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첨지가 가르치는 인형제작 과정
-꼭두각시놀음
삼전촌연어(三田村鳶漁) / 일본인형극 연구가
악서(樂書)에 이르기를 <굴뢰자본상가악(窟幞子本喪家樂) 개출어언사헌목왕지기(蓋出於偃師獻穆王之伎) 고려역유지(高麗亦有之) 한말용지가회(漢末用之嘉會)>라 한 것으로 보아, 혹시 조선에 옛 인형의 양식이나 조정법이 남아있지나 않을까 생각하였다. 이런 생각이 마음에 걸려 수차 조회하였으나 그때마다 <조선에는 연극도 없고 인형극도 없다>는 회답을 받았다. 그래도 쉽사리 체념하지 않고 있던 중, 이번에 만주로 유람하여 박식한 이문권군을 만났을 때 조선의 인형놀이에 대하여 질문하였다.
李군은 <없는 것이 아니다. 박 첨지라는 인형놀이가 있다. 경성에 간다면 물어보는 것이 좋으리라>하였다. 깊은 계곡에서 사람을 만난 듯, 뛰고 싶듯이 반가운 대답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떤 연극이냐 물으니 <아직 본 적이 없다>하고, 박 첨지는 한자로 어떻게 쓰느냐 물어도 <모른다>하였다.
박식한데도 그렇게 말하는 것으로 보아 쉽게 찾기는 어렵게 느껴졌다. 그래도 가르쳐 준 <박 첨지> 한 마디에 힘을 얻어 계림팔도를 찾아다닐 작정으로 귀로에 조선의 경성에 들렀다. 그런데 누구도 그것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조선의 인형놀이는 과거의 것이어서 아마도 현재는 절멸되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렇다면 문헌에 의해 지난날의 모습을 그려보는 수밖에 도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문헌이라 하더라도 장님같이 무턱대고 더듬는 식으로 여행 중의 나그네 처지로서 얼마 읽을 수도 없고, 또 열심히 읽는다 해도 1년이나 반년 정도로 윤곽이 밝혀지리라 생각되지 않았다. 또, 읽는다면 무엇부터 시작할까. 우선 학자의 지시를 받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여 그 방면을 수소문하던 중, 최남선군에게서 경성대학의 다전(多田) 교수를 찾으면 토속연구실에 인형놀이의 표본 수 점을 보존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전 교수의 덕분에 그 표본을 보게 되었다. 표본의 주관자 추엽(秋葉) 교수는 현재 山臺戱라는 가면극을 연구 중에 있고, 이어서 인형놀이도 연구할 예정이어서 평소에 인형놀이의 줄거리를 적어 놓은 책 한 권을 빌려주었다. 그 후 경성에 사는 의제(義第)가 김재철군의 《조선연극사》를 찾아 주어서 큰 편리를 얻었다. 또 이천종이라는 흥행사를 불러 주었는데 벽제관(碧蹄囥) 근처인 고양군 신도면 구파발의 김창철이라는 사람에게 20여 개의 인형이 있음을 알려 주었다.
구파발을 찾아가 김창철씨로부터 보고들은 것은 하나 하나가 진기하고 귀중한 것이었다. 또 기구방지진(磯具房之進)(점구방지진(鮎具房之進)의 오기인 듯-역자)군의 호의에 의해 미발표 희귀서인 《목우희고(木偶戱考)》를 빌려보고 더욱더 도움을 얻게 되었다. 방송국의 윤교중군도 도와주어 기쁘기 그지없었다. 늙은 인형사 한성준에게 들은 바 역시 모두가 우리에게 가장 좋은 연구자료가 되었다.
우리 일본의 인형극 연구는 아직 저급한 수준이다. 극히 침체되어 진전이 없었던 것은 인형의 구성으로부터 그 제작과정을 살피는데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유리(淨瑠璃)에 입각해서 그 변천에 따른 제반 과정을 차근차근 조사해 가는 것이 순서이고 규칙적인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모든 성곡(聲曲)에 무지하였고 정유리사가(淨瑠璃史家)의 태도에 영양실조를 일으켰으므로 엉뚱한 곳에서 접근했다가 보기 좋게 실패하고 후회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이제 새로 씨를 뿌리고 출발해야 할 형편에 이르렀다.
어쨌든 재출발하지 않으면 안 될 우리의 연구는, 조선에서 이상하게도 부처님의 도움을 얻어 극히 짧은 기일 동안에 귀로 듣는 학문을 성취하였고, 조선인도 모르는 사람이 많은 인형놀이에 대하여 그 개략과 인형제작 과정을 실제로 살펴 알게 되었다. 그것을 토대로 하여 실정시대(室町時代)말부터 강호시대(江戶時代)에 걸친(대체로 1570년부터 1867년까지-역자)인형극을 논하는 것이 가능할까 어떨까 하는 기대를 거는 우리들의 흥미는 자못 크다. 그런데 인형제작 과정만을 이야기하여서는 인형놀이 전체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므로 부수되는 여러 문제도 함께 진술하여 독자 여러분의 가르침을 받고자 한다.
박첨지는 한자어 朴僉知의 독음이다. 박첨지는 인형놀이의 주인공이고 그로 인해서 놀이가 있는 이상, 그 종목은 오직 하나로서 <박첨지놀이> 뿐이라 함은 믿을 수 없는 이야기다. 신구(新舊) 몇 개의 종목이 있었지만 그 중에 박첨지놀이만이 남아 있다고 하면 알 수 있어도, 시종 하나뿐이었다고 하는 것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 납득이 가지 않더라도 <틀림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어째서 한 가지만 놀고, 다른 것은 창작되지 않았는가 하고 물으니 대답해 주는 사람이 없다. 참으로 이상 천만한 일이다.
박첨지라는 배역의 이름에 대하여는 磯具군의 《목우희고(木偶戱考)》에서 상세한 해설이 있다.
박첨지의 朴은 성이고 僉知는 관명(官命)이다. 상대역인 홍동지도 洪은 성이고 同知는 관명이다. 종전 중추부(中樞府)의 관직명에 첨지와 동지가 있었는데 첨지는 정삼품이고 동지는 종삼품으로 본래는 중임(重任)의 관직이었다. 그러나 후에는 미천한 무리가 이름만을 비는 벼슬로 금전에 매매되었고, 다시 전의 되어 상인(常人)·미천한 계층의 노인을 존칭하는 데도 사용되었다. 박첨지놀이에서 첨지는 즉 이런 의미를 갖는다.
선조조(宣祖朝)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峰類說)》에는 <아국중추부(我國中樞府) 내재신치산지지(乃宰臣置散之地) 즉송지추밀사야(卽宋之樞密使也) 기위임역존의(其位任亦尊矣) 금칙의역징천지배(今則醫譯徵賤之輩) 개이상직제수(皆以賞職除授) 제신우득위지(帝臣沵得爲之) 명기설월기의(名器屑越其矣)>라는 기록이 있다. 중추부의 위임(位任)이 존귀함에도 불구하고 제신이 그 자리에 취임하는 것이 드물게 된 까닭은 미천한 무리들의 상직(賞職)이 된 때문이다. 이것은 조선조 중기 무렵 이후부터 익숙해진 습속이다.
박(朴)·홍(洪)의 성은 실재한 사람을 분장한 것 같으나 성만을 들어서는 알 수 없다. 일설에 박(朴)은 포(匏)의 사투리로 인형의 얼굴을 박을 켜서 만든 데서 음차(音借)되어 박(朴)이 되었다 하고, 홍(洪)은 홍(紅)고 동음(同音)으로 그 인형이 홍색(紅色)인데서 비롯된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런 이유보다는 조선에 흔히 있는 성인 박(朴)·홍(洪)을 무의미하게 칭한 것으로 봄이 믿을만한 설이 아닐까.
박첨지놀이가 누구의 작(作)인지, 어느 때 만들어진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조선조 중기(대략 일본 강호초(江戶初))의 것으로 보인다. 매관(買官)도 하지 않은 민간의 노인에게 일반의 존칭으로서 첨지를 사용하였고, 또 인형극의 주인공 박노인에게 첨지를 멋대로 쓰고 있음이 이점을 뒷받침한다.
박첨지놀이에는 각본도 줄거리라고 할 만한 것도 없다. 전해지지 않은 것이 아니라 본래가 없는 듯하다. 그것이 3, 4백년이나 다만 하나의 인형놀이로 상연되어 왔다. 그 사이에 어느 정도 이야기를 바꾸며 취향을 변경하지나 않았을까 하나,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원형은 물론 변혁의 흔적도 찾으려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천종의 말에 의하며, 박첨지놀이 전부의 상연에는 6·7시간부터 10시간이 소요된다고 한다. 건너뛰어서 1∼2시간에 하기도 하나 일정한 시간은 없다. 부담 없이 멋대로 보려면 짧은 시간이 좋겠으나 전부를 상연하는데 드는 시간과 차이가 많은 것이 의문이었다. 그렇지만 李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상연한다>는 것 외에는 설명이 없었다. 우리가 수득한 박첨지 놀이의 줄거리는 네 가지나 되었는데, 그것을 모두 종합해 보고서야 李의 말에 거짓이 없음을 믿게 되었다.
《조선연극사》는 늙은 인형사 박영하, 김광식으로부터 청취한 正式의 演出이 기술되어 있다.
제1막 곡예장
부득이 파산하여 버린 박첨지는 늙은 몸으로 팔도강산 유람길에 올라 방방곡곡을 편력한다. 어느 날인가 해가 저물 무렵, 시골 주막에 든 노인은 때마침 곡예장에서 들리는 남녀와 사당들의 음악소리를 듣게 된다. 풍류에 피로도 잊은 노인은 곡예장으로 달려나가 한 바탕의 노래와 춤을 엮어낸다.
제2막 뒷절
뒷 절에서 온 중 둘이 젊은 무녀와 함께 춤을 춘다. 박첨지가 나와 중을 호통치고 나서 자신도 한바탕 춤을 춘다. 그러자 무녀 둘이 모두 자기의 조카임을 알게 된다. 그는 힘이 센 홍동지를 부르게 되고 홍동지가 나타나 곧 중을 꾸짖고 무녀들을 때려 내쫓는다. 홍도 퇴장한다.
제3막 최영로(崔永老)의 집
박첨지는 사돈 최영로의 집에 거처하고 있다. 때는 한창 바쁜 추수철이라 마당에는 벼를 널어놓고 새를 쫓느라 야단이다. 그런데 박첨지는 조밭에 가서 새를 쫓아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마침 용강(龍岡)의 이심이가 배고픔을 참을 길 없어 새를 보러 오는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먹고 있을 때였다. 박첨지 역시 이심이에게 잡아먹힐 참이었는데, 그의 <살려달라>는 비명 소리에 홍동지와 박첨지의 아우가 와서 협력하여 이심이를 죽이고 구출한다.
제4막 동방삭(東方朔)
동방삭이 잠시 곡예장에 나와서 가무를 한 후 한마디의 예언을 남기고 퇴장한다. 해남지방에 사는 표(表)생원이 첩을 두었기 때문에 본부인은 행발불명이 되고 말았는데, 그 본부인을 찾기 위해 강원도까지 갔다가 귀로에 이곳에 들리게 될 것이라고
제5막 표(表)생원
본부인을 찾으려다 실패한 표(表)생원이 첩을 데리고 등장한다. 거기서 우연히 본처를 만나게 된다. 그들 사이에는 삼각관계가 생기고 본처는 재산의 분배를 강요하기에 이른다. 구장(區長)인 박첨지가 나와 표(表)생원을 위해 재산을 분배하게 되는데, 귀중한 것은 모두 첩에게 주고, 나쁜 것만을 본처에게 준다. 이에 본처인 郭禿閣氏(꼭두각시)는 남편과 이별하고 떠나버린다.
제6막 꿩 사냥
한양에서 새로 부임해 온 평양감사는 즉시 강계(江界)포수를 불러들여 꿩 사냥에 열중한다.
제7막 장례식
평양감사의 어머니가 죽어 장례식이 거행된다. 상여의 뒤를 따르는 상주 평양감사는 슬픈 빛이 없이 오히려 場打令, 梁山道 등을 부른다. 도중 상둣군 한사람이 발병이 나자 발가벗은 홍동지가 그 대신 선발된다.
제8막 절 짓기
평양감사의 모친이 죽은 후 백일의 법요식(法要式)을 거행하고자 절을 짓고 발원한다.
또《민속예술》잡지에는 절반 정도로 줄어든 연출 기록이 있다고 하면서(송석하의 <朝鮮の 人形芝居>이 게재된 것을 지칭함-역자) 《조선연극사》에 다음과 같이 병기하여 놓았다.
(1) 여자 둘과 중 둘이 어울려 춤을 추는 곳에 홍동지가 나와 중을 내쫓자 모두 퇴장한다 .이때 박첨지가 나와 관객에게 자기처를 소개하겠다고 하면서 아내를 불러낸다.
(2) 첩으로 인하여 풍파가 일고 박첨지는 본처와 이혼하기로 한다. 가산을 분배하는데 본처에게는 나쁜 것만을, 첩에게는 좋은 것만을 준다. 본처는 눈물을 흘리며 금강산 여승으로 가 버리고, 뒷날 첩에게 질린 박첨지는 마을 사람들의 권고로 첩을 버리고 본처를 불러들인다.
(3) 어느 날 평양감사가 꿩 사냥을 나갔다가 미친개에게 물려 죽는다. 장례식 날 상여를 따르는 상주는 조금도 슬픈 기색이 없이 조문 온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가 오히려 기쁜 일을 당한 듯이 한다. 그것을 본 조객이 장타령을 부르자 상주는 홍이 나서 함께 부른다.
(4) 박첨지의 딸은 조밭에 새를 쫓으러 간다. 조밭에는 용강(龍岡)의 이심이가 살고 있는데, 이심이는 몰려드는 새떼와 박첨지의 딸, 그 가족까지 모두 잡아먹는다. 박첨지도 잡아먹히려다가 겨우 구조된다. 이 소식을 들은 홍동지는 크게 활약하여 이심이를 물리친 후 원통하게 죽은 사람들을 위해 절을 지어 놓는다.
(1) (2) (3) (4)에는 동방삭·표생원·박첨지 동생 등이 생략되고 곡예장과 뒷 절의 장면, 최영로 가족들의 사건과 절 짓기 장면을 합쳐 놓았다. 또 예언의 장을 없애고 꿩 사냥의 장면은 시늉만 보이며, 처첩의 싸움도 박첨지 신상의 사건으로 다루어 장면을 줄임으로써 연출 시간을 멋대로 수축시켜 놓았다.
한편, 현재 66세인 인형사 한성준은 모두 12장으로 된 줄거리를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1) 박첨지가 나와 인사말을 한다.(이후에도 박첨지는 계속 등장한다)
(2) 당녀(唐女 : 기생) 둘이 양측에서 나온다.
(3) 중 둘이 나와 당녀들을 유혹하여 함께 들어간다.
(4) 당녀들은 무대 뒤에서 중의 음란한 요청을 거절하고 다시 등장한다.
(5) 망석승(忘釋僧)이 나온다. 그가 당녀들을 말로 꾀자 함께 어울려 들어간다.
(6) 평양감사가 2, 30인의 행렬을 거느리고 지방순시에 나선다.
(7) 평양감사가 2, 3인의 하인과 함께 매사냥을 나온다. 후에 감사는 죽는다.
(8) 박첨지가 감사의 죽음을 알리고 장례식이 시작되고 조사를 말한다.
(9) 박첨지의 동생이 나와 골계스럽게 논다.
(10) 홍동지가 나와서 장례식을 욕하는데 남근(男根)을 관(棺)을 향해 내놓은 채 조의를 표하기는커녕 <좆이나 먹으라>고 악담을 한다.
(11) 행렬에 참가했던 사람들이 분노하여 홍동지를 잡아 참수형에 처한다. 형을 집행하는 의식이 거행된다.
(12) 평양감사의 극락행을 위해 절을 짓고 공양을 드린다.
이렇게 공연하고 나서 때로는 다시 절을 허무는 장면을 보이기도 한다. 그것은 조선조에서 불교 배척의 영향이 인형극에 미친 것이 아닌가 한다. 다시 계속해서 여흥으로 보이는 (1) 자라타령 (2) 먹중 (3) 취발 (4) 딱따구리 등의 장면이 공연되는데, (3)에는 인형이 하나 나와서 다른 사람의 비행을 폭로하고 비꼰다. (4)는 큰 대나무에 나선형의 홈을 파고 홈을 상하로 하여 새가 날아가는 모양이나 쪼는 움직임을 나타내는 견실(牽絲)의 장치로 만들어졌다.
또한 추엽 교수의 수기에는 (1) 박첨지의 걷는 모양 (2) 노처(老妻)와의 만남 및 재산분배 (3) 평양감사의 부임부터 장례식까지 (4) 절 짓기 등 네 장면으로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조선의 인형놀이에는 막이 없고 배경도 없다. 막을 치고 도구가 교체되는 것이 아니므로 일단 나온 인형은 무대에서 사라지게 된다. 나온 인형이 모두 퇴장해 버리면 한 장면이 다 끝났다고 한다. 주요한 인형이 등장하자마자 노래가 따르나 노래와 함께 등장하는 인형은 드물다. 인형의 출입에 대하여는 나중에 설명하겠으나 인형의 출입에는 일정한 제한이 없음으로 무대 위에 단 하나의 인형도 보이지 않는 듯할 때 또 나타난다. 이러한 간격은 매우 이상하여 전장과 후장의 구분이 명백하지 않고, 한 장 가운데서도 인형이 보이지 않는 경우가 있으므로 잘 생각하면서 보지 않으면 이해하기 힘들다.
일본의 인형극, 특히 정유리에 의해 연출되는 것은 박첨지와는 다른 약속 아래서 존재한다. 인형이 정유리에 의해서, 처음으로 인형극이 성립된 것을 이제 깊이 생각하게 된다. 인형극을 완성하기 위하여 몇 번이나 정유리가 그 형식을 변혁시켜 왔는가를 잘 살피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렇게도 정연한 가무기극(歌舞伎劇)의 형식은 이상과 같은 인형극으로부터 큰 힘을 받았다. 형(型)에 사로잡혀 판에 박힌 양식에 빠져버릴 정도로 정유리가 엄정·정확한 규모를 구성하여 인형극을 성립시킨 것을 감탄함과 동시에 그것이 또 다시 가무기극(歌舞伎劇)에 철저한 가르침을 준 것을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도 연극사가나 淨瑠璃史家들이 그런 문제에 언급이 적은 것은 무엇이라 해야 할까.
박첨지놀이의 무대는 극히 간단한 것으로 흔히 노천에 기둥을 세우고 포장을 둘러친다. 대개는 옥외 공연이고 실내에서 공연하는 경우는 드물다. 포장의 주위는 사방 전체가 4간(4⁓1.82m), 때에 따라서는 정면의 폭이 1간(間)반, 안쪽으로 폭이 1간(間)되는 협소한 곳이다. 인형사·악사가 그 포장의 안에 들어가거나, 협소한 경우에는 악사들만 포장 밖으로 나온다.
반주 악기로는 꽹과리·북·장고·반월형의 징·소고·호적 등이 있으나 이것들이 모두 갖추어지는 것은 아니고, 장고·호적·징만으로 하는 등 때때로 편의상의 생략이 있다.
본래 전막과 후막으로 전경과 배경을 삼았으나 차차 바뀌어 오늘날 후막은 없어지고, 전막도 무지(無地)의 천으로 단순히 주위를 두르는 포장이 될 뿐이다. 그러므로 인형놀이에는 배경, 전경이 없어져 버렸다고 하겠다. 무대의 모습을 보이기 위해 무대면 사진을 소개하고자 한다(사진자료 2매 게재됨-역자), 무대를 산대(山臺)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가면희의 무대인 산대를 차용한 명칭이며, 이런 이유로 산대 박첨지놀이라 불려지기도 한다.
사진 제1도에는 오른쪽으로부터 취발이·박첨지·홍동지·망석승이 차례로 서 있고, 제2도에는 같은 순서로 당녀(꼭두각시라 하는 여자인형, 여기서는 기생 역)·삼보승(위계가 낮은 중)·평양감사·당녀(전자와 같음)가 나와 있다.
인형사는 포장막 안에서 인형을 들어올려 놀리는데, 막은 인형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다. 인형의 등·퇴장 때에도 인형사는 손을 구부렸다 폈다 하는 정도로 조작은 간편하고 단순하다. 등장할 때 부르는 노래는 악사가 부르는 경우도 있으나 대사는 전부 조종을 하면서 한다.
이 대사는 엷은 종이를 빗살과 같은 나무에 붙인 기구를 조종사의 입에 대고 하였으며 그 음향은 <비이비이>하고 울렸다 한다. 40, 50년 전까지도 있었던 이런 낡은 방식은 바뀌어 오늘날에는 대나무통에 입을 대고 말하는데, 그 통은 사진에서 보이듯이 막의 전면 한 가운데 옆으로 조금 벌어진 틈 사이로 돌출 되어 있다. 대사에는 노랫가락이 곳곳에 들어 있다.
추엽 교수의 수기를 보면, 노부부의 만나는 장면 하나에도 여러 군데에 노랫가락이 들어 있다. 하나의 예를 들기로 하겠다.
어디 갔다 이제 왔나, 기산영수별건곤(箕山潁水別乾坤) 소부허유(巢父許由)가 날 찾나, 채석강(採石江)의 명월야(明月夜) 이적선(李謫仙)이 날 찾나, 사호(四皓)선생 사노인(四老人)이 바둑두자고 날 찾나, 노래 부르던 도연명(陶淵明)이 노래가 부르고 싶어 날 찾나, 마누라가 집 떠난 지 이미 오륙십 년이 되었는데 나를 찾아왔단 말인가. 만나 보자, 만나보자.
또 박첨지가 첩을 타이르는 말에는 다음과 같은 대사가 있다.
여보게, 여기 큰마누라가 오랜만에 왔네, 흔히 이르는 말에 평지에 지어도 절은 절이요, 개천에서 나와도 용은 용이요, 지푸라기로 만들어도 위패는 위패라 하였네, 큰마누라의 모양이 개 같아도 돼지 같아도 역시 큰마누라일세, 자 어서 인사드리게.
이상의 노래(타령)와 대사를 비교해 보면 평범한 말과 타령은 맛이 아주 다르다. 노로마인형극(일본 신사현(新寫縣)에 있는 인형극. 홍동지 같은 인형의 남근으로 오줌을 눈다-역자)의 대사보다 박첨지 놀이의 대사는 보는 사람들에게 강한 느낌을 준다. 박첨지놀이는 골계스러운 놀이인데 그 골계미는 인형의 움직임이 중심이지만 평범한 대사에도 그런 맛이 있다. 노래(타령)에는 그런 골계스러운 효과가 없다.
이러한 인형놀이가 어찌하여 조선인들로부터 멀어졌을까. 몹시 오랫동안 즐겨 오던 것을 완전히 망각하여 버리고 생각조차도 거의 않게 된 까닭은 근래 연극, 영화 등 재미있는 오락들이 속속 스며들어와 그 방면에 굶주린 조선인들을 유혹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이런 문제에 대하여는 기구군의 논설에서 참고사항을 적지 않게 얻을 수 있다.
조선 인형놀이의 기원은 가면놀이처럼 오래인 것은 아니다. 다만 인형을 사용한 것은 가면보다 더욱 오랜 일로 보인다. 유사 이전의 고분인 듯한 곳에서 가끔 여러 가지 토우가 출토되는 점을 보아 알 수 있다. 土偶는 가면놀이에서 사용된 가면과 같이 벽사(抗邪) 박천(迫薦)의 의미를 지녔던 부장품이었을 것이다. 기록에 전하는 인형놀이로서 우리가 볼 수 있는 최고의 것으로는《문헌비고(文獻備考)》 악고(樂考)에 있는 다음과 같은 기사이다.
당구부악유고려기(唐九部樂有高麗伎) 당무후시(當武后時) 상여이십오곡(尙餘二十五曲) 정원말유능집일곡(貞元末唯能集一曲) 의복역쇠패(衣服亦衰敗) 실기본풍(失其本風) 괴뢰병월조이빈곡(傀儡拄越調夷賓曲) 이적파고려소진야(李勣破高麗所進也)
물론 이상의 기사는 중국의 기록에 의한 것이겠으나 인형이라면 인형놀이를 말한다. 이적(李勣)이 바친 것이라면 당나라 초였을 것이다. 그때 고구려의 우인(優人)이 조종하는 인형놀이가 행하여지고 있었거나 혹은 다만 목우(木偶)를 진열하고 관람만 하는 행사가 아니었을까. 기사가 간단하여 분명하지 않다. 아마도 목우를 무대에 등장시키고 관람만 하는 것이 아니었나 한다. 왜냐하면 만약 당나라 초기에 고구려의 우인이 조종하는 인형놀이가 행하여지고 있었다면, 후에 신라나 고려에도 전하여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동국(東國) 역사책에서 인형에 관한 것으로는 삼국사기열전지도로왕(三國史記列傳智度路王) 때의 기록이 전한다. 이사부(異斯夫)가 우산국(于山國)을 정복시키기 위해 커다란 목우사자를 만들어 전선(戰船)에 실었다는 기사가 나온다. 이것은 놀이에 사용된 경우는 아니며 이외에 인형을 관람시켰다는 기사는 하나도 찾을 수 없다.
高麗史列傳 성종원년(981년) 최승로의 상서(上書)에는 팔관회에서 여러 가지 인형을 만들어 관람시켰다는 기사가 나오는데, 이것이 우리가 볼 수 있는 최고의 기록이다. 물론 우인이 조종하는 인형이 아니었음을 단순히 우인(偶人)이라 칭하고 있을 뿐 아니라, 공비(工費)를 많이 들여 한번 사용한 후에는 곧 파손하였음을 말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알 수 있다. 또한 우인은 중국에서 흉례가 아니면 사용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오직 진열하여 놓고 관람시켰던 것으로 생각된다.
팔관회는 신라시대에도 행하여졌으니 인형의 관람은 신라에서도 이루어졌을 것이나 그 기원에 대하여는 모색할 방도가 없다. 고려시대의 팔관회에서 인형의 관람이 폐지되어 그 흔적이 어둡게 된 것은 최승로의 상서가 그대로 승인된 데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의 습속에는 종교적이든 관상용이든 보통 민가에 인형을 장식해 놓는 것이 없었는데, 이는 인형(偶人)이 마(魔)를 부른다는 미신 때문이었다. 어린이의 장난감에도 인형이라 할 만한 것은 없었다. 특히 심한 경우는 담장 벽에 그린 인물이나 짐승의 눈에 바늘을 꽂아 두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는 점이다. <인형>이라는 방언도 일반적으로 사용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민간에게 사용하는 인형으로는 논이나 밭에 새를 쫓기 위해 길가에 버린 제웅 정도를 들 수 있다.
이런 이유로 해서 조선의 한자字典에는 인형의 뜻으로 우용(偶俑)(나무인형), 허수아비, 제웅 등을 지적하고 있다. 인형을 혐오하여 그 말조차 사용하지 않게 된 것은 아마 고려 예종 때 중국에서 부록파도교(符帱派道敎)가 수용된 이후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앞서 본 대로 고려 성종 때까지는 인형을 진열하고 관람시키는 풍습이 이어져 왔으니까 인형이라는 말을 방언으로 쓰는 경우가 분명히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의 논설에 따르면 조선에는 인형이 없었고, 또 조선인이 인형을 혐오해 왔다고 하는 것은 결코 처음부터가 아니고, 950년 이래의 금법(禁法)에 의해 특별한 관습이 생긴 것으로 볼 수 있다. 기구(磯具)군도 <극히 야비하고 외설스러운 장면이 들어 있어, 인형놀이는 경성 안에서는 금지되어 있었다고 한다>고 기록하여 놓았다.
과연 이런 까닭으로 경성의 민중은 박첨지놀이를 알 수 없었다. 인형놀이는 수도로부터 떨어져 전적으로 시골사람들의 놀이가 되었으며, 오늘날에도 시골이 아니면 박첨지놀이를 알지 못한다. 우리들이 친히 방문하여 보게 된 구파발의 인형은 마을의 공유물로서 그 공연에 대하여 사람들은 익숙하다. 현재 인형사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은 없고 무엇인가 본업을 지닌 이외에 인형의 조종은 부업으로 하고 있다. 구파발의 패거리도 마을의 제례나 특별한 잔칫날에 공연을 다니는 이외에 농한기를 이용하여 돌아다니며 공연한다. 그리고 이런 것은 비단 구파발에만 있는 일이 아니라 한다. 경기도·충청도·전라도·경상도·황해도의 각 지방에도 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조선 8도의 여러 곳에 인형놀이의 패거리가 있음을 알겠다. 인형놀이의 흥행이 잘 안되고 순회공연이 대체로 어려운 형편인데도 인형사는 아직 시골에 많이 남아 있다고 한다.
이천종의 말로는 인형의 수는 대체 30개 정도이고 인형사는 7, 8인 내지 3, 4인을 요한다고 한다. 또 인형은 다음과 같다고 한다.
① 박첨지
② 그의 처
③ 그의 첩
④ 그의 자식
⑤ 그의 동생
⑥ 홍동지(머리가 잘릴 수 있도록, 머리가 떨어지는 장치가 되어 있다)
⑦ 그의 자식
⑧ 主僧
⑨ 役僧(2개)
⑩ 小僧(4개)
⑪ 꼭두각시(2개)
⑫ 포수
⑬ 상주
⑭ 평양감사(감사에 따르는 관노(官奴)·사령(使令) 등 10인은 나무판에 못을 박아 붙여놓 았다)
또 여흥(餘興)의 인형은 다음과 같다.
① 먹승(아주 검은 얼굴이다)
② 홍백생원(紅白生員 : 얼굴이 절반은 붉고 반은 흰색이다).
③ 취발(붉은 얼굴이다)
조선의 인형은 머리부분이 고정되어 있을 뿐 아니라 의상도 그렇고 1인 1역이다. 이들 인형의 머리는 박을 켜서 만들거나 나무 막대기에 그림을 그린 두 종류가 있다. 홍동지만 다리가 있고 그밖에는 모두 다리가 없다. 하찮은 역할을 하는 단역인형에는 손조차 없다.
경성대학에 수장되어 있는 5개의 인형은 다음과 같이 만들어져 있다.
① 박첨지
반신(半身), 전체길이 2척(尺) 2촌(寸) 7분(分), 머리로부터 어깨부분까지 노출된 부분의 길이가 1척(尺) 3촌(寸) 7분(分)이다. 어깨 폭 5촌(寸) 4분(分), 가슴 폭 4촌 7분, 가슴 길이 6촌 5분, 이 같이 몸 전체를 이루는 나무틀은 앞뒤 2개로 가운데에 있는 가눔대(조종대)에 틀이 고정되어 있다. 어깨부분 양쪽에는 팔이 붙어 있다. 팔 길이 6촌 3분, 속에 있는 실을 잡아당겨 움직인다. 얼굴은 6촌 5분인데 박으로 만들고 흰토끼털로 머리카락·눈썹·수염까지 붙였다. 영락없는 노인의 모습이다(그림 참조). 입의 움직임은 전면에 있는 실로 조작한다. 이것은 머리 내부에 고무줄을 사용해서 아래턱을 움직이는 장치다(그림참조). 이 장치의 새로움은 고무를 사용한 데 있다. 이미 쇠약해진 조선 인형놀이에도 진보의 자취가 보이는 것은 기쁜 일이다. 그러나 옛 인형의 모양을 생각할 수 없는 것은 유감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② 그의 첩
전체길이 1척 8촌 4분, 얼굴 4촌, 세로 5촌에 폭 4촌인 몸체틀 2개 사이에 6촌 5분의 팔이 붙어 있다. 박첨지 인형과는 달리 머리부분의 축이 어깨에 고정되어 있다. 조종대 역시 몸체 틀에 고정되어 있는데 길이는 1척 3촌 5분이다(그림참조).
③ 그의 처
전체길이 1척 7촌, 얼굴 5촌 5분, 팔이 몸체틀 사이에 붙어 있는 것은 위의 경우와 같으나 조종대는 머리부분에 접속되어 있다. 대를 쪼개어 둥그렇게 머리부분을 만들어 그 위에 종이를 바르고(얼굴 모습을 만든 후) 특별히 만든 입술을 붙인다. 그 입술은 실로 움직이게 한다. 이 방법은 고무장치보다 물론 오랜 것이다.
④ 평양감사
머리에 천을 꿰매어 붙인다. 3개의 가느다란 대나무로 조종한다. 머리에는 2촌 8분의 대나무, 양팔에는 1척 3촌 2분인 대나무를 한 개씩 붙인다. 한번 보아서는 손가락 인형에서 변형되어 만들어진 인형으로 생각된다.
⑤ 홍동지
전체길이 1척 4촌, 얼굴 3촌 5분의 목각인형이다. 몸 전체가 붉게 칠해져 있다. 양팔의 어깨 부분에 못을 꿰어 놓아서 흔들흔들 움직인다. 아래턱이 움직이고 그 조종실은 오른쪽 다리 끝에 내려와 있다. 조종방식은 박첨지 처의 경우와 같다. 이 인형은 통나무를 깎아 만들었기에 체내에 들어간 장치는 없다.
구파발에서 본 것은 또 다른 구성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① 박첨지
전체길이 2척 8촌, 얼굴길이 9촌, 얼굴폭 7촌, 십자형으로 만든 조종대, 손에는 가느다란 막대기가 붙어 있고 그것으로 조작한다. 경성대학에서 본 평양감사의 구성에서 한 차례 변화된 모습이 보인다. 머리 부분은 십자로 된 부분 위에 붙어 있으므로 어깨부분은 그 아래가 된다. 입을 움직이는데 철사줄을 이용한 장치가 사용된다. 이 철사줄 장치는 고무줄을 이용하는 것보다 뒤떨어진 방식이라고 들었다.
② 그의 처
입을 움직이지 않을 뿐 나머지 모양은 전자의 경우와 같다.
③ 그의 첩(일명 용산마포(龍山麻浦))
전체길이 1척 9촌, 얼굴은 물바가지 모양의 표면에 그리고 그 바가지에 4촌 5분의 둥근 대를 세워서 끼우고 다시 거기에 대나무 못을 꽂아 고정시킨다. 바가지의 길이는 3촌, 폭은 2촌이다. 팔은 나무를 깎아 가슴부분에 교차시키고 대나무 못으로 고정시킨다. 교차시킨 양쪽 끝에 실을 매었고 그 실은 둥근 대를 통해서 밑으로 내려와 있다. 또 머리를 대나무 못으로 고정시킨 곳으로부터 아래로 2촌 되는 부분(즉 목)에 두꺼운 종이를 둥글게 하여 두른다. 이 목띠는 폭 2촌에 둘레길이 9촌이다. 목띠로 인하여 양팔이 위로 벌어지는 범위가 생기고 정도 이상은 좁혀지지 않게 된다. 이 방식은 주의할 만하다고 생각한다.(그림참조)
④ 홍동지
벌거벗은 몸이 붉게 칠해져 있다. 통나무로 깎은 인형, 전체길이 1척 7촌 5분, 얼굴 3촌 4분, 머리틀 1촌 1분, 어깨 3촌 5분, 목 4촌, 팔 6촌, 이 팔은 못으로 고정되어 흔들흔들 움직인다. 경성대학의 수장품은 입이 움직이나 이것은 사타구니 사이에 5촌의 남근이 달려있다. 이것은 궁둥이 부분에 있는 실에 의해 움질움질 움직인다. 음란한 연출이기에 경성에서의 흥행이 금지된 이유의 한 가지를 알게 해 준다. 두 다리 아래에 손잡이가 있다. 그 길이가 2촌 5분이므로 다른 인형들은 놀이에서 다리를 보일 수 없으나 홍동지만은 다리를 보였음이 분명하다. 내가 본 홍동지는 2개가 다 목을 아래로 떨어뜨릴 수 없어 사형집행의 장면을 보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홍동지 사형의 장면은 하지 않은 경우가 많음을 알겠다.
⑤ 당녀
2개인데 박첨지의 첩과 같은 형태다.
⑥ 박첨지의 자식
전체길이 2척 6촌, 얼굴길이 7촌, 얼굴폭 6촌, 옷은 머리에 꿰매져 있고 세 개의 대나무로 움직인다. 경성대학에서 본 평양감사와 같은 형태다.
⑦ 평양감사의 자식
전체길이 1척 1촌 5분, 두꺼운 종이를 접어 모자를 만들었다. 십자형의 조종대 위에 머리를 붙이고 어깨로부터 아래 부분이 7촌이다.
⑧ 영노(관청의 노예로 공천(公賤)이라 한다)
전체길이 1척 2촌, 둥근 머리의 직경이 4촌, 원 주위가 9촌인 박이다. 십자형의 조종대에 머리가 붙어 있고 어깨 아래의 길이는 3촌 3분이다.
⑨ 화덕진군(火德鎭君 : 조왕신)
역시 십자형의 조종대로 만들어져 있다.
⑩ 노승
삼보승이 3개, 모두 중이 모자를 쓰고 옷은 머리부분에 꿰매어져 있다. 막대기인형의 최초의 형태로 보인다. 손가락인형으로부터 첫 단계 변화로 생각된다.
⑪ 소승
흰옷 인형이 2개, 붉은 옷 인형이 2개로 버드나무로 만든 손가락인형이다. 조종되는 인형은 손가락인형으로부터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확실한 증거를 제시할 수는 없으나 그렇게 상정해 볼 수 있겠다. 짚이나 종이로 만든 인형 및 나무로 만든 주술인형과 조종되는 인형과의 분리는 움직이기 위해서 만든 손가락인형으로부터 시작되었다함이 마땅할 것이다.
여흥으로 놀리는 인형으로서.
① 취발은 박으로 만든 머리에 십자형 조종대가 있고, 두 손은 가느다란 막대로 조종한다.
② 홍백생원은 물바가지 같은 표면에 얼굴을 그린 것인데 절반은 푸르고 절반은 붉다. 양면의 모습은 같다.
이상에서 간단히 살펴 본 대로 머리 제작 방식에는 박으로 만든 것, 틀을 만들어 종이를 붙인 것, 물바가지 모양의 표면을 이용한 것, 나무에 새긴 것 등 4가지가 있다. 인형의 구조에는 손가락인형(소승 4개), 막대기 하나로 된 것(영노, 삼보승), 막대기 3개로 움직이는 것(평양감사, 박첨지 동생), 십자형 조종대로 된 것(평양감사의 자식), 막대기 2개로 움직이는 것(십자형 조종대에 붙인 것, 구파발의 박첨지 부처), 몸체틀로 된 것(경성대학의 박첨지 부처), 둥근 대나무 조종대로 된 것(용산마포), 둥근 나무를 조각 한 것(홍동지) 등의 8가지 양식이 있다.
머리에서 움직이는 부분은 입뿐인데 그 조정방식에는 실로 움직이는 것, 철사로 만든 기구를 이용한 것, 고무줄을 이용한 것 등 3가지가 있다. 팔도 홍동지와 같이 못으로 고정시켜 흔들거리는 형태, 몸체틀의 양쪽 끝에 끼워 넣고 실로 잡아당겨 움직이는 것, 두 팔을 교차시켜서 만든 것(둥근 대나무장치) 등 3가지다. 한성준이 말한 아래 입술을 움직이는 형태도, 4, 50년까지 실을 당겨서 개폐되는 것뿐이었다고 한다. 또 한(韓)은 인형의 구성을 크게 셋으로 나누어 손가락인형(동시에 막대기인형), 십자형 조종인형, 실로 조종하는 대나무 장치인형 등이 있는데 그것들은 8, 90년 전부터 전해왔다고 한다. 아마도 보다 더 오래 전부터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러한 인형들의 형태는 인형의 발전 과정을 말해 준다고도 할 수 있다. 일본에서 <줄로 조종한다(아야쯔리)>는 말은 뜻이 분명하게 사용되지 않고 여러 가지 의미를 갖는다. 손가락으로 직접 조종되는 인형도 아야쯔리라 하고, 실로 잡아당기는 방식도 그렇게 말한다. 손으로 조종하는 방식(테즈까이)과 실로 조종하는 방식(이토아야쯔리)이 있었으나, 아야쯔리라고 하면 테즈까이인지 이토아야쯔리인지 알 수 없다.
중국에서는 실로 조종하는 것을 토우호우(돈유(寸乳)), 손으로 조종하는 것을 후리이스(요고이자(要古里子))라 하는데, 조금도 혼동되게 쓰이지 않는다고 이문권군으로부터 들었다. 서하시화(西河詩話)의 궁희(宮戱)는 원래 물에서 노는 인형(수괴뢰(水傀儡))으로, 그 만드는 방식은 인형을 판자 위에 세우고 큰 연못의 수면에 띄운 다음, 병장(屛障)을 이용해서 그 밑에서 기계를 돌린다. 그렇게 하면 물에 의해서 인형을 놀리게 된다. 또 막대기인형은 사람이 그 다리를 잡게 되므로 속칭 황각구(簸脚埀)라 하고, 줄인형은 속칭 제선구(提線埀)라 하는데 이것이 이토아야쯔리다. 이처럼 각각의 명칭이 있으므로 혼동되게 쓰임이 없다.
그러나 우리 일본에서 이상과 같이 구별해서 쓰이는 말이 없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희다촌균정(喜多村筠庭)은 아야쯔리가 아야도루(손으로 실뜨기)라는 말에서 온 것인데 본래 이토아야쯔리라고 해야 할 것이라 하였다. 그것이 본래대로 사용되지 않고, 상당히 뒤섞여져 의미가 분명하지 않게 쓰이고 있는 것은 지금도 고쳐지지 않고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일본의 인형이 세계에 뛰어난 까닭으로서 그 구성은 결코 다른 나라에 없는 것이다.
일본인형의 특징은 다른 나라에는 없는 <3인 조종인형>이다. 이 방식은 ① 손가락인형, 선사(線紗)인형(한 손으로 움직임), 팔에 끼고 조종하는 인형 등과 같이 몸체틀과 조종대가 없는 계통, ② 머리인형이나 십자 조종대가 있는 막대기인형의 계통, ③ 중국 남경조(南京操)의 이또즈까이로부터 강호손사랑(江戶孫四郞)의 3인조가 된 계통 등 세 계통이 하나로 총화 된 형태다. 이 세 계통은 각기 서로 영향을 끼치면서 발달되어 왔으나 <3인 조종인형>에 이르러 형식을 병합하여 하나의 형태가 되었다. 그것은 인형의 모든 심사(마음)를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다른 나라에는 없는 체제로서 영국에서 들어온 다쿠(タ一ク)나 이야기로만 전승되는 이탈리아의 이토아야쯔리도, 또한 중국의 제사(提絲)인형도 모두 실로 조종되는 형식이기는 하나 일본의 것이 그중 모든 계통의 총화인 것이다. 그것은 인형 형식의 모든 점을 구비하고 있다. 그러니까 일본에서는 테즈까이라고 해도 단순한 테즈까이의 의미만이 아닌, 카라쿠리(여러 장치가 있는 것)도 있고, 이토아야쯔리도 포함된다. 이토아야쯔리의 경우에도 그냥 아야쯔리라고 쓰고 있는 것은 형식을 넘어선 의미를 지니고 있기에 결코 틀린 말이라 할 수 없다.
우리 일본인형 체제의 제작과정을 여기까지 다소라도 생각해 보았으나 모든 계통이 서로 복잡하게 얽혀서 드디어 하나의 총화를 이룩한 발자취를 검토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번 조선 인형놀이의 시찰을 통해서, 그것이 우리의 것보다 유치한 경로를 지니고는 있으나, 비슷하게도 앞서의 세 가지 계통이 혼합되어 가는 모습을 보게 되었음은 기쁜 일이었다. 손가락인형에서 막대기인형으로, 몸체 부분에서 십자 조종대가 생기고, 다시 둥근 대나무 장치에 실로 조종하는 것이 되었는데, 이러한 형식들이 각기 8가지의 방식으로 눈앞에서 작동되고 있었다. 이 8가지 방식으로 우리 일본에 현행하는 세 가지 계통 총합인형(즉 3인 조종 인형)의 제작과장을 고찰해 보면, 이해가 되는 부분이 상당히 있다.
해설
1930년대에 인형극인 꼭두각시놀음을 현지 조사한 사람으로는 김재철과 송석하를 들 수 있다. 김재철의 연구는 이미 알려진 대로 그의 《조선연극사》(1933년 청진서관·1939년 학예사에서 각각 간행)에 집대성되어 있어 그 동안 널리 읽혀져 왔고 또 학문 연구에 값진 도움을 주었다. 송석하의 논문은 <박첨지극에 대한 수삼고찰>(원제 : 朴僉知劇こ對ゐ數三考察, 季刊 人形芝居 제4호)과 <조선의 인형극>(원제 : 朝鮮の人形芝居, 민속예술 제4호, 1924년 4월)이 발표되었고 후일에 진행된 《韓國民俗考》(1960년 일신사 간행)에도 박첨지극, 망석승 극, 완구인형극에 관한 기록이 게재되어 있다.
1930년대에 일본인으로서 꼭두각시놀음을 현지 조사한 사람으로는 점구방지진(鮎具房之進)과 추엽륭(秋葉隆), 그리고 삼전촌연어(三田村鳶魚)를 들 수 있다. 점구(鮎具)의 기록은 그의 《신고화랑고(新攷花郞고攷)·백정고(白丁攷)·노비고(奴婢攷)》(1938년 조선인쇄주식회사·1973년 동경국서간행회(東京國書刊行會)에서 각각 간행)에 실려 있고, 추엽의 기록은 아직 확인하지 못하였으나 그의 저작물 가운데로 게재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활자화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추엽이 꼭두각시놀음에 관한 조사노트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삼전촌(三田村)이 밝힌 것인데, 아마도 조사자 자신이 전쟁 와중에서 분실했을 가능성도 전적으로 배제 할 수 없다.
여기에 번역 게재하는 삼전촌의 조사기록은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소개되는 자료이다. 일본에서는 인형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몇몇 학자들 사이에서 극히 조심스럽게 검토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 그 까닭은 삼전촌의 꼭두각시놀음과 그 인형에 관한 설만으로는 한국과 일본의 인형에 대한 제반 관계양상을 쉽사리 이해하거나 수긍할 수 없는 미진한 부분이 아직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논문<박첨지가 가르치는 인형제작과정>(원제 : 朴僉知の敎へゐ人形制作過程)은 애초에 《旅と傳說(여と전설)》(1932년12월)이라는 잡지에 게재되었으나 후일 그의 수필집인《鳶魚縱筆(연어종필)》(1942년 앵정(櫻井)서점 간행)에 재수록되기에 이르렀다.
삼전촌연어(1870∼1952)는 옛 팔왕자(八王子 : 오늘날에는 동경도내 지역)에서 태어나 어려서 동경으로 이사하여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였고 작고할 때까지 고증·수필가로 활약하였다. 송전소학교 시절에는 세천임풍(笹川臨風)과 동급생이었다. 20세 때(1889년)에 내도항희(來島恒喜)가 대외외상(大氟外相)을 저격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그는 혐의자의 한사람으로 검거되었다가 무혐의로 석방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 동안 범죄자로 취급되어 그의 사진이 세상에 공개된 것을 계기로, 평생동안 사진을 싫어하였고 또한 한 장의 사진도 남겨 놓지 않고 작고하였다 한다. 그는 정열적인 성격의 소유자로서 일생을 독자적으로 고고하게 살아간 명치인(明治人)이었다. 그의 평생 저술은 《三田村鳶魚(삼전촌연어)·江戶ばなし》(20책, 1956∼1959년 청와방(靑蛙房) 간행)와 《三田村鳶魚全集(삼전촌연어전집)》(27권, 별권1, 1975년 중앙공론사 간행)에 집대성되어 있다.
삼전촌은 1932년에 우리나라를 다녀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자신의 조사 경위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굴뢰자본상가악(窟幞子本喪家樂) 개출어언사헌목왕지기(蓋出於偃師獻穆王之伎) 고려역유지(高麗亦有之) 한말용지가회(漢末用之嘉會)>라 기록한 악서를 읽고, 그는 당시 조선에 인형의 양식이나 조정법이 전승되고 있으리라 는 가정 아래 몇 차례 문의하였다. 회답을 얻지 못하고 있던 중, 마침 만주를 여행할 기회를 얻어 그곳에서 만난 이문권으로부터 박첨지놀음(꼭두각시놀음)에 관한 약간의 정보를 듣게 된다. 경성(서울)을 찾아와 최남선을 만난 그는 경성제국대학 예과 한문교수였던 多田 교수를 소개받게 되고, 다전을 통해서 당시 경성제대 교수이자 민속학참고실 책임자인 秋葉 교수를 만나게 되었다. 추엽 교수로부터 민속학참고실에 보관된 꼭두각시놀음의 인형표본을 처음으로 목격하게 되었다. 그로서는 실로 충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한편 그로부터 꼭두각시놀음의 줄거리를 적어 놓은 《노트》도 빌어보게 된다. 또 그는 당시 이미 출간되어 있던 김재철의 연극사(학부 졸업논문으로 제출되었다)와 鮎貝의 《목우희고(木偶戱考)》도 빌려 보고 참고한다. 당시 흥행사였던 이천종으로부터 고양군 신도면 구파발의 김창철을 소개받아 그곳에 보관되어 있던 20여 개의 인형을 다시 발견하게 된다. 늙은 인형사인 한성준도 만나게 되어, 그들로부터 귀중한 증언을 청취하기에 이른다.
그가 조선의 인형에 그처럼 집요한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은 어디까지나 일본의 인형에 대한 계통적인 이해를 넓히려는 의도였다. <박첨지가 가르치는 인형제작과장>이라는 제목 그대로 그는 조선인형의 제작과정을 살핌으로써 일본의 정유리인형(淨瑠璃人形)(文樂(문악))이 과연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떤 과정을 밟아 현재와 같은 양식에 이르게 되었는가를 밝혀보고자 하였다. 당시 그는 일본 인형극 연구자들의 좁은 안목에 은근한 불만을 지니고 있었으면서도, 자국(自國)의 인형이나 인형극에 대하여는 매우 긍지 있게 느끼고 있었음이 논문 가운데 반영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는 그처럼 우수한 일본의 인형이 어떻게 해서 만들어지게 되었는가를 이웃인 중국이나 조선의 인형을 통해 규명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의 문화우월론적인 사고는 일본의 인형에 대하여는 인형극(劇)을 조선에 대해서는 인형희(戱) 라 하여, <놀이>로서 보다는 <연극>으로서의 성장이 앞장섰음을 상대적으로 강조한 데서도 나타나고 있다.
삼전촌의 논문은 문헌적인 연구와 현지조사 연구로 나누어 검토할 수 있다. 먼저 문헌적인 연구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항에 관하여 기술하였다.
1) 박첨지놀이는 조선조 중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2) 박첨지놀이에는 일정한 연희본(각본)이 없고 연희자들에 따라 수시로 내용이 바뀌어 왔다.
3) 고려시대의 팔관회에서 인형의 관람이 폐지된 경위를 적은 기록을 통해 인형에 관한 간단한 역사를 알 수 있다.
다음으로 현지조사 연구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항에 관하여 기술하였다.
(1) 조선의 인형놀이는 김재철, 송석하, 추엽륭 등의 기록과 한성준의 증언을 통해서 그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고 함으로써, 새로이 자신이 조사한 한성준본의 내용을 추가하여 소개하였다.
(2) 경성제국대학 민속참고실에 보관된 인형과 구파발에 보관된 인형에 대하여 자상한 측정과 조사를 하였다.
(3) 인형제작 방식은 ① 머리 ② 구조 ③ 입 ④ 팔 등으로 분류하여 그 특징을 기술하였는데 ①에는 박으로 만든 것, 틀을 만들어 종이로 붙인 것, 물바가지 모양의 표면을 이용한 것, 나무에 새긴 것이 있다 하였다. ②에는 손가락인형, 막대기인형, 막대기 3개로 움직이는 것, 십자형 조종대로 된 것, 막대기 2개로 움직이는 것, 몸체틀로 된 것, 둥근 대나무 조정대로 된 것, 둥근 나무를 조각한 것 등 8가지 양식이 분류되었다. ③을 움직이는 기구로는 실, 철사 장치(자바라식), 고무줄이 있고, ④의 형태에는 못으로 고정시켜 흔들거리는 것, 몸체 틀의 양쪽에 끼워 넣고 실로 잡아당겨 움직이는 것, 두 팔을 교차시켜서 만든 것 등이 있다 하였다.
(4) 한성준의 증언을 토대로 인형의 아랫입술을 움직이는 방식은 4, 50년 전 까지 실로 잡아당겨서 개폐하는 것뿐이었고, 손가락인형(동시에 막대기인형)·십자형 조정인형·실로 조종하는 대나무장치인형 등은 8, 90년 전부터 전해왔다고 함으로써, 19세기에도 인형극이 성행하였음을 시사하였다.
(5) 본래 전막과 후막으로 전경과 배경을 삼았으나 차차 바뀌어 오늘날 후막은 없어지고, 전막도 무지의 천으로 단순히 주위를 두르는 포장이 되었다. 가면희의 무대인 산대를 차용하여 산대박첨지놀이라 불러지기도 한다.
(6) 인형사와 악사는 포장 안에서 연출하는데 협소한 경우에는 악사들이 포장 밖으로 나온다. (여기서 산받이의 분화를 볼 수 있다.)
(7) 대사는 대나무통에 입을 대고 말하는데 그 통은(사진에서 보듯이) 막의 전면 한 가운데 옆으로 조금 벌어진 틈 사이로 돌출되어 있다.
(8) 본놀이 이외에 자라타령, 먹중, 취발, 딱따구리 등 여흥장면이 공연된다.
요컨대 삼전촌의 논문은 지금까지 남사당패의 전유물로만 인식되어 왔던 인형놀이와 놀이패가 각 지방에도 존속되었다는 사실을 밝혀 놓음으로써 우리의 인형극사 연구에 새로운 방향과 방법을 제공해 주는데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이상 삼전촌의 논문에 관한 자세한 분석은 필자의 논문 <민속극 전승과정연구>(예술과 비평, 1985. 9)를 참고해 주기 바란다.
번역·해설 : 서 연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