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전통문화의 참모습. 완

단군신화의 신해석

- 한국전통문화의 바탕론




전완길 / 태평양박물관장

1. 서

지금까지, 조선시대의 문화를 주도했던 선비(실질적으로는 신라시대부터 이지만)의 사상과 관습, 그리고 제도에 대하여 잘못된 통념을 지적하였다. 그 까닭은 이미 여러차례 언급하였듯이 그것들이 한국의 전통문화 이해에 자못 커다란 저해요소였던 데다가, 전통문화의 考究 및 국민성의 탐구가 피상적이거나 단편적으로 거론될 수 없는 명제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까지의 고찰을 토대삼아 한국전통문화의 실상을 분서해 볼까 한다.

2. 단군신화 연구사 개략

필자의 견해로는 우리나라 전통문화의 실상을 考究하려면 개국신화인 단군신화를 우선 해명해야 하리라고 본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까지 단군신화 연구가 없었던게 아니다. 실로 많은 학자들이 각기 다른 각도에서 조명하였다. 필자가 단군신화에 대한 소견을 피력하기 전에 단군신화 연구의 개략을, 이을호 박사가 논고를 빌어 살펴보자.

⸁ 무교론 : 최남선의 不咸文化論에 의하여 제기된 군무-원론은 무교적 입장에서 온 단군신화로서의 최초의 시도로 간주되고 있다. 「이는 광명신앙을 중심으로 동북아시아의 샤아머니즘 문화권을 논하면서 한국 무교의 성격과 그 위치를 해명하려고 한」논문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공명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 신화론 : 긍정적 입장과 부정적 입장 두가지가 있는바, 부정적 측면에서는 안정복의 荒誕說이 있다. 그는「동방고기」에서 「단군에 관한 일을 말한 것은 모두 황탄하여 불합리하다」라고 하고, 「단군이 맨처음 나오게 된 것은 반드시 그 사람이 신성의 덕이있기 때문에 그런 사람을 좇아 임금을 말한 것뿐이다」라 하여 신성한 덕을 갖춘 인군으로 파악했을뿐 신화적인 요소들은 일체 부인하였다.

다산 정약용도 부정하였다. 즉 「단군이 평양에 도읍을 정한 것은 믿을 만한 문헌이 없는데 우리나라 사람이 기록해 넣었다. 그러나 검을 고쳐 검으로 한 것은 천착함이 심하다. 또 사기에 직접 운위한 왕검은 분명 지명인데, 그것은 단군의 이름으로 한 것은 망령된다」<탄혹고>중 <조선고>)한 것이야 말로 단군왕검설의 완전 부인인 것이다. 이들은 다같이 기자조선을 기점으로 하고 있음에 문제를 안고 있으나 후세 사가들은 기자동래설의 허구성을 밝혀냄으로써 이병도박사의「韓氏王朝說」이 이에 가늠하게 된 것은 단군설화의「한」논을 잇는 입장에서 주목할 만하다.

한편 이을호 박사는 토테미즘에 의한 해석, 경제학사적 해석, 민속학적 해석, 그리고 언어학적분석을 모두 부정적 측면으로 간주하였는데 본인은 단군신화의 긍정, 부정보다 해석방법을 참고하려 하므로 관점의 요지만 인용한다.

「단군신화는 고조선족의 熊도 토테미즘을 나타내는 것으로 熊族의 정치적 승리를 뜻하며」(유명종 <한국철학사>) 「원시 시대인 조선조 선족은 林間생활을 하면서 수렵으로 정규의 생산행위를 하는 경우에 있어서 웅의 肉은 주요식물이 되고 皮는 의복이나 침구로 소용되고 그 骨은 도구 또는 무기로 까지 만들어졌으며 특히 원시교역물도 되고 조선의 상징으로까지 되었다고 하는 것은 管子에 의해서도 알 수 있을 것이다.」(백남운<조선사회경제사> 김재원 <단군신화의 新연구>) 또「桓雄天王이라고 신격화 된<개마>족의 남성이 熊女라고 불리우는 <개마>족의 여성과 혼인하여 단군왕검을 낳았는데, 이와 같은 상징은 모계사회 또는 群婚 시대에서 부권사회 또는 일부일처적인 對偶혼인의 사회로 변천해 나온 것을 설명한 것이오…」(김지용 <단국설화의 민족학적 고찰>)하였다.

이어 이을호박사의 소론을 인용 해보자.

「우리는 단군신화의 暗號的인 착색을 그 당시 한민족의 사유의 실상에로 탈색 환원시켜야 할 것이다. 이때에 우리는 우선 그 당시에 이해한바 그 세계상의 본래적 면목부터 인식해야 할 줄 안다.」(이남영 <단군신화와 한국인의 사상> <한국사상> 13집)고한 그 세계상의 본래적 면목을 단군신화를 통하여 전일적 세계관으로 파악한 이교수의 논문은 단군신화의 철학적 관찰의 첫 시도로써 주목할 만하다. 그는 그보다도 앞서 그의 스승 박종홍 박사의 다음과 같은 일언을 잊지 않았으리라 여겨진다. 「한국의 고유사상을 샤아머니즘에서 찾는 일이 많은 듯하나 이른바 무당을 매개로 하여 신화를 믿으려는 일부의 민속, 우매한 민속을 그대로 민족 전체의 신앙인양 확대함은 과연 온당한 일인지 모르겠다.

천신지씨에 대한 신앙이나 음양사상은 샤아머니즘보다는 휠씬 고차적이오 폭이 넓고 깊으며 보다 세계성을 띨 수 있는 것, 이론적으로도 많은 전개의 여유를 간직하고 잇는 것이라고 하여도 무방하겠다.」 (박종홍 <지성과 모색> <한국인과 종교> )

이상과 같은 종교적 또는 철학적 접근과는 달리 순수신화로서 다른 이어령 교수의 긍정적 입장을 여기서 간과할 수가 없다. 그는 <한국인의 신화> 서문에서「한 민족의 본적지는 말하자면 그 정신의 고향은 그 민족의 만들어낸 신화 속에 있다」고 주장하면서 우리 겨레의 마음 속에서 단군의 신화를 보려하고 있다. 어쨌든 그의 서구신화와의 비교신화론은 흥미로운 일면의 없지않고, 해방 직후 김재원박사의 「단군신화의 신연구」는 고고학적 역저로서 그 책의 재판 서문에서「최근 우리나라 고대사의 지도적인 몇몇 학자들의 저서 (이기백, 김철준 등> 는 졸저를 획기적인 학파로 받아들여 전적으로 긍정적인 태도를 보여 주어 …」라 하여 신학설로서의 정평이 있음을 말하고 있으나, 그와는 반대로 윤성범 교수는 「김박사는 중국 산동성 嘉祥의 무씨사당에 있는 화상석과 단군신화를 대조함으로써 양자의 연관을 밝혀 보려는 것이다. 그런데 박사의 의도한 바와는 달리 유사성보다는 도리어 상이점이 더 많이 나타나 있는 것이 흥미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라는 비판적 논평도 없지 않다.

⸃종교론 : 「삼국유사」에 의하여 구체화된 단군설화는 무교나 신화로서 문제의 단계를 벗어나 고신교라는 원시종교적 범주에서 일보전진하여 단군교 또는 대종교로서 말하자면 배달민족의 한 종교로 발전 성장하였다. 그러므로 단군설화를 그러한 종교적 측면에서 이를 창조적 입장과 位格的 입장의 두면에서 살펴보면,

먼저 창조적 입장에서 볼 때, 대체로 천지창조라기 보다는 차라리 천손강림 또는 인간화생이라는 격이 뚜렷한 것으로 이해된다. 환인이 처한 천상이 혼미 있었고 신단수가 그늘진 신시는 이미 하계에 존재하고 있었기에 무웅은 여기에 내리기를 소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소위 인간다운 인간이 없었으므로 웅녀의 시련과 환웅의 조화로 단군왕검이 탄생한 것이다.

이 설화에서는 천신에 의하여 낙원을 쫓겨나는 인간이 아니라, 신시에 홍익인간의 낙원을 건설하기 위한 인간이 탄생한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탄생한 한 인간은 평범한 常人이 아니라 비범한 인간이 아닐 수 없다. 단군은 곧 왕이요, 스승이요, 그리고 아버지인 소이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단군이란 하나의 순수한 인간으로 태어나기는 했지만 그의 부계는 천손 환웅이요, 모계는 지상의 웅녀로서 이를 순수한 인간창조로만 설면할 수는 없다. 1천8백여의 壽로 상징되는 단군 속에는 아직도 신격이 엄연히 존립하고 있는 이상 이제 그의 신격이 문제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여기에 단군설화의 삼위일체론이 문제되는 소이가 있는 것이다. 하였는데, 이번에는 안치상, 윤성범박사의 소론을 보자

「…한얼의 본바탕에서 세 가지 규종 또는 계기를 찾아낼 수 있는데, 첫째 한얼은 온누리와 온갖 것을 다 만들어내게 하는 조화주로서 한울의 아버지인데, 그것은 한울의 창조주로서 환인 곧 천부요, 둘째 한얼은 온누리와 온갖 것을 다 가르쳐 내는 교화주로서 한울의 스승인데, 그것은 한울의 주교주로서 한웅 곧 天師요, 셋째 한얼은 온누리와 온갖 것을 다 다스리는 始治主로서 한울의 임금인데, 그것은 한얼의 조화위는 부로서 한님이요, 한얼의 교화위는 사로서 환웅이요, 도 한얼의 치화위는 군왕으로서 한검이다」(안치상)

「그리스도교, 삼위일체론에서도 아버지되시는 하나님, 아들 되시는 하나님, 성령되시는 하나님, 이렇게 해서 부. 자. 영으로 세 분이 되는데 환인은 아버지 하나님에, 환웅은 성령 되시는 하나님에 그리고 환검은 아들 되시는 하나님에 각기 대응된다고 볼 수 있다」(윤성범)

3. 신화의 가치

그런데 필자는 제설과 다른 견해를 밝히고 싶다. 도대체 신화란 무엇인가? 신화에서 무엇을 찾아낼 수 없을 것인가?

천지나 인간의 시초와 종말에 관한 옛날의 이야기들은 과학에서는 이미 버린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이런 사항들에 관한 오늘의 과학의 설명도 다만 반설이며 앞으로 과학지식이 더 발달되면 엣날의 신화와 다름없게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과학에서는 이미 버림을 받고, 종교에서는 아직도 기본적 신조가 되어 있는 이런 종류의 신화는 과거의 그 시대로서는 틀림없다고 믿은 과학적 설명이었고, 또한 나라들의 유래에 관한 신화엔느 나라를 세운 사람이 하늘에서 내려왔단느니 죽은 후에는 하늘로 올라가서 살아 있다는니 하는 것이 많은데 있을 수 없는 일을 말한 이러한 종류의 신화들은 그 사람의 출생과 생애와 사망은 보통사람의 경우처럼 속되고 흔한 것이 아니라, 신성하고 희한한 것이었다고 숭모하는 뜻에서 지어낸 것이므로 여러 나라의 국민적 신아의 근원이 된 신화에서 과학과 종교의 원초적 형태를 탐구하고, 이념과 사실을 식별하고, 이야기에 나오는 사람들의 이동과 문화의 특질과 지명의 소제도 탐구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고조선의 실재설을 주장하는 견해도 있고보면 단군신화는 새로운 각도에서 고구되어야 한다. 그러나 본고에서 굳이 실재설을 긍정하지 않더라도 전제하였듯이 단군신화에서 고대 한인의 종교 관습, 사상다위를 추출해 낼 수 있으리라 믿는다. 설혹 실제 하지 않고, 구전되는 신화라 하더라도 그것은 고대 한인의 관습이 내제하고 있겠기 때문이다.

4. 檀君神話와 白色好尙

魏書云. 내주이천재유단군왕검. 입도아기달. 개국호조선. 여고동시. 고기운. 차유환인. 서자황웅. 수의천하. 빈구인세. 세지자의. 하시삼급태백가이홍익인간. 내수천부인삼고. 귀왕리지. 웅솔주삼천강어태백산정 단군수하. 위지신시. 시위환웅천왕야. 장풍백우사운사. 내주곡주명주병주형주선악. 범주인간삼백육십여사. 재세리화. 시유일웅일호. 동호이거. 상기우신웅. 원화위인. 시신유호문일주. 혁이십목일. 미배식지. 불견일광백일. 변득인형. 웅호득이식지기삼칠일. 웅득우신. 호불능기. 이불득인신. 웅녀자고여위혼. 고매어단수하. 축원유위. 웅내반화이혼지. 후생자. 호왈단군왕검. 이당고즉 위오십년강인도평양성시칭조선. 쌍이도어백악산아사달. 우금미달. 어국일천오백년. 주호왕즉위기묘. 대기자어조선. 단군내이어장당경. 후환은어아사달위산신. 수일천구백백재. 당배단전운. 고려본고죽국. 주이대기자위조선. 한분치삼도. 위현일. 낙랑. 대방. 통전혁동비설.(삼국유사 기이권 제1)

이 단군신화에서 먼저 쑥(쑥)과 마늘(제)의 정체[효용]에 대하여 규명해 보자.

일찍이 김두종박사는 쑥과 마늘을「인신으로 화하게 하기 위한 식이적 재료」라고 전제한 다음 쑥은 「식기적 내용약제로 사용된 이외에 수재술에도 응용」되었을 것이라 하고 마늘 역시 약제 혹은 식료로 실용 되었으므로 기도. 축원, 금기 등과 같은 무술적 방법과 약제의 치료 혹은 추상적이나마 부재술같은 방법이 있지 않았나 하고 이를 신시의약이라 명명하였다.

한편 윤서석 교수는「쑥과 마늘이 단군 신화에 나오고 잇으니 이 신화의 서술 당시에 쑥과 마늘을 먹었음을 상상」한다 하였고, 박용구씨는 「마늘이라 는 것은 조미료에 속하는 것이니 그들의 식료품이 상당히 폭이 넓었다는 것과 초보적인 농경이 실시되고 있었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왜냐하면 조미료의 등장은 곡물 또는 부식 구실을 하는 식물의 재배를 배경으로 하지 않고서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런데 필자의 추리로는 쑥과 마늘이 식이 재 혹은 약재, 조미료였다 하더라도 이러한 용도보다 미백제였음직 하다. 왜냐하면 쑥과 마늘이 고래로 효용이 뛰어난 미백재로 쓰였기 때문이다.

쑥을 삶은 물에다 목욕하면 살결이 희여지고 마늘을 찌어서 꿀에다 섞어 하룻밤을 재운 다음 얼굴에 바르게 되면 표백이 되어 흑인도 백인이 된다하여 각국에서 유행함을 보게 된다는 견해도 있지만, 쑥과 마늘 목욕은 피부를 희고 윤택하게 하는 미용요법으로서 오늘날에도 권장되고 있다. 쑥은 피부를 희게 할 뿐만 아니라 피부병 예방과 치료, 집을 제거에도 효험이 있고, 마늘을 주성분인 스콜진의 작용으로 미백효과가 뛰어나다.

그런데 왜 쑥과 마늘을 주었을까? 願化爲人이란 구절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곰과 호랑이가 사람이 될 수 없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당시 고대의 한사회가 그러한 축원을 할 정도로 미개하지 않았고, 신화가 상징적인 표현을 잘 쓴다는 점을 감안하다면 이는 곰과 호랑이를 우상숭배하는 웅족과 호족의 격상 기원을 의미하는 것 이겠다. 즉 웅족과 호족의 대표자가 신웅에게 지배자가 되기를 청원한 것이고 신웅이 이들에게 「조선」을 부여했거나 이들을 테스트한 것이라 추측된다. 신웅의 테스트에 합격한 자가 웅족의 대표자이고, 호족의 대표자가 불합격한 것으로 해석된다.

조건부여(혹은 테스트)란 다름 아닌 백일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서 쑥과 마늘로 피부를 희게 하는 것이었다. 백일 동안 일광을 보지 않을 경우 얻어지는 효과란 피부의 희어짐이다. 그냥 희어지도록 기다리지 않고 쑥과 마늘을 사용함으로써 백인되기를 겨룬 것이다. 쑥이 한타래이고 마늘이 스무개인 것이 그것을 뒷받침한다. 쑥 한타래와 마늘 스무개는 팩을 하건 목욕을 하건 효과를 측정할 만한 양이다.

그렇다면 왜 백인이 되도록 하였는가? 그 까닭은 백인이 지도자의 상징이고, 원초의 인간이 백인이었기 때문이다. 즉 지도자의 자격요건을 갖추도록 한 것인데, 다른 나라의 신화와 종교 관습에서 실상을 찾아보자.

「하느님 이린 아지 토존이 만드신 맨 처음 사람은 하얀 색의 사람이었다. 하느님은 그 사람에게 」숨은 불어 넣으셔서 산 사람을 만드셨다.

그 사람은 세상이 어떻게 생겼는가 구경하며 걸어다녔다. 동쪽에 가 보니 넓고 밝은 벌판에 큰 나무가 있었다. 나무의 꼭대기는 일곱 층 하늘 위에 까지 솟았고, 뿌리는 땅 밑에 있는 깊은 나라까지 내려갔다. 나무에서 흐르는 진이 나무 아래 괴어있는데 아주 맑고 향기가 높았다. 그 나무는 생명의 나무였다. 마르고 일이 없고 사시로 청청한 잎사귀는 하늘나라 신령님들과 살랑살랑 속살거리고 있었다.

남족으로 가 보니, 거기에는 새파란 초원 가운데 젖빛의 호수가 있었다. 거기는 바람도 전혀 없고, 물결도 아주 아주 고요하기만 하였다.

북쪽으로 가 보니, 거기에는 큰 원시림이 있는데 낮이고 밤이고 늘 설렁설렁 소리나고, 온갖 짐승들이 떼를 지어 다니고 있었다. 그 윈시림 북쪽에는 높은 산드이 있는데, 모두 하얀 토끼털 같은 머릿보를 쓴 산들이었다. 그 산들은 북쪽에서 불어오는 추운 바람을 막고 솟아 있었다.

서쪽으로 가 보니, 거기에는 낮은 덩굴숲이 있고, 그 너머는 큰 전나무들이 들어섰고, 또 그 너머는 꼭대기가 평평한 외딴 산이 있었다.

하얀 빛 사람은 사방을 살펴본 후에 생명의 나무로 가서 말하였다.

-나무의 신령님, 땅의 신령님, 숨있는 모든 것이 짝을 지어 살며 가지를 치고 있는데 사람인 저만은 짝이 없이 혼자 외롭게 살고 있습니다. 이게 어디 사는 것이라고 하겠습니까. 이렇게 머리를 숙이고 무릎을 꿇고 비오니, 제게도 짝을 보내 주십시오.

그러자 생명의 잎이 속삭이기 시작하더니, 젖빛의 비를 내려 주었다. 향기로운 바람이 감도는 그 나무가 딱하고 갈라지면서, 나무 속에서 아름다운 여자가 나와서 유방을 드러내고 먹으라고 동작으로 일러 주었다. 그 젖을 먹으니 원기가 샘솟는 기분이었다. 나무에서 나온 그 신령님은 이 사람에게 온갖 복을 주고, 물도, 불도, 쇠도, 모든 것을 이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하였다.

이는 우리와 같은 알타이 어족으로서 시베리아 북부에 거주했던 야규트족의 신화인데 이 신화에 의하면 원초의 인간이 흰 사람이기도 하지만 꼭 대기가 하얀 산, 젖빛(백색)의 호수, 젖빛의 비 등 온통 백색이다. 특히 흰 사람이 흰 젖을 먹고 지혜와 힘을 얻었다는 것이다.

야쿠트족의 이 신화와 단군시화는 매우 흡사하다. 산「꼭대기가 하얀 산」에서 인간이 태어난 점 [단군신화는 환웅의 강림] 향기로운 나무의 존재 [단군신화상의 단목도 향나무다] 그리고 외톨인간이 기원에 의하여 짝을 얻었다. 그러므로 해가 돋는 동방, 생명의 싹이 돋는 동쪽으로 민족이 이동함에 따라 변형된 [휠씬 신호가 진보한 형태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그런데 신화의 구성만이 유사하지 않다.

야쿠트족을 포함한 제알타이 어족이 흰 사람 및 백색동물, 흰빛, 흰옷 등 백색문물을 호상한바, 그 공통점이 표현되어 있다. 몽고에서는 흰옷감과 백마로 년초에 흰빛의 축제를 가졌고 흉노족은 흰사슴, 흰늑대를 숭상한 나머지 이를 잡아간 중국과 원수지간이 되기조차 하였다.

흉노는 하후씨의 후손이다. 요임금 이전에는 험윤산융 또는 훈족이라고 하엿는데, 중국 북방에서 이목하며 살아왔다.

하나라 말기에 공유도 흉노가 되어 그 자손이 삼백여 년을 흉노와 같이 살았고 그후 태왕대에 이르러 흉노와 갈라져서 기산아래로 이주하여 주라는 고을을 이루었다. 다시 2백여 년이 지나서 주백 창대에 흉노의 한 갈래인 견이를 정벌하였고, 또 십여 년 후에 그 아들 반왕이 은나라를 멸하고 주나라를 세우니 흉노가 사신을 보내와서 화친하였다.

그후 이백여 년에 주나라 목왕이 견벌을 공격하여 네 마리의 흰 늑대(白狼)와 흰 사슴(白鹿)을 잡아왔다.

이때부터 흉노는 중국에 원한을 품고 빈번히 침범해 왔다.

이와 같은 백색호상은 타타르족의 최고신이 백광이며, 남부시베리아거주 부르야트인의 샤아먼 입무의식에서 백색 리본을 달고 흰 옷을 입느데서 구체화되는데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며, 우리나라에는 백의호상 등 백색호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 구체적인 예가 바로 단군신화인 것이다. 즉 야쿠트족의 원초 인간이 흰 사람이었고 그가 꼭대기가 하얀 산에서 태어났듯이 그리고 브르야트인의 샤아먼이 흰 리본과 옷으로 입무의식을 가졌던 것처럼 웅족과 호족이 쑥과 마늘로 백일 동안 일공을 외면함으로써 사야먼고 비슷한 권위를 지닌 지배자가 도려 하였다. 또한 항군이 강림(터를잡은 곳)한데가 태백산이고, 단군왕검 역시 백악(즉 꼭대기가 흰산)에 거주하였다.

이처럼 단군신화는 고대 한인의 백색사물 숭앙의 관습을 담고 있는 바 백색 관습이 지금도 여전히 남아있다. 즉 갓난애가 태어나면 백일 동안(요즘은 7일 혹은 21일간으로 짧아지고 있다)흰 옷만 입히며, 살갗이 흰사람을 가리며 귀티가 있다 하고 존경하기까지 한다. 엣날에는 더욱 그러하였다.

고구려 대무신왕(3대)이 즉위 4년(서기21년)12월 길에 나갔다가 怪由를 만났는데 그의 신장은 9척, 얼굴이 희고 눈에 광채가 있었다. (面白而目有光) [괴유가 큰 공을 세웠으므로 그가 죽자 북망과 남쪽에 장사하고 유사로 하여금 매년 제사케 하였다]

그러고 보면 단군신화는 다음과 같은 사실의 표현이 아닐까 한다.

천제의 아들인 환웅 [최초의 왕]이 장소를 물색하던 끝에 터를 잡은 곳은 꼭대기가 하얀 산위, 향나무[박달나무]가 많은 곳이었다. 그는 신하들을 여럿 거르니고 있기는 하였지만 하늘과 대화할 수 있는 샤아먼이었다. 그의 뒤를 잇겠다고 나선 이가 있었다. 그들은 웅부족과 호부족이었는데, 누구를 선택할 지 몰라 쑥과 마늘을 주면서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고 살빛을 희게 하는 과제를 주었다.

그 결과 웅부족의 대표자가 무난히 입무의식을 마쳤다. [고대사회가 모계제였음을 상기하면 여계계승의 표현일 수도 있다. 호부족의 대표자도 여성인지 모르는 일이긴 하지만] 살빛을 희게 함으로써 입무의식을 마친 웅녀는 환웅과 향나무 근처에서 통혼하여 지위를 굳힌다. 그러나 그 이후엔 단군이 왕위를 계승함으로써 여왕이 종식된다. [1800여수는 단군이 지배자 [아마도 샤아먼의 명칭] 이므로 단군의 지배시대가 1800여년이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단군의 거주지 역시 꼭대기가 하얀 산(백악)이었다. 그도 1800여년만에 통치력을 상실하는데 산신이 되었다는 구절이 이 사실을 표현한 것 일게다.

그런데 이러한 단군신화의 해명이 왜 우리나라 전통문화 해명에 우선해야 하는 것일까? 전술하였듯이 단군신화는 고대한인의 백색사물 숭앙 관습을 담고 있는데,. 고대 한인의 관습과 사상 이해가 전통문화를 해명하는 열쇠이기 때문이다.

백색사물 好尙이 연면히 이어진 결과 한국의 문화 그리고 국민성에 깊숙이 영향을 끼친 사실을 간과해 버리면 우리의 전통문화 탐구가 커다란 오류를 범하게 될 것이다. 실례가 없지 않다. 한국문화가 가난과 슬픔의 소산이라는 망발이 바로 그런 예다.

백색호상이야말로 한국 문물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며, 그 시발이 단군신화에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