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후반을 바라보면서
이일 / 화가·홍익대교수
1.
85년과 함께 우리는 벌써 8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었다. 정치·경제·사회면에서 요즘 한참 21세기를 내다보는 화려한 청사진이 우리에게 제시되고 있는 이때, 우리의 예술계는 적어도 80년대 후반기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 하기는 단순히 연대를 기준으로 해서 그 어떤 극적인 새로운 전환을 기대한다는 것은 한낱 기대감에 찬 타성적 습성에서 오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는 한 해를 보내면서 또한 연대를 넘기면서 그것을 하나의 「계기」로 삼기를 바라고 또 그것을 앞을 바라보고 또는 과거를 회고하는 하나의 시점으로 설정하려고 하며 이는 굳이 불합리한 사고방식이라고 만은 생각되지 않는다. 어느 시점에서 이건 어떠한 문제를 결산해야 할 시기가 있고 또 어떤 전망을 다듬어 보아야 하는 시기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날 과연 어떠한 시점에 놓여 있는가 ? 우리에게는 단순히 회고에 그치지 않고 결산해야하고 정리해야 할 과거, 다시 말하면 70년대와 80년대 전반기에 걸쳐서의「부채」가 분명히 있다. 그 빛을 결산하고 정리해야 할 시점에 바로 우리는 놓여 있는 것으로 보이며 거기에서 우리는 적어도 앞으로 남은 5년 단위의 전망을 세울 수가 있을 것이다.
우리 나라의 현대미술의 전개 과정에서 70년대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확실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10년이라 생각된다. 일차적으로 이 시기는 우리의 현대미술이 바로 「우리의 현대미술」로서 자각되고 의식화된 시기이다. 그리고 이 의식화된 우리의 현대미술 정립을 위한 새로운 방법론의 추구라는 과제가 전면에 내세워진 시기이기도 하다. 이 과제의 추구는 필연적인 추세로서 국제적인 미술 움직임과 연관성을 지니고 전개되었고 동시에 그 속에서 우리의 미술 자체의 정신적 기조의 재 발굴이라는 과제를 또한 안고 있었다. 70년대에 출현한 일련의 오브제 작품 그리고 70년대 후반기에 나타난 일련의 넓은 의미의 미니멀적 경향의 미술(이 경향은 미국에 있어서의 이른바 「미니멀리즘」과는 구별되어야한다)은 다같이 바로 이와 같은 맥락에서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들 일련의 탐구는 일부에서 주장하듯 결코 국제적 추세의 단순한 수용이 아닐 뿐더러 그와 동질의 것도 결코 아니며 또한 한 때 흔히 입에 오르내리던 이른바 「국제 양식」이라는 어휘로 묶여질 성질의 것도 아니다. 국제양식이라는 개념은 국제 양식과 「민족양식 」이라는 개념 적인 이분법과 함께 오늘의 미술에서는 성립되지 않는다.
만일 이 자리에서 우리가 경계해야할 문제점이 있다면 그것은 오히려 국제 미술의 맥락과의 의도적이고 소극적인 자기소외이며 또 한편으로는 우리의 오늘의 미술이 그 어떤 특정 경향에 있어서의 발상과 방법론의 획일성에 있다. 이 위험성은 우리나라미술에 있어 어느 시기에건 도사리고 있는 함정이기도 하거니와 그것이 곧 편협한 획일주의와 매너리즘 화한 아카데미즘의 온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70년대에 있어서도 그와 같은 현상은 예외가 아니었다.
2.
80년대에 들어서면서 우리 나라 미술계에도 서서히 새로운 태동의 징후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른바 새로운 형상의 움직임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 움직임은 분명히 서구에 있어서의 일련의 새로운 경향과, 의식화된 것이든 아니든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다. 프랑스의 「자유 형상」 (Figuration libre), 독일의 「신표현주의」 (Neue-Ekpressionisumus), 이탈리아의「트란스 아방가르드」 (Trans-Avant-Garde)라는 맥이다. 이들은 통 털어 흔히 「뉴 페인팅」 (New-Painting)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지고 있고 그 출현의 시기는 대체로 75년경으로 잡고 있다.
그 용어야 어찌했든 우리 나라의 80년대의 막을 열게 한 일련의 구상적 움직임은 부인할 수 없는 하나의 집단적인 현상으로 등장했다. 그리고 그것은 미술사적인 문맥으로 볼 때, 70년대 후반기의 지극히 관념적이며 또 타성화된 미술 경향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경우 그것은 자칫 추상 대 구상이라는 도식적인 대립관계의 이분법으로 풀이되는 경우가 많은 듯이 보인다. 다시 말해서 이 새로운 경향 내지는 움직임이 과거의 구상 대 추상의 변증법적 지양이라는 차원에서가 아니라 추상의 전적인 거부를 전제로 함으로써 자신의 존재이유를 정당화시키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한 까닭에 일부에서는「신구상」이라는 호칭에 집착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며 이 집착은 결국은 흑백 논리적인 단순 사고에서 결과된 것에 불과하다.
미술의 움직임의 전개란 결코 단선적이거나 일원적인 것이 아니며 하나의 「제기(提)」와 이에 대한「반(反)제기」의 단순한 반복적 과정을 밟는 것이 아니다. 이 두 명제는 다같이 자기부정으로서 스스로를 지양하는 복잡한 역학관계를 그 속에 지니고 있으며 우리가 그 동안 보아 온 현대미술의 상황이 바로 이를 반증한다.
「안티(反)」라고 하는 명제는 확실히 현대미술의 가장 근본적인 라이트모티브의 하나이다. 또 실제로 80년대에 접어들면서 일어난 우리 나라의 일련의 형상적인 회화는 일체의 형상과 표현성을 거부한 선행의 미술 형태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났다. 또 거기에는 역시 그 동안 거부되어 왔던 인간적·사회적 요인이 작용하고 있음도 분명하거니와 요컨대 새로운 경향의 미술은 그 거부되었던 것의 「복권」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따라서 「안티」는 그 어떤 특정 미술형태에 대한 반작용이면서 동시에 과거의 유산의 긍정적인 확인을 전제로 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유럽이나 미국에서 거의 동시적으로 일어난 뉴 페인팅의 물결이 새로운 물결이면서 동시에 예컨대 잭슨 폴록 또는 독일 표현주의의 일련의 화가들과 연계 관계에 있음을 우리는 수긍할 수 있는 것이다.
80년대에 접어들면서, 싹트기 시작하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 나라 미술계의 일각에서 서서히 집단적인 경향으로 확산되어 온 「새로운 형상」의 미술은 하나의 움직임으로서 보다 복합된 문제를 제기해야 하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형상」또는 이미지 그 자체의 문제, 회화에 있어서의 전달과 시각적 메시지의 문제, 회화의 의미 작용과 그 한계의 문제 등등‥‥. 이와 같은 회화 자체의 미학적 이념 설정의 문제를 제쳐놓고 우리의 미술계 일각에서는 모든 미술실천을 이른바 「민중미술」이라고 하는 막연하고 또 새삼스러운 구호 아래 강령 화시키려는 추세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민중미술이라는 것이 설사 어떤 형태로든지 존재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강령, 하나의 「지향」 또는 「의도」에 그치는 것이며 결코 그 어떤 미술 형태를 규정짓는 미학적 이념일 수는 없다.
바네트 뉴만은 의연하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우리는 이제 기억의 쇠고랑으로부터 해방되고 있다.』 뉴만이 말하는 그 「기억」이란 두말 할 나위도 없이 서양미술사의 그것, 좀더 좁게는 서구의 근대주의적 미술사의 그것이다. 그는 그 속박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을 예견하고 또 그의 회화를 통해 그것을 실현했다. 문제는 과거의 중압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떨쳐버려야 할 그「기억」이 불행인지 다행인지 없다. 우리는 미술사적 맥락에서 있는 그 상태대로 자유로운 상황에 놓여 있으며 말하자면 현대미술 속에서의 일종의 프리미티비즘을 살고 있는 것이다.
현대미술에 있어서의 프리미티비즘. 이 얼마나 매혹에 찬 미지의 영토를 우리에게 제시해 주는 말인가. 너무 비약적인 논법이 될지는 모르나 70년대의 우리의 환원적 미니멀 경향의 미술 그리고 일련의 오브제 작품이 비록 그 방법론에 있어 어떤 제약을 받았을망정 바로 이 원초에로의 회귀를 꿈꾼 것이 아니었는지‥‥. 뉴 페인팅만 하더라도 그것이 어떠한 형태의 것이든 그 근원에는 「자유 즉 프리미티비즘」에의 의지가 깔려 있음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의 하나의 운동으로서의 미니멀적 경향의 미술(뒤늦게 나마 여기에서 밝혀 두거니와 이 미니멀적이라는 용어는 다른 마땅한 말이 없어 편의상 쓰고 있는데 불과하다)은 오늘의 시점에서 그 사명을 다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다고 이 사실이 비록 새로운 전환의 계기가 될 망정 그 어떤 종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바꾸어 말해서 비록 운동은 사라졌으되 작가는 살아 남는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들에 의해 그 경향은 한층 더 심화되어갈 것이다.
전환은 분명히 획 해지고 있다. 그리고 이와 함께 제기되는 가장 중요한 문제가 바로 그 전환의 계기를 분명하고 정확하게 확인한다는 일이다. 그것은 곧 전환의 당위성의 확인이다. 그리하여 또 그럼으로써 그 전환은 앞으로의 보다 다양한 전개의 길을 열어주며 다기화(多岐化)되고 다층 적인 미술 형태의 출현을 우리에게 약속해 줄 것으로 전망해 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