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령 탈춤
서연호 / 고려대 교수
■ 놀이의 환경
황해도 웅진군 부민면 강령리에는 예로부터 탈놀이가 전승되어 왔다. 황해도의 각지에 전승된 여러 탈놀이 중의 하나이다. 황해도에서는 탈놀이를 흔히 탈춤이라고 부르기에 강령탈춤이라는 명칭이 생겨났다.
강령이라는 지명은 세종 10년에 설치한 강령현에서 비롯된 것으로, 고구려의 부진사가 고려 초기에 영강현이 되고 고구려의 조도가 고려 때 백령진이 되었는데, 영강과 백령이 합해져서 강령이 되었다. 강령현은 인조 15년에 해주에, 효종 4년에는 옹진에 편입되었다가 다시 10년 뒤에는 강령현으로 되는 등 변화를 겪다가㬑㬉 최근세에 이르러 옹진군 내의 지역으로 개편되었다.
강령에서 북동쪽으로 80리 거리에 해주가 있으며 서쪽으로 30리 거리에 옹진이 있고, 마을의 앞은 황해의 바다로 이어진다. 1945년 무렵, 마을의 홋수는 2백여 호에 인구가 1천2백 명 정도였다. 5일마다 장이 서고는 하였다. 1911년에 사리원·송화·해주와 함께 황해도에서는 보통학교가 제일 먼저 설립되어 이른바 신교육이 첫발을 내딛은 지역이기도 하며, 1915년에는 14명의 첫 졸업생이 배출되었다.㬒㬉
조선조 시대 마을의 서쪽에는 사직단이 있었고 북쪽에는 성황사와 여제단이 있었으며 향교도 있었다.㬓㬉 경치가 수려하고 물산이 풍부한 지역이어서 주민들의 놀이에 관한 흥취나 뒷받침이 퍽 좋았으며, 현청을 비롯하여 해주 감영·옹진 수사청 등이 인근에 있어 문화적인 영향이나 교류를 쉽게 가질 수 있는 조건도 있었다. 마을에서 가까운 마곡(麻谷) 능선 위에 팔경대가 있는데, 그곳에서 바라보이는 팔경은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렸다. 그것은 왕탄탁족(汪灘濯足)·풍도낙안(楓島落雁)·빈포귀범(濱浦歸帆)·모산낙조(帽山落照)·휴암송객(休岩送客)·마곡귀승(麻谷歸僧)·봉황상월(鳳凰上月)·구촌모연(具村暮煙)이라 하여 시적인 정취를 머금고 있었다.㬔㬉
강령탈춤이 언제 어떻게 성립되었는지를 밝힐 수 있는 문헌이나 확실한 증언을 찾을 수 없다. 다만 아래와 같은 몇 가지 방증 자료만을 청취할 수 있을 뿐이다.
① 해주 감영에서는 매년 5월 단오절에 각처의 탈놀이 패를 초치하여 놀이의 경연을 베풀었 다 한다. 그 가운데에서 가장 잘 한 놀이패의 놀이꾼에게는 감사가 관기 하나를 상으로 하사하였는데, 이러한 행사를 통해서 탈놀이가 더욱 발전되어 온 것이 아닌가 한다.㬕㬉
② 웅진군 북면은 옛 水使의 本營이 있던 곳이다. 그 본영에서는 강령의 놀이패를 초치하여 놀았다 한다.㬖㬉
③ 한일합병과 함께 해주 감영이 폐쇄되자 그곳에 있던 강령 출신의 관기 김금옥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가무에 능하였으므로 탈춤을 중흥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㬗㬉
이상의 방증을 토대로 한다면 늦어도 조선조 후기(19세기)까지는 강령에 탈놀이패가 성립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놀이가 발전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는 현청에 소속되었던 악사들의 지원을 고려할 수 있으며, 그밖에 다른 민속놀이 패들의 보조적인 역할이나 영향도 간과할 수 없는 조건이다. 예컨대 그곳의 부암리(갈모리)에는 김만열·이봉찬이 이끄는 사당패가 살고 있었으며, 천상리에는 이용식이 이끄는 사당패(그곳 말로는 경잔이라 하였다)가 있었는데 ,그 재인들은 탈놀이(악사)를 지원해 주었다고 한다.㬘㬉
세시 풍속인 단오놀이 중 탈춤이 대표적인 놀이가 되었던 것도 전승의 요인으로 간주할 수 있다. 매년 단오에는 주민들(특히 상업자)의 자발적인 지원과 호응을 받아 탈춤을 놀았는데, 음력 5월 4일에는 길놀이를 하였으며, 5월, 6월에는 저녁부터 새벽 무렵까지 밤새도록 탈을 놀았다. 길놀이 때에는 중요 배역(남강노인 역)은 소나 말을 타고 마을을 순회하였고 다른 놀이꾼들은 탈을 쓰고 따라다녔다. 길놀이가 끝나면 밤늦도록 마을에는 음식잔치가 벌어졌다. 놀이는 구경꾼들이 집으로 모두 돌아가야 끝이 났는데, 대개는 남강노인이 등장하는 부분은 하지 못한 상태에서 구경꾼들이 흩어지고는 하였다. 놀이마당으로는 주로 公廳의 앞마당(미곡시장)이 이용되었고 수백 명이 모여들어 즐겼다.㬙㬉
강령탈춤이 지상을 통해서 알려지기로는 1939년 10월의 서울 부민관 공연(13∼14일 낮밤)이 계기가 되었다.
대략 해서지방의 가면연극무용의 재래의 분포는 해변쪽은 해주와 강령이 성하고 산길쪽은 황주와 봉산과 기린이 장해서 언제든지 이 몇몇 고장에서 천재가 나타나는 것이 전례이다. 물론 그 이외에도 안악·재령·신천·서흥 등지에서도 명무(名舞)와 명재담(名材談)이 안 난 바는 아니다. 그러던 것이 근년에 와서 제일 먼저 황주·기린이 없어지고, 나머지 중에 강령·.해주·봉산 것만 命만 가까스로 보존하다가 時潮의 변천에 참다 못하여 영영 자취를 감추려고 최후의 촉광이 꺼졌던 것이 요즈음 겨우 부활되었다.㬑㬐㬉
이상 송석하의 기록으로 미루어 보면 조선조 후기에 성행하던 강령탈춤은 일제의 강점과 더불어 쇠퇴하게 되었고, 1930년대 중엽에 이르러 부흥되었음을 대강 파악할 수 있다.
당시 서울 공연은 강령의 조봉하가 인솔하였는데 이겸하(당시36세)도 동행하였다. 첫날에는 관중이 없었는데 동아일보를 찾아가 독자위안우대권을 발급하게 되자 이튿날에는 젊은이들과 연구자 혹은 관중들이 모여들어 어느 정도 객석을 메웠다. 함계희와 최준봉의 춤이 특히 주목을 끌었다. 공연이 끝나자 춤을 배우겠다는 대학생 7명(여자 2명 포함)이 나타나 잠시 가르쳐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서울 공연의 흥행 실패는 인솔자 조씨의 자살 사건을 가져오게 되었다.㬑㬑㬉 이 사건은 당시 탈춤에 관한 지방민들의 후원 상태나 서울 관중들의 태도를 시사적으로 전해주고 있다고 하겠다. 전쟁의 분위기로 치닫던 불안한 정국, 집단적인 행위에 대한 총독부 당국의 제지와 간섭,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려운 경제상태가 탈놀이의 와해와 침체를 부채질한 요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8·15광복 이후 강령 4개면 (부민면·용연면·봉구면·흥미면)의 치안유지회가 주동이 되어 탈춤을 부흥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여, 1948년 정부수립 기념행사에서 공연되었으며, 1950년 6월 20∼21일(단오절)의 놀이를 마지막으로 본고장에서의 전승은 끊기고만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 부흥운동에 가담한 사람은 놀이꾼으로 최승원·최준봉·송규흠·함계희·송순희·정성열·정천미 등이 있었고, 지방의 유지로는 이관하(총지휘)·이겸하(부민면장)·노준팔·김의식(한학자, 탈제작)·조규삼(중문학자)·김응규 등이 있었다. 선배 놀이꾼들에게 춤을 다소 배우고 월남한 송순희는 그 동안 경기도 경찰업무에 종사하느라 서울에서 새로 부흥된 강령탈춤단체(해서가면극보존회) 활동에는 참여하지 못하였다.㬑㬒㬉
■ 놀이패와 놀이꾼
1945년 9월 광복직후 미군정하에서 실시된 선거에서 부민면 면장에 당선되어 활약하던 이겸하(1903∼ )는 6·25때 남쪽으로 내려와 현재 서울(수유 2동 547-14)에 살고 있다. 그는 강령 출신으로서 1915년에 강령보통학교를 제1회 생으로 졸업하였고 일제시대에는 금융조합에서 근무하였으며 광복 후에 면장이 되었다. 고향에 있을 때 탈춤에 관심이 깊었던 그와, 현지에서 직접 탈춤대본을 채록(1943. 12)한 바 있는 임석재는 현재 옛 놀이꾼들에 관하여 증언해 줄 수 있는 다시없는 적임자들이다. 아래의 기록은 주로 이겸하의 증언을 토대로 한 것이다.㬑㬓㬉
옛 놀이꾼으로 기억되고 첫 번째 세대(살았으면 1백세 이상)로는 김익여·이면식·방재유·조주환 등을 들 수 있다. 김익여는 농사를 지으며 어려운 사림이었으나 탈춤 전반에 유능한 놀이꾼이었고 특히 말뚝이·영감·사자역에 뛰어났다. 이면식은 농사를 지으며 구장(區長)을 하였고 한때는 항일독립운동에 가담하여 6개월간 옥살이를 하기도 하였다. 말뚝이역을 잘 하였다. 방재유는 여관업을 하였으며 양반역을 하였다. 조주환은 양조장을 크게 하였으며 큰양반을 잘 하였다.
다음 세대(이겸하보다 12세 연상)로는 송규흠과 함계희를 들 수 있다. 송규흠은 구장(區長)으로서 엽총 사냥과 탈놀이를 즐기는 사람이었다. 탈이나 의상은 주로 그의 집 사랑방에서 만들었으며 놀이패의 사무를 총괄하는 산주(山主)의 일도 맡아보았다. 그는 소무역에 뛰어났다. 함계희는 비교적 부유한 농가였으며 모든 역할에 능통하였다. 특히 말뚝이역에 뛰어났고 꽹과리를 잘 쳤다.
산주노릇은 송규흠 이외에도 이관하의 활약이 있었다. 그는 이겸하보다 10세 연상의 친형으로 1930년대에 10년이나 산주노릇을 하였다. 해주농업학교를 졸업하고 측량기사, 사법서사 등을 한 그는 직접 춤을 추지는 않았으나 놀이꾼들을 위해서 헌신적인 뒷바라지를 맡아 주었다. 제주대학 대학원장을 역임하다가 몇 년 전에 작고한 이영춘 교수는 바로 이관하의 아들이었다.
이겸하와 비슷한 세대로는 오인관(1901∼1971)·최준봉(동년배)·최승원(2년 연하)·이시년(2년 연하)·김유붕(3년 연하) 등을 들 수 있다. 오인관은 고향에 있을 때 탈판을 따라다니며 춤을 배우기 시작한 사람이었는데 월남하여 강령탈춤의 재기운동에 잠시 참여하였다가 작고하였다. 최준봉은 부농가로서 어려서부터 춤을 익혀 모든 부분에 두루 유능하였다. 특히 말뚝이, 취발이, 미얄 등을 잘 하였다. 최승원은 앞 바다에 범선을 띄우고 고기를 잡는 어부였는데, 학교교육을 받은 바 없으나 문자를 잘 써 사람들의 주목을 이끌곤 하였다. 셋째 영감(재물대감)역을 특히 잘 하였다. 이시년은 농부로 특히 노승역이 일품이었다. 부채로 지팡이를 탁탁 두드리며 추는 춤은 멋이 깃들여 있었다. 김유붕은 탈을 잘 만들던 김의식(살았으면 100세 이상으로 한문 선생이었다)의 아들로서 작은 양반, 말뚝이 등을 하였다.
강령탈춤의 중흥자로 알려진 김금옥(살았으면 120여세 정도)은 해주 감영에서 관기노릇을 하다 감영의 폐쇄로 고향인 강령으로 돌아왔는데, 오행수(吳行首 : 행수는 우두머리라는 뜻)의 소실로 살았다. 한시·언문풍월·춤 등에 능통하였으나 탈춤을 추지는 않았다. 각종 예능에 능통했던 그녀는 강령의 놀이꾼들에게 하나의 자극제가 되기는 하였으나 직접 탈춤을 이끌어 간 바는 없다. 강령에는 여자 놀이꾼의 참여가 없었다 한다.
이상의 내용은 대체로 20세기 이후 강령 놀이꾼들의 모습이다. 농어민으로서 신명이 뛰어난 사람들이 주로 놀이패를 구성하였으며 마을의 유력자들이 산주나 후원자의 역할을 맡아 주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채록된 연희본을 검토해 보면 전통적인 놀이꾼의 신분이나 지식정도가 농민에만 국한되어 있었다고 보기 어려운 의문이 남는다. 예컨대 대사 가운데에는 사기(史記)·삼국지·진서(晋書)·공자·맹자·이백(李白)·소식(蘇軾)·구운몽(九雲夢),기타 한문귀나 문자 유희 등에서 차용된 것들이 많이 노출되는데, 이러한 언어의 구사력으로 미루어 조선조 말기에는 관청의 중인 계층들도 참여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해주 감영의 관찰사 앞에서 탈춤 경연을 벌여왔다니 응당 양반 계층의 취향에 걸맞은 문자 유희의 삽입이 필요하였을 것이고, 또한 관아 중인들의 개입이 자연 이루어지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강령탈춤을 순수한 농민들의 탈춤으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 해서가면극보존회
현재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 무형문화재 전수회관 안에는 해서가면극보존회가 자리잡고 있다. 해서가면극이라 하나 봉산탈춤, 은율탈춤 등은 각기 독립되어 있고 강령탈춤 관련자들만이 회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1970년 7월 중요무형문화재(제34호)로 지정되었는데, 예능보유자로는 박동신(1909∼ , 피리·해금)·지관용(1909∼1986, 피리)·김실자(1928∼ , 소무·장고)·김정순(1936∼ , 용산삼개집·꽹과리)이 있고, 김정숙(1939∼, 할미)이 최근에 준 보유자가 되었다. 이수자로는 이정석(1949∼ ,영감)·이재인(1952∼ ,말뚝이·취발이·징)·강대승(1952∼ ,둘째목중·말뚝이·무당·꽹과리)·송용태(1952∼ ,둘째양반·취발이)·양종승(1952∼,맏양반·도미유학중)·한상근(1953∼ ,맏양반·말뚝이·팔목중·북)·차선숙(1953∼,소무·상좌·도일유학중)·김영석(1955∼ ,목중2·노승)·이혜경(1958∼ ,용산삼개집·상좌·북)·정영미(1960∼ ,원숭이·소무)·김정규(1958∼ ,첫째목중·팔목중·사자)·윤준석(1961∼ ,마부·팔목중·북) 등이 있고, 전수자로는 조수동(1958∼ ,말뚝이·팔목중)·김영만(1959∼ ,사자1·팔목중)·이성호(1959∼ ,사자2·팔목중)·옥용준(1959∼ ,말뚝이·팔목중)·서정진(1960∼ ,원숭이·도령) 등이 있고, 일반 전수자로는 이종호(1957∼ ,말뚝이·팔목중)·김미숙(1959∼ ,상좌·노승상좌)·김영선(1960∼ ,말뚝이·해외유학중)·김영덕(1964∼ ,마부·징)·송인우(1964∼ ,사자2·남강노인)·양희석(1964∼ ,원숭이)·박원식(1964∼ )·임종국(1964∼ ,군입대중)등이 있다. 이밖에도 최종익(사자1)·김종선(대금)·송선원(피리) 등이 참여하고 있다.㬑㬔㬉
현전하는 강령탈춤의 복원에는 6·25이후 월남한 오인관·박동신·지관용·김지옥(1922∼1984)·양소운(1924∼ ) 등이 참여하였다. 유일하게 옛 놀이꾼이었던 오인관은 피난 후에 전라도 임실에서 살고 있었는데 강령탈춤이 복원되던 1970년에 상경하여 기억을 더듬으며 몇 가지 춤사위를 젊은층에 전수해 주었다. 그 해에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으나 이듬해에 작고하고 말았다. 김지옥 역시 강령 출신이었으나 고향에서는 아직 탈춤에 깊이 관여한 바 없어 초보적인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들 이외의 세 사람은 강령이 아닌 해주·연백(지관용) 사람들이다. 그들이 강령탈춤의 복원에 참여하게 된 것은 강령과 해주의 춤이나 음악에 유사성이 깊었고, 또한 월남한 강령의 옛 놀이꾼들이 희소하였기 때문이다.㬑㬕㬉
해주에는 본바닥 탈춤이 없었다고 한다. 감영에서 놀이패를 초치하여다 놀던 관습에 따라 동해주(東海州)에서는 봉산탈춤을, 서해주(西海州)에서는 강령탈춤을 불러다 놀게 되었는데, 그러한 관습이 얼마 동안 이어지자 해주의 본바닥 한량들이 그 춤을 익혀 탈춤을 추게 되었다 한다. 이상 두 고장의 탈춤에 비하면 겨우 대사나 춤을 흉내내는 정도의 아마추어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㬑㬖㬉
이상과 같은 임석재의 증언은 해주탈춤의 위치와 본질에 대하여 근본적인 의문을 갖게 해 준다. 그러나 1980년대 중엽에 해주에서 탈춤을 출 수 있는 놀이꾼이 몇 사람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최용락(노승역)·노병엽(말뚝이역)·백병규(여러 역에 능수)·오순옥(말뚝이역)·이시언(취발이역, 원래 강령인)·강오순(노승역)·이치우(맏양반역) 등이 그 실존적 인물들이다.㬑㬗㬉 이를테면 전기 박동신·지관용·양소운은 이러한 해주 놀이꾼들의 주변에서 기능을 익혀온 것으로 보인다. 박동신과 지관용은 피리가 전문인데 지관용의 기능은 월남 이후에 보다 원숙해진 것이다. 특히 양소운은 강령 흥미면이 시집이어서 일찍부터 강령탈춤과도 관련을 맺어 왔으며, 1970년대의 복원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 현재 그녀는 봉산탈춤의 예능보유자(소무역)로 활약하고 있는데, 일찍이 강령탈춤은 물론 은율탈춤의 복원에까지 깊이 관여한 사실을 감안하면 오늘날 새로이 복원된 황해도(해서) 탈춤의 혼합·혼미된 양상을 웅변해 주고 있다고 하겠다.㬑㬘㬉 그리고 나중에 예능보유자로 지정된 김실자는 신천, 김정순은 충남 서산, 준 보유자인 김정숙은 해주 출신으로서 모두 1969년 인천에서 양소운에게 사사받은 사람들임을 부기하여 두고자 한다. 이런 측면에서 종합하여 보면, 오늘날 강령탈춤의 춤사위나 진행방법은 대개가 70년대에 새로 만들어진 부분이 많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이후 금년 1월까지 17회의 정규 실기 강습회(연2회)를 마쳤으며 그 동안 탈춤을 배운 일반인들은 상당수에 이른다. 강습회에 참여하는 자격에는 아무런 제한이 없으며 3주 강습이 끝나면 수료증이 교부된다. 85년 10월에는 그 동안 예능을 익혀온 주부회원들이 두 번째로 발표공연을 가져 강령탈춤의 저변 확대가 빠르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강령탈춤의 이수자·전수자·일반전수자들은 각계각층의 직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경제생활 역시 차이가 심하다. 오늘날 각지의 무형문화재가 거의 세대교체를 겪고 있는 것은 일반적인 현상의 하나이거니와, 특히 강령의 경우는 애초부터 젊은층이 중심이 되었고 그들이 이수자 세대를 이루어 어느 단체보다도 젊음과 혈기에 넘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예능만으로는 생활이 불가능할 뿐 아니라 최소한의 생계비마저도 어렵다는 것이 현실적인 문제다. 그들이 다른 직업이나 직장을 찾아 뿔뿔이 흩어져 다니는 것은 이러한 까닭이다. 사태가 이렇게 되니 기왕에 추구되어야 할 개개인의 예능 향상이나 전체적인 연희의 조화가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고, 항시 지지부진한 상태로 이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오늘날 진정한 예능의 발전을 위한 범사회적인 대책의 마련은 시급한 과제로 대두되었다.
■ 탈의 제작과 기본춤
1969년 강령탈춤의 복원과정에서 처음으로 탈을 만든 사람은 오인관이다. 그는 옛 기억을 더듬고 제작법을 살려 탈을 만들어 내었다. 그가 만든 탈은 너무 커서 쓰고 춤을 추기에 불편할 정도였다.㬑㬙㬉 오인관이 타계한 후 1974년에 이수자인 김만회(작고, 살았으면 44세 정도)가 새로 탈을 만들어 한동안 사용하였다. 1976년 송석하의 저서《한국민속고(韓國民俗考)》에서 강령탈의 옛 사진을 확인하게 된 회원들은 사용 중인 것과 차이를 발견하고, 새로이 탈을 만들기로 하였다. 지금은 봉산탈춤의 회원이 된 김기수가 주동이 되고 한창송(서울예술전문학교 문창과 졸업), 송용태가 함께 모형틀을 만들어 내었다. 현재 사용하는 탈의 형태는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며, 그 동안 같은 모형을 놓고 탈을 만들어 온 회원은 주로 송용태와 김영석이었다.㬒㬐㬉
본래 송석하의 글 <해주강령의 假面演劇舞>는 동아일보(1939. 10. 13∼14)에 게재되었던 것을 전기 저서에 사진까지 그대로 재수록한 것이다.㬒㬑㬉 두 장의 사진이 소개되었는데 말뚝이의 대무(對舞)로 보이는 앞의 것은 「강령가면의 분장」(13일자)이라 하였고, 전체 탈을 진열한 뒤의 사진에는 「해주가면 전모」(14일자)라 해설을 붙여 놓았다. 해설대로라면 두 개의 사진은 각기 다른 지방의 탈이어야 하는데, 실제 탈의 형태는 같으므로 해주나 강령 어느 한 고장의 것임에 틀림없고, 당시 사람들이 강령을 흔히 해주 감영에 가깝다 하여 「해주강령」이라 불러왔던 관습으로 미루어 강령탈로 봄이 타당하리라 생각한다. 필자가 신문에 게재된 형태와 오늘날 사용중인 탈의 실제 형태를 비교해 본 바로는 여러 면에서 유사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렇게 새로이 만들어 현재 사용하고 있는 탈의 형태는 다음과 같다.
말뚝이(2개) : 패랭이, 붉은 얼굴빛에 눈이 불거져 나옴, 눈구멍 주위에 흰 칠을 하여 번쩍이는 느낌, 양 볼과 턱에 혹이 있고 혹은 오방색으로 되어 있음, 전체적으로 귀면(鬼面).
목중(2개) : 송낙, 붉은 얼굴빛에 이마에 큰 무늬가 있고, 양 볼과 턱에 혹이 있고 혹은 오방색으로 되어 있음. 눈구멍 주위에 흰칠무늬, 전체적으로 귀면(鬼面).
상좌(2개) : 고깔, 얼굴은 흰 바탕, 붉은 입술에 검은 눈썹, 전체적으로 사실면(寫實面).
취발이 : 희고 긴 머리카락, 이마에 주름무늬, 얼굴 전체 요철 심하고 양 볼과 턱에 혹, 혹은 오방색, 전체적으로 귀면(鬼面).
마부(2개) : 패랭이, 진주황빛 얼굴색, 오방색의 혹이 여러 개 있음. 붉은 입술에 검은 수염 무늬, 귀면과 사실면의 혼합형.
맏양반 : 개가죽 모자, 얼굴 흰 바탕, 눈썹과 수염은 토끼털, 붉은 입술에 이마에는 검은 줄무늬, 사실면.
둘째 양반 : 총관, 얼굴 흰 바탕, 눈썹과 수염은 토끼털, 붉은 입술에 언챙이, 사실면.
셋째양반(재물대감) : 용수관, 얼굴 흰 바탕, 눈썹과 수염은 토끼털, 붉은 입술, 사실면.
남강노인 : 긴 이마, 얼굴 흰 바탕, 붉은 입술, 사실면,
노승 : 송낙, 검은 얼굴빛, 얼굴에 희고 노란 반점, 양 볼에 혹, 붉은 입술, 귀면.
소무 : 벙거지, 얼굴 흰 바탕, 연지, 붉은 입술, 사실면.
영감 : 개가죽관, 얼굴 흰 바탕, 눈썹과 수염은 토끼털, 붉은 입술, 사실면.
미얄할미 : 흰머리테, 얼굴 진녹색 바탕, 희고 노란 반점, 양 볼에 혹, 귀면.
용산삼개집 : 검은머리테, 얼굴 흰 바탕, 연지, 사실면.
도령 : 복건, 얼굴 흰 바탕, 붉은 입술이 비뚤어졌음. 사실면.
원숭이 : 토끼털, 붉은 바탕, 수염, 오방색 점, 사실면.
사자 : 주황색 바탕, 양면에 혹이 있음, 반점이 많고 눈에는 방울이 달렸음.
이상의 가면 가운데서 사자를 제외하면 높이가 가장 높은 것은 13.2cm의 말뚝이탈이고, 가로가 제일 넓은 것은 말뚝이탈로서 21.5cm이며, 세로가 제일 긴 것은 남강노인으로 33.5cm이다. 개별적으로 볼 때 제일 큰 탈은 말뚝이탈(높이 13.2cm,가로 21.5cm, 세로 26.5cm)이고 제일 작은 것은 소무(8.5cm, 16cm, 24cm)탈이다. 그런데 1930년대의 사진에는 말뚝이탈의 모자에 색실로 꼬아 붙인 굵은 턱끈이 모두 달려 있으나(마치 동래의 말뚝이 같다) 현재의 탈에는 그런 턱끈이 없는 것이 대조적이다.
현재 탈의 제작방법은 다음과 같다. 먼저 탈의 진흙본을 만들어 말린 다음, 그 위에 석고를 부어 굳힌다. 굳은 다음에 진흙을 뜯어내면 음각의 모형틀이 생기게 된다. 그 모형틀 안에 비눗물을 칠하고 사고지(얇은 종이)를 바른 후, 그 위에 마분지를 8번 바르고 다시 피지(딱지)를 바른 후 말린다. 비눗물을 칠하는 것은 틀에 마분지가 붙지 않도록 하는 까닭이다. 마르면 종이 탈을 뽑아내어 사고지를 제거한다. 탈의 테두리를 곱게 자르고 각기 얼굴 모습대로 구멍을 뚫으며 그 위에 사고지를 깨끗이 발라 말린다. 마른 다음에 각기 형체에 어울리는 색칠을 한다. 색은 페인트에 카세인을 섞어 바른다.
강령탈춤의 기본춤 동작은 1983년 초에 정립되었다. 그 이전에도 산발적으로 춤사위의 정립이 이루어져 왔으나 80년대에 와서 이수자와 전수자들 사이에서 완성을 보게 되었다. 기본 춤은 17종류로서 겹사위·앉아여닫이·엇사위·업메기·고개잡이·인사사위·겨누기·앉아 뛰기·돌아낮아뛰기·쪼그려뛰기·돌며양사위·한삼걷기·코차기·엎발찧기·외사위·돌며 외사위·까치걸음 등이며, 이러한 기본춤이 장면마다에서 복합·혼합적으로 활용되면서 극적인 행위가 표현된다.
송석하는 봉산탈춤과 비교하여 강령탈춤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 있다.
첫째 제일 큰 요소인 가면에 있어 크게 다른 것은 양자를 다 본 사람이면 짐작할 것이다. 그것은 봉산은 색채적으로 대단히 강렬한 시감을 주는데 대하여 해주강령 것은 온화한 감을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자는 動적이고 후자는 靜적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따라서 용모도 전자는 괴위(魁偉)하고 후자는 아담(雅淡)하다. (물론 아담하다고 하여도 가면 자체가 가진 그로테스크한 점은 있지마는) 또 가면의 제작상의 표현에서 전자도 그러려니와 후자에는 특히 다른 것이 많다. (일례로 눈썹 같은 것과 눈잔등이 같은 것)
둘째는 무용 즉 춤모습이 상이한 것이다. 봉산춤은 소위 <뒷길깩기춤>이라 하여 활발하고 라프한 점이 있는데 후자는 비교적 스무스한 점이 특색이다. 그러므로 각각 일장일단이 있으려니와 전자는 현대적 호흡에 적응하고 후자는 시대의 호흡이 맞지 않는 점도 있으나 그는 그대로 좋고 이는 이대로 좋다고 할 수 있다.
셋째는 연기의 표현방법의 상이라고 하겠는데 이는 처처(處處)에 조금씩 틀리므로 일일이 예를 들어 말하기는 어려우나 세밀히 주의하면 쉽게 구별할 수 있는 것이다. 넷째는 扮裝이 상이 되는 것이며 그 외에는 소도구 같은 것도 피차의 유무가 있는 것이다.
(중략)
해주, 강령 것이 모두 야외극임에 불구하고 너무 스케일이 적고 연기자간의 콤비네이션이 적은 것, 그러므로 도리어 무대에 올리면 좀더 낫겠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결국 각 개인이 제 재주만 자랑하려는 功利心에서 나온 것이다. 결과는 반대현상을 나타낸다. 또 하나는 악공과 연기자의 호흡이 맞지 않는 것이고 제일 큰 것은 가면의 각도적 표정을 이용치 못하는 것 등이다. 가면은 投光의 각도에 따라 표정이 다른 것이다. 그러나 데리케이트한 연기는 봉산으로서는 일주(一籌)를 사양하여야 될 것이다.㬒㬒㬉
요컨대 강령탈의 특징은 색채가 온화하고 정적인 느낌을 주며 용모가 아담하다는 것이다. 춤은 봉산이 활발하고 거친(rough)데 비하여 강령은 비교적 부드럽고(smooth) 섬세한(delicate)면을 드러내며, 놀이꾼 상호간의 조화와 놀이꾼과 악사(음악)의 조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는 미숙함도 있다는 지적이다. 이상과 같은 송석하의 몇 마디 언급만으로 강령탈춤의 전모들 쉽사리 단정할 수는 없으나, 앞서 피력해 둔 대로 1930년대에 조화된 세련미를 되찾지 못하였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해 준다.
세대 교체가 이루어진 오늘의 강령탈춤에서 비록 활기는 넘치고 있으나 탈춤이 지녔던 신명스런 멋과 연극적인 동작의 다양한 표현이 점차 사라져가고 있음은 일말의 쓸쓸함을 안겨 준다. 문화재로 지정된 이후 함부로 고칠 수 없다는 제약이 어쩌면 더욱 고정화된 동작만으로 굳어지고 있는 느낌을 준다. 옛 가락을 상실해 가는 악사들의 반주도 춤의 생명력을 움츠러들게 하는 하나의 요인이 된다고 하겠다.
■ 놀이본의 채록
강령탈출의 놀이본은 최초로 임석재에 의해 채록되었다. 1943년 6월 강령 출신인 김응규(당시 양정중학교 학생, 현재 김포약주 경영)의 제보에 의해 12월 27, 28일 강령리를 찾아 그곳의 강령여관(당시 이재봉 경영)에서 최준봉·최승원의 구술에 따라 채록되었다.
임석재가 밝힌 채록 경위는 다음과 같다.
그때는 年末警戒가 실시되어 있었고 일본이 전쟁에 광분하고 있어서 지방 倭警은 外來者를 감시하고 모종의 피의자시(被疑者視)할 만큼 엄중 경계하던 때라 장기체재가 불가능하여 대사 채록이 끝나자, 재검할 여유도 없이 홀홀히 그곳을 떠나 귀가하였다. 귀가 후 채록된 것을 통람(通覽)하여 본즉 표현 언구가 부적할 뿐만 아니라 소루(疎漏)와 미비(未備)가 많이 눈에 뜨이고 모호한 점도 많았다. 그리고 탈춤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여러 가지 부대사항은 전혀 손을 대지 못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㬒㬓㬉
이렇게 하여 채록된 임석재본은 1957년 5월 현대문학지에 발표되었다. 그러나 오자·오식·누락 등이 많이 나타나 그대로 놀이본으로서 사용이 어렵게 되었다. 그후 1972년 3월 서낭당(제2집)지에 채록자의 후기와 함께 다시 발표되었다. 현재 임석재본은 강령탈춤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런데 이보다 앞선 1943년 8월에 강령의 놀이꾼 함계희의 구술에 의해 채록되었다는 최상수본이 있다.㬒㬔㬉 이 놀이본에 대하여는「본인의 것을 표절한 것임을 충분히 보여 주고 있다」는 임석재의 반론이 제기되기도 하였다.㬒㬕㬉
1970년 7월 강령탈춤이 문화재로 지정될 때에는 이두현과 김기수가 채록을 맡았다. 오인관·양소운이 구술자로 되어 있는데, 이 채록본은 후에 연극평론(3호, 1970, 12)지에도 게재되었다.
1979년 6월 이재인본(타자본)이 발표되었다. 이수자의 한 사람인 그는 임석재·이두현 본을 토대로 하고 박동신·지관용·김지옥 등의 증언을 참조하여 놀이본을 다시 정리하였으며 전수생들의 교재로도 사용하여 왔다.
1983년 1월 양종승·김영석본(인쇄본)이 발표되었다. 이보다 앞선 1981년 6월 강령태생의 김응규·송순희·김유행·조규행·조순환·노준팔 등으로부터 옛놀이의 진행에 대하여 참고가 되는 자료를 청취할 수 있었는데, 그것을 토대로 종래의 놀이본을 새롭게 보완해 놓은 것이다. 그러나 보완부분에 대한 명확한 사실성 여부에 대하여는 아직 의문의 여지가 남아 있음을 밝혀 두고자 한다.
애초에 임석재는 놀이과장은 10과장으로 분리 채록하였다. 즉 사자춤·원숭이춤·말뚝이춤·목중춤·상좌춤·양반춤·목중춤·양반, 할미춤·취발이춤 등이 그것이다. 이두현은 전기 임옹의 놀이본을 8과장으로 정리하였다.
제1과장, 사자춤·원숭이춤(임석재본의 1, 2과장)
제2과장, 말뚝이춤
제3과장, 목중춤(임석재본의 4, 5과장)
제4과장, 상좌춤
제5과장, 양반춤
제6과장, 목중춤(임석재본의 8과장)
제7과장, 영감, 할미춤(임석재본의 9과장)
제8과장, 노승춤
제1경 8목중춤(임석재본의 10과장)
제2경 취발이춤(임석재본의 10과장)
이상과 같은 전개방식은 현재에도 대체 그대로 지켜지고 있으며 그때 그때마다 부분적인 차이점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양종승 김영석의 정리본에서 사자는 두 마리로 증가되었다. 처음에는 서로 마주 보면서 춤을 추다가 나중에는 한 마리가 입사자를 만들기도 한다. 종래에는 셋째양반(재물대감)이 하던 <장타령>도 도령이 연기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특히 영감·할미과장에서 할미가 영감과 용산삼개집의 괄시로 인하여 왕탕다리에서 빠져 죽게 되고 그 유서를 들고 남강노인이 나타나는 장면, 그리고 할미를 위해 무당이 나와서 진오귀굿을 하는 장면은 일단 새로운 것이어서 주목된다. 이상과 같은 새로운 부분들은 1982년 11월의 정기공연에서부터 재현되기 시작하였다.
한 마리의 사자가 두 마리로 증가된 것은 그런 대로 수긍이 간다. 전기 임석재본에는 마부가 둘이 등장하고 있는데, 그들의 존재로 미루어 보아 사자도 두 마리였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셋째양반이 하던 <장타령>이 도령의 역할로 변화된 것은 큰 무리가 될 수 없다. 넓게 보면 그 장면은 모두가 양반들이 스스로의 무능과 무식을 폭로하는 행위이므로 도령이 장타령을 읊고, 셋째양반이 <만수바지>를 하는 것이 오히려 효과적이라 하겠다.
1941년에 보고된 한 자료에는 ① 말뚝(2인)의 대무(對舞) ② 승무용(僧舞踊 : 1인) ③ 상자승(上子僧 : 2인)의 대무 ④ 양반(3인)과 하복(下僕 : 2인)의 대담(對談) ⑤ 승무용(1인) ⑥ 老人夫 처(妻)와 첩(妾)의 가정(家庭) ⑦ 승무용(1인) ⑧ 노승(1인)과 미인(1인) ⑨ 부랑자(취발승)와 미인(3인)의 삼각관계 ⑩ 남극노인(南極老人)의 가무 등으로 과장이 구분되어 있는데㬒㬖㬉, 임석재본에 비교하면 남강노인이 남극노인으로 표기되어 있는 점이 다르며, 극중 역할은 노래와 춤을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전기 양종승본에서처럼 남강노인이 고작 할미의 「유서」만을 전달하기 위해서 등장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1930년대 말기에 이미 그의 극중 역할은 소멸되어 있었던 것이 분명하나 일반적으로 남극노인은 ① 남극성(南極星)의 화신(나타나면 태평하고 나타나지 아니하면 전란이 있다고 한다)이나 ② 남극노인성(南極老人星 : 남극 가까이에 있어 수명을 맡아보는 별)을 상징해 왔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㬒㬗㬉, 남강은 남극의 오기일 가능성이 크며, 전성기의 강령탈춤에서는 남극노인에게도 당당한 극적 역할이 있었음을 추론해 볼 수 있다.
한편 무당의 진오귀굿 장면은 다른 지방의 탈춤에서도 볼 수 있으므로, 실체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으나, 문제는 과연 강령에서는 나름대로 어떠한 특색을 구비한 채 연희되었느냐 하는 의문이다. 현재의 놀이본에 수록된 부분에서는 그러한 지방적 특색을 찾아볼 수 없을 뿐 아니라, 연기의 방법도 다른 지방의 것을 대체로 모방해 버린 느낌이 짙게 노출되고 있어 신빙성이 별로 없다고 하겠다.
註---------------------------------------------------------------------------
1) 이행(李荇)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 권43, 강령현조(康翎縣條) 참조, 《국역신증동국여지승람 Ⅴ》, 민족문화추진회, 1971, 2, 461∼463면 참조.
2) 전(前)부민면장 이겸하씨와 필자의 면담, 이씨는 강령보통학교 1회 졸업생이기도 하다.
3) 이행, 앞의 책, 463면 참조.
4) 황해도지 편찬위원회, 황해도지(黃海道誌), 주식회사 시사(時事), 1982, 1. 816면 참조.
이겸하씨와 필자의 면담, 1986, 4. 12, 참조.
5) 임석재 선생과 필자의 면담, 1986. 3. 31, 참조.
6) 이겸하씨와 필자의 면담, 1986. 4. 12, 참조.
7) 서연호, 강령탈춤, 월간문예진흥, 1979. 7. 53면 참조.
이겸하씨와 필자의 면담, 1986. 4. 12, 참조.
8) 이겸하씨와 필자의 면담, 1986. 4. 12, 참조.
서연호, 같은 글, 54면 참조
9) 이겸하씨와 필자의 면담, 1986. 4. 12, 참조.
서연호, 앞의 글, 54면 참조
10) 송석하, 해주강령의 가면연극무, 동아일보, 1939. 10. 13∼14
11) 이겸하씨와 필자의 면담, 1986. 4. 12, 참조.
12) 같은 면담 참조.
송순희씨와 필자의 면담, 1986. 4. 15, 참조.
13) 임석재 선생과 필자의 면담, 1986. 3. 31, 참조.
이겸하씨와 필자의 면담, 1986. 4. 12, 참조.
14) 중요무형문화재 발표공연(강령탈춤 편), 서울놀이마당 팜플렛, 1985. 5. 11∼16 참조.
강령탈춤 정기발표 공연, 무형문화재전수회관 팜플렛, 1985. 11. 2 참조.
15) 서연호, 앞의 글, 54∼56면 참조.
16) 임석재 선생과 필자의 면담, 1986. 1. 20과 3. 31, 참조
17) 서연호, 앞의 글, 55면 참조.
18) 앞의 글, 55면 참조.
서연호, 은율탈춤, 월간문예진흥, 1979. 3. 44면 참조.
19) 예능보유자 이재인과 필자의 면담, 1986. 4. 26, 참조.
20) 예능보유자 송용태와 필자의 면담, 1986. 4. 26, 참조.
21) 송석하, 한국민속고(韓國民俗考), 일보사, 1960. 201∼208면 참조.
22) 송석하, 앞의 글, 1939. 10. 14
23) 임석재, 강령탈춤 臺詞 후기, 서낭당(제2집) 1972. 3, 153면.
24) 최상수, 해서가면극의 연구, 정동출판사, 1983. 4. 121∼150면 참조.
25) 임석재, 앞의 글, 154∼156면 참조.
26) 조선의 향토오락(甕津지방), 조선총독부, 1941. 3. 228면 참조.
27) 한한대사전(漢韓大辭典), 동아출판사, 1963. 236면 참조, 中文大辭典(=)중화학술원, 1976, 268면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