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1/한일문화교류의 역사와 전망·복식사편

고대 한국복식(服飾)이 일본복식(服飾)에 끼친 영향




神谷榮子 / 동경 국립문화재연구소 주임연구관

김영숙(金英淑) / 동양복식연구원원장

1. 머리말

한국과 일본측 고대 역사에 있어서 많은 영향관계가 수수(受授)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복식문화도 그 중의 하나라고 생각된다. 특히 복식의 영향관계는 상류지향의 속성이 강하기 때문에 문화의 선진(先進)을 무시할 수 없다. 한국과 일본은 지리적인 여건과 사회적 환경의 동일 요인으로 인하여 문화의 유사성을 발견할 수도 있다. 한국의 고대복식은 기마 민족인 북방계 복식이었다. 북방유목민의 문화는 남동진하여 일본에까지 전파되었으며 승문시대(繩文時代)에 이미 한국의 보석공예가 일본에 전파되고, 미생시대(彌生時代)에는 청동기(靑銅器)를 포함한 농경문화가 전파되었다. 고분(古墳)시대에는 문화의 전파가 본격화되어 한일 동일의 양상을 나타내기도 한다.

특히 4세기에서 6세기에 이르는 약 200년간은 한반도의 삼국문화가 일본 고대문화 형성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던 획기적인 시대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신라의 통일 이전까지 40회에 달하는 일본과의 관계 기사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중 30회가 침범기사이고 나머지 10회가 교빙(交聘) 등 평화적 우호관계의 기사이다. 고구려와의 관계기사는 나타나지 않으며 백제의 경우는 6회의 교빙 관계 기사이다. 1)

5세기에는 백제의 봉공녀(縫工女)가 일본에 건너가 봉재기술과 직조기술을 전파하고 방적기술을 가지고 일본에 정착한 봉씨가 신라계통이므로 신라에서도 직조기술이 전개되었다고 생각된다. 2)

이러한 고대사(古代吏)의 영향관계 속에서 본고(本考)는 복식의 형태와 특성에 관한 영향관계를 살펴보려 한다. 이에 대해서도 이미 많은 선행 연구가 있어 이것이 정설로 굳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3) 본고(本考)에서는 고구려 시대의 고분벽화에 나타난 복식에 중점을 두어 우리 나라 복식의 기본형을 살펴보고, 이것이 일본 복식에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를 살피는데 목적이 있다. 일본의 고대 복식자료로는 식륜(埴輪)을 들 수 있는데 이는 무덤의 주위에 세워 놓았던 것으로, 신라의 토우(土偶)와 같이 인물 등 여러 형태를 조각했는데 크기가 대부분 1m가 넘는다.

그리고 정창원(正倉院)에 보존되어 있는 복식류와 1972년에 발굴된 고송총(古松塚)의 벽화 등이 고대복식을 살펴보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 이와 같은 한일 복식자료를 중심으로 한·일 고대복식의 구체적인 동일양상을 추출하여 고대 한국복식이 일본복식에 끼친 영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2. 고분벽화에 나타난 한국복식의 기본형

고구려·백제 신라는 대체적으로 유사한 형태의 복식을 착용하였다. <구당서(舊唐書)>에 '기풍속형법의복 여고여백제약동(其風俗形法衣服 與高麗百濟略同)' 4)이라 하였으며 <북사(北史)>에도 '풍속형정의복 약여고려백제동(風俗形政衣服 與高麗百濟略同)'이라 하여 고구려·백제·신라의 의복이 대체적으로 동일함을 말하고 있다. 이들의 의복은 다같이 상의와 하의로 구분되며 상의로는 유(淒)를 하의로는 고(袴), 상(裳)(군(裙))을 착용하여 유고제(淒袴制), 유상제(淒裳制)의 복식이 오늘날까지 바지저고리, 치마저고리의 형태로 남아 전형적인 한국 의복 형성의 기원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기본 복식 외에 중국의 영향을 받아 유고(淒袴)와 유상(淒裳) 겉에 입는 표의(表衣), 곧 포(袍)를 남녀 모두 입게되는데 이러한 형태의 기본 복장을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우선 벽화에 나타난 기본 복식의 유형을 살펴보도록 한다.

장유(長淒)

상의로는 유(淒)가 있었다. 유는 대체로 길어 허리 아래까지 내려왔으며 착수(窄袖)형이 많고 직영(直領)이다. 허리에 대(帶)를 매어 여몄으며 선이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단의(短衣)라고 하는 말이 나오고 신당서(新唐書)에는 '남자갈고부장유(男子褐袴婦長孺)' 5)라 하였고 (북사(北史))에는 '부인불가분대여변발수후 사출가칙분위양도반어두상(巳出嫁則分爲兩道盤於頭上) 의사포이유미대(衣似袍而柚微大)' 6)라 하였다. 여기서 단의(短衣)나 장유(長淒), 포(袍)와 비슷하고 소매가 약간 크다고 한 내용들은 같은 형태의 의복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유(淒)를 착용하고 있는 인물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무용총(舞踊塚) 수렵도의 기마 인물상(騎馬人物像), 영빈도(迎賓圖)에 보이는 주인, 시종자 등이 유(淒)를 착용하고 있으며 각저총(角抵塚) 전별도(餞別圖)의 주인·부인, 각저도(角抵圖)의 노인 등이 역시 유(淒)를 착용하고 있다. 감신총(龕神塚)의 장검남자인물도(長劒男子人物圖)에 보이는 인물이 사격자문(斜格子文) 장유(長淒)를 착용하고 있으며 개마총(鎧馬塚)의 쌍각관귀인상(雙角冠貴人像)도 장유(長淒)를 착용하고 있다. 이들이 착용하고 있는 유(淒)의 특징을 보면 여밈은 좌임과 우임이 혼용되고 있으며 7) 가선을 장식하고 있다. 포지(布地)의 색은 갈색·회색·황색·자색·백색 등으로 나타나며 포지의 문양은 홍점문(洪點紋), 흑점문(黑點紋), 사격자문(斜格子紋)(감신총 장검 남자인물상(龕神塚 長劍 男子人物像)), 흑권문(黑圈紋)(개마총입식관귀인상(鎧馬塚立飾冠貴人像)) 등이 나타나는데 무문(無紋)이 다수이다. 이렇게 고대복식의 기본형이었던 유(淒)는 벽화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남녀·귀천·노소에 구분을 두지 않고 같이 착용했던 것 같으며 후대에 와서 몽고복식의 영향으로 기장이 짧아지고 대를 매는 것 대신에 고름을 달기 시작하였으며 직배내가 곡선으로 변천되어 현재 한복 저고리의 형태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고(袴)

고(袴)는 오늘날의 바지와 같은 형태의 옷이다. 중국문헌에 보이는 '궁고(窮袴), 태구고(太口袴), 대구고(大口袴), 갈고(褐袴)' 등이 여기에 속하는 것이다. 이처럼 문헌에 보이는 고(袴)의 명칭에 차이가 있듯이 고구려 고분 벽화에도 그 형태적인 차이가 있다. 즉 폭의 넓고 좁음, 길고 짧음이 그것이다.

무용총(舞踊塚)의 경우 수렵도의 기마 인물상이나 무용도의 무용행렬 선두에 서 있는 사람, 영빈도(迎賓圖)에 보이는 칼을 들고 움직이는 어린 소년 등이 착용하고 있는 바지는 통이 좁은 세고(細袴)의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감신총(龕神塚)의 서벽 벽화의 남자인물상, 각저총(角抵塚)의 전별도의 주인과 시종자, 개마총(鎧馬塚)에 보이는 마부, 안악(安岳) 3호 고분 동수묘의 행렬도에 보이는 군졸 등이 같은 형식의 세고(細袴)를 착용하고 있다.

한편 벽화에는 통이 넓은 광고(廣袴)의 모습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삼실총(三室塚) 제1실 남벽의 귀인 남자, 대안리 제1호 고분 전실의 남자인물상, 수산리 고분 벽화의 남자소년, 쌍영총(雙楹塚)의 주실 동벽에 그려져 있는 인물 행렬도의 남자 3인, 쌍영총의 선도(羨道) 서벽의 남자 기마상 등에서 볼 수 있다.

또 삼실총(三室塚) 제3실 동벽의 장사도(壯士圖)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길이가 짧은 단고(短袴)를 착용한 모습도 볼 수 있다. 또 통구(通溝) 제17호 고분 요도 동벽 역사도(力士圖), 사신총(四神瘣) 선도 동벽(羨道 東壁)의 역사도(力士圖), 각저총(角抵塚) 주실(主室) 동벽의 씨름 장사도에서도 단고(短袴)를 찾을 수 있다. 이와 같이 고(袴)의 형태는 세 가지로 나타나는데 통이 좁은 바지의 경우는 (남제서(南齊書))에 '고려속(高麗俗) 복궁고(服窮袴) 관절풍일양(冠折風一梁) 위지책(謂之瓔)' 8) 이라고 한 궁고(窮袴)가 이에 해당하는 것일 것이다. 통이 넓은 바지의 경우는<北史>에 '인개두착절풍형여변(人皆頭着折風形如弁) 사인가삽이조우(士人加揷二鳥羽) 귀자기관왈소골자라위지(貴者其冠曰蘇骨多用紫羅爲之) 절이금은복대수진(節以金銀服大袖衫) 대구고(大口考) 소피대황혁리(素皮帶黃革履) 부인(婦人) 군유가선 9) 라 하여 대구고의 명칭이 보이는데 형태적인 면에서 이와 동류의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착용신분에 있어서는 세고(細袴)의 경우 남녀·노소·귀천의 구별 없이 유(淒)와 함께 착용하고 있으며 광고(廣袴)의 경우는 대체로 귀족층에서 착용하고 있다. 그리고 광고의 착용 예에는 사신총(四神塚), 쌍영총(雙楹塚), 개마총(鎧馬塚) 등 평양 부근의 고분에서 많이 찾을 수 있다. 이로 인하여 본래는 장유세고(長淒細袴)의 북방계 형태가 점차 중국의 영향으로 광수대구(廣袖大口)의 형태로 변모해 가는 것으로 추정할 구 있다.

이러한 바지(袴)의 색깔을 살펴보면 갈색·회색·등황색·백색 등이 나타나며 문양은 무용총(舞踊塚)의 무용도의 무용인(舞踊人) 복식이 흑점문(黑點紋), 홍점문(紅點紋)이 있는 세고(細袴)이며 기마귀인(騎馬貴人)이 착용한 고(袴)에 흑점문이 있으며, 영빈도(迎賓圖)의 시종소년의 고(袴)에도 흑점문이 있다. 각저총(角抵塚) 전별도(餞別圖)의 주인이 착용하고 있는 고(袴)가 흑점문 세고(細袴)이며 각저도의 노인상은 종선문세고(從線紋細袴)이다. 이와 같이 고(袴)의 문양과 포지(布地)의 색깔도 유와 같은 양상으로 나타나며 문양도 흑점문·홍점문, 종선문 등이 있고 무문(無紋)이 나타나기도 한다.

상(裳)

상(裳)은 여인들이 착용한 하의이다. 이를 군(裙)이라고도 하였는데 이여성(李如星)은 상(裳)은 군(裙)의 원형이고, 상(裳)에 군폭(裙幅)을 더해서 좀더 미화시킨 것이 군(裙)이라 하였다. 10) <北史>에 '부인유군가선' 11)이라 하였고 <구당서(舊唐書)>에는 무인복식(無人服飾)중 '황군(黃裙) 12) 이 기록되어 있어 군(裙)의 착용 예를 볼 수 있다.

고구려 고분의 벽화에서도 군(裙)의 형태를 찾을 수 있는데 통구 지방 고분의 벽화에서는 유고여인상(孺袴女人像)이 꽤 보이는 반면 평양 지방의 고분벽화에서는 유상제(淒裳制)여인의 모습이 많이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쌍영총의 선도 동벽(羨道 東壁)에 귀부인 셋이 상(裳)을 착용하고 있다. 이들이 착용하고 있는 상(裳)은 허리에서부터 끝까지 주름이 촘촘히 잡혀 있으며 상의로는 수에 금(襟)·거·수구(袖口) 등에 선이 부착된 장유를 착용하고 있다. 머리에는 수건을 동여매고 있다. 같은 쌍영총 진지동 현실 동벽(眞池洞 玄室 東壁)의 귀부인과 시녀 역시 장유에 주름이 잡혀있는 상(裳)을 착용하고 있다. 또 쌍영총 진지동(眞池洞) 현실 동벽(玄室 東壁)의 벽화에 승려 앞에 향로를 이고 가는 여인도 장유에 주름진 치마를 착용하고 있다.

이 여인이 착용하고 있는 상(裳)에는 끝에 선이 있으며 줄무늬가 있는 포(袍)를 착용하고 있다. 또한 무용총의 주실 우벽 우부(主室 右壁 右部) 무용도의 무용하는 인물 중에 포를 착용하고 그 안에 주름 상(裳)을 착용한 두 여인을 볼 수 있다. 이들 역시 치마 끝에 선을 부착하였으나 치마길이가 짧아 안에 입은 바지(袴)가 드러나 보인다. 한편 주실(主室) 석벽(石壁) 좌부(左部) 벽화에 차를 나르는 시녀 역시 포를 착용하고 주름잡힌 상(裳)을 착용하였는데 길이가 짧고 선이 부착되어 있다. 포(袍)는 무용인의 복식에 비하여 소매가 짧으며 대(帶)는 같은 형식으로 뒤에서 맸다. 또한 각저총 주실 오벽 벽화(主室 奧壁 壁畵)에 보이는 앉아 있는 두 부인 역시 상(裳)을 착용하고 포를 입고 있다. 그러나 한 여인은 치마 끝의 선이 있고, 다른 한 부인이 착용하고 있는 상(裳)에는 선을 대지 않았다. 역시 대(帶)는 뒤에서 매고 있다. 그 옆에 서 있는 어린 시녀도 포와 주름치마를 착용하였는데 치마 끝에 선이 있고 바지가 드러나 보인다.

또한 수산리(修山里) 고분 벽화에 일산(日傘)을 쓰고 장유(長淒)에 상(裳)을 착용한 귀부인이 그려져 있다. 이 귀부인이 착용하고 있는 주름 상(裳)은 위의 다른 상(裳)들과 달리 주름 폭이 넓어 이색의 천을 이어 붙여 만든 느낌을 갖게 한다. 일산(日傘)을 들고 있는 시종소녀는 잔주름이 잡히고 선이 있는 상(裳)을 착용하고 있다.

이와 같이 상(裳)은 주로 여성들이 착용하였으며 (무용총 주실 접견도(接見圖))에서 승려로 보이는 두 남자가 상(裳)을 착용하고 있다) 귀인 층에서는 땅에 끌리도록 길게 입었으며 시종배나 무용인은 안의 고(袴)가 보일 정도로 짧게 입었다. 대부분의 상(裳)의 형태는 위에서 아래로 잔주름이 잡혀 있으며 삼실총(三室塚)의 벽화에 나타난 부인이 착용하고 있는 상(裳)은 주름을 잡아 만든 것이라기보다는 다른 천을 이어 붙여 만들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대체로 상의로는 장유나 포를 착용하였고 치마 끝의 선은 신분에 구별을 두지 않았던 것 같다.

포(袍)

포(袍)는 겉옷을 의미하며 유고(淒袴), 유상(淒裳)의 위에 착용하였는데 여러 양상이 나타난다. 이는 예의적인 목적도 있었던 듯 하며 방한의 목적도 있었다. 고구려에서 포(袍)를 착용한 기록은 없으나 고분벽화에는 포(袍)를 착용한 모습이 나타나 있다. 포(袍)의 형태는 셋으로 대별될 수 있다. 첫째 형식은 삼실총 제1실 남벽 좌부 벽화의 행렬도에서 귀부인이 착용하고 있는 포이다. 이는 유(淒)의 형태와 마찬가지로 직영교임식이며 소매가 넓고 길이가 무릎 아래까지 내려온다. 깃, 섶, 도련, 수구(袖口)에 선을 대었다. 이와 같은 형태의 포(袍)를 착용하고 있는 벽화로는 무용총 주실의 무용도로 이의 무용인 2인이 착용하고 있는 포(袍)가 같은 형식의 포(袍)이다. 그러나 이들은 흑점문(黑點紋), 홍점문(紅點紋)이 있으며 어깨와 수구(袖口)에 다른 색 천을 이어 붙였으며 착수(窄袖)이다. 대는 뒤에서 매었고 포(袍) 안에는 상(裳)·고(袴)를 착용하였다. 또한 같은 무용총 주방도(狈房圖)의 차를 나르는 시녀 역시 직령교임식의 포(袍)를 착용하고 있는데 어깨의 선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이와 같이 직령교임식의 포(袍)는 귀인, 시인, 무용인 들이 같이 착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귀인은 광수(廣袖), 시인(侍人), 무용인은 착수(窄袖)이며 무용인 들이 착용한 포(袍)는 소매가 길다

또 다른 형식의 포(袍)는 수산리 고분 동벽 인물도에 보이는 것으로 깃이 곡영(曲領)이고 소매가 넓으며 길고 섶이 곧게 내려왔다. 길이도 더욱 길어 땅에 끌리며 깃·도련 ·소매 끝에 선을 둘렀다. 이 벽화는 고분의 주인인 남자가 승천하는 것을 아들이 영접하는 그림이다. 이와 같은 곡영의 포(袍)는 사신총의 전실 북벽 세 인물도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러한 곡영의 포(袍)는 중국 포(袍)의 영향이라 생각된다.

또 다른 형식의 袍는 쌍영총 주실 북벽 부부상에서 부부가 착용하고 있는 포(袍)이다. 이들은 깃이 직령교임식이나 색깔이 화려하고 포의 길이가 땅에 끌리도록 길며 품이 풍성한데 특징이 있다. 같은 형식의 포(袍)로는 안악 3호 동수묘의 주인 부부와, 감신총의 주인공 등이다. 동수묘의 주인은 요동에서 고구려에 투항해 온 冬壽라고 생각되는데 동정이 달린 포(袍)를 착용하고 있으며 그의 부인 역시 같은 형태의 포(袍)를 착용하고 겉에 반비와 같은 형태의 옷을 걸치고 있다.

한편 감신총의 벽화의 여인들은 대부분이 백색 곡영에 상하가 연결된 광수의 포(袍)를 착용하고 있음을 본다. 그리고 이들은 요즈음의 앞치마와 같은 것을 매고 있으며 뒤에는 천의(天衣)와 같이 천을 길게 느렸다. 또한 길이도 길다. 이러한 포(袍)는 고구려 고유의 복식이라기 보다는 당조(唐朝)의 영향 아래 생겨난 옷이라 할 수 있으며 불상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13) 이것은 감신총의 축조방식이나 화풍이 중국의 영향이 짙은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다.

이상과 같이 포(袍)는 여러 형태로 나타나는데 전통적인 고구려 양식과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러한 포는 남녀가 공히 착용하였으며 신분이 높은 사람은 광수(廣袖)이며 낮은 사람은 착수(窄袖)이고 길이도 짧다. 신분에 구분 없이 선이 있고 속에는 군(裙)·고(袴) 등을 착용하였다. 이상 삼국시대 복식의 기본이 되는 장유(長淒)·고(袴)·상(裳)·포(袍) 등을 살펴보았다. 여기에서 한국 복식의 특색 중에 하나인 가선은 장유(長淒)·포(袍)등에 나타나는데 복식의 미적 가치를 나타내고 올이 풀리는 것을 방지하려는 목적에서 사용되었다.

다음으로 논의될 수 있는 것이 대이다. 대(帶)는 초기에는 옷을 여미어 활동에 편리하도록 하려는 목적성을 지녔겠으나 후대에 와서는 사회의 계층을 나타내는 장식적인 목적이 첨가되었다. 고분의 벽화에서 보면 장유나 포(袍)를 착용하고 허리에 대를 매었는데 대의 폭이 좁고 넓음의 차이가 있고 매는 장소의 차이도 있다. 무용총의 무용인물이 착용하고 있는 대는 흑색 사승대(絲繩帶)이며, 강신총의 주방도에 보이는 시종여인은 흑색 세폭대(細幅帶)를 매고 있다. 같은 감신총(龕神瘣) 전실 서벽의 주인은 백색 광폭대(廣幅帶)를 앞에서 매고 있다. 쌍영총의 선도(羨道) 서벽 기마상의 기마 인물은 장도에 자색 세폭대를 옆에서 매고 있다. 이와 같이 대는 사승대를 비롯하여 세폭대·광폭대 등이 있으며 결양(結樣)은 확실하게 드러나지 않으나 앞·뒤·옆 등에서 자유롭게 맬 수 있었던 것 같다. 특히 개마총 현실 서벽 천장 받침 1층 개마도(鎧馬圖)에는 두 사람의 마부가 장유세고(長淒細袴)를 착용하고 대를 매었는데 한 사람은 앞에서 맸고 또 한 사람은 뒤에서 매고 있다. 이것으로 맺는 양식은 같으나 위치는 자유로웠음을 말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관모류(冠帽類)

고구려 고분 벽화에 나타난 대표적인 관모류(冠帽類)를 살펴보도록 한다.

고구려 시대에 널러 착용되었던 관모(冠帽)로는 절풍모(折風帽)와 조우관(鳥羽冠)을 들 수 있겠다. <위서(魏書)> 열전(列傳) 고구려조(高句麗條)에 '두저절풍(頭著折風) 형여변방삼조우(形如弁旁揷鳥羽) 귀패유착(貴賤有差)' 14)이라 하였고 <삼국지(三國志)> 고구려조(高句麗條)에도 '기공회의복(其公會衣服) 개금수금은이자식대가주박두저책(皆錦繡金銀以自飾大加主薄頭著瓔) 여책이무후(如瓔而無後) 기소가(其小加) 저절풍여변(著折風形如弁)' 15) 이라 하였으며 <수서(隨書)>에도 '인개피관(人皆皮冠) 士人加揷二鳥羽(사인가삽이조우)' 16) 이라 하였고 <북사(北史)>에서도 '인개두절풍(人皆頭著折風) 형여변(形如弁) 사인가삽이조우(士人加揷二鳥羽)' 17) 라 하였다. 이들을 보면 절풍모(折風帽)는 변형(弁形)을 하고 있으며 여기에 새 깃을 꽂아 귀천을 구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절풍모(折風帽)를 착용한 예를 벽화에서 찾을 수 있는데 용강 쌍영총 선도동벽 차마인물도(車馬人物圖)의 직립인물상(直立人物像)이 변형의 절풍모(折風帽)를 착용하고 있으며 대안리(大安里) 1호 분 전실인물도(前室人物圖)의 좌측인물이 절풍모(折風帽)를 착용하고 있다. 또한 여자가 착용하고 있는 절풍모(折風帽)로서는 무용총 영빈도의 시종 소녀가 있다. 이처럼 절풍모(折風帽)는 남녀 구분 없이 착용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조우관(鳥羽冠)은 새의 깃을 꽂아 장식한 관을 말하며 문헌기록에 의하면 귀한 자들이 조우관을 썼던 것으로 나타나있다. <주서(周書)>에 '기유관품자(其有官品者) 우삽이조우어기상현이지(又揷二鳥羽於其上以顯異之)' 18) 이라 하였고 <북사(北史)>에도 '인개두저절풍(人皆頭著折風) 형여변(形如弁) 사인가삽이조우(士人加揷二鳥羽) 귀자관왈소골(貴者冠曰蘇骨) 다용자나위지(多用紫羅爲之) 식이금은(飾以金銀)' 19) 이라 하였고, <구당서(舊唐書)>에도 '관지귀자(官之貴者) 즉청나위관(則靑羅爲冠) 차이비나(次以緋羅) 삽이조우급금은위식(揷二鳥羽及金銀爲飾)', '자나모(紫羅帽) 식이조우(飾以鳥羽)'라 하였으며 <唐書(당서)>에도 '대신청라관(大臣靑羅冠) 차강나(次絳羅) 이양조우금잡금(珥兩鳥羽金銀雜夛)' 20) 이라 하였다. 이상 고구려의 조우관에 관한 기록들을 보면 귀족층에서 조우관을 착용하였으며 양쪽에 깃을 장식했음을 알 수 있다.

벽화에서 조우관을 착용하고 있는 것을 찾아보면 쌍영총 선도동벽 인물과 무용총 주실 수렵도에 말을 타고 활을 쏘는 인물이 양쪽에 새 깃을 꽂은 조우관을 쓰고 있으며, 무용총 무용도의 무용인물이 긴 조우(鳥羽)를 장식한 조우관을 쓰고 있다. 감신총 전실 서벽 인물도 조운관을 쓰고 있는데 이는 조미(鳥尾)를 장식한 것 같다.

이상 벽화에서처럼 절풍모가 남녀 공용이었다면 조우관은 남자들만 착용하였고 귀족·관직자·무용인 들이 착용하였다. 이외에 무사들이 착용한 쌍각식 관모가 나타나는데 삼실총 제2실 서벽 무사도(武士圖)의 무사가 갑옷을 입고 칼을 차고 쌍각관을 쓰고 있다. 같은 삼실총 제1실 북벽 기마도(騎馬圖)의 말을 타는 무사가 쌍각관을 쓰고 있으며 쌍영총의 선도동벽 차마인물도(車馬人物圖)에서 말을 타고 있는 무사(武士) 역시 갑옷에 쌍각관을 쓰고 있다. 쌍각관은 주로 무사들이 씩씩한 기상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고 하겠다. 이외에 외래의 영향을 받아 생성된 책건(瓔巾), 건책(巾瓔), 흑건(黑巾), 입류(笠類) 등을 착용하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화(靴)·리(履)

끝으로 화(靴)·리(履) 등의 신발류를 살펴보도록 한다. <구당서(舊唐書)> 지(志) 음락(音樂) 고려조(高麗條)에 적피화(赤皮靴), 조피화(鳥皮靴) 등이 보이는데 쌍영총 주인공 부부가 정좌한 앞에 그들이 벗어 놓은 신이 조피화(鳥皮靴)의 형태이다. 또한 매산리 사신총 북벽의 현실 주인과 세 부인이 정좌한 앞에 놓여있는 것 역시 흑피화이고, 무용총의 무용도에서도 포(袍)를 착용한 여인이 화(靴)를 신고 있다. 무용총 주실 북벽 접견도(接見圖)의 주인이 신고 있는 것은 적피리(赤皮履)이며 승려인 듯한 객(客)이 신고 있는 것은 흑피리(黑皮履)이다. 또한 통구 17호 분 선도동벽의 수문신장도(守門神將圖)의 장사는 흑리(黑履)를 신고 있다. 벽화에 의하면 포를 착용했을 경우는 화(靴)를 신었고 유고(淒袴)의 착용 시는 리(履)를 신은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상 개괄적으로 고분의 벽화와 문헌을 통하여 고구려 시대의 복식양상을 살펴보았다. 이것은 단지 고구려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삼국시대의 전반적 경향이었다. 이들의 복장은 북방계 유목민족의 특성을 갖추어 유고제(淒袴制) 및 유상제(淒裳制)가 기본복장이며 여기에 중국의 영향을 받은 포(袍)를 착용키도 하였다. 유(淒)에는 좌임·우임이 동시에 나타나고 선을 대었으며 대(帶)를 매었다. 선은 흑색·자색이 대부분이며 대(帶)는 그 폭에 차이가 있고 매는 위치는 앞·뒤·옆 등 제한이 없었다. 고(袴)는 세고(細袴)·광고(廣袴)·단고(短袴) 등이 있으며 裳(裙)은 잔주름이 잡혀 있고 무릎 아래까지 내려왔다. 포는 직령(直領)과 곡령(曲領)이 나타나는데 동수묘와 감신총에 나타나는 소매가 넓고 긴 곡령의 포는 중국의 영향에서 생겨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밖에 관모(冠帽)로 절풍모(折風帽), 조우관(鳥羽冠). 쌍각관 등이 착용되었고 건류(巾類), 입류(笠類) 등의 외래적 관모 양상도 찾을 수 있었다. 신은 화(靴)·리(履)등이 있었는데 화의 경우는 포를 착용하고 신었으며, 리는 고(袴)를 착용하고 신었다.

3. 고대일본복식과의 비교

한국과 일본은 동부 아시아문화권에 속해 있으며 많은 영향관계 속에서 성장해 왔다. 특히 고대문화에 있어서의 영향관계는 지대한 것이었으며 복식에 있어서도 북방계 유목민족의 복식이 전수되었다. <일본서기(日本書紀)> 권 3에 '응신십사년춘이월(應神十四年春二月), 백제왕(百濟王) 공봉의공녀(貢縫衣工女) 일진모율(日眞毛津) 시금래자의봉지시조야(是今來自衣縫之始祖也)'라 하여 옷을 꿰매는 공녀(工女)를 일본에 보내어 그곳의 의봉(衣縫)의 시조가 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옷을 꿰매는 기술만을 보낸 것이 아니라 복식형태까지도 가지고 갔을 것으로 생각되며 이로써 백제의 복식이 일본에 전파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삼국시대의 우리 복식이 일본 고분(古墳)시대의 복식형성에 영향을 주었는데 이 시대 일본 복식자료가 하니와(堰輸)이다. 이 하니와는 진흙으로 만든 통이라는 뜻으로 무덤의 봉분 주위에 일렬로 세워 놓았던 것이다. 크기가 1m가 넘는 것이 대부분이며 원동(圓屁) 하니와, 가형(家型) 하니와, 인물(人物) 하니와 등 여러 형태가 있다. 하니와에 복식이 상세히 나타나는 것은 6, 7세기 지금의 동경부근 관동지방에서 나오는 것이 대부분이며 이때는 이미 한반도에서는 삼국통일기 전야이다. 이 하니와에서는 일본의 3세기의 관두의(貫頭衣)나 횡폭의(橫幅衣)가 보이지 않고 한족(韓族) 계통의 옷이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삼국지(三國志)> 왜인전(倭人傳)에 '남자개로계이대면소두(男子皆露喨以大綿招頭) 기의황폭(其衣籂幅) 결속상연(結束相連) 약무봉부인피발굴계(略無縫婦人被髮屈喨) 작의여군피(作衣如單被) 천기중앙(穿其中央) 관두의지(貫頭衣之)'라 하여 일본의 고대복식이었던 남자의 횡폭의(籂幅衣), 여자의 관두의(貫頭衣)가 사라지고 하니와에서 보는 바와 같이 착수(窄袖) 반영좌임의 장유(長淒), 고(袴), 상(裳)을 착용한 것은 북방유목민 스키타이 계통의 기마(騎馬)에 편리한 유고복식(淒袴服飾)에 원류(源流)하는 것으로 한국복식이 전수된 것이라 하겠다. 이밖에 직물, 장신구 등에서도 한국적 요소가 많이 발견된다.

전장에서 설명한 고구려 벽화에 나타난 우리 나라의 기본 복장과 일본복식의 구체적인 동일 양상을 찾아보도록 한다. 참고로 이 시대의 연표를 보면 다음에 나오는 표와 같다.


장유(長淒)

장유(長淒)는 남녀가 공통으로 착용하였으며 착수(窄袖) 직령(直領)이고 깃은 좌임과 우임이 혼용되고 선이 있으며 길이가 무릎 아래로 내려오는 겉옷이다. 하니와에서도 이와 유사한 유(淒)를 착용한 인물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한 예로 군마현(群馬縣)의 境町에서 출토된 응수남자(鷹狩男子)의 복식 21) 을 보도록 한다. 이는 줄무늬가 있는 유(淒)를 착용했는데 소매가 좁고 허리 부분에서 곡선을 이루어 아래로 퍼져있다. 깃은 반영(盤領)이며 섶은 좌임이다. 허리에는 가는 대(帶)를 매었고 상의는 두 곳에서 끈으로 여몄다. 목에는 고구려의 벽화에서 볼 수 없는 목걸이를 장식했다. 어깨에 매를 얹고 있는 것은 유목민 사이에 발달되었던 길들인 매를 풀어 사냥하는 방법을 말해 주고 있다. 천수국만다나수장(天壽國曼茶羅繡帳)에서는 깃만 다를 뿐 고구려 벽화의 유(淒)와 동일한 형태를 찾을 수 있다. 깃·섶 ·도련·끝동의 선이 뚜렷할 뿐 아니라 대(帶)를 맨 것 역시 동일하다.

고(袴)

고(袴)는 바지로 고구려 벽화에서 본바와 같이 세고(細袴)와 광고(廣袴)가 있으며 남녀 같이 착용하였고 단을 졸라매었다. 하니와에는 주로 세고(細袴)로 나타나 있으며 무릎 아래에 끈을 매었다. 群馬縣(군마현) 新田郡(신전군) 寶泉村(보천촌)에서 출토된 성장(盛裝)한 남자의 하니와를 보면 유(淒)를 착용하고 하의로 고(袴)를 입었다. 양쪽 무릎은 끈으로 졸라매었다. 또한 군마현(群馬縣) 태전시(太田市) 반총(飯塚)출토된 주갑의 남자 23) 역시 무릎부분을 묶고 있다. 이것은 기후의 영향이라고 생각하며 군마현 전교시(前橋市) 출토의 탄금(彈琴)남자 24) 하니와의 바지와 역시 아래 부분을 매고 있는 것도 있다.



일본 고분(古墳)시대 여자의 복식은 유상제(淒裳制)가 그 주류를 이룬다. 유는 남자의 유와 같은 형식이며, 상(裳)은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귀부인이 착용하고 있는 것과 같은 형식의 주름이 잡혀 있는 치마를 입었다. 이러한 상(裳)의 형태는 신라의 토우(土偶) 부부상에서 부인이 착용하고 있는 상과 같은 형태의 것이다. 군마현 이세기시(伊勢崎市) 팔촌 출토품 중에서 성장(盛裝)한 여자 25)의 하니와를 보면 머리의 형태는 반월형이고, 그 위에 빗을 장식하였으며, 큰 귀걸이를 하고 유를 착용하였는데, 그 유는 파도무늬가 있고, 가슴과 허리의 두 곳에 끈을 고리처럼 장식했다. 깃은 반령이고 좌임이다. 상은 땅에 끌릴 정도로 길게 늘였으며 주름이 잡혀있다. 여기에서 고구려의 상과 유사한 형태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선 및 대(帶)

고구려 고분의 벽화에서는 유나 포(袍)의 깃·섶·도련 진동에 선을 대었던 것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하니와에서는 흙으로 만든 것이기 때문에 뚜렷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도이찌현(板木縣) 출토의 하니와에서는 좌임 섶에 기하무늬가 있는 선이 보여 원래는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대(帶)는 기옥현 강남촌 야원(野原) 출토의 하니와나 군마현읍 낙군대천정고해(樂郡大泉町古海) 출토의 巫女하니와 26) 등의 여자의 유에 대를 매었으며 군마현 우파군 경정(境町) 출토의 매를 든 남자 하니와에도 가는 대를 매고 있다.

일본의 고대 관모(冠帽)는 <삼국지(三國志)> 왜인부(倭人部)에 보이는 것처럼 '상투[계(喨)]를 내놓고 머리를 무명으로 덮었다'고 하여 포건(布巾) 정도가 있었던 듯하나 하니와에는 여러 형태의 관모(冠帽)가 나타난다. 변형모(弁形帽), 입형모(笠形帽), 원추형모(圓錐形帽), 평건모책(平巾帽瓔) 천관(天冠) 등이 나타난다. 변형모(弁形帽)의 형태는 고구려의 절풍모(折風帽)와 비슷한 것으로 천엽현전부전(千葉縣殿部田) 제1호 고분 출토의 하니와가 그것이다. 입형모(笠形帽)는 고구려 감신총 기마 인물상의 입형모(笠形帽)가 그것이다. 일본 자성현 고호(高戶) 출토 하니와의 평건모는 신라 토우(土偶)의 말 탄 사람이 쓰고 있는 평건모와 그 형태가 같다. 또한 일본 자성현 청목(靑木)에서 출토된 하니와의 쌍각모는 삼실총 제2실 서벽 무사도(武士圖)의 관모와 형태가 같다.

이밖에 목걸이·팔찌·귀걸이 등의 장신구 등에서도 유사한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다.

끝으로 1972년 발굴된 고송(古松)총 고분의 벽화에 나타난 남·여의 복식을 살펴보도록 한다.

동벽남칙(東壁南則)의 남자의 군상(群像)을 보면 直領의 포(袍)를 입고 있는데, 소매가 상당히 넓어졌고 아랫단이 넓게 표현되어 있으며, 허리에는 가는 대(帶)를 매고, 아래에는 고(袴)를 입었다. 또한 동벽북칙(東壁北則) 여자군상을 살펴보면 역시 같은 직령의 포를 착용하였는데 소매가 넓고, 수구(袖口)·도련에 선이 있다. 허리에는 가는 끈을 매었는데, 위치가 허리 아래로 내려왔고, 모두 앞에서 매었다. 안에는 주름치마를 받쳐입었는데, 이는 고구려 벽화의 귀부인들이 착용했던 것과 같은 형식이다.

이 같은 형식의 상(裳)은 천수국만다나수장(天壽國曼茶羅繡帳)에서도 볼 수 있는데 이는 반령의 좌임 포(袍)와 주름이 잡힌 상을 착용하고 있으며 역시 포에는 깃·수구(袖口)·도련에 선을 대었다.

이와 같이 유고제(淒袴制)의 남자복식과, 유상제(淒裳制)의 여자복식, 직령좌임 선 등이 우리 나라 복식의 고유요소가 첨입된 현상이라 할 수 있겠다.

4. 마무리

이상으로 고구려 시대의 고분 벽화를 중심으로 우리 나라 고대 복식의 특성을 살펴보고 이것이 일본의 고대복식과 어떠한 공통적 요소가 있는지 살펴보았다.

즉 유고제(淒袴制)·유상제(淒裳制)의 우리 나라 기본 복식은 일본의 하니와에서도 나타난다. 유(淒)에 있어서 窄袖의 형태는 같으나, 깃이 盤領이 많이 나타나고 여미는 형태에 있어서 상하 두 곳에서 가늘게 매고 있다.

고(袴)는 세고(細袴)의 형태가 많이 나타나며 무릎 아래에서 끈을 맨 경우가 많다. 상(裳)은 고송총의 여인들이 착용한 것과 수산리 고분의 귀부인이 착용하고 있는 것이 동일하다.

관모(冠帽)의 경우 변형(弁形)의 절풍모(折風帽), 평건책(平巾瓔), 입형모(笠形帽) 등이 동일 요소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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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홍양창 : 三國文化의 日本傳播(思想과 政策, Vol.2, 경향신문사 1984)

2) 日本書紀 권 9, 神功皇后 攝政 46년.

3) 이은창 : 한국복식의 역사-고대 편 (세종대왕 기념사업 회, 1978)

김동욱 : 補說의 衣袴着用民族 日本 支配族說(한국 복식사 연구, 아세아문화사 p.60∼84)

4) 舊唐書, 列傳 新羅條

5) 北史,, 列傳 新羅條

5) 卷 220, 列傳 제 145, 東夷 1 新羅條

6) 卷 94, 列傳 제83 百濟條

7) 李如星은 朝鮮服飾考(白楊堂 1947, p.125)에서 좌임과 우임의 混用은 胡服形態에서 漢服形態로 移動을 의미한 것이라 하였다.

8) 卷 58, 列傳 제39 蠻, 東南夷(東南夷), 高麗

9) 卷 94 列傳 제83, 高麗條

10) 이여성 op.cit p.135

11) 북사 열전 고려

12) 구당서 지 음악 고구려

13) 이은창 : op.cit. p.84

14) 권 100 고구려전

15) 卷 13 烏丸鮮卑 東夷傳 제30 高句麗

16) 권 81 고려전

17) 권 94 고구려조

18) 권 49, 열전 제41 이성상(異城上) 고려조

19) 권 74 열전 제83 고려

20) 권 220 열전 제 145 동이 고려조

21) 材幷滅雄 : 土器とはたわ (사회사상사, 1962) p.99

23) 兒玉幸多 편 : 圖說日本文化史大系 제1권 (소학관, 1956) p.320

24) Ibid

25) Ibid p.319

26) op.cit p.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