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기행

탈놀이, 옛터를 찾아

-오광대·野遊 전승인멸지역 현지조사기록 종합




서연호 / 고려대 교수

한국 탈놀이 가운데서 영남지역 유형에 속하는 것이 오광대놀이와 야유(들놀음)이다. 낙동강을 근간으로 하여 서쪽지역에 광범위하게 분포된 오광대놀이와 그 동쪽지역 일부에 분포된 야유는 전체적으로 산대 유형이나 황해도 유형과 다른 특징을 지녔기에 영남지역 유형으로 분류될 수 있으며, 동일지역 안에서도 내용이나 연희방식에 차이가 적지 않다.

현지조사의 의의

오광대와 야유의 현지조사 연구는 1920년대 말기부터 비로소 시작되었다. 영남지역 일대에서 전반적으로 탈놀이의 전승이 사라져 가던 그 시기에 역설적으로 현지조사 연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당시 연구자들은 불과 몇 사람에 지나지 않았고 그들의 전문적 자질 또한 충분하지 않았다. 체계적으로 현장중심으로 충실한 조사와 고증과 광범위한 비교 연구가 진척되지 못하였으며, 개인적으로 부분적인 자료들을 챙기고 단편적으로 기술해 놓는데 그쳤다. 그러나 엉성하나마 이 남긴 자료들이 오늘날 탈놀이 연구의 토대가 되고 시원이 된 사실은 매우 값지고도 의의 깊은 업적으로 평가된다. 최초의 현지조사이후 이제 6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동안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연구서가 출간되기는 하였으나 아직도 그 전승체계나 연희내용, 지역환경과 예능의 상관성, 가면의 미학 등에 관한 총체적인 정리와 심도있는 해석에는 이르지 못한 실정이다. 앞으로 우리들의 연구 방향은 현장에 토대를 둔 탈놀이 실체의 규명과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의미 해석에 두어야 할 것이다. 현장조사, 문헌조사와 병행하여 학술적인 연구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

아래에 서술하는 내용은 간헐적이고 엉성하게나마 그동안 이루어진 탈놀이 인멸지역에 대한 현지조사 기록의 종합 정리다.

현재에도 계속 전승되고 있는 오광대나 야유는 제외하였다. 우리는 이러한 기록의 정리를 통하여 그간의 성과를 종합적으로 파악하고 앞으로의 연구활동에 새로운 방법과 대안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정리과정에서는 되도록 객관성을 위주로 하였고, 필자 나름의 풀이나 해석은 배제하였다. 말미에 붙인 연희과장의 내용은 앞으로 비교 연구를 위한 자료로서 작성한 것이다.

각 지역의 탈놀이

의령오광대

의령군 의령면에는 1920년대까지 오광대놀이가 전승되었다. 당시 수년간 말뚝이역을 맡았던 김치삼(살았으면 105세 정도)의 증언에 의하면 동리사람들의 찬조에 의해 놀이를 준비하였으며 적당한 시기를 택하여 저녁에 넓은 마당에서 공연하였다. 가면은 바가지나 나무로 만들었고 놀이가 끝나면 보관해두었다가 다시 사용하였다. 등장인물은 양반, 말뚝이, 영감, 할미, 제밀집 등이 있었는데 각기 신분에 따른 차림새를 갖추었다. 반추음악으로는 꾕쇠, 징, 장고, 북으로 굿거리 장단을 연주하였다. 놀이내용은 말뚝이가 상전인 양반을 희롱하거나 할미와 제밀집이 영감을 사이에 두고 다투는 것이었다.

창원오광대


일찌기 현지를 답사한 송석하는 1895년경부터 창원에서 오광대놀이가 시작되었다고 보고한 바 있다. 김종대 (80세 )옹은 1920년대까지 놀이가 성행하였다고 밝혔다. 중동에 있는 설권수네 정미소 앞마당에서 수차 놀았는데 발판을 중심으로 주위에 멍석을 깔아놓고 앉거나 서서 구경하였다. 북, 장고, 징 ,피리, 해금 등 악기로 반주하였고 사람들은 그 소리만 들리면 놀이판으로 모여들었다 놀이꾼은 15명 정도로 그중 김정률, 김우일, 김봉규, 김상도, 이개동(살았으면 83세)이 기억된다. 특히 김정률은 탈을 만들고 연희방법을 지도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소년당상 애기두령 좌우로 벌려서거라.

말 잡아먹고 장고 매우고

소 잡아먹고 북 매우고

우목네기 징치고 떡치고 밥치고

아랫 방천에 줄얌생이새끼처럼 모였구나

이놈아 말뚝아

이런 대사를 곁들이는 놀이의 내용은 군주제하의 양반과 상노관계를 해학적으로 풍자한 것이었다.

마산오광대


송석하는 마산오광대를 창원오광대에 포함시켜 기술하였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마산은 창원에서 분파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송옹은 사자가 등장하여 담보를 잡아먹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음을 지적하고 매년 3월말부터 4월초사이에 놀이되었으며 놀이꾼으로는 이영재, 김순일을 들었다 연희본은 1957년 김순일 구술로 최상수에 의해 채록되었다.

진주오광대


송석하는 1875년경부터 진주에서 오광대놀이가 시작되었다고 보고한 바 있다. 1920년대까지 지속적으로 놀다가 30년대에 들어와서 소멸되기 시작하였으며 광복직후에 전승이 끊겼다. 1934년 그곳 부인위친계, 제 3야학회, 각 신문지국 등이 주동이 되어 놀이를 부흥시키고자 지원하기도 하였다. 놀이를 위하여 정초부터 지신밟기를 하며 모금하였고 특별기부금도 받았다. 본놀이는 정월 보름날 저녁에 하였는데 수정산 언덕에 달이 뜨고 세시놀이인 달집에 불이 오르면 잽이들의 반주와 함께 판의 분위기가 무르익어 갔다. 20-30년대의 놀이꾼으로는 소무역의 정종근(살았으면 103세), 말뚝이역의 강석진(105세), 옹생원역의 최선준(100세), 말뚝이역의 김치건(106세), 할미역의 신길용(103세), 할미역의 양덕현(105세)·박용근·강대창, 악사역의 문쟁현(103세) 등이 있었다.

김종철(82세)옹의 증언에 의하면 20년대에는 진주공설운동장(계동)이, 30년대에는 삼포극장이 놀이판으로 이용되었으며 김치건·강석진·최선준은 3대 말뚝이라 부를 정도로 기량이 뛰어났다. 정종근은 한량이라 부를 정도로 춤·소리·악기에 두루 능통하였고, 문쟁현·강석진은 소지주로, 신길용은 한약방으로, 양덕현은 정미소 경영으로 각기 생활하였다. 자신과정봉양(94세 )은 놀이의 지원자 역할을 하였다 한다.

연희본은 1928년 강석진 구술의 정인섭 채록본, 1934년 박용근 구술의 송석하 채록본, 1957년 최선준 구술의 최상수 채록본 등이 있다.

가락오광대

송석하는 김해군 가락에서 1890년경부터 오광대 탈놀이가 놀아진 것으로 기술하였다. 김상기(78세)·이동근(74세)·배몽기(65세)옹의 증언에 의하면, 1920년대까지 놀이가 성행하였으며 그후 간헐적으로 연희되다가 60년대 초에 전승이 끊겼다. 매년 정월 보름에 주로 놀았는데 동제가 끝나면 탈꾼들은 마을의 재력이 있는 집을 위주로 순회하면서 찬조와 향응을 받으며 공연하였다. 쟁이를 앞세운 탈꾼들이 큰 집의 마당에 이르면 먼저 한바탕 마당놀이를 하였으며 이어서 탈놀이판을 벌렸다. 판놀이가 끝난 다음에는 샘굿, 성주굿, 조왕굿, 뒤지중(고방굿) 등 지신밟기를 해 주었다.

가락에 놀이가 성행할 수 있었던 조건으로는 김해 평야의 풍부한 농작물수확, 인근해에서의 풍부한 수산물수확, 낙동강하구의 공물 수송에 따른 운반노임 수입, 식당 요리집 여관업성업에 따른 수입 등을 지적하였다. 1930년대까지 마을의 총3백호 중에서 1백석 이상 연수입을 올리는 가호가 27호 넘을 정도였다. 당시 조장수, 손대준, 김응운이 부자 한량으로 대표적인 놀이의 지원자였다.

탈은 주로 바가지로 만들었으며 나무가면인 양반은 유명하였다. 탈은 보관해두고 매년 사용하였다. 김해읍에 나가 수차 놀기도 하였다

놀이꾼은 보조역의 원학산(살았으면 100세), 비비새의 김응운(130세), 말뚝이의 신성칠(130세), 포졸역의 배학산(100세), 말뚝이의 이화복(97세), 보조역의 박대봉(94세)이 활약하였고, 지신밟기꾼으로 상쇠 박상근, 상쇠 김석택(94세)·신인생·강윤오(87세)·임선달(99세)·공수만(98세) 등이 유명하였다.

연희본은 1953년 이화복 훤학산 구술, 최상수 채록본이 「김해오광대」라는 명칭으로 남아 있으나 김상기옹은 채록 사실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김옹은 기억나는 대사 한 마디를 즉석에서 읊어 주었다.

말뚝인지 쇠뚝인지 소매 아래 팔뚝인지

삼거리질에 수케 모이듯

옹달샘에 실뱀이 모이듯

왜 나를 찾느냐

산청오광대

1910년대에 놀이가 성행하였는데 이춘석(살았으면 105세 정도)이 말뚝이역을 잘하였다.

진동오광대

창원군 진동오광대는 1910년 이전까지 전승되었다. 매년 4월 8일 동림에서 놀았다. 놀이꾼은 양반 말뚝이 할미역을 한 제갈수(살았으면 103세)·강감준 등이 활약하였다.

학산오광대

거제군 둔덕면 학산에는 1910년대까지 오광대놀이가 전승되었다. 지리적 행정적 조건으로 보아 봉영오광대의 분파로 여겨진다. 매년 정초 동제를 지내고 나서 보름까지 매구패가 동리를 순회하면서 걸립놀이를 하였고 밤에는 동사마당에서 탈놀이를 하였다. 종이로 만든 탈을 사용하였고 굿거리장단에 변화가 많은 덧베기춤을 추었다. 놀이꾼은 통제영의 이속과 동리사람들이 함께 하였다. 말뚝이 봉사 문등이 역의 장희필(살았으면 102세), 원양반 할미양반역의 정작지(92세), 홍백역의 김종관(92세), 할미 사자역의 김종원(102세), 작은 각시역의강태문(88세), 조리중역의 장윤이(102세), 포수역의 이학련(102세) 등이 활약하였다.

도동오광대

진양군 도동면 하대리(현 진주시 하대동)에는 1937년대 말기까지 오광대놀이가 전승되었다. 지역적 여건으로 보아 진주오광대의 분파로 여겨진다. 매년 정초부터 보름까지 지신밟기를하였고 보름날저녁에 늦도록 탈놀이를 하였다. 지신밟기는 당산굿·정자굿·샘굿·동사쿳· 집돌금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탈은 둥근 소쿠리(말뚝이), 바가지(문둥이), 두꺼운 종이 등으로 만들었는데 놀이 전후에 탈고사를 지내는 일은 없었고 사용 후에는 동사에 보관했다가 해마다 수리 보충하여 놀았다. 저정작구(느린 굿거리), 정작쿵작(잦은 굿거리) 장단을 반주로 하며 덧베기춤을 추었다. 놀이꾼은 말뚝이역의 한보언(살았으면 102세), 양반역의 이근세(92세)·윤윤석(92세)·하일세(97세)·구부용(92세)·김들깨(87세), 문둥이 역의 배인식(82세)·허기후(87세)·김봉천 (92세)·신도연(97세)·임순일(92세), 할미역의 정몽돌이(92세), 미수루미역의 전일수(73세)·김또선일(69세), 중역의 오도영(73세), 각시역의 배우문준(73세) 등이 활약하였다. 비용은 집돌금에서 받은 전곡으로 충당하였다. 배우 문준의 선친은 배윤옥(108세)으로 꽹과리의 명수로 놀이에 참여하였고 가면도 제작하였다.

서구오광대

사천군 서포면 서구리에는 1930년대까지 오광대놀이가 전승되었다. 인근지역인 축동면 가산리 출신의 연희자가 이주하여와서 놀이를 전파시킨 사실로 미루어 가산오광대의 분파로 여겨진다. 정초부터 정원 20여 일까지 마을과 인근동리를 순회하면서 집돌금(지신란기)으로 걸립하고 밤에는 형편에 따라 집마당이나 논바닥에서 탈놀이를 하였다.

가면은 둥근 대소쿠리 (양반, 말뚝이, 사자, 문등이 )에 종이를 발라 만들기도 하였으나 주로 종이 가면을 사용하였다. 지 가면으로는 오방신장(5개), 작은양반(2개), 중(1개), 상좌(1개), 제대각기(2개), 할미(1개), 마당쇠(1개), 옹생원(1개), 순사(1개) 등이 있었다. 옛 놀이꾼으로는 양반역의 최태술(살았으면 81세), 최용환(79세), 말뚝이역의 강주섭(80세), 중역의 탁창현(96세), 정차수(76세), 제대각시 역의 류삼영(73세), 배봉렬(68세), 문둥이 역의 박석찬(71세), 할미역의 최주삼(96세)·강소주(82세), 마당쇠역의 김용곤(74세) 등이 활약하였고, 강주삼·정차수(이상 상쇠)·탁창현·정차수(장고)·김용곤·김범수(징) 등이 풍물잡이(악사)를 겸하였다.

놀이의 내용은 가산오광대와 유사하나 서울애기를 제대각시로, 영노를 사자로 이칭, 흔돈하고 있는 점이 다르다.

남구오광대

사천군 서포면 남구리의 오장대는 1930년대에 성행하였고, 1950년대까지 잔존되었으며 서구오광대에서 분파된 것이다. 정초부터 마을의 당산, 우물, 각 가정을 순회하며 집돌금을 하고 이웃마을에 가서도 하는데 대개 20일까지 계속하면서 걸립을 아울러 하였다. 밤에는 걸립기금으로 준비한 탈놀이를 공연하였다.

가면 제작법, 반주, 놀이내용 등은 서구오광대와 대동소이하다. 다만 마지막 과장에 사자가 등장하여 토끼 암수를 잡아먹고 포수가 등장하여 그 사자를 총으로 쏘아 죽이는 장면이 있다. 놀이꾼들 중에서 고령자는 1930년대에, 젊은층은 1950년대에 활약한 인물들이다.

양반역의 황용구(살았으면 73세)·이복재 (51세), 말뚝이역의 이재섭(68세)·최상운(75세)·황기수(47세), 중역의 이을주(73세)·이삼용(71세)·최상신(56세), 상좌역의 이명재(64세)·이석재(52세), 제대각시 역의 이용재(69세)·이막개(69세), 문등이 역의 최상진(66세)·이용환(67세), 할미역의 이우상용(76세), 이계언(52세), 마당쇠역의 최상홍(72세)·이또향년(76세)·이권재(55세), 시지역의 이현재(69세)·이현재(71세)·황운택(61세), 순사역의 이삼재(63세), 옹생원역의 이사천(84세)·북제장군역의 황명수(43세) 등이 출연하였다.

신반오광대

의령군 부림면 신반리에 전승되었던 오광대는 향인 놀이꾼이 아닌 유랑연희패 대광대패의 연회로 알려져 있다. 그곳이 한 때 대장대패의 활동 근거지인 데서 연유된 명칭으로 보인다. 다른 연회패와 같이 대광대패는 여러 가지 공연내용을 지니고 다녔는데 그 중에 탈놀이도 들어 있었다.

신반오광대가 진주오광대에 영향을 끼쳤다고 하나 연희본이 채록된 바 없어 양자 사이의 유사성 여부는 현재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런데 마을의 김봉희(94세)의 증언에 의하면, 오광대를 할 때에는 먼저 당집에 제사를 드리고 연희자들이 부락으로 내러와 놀았으며 놀이꾼으로 영감역의 손여욱, 할미광대·오방신장 역의 김윤호, 서울집 역의 최명수 등이 활약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하면 대광대패의 오광대뿐만 아니라 마을에 토착적으로 전승되던 오광대 탈놀이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을지오광대

협천군 덕곡면 율지리(옛 초계군)에 전승되었던 오광대는 유랑연희패인 광대패의 놀이였고, 그 놀이가 각지에 전승되는 오장대의 초기 원형으로 기록된 바 있다. 그러나 이러한 피상적인 기록만으로는 사실을 확인할 길이 없다.

대광대패는 중매구패, 초란이패 , 사당패 , 솟대쟁이패, 중매구패 등과 더불어 전국을 유랑하던 연희 집단의 하나인데, 이들 패가 대체로 유사한 탈놀이를 공연 종목으로 지녔기에 유독 대광대패만이 오광대를 전파시켰다는 것은 신빙성이 없으며, 유랑연희패와는 별도로 각지에 탈놀이가 전승되었던 증거가 있고, 율지리만 하더라도 향인광대에 의한 토착적 탈놀이의 흔적이 있음을 일단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율지리에서 강을 건너면 창령군 이 방면으로 가게 된다. 1920년대까지 강 양쪽의 나루에는 넓은 밤나무 숲이 있었는데 이로 인하여 율지라는 지명이 유래되었다. 하류에서 올라오는 배가 이곳에서 대규모의 하역을 하였고 다시 인근에서 모인 산물을 싣고 하류로 내려갔기에 큰 나루인 율지가 번창할 수 있었다. 30년대까지 배가 많이 다녔다. 율지는 농산물 집산지로서 내륙 교역의 큰 시장으로서 중심이 되었고 각계각층의 인파가 항시 붐볐다. 보통 5∼6명이 승선하는 범선이 구포에서 율지까지 오는데 15일이 소요되었다. 마을에는 객주집이 많았고 거상들이 상주하고 있어서 경기가 흥청거리는 분위기였다. 이러한 경제상태를 바탕으로 예능 오락 향락문화가 발전하게 되었다.

현지의 강점숙 (살았으면 98세), 정대규(101세), 이정흥(111세), 정성조(98세)의 증언에 의하면, 1907년 대회재가 나서 그때까지 전래하던 오동나무 가면이 소실되었는데 그것은 놀이꾼 김성보가 제작한 것으로서 오동나무를 파서 여러 가지 채색을 입힌 탈이었다. 사자탈은 컸으나 나머지는 오늘의 오광대탈과 대동소이하였고 턱이 움직이는 탈은 없었다. 주역인 말뚝이탈은 붉은 안면에 코가 유독 컸다. 재차 제작된 가면으로는 1927년대까지 놀았으나 소실되었다. 3차 제작된 가면으로는 광복 무렵까지 놀다가 전승이 끊겼다.

연희자에는 윤화익(살았으면 109세), 진동원, 정순직, 정원직, 김성보, 하도감 등이 유명하였고 대광대패와 사당패가 함께 어울려 놀기도 하였다. 탈놀이의 순서는 말뚝이와 다섯 양반이 나와 양반파장을, 중과각시가 나와 중춤을 , 홋이불 같은 것을 쓴 비비새가 나와 영노과장을, 할미와 영감과 제대각시가 나와 영감과장을 각각 놀고 마지막으로 사자과장을 놀았다. 놀이를 시작하기 전에는 걸궁패처럼 매귀를 치고 다니며 중(죽)방울을 하여 사람을 모으거나 걸립하였고, 마지막에도 중방울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오광대를 제외하고 기억나는 연희로는 산두박첨지놀이. 사당놀이로, 줄타기, 말타기, 원숭이놀이, 근두놀이, 장대타기놀이, 무동놀이 등이 있었다.

정재석(69세), 정영희(59세)는 마을 한편에 서있는 거대한 당목과 서낭제, 지신밟기 그리고 장사 흥업과 탈놀음이 관련성이 있었을 가능성을 선대의 전언을 토대로 시사해 주었다. 서낭제는 지금도 매년 정월 14일 밤에 마을 사람들이 당목 밑에 모여 엄숙하게 지낸다고 한다.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종합하면 낙동강의 수운 교통이 번창하던 1930년대까지 율지에는 유리한 경제여건을 기반으로 하여 그곳의 향인광대와 수없이 찾아드는 유랑광대에 의한 오광대탈놀이가 빈번하게 공연 전승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솟대쟁이패오광대

유랑연희패의 하나였던 솟대쟁이꾼들도 오광대를 놀았다. 단원이었던 송순갑(75세)의 증언에 의하면, 탈을 쓴 포수와 사자놀이가 그중 인상적이었다. 1720년 당시 놀이꾼으로는 이우문(살았으면 106세)·이기문 이재문 삼령제가 크게 활약하였다.

부산진野遊

부산진에는 1930년대까지 탈놀이인 야유가 전승되었다. 장지완(78세)옹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부산진역 앞 쪼막손네묏등(현 수정여중), 동구청 뒷마당 등지에서 놀았는데, 내용에는 문둥이, 양반, 영노, 할미과장이 있었고 놀이꾼으로는 넷째 양반역의 한병상, 할미역의 박두찬, 거북춤의 주소수 등이 활약하였다. 할미과정의 끝에 거북춤과 요보지춤이 함께 연회되었다.

영감이 첩과 즐기며 본처인 할미를 막대하자 할미는 외간 남자인 거북이를 유혹하여 정사를 갖게 되는 내용으로써, 할미와 거북은 대무를 통한 결합으로 성교 장면 및 오르가즘을 표현한다. 성교에 지친 할미가 죽자 상여꾼들이 나와 메고 나간다. 이러한 과정에서 거북춤과 요보지춤이 연출되며 이는 다른 탈놀이에서 찾아볼 수 없는 장면이다.

연희과장의 내용

이상에 언급된 영남각지의 탈놀이 조사기록에서 연희과장의 내용을 도식으로 요약하면 아래의 표와 같다. 현장 조사과정에서 누락된 지역은 의문부호(?)로 표기하여 둔다.


말뚝이·양반

영강·할미

오방신장

문둥이

영노·양반

사 자

문등이·어딩이

중·양반

영노·오방신장

의령 창원

마산

진주

가락

산청

진동

학산

도동

서구

남구

신반

율지

솟대

부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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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1) 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경남편), 문화재관리국, 1977, p,615참조

2) 송석하, 한국민속고, 일신사, 1966, p.211참조

3) 서연호, 창원오광대 현지조사보고서, 월간문예진흥, 1979,11, pp.73∼75 참조.

4) 송석하, 전게서 pp. 218-223참조

5) 최상수, 야유·오광대가면극의 연구, 성문각, 1984, pp.73-74, pp .116-131 참조

6) 송석하, 전게서 pp.209∼223, pp.374-394참조

이두현, 한국가면극, 문화재관리국, 1969, p.421참조

최상수, 전게서, p.75 참조

7) 서연호, 진주오광대 현지조사보고서, 월간문예진흥, 1979,11. pp.77∼79 참조

8) 정인섭, 진주오광대탈놀음, 조선민속(1호), 1993. 1, pp.32-37 참조

송석하, 전게서 pp.378∼384참조

최상수, 전게서 pp 1訓∼144 p.57참조

9) 송석하, 전게서 p.211참조

10) 서연호, 1987. 5. 23. 현지조사 참조

11) 최상수, 전게서 p.74, pp172∼187참조

서연호, 1987 8. 23. 현지조사 참조

12) 이두현, 전게서, p.421참조

13) 이두현, 전게서, p.421참조

14) 정상박, 오광대와 들놀음 연구, 집문당, 1986, pp.197-201 참조

15) 정상박, 전게서, pp.203∼210참조

16) 정상박, 전게서, pp.211∼218참조

17) 정상박, 전게서, pp.219∼224참조

18) 송석하, 전게서, pp.210∼211참조

19) 정상박, 전게서, p.44참조

20) 송석하, 전게서 p.210참조

21) 송석하, 전게서 p.210참조

서연호, 1987. 8 22. 현지조사 참조

22) 같은 현지조사 참조

23) 이두현, 전게서, p.326참조

24) 이두현, 전게서, p.78, p.420참조

25) 서연호, 1987 8. 22. 현지조사 참조

26) 심우성, 한국의 민속극, 창작과비평사, 1976, p.34참조

서연호, 땅재주의 옛명인 송순갑, 꼭두극, 1988. 봄호, pp. 78∼82 참조

27) 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경남편), p.614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