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음악의 현장 / 국제무대에서 활동하는 한국의 아티스트들

세계 음악계의 한국인 파워




이인해 / 시인·월간「객석」편집부장

세계 음악계에는 유태인 마피아단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떠돌고 있다. 그만큼 유태인 파워가 막강하여 그들이 세계 음악계를 좌지우지하고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 그들을 잇는 한국인 파워가 대두되고 있다. 아직은 그들에게 미치지 못하지만 조만간 유태인 파워와 어깨를 겨룰 정도로 한국음악인들의 파워가 막강해지리라는 예견이다. 국제콩쿨의 예만 들더라도 이제 웬만한 콩쿨에서는 한국인의 등장이 놀라울 정도로 급신장하고 있다. 한 달에도 몇 건씩 크고 작은 국제콩쿨에서 입상했다는 낭보가 날아드는 것이 오늘 한국음악계의 실상이고, 이것이 오늘 한국음악인이 세계무대에서 어느 위치에 있는가를 단적으로 말해 줄 수 있는 가늠자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이것은 음악의 유학사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음악학교의 세계적 명문인 줄리어드 음악원의 예를 들어보자. 1950년대에는 유태인 학생들이, 1960년대에는 일본의 학생들이, 줄리 어드에서 판을 쳤는데, 1970년대에는 한국인 학생들이 줄리어드를 휘어잡고 있다는 것이 통설로 말해지고있다.

이처럼 최근 들어 한국 음악도들이 유학에 줄을 잇고 있는데, 줄리어드만 해도 총1천여 명의 학생 중 10분의 1인 1백여명 정도가 한국학생들이다. 이밖에 미국 쪽만 살펴봐도 피바디 음대에 30여명, 인디애너 주립대에 50여 명, 맨하탄음대에 30여명, 매네스 음대에 50여명 등 한국 유학생들이 비교적 많이 몰려 있는 곳이긴 해도 미국 음악계에서 한국인의 파워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된다.

이러한 실상은 유럽 쪽에도 마찬가지이다. 비인 국립 아카데미와 시립 콘서바토리에 한 해에 50여명씩 지원자가 몰리는가 하면 이탈리아 산타체칠리아음악원, 오시모음악원 등에도 한국인 음악도가 한 해에 수십 명씩 몰려든다. 프랑스의 파리고등 음악원과 쌍벽을 이루는 파리 고등사범음악원에도 1백명에 가까운 한국음악도들이 유학가 있고, 독일에는 쾰른 음대, 영국에는 런던 왕립음악학교에 한국인 학생들이 많이 다니고 있다.

그러다 보니 자연 세계무대에서 두각을 보이는 한국인 아티스트들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그들 모두 세계 정상을 향해 달리지만 그 정상의 고지는 멀고 높다. 그렇지만 이들 중 상당수는 분명 세계 정상급이며, 또한 그 뒤를 상당수의 한국인 아티스트들이 지금 오르고 있다.

여기 소개되는 아티스트들은 가나다… 순으로 게재했고, 현재 학교에 재학중인 사람과 현역에서 물러난 사람은 가능한한 배제했다.

바이얼리니스트 강동석

13세의 나이로 한국을 떠나 미국에서 줄리어드 음악원과 커티스 음악원에서 공부했다. 1971년에 17세의 나이로 메리워터 포스트콩쿨에 나가 1위에 입상했고, 75년에는 몬트리올 국제콩쿨에서 또 1위를 했으며 이밖에도 엘리자베드 국제콩쿨에서 3위에 입상한 경력을 갖고 있다.

1981년에 미국을 떠나 파리에 정착해 활동을 벌이고 있는 그는 1년에 보통 60회 정도의 연주를 갖는다.

병역기피자라는 낙인이 찍혀 17년 동안 고국 무대를 밟지 못했던 그는 지난 84년 처음으로 고국에서의 연주회를 갖고 이후 1∼2년에 한 번씩 고국 편들에게 그의 연주를 들려 주고 있다. 그의 주요 활동무대는 파리를 비롯해 뉴욕인데, 이밖에도 캐나다 등지에도 자주 연주여행을 간다 . 최선을 다할 수 없다는 이유로 연주회 수를 제한하며, 함부로 레코드 취입도 하지 않는 그는 지난 81년 권위있는 롱 티보 국제콩쿨에서 최연소 심사위원을 맡기도 했었다.

베이스 강병운·소프라노 한민희 부부

바그너 오페라의 본거지로 알려진 서독의 만하임국립오페라극장의 정식 단원으로 있는 강병운. 1948년 생인 그는 71년 서울대 음대 졸업 후 김자경 오페라단에서 잠시 활동하다가 74년 서독 베를린 음대에 진학하면서 유럽무대의 문을 두드렸다. 77년 베를린 음대 졸업 후 79년 마리오델 모나코 국제콩쿨 남자부문 1위, 82년에 이탈리아 트레지오의 토스티 달 몬테 콩쿨에서 다시 1위에 입상하면서 국제무대에 부상하기 시작했다

76-78년 베를린 오페라 하우스, 78∼81년 부퍼탈 오페라 하우스, 81∼84년 뉘른베르크 오페라 하우스 등을 거쳐84년 이후부터 만하임 오페라 하우스에서 활동하고 있는 그는 이밖에도 82년에 이탈리아 5개 도시 순회공연, 파리, 브뤼셀, 함부르크, 스페인 등지의 페스티벌에서 활약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88년에 새롭게 시작되는 바그너의 「링」 전작 공연에서 파프너와 하겐 역을 따내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바이로이트 무대에 바그너 가수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 공연은 91년까지 계속되는데 , 그는 4년간 베이스 주역으로 참가한다.

한편 80년에 강병운과 결혼한 소프라노 한민희(36세)도 서독무대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는 한국인 강병운이 1위를 한 79년 마리오 델 모나코 국제콩쿨 여자 부문1등을 차지했고, 이들은 그 다음해 결혼식을 올리고 줄곧 서독에서 활동하고 있다.

바이얼리니스트 강효

음악의 세계적인 명문 줄리어드의 유일한 한국인 교수인 바이얼리니스트 강효. 그가 한국을 떠난 것은 1964년 서울대 음대 1학년 재학중 그 무렵 내한한 벌 세노프스키에게 인정받아 줄리어드로 유학가면서였다. 줄리어드 음악대학과 대학원에서는 도로시 딜레이에게 사사받았다.

줄리어드를 마친 그는 미국의 여러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시작하면서 케네디 센터현악 4중주단의 수석 바이얼리니스트로 참가, 실내악 분야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보였다. 1977년부터는 미국 유수의 음악제인 아스펜 뮤직페스티벌에 바이얼린 교수로 참가하고 있으며, 케네디 센터 스트링 콰르텟과 쇤베르크의「정야」, 히네스데나의 「현악 4중주곡」등의 실내악 레코드를 출반하기도 했다.

그는 현재 줄리어드 예비학교에서 10여명, 줄리어드 대학에서 30여 명, 아스펜하기음악제에서 40여 명의 학생을 가르치고 있으며, 그의 제자 중에는 1982년도 차이코프스키 국제콩쿨 2위에 입상한 도모꼬가또가 있는가 하면, 매년 뉴욕 필이 주최하는 청소년 콩쿨에도 입상자가 속출한다고 한다.

이처럼 대학교수로, 실내악 멤버로 활동하는 외에도 그는 미국 내 여러 콩쿨의 심사위원으로도 활약했는데, 지난 84년부터는 처음으로 창설된 이차크 펄만 국제콩쿨의 심사위원으로도 위촉받고 있다. 유명한 피아니스트 레온 플라이셔와 명콤비

지휘자 곽승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 겸 음악 총 감독을 맡고있는 곽승. 그가 정식으로 지휘공부를 시작한 것은 1964년 22세 때였다. 그 전까지는 서울시립교향악 단의 트럼펫 주자로 활동. 그러다가 뉴욕에 있는 매네스 음대 지휘과에 진학하면서 지휘봉을 들었다. 매네스 음대 지휘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70년 링컨 센터 챔버뮤직소사이어티의 상임지휘자로 발탁되면서 지휘계에 데뷔. 1년 후에는 조프리발레단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로 자리를 옮겼다. 다시 매네스 음대지휘과 교수 겸 대학 오케스트라의 뮤직디렉터로 옮겨 76년까지 있다가 전문지휘자의 길을 택해 조지아주의 아틀랜타 심포니오케스트라의 부지휘자가 된다.

이 무렵부터 미국 내에서 점차 알려지기 시작한 그는 3년간 아틀랜타에 머물다가 다시 80년에 미국 5대 교향악단의 하나인 클리블랜드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부지휘자가 된다. 당시 클리블랜드 오디션에서 그를 발탁한 지휘자는 로린 마젤.

로린 마젤의 지도를 받아가며 지휘테크닉을 더욱 공고히 다진 그가 오스틴 심포니 오케tm트라로 자리를 옮긴 것은 83년.

오스틴 심포니는 미국 내에서 2류급의 교향악단이긴 하지만 그가 이 악단의 상임지휘자가 되기까지는 당시 미국 전역에서 몰려든 327명의 경쟁자를 물리쳐야 했었다.

1911년 창단된 이 악단은 미국 1천 5백 여개의 교향악단 중 30여 개의 메이저 심포니 다음 가는 30여 개의 2급 심포니 중의 하나. 단원은 90여 명으로 미국의 남부지방 음악을 이끌고 있는 악단이다.

훌륭한 지휘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린시절의 음악적 환경과 여러 악기를 다룰 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그는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북을 쳤고, 대학시절에는 첼로를, 서울시향 단원으로 있으면서는 트럼펫을 연주했다. 이처럼 여러 악기를 다룬 것이 현재 악단을 이끄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고.

젊었을 때는 현대곡에 빠져 들었는데, 점점 나이가 들면서 모짜르트·베토벤 ·브람스류의 정통 클래식이 역시 좋다고 한다.

피아니스트 김대진

85년 8월, 미국 클리블랜드에서 개최된 카사드쉬 국제피아노콩쿨에서 1위를 차지해 미국 악단에 부상한 김대진(25세), 어려서부터 이화콩쿨·중앙콩쿨·동아콩쿨등을 석권함으로써 재능을 과시했던 그는78∼79년 스위스 티보바가 국제음악제의 초청연주와 홍콩 등에서의 연주회로 미국에서 수학하지 않고도 국제무대에 그 모습을 드러냈었다.

서울예고를 거쳐 서울대 음대 2학년 재학중에 미국으로 건너가 줄리어드에서 공부한 그는 현재 줄리어드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지난 86년 한 해만 해도 미국 메인주에서 독주회를 가졌고, 이어서 뉴욕에서 독주회,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와 협연, 프랑스 파리에서 파들루 오케스트라 협연하는 등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다.

국내에서는 이성균·오정주에게 피아노를, 김정길에게 이론공부를 사사받았다.

지휘자 김몽필

20세의 나이로 오케스트라의 수석이 되어 지난 1950년대에 한국악단의 유망주로 등장했던 김몽필(58세). 일찌기 성악가 이관옥에게 발견되어 성악을 배우던 그는 성대에 이상이 생기자 전공을 바꿔 서올대 음대에서 플루트를 공부했다. 서울대 1학년 재학중 해군정훈음악대에서 수석주자로 재능을 발휘했던 그는, 그러나 다시 지휘로 전공을 바꿔 63년 미국 워싱틴의 시애틀 대학에서 지휘를 전공하고 국립교향악단의 객원 지휘자가 되었다.

서울 신포니에타를 창단하여 소규모 오케스트라 운동을 펼치기도 했던 그는 지난73년 도미하여 샌프란시스코 콘서바토리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사우드 캘리포니아 심포니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

작곡가 김병곤

아시안게임과 서울올림픽 축하를 위해 작곡한 「축제교향곡」이 지난 4월 상해교향악단에 의해 중공에서 연주되었는가 하면, 그에 앞서 3월에는 북경의 중앙교향악단을 직접 지휘해 화제를 뿌린 작곡가 김병곤(59세)은 현재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의 작곡과 교수로 있다.

그가 북경에서 발표한 작품은「은유(隱喩)교향곡」. 그때 공연에서 김병곤은 자신의 교향곡을 직접 지휘한 것 외에도 딸 김아드리안느(20세·미 인디애너 음대)가 바르톡의 피아노협주곡을 협연해 중공에서 부녀가 함께 연주하는 기록도 남겼다. 대구에서 자라 대구사범을 마친 그는 지난 61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인디애너 주립대에서 작곡을 공부했고, 힌데미트의 제자인 하이덴을 비롯, 월터 카우프만·티보에게 작곡 및 지휘를 사사받았다.

86년에는 로스앤젤레스에 태평양 현대음악센터를 설립, 그곳에서 작곡가, 지휘자, 교수로도 활동하고 있는 그는 88년 3월 예술의 전당 개관 기념음악제에서 자신의 작품 「신포니에타」를 서울바로크 앙상블과 연주했다. 이에 앞서 링컨 카네기흘에서 우리 전통가곡을 소재로 한 「초엽(初葉)」을 발표하기도 했다.

바이얼리니스트 김복수

1984∼85년 시즌에 동양인으로는 처음으로 로스트로포비치가 이끄는 워싱턴 내셔널 심포니 오케스트라에 부악장 겸 솔리스트로 발탁되어 입단했던 김복수. 그는 6세 때부터 바이얼린을 시작했으며, 이미 고등학교를 다닐 시절에 국립교향악단·서울시립교향악단·바로크합주단과 협연을 가졌다. 서울대 음대 재학시절 제3회 5·16민족상 수상했고, 73년에 미국 줄리어드에 진학해 도로시 딜레리의 문하에서 장학생으로 수업했다.

줄리어드 대학원을 수석으로 마친 그는 캐나다의 새스커툰 심포니 오케스트라에 입단, 악장 겸 부지휘자에다가 솔리스트와 청소년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 활동했다. 2년 뒤에는 시애틀 심포니 오케스트라로 옮겨 1980∼81년 시즌에 걸쳐 악장과 솔리스트, 이밖에도 볼티모어·오마하·네브라스카 심포니에서 악장과 솔리스트로 활약했다.

김복수가 30명이 넘는 응모자를 제치고 오마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악장 겸 솔리스트로 뽑혔을 때 , 이 악단의 고문이며 작곡가인 브리게티는 그에 대해 이렇게 말했었다.

「김영욱이나 유진 표도르·에릭 프리드만과 더불어 김복수는 오늘날 미국에서 훈련을 쌓은 젊은 바이얼리니스트 중에서도 가장 탁월한 자질을 타고 태어난 음악인의 한 사람입니다. 김복수는 그동안 여러 오케스트라를 거치면서 그때마다 오케스트라 전체에 훌륭한 영향을 끼쳤으며 , 특히 현파트에 기여한 공적은 대단합니다. 」

워싱턴 내셔널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미국 내에서 10대 교향악단에 끼이는 세계일급 악단이며, 그만큼 단원들도 세계 각국의 대가들이 몰려 있는 곳이다. 이 악단에서 그는 무엇보다도 동양인 최초의 부악장으로 현악부를 리드했으며 특히 권위를 내세우지 않는 점에서 단원들과 조화를 잘 이루었던 그는 현재 콜럼버스 심포니 오케스트라 악장으로 있다.

1951년 서울 출생이며, 국내에서는 정영갑과 이채현으로부터 바이얼린을 사사받았다.

소프라노 김영미

1973년 서울예고를 졸업하고 이탈리아로 유학, 산타체칠리아 음악원에서 학사와 석사과정을 밟은 김영미. 파르마 성악콩쿨1위, 푸치니 성악콩쿨 1위 ,마리아 칼라스콩쿨에서 1위를 하는 등 오페라의 본고장에서 연속적으로 국제 성악콩쿨을 석권해나갔다.

그러다가 그가 미국으로 무대를 옮긴 것은 지난 80년도. 그는 미국에서도 81년 필라델피아 오페라단이 주최한 파바로티 국제 성악콩쿨에서 입상, 82년에 도니제티의 「사랑의 묘약」에 출연하여 파바로티의 상대역 아디다 역을 성공적으로 해냈다.

86년도에는 LA뮤직센터 오페라 창립무대에 출연해 플라시도 도밍고·레오나 미첼 등 세계적 성악가들과 어깨를 겨룬 김영미 현재 그는 쌔 디스페커 아티스트Thea Dispeker Artist 매니지먼트에 소속되어 있으며 로스앤젤레스를 비롯 미국전역에서 활동하고 있다. 지난 86년에 LA뮤직센터 오페라단 창단기념공연에서「나비부인」의 주연으로 화제를 모았으나, 기존 오페라와 다른 나비부인 역을 연습 도중 스스로 물러나 또 한번 화제를 뿌렸다.

바이얼리니스트 김영욱

뉴욕의 콜럼비아 아티스트사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1년에 100∼150회의 연주회를 가지며 3년 뒤까지의 스케줄이 짜여 있는 김영욱. 1947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4세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7세 때 바이얼린으로 바꾼 그는 1960년 도미하기 전까지 원경수·이재헌 ·안용구 등의 스승을 거치며 현악기적 재능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루돌프 제르킨의 주선으로 13세 때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산타바바라에서 섬머스쿨을 거쳐 커티스 음악원에 입학하는 한편 이반 갈라미언의 문하로 들어간다. 도미 3년 되던 63년 필라델피아 심포니 오케스트라 주최 청소년 음악콩쿨에서 1위로 입상했고, 그 이듬해 유진 올만디의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 랄로의 작품을 협연할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다.

65년 워싱턴의 메리위도 국제음악경연대회에서 1위 입상을 계기로 미국 악단의 주목을 받았으며 세계무대에 첫발을 내딛게 된다. 18세의 나이로 잘츠부르크 음악제에 초청되었는가 하면 그 이듬해에는 번스타인이 지휘하는 뉴욕 필하모니와도 협연을 가졌다. 알렉산더 슈나이더에게 음악사를 배우기도 한 그는 이후부터 비인 필·베를린 필·런던 심포니·로스앤젤레스 심포니·시카고 심포니·뉴욕 필 등 세계정상급 교향악단의 단골 협연자로 등장했는가 하면 과르네리 4중주단· 줄리어드 4중주단과도 자주 무대를 꾸몄다.

79년에는 링컨센터의 실내악협회에 가입하여 첼리스트 요요마, 피아니스트 엠마누엘 엑스 등과의 연주로 새로운 면모를 보여 주기도 했으며, 80년에는 이들 세 연주자가 엑스-김-마 트리오를 결성하여 실내 악 연주를 펼치기도 했다.

레코드로는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바하·베토벤·브람스의 소나타와 멘델스 존·브르흐의 협주곡이 나왔고, EM레코드에서는 프레빈과 함께 녹음한 라벨·쇼스타코비치 등이 있으며 이들 모두 명연주로 꼽힌다.

이제 40의 나이를 넘어선 그는 세계 정상급의 바이얼리니스트로서 피아니스트피터 제르킨과 함께 세계 각지를 순회하며 90년까지 베토벤 사이클(바이얼린 소나타 전곡)을 연주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86년부터는 매네스 음대에서 이론을 가르치고있는 칼 색터 교수와 함께 음악분석을 공부하고 있다.

바이얼리니스트 김원모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바이얼린 연주학 박사학위를 받은 바이얼리니스트 김원모. 전 서울시향 지휘자인 김생려의 아들로 1939년 서울 출생. 음악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바이얼린 수업을 받은 그는 배재중학교 2학년 때인 1955년 도미하여 뉴욕의 매네스 음악학교와 맨하턴대학을 거쳐 플로리다 주립대학을 졸업했다.

브론스타인·갈라미언·밀스타인 등의 대가들에게 사사받은 그는 미국·유럽·아시아 등지에서 많은 실내악 콘서트를 가졌으며, 브라질에서는 연방 UFRN 챔버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솔리스트로서보다는 앙상블에서 보다 두드러진 활동을 보이는 그에 대해 보스턴과 뉴욕의 비평가들은 「곡을 시적(詩的)으로 표현해내는 감각적 기법을 지녔다」고 평하고 있으며, 현재 조지아대 음대의 바이얼린 주임교수로 있으면서 세심한 배려와 탁월한 교수법으로 많은 후학들을 길러내는 스승으로 격찬받고 있다. 특히 미국에서는 한국유학생의 대부적 존재로 이국땅에서 당혹감을 느끼는 후배들을 따뜻이 감싸 주며 스칼라쉽을 얻도록 주선해 주기도 해 김진·이성주·이순익·김애실·노정숙 등 한국의 유망주들이 미국에서 그의 지도를 거쳐 갔다.

20대의 정열과 30대의 끈기에 40대의세련미로 이제는 한국의 소리를 담은 작곡도 해보고 싶다는 그는 실내악활동에도 주력해 프로 아트 콰르텟의 수석 바이얼리니스트로 있다.

바이얼리니스트 김의명

막심 쇼스타코비치가 지휘를 맡고 있는 미국 뉴올리언즈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악장인 바이얼리니스트 김의명(43세). 그는 지난 1960년 고등학교 1학년 재학시 미국시카고에서 열리는 래비니아콩쿨 참가를 계기로 하여 유학길을 열었다. 시카고 델라살르 고교에 들어간 그는 그곳에서 폴 스타세비취와 노만 캐롤(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악장)에게 사사받았으며, 그 후 커티스 음악원에 진학하여 오스카 슘스키에게 배우다가 그가 줄리어드 음악원 교수로 옮겨가자 함께 줄리어드로 학교를 옮겨 배움을 계속했다.

70년에 줄리어드 음악원을 마친 그는 프리랜서로 활동하다가 73년에 뉴저지 심포니의 악장으로 입단하면서 미국 음악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78년부터 81년까지 한국인으로는 처음뉴욕 필하모니의 단원으로 활동하다가 82년 뉴 올리언즈 심포니 오케스트라로 옮겨, 동양인으로는 처음으로 미국 메이저 오케스트라의 악장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밖에도 그는 뉴올리언즈 대학에 강의도 맡고 있으며, 제퍼슨 챔버 오케스트라의 리더로도 활동하고 있다

작곡가 김진희

1988년 3월 전 미국작곡가연맹 초청음악회에서 알토 플루트와 거문고 곡을 발표했고, 6월는 현대음악 연주단체인 렐라셰와 거문고를 위한 실내악곡을 발표할 예정으로 있는 작곡가 김진희(31세). 국립국악고등학교에서 거문고를 공부했고, 76년서울대 국악과에 진학하여 국악작곡을 전공한 그는 80년 미국으로 건너가 작곡수업을 계속했다.

그곳에서 처음 들어간 학교는 샌프란시스코 음악원, 이 학교가 작곡가 중심의 학교가 아니고 연주가 중심의 학교여서 그는 이곳에서 서양음악의 기초를 다지고, 2년후 다시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현대음악의 중심지로 불리는 밀즈 칼리지로 옮겨 수업을 계속한다. 그는 이곳에서 인도의 라가음악과 아프리카 타악기음악, 그리고 중국의 음악 등을 본격적으로 배운다. 또한 전자음악과 컴퓨터음악 등도 익힐 수 있었다. 샌프란시스코 음악원에서는 존 애덤즈, 밀즈 칼리지에서는 루 해리슨에게 사사 이때부터 그는 이 두 교수의 도움을 받아 가며 작곡을 시작, 국악기법을 응용한 바이얼린과 첼로 2중주곡 「기맥」(氣脈), 현악4중주곡 「이음새」등을 발표했다. 특히 「이음새」는 86년 런던에서 초연된 후 세계 각국에서 연주되는 곡 현재 그는 미국에서 오는 10월에 열릴 여성즉흥단체 페스티벌에서 연주할 전자기기를 사용한 거문고 즉흥연주곡 신작 준비에 몰두하고 있다.

메조 소프라노 김청자

1945년 춘천에서 태어나 8세부터 피아노를 배우다가 진명여고에 진학하면서 당시 음악교사였던 조상현의 눈에 띄어 성악에 뜻을 가졌다. 여고시절 한양대 주최 작곡콩쿨에도 응모해 2위 입상한 캐리어도 갖고 있다. 고교를 졸업한 그는 63년 독일신부의 주선으로 독일 유학, 상뜨 엘리자벳 수녀원에 있으면서 아우구스부르크 레오폴트 모짜르트 음대를 마친다. 68년 다시 비인 국립아카데미로 진학, 70년에 스위스 베른 오페라단 오디션에 합격하여 모짜르트의 「티투스의 자비」에 주연을 맡으면서 국제무대로 진출한다.

그러다가 1972년부터 78년까지 한국으로 돌아와 중앙대·연세대 등에서 교편을 잡으며 국립오페라단 단원으로 활동했다. 그가 다시 독일에 정착하는 것은 37세 때. 칼스루헤 오페라단 오디션에 합격, 첫 무대로 펜데레츠키의 「그림자 없는 여인」에 출연하여 센세이셔널한 성공을 거두면서부터다.

그 후 그는 뒤셀도르프 오페라단과 5년간 전속계약을 맺고 「아이다」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 」까지 수많은 오페라에 출연해 왔다. 그 동안 카르멘 역만 해도 30여번 정도 출연, 그러나 지난 87년 8월 뒤셀도르프 오페라단과 계약이 끝나고 재계약에 나서지 않았다. 이제 그는 전속이 아닌 게스트 가수로 계약되어 보다 자유롭게 활동하고 있는 셈. 동양인으로서 드라마틱한 독일무대에서 드라마틱한 메조로 두각을 보인 그는 독일에서는 레양 킴Re Yang Kim으로 불린다.

피아니스트 민혜성

영국 런던을 중심으로 착실히 기반을 다지고 있는 민혜성(26세). 서울예고 1학년때인 1979년 영국으로 유학가 런던 왕립음악원과 대학원을 마친 그는 대학원 졸업 때 최고 피아노상인 월터 맥 파렌 상 수상.

그가 유럽무대에 등장하게 된 것은 지난87년 9월 이탈리아의 밀라노에서 열린 에토레 포졸리 국제콩쿨에서 2등 없는 3등으로 입상하면서부터였다.

국내에서는 이화·경향킁쿨을 비롯한 여러 콩쿨을 석권했고 윤기선·신수정 등에게 사사받았으며, 영국에서는 마리아 다이아몬드 쿠르초·크리스토퍼 엘튼 등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이미 85년에 영국 턴브릿지 웰스 국제청소년 음악가콩쿨에서 준우승했는가 하면, 같은 해 뉴포트 국제피아노경연대회에서 1위에 입상해 영국무대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소프라노 박미혜

예원학교와 서울예고에서 성악의 기초를 다진 박미혜는 83년에 서울대 음대를 졸업하고 미국에 건너가 줄리어드 대학원에서 석사를 땄다. 86년 3월에 메트로폴리탄 내셔널 카운슬 오디션에서 최고상을 받은 것이 계기가 되어 메트로폴리탄 오케스트라와 협연의 기회를 가졌다.

박미혜가 미국 오페라계에 등장하게 된87년 9월 메트로폴리탄 측의 요청으로 바그너 오페라와 오디션을 통과하고 「라인의 황금」에 출연하는 행운을 잡으면서부터이다. 88년 1월까지 계속 공연된 메트의 오페라「링 사이클」(바그너 링 4부작)에서 박미혜는 「라인의 황금」의 요정으로 출연, 한국인으로서는 홍혜경에 이어 두번째 메트무대에 등장했고, 그것도 바그너 가수로 그 모습을 보인 것이다.

이제 국제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게된 박미혜는 금년 2월에 팜비치에서 오페라를 했고, 3월에는 뉴저지와 맨하탄에서 10여 회 공연한 오페라 「쟌니 스키키」에 출연하는 등 바쁜 스케줄을 보내고 있다.

줄리어드 시절 엘렐 폴에게 사사받은 그는 현재 콜럼비아와 ICM 등의 매니지먼트사와 접촉하면서 세계무대에서의 스타를 준비하고 있다.

첼리프트 박상민

1987년 미국의 「빅 5」Big 5 교향악단중의 하나인 필라델피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 19세의 나이로 입단한 박상민. 그는 이 교향악단 창설 이래 최연소의 나이로 오디션을 통과해 미국악단의 화제를 불러 일으켰었다.

6세 때부터 김봉·장정자로부터 첼로를 배운 그는 국민학교 5학년 때인 지난 79년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 줄리어드 예비학교를 거쳐 85년에 줄리어드 음악원에 입학했다. 줄리어드에서는 채닝 로빈스에게 사사받았다.

그는 지난 82년에 미국 전역에서 15세부터 23세 사이의 청소년 50명을 선발해 구성하는 뉴욕 스트링 오케스트라에 뽑혔는가 하면, 85년에는 1,400명의 경쟁자를 물리치고 NFAANational Foundation for Advancement in Arts에서 심사하는 미국대통령 장학생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한편 그와 2살 터울의 형인 바이얼리니스트 박상우도 지난 83년 오하이오주 콜럼버스 심포니 오케스트라 콩쿨에서 1등을 차지하는등 형제 연주가로서도 화제를 뿌리고 있다.

테너 박세원

지금 한창 유럽무대에서 성가를 올리고있는 테너 박세원. 이태리인보다도 뛰어난 벨칸토 창법을 구사한다는 평을 듣는 그는 우리나라에서 보다 유럽에서 더욱 각광을 받고 있다. 지난해 연말부터 금년 초까지 그는 독일의 립스시타트 가극장에서 공연된 오페라「토스카」에서 주역 카바라도시로 열연해 국제무대 진출에의 길을 탄탄히 다져 놓았다.「토스카」의 주역만 해도 28회나 했다는 박세원.

그는 국민학교 시절에 여러 콩쿨에서 우승했고, 서울예고를 거쳐 서울대 음대 성악과를 나와 이탈리아 유학의 문을 두드렸다. 오시모 음악원에서 공부를 계속한 그는 지도 시님베르기 선생을 만나 실력을 연마해 나갔다. 시님베르기 선생은 박세원의 목소리만으로 그의 지도를 자청했던 것이다.

지난해 연말「토스카」에 출연하면서 그는 또 이탈리아 여러 곳에서 베르디의 「레퀴엠 」과 베토벤의 「합창교향곡」의 솔리스트로 출연해 격찬을 받기도 했다. 또한 그전인 87년 5월에는 로마의 바르베르니 궁전 연주실에서 이태리 오페라「아리아」를 불러 초청인사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으며, 그때 지휘한 시노폴리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작곡가 박영희

남부 독일 프라이부르크에서 제2의 윤이상이라는 주목을 받으면서 문제작을 내고있는 작곡가 박영희. 1945년 충북 청주에서 태어 난 그는 서울대 음대에서 작곡을 공부하고 74년 독일학술교류회 장학생으로 프라이부르크 대학에 유학 가 클라우스 후버 교수에게 사사받았다.

독일로 유학 간 그 이듬해인 75년에 첫 작품인 플루트독주곡 「Dreisam Nore」를 발표해 주목을 끌기 시작한 그는 이때부터 1년에 한 곡 정도를 발표하고 있다.

한 작품을 쓰기 위해서 반 년 이상 고민한다는 그는 좋은 작품은 정신력에서 나오는 것이며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의 이야기를 담아야 한다고 말한다.

지난해에도 ISCM 주관 '87국제음악제에서 「아가」라는 작품을 발표해 유럽 작곡계의 이목을 집숭시킨 그는, 그동안 발표한 작품이 클라리넷과 현악 3중주를 위한「만남」(1977년), 18개의 악기와 5명의 여성 성악가를 위한 「눈」(78년), 대 오케스트라를 위한 「소리」(79년), 12개악기를 위한「마디」(81년), 피아노와 타악기를 위한「편경」(82년), 1인의 여성 성악기를 위한 「불꽃」(83년), 첼로독주를 위한「AA-GA I」(84년), 비올라·첼로·콘트라바스를 위한 「노을」(85년), 6명의 여성 성악가를 위한 「횐눈」(86년) 등의 작품이 있다.

피아니스트 백건우

프랑스 인상주의 음악, 특히 라벨의 스페셜리스트로 불리는 백건우는 최근에 메시앙과 베토벤을 다시 연구해 보겠다며 음악에 대한 구도적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는다.

8세 때부터 피아노를 쳤으며 줄리어드로 유학가 로지나 레빈에게 사사받은 그는 30여 년 외국생활을 지나 40대 나이에 정상급의 연주자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지난 85년만 해도 프랑스 엑상프로방스 페스티벌에서 초청 리사이틀을 가졌고, 영국 웨일즈 BBC방송국 초청연주회, 런던과 버밍헴 BBC의 초청연주회도 가졌다. 그 전해에는 라로크 당테론 국제 피아노 페스티벌에서 초청연주회를 가졌고, 87년에는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협연했고 레코딩도 했다.

또한 86년에는 네덜란드 리스트 페스티벌에서 초청연주, 미국 순회연주, 영국의 알드버러 페스티벌 초청 연주, 유럽지역 청소년 오케스트라와 함께 유럽 순회연주, 아일랜드와 쾰른에서의 녹음과 독주, 이밖에도 파리와 런던에서 수차례의 연주회를 개최했었다.

피아니스트 서주희

1967년 서울에서 태어난 서주희는 4세에 피아노를 시작, 9세에 독주회를 가졌고 10세에는 국립교향악단과 베토벤 피아노협주곡 1번과 3번을 연주할 만큼 어려서부터 그 재능이 뛰어 났다. 11세에는 KBS향과 그리그의 피아노협주곡을 협연했고, 이해 (1977년)에 로스앤젤레스의 「젊은 음악인 재단」초청으로 미국에 건너갔던 그는 커티스 음악학교 오디션에 합격하며 입학이 허용된다.

커티스에서 볼레트 교수의 사사를 받으며, 또한 개인적으로 레온 플라이셔 교수의 레슨도 받으며 급속도로 성장을 한 그는 79년 뉴욕 필하모니의 젊은 음악가 콩쿨에서 우승해 미국 악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같은 해 링컨센터에서 주빈 메타가 이끄는 뉴욕 필과 차이코프스키 협주곡1번을 성공리에 협연한 그는 곧이어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 협연, 홍콩 필하모닉오케스트라·런던 필하모니 등 세계 유수의 교향악단과 협연하는 등 국제무대에서 두각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던 그가 국제무대에서 그 위치를 확고히 한 것은 84년 9월 영국 리즈 국제피아노 컴피티션에서 최연소의 나이로 2등 입상의 영예를 안으면서부터. 지난3월 독일에서 함부르크 방송교향악단과 협연, 이틀간 열린 이 연주회에서 지휘자는 중공의 대표적 지휘자인 탕무하이(潟沐海)로 현재 그는 북경교향악단 음악감독 겸 상인지휘자이다.

「20세에 이미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대열에 올라섰다」고 격찬받는 서주희는 현재 이스라엘 필과의 아시아 투어 콘서트도 계획잡고 있다. 그런가 하면 그와 세 번이나 협연을 한 탕무하이는 중공에서의 연주초청도 계획하고 있다.

피아니스트 서혜경

1960년 서울에서 태어나 동경의 다이또중학교, 그리고 미국 매네스 음대를 거쳐 줄리어드 대학원 박사과정을 다녔다. 5세때 피아노를 시작하여 12세와 13세 때 5.16 민족문화상을 연거푸 수상할 정도로 재능이 뛰어났던 그는 미국 국제 영 아티스트 콩쿨 1위, 쇼팽콩쿨·줄리어드 차이코프스키 콩쿨 등에서 입상하고, 80년 마침내 세계적 권위의 이탈리아 부조니 국제콩쿨에서 2위에 입상해 국제무대에 알려졌다. 83년 다시 뮌헨 국제콩에 재도전 1위 없는 2위에 입상함으로써 그가 정상급의 연주자임을 재확시켜 주었다. 후부터 그에게는 연주회와 레코딩 주문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쇄도했다. 86년 2월에는 영예의 링컨센터상도 수상했다. 세계 곳곳의 교향악단과 협연을 거친 그는 지금 ICM소속으로 뉴욕에 거주하며 2주일에 한번씩 규칙적인 연주회를 갖는다.

그에 대한 가장 최근 소식은 87년 11월 일본 순회연주를 성공리에 마쳤고, 이 결과 88년에도 20여 차례 일본 순회연주를 계약했다. 또한 그동안 미루어 왔던 레코딩도 88년에 마칠 예정이며, 40대 이후에는 오페라 지휘에도 나설 생각이다.

플루티스트 송여진

1964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11세 때부터 플루트를 시작해 김기순에게 사사받았다. 서울예고 1학년 재학중 81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줄리어드 예비학교와 PCS고교를 83년에 졸업하고 맨하탄 음대로 진학했다. 미국에서의 스승은 맨하란 음대 교수인 랜솜 월슨과 전 뉴욕 필의 수석 플루티스트였던 줄리어스 베이커였다.

3학년 때 유럽으로 옮겨 비인 국립아카데미로 전학한 그는 비인 필의 수석 플루티스트인 볼프강 슐츠에게 배웠다.

이미 지난해부터 유럽무대에서 두각을 보이기 시작한 그는 금년 2월 체코 필하모닉과 협연했으며 , 5월에는 대만성 오케스트라, 7월에는 베른 심포니 오케스트라 협연 예정으로 있어 유럽 플루트계에서 「떠오르는 새별」로 불리고 있다.

플루티스트 송영지

1987년 11월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린부키 국제콩쿨에서 1등으로 입상, 이제 본격적으로 국제무대에서 성장하고 있는 송영지(22세). 지난 75년 이화·경향 콩쿨에서 1등 입상을 계기로 플루티스트의 꿈을 가꾼 그는 예원중학교와 서울예고에서 플루트의 기초를 다졌다.

예고 2학년 때 미국으로 건너가 줄리어드 예비학교를 다닌 그는 83년 플루트 전공 한국학생으로는 처음으로 줄리어드 음악원에 진학, 뉴욕 필의 플루트 수석을 지낸 줄리어스 베이커에게 사사받았다. 그러던 중 니스 여름음악제에 참가했다가 알랭마리옹 교수를 만나 84년 파리 고등음악원으로 전학, 87년 플루트 전공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파리 고등음악원을 졸업했다.

지난해 부키 국제콩쿨 1위 입상으로 3회의 콘서트를 보장받고 있는 그는 88년 1월 프랑스 보르도에서 리사이틀을 가져 국제무대에 나서기 시작한 그는 현재 스위스 제네바 음악원에 다시 진학, 막상스 라류에게 사사받고 있다.

바리톤 신경욱

미국 텍사스 주립대학의 성악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면서 성악과 오페라를 지도하고 있는 바리톤 신경욱. 이미 서울대 음대 재학중 문교부 주최 콩쿨에서 1등을 했고, 서울대 총장상을 받고 졸업했다. 이후 미국 인디애너 주립대에 유학 1969년부터 75년까지 성악교수법과 오페라 연출로 각각 석사학위를 받았다.

인디애너 주립대에 유학 가기 전 그는 약관 20대 후반의 약관의 나이로 1963년부터 68년까지 KBS합창단을 이끌어 국내의 독보적인 직업합창단으로 올려놓았다 .

미국 내에서 오페라 주역 출연만 해도20여 작품에 등장한 그는 오페라와 뮤지컬 연출도 10여 작품에 이르고 있어 인디애너주와 텍사스주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있다.

바이얼리니스트 안용구

1968년 피바디 음악원 교수 취임 초청으로 미국으로 건너간 후 줄곧 그곳에서 활동해 온 안용구(61세)는 60년대 한국 바이얼얼린계의 주역이었다. 서울대 음대 제1회 졸업생인 그는 학교 졸업 후 이화여고 교사로 재직하다가 54년 유럽으로 유학을 떠났다.

서독의 뮌헨 음대와 오스트리아의 비인국립아카데미 , 영국의 길드홀 음악학교 등에서 바이얼린을 공부한 그는, 59년 귀국해 국립교향악단의 악장과 서울대 음대 교수로 활동했다. 이어서 4중주단, 3중주단, 합주단 등의 실내악단을 조직하여 실내악의 중요성을 한국악단에 인식시킨 그는 국내에서 서울시향의 악장도 역임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다가 68년 도미, 현재까지 피바디에서 교수로 있으면서 동시에 콜럼비아시에서 콜럼비아 컴뮤니티 오케스트라를 조직하여 한국에서 못다한 실내악운동을 계속하고 있다.

서울대 재학시절 안성교와 문학준에게 바이얼린을 배운 그는 유럽 유학에서 칼 플레쉬 계열의 바이얼리니스트 칼 프로인트·오드너 폰서프·막스 호스터프 등에게 사사받았다.

바이얼리니스트 양성식

바이얼리니스트이며 전 서울대 음대 교수였던 양해엽의 아들인 바아일리니스트 양성식. 1966년 서울에서 태어나 4세 때부터 바이얼린을 배운 그는 12세 때 프랑스로 건너가 말메종 음악원에서 1년을 배우고 13세 때 파리 고등음악원의 오디션에 합격하여 그곳에 입학했다. 3년의 정규과정을 마친 후 다시 석사과정에 진학하여 18세에 음악분야의 박사과정인 트르와지엠 시클을 1등으로 마쳤다.

79년 파리 고등음악원에 입학하던 해 말메종 콘서바토리 콩쿨에 나가 뜻밖에 1등을 차지했고, 83년에는 보르도 국제음악페스티벌에서 은상을 받았다. 이어서 제노바에서 열린 파가니니 국제콩쿨에서 3위, 파리의 롱 티보 국제콩쿨에서도 3위의 영예를 안았다. 이때 르몽드지는 「양성식의 차이코프스키 바이얼린 협주곡은 너무나도 훌륭하고 완벽했다」고 했으며, 피가로지는 「순수하고 우아하며 영롱한 감상을 안겨 주었다」고 평했다.

지난 84년 이미 연주자고서는 최고의 과정인 파리 고등음악원의 트르와지엠 시클을 통과한 그이지만, 현재 이프라 니만 교수의 발탁으로 런던의 길드홀 음악한교의 솔리스트 클래스의 장학생으로 있다. 파리고등음악원 시절에는 제라르 풀레와 미셸 오클레에게 사사받았다.

테너 옥인걸

1969년부터 미국 매사추세츠 주립대학의 로웰 음대에 재직, 현재 성악과장과 오페라 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는 옥인걸. 타고난 미성으로 알려진 그가 성악의 길로 접어든 것은 1960년 도미하여 슈타크 호수의 여름음악캠프에 참가하면서부터였다. 마침 이 여름음악캠프에 메트로폴리탄에서 활동했던 조세핀 앙트완느가 성악교수로 왔다가 옥인걸을 발견한 것이다. 그의 주선으로 보스턴의 뉴잉글랜드음악원에 들어가게 된 옥인걸은 이 학교에서 연주학위(64년)와 음악석사(66년)를 받고 미국무대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65년 뉴잉글랜드 컴피티션에서 1위, 68년 제네바 국제콩쿨 입상, 69년 뉴욕의 콘서트 아티스트 길드 오디션Concert Artist Guild Audition이 주최한 콩쿨에서 1위에 입상하여 카네기 리사이틀 홀에서 뉴욕 데뷔 공연을 가졌다.

67년에는 와그너 코럴의 수석 독창자로 미국과 일본 순회연주, 72년에는 뉴햄프셔 오페라단의 「마적」공연에 주역으로 출연, 80년에는 시카고와 토론토에서 독창회를 갖는 등 현재까지도 미국과 캐나다 무대에서 바쁘게 활동하고 있다.

비올리스트 유관일

케네스 슈케머혼이 이끄는 홍콩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비올리스트로 있는 유관일(35세). 1973년에 창단되어 비교적 짧은 시일에 놀라운 발전을 거듭한 홍콩 필과 유관일이 인연을 맺은 것은 지난 78년부터이다.

75년 유관일은 연세대 음대를 졸업하고 서울시향 단원으로 활동했는데, 73년 쥬네스 뮤지컬 1기생으로 발탁되어 이스라엘연주를 가지면서 당시 홍콩 필의 지휘자였던 한스퀸터 모모에게 특별 선발되었다. 지금까지 10여 년간 홍콩 필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홍콩 밥티스트 칼리지의 비올라 교수로도 재직중이다.

지휘자 유종

소련 출신 망명 지휘자 박탕 조르다니에게 발탁되어 그의 문하생으로 있는 유종은 예일 음악대학원생을 주축으로 모인 관현악단 신낭만파협회 Neo Romantic Academy를 창단, 지휘를 맡고 있다.

1957년 서울에서 출생, 이미 4세 때 작곡과 지휘를 하고 싶다고 했다는 그는 그러나 부모의 반대에 부딪쳐 인문계 공부를 했다. 72년에 미국 커네티컷주의 테프트스쿨에서 공부한 뒤 76년에 펜실베니아 대학에 장학생으로 진학하면서 비로소 작곡과 지휘 공부를 시작했다. 작곡은 신낭만파 작곡가인 조지 크럼과 제이 라이스 밑에서 공부했으며, 지휘는 로저 니렌버그에게 배웠다.

펜실베니아 대학시절 1년생으로는 학교사상 처음으로「딘 컴포셜스 길드」Denn Composers Guild라는 자신의 곡을 초연했으며, 대학 오케스트라 음악감독으로 쿠르트 바일의 「서푼짜리 오페라」를 필라델피아에서 지휘하여 미국악단에 선을 보이기도 했다.

이때부터 그는 신낭만파 음악, 특히 라흐마니노프 음악에 심취하여 펜실베니아대학 졸업논문도 라흐마니노프의 교향곡제번에 대해서 썼다. 대학을 마치고 그는 다시 줄리어드 대학원 지휘과에서 공부했으며 , 뉴저지교향악단의 학생 음악감독을 맡기도 했다.

「예술은 감정의 표출인데, 커뮤니케이션이 안되는 표현은 의지가 없다」고 전위음악에 대해 비판을 가하는 그는 지휘에서「고전적이며 진솔한 지휘솜씨를 갖고 있다」는 평을 듣는다. 경제·경영·불문학 등 광범위한 교양을 쌓은 그는 음악에서도 작곡과 지휘 외에도 어 려서부터 피아아노와 첼로를 익혔다. 이밖에도 가야금을 틈틈이 공부했으며 김병섭에게 배운 설장고 솜씨도 뛰어나다는 소리를 듣는다. 국내 데뷔는 지난 83년 고려교향악단을 지휘한것이 첫무대 이후부터 1년에 한두 차례씩 국내 무대에 등장하는 그는 지난해부터 「신낭만파협회」를 이끌면서 미국악단에 서서히 부상하고 있다.

작곡가 윤이상

1917년 경남 산청 출생. 13세 때 옆에 살던 동경유학생을 통해 바이얼린을 잠시 배운 그는 14세에 첫 작품을 습작했다. 17세에 음악을 공부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온 그는 2년 후 동경유학 길에 오른다. 상업학교를 다니며 틈틈이 음악을 공부하겠다는 조건으로 부모의 허락을 받은 것이다. 동경에서는 작곡가 토모지로 이께노우찌의 문하생으로 들어갔다.

해방후 그는 통영여고, 6·25 동란 후 덕성여대. 숙명여대 등에 출강했던 그는 1956년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 고등음악원에서 작곡공부를 다시 시작한다. 그 무렵 그는 그의 생애의 중요한 스승인 보리스 블라허를 만나게 되고, 블라허의 주선으로 첫 작곡작품이 다름슈타트에서 인정받는 계기가 이루어진다. 그때의 작품이「일곱악기를 위한 음악」이다.

58년 그는 당시 현대음악의 중심지였던 다름슈타트 현대음악코스에 참여했고 이어서 가우데아무스 현대음악제에서도 그의 작품이 성공을 거둔다. 64년 그는 우여곡절 끝에 베를린에 정착하게 되고 이때부터 오페라「리유톤의 꿈」(65년), 「나비부인」(68년), 「요정의 사랑」(69∼70년), 「심청」(71-72년), 합창곡 「나비의 꿈」(66년), 관현악곡 「예악」 (66년) 등의 걸작들이 쏟아져 나온다. 67년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에 연류되어 한때 옥고도 치른 그는 2년 후에 풀려나 다시 베를린으로 돌아갔고, 하노버 음대 출강을 나가며 다시 작곡에 몰두 그 2년 후에는 베를린 음대로 교수자리를 옮겼다.

70년에 킬문화상을 수상했고, 73년 베를린 음대 정교수가 되었으며 함부르크시와 베를린시의 아카데미회원으로도 선임되었다. 그는 현재까지 각 장르별 수백 편의 작품을 썼으며, 레코딩 작품만도 수십편에 이르고 있다.

88년 1월, 미국의회도서관 제정 금년도 세르게이 쿠세비츠키 음악재단상을 받기도 했다.

피아니스트 이대욱·문용희 부부

여류 피아니스트인 김성복의 장남으로 태어나 5세부터 모친으로부터 피아노수업을 받은 이대욱(41세)은 고등학교 2학년때 동아콩쿨 피아노부 1등을 차지하고 곧 미국으로 건너가 줄리어드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그는 샤사 고로드니츠키 교수에서 사사를 받았으며, 이어서 로지나 레빈과 마틴 캐닌 교수의 가르침을 받았다.

이후 그는 78년년에 다시 피바디 음대 지휘과에 입학, 프레데릭 프라우스니츠와 허버트 블롬슈테트에게 지휘를 사사받고 지휘자로서도 활동을 시작했다. 콩쿨의 경력은 줄리어드 콘체르트 컴피티션과 로스앤젤레스 영 뮤지션협회 주최 콩쿨에서 1등을 했으며, 시카고시가 음악인에게 수여하는 미카엘상도 받았다.

84년부터 미시건 주립대학에서 피아노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그는 지난해부터는 이 대학교 대학원에서 지휘를 가르치기도 하며, 학교 오케스트라의 부지휘자 직책도 맡고 있다.

한편 피아니스트 문용희(40세)는 서울대 음대 1학년 때 오스트리아 비인으로 건너가 비인 국립아카데미에서 공부했다. 비오티 국제콩쿨과 제네바 국제콩쿨에 입상하기도 한 그는 미국에 건너가 인디애너대학에서 게오르기 세보크 교수에게 다시 피아노수업을 받았다. 이때 그는 이대욱과 만나 지난 75년 서울에서 결혼, 현재 이대욱과 함께 미시건 주립대 피아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소프라노 이명숙

1960∼68년까지 서울대 음대에 재직하며 많은 연주활동을 한 소프라노 이명숙은 68년 미국으로 건너가 워싱턴에 거주하며 조지 워싱턴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경기 여고와 서울대 음대를 마치고 56년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세인트 캐스린대학에서 공부했으며 뉴잉글랜드 음악학교에서 아티스트 디플롬을 획득했다. 이후 그는 엘레너스티버 성악콩쿨 특선, 마리안앤더슨 전 미국 성악콩쿨에서 입상했으며 카네기 홀 리싸이틀을 비롯한 동남아 등지에서 연주회를 가졌다.

미국 성악교수협회 주최 전미국성악경연대회 심사위원도 역임한 그는 조지 워싱턴대학에 오기 전 트리니티대학과 버지니아 커먼웰스대학 교수를 거쳤다. 서울대교수인 소프라노 이경숙과 자매로 언니가 된다.

바이얼리니스트 이미경

1985년 벨지움의 브뤼셀에서 개최된 엘리자베드 국제콩쿨에서 은메달(5위)을 수상한 이미경(29세). 「과장된 표현없이 단아하면서도 정확한 연주를 한다」는 평을받는 그는 82년 쾰른 음대콩쿨과 자브뤼켄의 전 서독콩쿨에서도 각각 1위를 했다.

서울예고 2학년 때 스위스로 건너가 메뉴힌 아카테미와 서독의 쾰른 음대를 졸업한 이래 주로 유럽에서 활동하고 있는 그는 87년 여름 살바르토 아카르도의 초청으로 나폴리에서 실내악을 함께 열기도 했다.

85년 스위스 윔클러 매니지먼트와 계약을 맺고 있는 그는 현재 스위스 메뉴힌 아카데미 조교로 있으며, 제네바와 스페인의 섬머 스쿨에서도 강의를 한다.

85년에 비오티 국제콩쿨에서 우승한 피아니스트 이미주와는 쌍둥이 자매이때, 줄리어드 대학원을 마치고 보스들에서 연주활동을 하고 있는 피아니스트 이미혜가 언니이다.

바이얼리니스트 이성주

비니압스키 콩쿨 1등, 시벨리우스 콩쿨최고상, 차이코프스키 콩쿨 특별상, 엘리자베드 콩쿨에서 특별상을 받아 세계 바이올린계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한 이성주·아마추어 가수였던 부친의 영향으로 바이얼린을 시작한 그는 9세에 서올시향과 협연하여 유망주로 떠올랐다.

10세에 한국 소년소녀 경연대회에서 입상하고, 13세에 미국으로 건너가 줄리어드 음악학교에서 이반 갈리미언, 마가렛파디, 도로시 딜레이에게 사사받았다.

1977년 그가 뉴욕에 데뷔했을 때 뉴욕타임즈는 그에게서 무한한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의 음악성과 테크닉에 대해서 격찬했다.

「곡 전체를 통틀어서 그냥 흘러가는 구석이 없이 자신있고 정확한 스타일링을 구사한다‥‥ 특히 현대음악 연주에 있어서 뛰어난 원색적 플레이를 들려주며, 감성이 결여된 현대음악에 감성을 불어넣는 재질이 있다.」

이후 그는 솔리스트로서 리사이틀과 협주곡에 주력, 미국 전역의 오케스트라와 무대를 꾸며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기시작했다. 이밖에도 실내악에서도 많은 활동을 보여 콜로라도의 아스펜 뮤직 페스티벌, 아리조나의 플랙스태프 페스티벌 등에 참가하이 샐내악의 대가들과 어깨를 같이했다.

슈만의 소나타 제1번과 제2번의 레코딩도 내고 있는 그는 현대음악 연주에서 뛰어나다는 평을 받고 있으며, 그 자신도 스트라빈스키·프로코피에프를 특히 좋아한다고 말하며, 미국 현대작곡가들과 가깝게 지내고 있다.

그림을 그린 모친의 영향을 받아 미술에도 조예를 보이는 그는 현재 1년에 20에서 25회의 연주여행을 다니고 있다.

지휘자 이윤국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에 있는 모짜르테움 음악원 지휘과 교수이자 챔버 오케스트라 신포니에타 잘츠부르크의 음악감독인 이윤국(35세). 충남 공주에서 태어나 국내에서는 이렇다할 음악교육을 받지 못했던 그는 13세 때 뉴욕으로 이민, 처음에는 우주물리학에 정진했다. 그러다가 뉴욕의 월리엄즈 칼리지에 들어가면서 뉴욕 올바니 심포니 상임지휘자 줄리어스 헤지를 만나 작곡과 지휘공부를 하게 된다. 또한 이 학교 음악과 교수 로버트 배로의 사사도 받았다.

이곳에서 그는 교내 오케스트라를 창단, 첫 지휘자가 되었으며 76년 이 학교를 졸업하자 잘츠부르크 모짜르테움 지휘과로 진학한다. 미국에서는 작곡을 세자르 브레스켄한테 배우고 지휘는 제랄드 빔베르거에게 계속 배웠고 잘츠부르처에서는 지휘를 마이클 길덴에게 배웠다.

찰츠부르크 모짜르테움을 마친 그는 이학교의 예비교수로 출발하는 한편 모짜르테움 학생 20여 명으로 창단된 신포니에타잘츠부르크를 이끌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이 챔버 오케스트라는 잘츠부르크에서 최고 수준의 음악적 기량을 자랑하는 악단으로 성장, 방송활동과 순회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바리톤 이재환

1987년 이탈리아의 제노바 오페라 페스티벌에서 베르디의 「리골레토」중 레골레트 역을 맡아 화제가 되었던 바리톤 이재환. 그곳 제노바에서 동양인 남자를 주역으로 쓴 것은 이재환이 처음으로「리골레토」를 지휘한 다니엘 오란(나폴리 산 카를로 극장 상임지휘자)은 약간의 발음 이외에는 외국인임을 전혀 느끼지 못했으며 음악성과 테크닉이 모두 좋다고 평했다.

국내에서 중앙대를 마치고 이탈리아 오시모 아카데시와 페자로 음악원에서 공부했고 현재 밀라노 극장 아카데미에서 계속 수업받고 있는 그는 86년에도 「가면무도회 」의 주역으로 발탁되었었다 . (교통사고로 출연 못함). 그가 주로 부르는 레퍼토리는 베르디 작품이 대부분이며, 그 자신 베르디를 부르지 못하면 바리톤의 자격이 없다고 믿는다.

첼리스트 이창우

서울대 음대 재학중 세계적인 첼리스트 야노스 쉬타커의 눈에 띄어 미국 인디애나대학에 장학생으로 입학, 그후 멕시코시티로 가서 멕시코 할라파 교향악단의 수석주자로 있으면서 직업적인 연주활동을 시작했다. 솔리스트로서의 활동보다는 오케스트라의 멤버고 좋은 지휘자와 함께 훌륭한 연주를 할 때가 좋다고 말하는 그는 멕시코에서 CFE 스트링 콰르텟의 멤버로서도 활동했다.

그후 그는 캐나다로 건너가 캐나다 국립예술센터 심포니와 아틀랜틱 심포니의 수석주자를 거쳐 현재는 미국 볼티모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첼로 수석으로 있다.

「볼티모어 심포니는 미국 5대 교향악단을 제외하면 첫손에 꼽히는 일급 교향악단인데, 1년에 250회 정도의 연주를 하고 있읍니다. 정기연주·방송출연 레코드 취입 등으로 무척 바쁘게 돌아가는 것이 미국 교향악단의 사정이지요. 」

첼로를 인간의 심층을 표현하는 악기라고 정의하는 그는 볼티모어 심포니에서 프랜치 호른 주자였던 키르처 라우튼과 만나 결혼했다. 말러의 음악을 특히 좋아하는 그는 미국 5대 교향악단의 수석주자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밝힌다.

바이얼리니스트 정경화

1947년 서울에서 태어나 4세부터 피아노 수업을 받기 시작했으나 별 흥미를 못느끼다가 6세에 바이얼린으로 전환하면서 급속도로 성장, 9세에 서울시향과 멘델스존의 협주곡을 연주했다. 61년 줄리어드로 가 이반 갈라미언의 문하생이 된 그는 67년 19세의 나이로 리벤트리트 국제콩쿨에서 핑커스 주커만과 공동1위 하여 세계무대로 부상했다. 뉴욕 필과 성공적인 협연을 갖는가 하면 70년에는 영국으로 건너가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차이코프스키를 협연해 일대 센세이션을 일의켰다.

이어 로린 마젤의 주선으로 베를린 데뷔, 다시 앙드레 프레빈과 런던에서 활동,그 다음에 사를르 뒤토와를 만나 몬트리올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활동하는 등 세계 정상의 무대에서 끊임없는 찬사를 계속 받았다.

70년 런던 데뷔 이후 앙드레 프레빈이 이끄는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시벨리우스 협주곡을 데카 판으로 낸 이래 레코딩도 수없이 취입한 그는 이제 뉴욕·런던·파리·베를린 등 세계 어느 무대에서도 정상의 연주를 들려주고 있다. 이것을 입증이라하듯, 88년 4월 타임지는 최근 세계 바이얼린계의 우먼파워 대두를 대서 특필하면서 세계정상의 여류 바이얼리니스트 5명을 선저했다. 안네-소피 무터·빅토리아 뮐로바·나디아 살레르노 손넨버그·미도리, 그리고 정경화가 그들인데 그중에서도 정경화를 제일 선두주자로 꼽았다.

지난 84년 결혼, 아들을 출산하고 86년 2월 뉴욕 링컨센터 에서 동독의 라이프치히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와 브람스를 연주, 대성공을 거두어 정상의 연주를 재개한 그는 현재 결혼 전과 다름없는 바쁜 연주를 계속하고 있다.

지휘자 정명훈

1953년 서울에서 태어나 5세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해 7세 때 서울시향과 하이든의 협주곡을 협연하는등 일찌기 재능을 보인 정명훈. 61년 누나 정경화·명화 등과 미국로 유학을 떠나 그 이듬해 미국 연예음악콩쿨에서 입상하여 시애틀교양악단과 6회 공연을 갖는 등 10세 이전에 벌써 두각을 보이기 시작했다. 69년 콜럼비아 아티스트사는 피아니스트로서 그와 계약, 최연소의 프로 연주자로 주목을 끌었다.

73년 뮌헨 국제콩쿨 2위 입상, 74 년에는 차이코프스키 국제콩쿨에서 2위를 해 국제적 피아니스트로 발돋움했다. 그러던 그가 지휘자로 변신해 로스앤젤레스 필의 부지휘자가 건 것이 78년, 이후부터 그에게는 세계 유명 교향악단의 객연초청이 쇄도한다.

84년 베를린 필의 객원지휘로 정상의 무대를 넘보기 시작한 그는 서독의 자브뤼켄 방송교향악단 상임지휘자와 이스라엘 필객원지휘자로 활동하면서 뉴욕 필 등 세계 유수의 교향악단의 객원지휘로 성공적인 무대를 꾸민다. 이어서 오페라 지휘에도 손을 뻗치기 시작한 그는 87년 오페라의 본고장 피렌체의 시립오페라 극장에서 무소르기스키의「보리스 고두노프」로 이탈리아 무대에 공식 데뷔 뜨거운 갈채를 받고 피렌체 오페라 극장과, 3년의 계약을 맺었다. 이로써 그는 피아니스트, 교향악단지휘자 외에도 오페라 지휘자로서 세계무대에서 그 위치를 확고히 하고 있다.

바이얼리니스트 정승영

1975년 동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호주의 멜버른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종신단원이 된 바이 얼리니스트 정승영. 그는 이 교향악단 외에도 실내악단 펄하모니아 오브멜버른에서 활동하고 있다. 지난 72년에 창단된 이 실내악단은 12명의 세계 각국 연주자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85년부터 정승영이 리더로 이끌고 있다.

서울대 음대를 졸업하고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를 마친 그는 케네디·록펠러 재단의 방콕 스트링 콰르텟의 바이얼린 주자로 있다가 호주로 건너가 75년 이래 그곳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하피스트 정혜연

미국 루이지애나 주립대학의 교수로 재직중인 하피스트 정혜연. 이교숙의 지도아래 이화여대 출신 첫 하피스트인 그는 지난 73년 이스라엘의 국제하프콩쿨에서 우승한 후 유명한 하피스트인 스잔 맥도날드의 사사를 받았다.

이후 그는 베이튼 루즈 심포니의 하피스트를 거쳐 뉴욕 국립오케스트라의 카네기홀 시리즈 멤버로 활약하는 등 1년에 60여회의 연주회에 참여하고 있으며, 바이얼리니스트 정승영과 남매간이다.

소프라노 조수미

1985년도에 비오티 국제콩쿨에서 우승했고, 이어서 국제콩쿨에서 1등한 아티스트들만 모여 경연을 벌이는 아레나디 베로나 콩쿨에서 1등을 차지하는 등 국내외에 화제를 뿌렸던 조수미가 이번에는 프랑스순회공연에서 모짜르트의 「후궁에서의 도중」에서 열연을 해 또다시 격찬을 받고 있다. 이를 계기로 프랑스의 음악잡지「기드데 뮤지끄」에서는 지휘자 세미온 비쉬코프와 조수미를 다른 8명의 정상급 신인과 함께 다루며 「21세기의 거장」들이라고 평했다.

6세부터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고, 국민학교 때는 가야금과 무용도 배웠단. 장학생으로 선화예술중 고등학교를 다녔고, 서울대 음대를 다니다가 2학년때 산타 세칠리아 음악원으로 옮겨 공부를 계속했다. 이 음악원을 1학년 마치고 심사위원들의 평가를 거쳐 4학년으로 월반하기도 해 주위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88∼89 시즌에 메트로폴리탄 무대에 등장하게 될 조수미. 89년에는 카라얀과 독일 그라모폰사에서「루치아」를 레코딩할 예정으로 있다.

첼리니스트 조영창

82년부터 서독의 쾰른 방송교향악단의 수석 첼리스트로 활약해 온 조영창(30세)은 지난해 5월부터 에센 국립음악대학의 첼로과 정교수가 되어 연주자와 스승의 길을 걷고 있다. 성악가인 조상현의 외아들로 5세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다가 국민학교 3학년 때부터 첼로를 시작한 그는 예원중에 들언가면서부터 김광자·전봉초에게 사사받았다.

13세 때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로렌스레서·야노스 쉬타커 등에게 사사받으면서 80년 커티스 음대를 졸업, 81년에 파리에서 열린 로스트로포비치 국제콩쿨에 나가 4등에 입상했다. 이어서 82년에는 뮌헨국제콩쿨에 도전, 1등 없는 2위에 입상해 유럽무대에 그 이름이 알려지지 시작했다. 84년에는 뉴욕 데뷔를 해 뉴욕타임즈로부터 찬사를 받은 그는 85년에 다시 카잘스국제콩쿨에서 코다이 음악상과 현대작품 연주상을 받았다.

현재 1년에 80회 정도의 연주와 한달에 6회 정도의 방송녹음을 하는 등 정력적인 활동을 벌이고 있는 그는 조영방·영미 두 누나와 조트리오를 결성해 트리오 연주도 하고 있다. 조트리오는 77년 제네바 트리오 콩쿨에서 2등을 했고, 80년에는 뮌헨콩쿨에 도전하여 3등을 해 조영창은 트리오로도 국제적 인정을 받고 있다.

작곡가 신은숙

85년도에 서울대 음대 작곡과를 졸업하고 서독 함부르크 음대에 유학하고 있는 진은숙은 서울대에 재학중이던 84년 ISCM(국제음악협회)주최 세계음악제에 출품작입선으로 국제무대에 처음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입선작품은 파울 클레의 그림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한 「플루트·바이얼린·피아노를 위한 형태 」라는 곡이다 .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배웠고, 교회에서 오르간을 연주했던 그는 국내 대학시절 강석희 교수에게 사사받았다.

또한 그는 85년 네델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가우데아무스 콩쿨에서 「세 대의첼로를 위한 분광」Spectra으로 1위에 입상해 그 진가를 재확인시켰다. 그는 이를 계기로 87년도 가우데아무스 콩쿨을 위한 시범 작품도 의뢰받아 작곡했다.

그리스 오페라 페스티벌 위촉작품인 오페라 「트로야의 여인들」을 작곡, 86년에 크레타에서 초연하기도 한 그는 이후 암스테르담, 이탈리아의 몬테풀치아노 페스티벌, 덴마크의 아르후스 등지에서 작품 연주회를 가졌다.

1961년 생으로 서울대에서 강석희, 독일에서는 리게티에게 사사받았다.

피아니스트 한동일

1941년 함남 함흥에서 태어나 3세 때부터 피아노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그가 어린시절을 보낼 무렵은 6·25의 암울한 시기. 그러나 그는 해군정훈음악대에 있었던 부친의 도움으로 해군어린이음악대 단원으로 선발되었고, 이어 미 제 5공군 사령관의 주선으로 줄리어드 예비학교로 유학 떠난다. 그는 이곳에서 로지나 레빈에게 사사받았다.

14세 때 뉴욕 필이 주최하는 영 피플즈콘서트에서 젊은 음악가상을 수상한 그는 56년 15세의 나이로 카네기 홀 무대에 선다. 그는 이곳에서 뉴욕 필과 차이코프스키 협주곡 1번을 쳐 「한국에서 온 신동, 천재 피아니스트」라는 찬사를 받았다.

줄리어드 본과로 진학한 그는 18세의 나이로 시카고 내셔날 바이에날 미카엘 경연대회에서 1위를 차지했고, 65년에는 리엔트리트 국제콩쿨에서 1위를 차지해 국제무대 진술의 기회를 잡았다. 그로부터 피아니스트의 길 3년. 68년 런던 연주회에서 몸에 이상이 오기 시작했다. 더 이상 연주가 어려운 상태에 빠지게 된 것이다. 그런데 마침 그 무렵 미국 인디애너 주립대학에서 초청장이 날아와 그는 피아노 교수로서의 인생을 다시 시작한다.

이로부터 피아니스트보다는 교수의 길에 더 열중한 그는, 그러나 피아니스트로서의 직분 또한 잊지 않고 미국과 한국무대에서 연주회를 자주 열고 있다. 현재 남부 텍사스 주립대학 음악과 교수로 재직중.

바이얼리니스트 함혜영

1986년 10월초 주빈 메타가 이끄는 뉴욕 필하모니 의 바이언린 주자로 정식 입단한 함혜영. 당시 그는 250여 명의 경쟁자를 물리치고 뉴욕 필 오디션에 합격했다.

1962년 서울 출생의 함혜영이 바이얼린을 시작한 것은 국민학교 6학년 때, 그전에는 피아노 공부를 하면서 KBS 어린이합창단원으로 활동했다. 한국에서의 그의 스승은 이운동과 이재헌 교수 이들로부터 바이얼린을 배운지 3년 만에 그는 이화·경향 콩쿨의 대상을 따냈다.

중학교 2학년 때인 77년 미국으로 유학간 그는 줄리어드 예비학교에 입학했고, 곧이어 메드마운드 음악학교 캠프에도 참가하여 공부를 계속했다. 그후 줄리어드음악원과 대학원에 다니면서 마가레트 파드디 교수에게 사사받았다. 이밖에도 요셉긴골드와 펠릭스 갈리미어 교수에게 사사받았다.

78년부터 뉴욕 현악 오케스트라의 단원으로 활동했으며, 줄리어드 예비학교와줄리어드 음악원에서는 학교 오케스트라의 악장을 맡기도 했다. 뉴욕 필하모니 주최의 영 아티스트 컴피티션에서 우승한 경력도 갖고 있는 그는 현재 일주일에 네 차례뉴욕 필의 콘서트에 참여하고 있다.

소프라노 홍혜경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무대에 한국인으로서는 처음 등장한 소프라노 홍혜경 (30세). 서울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노래에 재능을 보인 그는 선명회합창단을 거쳐 예원학교에 다녔는데, 당시 성악을 지도했던 김옥자 선생의 권유로 15세의 나이에 줄리어드로 유학가게 되었다. 메트로폴리탄 무대와 관계를 맺게 된 것은 지난 84년, 줄리어드 대학원을 마치면서 메트로폴리탄오디션에 참가해 우승하고 모짜르트의 「황제 티투스의 자비」에 출연하면서부터였다. 미국에서 오페라 데뷔는 83년 시카고에서 「라보엠 」의 무제타로 출연한 것이 처음이지만 그의 성공을 기약한 것은 이 메트 무대라고 할 수 있다.

이후 그는 85년 산디아고에서 「라보엠 」의 의미, 뉴욕 필하모니와의 「루 살로메」협연에서 솔리스트, 그밖에도 「튜란도트」의 류, 「마농」에서의 마농 역 등으로 많은 오페라의 프리마돈나로 출연했다.

또 한번 그가 뉴욕무대에서 화제를 불러일으킨 것은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단장이며 지휘자인 제임스 레바인의 지목으로「라보엠」의 프리마돈나 미미 역을 따낸 것, 87년 1월에 공연된 이 오페라의 성공으로 메트에서는 87∼88년 시즌까지 그와의 계약을 연장했다. 제임스 레바인은 그에 대한평가를 「목소리와 감정표현이 너무 매력적이어서 관중은 마치 주술에라도 걸린 듯 넋을 잃는다」고 했는데, 이에 걸맞게 그는 워싱턴 오페라 가이드지가 선정한 「올해의 예술가」상을 수상(86년)했는가 하면 뉴욕타임즈는 그를 86-87년 시즌에 가장 기대되는 성악가로 선정하기도 했다.

금년 초 캐나다 캘거리 동계 올림픽 문화축전에도 초청받은 그는 또 권위있는 오페라 뉴스지 88년 4훨 9일자 표지인물로 부각되기도 했다.

바이얼리니스트 황수지

금년 17세의 나이로 동갑의 일본의 미도리와 함께 세계 악단의 주목을 받고 있는 황수지. 홍콩에서 태어나 11세까지 그곳에서 자란 그는 7세 때부터 다까꼬 니스자끼·칼 피니 등으로부터 바이얼린을 수업받았다. 7세 때인 1978년 홍콩 페스티벌을 통해 데뷔, 천재소녀라고 칭송을 받았으며, 홍콩에서 가장 권위있는 홍콩 라디오 컴머셜 컴피티션에 입상했다. 87년에는 메뉴힌 국제콩쿨에서 3위에 입상하기도 했다.

줄리어드 예비학교를 거쳐 86년에는 이고르 오짐 교수가 있는 서독의 퀼른 음대예비학교로 진학, 88년에 퀼른 음대 본과에 입학했다가 다시 영국의 로열 칼리지로 전액 장학금을 받고 옮길 생각이다.

아스펜 음악제 참가로 뉴욕타임즈로부터 「동양으로부터 온 음악성의 천재소녀 」라는 평을 받은 바 있는 그의 캐리어는 뉴저지 심포니·줄리어드 그로스만 오케스트라·홍콩 필하모니 등과의 협연과 줄리어드 음악원 폰홀에서 독주회, 뉴욕 아메리칸 홀에서의 독주회 등 만만치 않다.

바이얼리니스트 황보엽

미국의 일급 교향악단인 보스턴 심포니오케스트라의 제1바이얼린 파트 주자로 있는 황보엽. 그는 서울대 음대 재학중이었던 1968년 조선일보사 콩쿨에서 1위를 차지해 유학의 길에 올랐다. 이 콩쿨에서 우승하면 유학 보내는 특혜가 있었는데 마침 위스콘신 음악대학의 파인 아트 콰르텟이 내한하여 그들의 눈에 띄어 장학금을 받고 위스콘신 음대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그곳을 졸업후 그는 밀워키 심포니 오케스트라 부수석주자 시험에 합격, 활동하다가 74년 보스턴 심포니치 오디션에 응모하여 50대 1의 경쟁을 뚫고 입단했다.

이밖에도 그는 보스턴 심포니의 멤버로 구성된 챔버그룹 하우그폰 스트링 콰르텟의 바이얼린 주자로도 활동, 매년 여름 탱글우드 음악센터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있다.

그밖의 연주자들

이밖에도 세계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한국음악가는 수없이 많다. 지휘자로는 국내 교향악단의 산파 역을 맡았던 김생려가 최근 로스앤젤레스의 노스이스트 챔버 오케스트라를 남부 캘리포니아 필하모니로 개칭해 아직도 현역에서 지휘를 맡고 있는가 하면, 지휘자 양인복이 로스앤젤레스에서 LA 매스터피스(한인교향악단)를 창설하며 지휘를 하고 있고, 바이얼린을 전공한 신경흠이 노스캐롤라이나의 샤롯교향악단에서 활동하다가 지난 83년 뉴욕의 코리언 심포니를 창단하여 지휘를 맡고 있다.

피아노에서는, 서울예고 재학중 도미, 줄리어드를 거쳐 런던 왕립음악학교에서라두 루푸에게 사사받으며 공부한 채정원이 지난 86년 영국 헤스팅스 페스티벌에서 1위에 입상하면서 유럽무대에 등장했다. 줄리어드에서 석사를 받았고 맨하탄 음대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피아니스트 김영호,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모짜르테움에서 수학중 지난 85넌 비오티 국제콩쿨에서 우승하여 이탈리아 10개 도시 순회연주를 한 이미주, 서울대 음대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갔다가 현재 캐나다의 토론토 로열 콘서바토리 교수로 있는 피아니스트 김옥현, 보스턴 챔버 뮤직 소사이어티 멤버이며 보스턴 콘서바토리 음악과주임교수로 17년 째 재직중인 피아니스트 김정자, 그리고 87년에 줄리어드에서 피아노 연주 박사를 획득한 피아니스트 이학녀 등이 있다.

바이얼린에서는, 지난 75년 이래 네델란드 로테르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서 제1바이얼린 주자로 활동하는 김애실, 81년부터 호주 멜버른 심포니 오케스트라 멤버로 있는 바이얼리 니스트 노정숙, 6세에 미국으로 이민가서 줄리어드와 예일대 대학원을 거쳐 현재 예일대의 조교수로 있는 바이얼리니스트 유경학, 커티스 음악원을 졸업하고 84년부터 필라델피아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종신단원이 된 박창미, 네델란드 암스테르담 스웰린크 콘서바토리에 재학하며 네델란드 유스 오케스트라 악장을 맡고 있는 서혜주, 지난 87년 줄리어드에서 비올라와 바이얼린으로 두 악기 복수로 박사학위를 받은 배은환, 줄리어드에서 박사과정 중에 있는 김진, 배익환 등이 있다.

첼로에서는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정명화가 있는데, 정명화는 경화·명훈 등 3남매끼리 정 트리오를 결성해 연주와 녹음으로 바쁘게 활동하고 있다.

성악에서는 연세대를 졸업하고 줄리어드·맨하탄·인디애너 주립대를 마치고 버지니아 주립대의 교수로 재직중인 바리톤 최인달, 뉴욕에서 활동하며 최근에 오페라 추방론을 펼치는 테너 서병선, 줄리어드 대학원을 마치고 아메리칸 오페라센타 단원으로 활동중인 소프라노 박정원이 있다.

오르가니스트로는, 서울대 작곡과를 마치고 오리곤 주립대에서 작곡석사와 파이프 오르간 박사를 획득하고 캐나다 토론토대학 로열 콘서바토리 교수로 재직중인 유회자가 있으며, 특수악기인 옹드마르티노 연주자인 김경애(도미니즈 김)도 파리 국립음악원에서 박사학위를 따고 파리음악원 랭시 분교에서 피아노 강사를 하는가 하면 프랑스 잔느 로이오 옹드마르티노 6중주단 멤버로 활동중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