 태도나 상징주의와 뿌리를 같이한다. 예컨대 미술에서 원근법의 생략과 과감한 이미지의 단순화 특히 대상을 하나로 녹여 버리는 동적 표현력도 마찬가지다.

음악·무용에선 이러한 우리 민족의 미적 원형이 더욱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우리의 전통 고전음악인 정악(正樂)에 나타난 장려미(壯麗美), 정관미(靜觀美), 유장미(悠長美), 노련미(老練美), 한아미(聞雅美), 순응미(順應美) 등은 바로 태극의 원형과 통한다.

정악은 기교보다는 힘의 예술이고 살아 움직이는 생명력의 자연스런 분출이다. 또 공(空)이나 무(無)를 바탕으로 초세간적(超世間的) 성격을 보인다. 뵈티우스Bothius의 분류법에 따르면 우주음악Music of Universe, Musica mundana에 가깝다.

정악은 코드chord라고 하는 수직적 균제를 통해서 표현하는 서구식 복선률이 아니고 제멋대로 개성을 최대한으로 인정하면서 단지 묵시적인 감성으로 협화경을 만들어 낸다. 전통음악의 선율의 특징이 강유(强柔)의 농담(dynamic shading 濃淡) 을 보이는 것도 태극의 원형(역동적 이분법)과 무관하지 않다.

우리의 전통음악은 호흡의 주기에, 서양의 음악이 심장의 박동에 기준을 두었다는 주장도 있다.

정악에는 선(線)적인 의식이 저변에 깔려있다. 또 공간개념까지 시간적으로 파악하려는 심층의식이 숨어있다.

결론적으로 자연스럽게 우주 전체와 하나가 되는 경지, 자연에 순응하면서 초월하는 의식이 깔려있다.

이같은 우리 전통음악의 특정은 전통 가악(歌樂)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더우기 우리 민족의 예술적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판소리와 산조(散詞)는 태극의 신화적 원형을 더욱 잘 증명해 주고 있다.

선(線), 역동성(力動性), 무한연속(無限連續), 멋으로 요약되는 판소리와 산조.

판소리와 산조는 철저히 선의 미를 추구한다. 일반적인 극가(劇歌)는 여러 사람의 배역과 기악반주로 입체성을 보이지만 판소리는 한 사람이 단순히 북 하나만을 반주로 일관한다. 산조도 화음은 없으며 전 곡이 하나의 음선으로 이루어지고있다.

판소리가 「천구성」을, 산조가 「실한소리」를 내는 것을 추구하는 것은 역동(力動)의 미, 즉 힘을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음악의 역동성은 「조이는 것」과 「푸는 것」의 대립, 즉 긴장과 이완의 반복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것은 하모니보다 리듬에 우선하는 우리 음악의 특징을 단적으로 나타낸다.

한편 굿음악에서 보여주는 현장성과 대동성(大同性), 그리고 신비성은 자연스러움과 초월성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이밖에도 궁중무용이 입체적인 율동미가 아니라 평면적인 선에 치중하여 동(動) 속에서 정(靜), 정속에서 동을 살려내는 점이라든지 민속무용이 무진법으로 섬세한 발동작을 중심으로(손발의 입체성보다)하고 있으며 집단무용의 경우 대체로 원형진행을 하고 있음도 주의해 볼 만하다.

우리 민족의 예술은 확실히 공간성(입체성)보다는 시간성, 기교보다는 힘의 자연스러운 표출, 그리고 미(美)의식의 표현뿐 아니라 윤리성(도덕성)과 종교성(초월성)을 동시에 추구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예술을 사회적인 차원 및 초자연적인 세계와 통합적으로 바라보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우리민족의 미학(美學)은 풍류도(風流道)에서 잘 드러난다.

풍류는 그 상위(上位)에 있어서는 윤리·종교와 연결되고 하위(下位)에 있어서는 관능적인 육욕(肉欲)과 결부된다.

이것은 초월적 정관성과 동시에 유락향수(遊樂享受)의 이중적 태도를 동시에 가질 수 있음을 말한다. 나아가서 풍류의 핵심은 양자를 중용적으로 취하는 것인데 이것 자체가 이미 미적인 태도로 사물을 보는 우리 민족의 사고원형을 웅변하고 있다.

풍류는 미적·예술적 가치를 중심으로한 전체적인 정신적 가치이다. 특히 이같은 가치가 궁극적으로 이상적 인간과 국가의 수립을 위한 미적 실천(美的 寶踐)의 의지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유불선(濡佛仙) 삼 교를 근간으로 하는 풍류도는 한국,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에서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이념이면서도 세 나라가 각기 다른 특성을 보이고 있다.

중국은 은일(隱逸) 사상적 성격, 일본은 감각주의적 성격을 보이는데 반해 한국은 실천적 성격을 나타낸다.

바로 그 실천성은 인간의 신체와 긴밀하게 연결되는 것인데 신체의 수련에서 출발하여 미적 가치를 실현하는 것, 그것은 서양의 이성(理性)주의, 기하학 정신(입체주의, 형식주의, 자연과학주의)과 달리 감정(感情)을 중시하면서 영육(靈肉) 일체라는 전체미(全體美)를 추구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예술인류학이 서양학문의 「이론-실천」theoria-praxis의 이분법적 틀을 무시하고 「상징-의례」의 일원적 틀을 주장하는 것도 언어와 신체를 통합적으로 보는 위의 전체미(全體美)의 추구와 통한다. 서구예술의 이성-입체주의는 하나oneness를 추구하지만 유클리드 기하학적 공간개념(분할)에 의해 그것을 실현하려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하나oneness의 실현에 실패한다. 따라서 정신분열적 상태를 노출한다. 아마도 서구(서방)는 기하학적 문양(직선), 인도·티베트 등 중동(중방)은 만다라(직선과 곡선), 한국·중국·일본등 동아시아(동방)는 태극(곡선)을 디자인(미술, 예술)의 신화적 원형으로 갖고 있는지 모른다.

커뮤니케이션 인류학의 신화학

인간의 생활이나 행위를 미학이나 예술학의 대상으로 다루는 것은 예술사회학에서 많이 행해왔다. 필자는 앞에서 밝혔듯이 「상징-의례」의 틀로 인간의 행위를 분석·이해하는 것을 커뮤니케이션 인류학의 신화학이라 규정했다.

이것은 다름아닌 축제를 보듯이 인간의 행위를 보는 것을 말한다.

사실 상징세계나 의례Ritual·축제Festival 세계에 대한 연구는 지금까지 인류학을 비롯 인문사회과학에서 폭넓게 다루어져 왔다. 민속·민족지나 고대역사문헌, 그리고 종교학이나 신학에서도 깊은 관심을 갖고 다루어 온 주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상징세계에 대한 철학적인 논의는 조사·연구보다는 등한시되어 온 감이 없지 않다. 이러한 사정 속에서도 미학이나 예술철학에 종사하는 쪽에서 이 분야에 대한 천착이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인류학쪽에서는 주로 정치·사회인류학이나 신화학, 또는 심리인류학에서 원주민 사회primitive society의 현지·조사연구를 통해 관심을 보여왔다. 프로이드, C.G.융 등 정신분석학쪽에서의 연구성과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상징을 연구하면서도 상징 자체의 성격에 대한 철학적 논의는 상징이 내포하고 있는 양가성 또는 다기성(多價性), 애매모호함ambiguity으로 인해 논리적 설명의 어려움에 봉착해 왔다. 심지어 역설적인paradoxical 상황에 연구자들은 학문적인 노력을 회의하기도 했다.

이러한 연구현상들은 서양의 학문에 대한 근본적인 잘못된 개념규정에도 문제가 있지만 그 보다는 상징적 현상, 예컨대 의례, 축제 자체의 역동성dynamics에 기인한다. 쉽게 말하자면 도대체 종잡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현재까지의 업적으로 볼 때는 상징은 적어도 부분과 부분의 경계(境界)선상에 있거나 부분이 동시에 전체와 관련을 맺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전자는 경계가 분명하고 어느 쪽이냐가 분명해야 하는 언어적인 것, 예컨대 개념concept이나 계층·계급, 자연과 인간의 경계 그리고 자연계 내부에서의 긱종 분류체계에서 소속이 확실해야 하는 것 등, 보다 확실함이 요구되는 것과는 상반되는 위치에 있다. 후자는 또한 부분과 전체가 동시에 존재being하고 상호작용해야 하는 말하자면 부분의 합이 전체가 아닌, 그러면서도 부분에 전체가 들어있는 원천적으로 모순된 조건들에서 파생하는 문제이다. 이상을 좀더 쉽게 말하면 하나(1)인가 둘(2)인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비롯된다.

이같은 상황은 화엄경(華嚴經)에 나오는 「일체일즉(一切一卽) 일즉일체 (一卽一體)」 (전체는 부분이요 부분은 전체다)라는 구절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상징세계는 연역법이나 귀납법과 같은 논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더우기 모순법에 의해 진리여부(모순이기 때문에 진리가 아니다)를 판단하는 게 아니라 모순·역설을 적극적으로 수용, 오히려 진리를 모순법으로 증명하는(모순이기 때문에 진리이다) 입장이 되지 않으면 그 면모를 밝힐 수 없는 것이 된다.

이것은 흔히 연설discourse의 세계와는 분명히 다른 차원의 세계에 대한 논의이다. 차원이 다른 세계의 논의를 위해(인과성을 찾는 것이 아닌) 서양철학의 경우 변증법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서양의 변증법은 모순적 관계를 극복·해명하는 데는 커다란 도움이 못 된다는 것이 이미 밝혀졌다. 변증법적 진화론의 경우도 진화(발전)의 과정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의 설명력을 가졌지만 모순관계 자체가 세계의 무궁한 생성becoming 또는 끝없는 생산(일거리를 장만하는 것)의 근본이치, 밑바탕이 된다는 사실을 밝히지 못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모순관계는 근본적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모순의 재생산-, 역동적으로 상호대립되는 것이 세계의 본래적인 모습이라는 것, 그리고 대립하면서도 하나라는 것, 이것이 다원다층적으로 있다는 것을 서양의 변증법은 너무 단순화시키거나 진화론으로 해결하려는 데에 한계가 있다.

변증법이나 변증법적 진화론은 이 다원다층적 구조를 마치 하나의 층계로 착각하여 열심히 오르내리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나아가서 변증법은 그러한 세계의 구조 자체가 역동적으로 변하고 있는 것을 모른다. 단지 위에서 언급된 구조(층계)를 오르내린 흔적인 역사(시간)에 매여있다. 심지어 유물사관historical materialism에서도 드러났듯이 구조를 시간 속에 속박하여 파악하고는 구조의 혁명(계급투쟁)을 주장하고 있을 정도로 한심하다(너무 결정론에 빠져있다는 뜻이다) 이것이 사회과학이라는 이름의 억지이다. 그러면서도 마르크시즘은 인간해방을 선언하는 자가당착에 빠져있다.

확실히 인간은 사회라는 조건 속에 살아가지만 조건이 인간의 자유를 완전히 박탈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인간은 자유의 부르짖음을 통해 결정화되어 가는 사회조건(계층·계급·사회적 지위)을 타파하고 새로운 구조(구성물)를 만들며 해방감과 함께 끝내 신(神)의 세계에 도달하고자 한다.

상징은 굳어진 구조hard structure를 타파하고 본래의 역동적 구조soft structure로 돌려놓는 끝없는 「자유와 해방의 작업」이다.

논의가 잠시 다소 빗나갔지만 이 글은 인간의 「정치성이나 신화재생산」에 대한 논의를 서양의 구조주의와 동양의 음양사상(철학)을 토대로 비교적 관점에서 진행하면서 그 매커니즘을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인간은 왜 상징과 의례적 행위를 할까? 왜 그것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가?

앞에서도 잠간 언급했지만 서양에서 이 분야에 대한 철학적 논의는 주로 미학이나 신학적인 범주·관점(분과학문의 의미에서가 아니라 전반적인 특성에서 볼 때)에서 이야기되어 왔고 그것은 대칭적 사고 혹은 초월적인 범주로 취급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정치학 또는 정치인류학의 논의도 역시 사회적인 영역에 제한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사회적인, 신화적인 다시 말하면 현실적인, 내세적인 차원의 상징적 의례 속에 숨어있는 매커니즘은 무엇일까?

필자는 비대칭의 미학, 나아가서 나선형의 상징구조라고 할수 있는 음양사상(철학), 결코 초월적이고 영원한 것만이 아닌, 더우기 눈에 보이지 않지만 결코 추상적인 것만이 아닌 우주의 본질 즉 기(氣)를 등장시킴으로써 추상적인 것과 구체적인 것, 사물과 신을 비롯, 대립적인apposition의 화해나 상호공존을 보여주고자 한다.

상징, 그것은 또다른 사물처럼 구조와 사물 뒤에 그림자처럼 붙어있는 것이면서 항상 본질적인 것 -- 우주는 끊임없이 역동적으로 변하면서도 변하지 않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을 환기시키는 작용(기능)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상징적 균형잡기는 사물에서 신에 이르기까지 계속되는, 다차원의 균형잡기이다. 음양사상은 상대적 두 범주 사이에 다른 한 범주가 내재되어 있다고 전제함으로써 항상 축소·확대 재생산-- 무(무) 또는 우주(宇宙)-- 을 가능하게 하고 있는 점이 탁월하다고 느껴진다.

사람들은 누구나 법에 의해서 살지만 다른 한편으로 의례를 하며 산다. 더구나 법이 있기 때문에 더욱 의례적 삶을 살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법과 의례의 연속체continuum 선상의 어디엔가에 있다. 단지 그 지점은 매우 유동적이다. 이같은 상황은 실질적으로 오히려 법과 의례가 뒤바뀌는 관점도 허용하는 역설적 세계이다. 법은 결국 반드시 준수되어야 할 까닭이 없다는 점에서 지극히 의례적인 것이며 의례는 반드시 행해져야 할 명분도 없는데 끊임없이 행해진다는 점에서 법과도 같은 것이다. 음양의 세계는 애시당초 선후(先後) 상하(上下) 좌우(左右)가 결정되어 있지 않은 입체적인 것이기 때문에 중용(中庸)이라는 상징적 균형잡기, 또는 자리바꾸기(變換)를 해도 전혀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세계이다. 언제When, 어느 곳Where에서라도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찾을수있는-- 누가Who, 어떻게How, 왜Why를 상관하지 않고-- 세계이다. 다시 말하면 언제나 애인을 부를 수 있는 요술지팡이와 같다. 그러나 음양의 세계에도 배우자를 선택하는안목은 사람의 선택적 안목(차원)에 달려있다. 배우자로 미인을 얻는 것은 결코 쉽지만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법(현실)과 상징(의미)의 세계를 결혼에 비유하면 법은 결혼의 방식(절차)을 우선하고 상징은 배우자를 찾는 행위를 우선한다. 따라서 전자는 사회적 보장이 뒤따르고 후자는 「배우자를 찾는 연습」으로 끝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법 속에 살면서 끊임없이 배우자를 찾고 있다. 심지어 동일한 배우자에게서도 다른 배우자의 모습을 발견하려 한다. 끝내는 법을 바꾸거나 스스로 다른 지역으로 이주를 하는 경우도 있다.

상징은 「자유」와 「배우자 찾기」를 위해 영원히 하나(□) 혹은 둘(□□)의 빈칸을 비워두는, 또는 채우고 비우는 행위이다. 이제 각설하고 이 빈칸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서양의 구조주의에 대한 논의에 들어가자.

구조주의 또는 구조주의철학은 구조언어학에서 태동했다.

구조주의의 등장은 독선적이고 결정론적 이기만 한 서양사람들에게 적어도 동양을 알아 볼 수 있는 눈을 제공해 주었다는 점에서 서양철학사의 일대 전환(이것이야말로 서양철학사에서 가장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해도 손색이 없다)점을 마련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비록 정태적이기는 하지만 우주는 스스로의 체계self-system에 의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체계 속에는 체계를 지탱하는 요소element의 관계망relation (혹은network)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비로소 자연과학에서 인문과학의 독립과 사회과학의 해석학에 길을 터주게 된다. 이것은 한편 자연과학에서도 물리학보다는 생물학, 심리학보다는 정신분석학의 비중을 높이는 것과도 관련을 맺는다. 유기organism의 심층적 기능funtion을 이해하도록 하는 데는 자기완결적 체계self-complete system에 대한 이해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언어야말로 자기완결적 체계의 대표적인 것이었다.

구조언어학의 용어와 분석들, 예컨대 시니피앙(能記, Signifiant), 시니피에(所記, Signifie), 랑그(言語, Langue), 파롤(言辨, Parole), 신태그마틱(順次的, sintagmatic), 패러디그마틱(範型的, Paradigmatic)-- 등은 인문과학의 수학으로 통할 정도로 인문과학적 대상을 설명·분석하는 데 빛나는 공헌을 세웠다.

구조주의는 사회과학에서도 친족체계kinship system 연구를 통해 사회구조연구에 큰 공로를 세운다. 그러나 구조인류학의 사회구조연구는 변화가 거의 없는 원시사회primitive society, 소위 차가운 사회cold society의 구조분석에는 적합했지만 현대복합사회modern comyplex society, 소위 뜨거운 사회hot society에는 그 관점의 정태성으로 인해 설명력이 부족하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논쟁이 있었다. 사르트르와 레비스트로스의 논쟁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여기서 사르트르는 역사적인 입장, 레비스트로스는 신화적인 입장으로 맞서 논쟁은 역사적 타성태(惰性態)와 친족과 신화의 기본구조의 대결양상을 보였다.

오늘날 상징·의례ritual의 관점에서 볼 때는 사르트르나 레비스트로스, 둘 다 결국 서양적 결정론이나 진화론, 정태적 구조분석의 차원에 머무르는 것이었지만 레비스트로스의 경우 훨씬 동양적 발상에 가까웠다고 평가할 수 있다. 레비스트로스의 신화분석은 매우 관념적인 것으로 증명이 불가능 또는 무의미했기 때문에 보다 경험적이고 역동적인 구조분석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것이 구조의 동태적 측면을 해석하는 상징인류학(구조인류학도 상징인류학의 일종이다)의 등장이다.

상징인류학은 기본구조보다는 그 구조를 인간의 마음psycho-mental이 어떻게 재구성하는가를 경험적인 차원에서 보여주는 인류학 분야이다. 여기에 보다 폭넓은 의미의 의례ritual 연구가 주대상이 된다. 예컨대 사회과학의 분야에선 정치행위의 의례적인 연구, 신화학에선 신화의 원형이 어떻게 변환되어 역사적으로 나타나는가를 연구한다.

축제는 확실히 역사와는 상반된 입장에 있다. 그것이 기독교의 형태로 나타나 하나의 훌륭한 축제의 모범이 된 것, 그리고 그것이 서구의 세계제패라는 역사적 맥락(근·현대사적)에서 여타지역에 매우 강력하게 독선적으로 전파되었다는 것을 제외하면 확실히 비역사·무역사적이다. 그것은 또한 기독교적 신학이 아니라 범세계적인 신화(神話)로서, 나아가서 신화의 부활(재생산)로서 특별한 의미와 가치가 있다.

축제는 비역사적이며 신화적이라는 점에서 매우 구조적이고 또한 그것이 자유와 해방, 구원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매우 탈구조적이다. 따라서 축제는 다분히 구조적인 차원에서 출발하는 연구보다는 구조를 능가하는 철학개념에서 출발할 때 제대로 논의될 수 있다.

그 구조를 배제하는 철학개념, 바로 그것이 우리의 전통철학개념인 「기(氣)」 개념임을 독자들은 차차 알게 될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수천 년전부터 구조적 개년인 「이(理)」와 비구조적 개념인 「기(氣)」를 설정함으로써 축제에 관한 한 가장 앞서가는 이론구축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를 바꾸어 말하면 서양이 절대적으로 신봉하고 있는 「이(理)」 개념 외에 우리는 기「(氣)」개념을 더 가졌던 것이고 기「(氣)」라는 개념은 「이(理)」 개념에도 영향을 미쳐 양자(理와 氣)가 매우 역동적으로 상호작용하는 것을 이미 오래전에 가정하고 격렬한 논쟁을 벌였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이(理) 기(氣)논쟁」 「사단칠성(四端七淸) 논쟁」인 것이다.

한국인은 오래전에 세상을 하나의 축제·의례로써 보려는 쪽과 이를 합리적으로 조절할때는 말하자면 「미학(美學)」파와「윤리학(倫理學)」파로 갈라져 논쟁을 벌인 경험이 있다.

필자는 종래 구조적 관점에서 축제를 논하던 「구조학파」를 준수하면서도 이제 의례(축제)에서 일상을 보는 「상징학파」의 한사람으로서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술인류학자) 새로운 사회학적 해석학, 나아가서 「구원의 신화학」을 제시하는 것이 이글의 최대 목적이다.

구조학파의 「언어와 실천」은 상징학파에겐 「상징과 의례」로 표현된다. 즉 구조학파의 언어는 상징학파에겐 상징이 되고 실천은 의례에 불과하다. 또 구조학파의 초점은 언어이고 상징학파의 초점은 의례이다.

이제 이상의 이론적 배경을 토대로 종교의식(예컨대 샤먼의 굿)과 같은 「상징---의례」를 형태분석의 틀로 삼아 연구대상이 된 S결사체 구성원의 형태가 내포하고 있는 상징적 의미 (다원다층의 의미)를 밝히고자 한다. 특히 「상징--의례」의 부정적인 측면을 강조할 것이다.

한국인은 매우 정치지향적이라고 한다. 정치지향적은 사회생활에서 파당성을 드러내게 한다. 한국인은 법보다는 정치적 술수에 의해 사회생활을 영위한다고 한다.

따라서 개인이 어떻게 자기에게 유리한 상징(사회적)을 생산하고 조작하는지를 모르면 한국사회를 동태적으로 이해했다고 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개인(구성원)을 중심으로 집단적 상징이 어떻게 개인의 인지과정에서 처리되어(이것은 일정한 수의 카드를 가지고 벌이는 포커게임의 카드조합과 같다) 자기에게 유리한 카드를 쥐고 집단적 의례에 참가케 하고 그 의례에서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강화하는지에 대한전략·전술을 디테일하게 기술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개인이 어떻게 집단에 적응하기 위해 상징적 행위를 하며 지위상승을 피하고 때로는 집단의 지도자leader로 부상하며 나아가 집단밖의 보다 강력한 정치적 집단(주로 정당조직)과의 우호적 관계를 전략적으로 맺는지를 기술하는 「개인--집단」간의 매커니즘을 읽히게 된다.

한편 정치행위연구에서 집단중심은 개인의 인지·상징조작 과정에 대한 기술에 소홀하게 되는 반면 집단과 집단간의 세력다툼·알력, 그에 따른 세력균형을 위한 노력, 극단적으로 반체제운동에 이르기까지 예컨대 파벌적 양상을 소상히 기술할 수 있게 된다 . 다시 말하면 전자의 개인중심은 행위가 포함되지 않은 상징(언어적 상징)에 초점을 두는 반면 후자의 집단중심은 행위가 수반되는 의례(실천적 상징)-- 언어적 상징과 실천적 상징은 서로가 상대방의 상징을 촉발시키는 역동적 관계에 있기 태문에 필자는 양자를 통합하여 「상징--의례」(연행적 상징)라고 부르고 있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필자는 여기서 개인의 언어적 상징과정에 중점을 두고 그 과정의 사회적 확인과정으로써 실천적 상징(의례)을 연구대상으로 하고자 한다. 따라서 한국인의 정치행위를 분석하지만 정치인류학적 성격보다는 문화(예술·상징)인류학적 성격이 강한 글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본고의 특성은 상징·의례행위가 집단을 확대·발전시킬 수도 있고 축소·붕괴시킬 수도 있다는, 흔히 사회인류학적 연구가 구조·기능주의적 균형론의 입장에 환원되기 쉬운 맹점을 극복하는 균형론과 갈등론의 통합에서 두드러진다.

앞에서도 언급되었지만 상징·의례는 집단의 체제유지적 보수기능과 함께 반체제적인 급진기능을 함께 수행한다. 또 급진기능 중에는 체제의 확대·발전 뿐 아니라 축소·붕괴도 포함하고 있기 마련이다. 이것은 상징·의례가 본래적으로 갖고 있는 양가(兩價)적 기능(의미)에서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것이다.

상징은 불연속적인 부분과 부분, 부분과 전체를 연결하는 윤활유 역할을 하면서도 또한 부분과 전체에 대한 실재existence의 그 어느 것도 아닌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상징, 그것은 역동성 그 자체이다. 그것은 변화가 있다는 지표이며 반대로 변화가 있는 곳에는 항상 상징·의례행위가 있다는 것이된다. 단지 상징과 의례의 내용이 바뀔 따름이다. 상징은 따라서 속이 텅빈, 역동하는 상자(구조)와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 상자에는 언제나 대립항the opposite이 존재하고 있다. 또한 부분과 전체의 붕괴는 단지 그 대립항의 상실에 지나지 않는다.

이 글은 다음과 같은 의의를 갖는다.

첫째, 종래 복합사회complex society에 관한 인류학적 연구가 주로 타민족의 도시사회 또는 소수민족minority group을 대상으로 이루어져 왔는데 본고는 자민족연구이면서 지역사회가 아닌 특정 결사체association 연구라는 점에서 매우 미시적인 분석·기술을 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둘째, 심리학적, 사회학·정치학적인 연구가 아니라 상징(문화)인류학적 연구라는 점에서 개인(구성원)이 사회적인 실체를 어떻게 상징symbol으로 수용하며 또다시 사회적인 실체·제도(관습)에 적응하는 데 사용하느냐를 역동적(동태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다시 말하면 개인과사회와의 관계를 상징의 상호교환(게임)으로 보면서 이 과정에서 왜 정치성을 나타내지 않을 수 없는가 하는 인간Humanity과 사회Society와의 가장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관계의 원형적 패턴--유형--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인간--사회」의 매커니즘은 그것을 확대하면 어떠한 수준과 범위의 사회에도 적용할 수 있는 하나의 패러다임이 될 가능성이 있다. 이는 인간이 때로는 이데올로기로 살아가지만 때로는 상징·의례ritual로 살아가는 보편성을 뜻한다. 더우기 이데올로기도 상징적 기능을 갖고 상징·의례도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동시에 가지며 따라서 서로가 상호보완적 기능을 내포하고 있음을 가리킨다. 이것은 언어language와 상징symbol, nonverbal language의 원천적인 불가해성(不可解性) 애매모호성ambiguity에 기인한다.

세째, 상징·의례행위가 어떻게 집단의 유지·확대·붕괴에 영향을 미치는가를 따짐으로써 상징이 긍정적 환류작용positive feedback·부정적 환류작용negative feedback을 일으키는가를 실례로 보여준다는 점이다. 즉 상징의 역동성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긍정·부정의 영향을 미치는가를 규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네째, 종래의 구조·기능주의나 구조주의적 연구가 사회구조의 유지·균형에 초점을 맞추던 것을 상징이 어떻게 새로운 사회구조의 형성에 영향을 미치는가를, 즉 역(逆)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상징이 기존의 구조에 순응하는 심리적 욕구·스트레스 해소가 아니라 구조를 변화·개조시키는 역할도 동시에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결국 인간은 상징의 상호교환(교류)을 통해서 살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상징은 사물의 바탕(조건) 위에서 재생산을 보장받으며 그것이 언어적 이든, 비언어적이든 역사(시간)와 사회(공간)에 노출될 때 어떤 연속성(발전·진화)이나 법칙성(현실성)을 형성하게 된다. 그것은 인간이 집단적 삶을 영위하기 때문이다.

다섯째, 끝으로 상징세계를 어느 정도 깊이에 이르기까지 논리적으로 분석·해명할 수 있느냐에 관심이 있다. 필자가 보기에는 논리라는 것은 상징이라는 이분법을 하나의 결정화된 기준이나 체계로-- 이것은 역사, 사회적 산물이며 우주가 1차원적이 아니고 3차원(다차원)적이라는 사실에 기인하지만-- 변화시키고 때로는 그것이 이분법의 세계를 어느 한 쪽만 강조하는 것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상징은 이러한 결정론이나 한 쪽만을 보는, 어느 한 쪽에서는 「애꾸눈one-eyed」을 거부하고 이분법의 세계를 동시에 포용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상징 인류학적으로--이것은 사회학적도 아니고 심리학적도 아니다-- 증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상징인류학은 이데올로기와 상징행위Ritual를 동시에 일원적인 것으로 보는(동전의 앙면과 같은 것으로)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의 전통철학으로 볼 때 「이(理)와 기(氣)」가 미시적인 영역에서는 구분이 곤란하다는 것과 통하고 서양철학에서 「주관-객관」, 「관념-경험」이라는 것이 실은 이원적인 것이 아니라 상징적(역동적) 대립항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하나(1)이면서 둘(2)이고 둘(2)이면서 하나(1)이다」라는 명제의 확인이다.

「하나(1)이면서 둘」이라는 것은 상징symbol이 필요하고「둘(2)이면서 하나(1)」는 법칙law-- 이것은 주로 수학화·기호학화-- 을 필요로 한다. 이것은 법칙이라는 것은 발견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만드는 것이기도 하고 나아가 법칙, 그 자체도 자연의 층위(구조)를 기준으로 할 때 상징적 의미로, 즉「법칙law=상징symbol」이라는 명제를 충족시킨다.

반대로 상징symbol이 계속적으로 유효한 설명력을 가진다면 또다른 법칙으로 즉 「상징symbol=법칙law」 이라는 정반대의 명제를 역시 충족시킨다.

결국 「상징과 법칙의 가역성」 (상징→법칙)은 역시 또다른 차원의 상징이며 또한 법칙임을 알 수 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 본고는 철저하게 상징을 찾음으로써 법칙성(과학이 추구하는 과제)을 달성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에브너 코헨커Abner Cohen : 1974은 그의 「이차원적 인간-- 복합사회의 권력과 상징의 인류학」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계급이라는 것은 사회학자의 상상력의 산물이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다양한 규모와 정치적인 중요성을 지닌 많은 이익집단으로, 대부분 가장 형식적으로 조직된 것으로부터 가장 비형식적으로 조직된 것 사이의 연속선상에 분포되며 대부분의 집단은 부분적으로는 형식적이고 또 어떤 부분은 비형식적인 그 사이에 있다. 정치인류학이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것은 명화하게 비정치적인 이익집단의 비형식적인 조직의 상징적 형성물과 상징적 활동-- 현대사회의 멈보점보mumbo-Jumbo가 지니는 정치적 의미를 확실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정치인류학은 권력관계의 제도화와 상징화에 포함되는 역동적인 여러 과정을 체계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사회과학에 커다란 공헌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에브너 코헨의 위와 같은 주장을 대신하여 필자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문화(상징)의 미시적인 분석micro-analysis-- 개인중심의 분석-- 을 위해서다.

사회적 지위(직위)라는 것은 사회구조주의 학자의, 또는 사회의 타성적 상상력의 산물이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무한히 변화하는 과정속의 다양한 차원과 정치적인 중요성을 지닌 많은 집단의 상징코드로, 대부분 가장 형식적으로 조직된 것으로부터 가장 비형식적으로 조직된 것 사이의 연속선상에 분포되며 형식적인 것에 대한 비형식적인 것의 부단한 도전이라는 역동적인 매커니즘을 갖고 있다. 상징인류학이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것은 비정치적인 이익집단의 비형식적인 조직의 상징적 코드와 상징적 활동이 지니는 정치적 의미를 확실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상징인류학은 권력관계의 상징적 과정과 제도화에 포함되는 역동적인 여러 과정을 체계적으로 분석함으로써 개인과 집단사이의 관계규명에 커다란 공헌을 할 수 있다.

결국 법칙과 제도라는 구조의 결정성에 대해 개인은 어떻게 자유와 고유의 상징영역을 침해 당하지 않고 오히려 상징을 생존의 하나의 전략으로써 사용하는지를 알수 있다. 상징, 그것은 사회 혹은 우주가 다차원의 구조를 가졌기 때문에 끊임없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것은 개방적·발생적 구조를 갖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일시적으로 폐쇄적·결정적으로 볼 따름이다. 따라서 하나의 차원에서 본 폐쇄적·결정적 구조는 반드시 다른 차원에서 보면 상징의 양차원의 하나에 불과하다. 따라서 상징성을 발생시킨다. 그것은 열려있는 세계이다.

필자가 연구대상으로 한 S결사체에 대한 역사 등 일종의 민족지ethnography는 회사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생략한다. 또 필요할 때는 약호로 고유명사를 대신할 계획이다. 문제는 집단상징을 어떻게 구성하여 구성원들이 자신의 집을 짓는가를 보여주면 되기 때문이다. 그 집이란 정치적 파워를 지탱하는 여러 크고 작은 가구와 장식물로 가득 채워져 있다.

S결사체는 물론 여타 결사체처럼 조직과 정관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 조직과 정관은 최고경영자의 의사에 따라 얼마든지 쉽게 바뀔 수 있는 매커니즘을 정관 속에 갖추고 있다. 그러한 점에서 최고경영자의 정치적 권위는 거의 절대적이다.

하지만 S결사체의 정치적 독자성은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최고경영자를 결사체 밖의 다른 권력기구가 임명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고경영자의 권위는 안으로는 절대적이지만 밖으로는 매우 종속적이다. 이러한 권력의 안팎관계는 S결사체로하여금 매우 권위주의적인 분위기에 젖게 한다.

따라서 의사소통이나 의사결정은 상의하달(上意下達)식의 경직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권위와 지도력의 과정이란 윗사람에게 어떻게든 잘 보이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선 윗사람의 생각이 어떤가, 또는 이데올로기적 배경이 어떤가를 파악하고 대처하지 않으면 안된다. 다시 말하면 매우 「눈치」가 발달하지 않으면 안된다.

S결사체의 하루생활은 따라서 매우 드라머틱한 상황의 연속이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윗사람이 어떤 집단적 상징을 갖고 있느냐를 아랫사람이 파악하고 어느 상징(카드)이 자기에게 유리한-- 상사와 근친한 관계를 유지하는데 -- 가를 따지는 게임과 같다.

구성원들은 사회관계를 하나의 전체적 체계로 보기보다는 사회관계를 집단적 상징(카드)으로 분절시키고 그것을 카드화하여 필요할 때면 언제나 내놓을 준비가 되어 있다.

카드의 종류는 다양하다. 먼저 혈연(血緣), 지연(地緣), 학연(學緣) 등 우리나라 연줄사회의 특징을 감안하여 구성원들은 서로 어떤 연줄(카드)을 가지고 있는가를 파악한다.

위의 세 가지 연줄은 입사 때부터 작용하기도 한다. 그래서 입사 후에도 계속 강력한 연줄로 작용하는 경향이 있다.

집단적 상징은 비공식적 조직에서 두드러지는데 입사과정이 시험을 치루었는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E」파 「비(非)-E」파로 나뉜다. 이것은 도시화·산업화에 따라 사회적 이동이심하고 촌락을 떠나 살기 때문에 전통적인 혈연관계가 생활에 직접적인 관련성을 맺기 어렵다는 점에서 발생한 의사(擬似)혈연관계로 볼 수 있다. 선후배간의 호칭이「형님」 「선배」…등에서 전통적인 가족관계를 연상시킨다. 그들 사이에는 전반적으로 가족주의적 인간관계가 형성된다.

지연의 경우 출신도, 고향이 기준이 된다. 가장 눈에 띄는것이 영남(경·남북)과 기호(충청·호남)이고 이것은 다시 하위기준으로 세된화된다. 마치 부족사회의 분절적 리니지Segmentary lineage와 같은 매우 유동적인 기준을 갖고 있다 .특히 고향이 같다는 것은 긴밀한 인간관계를 맺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학연의 경우는 주로 S대파 비 S대파 또는 일류대학(S대, Y대, K대)과 비일류학교로 나뉜다. 어떤 경우에 있어서 특히 매우 합리적인 판단의 대상이 될 때는(실지로 합리적이지만은 않다) 학연은 가장 큰 상징으로 통하기 일쑤다(특히 S대파의 독점은 거의 절대적이다).

이밖에도 우리가 사회학적으로 객관화시키기 어려운 인간관계-- 예컨대 개인적 네트워크에 의한 비밀스런 권력관계-- 도 상징적 카드가 됨은 물론이다.

이상의 여러 카드는 구성원들 사이에 중복되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혈연, 지연, 학연이 다 같을 수도 있다.

S결사체 내의 비공식적 조직들은 집단의 상징적 가치를 높이기 위해, 상징(카드)의 효능(힘)을 강화하는 축제를 벌이기 일쑤다. 그것은 주로 저녁을 겸한 술자리(만찬)나 점심식사(오찬) 때에 이루어진다.

이런 비공식적 조직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비밀스런) 커뮤니케이션 통로를 갖고 있다. 만찬이나 오찬 때를 보면 어떤 모임의 경우 어떤 카드What card의 모임인가를 알 수 있다. 이런 모임은 대개 자기의 구성원 자격membership을 확인하고 집단의 응집력을 높이는 기회가 된다. 따라서 친밀한 감정교류의 장이 된다. 이런 경우 대개 집단밖을 적enemy으로 규정하고 집단안을 친구friend로 규정한다.

경조사(慶吊事)가 발생했을 때도 집단적 상징들은 잘 드러난다. 또 정기·부정기적 모임이 비공식적 집단에 있다.

필자가 비공식적 집단을 통해서 집단의 정치행위를 서술했지만 물론 공식적 조직에도 이런 것이 있다.

공식적·비공식적 집단의 여러 하위그룹은 S결사체가 매우 외부권력종속적이라는 조건 하에서 인간관계가 매우 정치성을 띠도록 작용하게 된다.

말하자면 어떻게 권력을 획득할 수 있는가, 즉 「정치적 힘」을 목적으로 한 카드(도박) 놀이 장으로 S결사체를 비유할 수있게 된다. 구성원들은 저마다 카드를 갖고 있다. 어떻게 하면 그 카드를 갖고 정치적 힘을 많이 획득하느냐에 신경을 집중한다.

이러한 조직은 권력체계가 매우 유동적인 특징을 보인다. 왜냐하면 구성원들은 결사체의 룰rule에 따라 일work을 하기보다는 사교social ability를 통해 지위상승을 피하기 때문이다.

어떤 조직에도 정치행위(정치성)는 존재한다. 그러나 그러한 정치행위-- 집단의 상징행위-- 가 조직을 확대·발전시키느냐, 축소·붕괴시키느냐에 따라 정치행위의 순기능(+)과 역기능(-)이 구별된다.

후자의 경우 집단의 정치행위는 경제적 기반(독자적 경영자립)을 상실하는 음 (-)의 축제를 벌인 셈이다.

S결사체의 경우 룰rule의 준수와 일work 보다는 소비적 축제에 더 매달렸기 때문에 결국 결사체가 붕괴할 위험에 처하게되고 말았다. 축제는 필요하다. 그러나 축제는 일work과 균형을 견지해야 한다.

이러한 S결사체의 정치행위가 왜? 예술인류학의 논의대상이 되느냐하면 조직의 확대·발전·축소·붕괴라는 결과가 문제가 아니라 그 과정에서 구성원들은 카드(상징)를 조합하는 예술적 행위를 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고프만E. Goffman은 그의 주저 「自拭表現과 印象管理」에서 인간의 사회생활을 하나의 무대위의 연극에 비유하고 개인이 어떻게 자기의 인상을 조정·관리하여 청중에게 가장 효과적인 자아표현을 하고 상황을 정의하며, 그 상황정의에서 내려진 의미를 어떻게 견지하는가의 문제를 분석하고자 했다.

고프만은 그의 연극적 사회분석론의 개념으로 ① 인상관리impression mangement---인상관리의 과정을 하나의 공연이라 보았다. ② 팀team---인상관리에 있어서 상호협력과 상호지지를 통해 팀워크team work를 이루는 집단 ③ 전면영연front region---공연이 이루어지는 장소, 후면영역back region---공연을 준비하는 장소 ④ 모순된 역할---상쇄되는 공연countervailing performance을 상연한다---을 제시했다. 고프만은 이러한 공연 중 관찰자를 위해 공연의 일반적이고 고정된 형태로, 규칙적으로 가능하는 부분인 전면front을 무대장치setting, 외모appearance, 몸가짐manner으로 보았다.

이것은 탈을 쓰는 것에 비유될 수 있다. 고프만에 따르면 인간은 또 정보를 통제함으로써 감춰져야 하는 사실을 은폐하는데 따라서 공연자에게 정보를 얻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정보를 얻는 두 가지 의사소통, 즉 주는 표현expression which he gives과 던지는 표현expression given off이 있다.

행위자는 청중앞에서 자신에게 불리한 정보destructive information는 숨기고 유리한 정보를 주고자 하는 하나의 정보게임Information game을 연출한다.

고프만의 연극사회학이 우리 사회의 분석에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우리 사회가 매우 정치지향적인한 하나의 훌륭한 준거가 될 것으로 본다. 연줄사회의 각종 상징(카드)들은 고프만의 연극사회에서 마치 무대장치나 외모, 몸가짐에 해당되며 정보게임의 도구가 되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상징들은 연줄사회에서 대인관계의 지속적인 배경으로 따라다니며 때로는 한 인간을 외적으로 평가하는 기준이 되며 기대되는 몸가짐을 규정해 주게 되기 때문이다. 또 대인관계에서 유리한 상징들을 끄집어내게 하는 경향을 띠게 한다.

S결사체 구성원들은 인상관리에 있어 물론 고프만의 주장과 같이 ① 표정조정 ② 사실은폐 ③ 의례적 표현 ④ 신비화 ⑤ 의도적인 거리유지 및 전략적 기지를 사용하지만 또다른 연줄관계에서 오는 상징들을 사용한다.

예컨대 S결사체 구성원들은 반갑지 않은 손님을 만났을 때 애써 웃음을 띄움으로써(표정조정)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속이고(사실은폐) 안부인사를 정중히 하거나(의례적 표현) 자신의 어떤 특정 부분을 사실이상으로 신비화시키거나 청중과 의도적으로 일정거리를 유지함으로써 본래의 자기보다 더욱 호의를 받기를 원한다.

이와 함께 S결사체 구성원들은 대인관계에서, 즉 다른 사람과 만날 때 항상 상대방이 어떤 연줄상징을 갖고 있는지를 계산한다. 또 그러한 기억을 토대로 자기의 입장을 정립하고 이야기를 나눈다. 예컨대 상대방에 대해 「그는 시험을 통해 입사했나, 일류학교 출신이냐, 고향이 어딘가(어느 도 출신인가), 어떤 정치적 실력자와 친밀한가」를 따진다.

또 대화의 주제에 대해 상대방은 어떤 입장에 있기 쉬운가를 점친다.

결국 어떤 일이 어떻게 진행되어야 한다는 논리나 법칙을 제시하기 보다는 상대방의 비위를 맞추고(불리한 것을 거론하지 않고) 최소한 자기에게 불이익이 되게 하지 않는다. 즉 상대방과 자기에게 유리한 것은 드러내고 불리한 것은 옹호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드러내지 않는다.

자기에게 호의적인(유리한) 상징을 가진 사람(상대방)을 구태여 적으로 만들 필요가 없는 것이다.

과연 모든 행위자는 자신의 진정한 감정을 억제하고, 다른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다고 여겨지는 방식으로 공연하며 사회는 이처럼 공연자의 진정한 감정을 감추고 가장된 동의Veneer of consensus에 의해 매끄럽게 운영되어 나가는 것밀까? 이런 공연을 위해 구성원들은 상대방이 받아들일 것이라고 느껴지는 상황정의 뿐 아니라 자기자신의 상image도 투사한다.

S결사체, 즉 우리 사회가 매우 연극적 상황으로 전개되는 이유는 연줄을 싱징으로 전관시키기 때문에 여타 사회보다 더욱 상징의 조합이 무성한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에 대한 분석은 구조나 구조의 갈등·균형과 같은 용어보다는 시적·예술적 은유로 공연을 분석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은유는 단 하나의 잘못된 음표note off key가 전체공연을 망칠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 대 개인의 상징조작은 물론 팀구성에서도 드러난다. S결사체의 비공식적 조직은 그것을 잘 말해준다. 이러한 비공식적 조직들은 상징을 강화하고 재생산하는 공장과 같은 역할을 한다. 비공식적 조직들은 회원의 구성에서 배타성을 보이는 한편 매우 비밀스런 회합을 갖는다.

이상에서 우리는 사회적 실체reality나 법규보다는 사회적·개인적 상징조작을 통해 인상image을 관리하는 사회가 왜 연극적 상황을 보이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사회는 연극적 요소를 갖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 사회가 연극적이라고 특징 지워지는 것은 그 정도가 심하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 사회도 법규에 따라 일정한 사회적 목표를 달성하는 기능이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기 때문에 연극적인 상황 속에서도 집단은 유지되는 것이다. 상징이 엔트로피entropy를 증가시키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상징은 매우 파편적인 것이 모여 어떤 전체적인 이미지를 형성하기 때문에 다소분열적이긴 하지만 반대로 상징을 통해 하위단위의 집단적 귀속감을 강화하는 측면도 있기 때문에 집단적 결속을 유지하는데 결코 부정적이지만은 않다.

단지 중간단계의 여러 상징들을 하나의 거대한 상징(이미지)으로 엮어나가는 과정에서 통과의례가 수반된다. 우리 사회에 축제적 상환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한국사회는 한마디로 연줄사회이다. 연(緣)이란 사회적 관계망을 헝성하지만 그 관계는 체계적·조직적인 어떤 공통의 집단적 공간(사회적 공간)을 토대로 공통의 이익을 추구한다기 보다는 매우 개인과 개인에 의해 이어지는, 다시 말하면 집단적으로 볼 때 매우 분절적인segmentary 사회현상을 보여준다.

따라서 연줄사회의 사회적 관계망은 바로 사회적 실체성reality 보다는 상징성symbol을 보여주고 구성원들은 그 상징성(카드)을 사회적 맥락·상황에 따라 조합할 것을 요구받는다. 이러한 사회에는 법칙성보다는 조합의 유형이 발달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회는 법칙사회가 아니라 확률사회이다.

다시 말하면 그러한 사회적 현상이 일어날 수 있는 비율은 몇 퍼센트인가-- 가 관심의 초점이 된다.

아프리카의 원주민 누어Nuer인들의 분절적 리니지Segmentary lineage는 우리 사회를 바라보는 데 중대한 시사점을 준다. 어떤 점에서 이분법dualism에 의한 분류법과 그러한 분류의 수준에 따라 발생하는 대립과 동맹alliance이라는 원초적primitive인 심성을 보여주는 것은 우리 사회와 누어인 사회를 구별하기 힘들게 한다.

단지 우리 사회는 복합사회Complex society이고 누어인사회는 단순사회Symple society라는 차이가 있다. 이러한 차이에서 파생되는, 예컨대 누어인 사회가 고정된 지역(영토)과 부계혈통을 기준으로 분절되는 데 비해 오늘의 힌국은 위와갈은 고정된 상징(실세)보다는 다양한 상징과 이해관계에 의해 움직이기 때문에 훨씬 분절과 통합이 다양하고 역동적이라는 점이 다르다.

결론

예술(작품)이든 행위(생활)이든 모두가 「상징---의례」의 산물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싱징 (의례)의 형식이 어떤가, 무엇을 재료로 하는가가 중요하다. 한 문화는 그러한 형식과 재료면에서 특수성을 나타낸다. 그 특수성은 결국 커뮤니케이션을 달성하는 데 있어 한 사회(문화)의 유·무형의 통로channel라 할 수 있다. 물론 그 통로는 정신적·물질적인 것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이 글에서 필자는 한국문화(사회)의 디자인과 형태에서 신화적 원형을 찾으려고 했다. <도표2>는 결론을 잘 나타내 준다.

<도표 2>

상징의 종류

한국(동아시아)

서구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의 신화학

음양적 균형

(비대칭)

균형

(대칭)

커뮤니케이션 인류학의 신호학

다원다응의 음양

(연줄)

이분법

(대립)

음양학적 커뮤니케이션

음양학

변증법


※ 음양은 가장 첨단적인 개념이면서 가장 원시적인primitive 개념이다. 음양은 결국 자연주의이다. 즉 서구의 자연과학주의 이전의 자연주의이면서 신과학주의의 자연주의라는 이중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또 법칙이면서 구조(상징)이고 구조(상징)이면서 법칙이다. 상징이면서 실체이다. 우주의 흐름이다. 따라서 음양은 언어-상징-사물-기(氣)의 네가지 형태로 논의될 수 있다.

한국의 경우 디자인에 있어 신화적 원형은 태극이다. 태극은 비대칭의 동태적인 균형잡기이다. 서구의 신화적 원형이 대칭적 균형인 것과 비교된다.

이것을 다시 말하면 「음양적 균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형태에 있어 신화적 원형은 다원다층의 상징의 이분법이다. 다원다층은 각종 사회관계에 의해 발생하는 연줄관계이다. 서구의 경우 이분법이 정태적·계급적인데 비해 한국의 이분법은 훨씬 역동적이다. 이것을 다시 말하면 「음양적 이분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한국문화의 신화적 원형은 음양(陰陽)이며 한국인은 예술작품이나 형태에서 「음양」을 원형으로 삼고 있으며 음양을 통해서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 자연과 자연의 관계를 이해한다. 이것을 「음양학적 커뮤니케이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의 글은 매우 실험적인 내용으로 가득차 있다. 필자는 한국문화를 상징주의symbolism 문화라고 규정한 바 있다.

상징문화는 언듯 보면 서구의 유물주의materialism나 유심주의idealism에 비해 비과학적·비합리적으로 간주하기 쉽다. 그러나 상징주의 문화는 정신과 물질을 통합하는 힘을 갖고 있다. 왜냐하떤 상징의 이면에는 우주의 가장 원초적인 본질인 기(氣)가 있기 때문이다. 기(氣)는 상징symbol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언어language나 사물thing로 나타나기도 한다.

한국문화의 정수는 그 자연주의naturalism에 있다. 자연주의는 매우 원초적인primitive특성을 나타낸다. 자연주의 문화는 그 표현형이 매우 혼란스럽게 보이지만 그 이면형은 냉엄한 질서를 깔고 있다.

그 냉엄한 질서란 음양법이다. 음양의 질서란 인간으로서 어쩔 수 없는 커다란 법칙이며 또한 일상사에도 흔히 볼 수 있는 법칙이다.

음양은 무소부재의 법칙이다. 그것은 예술작품에도, 사회생활에도, 종교의례에도 적용될 수 있다.

미학, 정치학, 신학에서도 음양은 원형으로 작용한다. 그것을 이름하여 신화적 원형이라 한다.

음양학의 틀은 「상징---의례」이며 이 틀이 사람에게 나타난 좋은 예가 「무당shaman」이다. 모든 인간은 크고 작은 무당이다. 좀더 비약하면 모든 사물은 무당이다. 그들은 저마다 신(神)과 통하는 주문을 하고 몸짓을 하고 신내림(降神)을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